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정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다. 같은 이유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정의는 보편적이다. 그리고 일반적이다. 그 말은 곧 인격이 없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 누구도 정의를 소유할 수 없다. 사람을 위해 정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원래부터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의 역사란 원래 있는 그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인간은 그런 과정 위에 있다.


그런데 인정은 다르다. 인정은 철저히 개인에게 귀속된다. 그리고 대개는 현실에서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더 직접적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착하다. 성실하다. 예의바르다. 주위에 두루 잘한다. 하지만 그 평가조차 결국은 그를 지켜보는 주위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테면 동네사람 누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그 사실이 알려졌다.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실을 감추려 움직였다. 누가 더 인정이 있는가.


그래서 역지사지라는 말도 싫어한다. 네가 그 입장이 되어 보라. 네가 그 성폭행범의 입장이 되어 보라.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세상의 비난을 받고 법적인 처벌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어 보라. 눈앞에 무방비의 여자가 있는데 너라고 눈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거랑 별개다. 네 가족이 그렇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는데 너라면 참고만 있겠는가. 당연히 참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참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이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 감정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간을 저열한 감정과 욕망의 노예로 격하시킨다.


폐쇄된 시골마을에서 곧잘 이같은 끔찍하고 말하기에도 괴기스런 사건들이 곧잘 일어나게 되는 이유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준다. 인정이 넘친다. 그래서 그 인정을 위해 때로 타인을 희생시킨다. 자기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 즉 서로 인정을 공유하는 '우리'라는 집단에 들어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 인정을 위해 대상을 희생시키려 한다. 서로 좋으니까. 서로가 기쁘면 그만이니까. 내일도 보고 모레도 봐야 할 상대다. 그런 사람이 불편한 것이나 그로 인해 자기가 불편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어차피 서로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자기들끼리 결정하면 폐쇄된 환경에서 그런 모든 것이 가능하다.


여러 해 전 이슈가 되었던 섬노예 사건도 결국 그런 연장이었다. 마을사람 모두 - 심지어 경찰들까지 섬노예의 존재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해지기 싫다. 그냥 이대로 좋은 채 지내고 싶다. 그냥 하찮은 노예 하나 희생시키면 되는 일이다.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 인정의 세계에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의 거리에 비례한다. 보편적인 인간이란 보편적인 지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익숙한 인간의 관계가 보편의 정의와 윤리를 대신한다. 법마저 그 완고한 인정의 고리를 파고들지 못한다. 완벽하게 닫혀 있는 그들만의 세계다.


분명 시골이 도시보다 인심이 좋다. 인정이 많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서로 좋기 위해서. 서로 편하기 위해서. 차라리 피해자를 비난한다. 피해자를 마을에서 쫓아낸다. 너희가 마을 물을 다 흐려놓았다. 너희로 인해 마을의 체면이 떨어졌다. 그렇게 피해자만 쫓아내고 나면 다시 전처럼 문제없이 살수 있다. 죄인가의 여부마저 자기들끼리 결정한다. 서로의 관계를 고려해가며. 그것이 그들의 정의이며 윤리이며 도덕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마 대중문화를 통해 이해하는 바로 세계 어디에나 비슷한 문제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때로 시골이라는 공간이 공포와 스릴러의 배경으로 흔하게 쓰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의 정의가 사라지고 개인의 인정이 지배하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넘어가는 원시사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다. 인간은 정의를 추구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지성이다. 우울한 현실이다.

하여튼 나라는 인간은 글을 쓸 때만 생각한다. 항상 글을 쓰면서만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쓰기도 한다. 생각이 이어진다. 노동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파견제라고 하는 현실에 대해서.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인가. 아니면 별개로 분리될 수 있는가. 사실 아주 오래전에는 전자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을 소유하기 위해 노동자를 소유했다. 노예제다. 인신을 구속함으로써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을 전유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가는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는가와 거의 일치했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내가 필요한 것은 결국 노예가 가진 노동력인데 어째서 노동력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까지 내가 항상 신경쓰고 책임져야만 하는가. 딱 내가 필요한 만큼만 노동력을 가져다 쓰고 나머지는 노동자 개인에게 맡기겠다.


그나마 개인의 경험과 기술에 생산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던 전근대사회에서 기계가 대부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된 근대사회로 넘어오며 그같은 시도는 보다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기계를 돌리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기술만 갖추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다. 노동자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만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노동력만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정작 노동의 대가로 지급된 임금은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노동자는 사업장을 나가면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고, 사회의 구성원이며, 국가의 국민이다. 비스마르크가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은 그가 노동자의 편에 선 진보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철저히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노동과 노동자는 둘이 아니다. 노동과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의 대가로 노동자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용자들이 진심으로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노동과 관련한 사회적 진보는 사용자의 양보가 아닌 사회와 국가의 강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사회와 국가가 그런 의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노동과 노동자는 분리된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국가가 보장한 계약직과 파견직과 같은 사용자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제도들이 그런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노동력은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다 쓰지만 정작 노동자 개인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인신의 고용과 노동의 사용을 철저히 분리하는 파견제는 그 정수라 할 수 있다. 사용자는 단지 노동자를 고용한 파견업체로부터 노동력만을 대가를 주고 빌려 쓸 뿐이다. 그렇다고 정작 노동력을 사용한 것은 사용자인데 파견업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으니 누구도 노동자 자신을 책임지지 않게 된다.


부담은 당연히 사회로 돌아간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미 계약직과 파견직이 존재하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회적으로 모든 노동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마저도 없다. 자기가 사는 문제는 오로지 자기의 책임인데, 그마저 자신의 중요한 수단인 노동력을 자기로부터 강제로 분리당한다. 말했듯 누군가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친구이며,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다. 무고한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때로 무기력증에 빠져드는 사회란 그런 사회적 비용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계약직과 파견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같은 전제에 동의하는 국민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무노동무임금.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자기가 일한 만큼만 대가로 지급받아야 한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찮고 그 이익이 미미하다면 그만큼 대가도 받아서는 안된다. 공무원의 성과연봉제에 대한 지지여론도 그래서 높다.


그래서 묻게 되는 것인다. 억울한 죽음을 슬퍼한다. 무고하게 죽어간 젊은 영혼을 동정하며 위로한다. 하지만 그 대안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가. 사회가 책임을 지기 싫으면 기업에 책임을 지운다. 기업에 책임을 지울 수 없다면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모두가 돈이다. 내 이익이다. 내 지갑에서 주머니에서 나가게 될 것들이다.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는가.


참고로 노동자의 파업권에 대한 정의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고용된 상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누구의 소유인가. 기업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임의로 자신의 노동을 멈출 수 없다. 노동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이 노동자의 소유라면 노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의 노동을 이용할 수 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용자에게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개인의 권리다. 어떤 경우에도 그같은 노동자 개인의 권리는 배타적으로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고용이라는 자체가 조건에 동의하는 것이었으니 충실히 그를 이행해야만 한다. 어떤 부당하고 모순된 현실에도 끝까지 참고 견뎌야만 한다. 일부의 주장이 의미없는 이유다.


노동에 대한 대가만을 지불할 수는 없다. 노동자가 없으면 노동도 없다. 노동이 없어도 노동자는 존재한다. 노동은 전적으로 노동자가 소유한다. 소유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비용 역시 정당하게 노동자에게 지불되어야 한다.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상식이어야 할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말이 더 상식처럼 여겨진다. 노동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 노동만 따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 정작 노동을 소유한 노동자를 노동을 이유로 단정짓고 정의하며 차별한다. 하기는 원래 인간이란 모순된 존재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아니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그런데도 그들은 어째서 책임을 지지 않는가.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울한 것이다. 아무것도 시작되고 있지 않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 불관용이란 배제다. 부정이다.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관용이란 인정인데 그 전제를 부정한다.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완벽한 자기부정이다. 관용이 없는 것을 관용한다. 이미 그곳에 관용은 없다.


정확히 해야 한다. 일베를 불관용하는 것이다. 일베의 불관용에 대해 불관용하려는 것이다. 일베가 그동안 보여준 혐오와 증오, 차별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다. 다양성을 위해서다. 사회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소수자, 약자들을 위해서다. 사회적 배려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도 버거운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다. 차라리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주장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대신 주장한다. 그러지 마라.


사소한 말 한 마디에도 큰 상처를 입는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냥 말이지만 존재 자체가 죄이기라도 한 양 항상 주위를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몇 배나 크게 생살을 헤집는 칼이 되어 날아와 박힌다. 아무리 말도 안되는 비난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사회적으로 너무 불리한 위치에 있다. 아예 못하게 한다. 다른 이를 상처줄 수 있는 행위들을 아예 못하도록 막는다. 법이 못한다면 구성원 스스로 나서서 그러도록 만든다. 최소한 자신이 일베임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도록. 일베의 논리를 밖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고 삼가게끔.


착각해서는 안된다. 억압받는 소수가 아니다. 이미 저들 스스로가 타인을 억압하는 다수다. 더 큰 다수 앞에 소수가 되지만 이전에 그들은 다수로서 소수를 공격하고 모욕한 바 있다. 별개가 아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명백한 범죄라서 법으로 처벌할 수 없기에 대중이 스스로 나서서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에 하나 저들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자 울타리를 친다.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 안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살고 있다.


너무 똑똑해서 본질을 잊는다. 아마 너무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사소한 것은 그냥 지나치게 된다. 다양성은 중요하다. 관용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다양성과 관용을 해체는 요소들에 대한 주의와 경계가 필요하다.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타인의 조각품을 임의로 부수는 것은 분명 범죄다. 그러나 그 조각품이 상징하는 것이 사회적 혐오와 증오라면 그것을 배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의롭다. 법과 도덕은 하나가 아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잘못은 했지만 잘못하지 않았다. 딱 떨어지는 것은 없다. 언제나.

어차피 하나의 사회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부란 물질이다. 교환가능한 재화다. 새로운 물질을 무로부터 창조해내지 않는 한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여러해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도 교환가능한 화폐는 넘쳐나는데 정작 교환의 대상이 되는 가치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투자할 곳이 필요한데 투자할 곳이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전제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는 현실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하는데, 정작 현실은 물리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 온 이유였다. 무한히 증식된 자본이 정작 교환할 대상을 찾지 못하며 스스로 가치를 잃게 된다. 여전히 10이라는 재화만을 생산하는데 자본만 100으로 늘어나면 자본의 가치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모순의 파괴력이 사회를 휩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선택한 대안이 스스로 실물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절대가치로서의 화폐였다. 금이 가지는 지위를 대체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미국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신용으로 삼아 절대가치로서의 달러를 찍어낸다. 달러는 그 자체로 시장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다. 달러가 바로 자본의 기준이 된다. 현물가치의 뒷받침없이도 달러의 생산을 통해 전체의 가치는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자본 역시 무한히 증가한다. 물론 그렇게 무한히 증가한 자본의 대부분은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하락시키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이익 또한 증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여전히 유지됙고 있는 수입을 보면서 노동자 역시 아직은 아무 문제 없다고 스스로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같은 압도적인 힘과 신용을 가직고 있는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그러면 스스로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아무리 화폐를 찍어내봐야 시장에서는 달러를 기준으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지나치게 화폐를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폭락하고 전체의 가치는 비숫한 수준으로 유지된다. 거꾸로 가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비용을 줄인다. 실제 필요한 비용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나머지 잉여가치의 절대량을 늘린다. 수입은 줄더라도 지출도 역시 준다면 삶의 수준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나마 비용을 아끼겠다고 중요한 안전관리마저 파견업체에 맡긴다. 2교대로 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인건비 아끼겠다고 훨씬 적은 수의 사람만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넓은 범위를 모두 책임지게끔 한다. 비용이 줄어들면 아낀 나머지가 마치 자신의 수입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공공재인 지하철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물며 택배와 같이 직접 와닿는 분야라면. 고작 2500원에 소비자는 택배기사들을 부려 문앞까지 물건을 배송시킬 수 있다. 만일 택배기사들이 받는 수입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 현실적인 수준으로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 반대한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거나 가족이고 지인일 국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한다. 내 지출이 는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소득이 감소한다. 이미 노동자를 어떻게든 쥐어짜야지만 유지되는 사회인 것이다. 더 큰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는 서로 경쟁하며 비용을, 소비를 줄여야만 한다. 노동자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더 낮은 임금에도 버티며 사회를 지탱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이번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가지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정보다 훨씬 못미치는 인력을 그것도 파견직으로 채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낀 인건비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국민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긴다. 더 낮은 임금에, 더 열악한 조건에, 그럼으로써 수입의 증가 없이도 자신은 이전과 같은 - 어쩌면 그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는 어떻게든 경제를 살리자면서 노동자의 임금과 지위, 처우에만 관심을 가지는가. 한국경제가 가지는 근본적 모순이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전체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결국 비용과 지출을 늘여야 한다.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사람을 싸게 부리면서 아직은 자신은 괜찮다. 문제없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었다. 한 해 재해로 인정된 사망만 무려 995건에 이른다.

부디 명복을. 죽고 나서도 보상조차 거의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할 뿐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결국은 다시 저비용의 구조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이어질 것이다. 서로의 살을 베어먹고 피를 마시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틴다. 그래서 도태되면 따라오지 못한 자를 비난한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명복일지. 우울하다.

이를테면 몸무게 50킬로그램인 남성에게 몸무게 100킬로그램인 남성과 아무 조건 없이 링 위에서 정정당장하게 권투로 겨루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과연 5살짜리 여자아이와 20살 넘는 성인남성을 같은 조건 아래 아무 제약없이 시합하게 했을 때 그것을 공정하다 정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같은 성인이더라도 20살 여성과 20살 남성을 같은 조건에서 시합시키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맨몸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프로격투기선수에 대항해서 여성이 손에 칼을 들었다면 그것을 부당하다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힘에서도 우월한 상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했다면 그것만으로 악의가 있었다 처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강자의 법과 약자의 법은 그래서 다르다. 강자는 가만히 있어도 이미 우월한 지위에 있기에 강자인 것이다. 약자는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열등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만큼 강자에게는 엄격하게 약자에게는 관대하게 규준을 적용해야만 한다.

여성주의가 얼핏 과격하게 보이는가. 흑인운동이 때로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은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는가. 퀴어축제에서 여러 성소수자들은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한다. 약자이기 때문이다.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겨우 완고한 강자들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더 강하게 더 극성으로 더 비상한 수단을 동원하여 발버둥쳐야지만 겨우 자기에게 허락된 권리를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으라. 여성도 남성과 같이 행동하라. 점잖게. 얌전하게. 착하게. 성실하게. 온건하게. 하지만 막상 남성이 자신을 위협하려 하면 아무거라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이 여성인 것이다. 무기를 들고서도 감히 상대인 건강한 남성을 이기기는 커녕 막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허세를 부리고 소리를 지른다. 거짓으로 협박도 한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같은 룰 아래 승부를 겨룰 한가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여성들이 저토록 강하게 남성들을 성토하는가. 정확히는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신체적인 남성의 우월함이다. 그럼에도 여성을 단지 성적 대상으로, 욕망의 분출구로 삼으려는 공격성이다. 남성이 자제해달라. 남성이 조심해달라. 조용히 말해서는 들어먹지 않으니까. 언제 한 번 남성들이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적 있는가.

평소 무시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쳐 왔었다. 이제 보니 왕왕 시끄럽다. 괜히 귀아프고 정신이 사납기도 하다. 내가 손해를 본다. 내가 피해를 본다. 내가 기분나쁘다. 여성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객관화한다. 잣대를 들이민다. 평가를 하고 채점을 한다.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기준으로. 여성은 공격적이다. 여성의 반응이 지나치다. 단지 내 관점에 의해서. 다른 것 없다. 내가 귀찮고 싫다. 아무튼.

혐오란 대상을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부정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말과 행동을 오로지 자기에게 귀속시킨다. 자기가 판단한다. 자기가 결정한다. 종속된다. 여성들이 시끄럽다. 여성들이 지나치다. 여성들이 잘못알고 있다. 잘못 판단하고 있다. 어리석다. 한심하다. 나는 잘못 없다. 재미있다.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은 선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깡패들조차 무고한 사람을 때리고 협박하면서도 다 당하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는 한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오히려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믿는 것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아있던 것들 중에는 희망과 함께 양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흔히 생각한다. 혐오란 단지 싫어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라고. 물론 그런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싫어할 때 항상 단서를 단다. 이른바 '착한 타인론'이다. 전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거스르려 하지 않는 착한 누군가다. 착한 흑인, 착한 유대인, 착한 동성애자, 그리고 착한 여성... 내가 바라고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존재한다면 마땅히 나는 여성들을 지지할 것이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성실하고 바르고 온건한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나 역시 동성애자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타인이며 스스로 독립된 주체인 그들 자신이 어째서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금기다. 지금 이 선을 넘어서면 나는 당신들을 지지하지 않겠다. 당신들을 비판하겠다. 당신들을 공격하겠다. 그러니 이 선을 넘지 말라.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이다. 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이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보호구역이다. 역차별론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만큼 자신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준다. 그런데 정작 정부가 정한 보호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존엄이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인정되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평가한다. 그냥 울타리다. 이 밖으로 나오지 말라.


저들이 하는 말들이 결코 여성에 대한 혐오일 수 없는 이유다. 이미 자신들은 여성들에 대해 기준을 제시했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동의해 줄 수 있는 한계를 정해주었다. 여성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이 제시한 그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여성의 잘못이며 여성 자신의 책임이다.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해서 비판하는 것이지 단지 여성이 싫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 여성에 대한 혐오는 없다.


주체가 아니다. 독립된 존엄한 존재가 아니다.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타자다. 그리고 그런 자체가 바로 혐오이고 차별이다.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도 같은 소리를 한다. 올바른 흑인은 인정한다. 사회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흑인들은 충분히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을 싫어한다. 흑인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있고 이유가 있다. 깡그리 무시한다. 오로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자기가 이미지화한 흑인만이 바른 흑인이다.


여성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저마다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있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도 보이는 것이다. 모두는 자기의 경험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다. 내면화 한다. 주체로써 인정하고 스스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이유와 자기의 동기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에 옮기는 주체여야 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바른 여성은, 바른 인간은 오로지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이미지 안에 있다.


무엇이 혐오인가. 무엇이 차별인가. 어째서 남성들은 여러해전 '루저'라는 단어 하나에 그토록 분개하고 있었던 것인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경멸당하고 무시당했다. 한 여성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남성의 개별적 차이가 무시되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키 큰 사람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의미가 있다.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가치를 오로지 타인이 결정한다. 내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정의한다.


나는 여성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나는 여성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아하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성은 현실의 여성인가. 현실의 모순되고 부조리한 때로 납득되지 않는 입체의 여성인가. 영상에 여성은 없다. 사진이나 텍스트에도 여성은 없다. 그것들은 철저히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가공된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그들만이 여성이다. 무엇이 진정한 여성인가. 진심으로 묻는다.


맞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 살인사건 피해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다. 작년 한 해 동안 미수까지 포함해서 남성 피해자가 511명인데 반해 여성피해자는 402명에 불과하다. 무언가 억울하다. 실제 가장 강력한 범죄인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남성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런데 위 주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다. 실제 인용한 경찰청 통계에도 바로 뒤에 한 가지 통계가 다시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 살인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통계였다. 당연하다. 피해자만 존재하는 범죄란 없다. 가해자가 있으니 범죄다. 피해자만 있으면 사고다. 미제사건조차 단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 누군가 가해자가 있기에 사건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전체 살인범죄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가.


놀라지 마시라. 무려 83.5%다. 전체 살인범죄자 1024명 가운데 무려 855명이 남성이었다. 여성은 169명이 전부였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살인사건이라는 중대한 범죄에 있어 성별비대칭성을 보여준다. 최소한 여성에 의해 남성이 살해당하는 것보다 남성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는 경우가 산술적으로도 더 많다. 남성피해자의 경우도 대개는 남성인 범인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냥 단순이 남성이 여성보다 살인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해서일까? 아니면 남성이 여성보다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아서일까?


어떤 범죄든 마찬가지다. 아니 범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요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은 상대와 자신과의 우열관계다. 상대의 반발이나 저항을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을 때 상대에게 불리한 행동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결심도 계획도 가져볼 수 있다. 하다못해 무기를 따로 장만한다거나,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거나, 그렇더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형제가 범죄예방에 도움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범죄 역시 자신이 범인인 것이 밝혀지지 않을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자기가 잡힐 것을 알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겨우는 매우 드물다.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열세인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고자 마음먹게 되는 경우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반대로 같은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더 자제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는 충동이나 욕구가 있을 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는 내적 동기가 얼마나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계인 것이다. 여성이 그러고 싶다고 남성을 폭행하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남성이 스스로 여성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여성은 신체적으로 열세이기에 남성의 반격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도사건의 경우도 전체 2087건 가운데 압도적인 1908건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무기를 들었든 어쨌든 상대를 위력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기에 강도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든 상태에서도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할 자신이 없으면 망설이게 된다.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무사히 현장을 탈출할 자신이 서지 않으면 주저하게 된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야만상태에서의 신체적 우열이 범죄의 비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부분의 범죄의 추세는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 강자에 의해 저질러지며 그 대상은 상대적 약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대다수는 남성이 남성을, 혹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범죄들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살인사건에 있어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잠재적인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전제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물리적 위력의 열세로 인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그같은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불어 어째서 강력범죄에는 남성피해자가 압도적인 폭행은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단순폭행이거나 쌍방폭행은 사실 강력사건이라 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전체 폭행사건 가운데 남성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비율이 무려 84%, 67%다. 사건의 피해정도 역시 피해없음으로 분류된 사건이 68%에 이른다. 대부분은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단순폭행에 불과한 것이다. 성범죄의 경우도 그 절대다수는 경미하다 할 수 있는 성추행이지만 차이라면 대개 위력을 동반하여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권력이 강하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존엄과 권리는 회복될 수 없다. 범죄의 동기나 성격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더구나 설사 폭행을 강력사건에 집어넣더라도 폭행의 가해자 비율에서도 여성은 고작 15.7%에 불과하여 32.9%에 이르는 피해자의 비율과 대조를 이룬다. 그냥 산수만 해도 전체 폭행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남성과 여성인 경우가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폭행사건조차 사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가해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남성인 가해자의 수가 남성인 피해자의 수보다 많다. 반대로 여성인 가해자의 수가 여서인 피해자의 수보다 적다. 물론 이해한다. 남성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행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굴욕과 수치심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성폭행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지. 명백히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죄인처럼 가해자에게 숙이고 살아야 하는지. 성범죄는 강력범죄가 아니다. 폭행도 강력범죄로 포함해야 한다. 사소한 성추행조차 위력를 동반해 저질러지며 여성의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다. 폭행에 있어서도 남성은 여전히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남성도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가해자의 비율은 여성보다 더 높다. 남성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 살해한다. 강도나 폭행과 같은 범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 피해자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가해자들이 바로 남성이었다.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며 여성을 상대로도 범죄를 저지른다. 여성의 경우 가해자의 수가 피해자보다 항상 훨씬 적다. 과연 범죄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일방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통계로서 부족한가. 바보라서 사람들이 그 통계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알고 있다. 알면서도 비열하게 인용하는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써 사실을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의 성비가 남성이 더 높음에도 단지 피해자인 남성만을 일률적으로 피해자 여성과 수로써 계량한다. 통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 그야마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아직까지 인터넷문화의 주류는 남성이며 같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최소한 동조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혁명가이거나 바보다.


어째서 살인의 피해자 가운데 남성이 더 많은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가. 가해자 가운데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다른 모든 강력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이 더 많이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있다. 여성피해자가 가해자의 수보다 훨씬 적다. 숫자가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근거는 될 수 있다. 부정하기 위해서는 더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인가. 물론 아니다. 내가 아니니까. 그러나 모든 남성 가운데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유의미하게 존재하는가. 최소한 통계는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그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일방적으로 선택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 경험으로 획득한 상식이다.


모든 참고자료는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했다. 범죄통계를 따로 PDF로 정리한 것이 있으니 다운로드 받아서 찬찬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차라리 비열하기를 바라야 할까. 멍청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아예 알아듣지 못하거나.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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