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예만 하나 들겠다.

 

대기업 공장이다. 월급 200만원,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에 비정규직이라 해고도 자유롭다.

 

동네 작은 식당이다. 월급 220만원에 하루 9시간 주 5일 근무, 해고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과연 노동자 입장에서 어느쪽이 더 나은 일자리이겠는가. 물론 동네 작은 식당이야 언제 어떻게 망할 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설마 대기업인데 망하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망하지 않더라도 그 전에 노동자가 내쫓길 수 있다.

 

당장 공무원만 하더라도 받는 임금만 놓고 보면 다른 직업에 비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법으로 정한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무엇보다 신분이 보장됨으로써 실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공무원연금의 존재가 나중에 정년을 맞아 일을 그만두더라도 경제적으로 크게 곤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무원에 매달리는 것이기도 하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오히려 연장근무에 휴일근무까지 해야 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그래서 공무원이 좋은 일자리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긴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제조업 일자리라는 것이 반드시 생산직 일자리는 아닐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도 사무직이 연봉을 많이 받는 것이지 생산직이 연봉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생산직도 정규직이 더 안정적이고 대우도 받는 것이지 비정규직은 아예 어림도 없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기업에서도 생산직 노동자를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보다 용역업체를 끼고 계약직으로 간접고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나면 노동자에게는 좋은 것인가. 그보다는 더 급여도 처우도 지위도 안정적인 다른 서비스업 일자리는 과연 나쁜 일자리인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보조하며 보살피는 요양보호사는 당연히 노인이 존재하는 이상 일자리를 잃을 걱정 따위 없는 것이다. 일이야 힘들지만 만일 정부에서 지원해서 이들 요양보호사들의 급여와 처우를 개선하면 딱히 나쁜 일자리라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장애인을 돕는 일은 어떨까? 어린이집 교사나 유치원 교사도 오히려 더 충원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더 많은 급여를 받고 더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며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과연 이런 일자리들이 제조업 일자리들에 미치지 못할 것인가.

 

개소리들인 것이다. 지금도 떠들어대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돈을 받으면서 너무 많이 놀고 또 아예 해고도 안되는 철밥통들이다. 그러니까 월급도 줄이고 일하는 시간도 늘리고 쉽게 해고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 너무 좋은 일자리라 그러는 모양이다. 그러다가는 그런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으니 일자리 정책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정작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4차산업혁명이란 자체가 그런 것이다. 아예 무인공장까지 속속 지어지고 있는 것이 제조업의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었으니 전체 일자리가 늘어도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은 네놈들 대가리속이 아닐까.

 

그냥 편의점 알바라도 좋은 일자리로 만들면 된다. 하다못해 물류센터 상하차조차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있는 일자리가 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문제다. 그러려면 급여도 올려야 하고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 보다 사회안전망도 강화해야 한다. 단기일자리라도 장기일자리처럼 안정적일 수 있도록 보다 사회적인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다. 제조업도 편의점 알바처럼. 대기업 정규직도 물류센터 상하차처럼. 그러니까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드는 게 잘못인 것이다. 다른 일자리는 그럼에도 제조업 생산직만 못해야 한다. 기준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일자리는 나쁜 일자리여야 한다. 차라리 그런 바람이 담겨 있다.

 

진보언론이라고 다르지 않다. 결국에 일자리도 같지 않다. 노동자라고 같지 않다. 무엇이든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라는 같은 존엄과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생활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편성이고 일반성인 것이다. 그래서 대중이다. 서비스업이 나쁜 일자리라 말할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 역시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도록 변화하는 시대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절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일단 기자새끼들부터 모두 자르고 일용직으로 만든 다음에 시작하자.

 

제조업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인가. 하긴 당장 중소기업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토록 좋은 일자리인데 중소기업으로, 더구나 생산직으로 가려는 사람이 이리 적은 것인가. 많은 중소기업들이 정작 사람이 없어서 불법체류노동자를 써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 좋다는 조선업마저 이제는 사람이 없어서 수주가 있는데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다. 무엇이 원인인가 고민해 볼 시점이다. 물론 몰라서 그리 떠드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하여튼 언론의 경제기사같은 것은 일부러 찾아볼 것이 못된다 할 수 있다. 혹시라도 우연히 봤다면 눈을 씻어야 한다. 진짜 몰라서 그리 쓰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리 쓰고 있는 것인지. 역겨운 것들이다. 

 

이미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위험하다. 자기를 지나치게 불쌍하게 여기는 나머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되기 쉽다. 이른바 한국인의 정이란 것이다.

 

한국인의 정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자기보다 너무 잘난 사람에게도 자기보다 너무 못한 사람에게도 그 특유의 정이란 것이 발현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정이란 것이 실제 발현될 때도 대개는 상대의 입장에서보다 자기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베풀고자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자신의 선의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분노하고 원망하게 된다. 정이란 이름의 선의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이라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그보다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내가 가장 불쌍하다. 내가 가장 가난하고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렵고 내가 가장 불행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를 얻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는다. 서로 돕는 가운데 있을 곳을 찾은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도 같이 힘드니까. 같이 어렵고 괴로울 테니까. 그래도 나누면 조금 더 수월하게 견딜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 그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보인다. 자기보다 더 불쌍하거나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이 전혀 불쌍하지 않아 보이거나. 타인이 되는 것이다.

 

확실히 보수언론이나 보수정당이나 그런 점에서 대중의 심리를 제대로 읽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적확하게 한국인의 심리가 가지는 허점을 꿰뚫었던 것이다. 같은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잃은 심정에 공감하기보다 그로 인해 그들이 받게 된 보상들에 집중하게 만든다. 피해자 자신이나 그 가족들이 그로 인해 받게 된 관심과 누리게 된 혜택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들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 내가 더 힘들고 어렵다. 그러니까 저들이 말하는 것은 들을 필요가 없다. 아니 저들이 떠드는 괴롭고 슬픈 사연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식이 된다. 심지어 적대하게 된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이, 혹은 그를 지지하거나 그와 연관된 인사들이 세월호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망언을 뱉어내고 그럼에도 오히려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단한 시절을 지나온 이들일수록. 그만큼 힘든 현실을 견뎌야 하는 이들일수록. 그럼에도 작은 성공이라도 이룰 수 있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자기들은 이런데. 자기들은 이렇게까지 살아왔는데. 그러면 저들은. 그런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과연 세월호 망언으로 인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일정 이상 떨어지는 경우란 있을 것인가. 오히려 당장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희생자를 모욕하고 피해자를 부정할수록 그들의 지지는 더욱 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최저임금 논란도 비슷하다. 근로시간단축에 대해서도 맥락은 비슷하다. 보수언론이 항상 떠드는 소리다. 네가 더 힘들다. 네가 더 불쌍하다. 그러니 남의 사정따위 돌아보지 말라. 사회를 파편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 생각하게 만든다. 입으로는 국론분열을 걱정하며 사회통합을 외치는 그들이.

 

원래 한국인의 정이란 것을 잘 믿지 않았었다. 그 정만은 이웃의 실체를 수도 없이 아프도록 겪어 온 때문이다. 가난한 동네에 정은 넘친다. 물론 정이 넘친다. 다만 그 정의 실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뿐.

 

망언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 속시원한 용기있는 발언이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더구나 기성세대에서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의 비극이기도 할 것이다. 보편적인 정의나 윤리 같은 것이 아니다. 공감능력도 없다. 슬픈 것이다.

원래 총선은 대선에 비해 투표율이 낮다. 한 마디로 거의 투표하던 사람들이 투표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총선에서 중요한 것은 투표장에 나올지도 확실치 않은 중도층을 잡는 것보다 확실하게 투표장에 나와줄 지지층에게 자신들에게 투표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단 확실한 집토끼부터 단속해야 승산이 생기는 것이다.

 

원래 한국 유권자들은 대부분 보수성향이 강하다. 그동안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낮게 나왔던 것은 박근혜의 구속 이후 너무 지리멸렬한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문재인이라는 확실한 대세 앞에서 분열한 자유한국당의 모습은 한심 그 자체였었다. 그런 기존의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에 대해 정부와 확실히 각을 세우며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만큼 자신들이 강하고 힘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을 지지한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이유다. 새삼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기보다 원래 지지율을 찾아간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주당에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자유한국당에게 35% 지지율은 상수와도 같았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유한국당 지지할 유권자가 전체의 35%였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직도 낮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봐달라. 자신들을 지지해달라. 더 선명하게 날을 세우며. 더 극단적인 주장들을 펴면서. 그동안 유권자의 눈치를 보며 자제하던 색깔론도 당당히 외치고 탄핵당한 박근혜를 사면하라는 주장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언론의 역할이 크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이 적지 않다. 심지어 진보언론 가운데서도 오로지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에서 자유한국당의 편에 서는 언론들마저 있을 정도다. 이번 WTO심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 패소한 것을 문재인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기사를 쓴 것이 바로 한겨레였었다. 정부와 여당의 사소한 농담고 큰 잘못이 되지만 자유한국당의 큰 잘못도 단순한 논란이 되고 정쟁이 된다. 그런 언론을 믿고 차명진도 정진석도 김순례도 김진태도 당당히 망언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이언주가 저리 막나가는 것도 그런 언론을 믿는 것이다. 이들 정치인들의 수준이야 말로 한국 언론의 수준이다. 

 

어찌되었거나 결국에 총선용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대선까지는 보지 않는다. 당장의 총선에만 집중한다. 중도층 입장에서야 국회의원들이 의회를 내팽개치고 길거리에서 저리 극단적인 주장이나 펴는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언론이 이끄는대로 정치불신과 혐오에 빠지면 바로 투표를 포기하게 될 것이 바로 그들 중도층인 것이다. 대선은 몰라도 총선에서는 쓸모 없다. 그리고 총선에서만 승리하면 다시 문재인 정부를 식물정부로 만들어서 다음 정권도 노려 볼 수 있다. 나라가 망해도 자기들만 정권을 잡을 수 있으면 된다. 지지자들의 바람과도 같다. 다시 일제강점기가 와도 자유한국당만 정권을 잡을 수 있으면 기꺼이 지지해 줄 수 있다.

 

내가 이래서 자유한국당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 지지자들까지 혐오하는 것이다. 차라리 극단을 추구하더라도 이념적으로 순수한 모습만 보인다면 이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정략적이다. 모든 것을 이해로 판단한다. 이념도 신념도 신의도 도의도 무엇도 찾아볼 수 없다. 그에 비하면 민주당은 진짜 순진할 정도다. 너무 순진해서 화가 날 정도다. 나라경제가 어렵다면서 하는 꼬라지들이란. 야당을 비판하던 그 날선 언론들의 다소곳한 모습은 또 낯설기조차 하다.

 

총선은 벌써 시작되었다. 황교안도 벌써 총선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 하고 있다. 당의 현재도 미래도 오로지 내년의 총선에 달려 있다. 바른미래당도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내년 총선에서 어떤 구도로 선거에 임할 것인가. 그래서 과연 어제의 퍼포먼스가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주기는 할 것인가. 참 바빠졌다.

무당을 찾아가 물으면 대답은 대부분 비슷하다. 묫자리를 잘못 썼다. 집터가 안좋다. 귀신이 씌었다. 그러니 부적을 쓰고 굿을 하고 새로운 터를 알아보라. 내가 해 주겠다. 아주 비싼 값에.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있고 각각의 일들마다 그만큼이나 많은 원인과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원인과 이유에 따른 해결방법들이 모두 다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이 무어고 이유가 무어고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당장의 곤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무당에게 그만한 지식이나 능력이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러니까 가장 쉽게 귀신을 말하고 터를 말하고 부적과 굿을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부터 한다.

 

한국 언론의 기사라는 것도 거의 비슷하다. 한참 열심히 떠들다가 나오는 답이란 결국 최저임금, 아니면 탈원전, 아니면 미세먼지의 경우는 중국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않는 듯하다. 다른 대안들에 대해서도 전혀 고민같은 것은 해 본 적 없는 듯하다. 세계경제가 안좋아도 최저임금이 문제이고, 국제무역량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데 근로시간을 줄여서 수출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제대로 기술투자도 않고 기업을 사유화하여 오히려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사이 경쟁상대인 중국에 추월당한 상황에서조차 반기업정서가 기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금호그룹과 한진해운을 망친 것은 반기업정서인가? 기업을 사유화한 경영자들이었는가?

 

하지만 그런 면밀한 분석 따위 없다. 어째서 자영업자들은 어려운가. 어째서 자영업자들은 곤란을 겪고 있는가. 내수가 침체된 이유는 무엇인가? 수출이 부진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정부는 어떤 정책을 통해 당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대안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있기는 하다. 벌써 수십년째 떠들어대는 소리들이다. 규제를 풀고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지난 이명박근혜시절 그렇게 했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지금 경제상황에서 그런 정책들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알 리 없지 않은가. 아는 것도 없이 그저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려니 그냥 집터 타령이나 귀신 타령처럼 익숙한 레파토리만 반복해 읊어댈 뿐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기업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당장 한진해운과 금호그룹이 그러다 망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조양호를 대한항공 이사에 선임되지 못하게 한 것은 과연 국민연금이었는가? 조양호 일가로 인해 실추된 대한항공의 이미지에 대한 주주들의 분노였는가?

 

고용지표가 나빠지면 왜 나빠졌는가? 오히려 장기적인 추세를 보며 고용이 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는 왜 그런가? 고용이 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런가? 그러면 정부의 역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앞으로 구성원들은 이같은 현실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그런 현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저 하는 말이란 IMF 이후 최악, IMF보다 더 최악, 어찌되었든 최악, 어찌되었든 최저, 어찌되었든 최고, 그러니까 나라 망한다. 경제 망한다. 그래서 뭘 어째야 하는가? 눈앞에 있는 저놈들부터 때려죽이자! 이런 게 선동이다. 다른 게 선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소득을 올려 내수를 키우고 그를 통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세계경제가 안좋고 국제무역이 줄어들며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국내경기를 살려야 한다. 답이 무엇이겠는가. 소비를 하라. 기꺼이 국내에서 소비를 하며 돈을 쓰라. 그렇게 돈을 쓸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돈을 풀라. 그래서 더 어이없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의 재정이 가정에서 가계부 쓰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는 모양이다. 기업에서마저 필요하면 과감히 빚을 내서라도 투자를 하고는 한다. 오히려 더 많은 빚을 지더라도 공격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우마저 있다. 정부의 재정이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재정에서 이익을 남겨서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따라서 당연히 있는 재정은 모두 소모하는 것이 옳다. 필요하다면 빚을 내서라도 경기를 살리고 국민들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다. 몰라서 그리 떠드는 것이든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든 언론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저 공포심만 자극한다. 혼란만을 조장한다. 그동안 한국정부의 경제정책들이 표류하게 된 원인 가운데 대부분은 언론들이 제공한 것이다. 당장의 단기적 처방들에만 급급하다. 고등수학보다는 그저 초등학교 산수 수준의 정책들만을 선호한다. 재정적자가 어떻고, 성장률이 어떻고, 기업의 이익이 어떻고,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고용을 희생해서 기업의 이익을 높이면 경제도 좋아진다. 그냥 믿음이다. 신앙이다. 종교다. 그래서 더욱 그리로 사람들을 내몰려 한다. 다른 생각은 감히 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가. 단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 경제는,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당장 무엇부터 고민해야만 하는 것인가. 주제가 안되니 기사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기자랍시고 아는 척 써대려니 할 수 있는 것이 무당짓 밖에.

 

IMF가 대한민국 경제를 분석해서 전망치를 내놓았다. 그리고 조언도 곁들였다. 세계경제의 일부로서 대한민국 경제를 철저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고도 자기들이 언론이라 말한다. 똥도 거름으로는 쓴다.

친구가 돈을 빌려갔다. 갚으라 말하자 친구가 대꾸한다.

 

"우리 사이에 돈문제를 끼워넣지 말자."

 

그러니까 돈부터 갚으라고. 일단 빌린 돈부터 갚고 나면 더이상 돈이야기따위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과연 정부로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했는가. 여당으로서 정부를 도와서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었는가. 당장 국민의 정부도 내수 살리겠다고 무책임하게 카드규제를 풀었다가 카드대란이 일어나며 참여정부에게까지 책임이 돌아갔던 것 아니던가. 부동산 폭등과 북한 핵문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끝내 정권을 내주고 말았었다. 그때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정부의 실정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다.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러면 당시 야당이던, 그리고 지금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경제문제와 안보문제를 정치에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김영삼 정부 시절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성수대교도 무너졌다. 항공기가 추락하고 여객선이 가라앉았다.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만 세월호의 몇 배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을 비판할 때 3당합당과 IMF를 이야기하지 굳이 이런 사고들까지 끌어들이는 경우란 거의 없다. 당연한 것이 그럼에도 김영삼 정부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었으니까. 생존자들을 구조하려 노력했었고, 그래도 사고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자를 찾아내어 처벌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사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부로서 자기들이 직접 일으킨 사고도 아닌데 이 이상 더 어떻게 잘할 수 있단 말인가. 말 그대로 이렇게 되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조금 규모가 큰 해상사고 정도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다 보면 떨어질 수도 있는 것처럼 배가 바다를 다니다 보면 가라앉을 수도 있다. 사고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이야 큰 사고가 일어났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아예 손이 닿지 않는 먼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도 아니고 바로 앞 가까운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인데 최대한 희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 않았는가. 설사 아무리 노력해도 더이상 사람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남은 사람이라도 위로하려는 노력이 뒤따랐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부와 여당과 그리고 언론이, 아니 심지어 국민들 가운데서도 그 피해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가.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만일의 상황에서 국민을 위로하고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빚과 같은 것이다. 당시 했어야 했던 일을 하지 않았기에 지금에 와서 그 책임을 물으려 한다. 하기는 당시도 정부로서 여당으로서 당연히 했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마저 정치적이라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기레기 새끼들이 감히 정의를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윤리와 도덕을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법을 이야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기레기 새끼들은 사람새끼들이 아니다. 누가 그런 행위를 동조했는가? 누가 그런 행위들을 단순한 정치쟁점으로 몰고갔는가? 그런데도 잘났다고 이리 훈수 저리 지적질. 차라리 지금에 와서 아닌 척 세월호를 추모하는 듯한 기사를 써대는 놈들이 더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그래서 그들은 빚쟁이인 것이다. 정부일 때 자신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당일 때 자신들이 졌어야 할 책임을 다 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정치적인 책임을 물으려 한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박근혜와 그 측근 몇 사람만 잡혀들어갔을 뿐 당시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모욕하고 탄압했던 인사 상당수가 야당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런데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되니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그러면 어째서 그들은 인사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수많은 사람 가운데 쓰레기도 한 둘 있을 수는 있다. 수천만의 사람들 가운데 쓰레기가 수천 수만 된다고 너무 많다고 하기도 뭣한 것이다. 문제는 그런 쓰레기들이 당당히 쓰레기짓하며 설칠 수 있도록 돕는 이들이다. 당장은 지지자들일 테고, 그럼에도 그들의 행동을 감추거나 혹은 치장하여 문제를 감추려 드는 언론들일 것이다. 기자새끼들은 그냥 죄다 마른하늘에 벼락맞아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이제와서 아닌 척 반성하는 척 눈물도 흘리는데 과연 당시 멀쩡한 사람새끼가 그런 언론환경에서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을까. 멀쩡히 회사생활하고 연차 쌓아서 진급까지 했을 터다.

 

정치쟁점인가? 정치적인 편향성인가? 저널리즘 토크쇼J에서 유가족이 나와 말하더라. 언론에 자기들 이야기 좀 들어달라 했더니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안된다. 그게 바로 정치적이라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이므로 그에 대해 비판해서는 안된다. 책임도 물어서는 안된다. 언론이 바라는 정의는 자유한국당의 정의다. 거기에 동조하는 기자새끼들부터 재활용도 불가능한 쓰레기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언사일 것이다. 그것도 자기들 말하는대로 의도한대로 받아쓸 언론을 믿었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일 터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정의로운 척 하던 언론들마저 이번에는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따옴표란 본심이다. 그렇게 언론과 야당은, 당시 정부와 여당은 한 몸이다. 공동운명체다.

 

아직 책임을 다 묻지 않았다. 당시 여당에도. 당시 정부에도. 그리고 지금의 언론들에도. 언론들만 쏙 빠져 있다. 잊을 뻔했다. 속내를 드러내주어 고맙기조차 하다. 기자새끼들을 죽이자! 솔직한 마음이다.

최근 주말 뉴스룸 비하인드 뉴스를 보면 최소한 손석희 자신은 아니더라도 뉴스룸이 황교안에게 줄섰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이전 홍준표가 비하인드 뉴스에서 다루어지던 것과 전혀 방식이 다르다. 굳이 비하인드 뉴스에서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은 일상적인 표현들까지 모두 끄집어내어 아무 비판없이 전달하는데만 주력하고 있다.

 

흔히 정치인에게 부고를 제외한 모든 언론보도가 유리하다고들 말한다. 비판이나 조롱까지도 정치인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말 뉴스룸 비하인드 뉴스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굳이 사람들이 관심도 가지지 않는 황교안의 발언들마저 모두 끄집어내어 의미를 부여해가며 대중에 소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황교안이 어째서 어떤 의도로 이런 주장들을 하는가. 이런 표현들을 쓰는가.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다. 두고보자. 무슨 의미이겠는가.

 

대부분 비하인드 뉴스에서 정치인의 발언을 다루는 목적은 대개 둘이다. 비판이다. 아니면 의미있는 발언의 경우 부각시켜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런데 주말 뉴스룸 비하인드 뉴스에서 황교안 발언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소개 그 자체에 방점을 둔다. 황교안이란 정치인이 있고 이런 발언도 한다. 목적은 문재인 정부 비판이다. 

 

하긴 전부터 뉴스룸도 손석희가 진행하는 주중과 주말의 논조가 상당히 다르기는 했었다. 원래 중앙일보와 한 회사였다. 그 뿌리가 어디 가지는 않는다. 가끔 경제나 사회관련 뉴스를 보더라도 손석희의 손을 벗어난 부분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과연 손석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흥미로운 부분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아이들이 일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 사는 부모들이 적지 않았었다. 부모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또다른 형제나 자매들 또한 자신들의 형제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겨우 빵을 사서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린 나이의 아동들을 고용해서 일시키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과연 아이들의 노동으로 겨우 먹고 살던 가정들은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많은 저개발국가에서도 아동노동이 법으로 금지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럼에도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히 어른에 비해 임금이 싼 아동들을 고용해서 장기간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적잖이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상품을 사가는 이들이 요구하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서도 그런 아이들이라도 나가 일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곤궁한 형편 때문에.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서서 아예 아이들은 일시키지 말라고 하면 사용자는 인건비 지출이 늘어나 단가를 맞추지 못하게 될 것이고, 부모들은 더이상 아이들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장 아이들 자신부터 일하지 못하니 돈도 벌 수 없을 텐데 아동노동금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일 것인가.

 

노예로 있을 때는 굳이 일자리 걱정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았었다. 당장 몸을 뉘일 집도, 하루를 연명할 빵도 굳이 자기가 나서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결혼까지 주인이 알아서 시켜주었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래도 주인 소유이니 자기 재산이라고 기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어디 내다 팔더라도 자식의 장래로 고민할 이유 역시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노예를 해방했더니 주인 앞에 엎드려 제발 내쫓지 말아달라 사정하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내가 나 편하자고 노예로 있겠다는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마저 방해하는 것인가. 이것이 자유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인가.

 

하긴 그러고보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수 십 년 전이다. 외삼촌이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모르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가 어디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집안의 사정으로 인해, 혹은 주변의 유혹에 이끌려 공부보다는 일찍부터 나가서 일을 해야만 했던 아이들이 현실에서도 적지 않았었다. 새벽같이 밥을 지어 아랫목에 묻어두고 일을 나간 어머니는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시곤 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혼자서 라면도 끓여먹어야 했었다. 아이들이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살던 집에서 아이들이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는 날도 없이 아이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일하던 부모들 역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돈도 받지 못하고 아침과 저녁을, 그리고 휴일 동안 집에서 강제로 쉬어야만 했었다. 과연 그 법은 누구를 위한 법이었을까?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야 당장 오늘 먹을 것도 걱정인데 아이들도 일찌감치 제밥벌이를 하도록 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면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야 하니 쉬는 날도 사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아예 노예로 들어가는 것도 나을 수 있다. 그저 먹고 입고 자는 것 해결해주고 아이들까지 키워주면 그냥 사고 팔 수 있는 재산이 되어 시키는대로만 일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갑질이라 떠들어대지만 사용자가 폭언을 내뱉고 폭력까지 휘두르는데도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사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연 그런 사회가 옳은 사회인가. 설사 자신들이 원한다고 해도 그러도록 허용해주는 사회가 바른 사회인가.

 

하다못해 종이 다른 동물에 대해서도 필요 이상 고통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보호법이 우리나라에서도 선진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단 시행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봐야 어차피 먹자는 소이고 먹자는 돼지인데 그런 소와 돼지의 권리까지 인간이 챙겨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양심인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존엄이라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느끼는 모멸감과 수치심이다. 불쾌감과 불편함이란 감정으로 표현되고는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현대의 법은 설사 자신이 원했고 정식으로 계약까지 마쳤어도 온전히 인신을 구속하는 노예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은 편할지 몰라도 세상이 불편하다. 자신에게는 좋을 지 몰라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좋지 못하다.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것이다.

 

이를테면 구직을 하는데 당장 내가 급하다고 비슷한 스펙에 비슷한 경력으로 급여를 반만 받겠다 하는 경우와도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야 내가 급하니 그 정도 받는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스펙과 경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그로 인해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급여를 낮춰 일을 구해야만 한다. 나는 편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해진다. 내게는 이익일 수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다. 하다못해 상품도 덤핑이 안되는데 인간을 덤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당장 급하니 쉬는 날도 없이 하루 20시간도 기꺼이 일하겠다. 그러니까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 이런 게 이기주의다. 그렇게 일하고 싶으면 차라리 다른 일을 하나 더 구해서 그만큼 더 일하라.

 

엄밀히 최저임금인상이나 근로시간단축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사회정책에 가까울 것이다. 탄력근로제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란 수단이 아니다. 인간은 오로지 목적이어야 한다. 모든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대전제다. 과연 현재 시점에서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루종일 일만 하느라 아이들 자는 얼굴만 봐야 하고, 겨우 쉬는 날에도 피로를 푼다고 하루종일 잠만 자며 가족과도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자신을 위한 취미를 가지지 못했으니 겨우 여유가 생기면 하는 일이라는 게 술마시고 멍때리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의 비율이 유독 높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퇴직하면 할 게 없다. 집에서 놀지는 못하고 다른 가치있는 일도 찾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일해야겠다고 창업부터 한다. 그리고 말아먹는다. 어떻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가. 어쩌면 당연한 그런 기본부터 대부분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사회가 정상인가. 그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정상인가.

 

사실 말이 소득주도성장이지 정작 필요한 정책 가운데 최소한도 시도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복지를 늘려서 노동시간이 줄고 수입이 따라서 줄더라도 최소한의 삶을 누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일단 의료비는 줄였다. 아이들 고등학교까지 교육비도 줄여주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굳이 욕심내서 비싼 과외만 시키지 않으면 더이상의 지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대한 투자도 갈수록 늘려갈 것이다. 노후에 대한 대비도 충실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 번 돈을 오늘 다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번 돈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도 전혀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돈을 쓸 만한 여가를 준다. 문제는 이와 관련한 모든 법안이 야당의 반대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당장 취직을 걱정해야 하고 아이들 기를 일을 걱정해야 한다. 당장 오늘 먹을 빵을 걱정해야 한다. 한 시간을 덜 일하는 만큼 벌이가 더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노예로 돌아가야 할까? 다시 19세기로, 아니 불과 수십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그때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었고, 아이들까지 일시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돈은 생활비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돈이었다. 최저임금을 낮추면 노동자의 소득이 늘어난다. 최저임금만 낮추면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난다. 그러니까 소득이 없다면 여가란 휴식이란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사회인가.

 

하여튼 언론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19세기 유럽이야 말로 이상사회였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야 말로 노동자의 천국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IMF로 그 신화가 끝났어야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박정희를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에 1970년대의 경제논리를 끌고 온다. 과연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다시 지금에도 노예제를 허용하고 아동노동까지 허락해야 하는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겠다.

 

21세기에 20세기의 경제논리를, 그나마 선진국에서는 이미 19세기에 끝난 주장들을 들고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신자유주의마저 수명이 다한 지금 그들이 추구하는 경제이론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크게 상관할 필요가 없다. 이제와서 새로 노예를 만들수도 아동노동을 허락할 수도 없다. 너무 당연한 것이다. 기자새끼들부터 휴일 없이 최저임금 이하만 주고 일시켰으면 좋겠다. 월급 많이 받는단 소리다. 쓰레기들이다. 

원래 권위를 앞세우는 체제일수록 말이나 글에 군더더기가 많다. 당장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내리는 교서를 보라. 전근대 유럽에서 쓰인 공식 외교문서도 비슷하다. 그래서 기호학이라는 것도 발전하게 되었다. 도무지 못알아먹을 휘황한 어휘들 가운데 진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요즘은 그런 것 없다. 아예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도록 구체적으로 간명하게 정리해서 발표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북한이라는 체제를 이해해야 한다. 한 마디로 전제왕조다. 전제왕조의 군주란 곧 신과 동격이다. 그래야지만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된다. 자칫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무오류하며 어느 누구보다도 위에 있음을 확인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북한의 국방위원장인 자신은 세계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동격이며 대한민국의 대통령 문재인을 꾸짖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면 그런 수식들을 지우고 한 번 김정은이 하는 말을 해석해 보자.

결국은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사정에 대해 잘 좀 말해 달라. 대한민국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 당사자이니 조금 더 절박함을 가지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사정과 요구를 제발 좀 잘 전해달라.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자신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 저번과는 다른 바뀐 조건을 제시해 달라. 지난 번 요구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으니 조금만 수정해서 자신들의 입장도 생각해 달라. 한 마디로 지금 이 대로는 내가 결단하기 어려우니 미국과 한국이 합의해서 명분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 급하고 아쉽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당장 쿠데타가 일어나 자리에서 내쫓길 지 모르니까.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권력자로서 권위를 잃는 순간 자신의 권력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워질 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애써 강한 척 거친 말로 자신을 숨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당국자들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미국은 몰라도 우리 정부의 당국자들은 북한의 스타일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한미공조가 중요한 것이다. 북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의 협력 없이 미국 혼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동안 보수정부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못한 것이다.

아무튼 결국 북한이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회답을 내놓은 것이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하노이회담보다 진전된 내용이면 받겠다. 한국이 나서서 그래도 하노이회담에서보다 명분이 서는 내용이라면 기꺼이 자신들도 받겠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던 굿 이너프 딜 역시 트럼프 대통령과의 짧은 회담으로 그 대답을 들은 것이나 같다. 원래 정상끼리의 회담은 이견이 많을수록 길어지는 것이다. 이미 모든 합의가 끝났다면 이야기가 길어질 이유가 없다. 굳이 정상들이 부부동반으로 어울려야 했던 이유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내용이면 자신들도 기꺼이 받을 수 있다. 빅딜이면서 스몰딜인 언론들이 미국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비판한 바로 그것이다.

의외로 빠를 것 같다. 대충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김정은이나 트럼프나 서로의 속사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회담의 결렬로 인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에 대한 계산도 거의 끝나간 듯하다. 그리고 둘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우리 정부가 한다. 정확히 설득한다기보다는 둘 모두가 나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명분을 제공한다. 배우들인 것이다. 국제외교란 것이 그렇다. 답이 정해진 경우 각 주체들은 배우가 되어 훌륭하게 자신을 연기한다. 물론 내가 이해한대로 풀려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바람이기도 하다. 따뜻한 바람이 곧 북에서 불어올 지 모르겠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 회사 다니면서 투자를 못받아 고생한 적이 있었다. 부동산은 미친 듯 뛰는데 정작 기업들은 투자를 받기가 어려워 고생하고 있었다. 만일 부동산으로 흘러간 그 막대한 자본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신생기업들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긴 미국에서도 서브프라임 이전에 닷컴버블이 있었다.

 

주식이란 곧 투자다. 자신이 특정 기업에 자본을 투자했다는 증명인 것이다. 그 권리를 시장에서 사고팔고 하는 것이다. 그 권리의 지분에 따라 기업이 이익을 올리면 배당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시장을 믿고 기업 역시 필요한 자본을 주식을 통해 확보하기도 한다. 그 주식을 다시 개인이나 기관이 사들임으로써 기업은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고 보다 공격적으로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주식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흔히 말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기업하기 좋은 사회. 그렇다면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가장 우선해서 실천해야 하겠는가.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이미선 후보자의 남편 오충진 변호사의 말은 옳다. 부동산은 사실 그 자체로 어떤 가치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자본주의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한 것이 바로 지대로 불로소득을 거두는 지주들이었다. 아파트 가격이 오른다고 과연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주식은 다르다. 주식시장이 활성화되면 기업들은 그 주식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자본을 확보하고 더 활발하게 기업활동도 할 수 있다. 더 큰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주식거래는 권장되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죄악시되어야 하겠는가.

 

차라리 정의당이면 이해하겠다는 말을 전에도 했었다. 한겨레가 그런 기사를 내놨다면 역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입만 열면 기업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시장의 자유를 이야기하던 보수정당과 언론이 그따위 소리를 내뱉는다. 내부거래로 인해 불법적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주식거래 그 자체를 문제삼으며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위공직자는 물론 고위공직자가 되려는 사람들까지도 주식거래를 해서는 안된다. 정작 더 많은 자본을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그들에게 주식투자란 죄악이라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기업과 시장의 자유란 부동산의 자유인가. 지금도 여전히 부동산 가격을 올리려 온갖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고 있다.

 

차라리 야당 국회의원들의 부동산투자보다야 주식투자가 건전하다. 때로 이익도 보고 때로 손해도 보고 어쨌거나 주식을 통해 재산을 늘릴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을 그냥 놀려만 두는 것도 죄악이다. 당장 옆나라 일본을 보라. 그렇게 주식에도 투자하고 자본이 돌아야 경제도 잘 돌아가게 된다.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 진짜 주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로구나. 어째 주식투자에 대해 너무 자신없이 말한다 했더니 진짜 주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니 그게 잘한 건지 좋은 건지도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차라리 권장해야 한다. 공직자들도 재산을 늘리려면 주식에 투자하라. 한심한 것이다.

오래전 동아시아의 왕과 대신들을 걱정이 많았었다. 백성들이 농사는 짓지 않고 허황되게 장사해서 돈 벌 궁리만 한다. 법으로 강제해서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장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도록 해야만 한다. 

 

하긴 동아시아만이 아니다. 유럽에서도 농민을 농지에 묶어두는 농노제를 시행한 이유가 자칫 농민이 이탈하여 농사지을 노동력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농사를 지어야 생산이 늘고 백성도 굶지 않고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당시에도 개인이 큰 돈을 벌려면 농사보다는 장사를 해야만 했었다.

 

원래 기술이 발달한다는 자체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양을 늘려가는 과정인 것이다. 예전에는 100명이서 겨우 할 수 있는 일들이 기술의 발달로 90명으로, 80명으로, 70명으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혼자서 그 이상의 일들도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직접 노동자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팠지만 이제는 포크레인 한 대면 그 몇 배의 일을 하루만에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종자를 개량하고, 농기구를 새로 만들고, 농사법도 새롭게 찾아내고, 그 결과 한 사람이 몇 배의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면 그만큼 일정 면적의 농지를 경작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수는 줄어든다. 그러면 더이상 필요없게 된 농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부터도 유럽에서 농민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전체 인구 가운데 농민의 비율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경작지는 늘어가는데 오히려 농민의 수는 줄고 고향을 떠난 유민과 도시로 흘러든 도시빈민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했었다. 아마 그래서 당시도 그와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더이상 농사지을 땅이 없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산업혁명 이후로도 제조업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처음 공장노동자들은 하루에 10시간 넘게 거의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어느새 하루 8시간, 토요일까지 제외한 5일 근무로 정착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노동자 한 사람의 전체 노동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차질없이 생산은 이루어지고 있었고 오히려 그를 통해 생산된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면 기술의 발달과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더이상 전처럼 일정한 가치를 생산하는데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비례해서 기술의 발달과 산업의 고도화에 비례해서 제조업 노동자의 비율은 선진국들에서도 줄어들고 있었다. 굳이 한 사람의 노동자만 있어도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굳이 한 사람 더 고용할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연합뉴스에서 GDP대비 취업자수라는 희한한 기준을 만들어 한국경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었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더 적은 취업자수만으로 그만큼 더 많은 GDP, 즉 가치를 생산해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토록 보수언론들이 노래를 부르던 한국경제의 노동생산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더 적은 노동력만으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굳이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당장 매출과 순이익에서 세계톱클래스에 꼽히는 삼성전자지만 정작 국내에서 직접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10만 남짓이다. 물론 다른 관계기업들이나 해외법인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만큼은 아니다. 어째서이겠는가. 반도체 하나 만드는데 도대체 사람의 손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굳이 불필요한 고용을 더 늘리겠는가 말이다. 자동차 역시 대부분 공장들이 자동화되어 있어 이제는 아예 있는 노동자들도 줄이겠다 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제조업 일자리가 줄었으니 나라 망했다. 경제 망했다. 정책 망했다.

 

어째서 제조업 일자리가 줄고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렇다면 그 대책은 무엇인가? 어쩔 수 없이 1차산업도 2차산없도 생산성이 오르며 고용이 줄어들면 3차산업에 기대야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 자영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벌써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이 비판해 온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서비스업은 대부분 소비성이다. 대부분 전문기술도 자본도 열악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창업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이 프랜차이즈들이다. 부족한 전문성과 자본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창업할 수 있다고 프랜차이즈로 몰린다. 그만큼 취약하다. 유행과 경기에 따라 하루아침에 망해나가는 자영업이 속출하게 된다. 자본은 몰라도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생산적인 분야에서 종사하는 서비스업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안정적으로 3차산업인 서비스업이 한국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정부는 이 사회는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그런데 오히려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만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노동자가 더 적은 임금만 받고 더 오랜 시간 일해야 제조업 일자리도 늘어난다. 진짜? 자신하는가?

 

심지어 공중파 언론들에서까지 이런 터무미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경제가, 한국 사회와 인류의 문명이 어느 단계에 왔고 그렇다면 어떤 고민과 궁리가 필요한가 전혀 고려치 않고 그냥 관습적으로 관성적으로 해오 던 말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제조업의 고용을 늘릴 수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도시의 빈민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할 수 있겠는가. 스마트팩토리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게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고용형태는 어떤 것이며 그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와 대비를 해야 하는가. 그런데도 그저 제조업. 그저 제조업 일자리. 그것은 과연 비판인가 대책인가? 그런 비판들에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결국은 소비사회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여러 정책들을 통해 그것은 이미 입증된 바다. 카드대란으로부터 대출대란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빚으로 만들어 온 내수를 공식화 본격화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치로 여겨졌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기본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갈수록 늘어나는 노인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위한 보건과 복지 서비스는 당연하게 주어져야만 한다. 오히려 미래의 한국경제를 위해 필요한 일자리다. 보건과 복지란. 공공서비스란. 그런데도 그런 일자리가 늘어났다 비판한다. 저출산시대에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자리와 고령화시대에 노인들이 안정된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마저 저급의 잘못된 일자리들이다. 지위와 대우가 불안하고 열악하다면 그것을 개선해야지 필요없는 일자리라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관성과 믿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우리 사회와 경제가 나아갈 방향이다. 이 역시 전부터 주장해 오던 바일 것이다. 생산에 더이상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 없다면 소비를 통해서 고용을 만들고 경제를 움직여야 한다. 선진국들에서도 시작된 고민들이다.

 

그냥 수준이 안되는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고 고민하기는 더 싫고 그래서 그냥 하던대로 끄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제조업인가? 어째서 보건과 복지의 일자리는 안되는 것인가? 공공부분에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 왜 문제인 것인가? 그냥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세상은 바뀌는데 자기들만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투덜거리고 있다. 그런 게 꼰대다. 그런데 젊은 꼰대들은 왜 이리 많은지. 더이상 제조업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벌써 오래된 이야기다. 내가 관련한 책을 읽은 것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한참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변화들을 지켜봐 왔다. 여러 지표들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다만 저들만 모른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기레기다. 한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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