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20대 남성들이 진짜 신기하다는 것이 내가 20대 때는 절대 사법부같은 것 믿지 않았었다. 경찰도 검찰도 믿지 않았었다. 당연히 언론은 더 믿지 않았었다. 그나마 신뢰를 가졌던 것이 손석희같은 언론인 개인이나 그래도 진보언론이라고 한겨레와 경향을 조금 더 주의깊게 살피는 정도였었는데 그 결과야 모두가 아는 바 그대로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20대 때 김문수의 민중당을 지지했던 것이고 이후로도 오히려 민노당보다 왼쪽에 있던 소수정당들에 표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20대 남성들 보면 어떻게 된 것이 내가 그리 믿지 못해 하던 것들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가.

 

언론이 보도했으니 사실일 것이다. 검찰이 수사해서 기소했으니 사실일 것이다. 재판부가 판결을 내렸으니 사실일 것이다. 일 것이다가 아니라 그냥 이다다. 언론이 보도했고 검찰이 기소했고 재판부거 판결했으면 그냥 사실이다. 그러니 언론도 손대서는 안되고 검찰도 개혁해서는 안되고 재판부도 견제받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저 인기만으로 선거에서 당선돼서 권력을 쥔 국회를 대통령이 해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원래 20대 때는 반기득권적인 정서가 강하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이준석의 영향인가 지금 대한민국 20대 남성들은 오히려 기득권에 더 친화적이다. 재벌개혁도 안된다, 노동자를 위해 무언가 하는 것도 안된다, 최저임금도 올려서는 안되고, 근로시간도 줄여서는 안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서도 안된다.

 

사는 게 우울하면 오히려 더 기득권에 대해 반감을 가져야 하는데 정작 그 반감을 가지는 대상이 그 기득권을 그나마 바꿔보고자 하는 4050이라는 게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4050이 기득권이라고 6070과 연대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야 2찍 진보들도 똑같으니 뭐라 하기는 그렇지만 그들의 세대포위란 것을 보고 있으면 뭐랄까 가정교육의 부재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이재용은 그렇게 빨아대면서 자기 회사 부장, 과장, 혹은 업소 사장등은 그리 미워하는 걸 뭐라 말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준석이 더 싫은 것이다. 그런 감정에 물꼬를 내 버렸다. 제도권에서 공식화해 버렸다. 

 

아무튼 특히 20대 남성들과 대화하다 보면 신기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대한민국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서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일까. 재벌도, 검찰도, 법원도, 언론도 무엇도 문제가 아니고 그냥 민주당이 문제다. 문재인과 이재명만 문제다. 4050과 2030 여성들만 문제다. 개인의 문제다. 민주당만 아니고 4050이 없고 여성만 없으면 대한민국은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 이준석 사퇴하면 아마 지금 40% 넘는 지지율 가운데 절반 넘게는 김문수에게 가지 않을까. 그들의 공정과 상식,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웹소설 보고 있으면 이런 것이구나 싶기는 한데... 확실히 다르다. 세대가 다른 탓이다.

미안, 내가 잘못 알았다. 하도 자기들이 2030이라 주장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60대 이상도 아이디 뒷자리 네 자리 같다고 같은 사람 아니라는 정도는 알겠다. 나도 유튜브에서 댓글 달려고 하면 가끔 내가 썼는가 싶을 정도로 아이디가 같아서 한 번 더 보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람 생각하는 게 비슷해서 내가 아이디 만들며 생각한 그대로 다른 사람도 비슷하게 만드는 경우가 그만큼 많은 때문이다. 그런데 그저 아이디 뒷자리가 같다고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라... 그러면 연쇄살인범 뒷모습이랑 눈코입이 닮았으니 같은 사람이라 해도 되겠네?

 

사람이 해도 되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 말하느냐에 따라,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려하고 판단하는 것을 흔히 지능이라 부른다. 인간의 지능이 지금처럼 발달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사회성을 꼽는다. 집단을 구성하는 일원들을 하나하나 구분하고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려면 그만큼 복잡한 연산이 필요한 때문이다. 자기보다 연장자니까 존중해서 존대하고,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많은 부분에서 미숙하니 배려하면서 가르치고, 혹은 서로 경쟁하는 입장이니 때로 거칠게 어르기도 하면서, 그런 걸 그래서 다른 말로 경우라 부른다. 경우를 안다 할 때 바로 그 경우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성장한다는 것도 그런 경우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아이들이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는 이유도 그래서 아직 사회화가 덜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대서나 엉덩이 훌렁 까고 오줌싸고 똥싸고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괜히 끼어들어서 술안주거리를 낼름 집어가기도 하고, 당연히 그런다고 대부분 어른들은 무작정 야단치기보다는 당장은 귀엽다며 허허 웃어 넘기거나 아니면 조용히 타이르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가르치고는 한다. 아직 뭘 모르기 때문이다. 어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40이 되었으면?

 

이준석에 대해 전부터 느낀 점 중 하나다. 이준석이 똑똑하다 정치 잘한다 말을 듣는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이라면 상대를 배려해서 절대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들을 전혀 서슴없이 저지른다는 점일 것이다. 이를테면 세대포위론 같은 것은 상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어도 그를 대놓고 해보자고 내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대포위론에 적극 동조했던 한겨레나 정의당 같은 2찍 진보들도 비슷한 부류들이다. 하긴 비슷하기는 하다. 2찍 진보들도 대부분 좋은 대학 나와서 그다지 고생같은 건 해 보지 않은 채 학벌을 간판삼아 입만 나불거린 경우가 대부분일 테니. 한겨레 기자는 다를까? 기자놈들 하는 게 뭔데? 그렇다 보니 그런 어린아이같은 되바라짐을 비슷한 놈들이 받아서 키우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터지고 만 것이고. 

 

설사 사실이더라도 지금 여기가 어딘가를 알아야 하고, 누가 자기 말을 듣는가를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을 골라서 써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한 나라의 최고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더 그렇다. 괜히 그동안 여러 정당들에서 다른 정당의 정치인을 공격할 때 전담할 저격수를 따로 두었던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조차도 언론을 통해 공격할 때와 실제 대중을 상대로 직접 이야기할 때 그 표현수위를 달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몰라서 안한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상대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하는 말들을 실제 듣게 될 대중을 고려한 자제이며 절제다. 다른 말로 예의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품격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래도 수권정당으로서 대중들 앞에서 그런 품위없는 말로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물론 2030 남성들은 그런 것을 솔직함이라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한 마디로 인간이 덜 된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세상을 의미했다. 그래서 사람 인人자에 사이 간間을 써서 인간인 것이다. 사회화가 덜 되었다. 어디서 똥싸고 어디서 누워 자고 누구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남들이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그냥 젊은 세대들을 위해서 기존의 기성세대나 혹은 장애인, 여성, 외국인, 소수자들을 희생시키는 방법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다. 4050을 위해서 아주 간단하게 젊은 세대를 빨아먹는 방법으로 최저임금 낮추고 근로시간 늘리고 중대재해법도 없애는 훌륭한 방법이 이미 있다. 그러나 오히려 대부분 4050들은 젊은 세대들을 위해서 더 싼 금리로 대출도 해주고, 더 금리를 높여서 저축도 도와주고, 심지어 중소기업에 취업했으면 급여도 보전해주고, 집까지 세금을 들여서 더 싼값에 더 좋은 곳에서 잠시라도 빌려 쓸 수 있도록 정책을 펴기를 바라고 있는 편이다. 왜? 그런 것이 공동체일 테니까. 4050은 꿀을 빨아서 자기들이 기득권 차지하려고 민주화운동한 것이라 매도할 것이 아니라. 그런 놈들이 만난다. 그런 놈들이라 서로 지지하고 지지받는다. 그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더불어 그런 놈들 그렇게 떠받들어 온 언론과 심지어 자칭 진보들의 민낯도 까발린다. 그런 게 우리나라 진보란 것이다.

 

그냥 일개 당직자가 아니다. 까라면 까야 하는 힘없는 초선의원도 아니다. 아예 지역구가 그쪽이라 공천 받기 위해서 시키는대로 저격수 역할을 맡은 말단 정치인도 아니고 대선후보 가운데 하나라는 놈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차마 여기서도 거기서 이준석이 뭐라 말했는지 그대로 옮기지는 못하겠다. 사실 그래서 사실파악에 꽤 오래 걸렸다. 이준석의 발언에 분개하는 사람들조차 차마 그 말을 그대로 옮겨적는 걸 꺼리느라 상당히 간접적인 표현들이 대부분이었던 때문이다. 하다못해 인터넷에 글쓰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그런 걸 옹호한다? 병신이거나 미쳤거나 악하거나. 한숨도 나오지 않는다. 씨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악화가 양화보다 싸기 때문이다. 금이 절반 섞인 금화가 금이 90% 섞인 금화보다 당연히 더 싸다. 어차피 둘 다 똑같은 금화 하나의 가치라면 금이 절반만 섞인 금화를 화폐로 쓰고 90%짜리는 녹여서 다른 데 쓰는 것이 훨씬 이익인 것이다. 하다못해 90%짜리 금화를 녹여서 새로 절반짜리 금화를 만들어도 그 두 배 가까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통용되는 가치가 같다면 더 싼 쪽이 사용자 입장에서 더 이익인데 악화가 아닌 양화를 일부러 쓰는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인 것이다.

 

전투에서 져서 50보 도망간 병사가 있고 100보 도망간 병사가 있다. 그래서 다 똑같은 놈이라고 둘 다 처벌했다. 그러면 다음에 혹시라도 전투에서 지게 되면 병사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당연히 어차피 벌받는 것은 같은데 그냥 모두 100보 도망치고 마는 것이다. 50보 도망쳐도 100보 도망친 것이나 처벌받는 정도가 같다면 조금 더 안전하게 50보 더 도망치는 것이 병사 자신을 위해서도 이익인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 말 후금과의 최전선에 있던 무장들 다수가 전투에서 패하면 처벌이 두려워서 아예 항복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명으로 돌아가봐야 싸움에서 졌다고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차라리 항복을 하는 쪽이 목숨도 구하고 잘하면 영화도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수 있었던 때문이었다. 특히 후금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던 원숭환이 아예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똑같이 썩은 놈들이다. 똑같이 기득권이고 가진자의 편이다. 그래서 2찍 진보들이 윤석열의 집권을 방관한 결과가 과연 어떠했던가. 혹시라도 이재명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까 윤석열의 반노동자, 반소수자, 반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문제성 발언들에 대해 철저히 침묵한 결과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긴 민주노총이 간첩몰이 당하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민주노총 자신조차 대놓고 윤석열 정부를 적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는 할 것이다. 정의당도 한겨레도 그 말많던 자칭 진보 지식인과 논객들도 그 상황에 철저히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국민의힘도 문제지만 민주당도 완전무결하지 않으니 이놈이자 저놈이나 그래서 투표를 포기하겠다. 혹은 그냥 아무나 찍겠다. 그래서 실제 국민의힘이 집권했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재미있는 것은 그런 주장을 하는 인간들치고 자기가 윤석열에 투표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과거 민주당을 지지한 것은 후회하고 반성하는데 윤석열에 대해서는 절대 그런 것이 없다. 자기가 윤석열을 지지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민주당이 잘못한 것이다. 민주당이 자기로 하여금 윤석열을 지지하게 만들었으니 그 모든 것은 민주당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민주당이 싫어서 이준석을 지지한다. 주권자가 아니다. 자기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해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결정한 것이 아닌 그냥 떠밀려서 그리 된 것이다. 자신마저 대상으로 객체로 만든다. 결국은 현실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내리는 주체로서의 자신이 현실에 없기에 가능한 것이다. 권리는 행사하되 책임은 지지 않겠다. 그 권리라는 것도 구체적인 무언가를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인상과 감정을 위한 것이다. 그냥 비겁한 것이다. 책임지기 싫으니 다른 무언가에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아무튼 어차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완전무결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하게 선하고 무결하게 정의롭고 고고하게 도덕적인 존재란 인간세상에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설사 존재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정치따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이른바 성인이라 불리우는 부처나 공자, 예수와 같은 이들만 봐도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사정따위 전혀 고려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오롯이 곧고 올바른 하나의 진리와 정의만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렇지 못한 타자에 대해 한결같이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었다. 당연히 그런 이들에게 정치를 맡긴다고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적당히 추악하고 적당히 탐욕스럽고 적당히 저열하고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야비하고 적당히 음험한 현실의 존재들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정치따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가운데서도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최선을 주장하는 것은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타협 가능한 최선의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주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합격점은 줄 수 없다. 어차피 똑같은 낙제더라도 상대평가에서 조금 더 낫다면 그쪽이 더 나을 수 있다.

 

진화에 있어서도 하나의 형질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그 비율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주 오래전 아시아인의 조상이 시베리아의 설원에 갇혔을 당시 구성원 가운데 유전적 형질의 차이는 그냥 외모에서 각자 조금씩 차이가 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그런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는데 조금이라도 유리한 유전자가 있었기에 그 조금의 차이가 수 백, 수 천, 수 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예 지배적인 형질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101대 99의 차이가 결국에 199대 1의 차이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차이라 해도 그 작은 선을 무시했을 때 선은 자랄 수 없고, 아주 작은 악이라 해서 그 악을 방치했을 때 악을 막는 것도 어려워진다. 기껏해야 100 가운데 1, 아니 1000 가운데 1이라 해도 더 선한 쪽에 힘을 실어주었을 때 사회는 더 선해지는 것이고 더 악한 쪽을 방치했을 때 사회는 더 악해지고 마는 것이다. 둘 다 똑같으니 누구도 선택하지 않겠다. 그것은 그냥 더 악한 쪽이 날뛰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에고다. 세상이 어떻게 되도 자신의 고집과 신념만 지키겠다. 자신만 고고하겠다. 그렇다고 딱히 더 선한 쪽을 선택하느냐면 어차피 그쪽도 똑같은 놈들이라는 것이다.

 

거대 양당이 둘 다 썩었으니 개혁신당을 선택하겠다. 이재명과 김문수 모두 문제가 있으니 이준석을 선택하겠다. 그래서 개혁신당과 이준석이 완전무결한 존재인가? 그래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이념과 정체성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선이고 정의일 수 있을 것인가? 이놈도 저놈도 같다면 어차피 그놈들도 같은 놈들이다. 심지어 선거에서 당선되어서 무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말한 그대로 에고다. 그래서 그들 다수에게서는 자기들 아닌 타인에 대한 무시와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준석에게서 느껴지는 바로 그것들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없는 에고. 그래서 이준석인 것일까? 아마 맞을 것이다. 같은 부류들이 만난다.

 

정확히 그게 맞다. 그냥 개혁신당과 이준석이 맞는 것이다. 자기가 민주당을 지지했었다, 자기가 문재인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지금 지지하는 것은 개혁신당과 이준석이다. 왜? 개혁신당과 이준석이 자기에게 더 맞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지향과 이념이 자신들의 그것과 일치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원래 민주당과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맞지 않으니 불만을 가지게 되고 자신과 맞는 누군가를 찾아서 그를 대신해서 선택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렇게 실망하고 돌아서게 되었음에도 오히려 지지율이 오르고 당원도 늘고 있는 민주당의 현재가 그 근거가 되어 주고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들이 민주당과 맞지 않았다. 차라리 개혁신당과 이준석과 더 맞았다. 그러니까 윤석열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기 싫으니 과거 민주당을 지지했던 전력을 들어 그 책임까지 씌우려 하는 것이다. 비겁한 것이다.

 

결론은 무언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없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지겹기만 한 진부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러면 아예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던가. 그런데 결국 선택해 놓고 다른 누군가를 탓한다. 다른 무언가에 책임을 돌린다. 그래봐야 지금 선택한 그놈이 그들의 수준과 지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념과 성향과 정체성을 바로 한 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그저 합리적인 중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준석이 중도면 트럼프도 히틀러도 스탈린도 전두환도 박저희도 모두 중도가 된다. 박근혜와 이명박은 진짜 극좌가 될지도 모르겠다. 웃기지도 않는 것이다. 하찮다.

아주 오래전 연도도 기억 안나는데 아무튼 김문수랑 이재오랑 민중당 만들어서 총선에 나왔을 때 민중당에 한 표를 준 적이 있었다. 사실 이 정도면 내가 원래 김문수 지지했었다고 말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김문수와 지금 김문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까. 그때 김문수가 주장하고 추구했던 것들과 지금 김문수가 주장하고 추구하는 것들 역시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르다. 그러면 민주당은 과거 김대중 시절부터 지금 이재명이 당대표로 있는 동안 얼마나 바뀌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짜 많이 바뀌긴 했다. 일단 김대중이 대통령이던 시절 나는 민주당에 투표한 적이 없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일 때도 열린우리당에는 투표하지 않았었다. 내가 작심하고 민주당에 다시 투표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2012년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때도 민주당을 지지한다기보다는 그냥 한나라당이 싫다는 감정이 더 컸었다. 그러고보면 내가 민주당 지지자를 자처할 수 있게 된 계기도 역시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면서 당을 일신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 전까지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싫어서 표를 주기는 하는데 도저히 지지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정당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재인 이후 이낙연을 제외한 이해창과 이재명을 거치면서 민주당은 확실히 내가 지지해도 좋을, 아니 지지하고 싶어지는 정당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지한다.

 

그래서 한 편으로 이해도 하는 것이다. 어째서 자기가 과거 민주당을 지지했었다는 고해성사가 이리도 많이들 보이는가. 과거 문재인에 표를 주었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글들이 이리도 흔하게 자주 눈에 들어오는가? 그만큼 민주당이 많이 달라진 때문인 것이다. 더불어 이전 민주당이 어땠었는가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전의 민주당에 비해 지금 민주당의 지지율이 낮아졌는가? 오히려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기 이전에 비하면 거의 두 배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기 전 민주당의 지지율이 20% 언저리에서 그마저도 못되는 경우가 거의 태반이었는데 지금은 어지간하면 40%는 거뜬히 넘기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윤석열의 내란이 있기 전부터 그랬었다. 당원도 아마 한 500만 되지 않을까? 문재인 당대표시절과 비교해서도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면 그 변화의 방향이 잘못되었는가?

 

더구나 그렇게 민주당을 떠나서 새로운 지지정당과 정치인을 찾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대상이 윤석열과 이준석이라는 것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한길이 당권을 쥐고 있었을 때, 그리고 이낙연이 대표가 되어 있었을 때 민주당의 모습이 과연 어떠했었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은 지금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의 나이대를 생각했을 때 너무 어렸을 적의 일이므로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이전의 민주당은 차라리 윤석열과 이준석에 더 가까웠었다. 그러니까 지금 민주당에 실망해서 윤석열을 지지하고 이준석을 지지하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유야 현란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념적으로나 정체성에 있어서나 그만큼 지금의 민주당보다 윤석열과 이준석이 더 가깝다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란 곧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념이란 또한 정체성이기도 하다. 정치를 하면서 법안을 만들고 정책을 구상해 실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정한 방향을 가지게 되는데 그 방향성을 단순화해서 정의한 것이 바로 이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념에 기반해서 동일한 지향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 정치적 결사가 곧 정당이기에 이념은 또한 단일한 정당을 정의하는 정체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법안들을 지지하고 어떤 근거와 논리들에 근거하여 이러한 정책들을 지지하는가, 혹은 반대하는가. 그래서 과연 과거나 지금 민주당과 윤석열, 혹은 이준석 사이에 어떠한 납득할 수 있는 공통된 부분이 존재하는가? 내가 아무리 민주당 개새끼라 욕하고 아예 등돌리고 외면했을 때조차 차마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그리고 새누리당까지 보수정당에 절대 표를 줄 수 없었던 이유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 새끼들은 너무 심했다. 절대 아니다. 그래서 역시 문국현과 안철수에게도 한 번도 표를 준 적이 없었다. 그 새끼들도 나와는 맞지 않는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윤석열이고 지금은 이준석이다. 그렇다는 것은 최소한 지금 민주당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민주당의 잘못인가?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잘못해서 자기가 윤석열과 이준석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정작 지금 민주당의 지지율은 역대 최고이고, 당원 또한 연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다. 민주당이 잘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과거보다 더 늘어났는데 민주당을 지지하던 사람이 떨어져나갔다고 민주당 잘못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민주당을 지지 못하겠다고 떨어져나간 그들이 지지할 수 있었던 그때가 민주당이 자기 길을 가지 못하고 있던 것이라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민주당은 지지율도 더 낮고 당원도 더 적었던 그러면서 윤석열이나 이준석과 더 가까웠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민주당을 오히려 다수는 바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그런 선택은 오히려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낙연이 대표이던 시절 당원게시판 갔다가 눈이 썩는 줄 알았었다. 당원이라는 것들이 떠드는 소리가 거의 국민의힘 당원들이나 할 법한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문재인 정부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부터 생각이 너무나 달랐었다. 저럴 거면 그냥 국민의힘이나 지지하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민주당에 남아서 민주당 지지자라는 이유로 민주당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래 성향부터 달랐던 사람들이 민주당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려 분란을 일으키면 이전 지리멸렬하던 시절의 민주당으로 다시 돌아갈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달라진 만큼 그들도 당을 옮겨가는 것이 낫다.

 

아무튼 이것으로 확실해진 것이다. 내가 민주당을 지지할 수 없었던 시절 민주당은 보수정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당이었다. 이낙연이 대표이던 시절에도 민주당은 국민의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낙연 대표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신한 지금 과거 민주당을 지지하던 이들 가운데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지지로 돌아선 사람이 이토록 많은 것이다. 이념적으로나 정체성에 있어 그들이 자신과 더 가깝다. 윤석열을 지지했다고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당연히 이준석의 공약이나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비판적이지 않다. 오히려 민주당에 대해서만 엄격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 그들의 원래 정체성은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자부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의 노력으로 저런 사람들까지도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민주당을 제대로 일신해낸 것이다. 과거 윤석열이나 이준석 따위들과 가까웠던 민주당에서 그들과 절대 섞일 수 없는 민주당으로 바꾸어낸 것이다. 그렇게 서로 원래의 자리로 자기 갈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다. 그런 점에서 한 편으로 뿌듯하기도 하다. 덕분에 저들도 자기와 맞는 정치인 찾아서 떠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민주당이 잘못해서라 여기는 것은 그들이 옳다 여기는 정당과 정치인이 그쪽이기 때문인 것이다. 태극기들은 차라리 계엄으로 싹 다 잡아죽이라 할 정도로 민주당은 무조건 잘못이라 주장한다.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한 것이다.

갈라치기란 한 마디로 원래 하나였던 것을 나누어 다시 섞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오히려 한자어로 쓰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바로 분열이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취한 전략 또한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지의 협력자들에 대해서는 자신들과 다르지 않은 정도로 철저히 우대하면서 그렇지 않은 다수의 피지배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차별하고 억압한다.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손발이 되어 움직여야 할 협력자들이 원래 자신들의 동족이었을 이들에 대해 오히려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가지고 그만큼 자신들에 대해 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심지어 동족일 식민지의 협력자들이 제국주의 열강보다도 더 악랄했다 해도 좋을 정도로 현지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고는 했었다. 굳이 제국주의 열강이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혐오하고 증오하고 경멸하고 무시하며 싸우느리 서로 단합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 그래서 지금도 한국인 가운데 일부는 같은 한국인에 대해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가지면서 일본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를 아직도 심심치 않게 찾아보게 되기도 한다. 특히 서울대 가운데 많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누군가는 부유하고 누군가는 가난하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서 가난한 이들에게 조금 더 도움을 준다. 그런 것을 갈라치기라 하지는 않는다.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결국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으로 나뉘어 사회가 고착될 수 있기에 오히려 사회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그 가능성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위해서 장애가 없는 사람들에게 양보와 배려를 법으로까지 정해서 강제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아무래도 지방에서 살면 교육을 위한 여건이 서울과 같지 않으니 특히 외진 지역일수록 대입 등에서 배려하는 것 역시 최소한의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지 서울과 지방이 아예 섞여서는 안된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방의 교육여건이야 알 바 아니고, 그런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따위 자기와 상관없다면서 서울에 산다고 양보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부추기는 이들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또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같은 나라에 사는 국민이면서도 다른 지역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그들과 분리하려는 사고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준석 지지자들의 갈라치기와 공동체에 대한 터무니없이 역전된 인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의사를 욕한 게 아니다. 그냥 간호사들 열심히했으니 수고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전공의들 파업한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더 어려워진 여건에서도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그를 격려하고 치하한 것이다. 그런데 전공의들 파업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갈라치기가 된다. 의사는 빼고 간호사만 칭찬했으니 갈라치기가 된다. 그런데 당시 전공의들 의대증원 반대한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환자들을 위해 그 역할까지 간호사들이 대신한 것은 사실이었었다. 그때 머리 깨져서 응급실 갔다가 의사 없다고 간호사가 가르쳐준대로 거즈랑 소독약 사다가 머리에 붙이고 날 밝을 때까지 기다린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기에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간호사더러 의사들과 대립하라고 말한 것도 아니다. 간호사들에게 뭐라도 대단한 특권 같은 것을 주어서 의사와 대결하라 부추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작 이준석은 여성에 대해서, 장애인에 대해서, 외국인에 대해서, 비정규직에 대해서, 철저히 그들과 분리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지킬 것을 주장한다.

 

이준석이 여성을 특별히 폄하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말하기도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놈들도 평소 보이는 태도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준석이나 자신들이 여성에 대해 적대적인 것은 지금 여성들 가운데 문제가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고 선량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 선량한 정상적인 여성이란 어떤 여성인가? 이준석이 토론에서 보이는 태도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자기 멋대로 가정하여 전제한다. 상대의 발언은 이럴 것이다. 상대의 의도는 이럴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다. 그냥 자기 머릿속에서 망상만으로 상대를 예단하여 정의한 뒤 그를 근거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대부분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일단 여기서부터 말리기 시작한다. 그거 일일이 하나하나 대응하다 보면 자신의 논지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많다. 이준석이 토론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기자라는 새끼들도 대부분이 키워들이라. 여성은 이래야 한다. 올바른 여성주의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장애인을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니 틀린 것이고 틀린 것이니 잘못된 것이고 잘못된 것이니 그를 혐오하고 폄하하고 차별하는 것은 정당하다. 합리적이다. 이준석의 갈라치기를 합리적인 문제제기로, 정당한 의제설정으로 여기는 이유가 그것이다.

 

제도권에서 2030남성들의 그같은 주장에 대해 특별히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란 것이다. 정상적인 정치인이라면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어떤 요구가 있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그것만 들어주거나 하지 못한다.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최근 여성주의에 대해 민주당 내부에서까지 비판여론이 높아진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문재인 정부에서 여성주의자들을 위해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더니 자기들 입장만 떠들고 있더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그것도 여성 가운데서도 일부인 소수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더라. 그동안은 남성이 상대적으로 기득권의 입장에 있었기에 여성을 더 많이 배려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정도를 넘어서면서 그 수위를 조절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젊은 남성들이 주장한다고 다 옳은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입장 만큼이나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다른 계층 다른 분위의 입장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당장 연금 받는 액수를 줄인다면 퇴직을 앞둔 세대들은 어쩌라는 것인가. 여성의 입장은 생각 않고 젊은 남성의 입장만 들어주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가. 그런 복잡한 이해와 관계들을 중간에서 중재하고 조율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로지 그 목소리만을 듣고 그를 대변하려고만 하는 것을 정상적인 정치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주의자들이 잘못하면 여성주의자들의 잘못을 꾸짖되 그러면서도 결국 여성과 남성이 함께 나아가야 할 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성주의자가 잘못했다고 여성 전체를 혐오하는 남성의 감정에만 기대려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의 입장을 남성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남성들의 요구를 여성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세대가 느끼는 불만들을 기성세대에 전하면서 기성세대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청년세대에게 이해시킨다. 그런데 어느 한 쪽 말만 듣고 다른 한 쪽을 비난한다. 나아가 예단하여 전제하고 그를 통해 논리까지 만들어낸다. 이게 가장 나쁘다. 이준석이 갈라친다고 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심지어 이준석은 자신을 지지하는 2030 남성들마저 너무나 일상적으로 예단하여 대상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데 그냥 그의 천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이준석의 토론방식을 보더라도 상대의 주장이나 견해, 발언, 행동들을 예단하여 정의한 뒤 그를 전제로 일부를 문제삼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토론 잘한다 말하는 이유는 기자란 새끼들 대부분이 원래 키워 출신이라 그런 것이고. 

 

어째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준석을 그토록 싫어하는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인 것이다. 민주당이 그동안 추구해 온 가치의 정반대편에 있다. 아니 아예 민주당이 그동안 믿고 추구해 온 모든 방향들을 철저히 부정하는 위치에 있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 출신이라면서 이준석을 지지한다 말하면 차라리 불쌍해지는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 지지하면서 맞지 않아서 고통스러웠을 것을 생각하면 이제라도 제 갈 길 찾아 가는 것이 옳다. 그렇게 다르다. 민주당을 진심으로 지지했는데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하물며 노무현? 아니 하다못해 그동안 보수정치인 가운데 문제가 많았던 이들조차 윤석열 하나를 제외하면 그래도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준석은 어떤가? 그의 공약 어디에 공동체를 위한 고민이 있을까? 그의 공약들조차도 결국 2030 남성들을 위해서는 이렇게해야 하는데 다른 성별 다른 연령대에서 반대해서 못하고 있다는 증오와 혐오의 호소인 것이다. 그런데도 갈라치기가 아니라면 그냥 원래 그놈들 사고방식이 그래서 갈라치기라 여기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튼 하다하다 이준석이 갈라치기 않는다더니 이준석의 갈라치기는 이유있는 합리적인 문제제기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하긴 자기들도 노무현을 존경했다며 중력절 축하마저 중단하는 성의를 보고 있으면 더 이상 욕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그놈들이 병신일 뿐. 그런데 그런 병신들이 20대 남성 가운데 40%네? 나는 갈라치기 아니냐고? 정치인이 아니잖아? 워낙 속좁은 소인배라 그래도 된다. 이재명은 그러나 그러면 안된다. 민주당이 그래서도 절대 안 된다. 그게 공인과 사인의 차이다. 싫어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경멸해도 그러나 그를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된다. 이런 편한 자리를 두고 정치라니. 정치인 해보겠다고 인생 갖다 버린 인사들에 대해 그저 위로의 말을 보낼 뿐이다. 병신들.

이준석의 의회혐오는 꽤 오래되었다. 정확히 그를 지지하는 2030남성들의 의회혐오와 궤를 같이한다 보면 된다. 시험을 보지 않은 권력이다. 그나마 대통령은 단 하나의 권력으로써 상징성과 의미가 남다르지만 국회의원은 무려 300명이나 된다. 공정한 선출절차인 시험 없이 뽑힌 권력이 그 만큼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놈들이 감히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검판사 되고 고위공무원 된 분들 위에 군림하려 든다. 공정과 상식을 너무나 사랑하고 능력에 의해 줄세우는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이기에 그런 것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이준석의 능력주의라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 널리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관념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무지렁이 백성들보다야 많이 배우고 많이 아니까 그들보다 위에서 그들을 지배하며 정치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조선시대 사대부가 그랬고, 영국의 젠트리가 그랬고, 독일의 융커가 그랬었다. 그 이전 유럽 귀족들 역시 그들의 핏줄은 또한 귀족이 아닌 다른 피지배민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냥 핏줄만 타고나서가 아니라 그 핏줄이 가진 우월함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것이기에 저들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단지 핏줄 대신 재산이나 혹은 시험과 같은 절차로 바뀐 것이다. 그러니 능력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놈들을 지배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지난 대선에서도 오히려 2030 남성들 가운데서 검찰공화국을 경험하고 싶다고 지지한 놈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검찰을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지금도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검찰을 건드려서는 안된다. 판사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대통령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윤석열이 계엄한 것도 국회가 너무 건드려서 그런 것이다. 윤석열도 잘못했지만 그보다 그렇게까지 몰아간 의회가 더 잘못한 것이다. 이준석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의회해산권만 있었으면 윤석열도 계엄까지는 하지 않았었다. 의회가 그러도록 윤석열을 몰아간 것이다. 그런데 내란심판을 말하면서 이준석을 지지한다? 세상에 그런 웃기는 개소리도 없을 것이다. 뇌가 없거나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그냥 버러지 쓰레기들이거나. 

이재명이 주장한 호텔을 모델로 한 경제이론에서 외부의 손님이 굳이 예약을 했다가 취소하고 돈을 회수한 것은 바로 그 모델의 지속성 때문이다. 누군가 계속 와서 예약을 하고 돈을 지불한다면 그냥 그 돈으로 경제가 굴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손님이 예약하며 지불한 돈이란 경제를 돌리기 위해서 외부에서 - 즉 정책을 시행하는 주체로부터 투입된 자금이란 것이다. 그런 식으로 무한정 돈을 푼다는 것이 과연 정책모델로써 타당할 것인가. 그래서 그 돈을 나중에는 다시 회수하는 식으로, 그럼으로써 그 마을의 경제가 자체적으로 순환하는 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 그동안 여러 나라들에서 경제적으로 침체되어 있을 때마다 재정을 풀어서 부양하는 경우 그냥 돈을 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를 회수하는 식으로 운영한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래서 어린 놈들은 안된다는 것이 그러면 경기부양을 위해 돈을 풀고서 바로 세금 올리고 금리 올려서 돌려받겠다는 거냐며 따져묻는데 단순화시킨 모델에서도 일단 돈이 마을을 한 바퀴 돈 다음에 다시 돌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돈이 한 바퀴 다 돌고 마을 전체에 충분한 영향을 미쳤을 때 그를 돌려받는 것이지 돈을 풀자마자 다시 회수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식으로 정책을 운용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면 이재명의 지역화폐는 이같은 승수이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역화폐 1만원짜리를 구입하는데 정작 개인의 돈은 9천원만 쓰인다는 부분이다. 나머지 1천원은 지자체의 재정에서 보조해준다. 즉 1만원짜리 상품을 지역화폐로 구입할 때 정작 9천원만 쓰면 되므로 할인효과가 발생하고 그는 곧 소비의 동기로 이어진다. 평소라면 돈이 아까워서 쓰지 않을 부분에 대해서도 그만큼 할인받은 가격에 살 수 있으니 조금 더 소비에 적극적이 될 수 있다. 실제 성남시장 시절 지역 소상공인들에게서 효과를 확인한 방식이기도 하다. 나도 지역화폐 쓰고서 안해도 되는 지출이 늘어나서 상당히 곤란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면 이 돈은 그냥 시장에 풀리고 끝나는가? 그러면 바로 인플레이션이다. 돈이 너무 풀리면 물가도 따라 오르게 되므로 그 돈을 다시 회수해야만 한다. 정책의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이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아무튼 한국 국어교육이 문제인지 비유면 그냥 비유구나 하고 그 비유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하면 될 텐데 비유 가지고 디테일을 따지고 있으니 토론 자체가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다. 유시민이 과거 이것을 비열한 논쟁방법이라 말한 바 있었다. 비유의 디테일을 가지고 공박하는 것처럼 비열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지능의 문제인지 양심의 문제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맹목적 신앙인지. 어째서 손님이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돈을 돌려받는가에 대해 따져묻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그냥 호텔만 손해다. 비유가 잘못되었다 말하던가. 웃기는 것들이다.

권영길 때부터 그랬었다. 주장이나 공약 자체는 매우 선명하고 방향도 옳아 보인다. 차라리 현실에 영합하는 민주당보다 이들에 표를 준다면 이 사회가 보다 진보적으로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 바뀌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아마 당시 많은 민주당,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이 사회의 진보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고 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왼쪽에서 끌어주면 민주당, 혹은 열린우리당도 한나라당에 맞서서 조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조국혁신당 소속 정치인이나 지지자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조국혁신당에 대해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것은 거수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 하는대로 그냥 끌려다니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지지자도 물론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몸집이 커진 만큼 운신이 어려워진 민주당을 대신해서 더 선명하게 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민감한 이슈들을 주도해달라는 것이다. 보수와 타협하면서 현실에서 가능성을 이루어내는 것은 민주당이 할 수 있으니까 의제를 설정하고 그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당을 그쪽으로 끌어당겨 보라는 것이다. 당연히 남의 정당이기에 가질 수 있는 기대 같은 것이다. 그럼으로써 두 정당의 연대가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 이를테면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과거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서 민주당 지지자들도 민주노동당에 이은 역대 진보정당들에 전략적으로 투표를 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어땠는가?

 

권영길 이후 역대 진보정당들 가운데 통진당 하나를 제외하고 대부분 정당과 그 지도부들의, 아니 주변의 자칭 논객이나 한겨레와 같은 언론들이 추구한 전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자신들의 진보적인 의제를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그나마 방향이 일정부분 일치하는 민주당과 손잡기보다 이 사회의 정통 지배세력이자 정당한 집권세력인 보수정당과 손잡고 그들의 이해와 허락과 용인 아래 그것들을 이뤄보자는 것이었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노동당은 한나라당과 손잡고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을 포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2007년 대선과 이듬해 총선에서 폭망하고 그 책임을 노무현에게 돌리고 했었는데 당시 민주당 지지자들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포기한 데에는 그런 민주노동당의 모습에 대한 실망감이 큰 역할을 했던 터였다. 물론 그보다는 정동영 하는 꼬라지 보고서 그냥 투표를 포기한 덕분에 민주노동당에 표를 줄 지지자들마저 투표장에 가지 않았던 것도 컸을 테지만. 최소 내가 그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동영에게는 표를 못 주겠는데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에 표를 주지는 못하겠더라. 그때 민주노동당에 대한 감정이 그러했었다.

 

그러면 그 뒤는 달라졌었는가? 당연히 보수정당이 집권당이 되고 다수당이 되었으면 굳이 진보정당에게까지 손을 내밀 이유가 없으니 사실상 선택지가 없었다 봐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애원하고 매달려봐야 필요가 없으니 그냥 바라기일 뿐이다. 더구나 이후 민주노동당이 사라지고 NL계를 중심으로 유시민까지 참여해서 통진당이 만들어지면서 민주당과 연대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에서 지지자들이 착각했던 것이었다. 아니 그때도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NL들의 성향이 그래서 민주당과 연대를 추진한 것일 뿐 결국에 다시 예전 민주노동당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예 대놓고 유시민을 따라 정의당으로 들어갔었던 참여계를 밀어내고 내쫓고 나서는 역시나 보수정당과 연대하여 심지어 문재인 탄핵까지 언급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었다. 기억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사사건건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보수정당의 논리만 따라 읊던 모습들을. 심지어 그 보수정당을 두고 진정한 노동존중의 정당이라는 찬사까지 바치고 있었다. 그러면 정의당 뿐인가? 김규항이나 홍세화 같은 이들은 어땠을까? 한겨레와 같은 언론들은 어떠했을까?

 

오세훈에 이어 윤석열까지 그토록 이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을 무시하고 혐오하는 발언과 행동들을 쏟아냈는데, 노동자의 권리를 짓밟는 논리들을 늘어놓는데도 그에 대해 한 마디 비판조차 없던 것이 당시 정의당과 한겨레, 자칭 진보 지식인들이었었다. 그것은 윤석열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져서 아예 민주노총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조차 정의당이 한겨레, 자칭 진보지식인 사이에서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오랜 진보진영의 동맹인 민주노총이 간첩으로 몰려 탄압받는 상황에서 진보를 자처하던 놈들이 침묵만 하던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고서 윤석열이 내란을 시도했을 때 정의당에서 터져나온 첫일성이 윤석열 탄핵보다 이재명 집권을 막는 게 더 우선한다는 것이었었다. 하긴 그 전에 이미 그같은 2찍 진보들의 노선에 반대한 이들은 알아서 뛰쳐나와 각기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남아 있던 진보세력의 대통령후보란 어떤 인물일 것인가?

 

권영국이 뭔 소리를 하든 아예 관심조차 없는 이유일 것이다. 분명 선명했을 것이다. 듣기에 속이 시원할 정도로 입바른 소리들을 내뱉었을 것이다. 그래서 뭐? 그래서 과연 권영국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이루어낼 것인가? 아, 정의당만 있는 게 아니라고? 녹색당은 더 심한 놈들이다. 노동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에서 더 왼쪽으로 갈수록 그 사고방식이라는 게 김문수와 크게 다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말도 내가 2찍 진보새끼들로부터 처음 들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조선총독부에 있고 대한민국 정부는 바로 그 조선총독부를 계승한다는 말도 진보라는 놈들로부터 처음 들었었다. 당시까지 감히 보수지지자라는 사람들이 그따위 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뉴라이트가 전면에 나서기 전이었다. 그래서 과연 권영국이 당권을 잡고 진보정당을 이끌면 민주당을 진보적인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왼쪽의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저들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신념에 따른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의힘이 될 것이고.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킨 상황에서도 탄핵보다 이재명 집권 막는 게 더 중요하다는 놈들이다.

 

그러니까 권영국이 뭔 공약을 내놓고 어떤 주장을 하든 결국은 국민의힘이 그것을 허락할 것인가부터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겨레에서 기사가 나오면 조선일보의 의도가 무엇이가를 추리해야 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어차피 국민의힘만 바라보고 그들과 연대하여 이루려는 방향들일 텐데 그래서 그런 것들이 가능한가. 가치가 없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도 그래서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바로 자칭 진보고, 그래서 그들은 2찍 진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랜 동맹인 진보진영으로부터 버려졌음에도 여전히 그들만 바라보고 있는 민주노총처럼. 그래서 저놈들은 안된다. 관심도 가져서는 안된다. 당연한 것이다.

사실 이준석의 토론방식은 문재인 정부시절 정부와 여당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2030 남성들이 쓰던 방식 그대로라 할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혹은 그 가장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고서 그를 전제로 문제점을 헤집어 공격하는 것이다. 정책이나 법안 그 자체가 아니라, 혹은 발언의 내용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비판할 수 있는 다른 우상을 만든 뒤 그 뒤에 숨어 비판하는 가장 저열한 방식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맹자가 우물가의 아이를 가정하고 그를 구하려는 사람의 심리를 수오지심, 시비지심, 측은지심, 사양지심의 사단으로 설명했는데 그를 두고 그럼 아이를 구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게 없느냐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직접 물어본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그런 마음으로 구한 것인 지 어떻게 아느냐 따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실제 일본의 어느 저술가는 심리학의 연구를 들어서 아이를 구하려는 사람의 심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자신의 저서에 싣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것이 온당한 비판일 것인가. 사람이 전혀 상관도 없는 아이를 구하려 할 때 작용하는 선한 마음에 대해 그렇게 관념적으로 가정하고 비유해서 한 말을 두고 일일이 구체적으로 따져묻는 것은 그냥 본질을 호도하려는 것이다.

 

하나의 정책을 실제 정치를 통해 구현하려면 다양한 여러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 여러 다양한 주체들과도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적으로 이렇게 하겠다, 그러다가 나온 것이 청와대 용산이전 아니었던가. 그래서 정치다. 그래서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라는 것은 방향을 제시하되 그 방법론까지 확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선에서 대동법을 처음 제안하고 전국적으로 시행하기까지 무려 100년이 걸렸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정책인 경우 최소 연단위고 대체적으로 십 년 단위를 가정하고 길게 계획을 세워서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정권이 바뀌는 경우에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상대정당과도 계속해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합의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일 테고. 그런데 지금 당장 그 방법을 내놓으라. 이순신 장군도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무찌르기 전까지 조선 수군으로 어떻게든 일본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은 있었지만 어떻게 막을 것인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 역시 유럽으로 상륙하는 것은 맞는데 언제 어디로 어떻게 상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꽤나 오랜 논의를 거쳐야 했었다. 그런데 그런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과정들을 한 마디로 단순화한다. 하지만 워낙 그런 방식에 익숙하다 보니 주지지층인 2030 남성들 사이에서는 환호가 터져나오는 것이다. 아주 적확하게 이재명 정책의 문제점을 공격했다. 하지만 대부분 국민들이 보기에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단정짓지 않는 중용적인 태도인 것이다.

 

하긴 그런 점에서 그 주지지층인 2찍 2030 남성들 사이에서도 그런 변명이 나오고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중도층이 아닌 김문수를 지지하는 보수지지층의 지지를 끌어오려는 전략이다. 최소 10%의 득표를 위해서 가장 확실한 보수지지층의 마음을 돌리려 전략적으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한 마디로 중도층이 보기에 토론의 태도나 내용이 영 보기 안 좋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태도가 뭣같았다. 그런데 이번만 그랬냐면 원래 이준석 토론태도가 그랬었다. 그런데도 이준석 못 빨아서 안달인 한겨레와 2찍 진보들이 그래서 어이없다는 것일 테고. 이재명은 말이 천박해서 싫다면서? 하긴 가난해서 거친 것과 유복한 환경이라 싸가지 없는 것은 확실히 다르긴 할 터다. 어제 권영국은 조금 달라 보였지만 2찍 진보들이 실제 선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아무튼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통해서 꾸준한 노력을 강조했더니 토끼와 거북이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느냐 따지는 수준을 토론 잘한다 하는 것을 보면 한국 국어교육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 봐야 할 것이다. 장자가 붕이란 새를 통해 인간의 호연지기를 설명하려 한 것을 그런 새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 따져 묻는다면 그건 그냥 병신이라 봐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과 상관없는 사람 10명 가운데 누구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진지하게 묻는다면 아마 대부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 경우라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꽤나 오랜동안 망설여야 했을 것이다. 거기다 단정지어 대답하지 못한다 묻는다면 그냥 병신이라 말할 밖에. 할 말은 다 한 것 같다. 병신짜가리버러지새끼. 주어는 없다. 나경원은 참 훌륭하다. 연예인도 평생 남을 유행어 하나 만들기 쉽지 않다. 우주의 기운이 도와준다. 박근혜도 그런 점에서 성공한 인생이다. 그렇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이다. 아직 사람이 순진해서 진짜 진지하게 사실과 논리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토론을 하려던 진짜 오래전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하이텔 쓰던 시절 토론장에서 어떤 사람과 주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꽤나 길게 토론을 하던 끝에 상대가 갑자기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당황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자기가 억울하다며 우는 소리를 하면서 하소연을 하는데 순간 내가 뭘 잘못햇는가 잠시 자기반성까지 했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 내가 키배 떠서 이겼구나. 그때는 아직 키배란 말이 생소했을 때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떠들어도 이미 성인이 된 상대의 생각을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텐데 하물며 괜히 감정 상한다고 얻어맞을 걱정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이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터넷에서 글로 논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겨먹자는 것이다. 논리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옳다는 걸 입증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열받게 해서 폭주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논쟁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이기는 것이다. 어차피 긴 글 자료를 찾아서 일일이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까지 정리해서 진심을 담아 써봐야 제대로 다 읽고 답글 다는 놈은 거의 없다. 키배 뜨면서 상대가 무슨 말 하는지 신경써가며 키배뜨는 놈은 거의 없다 보면 된다. 그래서 키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가 쓴 글 가운데 꼬투리잡을 한두가지 찾아서 그를 통해 상대가 제대로 긁히도록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키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방대한 지식이나 치밀한 논리같은 것이 아닌 상대를 제대로 긁을 수 있는 말빨과 글빨이라 하는 것이다. 이준석 지지자들도 그래서 이준석의 토론능력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지식이나 논리가 아닌 말빨을 드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제대로 논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상대를 이겨먹을 수 있는 말을 골라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준석을 제도권으로 들어간 일베라 일컫는 이유일 것이다. 제도권에서 성공한 키배라 부르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이준석을 감히 유시민과 비교하는 것을 보면서 유시민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코웃음부터 치는 것이다. 유시민도 젊은 시절 날선 말로 많은 사람들을 열받게 만들었었지만 그럼에도 그 말의 내용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근거와 치밀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또한 화나고 짜증나는 가운데서도 그 지적인 능력만큼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만들었었다. 지금은 정치를 그만둔 김영춘이 열린우리당 시절 유시민을 두고 '옳은 말도 싸가지없게 한다'며 비판했던 것은 그런 다수의 심리를 대변하는 한마디라 할 수 있었다. 당장 나를 공격하니까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래서 밉기도 한데 정작 그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유시민 자신도 그 시절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았다며 자평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실제 유시민과 정반대편에 있는 보수진영에서조차 유시민이라는 사람의 주장이나 논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유시민이라는 사람 자체만은 인정하는 경우를 지금도 주위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김대중을 욕하면서도 두려워했던 보수지지자들의 논리인 능력있고 똑똑한 빨갱이 그대로인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이준석은 어떤가? 이준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이준석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존경하고 인정하는가? 그러고보면 재미있는게 유시민을 가장 무시하고 혐오하는 놈들이 한결같이 이준석을 추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왜일까?

 

아무튼 이번 대선후보 토론을 통해서도 드러났는데 이준석의 토론태도라는 것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이다. 이준석이 토론을 잘한다 말하는 것도 그만큼 상대의 약점을 잘 찾아서 헤집는다는 뜻으로 그의 지적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가인 것이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아무리 옳은 척 하는 사람도 이준석과 만나면 결국 자기 속내를 드러내며 자기 성질에 못이겨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능력은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딜가나 왕따나 되기 딱 알맞는 능력인 셈이다. 조나라의 명장 조사가 아들 조괄과 병법을 토론할 때마다 매번 지고서 저놈한테 군대 맡기면 나라 말아먹는다고 경계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말싸움 잘해서 이겨먹는 것이 반드시 능력이 뛰어나서는 아니다. 그런데 또 그런 것을 조괄 또래의 조괄같은 놈들은 잘한다며 좋아하며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이준석이 젊은 층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일 것이고. 특히 인터넷에서 키배문화에 익숙한 놈들에게는 거의 아이돌과 같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지금 MBC부터 방송사들마다 이준석을 띄우려 난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자놈들도 대부분 딱 그 세대일 것이거든. 공식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월급 받으면서 키배 뜨려고 기자 된 놈들 분명 있다. 특히 한겨레 같은 진보매체면 거의 확실하다. 어쩐지 한겨레가 이념적으로 전혀 반대편에 있는 이준석을 너무 좋아하더라. 키배와 지성을 착각한다. 키배와 지능을 혼동한다. 키배 잘뜨면 유능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키배로 이름날린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을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논객입네 뭐네 글로 이름을 알린 놈들치고 지금 어디서 제대로 사람구실 하고 있는 놈들 한 번 찾아보자. 그나마 한윤형 같은 놈은 서울대라는 학벌이라도 있으니 제밥벌이는 하는 모양이다만. 한윤형 묻었다는 소리에 그래서 빅마우스나 요즘은 무슨 남천동인가 하는 채널 근처도 얼씬 않는다. 더럽다. 

 

아무튼 이번 대선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막연하게 이준석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던 특히 30대 이상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문화를 초기부터 겪어온 세대라 그런 식의 태도를 무척 싫어할 것이거든. 나도 싫어한다. 그래서 블로그질하면서도 정작 댓글접대를 않는 것이다. 댓글로 논쟁도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논쟁하는 자체가 이제는 혐오스럽다. 그냥 적당히 친목질이나 하며 지내는 게 낫지 무슨 논쟁인가 논쟁은. 가끔 늙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한 마디 하게 되는 경우에도 금방 후회하고 만다. 예전처럼 하루 넘겨 논쟁하는 자체가 이제는 너무 힘들다. 그런데 하물며 대선후보라는 놈이. 아니더라도 차기 보수의 희망이라 여겼던 인간일 터다. 그런 수준이다. 딱 거기에 걸맞은 정도다. 너무 어울린다.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아 그래서 너무나 뿌듯하다. 키배로써 여기까지 왔으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공일 터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