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최저임금인상으로 고용이 줄었을 수 있다. 하지만 줄어든 고용의 편익과 그럼에도 고용노동자의 임금인상 가운데 어느쪽에 더 집중할 것인가.

 

자영업의 영업시간이 줄었다는데 오히려 그것은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손님도 없는데 가게들이 너무 일찍부터 문열고 너무 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고 있다. 이용하는 입장에서야 편할 수 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다. 결국은 이마저도 노동자의 너무 낮은 임금에 기대 지금껏 이뤄져 온 것인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주로 움직이는 시간이란 것이 있다. 결국 자영업도 그에 맞춰 영업을 해야 보다 효율적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없는 가장 첫째 이유는 지나치게 높은 임대료일 것이다. 고정비용이 상당한데 가게를 마냥 놀려둘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을 고용인의 낮은 임금이 받쳐주고 있었다.

 

중소기업에서도 어차피 노동시간 자체를 줄인 것은 그만큼 물량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당장 납품해야 할 물량이 쌓였는데 최저임금 올랐다고 노동시간을 줄인다는 것은 그냥 망하자는 소리다. 더불어 최저임금은 올랐는데 원청기업에서 납품단가를 조정해주지 않는다면 그 손실도 고스란히 중소기업이 떠안아야 한다. 이것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굳이 필요도 없는데 노동자를 직장에 잡아두는 비중은 줄어들게 되었다. 장기적으로 중소기업에서도 노동자의 임금이 더 오르고 그럴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여력을 만들며 더 많은 사람들이 중소기업도 가리지 않고 취업하려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아무튼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었음에도 전체 고용률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봐야 한다. 고용률이 일정이상 유지되며 고용을 유지한 노동자의 소득 역시 오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 노동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소비에 나설 수 있는가 하는 것일 게다. 언론이 불경기를 강조하며 경제심리를 위축시키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들 때문일 것이다. 소비하지 마라. 그래서 경제 망해라.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소득주도성장의 중요한 고리인 것이다. 이건 대중들에 영향력 있는 이들이 나서서 독려할 부분이다. 소비가 애국이다. 그러고보면 참여정부 당시도 술마시러 가면서 애국하러 간다 농담으로 말하고는 했었다.

 

소득주도성장은 결국 소비주도성장이다. 생산이 아닌 소비를 통해 경제성장을 견인하겠다는 것이다. 소득을 올렸으면 이제는 소비를 해야 한다. 지난달 카드값이 작년 한 달 지출에 비해 2배로 올랐다. 물론 월급 이내다. 2000년대 초반 카드대란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카드사용에 무척 신중할 수밖에 없다. 소득이 오른 만큼 소비를 꺼리지 않는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누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번 돈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축이 아니라 따라서 소비임을 더 많이 알릴 수 있기를.

 

아무튼 그동안 경제지표로도 나타났다. 이번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내용은 그동안 지표를 통해 확인된 내용들이다. 다만 그럼에도 고용률은 높아졌다. 고용노동자의 소득도 올랐다. 그렇다고 다시 저임금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되돌리기 위해 이미 오른 노동자의 임금을 다시 이전으로 되돌릴 것인가. 그럴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올 한 해 최저임금인상에 있어 조정기를 거쳐야 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이 역시 심리다. 시장이 불안해져서는 안된다. 언론이 개새끼인 탓이다. 요즘 진보언론도 뭔가 반성하는 것 같기는 하다만. 하여튼 경제란 것이 그리 어렵다.

아마 어느 인기 영어강사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부모가 그마저도 신기하다고 동네방네 다니며 자랑을 해대니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잘할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가 노벨상을 받은 이유였다. 잘해서가 아니라 잘 해 달라.

 

대부분 경우 일정한 자격을 스스로 입증함으로써 신분과 지위를 얻기도 하지만 오히려 거꾸로 그러한 자격을 입증할 것을 기대하며 신분과 지위를 내려주기도 한다. 하긴 어차피 실력과 실적을 보고 임명한다고 해도 해당 신분과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자격시험을 잘봤다고 실제 실무에도 뛰어나리라는 보장도 없고, 실무자로서 잘했다고 관리자로서도 반드시 잘할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과연 그 인사가 잘되었는가는 자신이 실제 결과로써 확인시켜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 역시 더 많은 여성을 경찰로, 혹은 군인으로, 소방관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기업의 임원 가운데서도 여성의 비중이 더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된다. 동등하게 기회를 누리며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장 그동안의 불평등에 익숙해진 여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기회의 문부터 열어주어야 한다. 일단 여성들에게 문을 열고 그리고 여성 스스로 자신들의 자격을 입증한다. 여성들 역시 당당히 자신들에 주어진 기회를 누릴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사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굳이 남성과 같은 수준의 근력이나 체력을 갖추라 요구하는 사람은 비판적인 남성 가운데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해 노력하려는 모습 정도는 보여주어야 한다. 남성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남성과 같은 자세로 그 절반 정도라도 하려는 의지 정도는 보여주어야 한다. 작년이었던가. 어느 여성유튜버와 관련한 논란이 꽤나 심각하게 다가왔던 이유였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단지 권리로만 여기며 그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마저 스스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남성과 대등한 근력과 체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를 묻기보다 차라리 그런 여성의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오로지 현재에 안주하려고만 하고 있었다. 과연 그런 여성들에게 남성과 대등한 기회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언론의 자유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다양한 언론들이 거침없이 진실을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어야 세상을 더욱 바르고 깨끗해진다. 그런 언론에 대한 믿음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의 비판을 그대로 따라 믿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물론 그래봐야 최종 판단은 나 자신이 하는 것일 테지만, 언론의 보도 역시 나 자신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일 터였다. 이런 일들도 있었구나. 이런 문제들이 있었구나. 하지만 정작 정권이 바뀌고 권력이 언론을 길들이려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납작 엎드려 재롱이나 떠는 애완견이 되어 있었다. 반려견이 아니다. 애완견이다. 언론의 양심이고 사명이고 뭐고 납작 엎드려 숨죽인 채 그저 정부가 원하는 기사나 받아쓰고 있었다. 그런 언론에 다시 정권이 바뀌었다고 마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언론인 양 설쳐대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과연 그런 언론에 주어진 언론의 자유란 것이 그렇게 이 사회를 위해 소중한 가치일까.

 

내가 좋아하는 어느 만화의 대사다. 상이란 아무라도 줄 수 있다. 아무에게도 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 상의 가치를 증명하는 상을 받은 자신의 행동인 것이다. 세상에 다시 없는 상이라도 그 상을 받은 당사자가 이후 보인 모습들이 실망스러우면 상의 권위도 따라서 함께 떨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진 상조차도 당사자의 이후 성공에 따라 선견지명을 가진 권위있는 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원한다면 상이야 지금 당장도 내가 만들어 아무에게나 줄 수 있다. 기회란 것도 그냥 마음만 먹으면 누구에게든 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 상이, 그 기회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당한 것인가. 그 선택이 얼마나 옳았던 것인가. 누가 증명하는가. 바로 자신들인 것이다.

 

기껏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경찰도 군도 소방관도 문호를 열었다. 더 많은 여성이 채용될 수 있도록 남성 입장에서 차별로 여겨질 정도로 허들을 낮추고 기회의 폭도 넓히고 있었다. 남성이라면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조건의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합격하여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되고 소방관까지 될 수 있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인가. 과연 그렇게까지 무리해가며 여성의 채용을 늘린 것이 과연 타당하고 합당한 것이었는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그를 통해 채용된 여성들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의 채용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옳았다. 여성 역시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남성과 동등하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당당히 한 사람의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여성들에게 기회를 넓힌 그 행위가 그저 이상만 높았던 몽상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취업의 기회를 잃었던 남성에게는 부당한 차별로까지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의 잘못일 것이다. 남성들과 사회적으로 동등해지는 대신 책임까지 동등하게 나누어야 함을 먼저 가르쳤어야 했다. 여성주의란 단순한 권리가 아닌 사회적 책임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는 대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동등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남성에 의존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들에게 남성과 똑같은 기회를 주었을 때 과연 여성들을 독립된 존재로써 온전히 그 책임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나마 대림동 여경의 경우는 최소한 경찰로서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회피하지 않았었다. 비록 힘이 부족해서 어려움은 겪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주취자를 제압하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그렇게 주위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인가.

 

사실 남자들도 대부분 비슷하다. 근육 생기면 옷빨 안 받을 것 같아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근육이 생기면 미적으로 보기에 좋지 않아 운동을 꺼린다. 그래서 여성이 운동을 한다면 대부분 가벼운 유산소운동이나 필라테스, 혹은 요가 정도나 하고 있을 것이다. 보통 남자들보다도 더 체력을 요하는 일일 텐데. 보통 남자들보다 더 근력을 필요로 하는 일일 텐데도. 그런데도 여성이기에 단지 미적인 부분만을 생각하는 것일까.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정자세로 하고, 웨이트도 상당한 무게를 들게 되면 근육이 불거져 보기에 흉해진다. 설마 그런 자세로 경찰일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결국에 기자란 인간들이 기껏 주어진 언론의 자유를 가족 하는 일이 무엇인가. 제대로 취재도 않고, 사실확인도 않고, 기사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마저 회피한다. 심지어 그 사실을 당당히 말하며 동정을 구하는 모습에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경우의 책임이 두렵다. 그러면 기사를 쓰지 말던가. 하다못해 블로그질이나 하는 나도 굳이 틀렸을 경우에 대한 걱정보다 당장 내가 해야 할 말들에 대해 솔직하게 정직하게 거침없이 쓰는 것이야 말로 그나마 찾아주는 사람들을 위한 예의란 사실을 알고 있다. 반발하든 부정하든 그래도 그런 주장들이 있기에 반발도 부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자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독자가 판단을 내리는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들이 독자를 가르치고 이끌려 한다. 시청자를 자신들이 온전히 책임지려 한다. 오만이고 월권이다.

 

그런 결과다. 당연히 옳았어야 할 성평등과 언론의 자유가 오히려 비웃음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은.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자들이 혐오스럽고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기자들이 가증스럽다. 성평등과 언론의 자유가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결과 그것을 누리는 그들이 옳지 않아서다. 자격이 없는 이들로 인해 그 자체도 옳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 아직 여성주의자도 기자들도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니 않으려 한다.

 

문득 오버랩되었다. 오히려 성평등을 적극 지지하기에. 언론의 자유 또한 적극 지지하기에. 그런데 오히려 그런 자신으로 인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과연 성평등은 옳은 것일까. 언론의 자유란 옳기만 한 것일까. 차라리 기존의 성차별이 더 공평해보이는 현실이. 언론이란 그저 옭죄어 길들여야 한다고 믿고 싶은 현상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현실과의 간극은 더욱 커져갈 것이다. 이것은 경고다. 과연 알아차리는 사람이나 있을까. 느끼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분명 여성은 남성과 더불어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자들 역시 더욱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거침없이 사실을 취재하고 진실을 보도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현실의 제약도 있어서는 안된다. 옳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내가 불쌍해지는 것이다. 그냥 내가 병신이었다. 차라리 들게 되는 감정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하다. 최저임금 올려서 임금노동자의 임금은 올랐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어찌하는가.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된 저임금저숙련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염려가 가득하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걱정하며 배려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미 오른 임금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야 한다는 것인가.

 

52시간 근로제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좋아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겨우 더 많이 쉴 수 있고 자기 시간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며 행복해하는 노동자들도 분명 적잖이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많다. 하지만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수입 역시 줄어들게 된 다른 노동자를 들멱이며 그들을 압박한다. 너희들이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으로 인해 이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불이익을 강요당하며 일방적으로 피해입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잘못이다. 그렇다고 다시 주말까지 주 68시간을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과연 최저임금 인상으로 줄어든 일자리란 얼마나 된다는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인가? 그와 관련한 명확한 통계를 보여주는 언론보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각분위별 소득통계는 참고가 되지 않는다. 가장 소득이 적은 최하 20%의 1분위에는 취업 자체가 힘든 고령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원래 일자리가 있었는데 실직했거나 혹은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소득이 줄어들었다고 보기 힘든 이들이다. 갈수록 고령화가 심해지며 고령인구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통계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재미있는 건 그런 고령층을 위한 일자리사업마저 세금낭비라며 비판하는 소리가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1분위 소득이 감소하는 건 문제인데 그 1분위의 다수를 이루는 고령층을 위한 일자리예산은 낭비다. 그러면 고령인구의 증가를 제외한 실제 고용시장에서의 상황은 어떠한가.

 

일자리 통계는 그냥 고용률 하나만 보면 된다. 고용률이란 한 마디로 전체 일할 수 있는 인구 가운데 실제 일하고 있는 인구의 비율이다. 한 마디로 자영업이든 무엇이든 지금 현제 실제 일하고 있는 사람의 비율인 것이다. 그러면 최저임금 인상으로 고용률은 얼마나 나빠졌을까? 최업자수가 아니다. 최업자수는 해당 연령대의 분모가 줄어들면 비례해서 함께 줄어들 수밖에 없는 수치다. 의외로 그렇게 나쁘지 않다. 조금 낮아지기는 했지만 실제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해 늘어닌 임금소득에 비해 딱히 더 크게 줄어들었다 말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정책의 비례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정책으로 인한 이익과 손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가.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임금이 오름으로써 노동자가 얻는 편익과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음으로써 생기는 손해 가운데 어느 것을 더 크게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인가. 당연히 나같이 일자리를 유지한 입장에서는 임금인상으로 인핸 급여의 인상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최저임금 올랐다고 인건비 아끼려 감원당한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사회적으로 편익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는가. 그러니까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해 사라진 일자리와 오른 임금 사이의 균형이다. 그러면 어느 쪽에 더 방점을 두어야 하는가. 그런데 없다. 심지어 진보언론의 보도에서조차 그로 인해 좋아진 임금노동자의 현실은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아예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고약한 것이다. 근로시간단축으로 인해 더 좋아진 노동자가 있을 텐데 보수든 진보든 언론들은 그들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는다. 최저임금인상으로 소득이 늘어 더 좋아진 노동자가 있을 텐데도 이들 역시 언론에서 전혀 다루지 않는다. 그로 인해 피해입고 고통받는 사람들만을 다룬다. 그들이 전부다. 오로지 그들만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한 정책이다. 과연 그런가. 그런 논리에 넘어가 똑같이 반복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정작 자기가 근로시간단축으로 혜택입고 최저임금인상으로 이익을 보면서도 마치 그것이 잘못된 일인 것처럼. 그러면 당장 근로시간 늘리고 임금을 낮춰 볼까? 생각을 안하는 것일까? 아니면 못하는 것일까?

 

대부분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의 혜택을 보는 것도 저임금저소독노동자들인 것이다. 어차피 대기업에 다니며 많은 임금을 받는 상위노동자들은 이런 정책들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노동시간도 줄고 임금도 올랐으니 그래도 아예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보다는 나은 처지다. 더 나아진 것이지 원래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나마 조금 나아진 것조차 죄인취급을 한다. 너희들이 좋아하고 정책을 지지하는 것마저 잘못되었다.

 

그리고 노동자의 이기심을 자극한다. 차라리 임금을 낮추고 더 많은 시간 일하게 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자기는 그럴 수 있다. 자기는 그래도 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누리고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더러 희생하라 양보하라 강요한다. 이기심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자신은 여전히 가난하고 열악한 조건에 있으니까. 약자는 얼마든지 염치없어도 된다.

 

하여튼 재미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통한다는 사실이. 진보언론까지 나서서 떠들어대니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익을 본 사람은 사라지고, 혜택을 본 사람도 지워진다. 그리고 실패만 남는다. 그래서 언론이 개새끼들이란 것이다. 좋은 것을 좋다 말하지도 못한다. 썩을 놈들이다. 아니 속는 놈들이 더 바보인지도 모르겠다. 당장 자기 월급이 오르고 일하는 시간이 줄며 여가가 늘어난다. 하지만 잘못이다. 무슨 논리인가. 그냥 웃긴다.

사실 청년실업률이라는 말도 우스운 것이 29세까지는 청년이고 30세 부터는 청년이 아니다. 문제는 29세까지의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어가는데 30대에 이르면 4%로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고작 1년 사이로 11%가 4%가 된다. 청년실업률이 사회문제가 된 것이 하루이틀이 아닌데 고작 1년 사이로 이만한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긴 말이 청년실업률이지 그 기준이 되는 연령대가 15세에서 29세까지로 10대와 20대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고용률만 놓고 보면 19세까지가 8%, 20세에서 24세까지가 42.9%, 24세에서 29세 까지가 69.1%로 하나의 단위로 묶기에는 그 편차가 무척 크다. 그러고보면 24-29세의 고용률이 69.1%로 30대의 고용률 75.8%와 상당히 근접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상식적으로 한국사회에서 각 연령대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면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는 내용일 것이다. 한 마디로 19세까지는 고등학생, 24세까지는 대학생이거나 혹은 군인, 본격적으로 취업전선에 나서는 것은 20대 중후반부터다. 그래서 20대 후반이 되면 고용률이 30대에 근접하다가 30대부터 고용률이 크게 오르게 된다. 30대와 40대는 고용률이 떨어졌다는 지금 수준에서도 거의 완전고용에 가깝다. 그런데도 유독 29세까지의 실업률만 크게 문제가 된다.

어차피 10대까지는 대개 학교에 다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도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10대까지의 대부분 고용지표는 학교다니면서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일자리다. 대학진학률이 유독 높은데다 징병제까지 있는 한국사회에서 20대 초반이면 상당수가 대학생이거나 군인이기 쉬울 것이다. 역시 대개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자리를 찾는 경우가 많다. 본격적으로 이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20대 중후반, 즉 고용률이 69%로 크게 뛰어 오르는 구간일 것이다. 그나마도 재수를 하거나 군대에라도 갔다 오면 구직에 나서는 나이는 더욱 늦어지게 된다. 심하면 30대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구직에 나서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재수도 하고 군대도 갔다 와서 졸업이 늦었는데 똑같이 29세까지만을 기준으로 구직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은 과연 공정한가. 현실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내가 일하는 곳에서도 신입사원을 구하려면 20대에서 30대까지 뒤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들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본격적으로 구직에 나서는 연령대인 24-29세 사이에서 고용률 69.1%, 실업률 10.4%이던 것이 30대가 되면 각각 75.8%, 4.0%로 상당한 비례성을 보이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딱 고용률 6.7% 오르는 동안 실업률도 6.4% 떨어지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청년실업률이 왜 그리 높은가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어째서 청년들의 취업이 늦어지고 있는가를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이는 언론에서 체감실업률이라고 떠들어대는 고용보조지표3과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고용률과 실업률 사이에 존재하는 20%에 이르는 비경제활동인구와도 관계가 있다. 한 마디로 구직에 나서기는 했는데 정작 자신들이 바라는 조건의 일자리가 생각처럼 많지 않다. 아무리 일자리가 급해도 최소 몇 년은 몸담고 일해야 하는데 아무 곳이나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중해지고 그만큼 시간이 걸리게 된다. 아예 구직활동을 중단하고 공무원 등 다른 길을 찾으려는 이들도 생겨나게 된다.

실제 구직난을 이야기하지만 구인난도 만만치 않게 심각하다. 정작 일자리가 있어도 일하려는 사람이 없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도 그런 경우다. 그나마 최저임금도 오르고 하면서 급여가 많이 좋아지며 지원자는 많아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아 필요로 하는 인력을 모두 갖추지 못하는 때가 많다. 취직해서 대출금도 갚고 돈모아 결혼도 하고 남들만큼 살려 하면 조건이 빠듯한 것이다. 그냥 일자리 있다고 아무데나 갈 수는 없다. 더욱 아직 여유가 있다 여겨지는 나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30대를 넘어가면 거의 완전고용에 가깝게 실업률이 줄어드는 것이다. 대부분 직장을 찾았거나, 아니면 아예 일자리 찾기를 포기했거나. 결국 핵심은 현실에서 얼마나 청년층이 가고 싶을 만한 일자리가 충분히 있는가. 그러면 청년들이 바로 가고 싶은 일자리란 어떤 일자리인가.

그래서 결국 돌아온 결론이 그동안 줄기차게 이야기해 온 최저임금과 근로시간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돈을 벌려고 일하는 것이고, 돈을 번 만큼 자신의 삶도 나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저 어떻게든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었던 과거와는 다르다. 생존과 안전 다음은 인정이고 존중이고 자아다. 이미 한국사회는 그런 단계에 접어들어 있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것만이 아닌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면서 더 풍족한 삶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해봐야 돈도 안되고 자신의 삶도 즐길 수 없다면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래서 최저임금 오르고 월급도 따라 오르자 지원자도 늘어났고 그런데도 다른 데 더 조건 좋은 곳이 있으면 미련없이 떠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면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급여와 노동조건의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급여도 더 높이고 노동시간도 더 줄이고 각종 복지도 더 늘리고. 그런데도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여를 줄이고 노동시간을 늘리고 복지도 줄여야 한다. 과연 말이 된다 생각하는가.

임금을 낮추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게 해주면 일자리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일자리들이 청년들이 가고자 하는 일자리인가. 그래서 좋은 일자리 찾아서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30대가 접어들고 나서야 급하게 아무 일자리라도 찾아 나서게 된다. 청년고용과 관련한 여러 지표들이 말해주고 있는 진실인 것이다.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갈만한 일자리가 없다. 일자리는 있지만 자기가 갈만한 일자리는 없다. 그래서 차라리 실업률에도 잡히지 않는 구직단념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실업률의 함정이기도 하다. 아예 일할 생각이 없으면 실업률에 잡히지 않는다. 일하려고 시도도 하지 않으면 실업률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고용통계에서도 정작 40대의 고용률과 함께 실업률도 함께 떨어지는 모순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굳이 나가 일하느니 그냥 집에서 놀겠다. 이유는 대개 더이상 일자리를 구하는 걸 포기했거나, 아니면 굳이 더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게끔 경제적인 상황이 바뀌었거나, 아니면 다음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잠시 쉬기로 했거나. 공무원 시험에 대거 수험생들이 응시하면서 실업률이 높아졌다는 말이 그냥 변명으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구직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비경제활동인구로 실업률에도 잡히지 않는다. 실업률이 높아졌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신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같은 기사에서 40대 실업률이 낮아진 것을 두고 비슷한 맥락의 설명을 붙인 것이 있었다. 알면서 그리 쓰는 것이다. 실업률이란 얼마나 애매한 지표인지.

어째서 청년실업률인가. 무엇이 청년실업률을 높이는가. 그래서 대안은 무엇인가. 사실 모든 사회문제들과 맞물려 있다. 결혼률과 출산률과도 밀접하게 맞물린다. 어쨌든 결혼을 하려 해도 돈이 있어야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려 해도 일정 이상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 바로 청년들의 미래다. 그러나 당장 오늘을 먹고 살기도 버거운 일자리로 내일까지 그릴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임금을 낮추라, 노동시간을 늘리라. 심지어 청년들 자신도 그리 주장한다. 중소기업에서 올린 구인광고를 보고서는 함께 조롱하며 분노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해서라도 최저임금은 낮추고 노동시간은 늘리는 등 노동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물론 자신들은 그런 최저임금과 최저근로시간이 적용되는 일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이 아직 있을 것이다. 그러면 혹시 자신들이 바라는 돈 더 많이 받고 더 적은 시간만 일하며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장래가 보장된 일자리도 늘어나지 않을까. 언론이 의도하는 바일 것이다.

과연 일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하는가. 아니면 일자리가 있는데도 일을 안하는 것인가. 좋은 일자리란 어떤 일자리인가. 저변 제조업 일자리와 관련해서도 말한 바 있었다. 그저 3년 전 최저임금에 주 68시간 일해서 수당으로 나머지를 채워야 하는 제조업 일자리만 많이 만들면 청년실업은 해결되는 것인가. 그런데 청년실업은 그전부터도 꾸준히 문제가 되고 있었다. 사실을 말한다고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언론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매일경제 1면을 보고 웃었다. 한국경제 1면도 비슷하더라. 소득주도성장으로 기업들 매출은 늘었는데 이익은 줄어들었다. 이익 가운데 상당부분이 노동자의 인건비로 들어갔다. 큰일났다. 그런데 원래 그러자는 소득주도성장이거든?

넘어가면 바보인 것이다. 자기가 사람을 고용해 쓰는 입장이 아니라면 기업의 이익이 줄고 노동자의 소득이 늘었다는 것은 당연히 반겨야 할 뉴스인 것이다. 그렇게 기업이 이익을 남겨서 결국 그 돈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결국 주주들에게 배당할 것이면 기업의 구성원인 직원들에게 임금으로 돌려주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 것인가. 매출이 줄었다면 차라리 심각한 문제겠지만 매출은 늘고 이익은 줄었는데 노동자의 인건비는 늘었다.

기업이 이익을 남겼으면 그만큼 돈을 쓰는 것이 맞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세금 남겨서 무엇하는가. 기업이 이익을 남겨서 죄다 경쟁력을 높이는데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에 누군가의 이익으로 돌아갈 것이면 노동자도 그 일부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아마 매일경제 기자는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할 목적으로 의미도 모르고 기사를 썼을 것이다. 그동안 세뇌된 국민들이 대기업의 이익감소를 자기 월급이 오른 것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함께 분노해 줄 것이다. 과연 그럴 것인가는...

하여튼 그놈의 규제완화. 누가 들으면 진짜 규제 때문에 경제 망가진 줄 알겠다. 중국이 성장하는 동안 손놓고 기술개발도 않고 인건비에만 기대 사업하던 것이 국내 기업들이었다. 아직 기술에서 우위에 있었을 때 더 적극적으로 투자했어야 했는데. 그때 강바닥 파고 있었던 게 누구였더라? 보수경제지는 경제를 모른다. 분명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사업이 잘되면 사용자가 알아서 노동자 임금 올려주지 않겠느냐. 노동자가 일 열심히 잘해서 이익이 생기면 그만큼 노동자의 임금도 오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정부에서 강제해서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노동자의 임금도 시장에서 결정된다. 한 마디로 이미 한국 경제는 망했다는 소리다. 2016년 기준 최저임금을 올리면 적용대상이 되는 노동자의 수가 무려 650만에 이르고 있었다. 이만한 노동자들이 사업 안돼서 최저임금만큼도 올려주지 못하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대기업까지 여기에 포함된다. 실제 유력경제지에 실린 기사이기도 하다. 최저임금 올렸다니 대기업들도 타격이 있다. 한국경제에서 거의 독점적인 매출과 이익을 거두고 있는 대기업들일 텐데도 여전히 임금체계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기본급만 최저임금이지 이런저런 수당들을 더하면 다른 중소기업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어째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체계는 이렇게 복잡한가. 최저임금 기본급에 각종 수당을 더하고서야 비로소 남들이 아는 대기업 생산직 임금이 된다. 간단하다. 대부분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돈들이 바로 이 기본급을 기준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월급은 더 주겠는데 그래도 추가적인 비용은 아끼고 싶다.

 

하긴 자본주의란 인간의 욕망을 전제하는 것이다.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경제와 사회발전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기업이야 당연히 더 많은 이익을 남기고 싶어 하고, 따라서 그를 위해서는 최대한 원가를 아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원가에는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의 임금도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면 기업의 이익은 늘어난다.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면 기업의 이익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고용인에게 지급하는 임금 만큼 자신의 이익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저임금 올리겠다니 온통 난리들인 것이다. 실제 최저임금으로 인해 망할 지경인 사용자도 있을 테지만 무엇보다 그로 인해 내 이익이 줄어들게 생겼다. 어차피 최저임금이라도 올리지 않았으면 평생 고용인의 월급을 올려줄 생각따위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단순히 그런 사용자들의 선의에 기대서만 최저임금을 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과연 오르기 전 최저임금이 노동자에게 적절한 수준이었는가.

 

몇 번이나 말한 바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 모든 대선후보가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최저임금만 받아서 한 달 생활한다는 것이 거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물가도 오르는데 최저임금만 겨우 받아서는 더욱 갈수록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가계부채가 단순히 부동산 때문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생계를 위한 대출 역시 꾸준히 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이 그저 먹기만 하면 사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과 더불어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지출 또한 필요하다. 물론 깡그리 무시한다. 지금 최저임금 받는 사람들은 그리 살아도 된다. 하루종일 돈을 벌기 위해 일만 하면서 최소한의 사치도 취미생활도 감히 누려서는 안된다. 오죽하면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자 유가족 가운데 국궁을 취미로 삼는 사람이 있다고 그리 비난들을 했었겠는가. 가난한 노동자는 한 달에 몇 만 원 하는 국궁조차도 허락되어서는 안되는 사치다.

 

아마 이것이 가장 솔직한 속내일 것이다. 당장 자신들은 중소기업이 구인광고라도 내면 그것을 돌려보며 웃음거리로 삼기 일쑤다. 누가 저 돈을 받고 저런 곳에 가겠는가. 누가 저런 조건에서 일하려 하겠는가. 당연히 자기는 그런 조건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적은 시간만을 일하며 자신의 삶을 즐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조건에서도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적은 급여에 더 긴 시간을 더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아니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은혜가 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임금은 낮춰야 하고 노동시간은 늘려야 한다. 그러니까 평소 자기 월급만 오르지 않는다 한탄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 월급 오르는 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그러면 그보다 더 적은 월급에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 사람은 어쩌란 것인가. 그렇게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더 솔직한 속내를 들여다 보자면 평소 노동자들의 주장에 대한 저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된다. 고작 그런 일을 하면서 그리 많은 돈을 받으려 하는가. 어차피 학교 다닐 때 공부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그런 일 하는 것 아닌가.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서 어째서 돈만 많이 받으려 하는가. 더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일수록 그들의 속내는 더 적나라하다. 한 마디로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하는 노동자들은 그럴만한 사람들인 것이다. 너 나아가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보장하고 더 적은 시간만 일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정작 그런 정책들로 인해 월급도 오르고 여가시간도 늘어나 좋아진 노동자의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정책들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있으면 더 좋아진 사람도 있을 텐데 철저히 그들의 눈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향해 있다. 결국은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나아진 사람들도 원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식 군군신신부부자자일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저런 일 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저들보다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저들에게는 저들에 맞는 수준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그것은 한 편으로 징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며 신분상승을 꾀해야 한다. 그래서 사법시험과 같은 신분상승의 수단에 집착하기도 한다. 노력과 실력에 따른 서열화, 그 가장 밑바닥에 저학력저숙련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이 마음놓고 기댈 수 있는 사회의 밑바닥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이란 자신의 권리로서가 아닌 사용자의 시혜로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임금도 노동시간도 결코 노동자의 권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저들이 여전히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기에 자신이 더 편리할 수 있다. 택배비가 때로는 교통비보다 더 싸다. 대중교통은 심지어 2천 년 대 초반보다 더 싸진 감도 있다. 몇 번이나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수도권을 가로지르면 20년 전 교통비가 더 비싸기도 했었다. 이번 버스기사 파업을 대하는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로로 인한 사고가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음에도 차라리 버스기사들이 장시간 노동을 하면 추가채용을 하거나 월급을 올려주지 않아도 되므로 버스요금도 지금대로 유지될 수 있다. 버스기사들은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고 자신은 그로 인한 이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신분이다.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노동자가 더 적은 임금에 더 오랜 시간 일해야 내가 더 값싸게 더 편하게 여러 상품과 서비스들을 이용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은 인정하는데 더 많은 급여와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하고 싶은 노동자의 욕망은 인정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던 노동자를 바라보는 그 기준이 어째서 정리해고당하는 노동자를 향해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자신의 노동조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더 적은 월급에 더 긴 시간을 일해서라도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싶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에서 오른 시급에 만족하고, 줄어든 노동시간으로 인해 일상이 풍요로워진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후자 역시 제도가 바뀌기 전까지 전자와 같은 처지에 있었을 노동자들이란 사실이다. 전자를 위해서 최저임금을 낮추고 노동시간을 늘리고, 후자도 똑같이 최저임금은 줄어들고 자신만을 위한 시간 또한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도 전자가 약자이기에 후자를 위한 주장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고용감소와 그로 인한 임금노동자의 소득증가 가운데 어느쪽에 더 방점을 찍어야 하겠는가. 저소득층과 실직자들에 대한 지원은 지금도 꾸준히 늘고 있는 중이다. 그마저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러니인 것이다. 과연 그들이 바라는 노동환경이란 어떤 것인가.

 

그래서 신종 계급주의라 말하는 것이다. 노동자 사이에도 계급이 있다. 모범생이었을 것이다. 부모와 선생들이 가르친 바를 충실히 따른다.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기에 저들과 다른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 자신과 다른 저들의 삶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 저열한 이기심이 그런 주장들에 담겨 있다. 자신은 더 적은 시간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안전하게 편하게 일해도 저들은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기회를 빼앗는 악일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있는 것이야 말로 저들 자신을 위한 것이고 모두를 위한 것이다. 바르고 옳은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그동안 배우고 지켜왔던 이 사회의 정의이기도 한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을 산다. 주제에 어울리는 삶을 산다. 노동자에게는 노동자에게 어울리는 삶을. 저학력에 저숙련인 노동자들에게는 그에 알맞는 삶을. 그것이 정의다. 그것이 선이다. 그렇게 여겨왔었다. 그렇게 믿어왔었다. 그것이 오랜동안 이 사회의 상식이었었다. 정의였었다. 노예가 노예를 벗어나는 것도 태어나면서 노예였던 이들에게는 학대일 수 있다. 자기는 싫지만 저들에게는 그래도 된다. 흥미로운 정의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다.

며칠을 굶었다. 일자리도 없고, 기껏 있는 일자리도 한 달 내 일해봐야 생활비도 안되는 돈만 받을 뿐이다. 그런데 딸인 가족까지 있다. 가족이 굶고 있는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노예로 팔아서라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주장한다. 나에게 노예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과연 국가와 사회는 무어라 대답할까?

 

인권이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인간의 가치란 한 사회가 공유하는 개념이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도 되는 시절이 분명 있었다. 조선 이전까지 가난한 농민들은 때로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을 팔고 가족을 팔았다. 그래서 크게 흉년이 들거나 해서 삶이 궁핌해지면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크게 늘고는 했었다. 그래서 첫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참혹한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아무래도 사내아이들보다야 계집아이들이 여러모로 비싸게 팔리기 좋았다. 어디에 어떤 용도로 팔려갔는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이건 덕담이 아니라 저주다. 하지만 과연 지금 누군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이나 혹은 가족을 팔려 한다면 사람들은 무어라 하겠는가.

 

개인이 개인을 소유할 수 없다. 개인이 개인을 지배해서도 안된다. 모든 개인에게는 절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의 가치가 주어진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소유하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다. 그것이 근대가 발견한 개인이란 것이다. 바로 이 전제 위에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근대의 사상과 개념들이 나타나게 된다. 국가조차 개인을 소유할 수 없다. 국가조차 온전히 개인을 지배할 수 없다. 그를 통해 개인들은 온전히 자신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며, 그런 존엄한 국민들에 의해 현대국가들은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원리와 전제를 깡그리 무시한 채 자신을 누군가에 예속시키려 한다. 그것을 국가와 사회가 방관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아무리 자기가 원하고 사정이 절박하다 해도 대부분 현대국가에서는 노예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현대국가의 원리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란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노동시장 역시 완전자유경쟁시장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장을 통해 합리적으로 가격이 결정되므로 굳이 국가가 개입하여 간섭할 필요가 없다. 더 싼 값에 더 오랜 시간 일하겠다는 것도 노동자 개인의 권리다. 내다 나 자신을 더 싸게 더 열악한 조건에 내다 파는 것도 자신을 소유한 주체로서 당연히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시장이라는 것이 과연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합리적으로만 작동하는가. 이를테면 몇 년 전 메모리반도체 시장을 크게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던 메모리 기업들이 벌였던 치킨게임이 있을 것이다. 아니 굳이 반도체기업들의 치킨게임이 아니더라도 입찰 등에서 상대 기업을 이기기 위해 아예 적자를 감수하며 출혈경쟁에 나서는 경우를 현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끝내 그렇게 쌓인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도산한 나름 중견기업이나 대기업들도 적지 않다. 그렇게 서로 이겨보겠다고 출혈경쟁에 나선 결과 당시 메모리 기업들의 치킨게임에서도 삼성과 하이닉스, 마이크론 세 기업만 겨우 살아남고 있었다. 이를 개인에게 적용시켜 보자.

 

어떻게든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기에 남들에 월급 100만원 받겠다는데 자기는 50만원만 받겠다고 한다. 남들 하루 8시간만 일하겠다는데 자기는 12시간 동안 일할 수 있다고 한다. 주말에도 나와서 일할 수 있다. 그밖에 수당이나 복지 같은 것도 필요없다. 그저 일할 수 있게만 해주면 된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일을 한다고 50만원으로 과연 한 달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12시간을 꼬박 일하면서 작업능률과 자신의 건강을 모두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선택이니 자기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 그런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만 훨씬 못한 조건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과연 사회 전체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타당한 것인가. 사회구성원들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정당하다 할 수 있는가.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며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를 위한 최저한의 선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이상은 살아야 사회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통념에 맞는 인간다운 삶일 것이다. 그래도 한 달 일했으니 먹고는 살아야 한다. 남들 하는 만큼 모두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일부는 누리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구성원이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어야 사회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사회의 모든 구조와 질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런데 당장 내가 아쉽고 내가 필요하니까 그런 것 상관않겠다. 딱 뭐와 같느냐면 기업의 이익을 위해 법도 정의도 질서도 규범도 가치도 깡그리 무시하는 대기업의 행태와 닮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법 정도는 얼마든지 어길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따위 아랑곳할 필요가 없다.

 

최저임금과 근로시간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의 최저한은 어디까지인가. 과연 한국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노동자가 보편적으로 누려야만 하는 권리의 최소한은 어디까지인가. 자신을 위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 자신은 과연 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삶을 누려야 하는가. 선택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강제다. 아무리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위해 양보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주장은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노동자 일반의 권리보다 오로지 자신의 사정만을 앞세운다.

 

한 마디로 그냥 이기심인 것이다. 나만 살겠다. 나만 좋겠다. 나는 더 일해도 되니까. 나는 나 자신을 수단삼아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니까.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쓰고 싶어한다.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그런 소수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제한받아야 한다. 자신의 삶의 질과 인간으로서의 존엄까지 희생해야 한다. 그러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런 직장을 찾으면 된다. 하도 사람들이 싼 물건만 찾으니 인터넷 쇼핑몰도 거의 최저가로 맞춰가는데 과연 직장이라고 다를까. 사용자라고 굳이 더 비싼 임금에 더 적은 시간만 일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해 고용조건을 끌어올려 사람을 구하게 될까. 하지만 당장 내가 필요하고 내가 아쉬우니까. 나만 돈을 벌 수 있으면 공동체고 뭐고 아무 상관도 없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에까지 귀기울이는 사람들이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싫으면 그만두면 된다. 싫으면 더 좋은 조건 찾아가면 된다. 자신들은 욕망을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용자의 선의에 기대기를 강요하고 있다. 과연 그런 주장들이 현실적으로 타당하기는 한가. 과연 공동체의 목적과 합치하고 있는가.

 

이제는 한국사회도 그런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도 그 정도 삶은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이고 경제를 성장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마저도 자신에게 수단이고 목적인가. 너무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당신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분명하다.

이번에 파업을 결의한 버스노조의 성명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다. 그렇게 52시간 근로제가 문제가 많으면 딱 버스운전사만 52시간 근로제에서 예외로 두자.

 

결국은 주 52시간 일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돈 더 벌기 위해 그 이상 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52시간 근로에 반대해서 파업하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로제를 하려면 돈을 더 내놓으라.

 

물론 그럼에도 반대하는 사람들마저도 더이상 자신을 소모해가며 일하지 않아도 되도록 노동시간을 제한하자는 것이 이 법의 취지이기는 하다. 그렇게 너무 많은 시간을 일하다 보면 몸도 정신도 지치고 결국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다. 과로로 인한 버스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던 것이.

 

성명을 내더라도 말을 좀 가렸으면 어땠을까. 전체 노동자가 좋으라는 법을 자기들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정면으로 반대한다. 연대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자기들 파업에는 노동자들이 연대하기를... 바라지 않겠지. 

 

그래서 버스노조를 위해서 주 52시간 근로제를 포기해야 할까? 하여튼 노조란 것들의 문제다. 싸우는 법만 알지 양보하고 타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세련되게 표현하는 법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부의 주 52시간 근로제가 문제다. 잘못이다. 그렇게만 읽히고 만다.

 

하긴 노조라고 모두 노동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다지 지지하고 싶지 않다. 저들이 반대하는 것을 나는 찬성한다. 노동자라고 모두가 같지는 않다는 뜻이다. 확실히.

그러고보면 남자 잘 만나 팔자고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이 따로 없었다. 신데렐라신드롬이라 말하지만 오히려 신데렐라는 아주 최근에서야 만들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오죽하면 전근대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을수록 창녀의 지위가 높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었다. 차라리 신분 높은 남성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창녀가 어차피 남성 개인의 소유인 여성보다는 더 사회적 지위가 높을 수 있다. 여성의 지위는 남성이 결정한다.

 

심지어 여자 잘 만나 팔자 고치는 온달이야기조차 결국은 남성의 성공으로 여성의 가치까지 함께 끌어올리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80년대까지 흔했던 고시생을 뒷바라지하는 여성의 이야기란 대개 그런 맥락이었다. 힘들게 일해서 남성을 뒷바라지하니 남성이 마침내 성공해서 여성에게 그 보답을 한다. 물론 대부분은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왔던 여성을 저버리고 더 좋은 조건의 여성을 찾아 떠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뒤에 복수하거나 어쩌거나 하는 역시나 진부한 이야기들이 따라붙는다. 결국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오로지 배우자 잘 만나서 결혼 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인터넷에서 흔히 하는 이야기가 이 정도 좋건이면 이만한 여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이만한 여자면 이만한 조건의 남자를 만날 수 있겠는가. 대중문화란 어쩌면 한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옳은 것, 바른 것,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들이 대중문화 안에는 녹아들어 있다. 어째서 신데렐라 이야기일까. 어째서 많은 드라마에서 재벌과 함께 재벌의 사랑을 받는 평범한 조건의 여성들이 보이고 있는 것일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다. 이때는 주로 사랑보다는 남성의 야심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결혼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이루고 자신의 야망을 이룬다. 여성의 경우 신분상승이 목표라면 남성의 경우 그를 통해 이루고 싶은 또다른 욕망이 주제가 된다. 그것만이 현실에서 가장 타당한 가능성높은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과연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까. 아니 남성이라고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과연 어디까지 자기가 바라던 것들을 이룰 수 있게 될까.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이다. 심지어 노오력이라고 하는 것조차 결국 좋은 상대를 만나서 좋은 조건에서 결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도 과거에는 그럼에도 지금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아주 나중에라도 성공한 자신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었다. 대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될 수도 있고, 그래도 건물도 몇 채 가진 알부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들이 가능한가.

 

어째서 헬조선일까. 도대체 젊은이들은 무엇에 그토록 분노하며 한 편으로 절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큰 기업에 취직할 수 있으면. 대개 평범한 젊은이들이 바라는 목표일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노력한 보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성공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고 행복해지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자신은 아마도 이대로 영영 죽을 때가지 불행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제 언론보도를 보았다. 단칸방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면 평생 가난하게 살 것 같다. 그러니 차라리 결혼하기를 포기한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토록 공정이라는 가치에 집착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패배자다. 나는 낙오자다. 그런데 그 이유를 납득하고 싶다. 최소한 내가 저들과 달라야 하는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듣고 싶다. 차라리 그를 통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승리자인 이유를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지만 온전히 자신의 현실 역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책적으로 약자를 배려하여 균형을 맞추려는 것조차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자신만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한 운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나보다 더 못한 것 같은 사람들마저 그런 기회를 누린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차라리 더 잔인하게 더 가혹하게 더 냉정하게 패자를 낙오시키고 약자를 도태시키며 앞으로 나가야 자신도 어떻게든 설명이 된다. 그래야 자신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다.

 

말하자면 포기인 것이다. 절망과 좌절의 끝에 포기단계에 이른 것이다. 여성들은 더 빠르다. 하다 안되면 시집이나 간다. 어차피 안될 것 대학이고 취직이고 좋은 남자 만나 시집이나 가겠다. 그런 판타지다. 신데렐라 이야기란. 우연한 운명이 자신을 구원하여 좋은 조건의 남자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게 해준다. 그를 통해 자신의 운명까지 바꾸게 된다. 거의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꿈이다. 그리고 대부분 남성들에게도 그것은 유일한 꿈이다시피 하다. 어째서 과거에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고시공부에 목숨을 걸었겠는가. 판검사, 의사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받는 직업이 되었던 이유였다. 바로 부자들이 그런 직업을 가진 특히 젊은 남성들을 선호했었으니까. 좋은 배우자를, 정확히 좋은 배경을 가진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남성들에게 거의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하긴 그러고보면 90년대까지 기업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조차 거의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었다. 기업이 잘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다. 권력의 지원을 잘 받아 지금의 대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우그룹의 김우중이었었다. 그 반대의 경우가 바로 국제그룹이었을 테고. 권력에 밉보이면 하루아침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과연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성공이란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니 오로지 자신의 실력만으로 경쟁해서 성공을 거두기보다 더 쉽고 더 빠른 수단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무의식은 대중문화를 통해 끈질기게, 그리고 비례해서 대중들에 노출된다. 그래서 더 불쾌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많은 경우 시청률까지 높은 것은 진정 그들이 바라는 것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마디로 헬조선과 신데렐라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헬조선이라 신데렐라이고, 신데렐라이기에 헬조선인 것이다. 신데렐라 시대에 여성이 자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제인 에어 시대에도 기껏 여성이 열심히 공부해서 아무리 자신의 가치를 높여도 그를 증명하는 것은 훌륭한 신분의 남성을 만나는 것이었다. 좋은 조건의 남성을 만나지 못한 대부분 여성들에게 당시의 시대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지금도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뒤에도 직장에 계속 남아있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여성이기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직장을 포기하거나. 바랄 수 있는 것은 교사, 공무원, 아니면 좋은 취집자리다.

 

그래서 결혼도 않는다. 그래서 아이도 낳지 않는다. 자칫 결혼으로 인해 자신을 구덩이로 내몰 수는 없으니까. 더 높이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자칫 아이로 인해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다. 그나마 남성은 아직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살릴 꿈이라도 꾼다. 결혼과 출산에 대한 남녀간의 인식차이는 바로 이것을 말해준다. 그마저도 많은 남성들이 이제는 아예 결혼마저 포기하고 있다. 어차피 결혼해봐야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선진국일수록 출산률이 떨어지는 이유는 너무 당연하다. 기회가 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자신에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목표는 높은데 그러나 현실은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결혼도 아이도 단지 그런 현실 앞에 자신의 발목만 잡는 짐이 되고 만다. 결혼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지 못하면 결혼은 차라리 자신을 옭죄는 족쇄다. 평범하게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 하긴 그런 드라마가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마저 나의 무의식일지도. 현실일 것이다.

내가 이러니 한겨레를 조중동 이하로 보는 것이다.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가계소득이 줄고 지출도 줄었다. 그러므로 정부의 정책은 실패했다. 누구의 프레임인가.

 

사실 여러 지표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 모든 것이 소득주도성장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구의 노령화도 있을 것이고, 가구구성의 변화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 지출의 비중이 옮겨간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출생률이 지금처럼 바닥인 상태에서 교육비의 감소는 필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애를 낳지 않는데 가르치겠다고 교육비를 더 써야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소득주도성장은 실패했다.

 

설마 그랬을까 싶어서 한겨레신문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최저임금 올리라, 소득주도성장을 강화하라, 기대에 못미쳐서 지지율이 떨어지고 선거에서도 질 것이다 정부를 다그치는 기사도 한가득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가계소득도 줄고 지출도 줄었으니 소득주도성장은 실패했다. 누구의 논리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논리인가? 그러고서는 대통령이 삼성 이재용을 만났다는 이유로 재벌주도성장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고 기사를 쓰고 있었다.

 

과연 한겨레가 얼마나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혐오하고 있는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최저임금도 올려야 하고 소득주도성장도 더 강하게 추진해야 하는데, 그러나 정작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실패였다. 작년 최저임금과 관련해서 보수언론이 집중적으로 기사를 쏟아내며 공격할 때도 한겨레는 아닌 척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영업자가 어렵다는 프레임에 실제 어려운 영세자영업자의 인터뷰를 실으며 현정부의 실정을 강조한다. 즉 현정부의 실패와 정권교체야 말로 한겨레가 그동안 추구하고 주장해 온 이념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소리다. 현정부의 실패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진보의 이념과 가치도 뒤집을 수 있다.

 

조금만 찾아보면 된다. 그래서 나도 언론에 통계에 기초한 기사가 나오면 바로 그 통계부터 찾아보고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핀다. 덕분에 경제에 대해 많이 공부할 수 있었다. 과연 이 통계의 의미는 무엇이고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통계를 살피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래도 좋은 대학 나왔다고 자랑하는 기자들 아닌가. 자기들 학벌 좋다고 떠들어대던 것이 한겨레였을 것이다. 몰라서 안쓰는 것일까? 알아도 못쓰는 것일까? 결국은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설마 그래도 학벌도 좋은 한겨레 기자가 몰라서 못썼을 리는 없으니.

 

하여튼 이래서 내가 한겨레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신문들도 사무실에 뒹구는 것 1면만 보고 마는 수준이다. 차라리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한 팔 거들겠다. 얼마나 증오와 혐오가 간절하면. 뒤늦게 알았다. 너무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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