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른바 회귀물이라 불리는 장르소설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일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무엇부터 할까? 생각밖에 답은 명확했다.

"더 열심히 더 잘 놀아야겠다."

의외로 가난이라는 것도 견딜 만 하다. 내 적성과도 맞지 않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인데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고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굳이 더 열심히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는 건 없구나.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낙관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나 희망 또한 없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사람은 살 것이고 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운명론에 빠지는 모양이다. 다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면 현실의 어떤 고단함도 괴로움도 어떻게든 타협하며 넘길 수 있다.

그래서 이름붙인 것이 비관적 낙관론이다. 아마 한국인이 가지는 한과 신명이라는 이율배반적 정서도 바로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어차피 얼마의 곡식을 거두든 하늘이 정할 일이고, 기껏 곡식을 거두어 들이더라도 어느 놈이 와서 다 빼앗아 간다. 오늘만 산다. 내일따위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구한말 선교사들이 와서 보고 경악할 정도로 억척스레 먹어대고 있었다. 때되면 잔치를 열고 제사를 벌이고 그렇게 춤사위와 노랫가락 속에 현실의 시름을 잊는다.

희망이 있으면 절망 또한 따라붙기 쉽다. 기대가 있기에 실망하고 믿음이 있기에 배신감에 떤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마음다칠 일 따위 없게 된다. 그래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면 때로 날카로워지고 때로 예민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현정부와 여당에 실망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도 한 편으로 이해가 된다. 이런 정부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정책들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바란 개혁적인 여당의 모습이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터다. 그런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까. 딱 참여정부 당시 내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가졌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까 참여정부에도 열린우리당에도 지지를 보내지 못하겠다. 단 한 표도 주지 못하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회당이었었다. 지금도 남아있는가는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나는 더이상 정치에 대해 더이상 아무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문재인이 처음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내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다는 자체부터 어울리지 않는 선택인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 구성원들부터 고만고만한 것들이고,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인간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모르지 않기에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자유한국당보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그럴 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잘하면 칭찬할 마음이 생긴다. 아마 지금이라면 아이가 생겨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면서 잘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그래도 바라는 것도 있고 기대하는 것도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진 더 좋아진 세상에 대한 희망이 가시기 전이라 그런 것이다. 그래서 실망도 크고 분노도 크다. 절망은 때로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게 딱 꼰대짓이란 것일 게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그래봐야 어차피 모두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인 때문이다. 온전히 아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째서 젊은 층에서 민주당과 정부에 대한 비토가 높은가. 특히 젊은 남성 가운데 민주당과 정부에 등돌리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인가.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섰는가. 바른미래당은 자유한국당과 다르다. 최소한 드러난 이미지로 전혀 다른 정당이라 할 수 있다. 보수화된 것은 맞지만 어차피 민주당도 보수정당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선택을 과연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20대에서 가장 많이 지지하는 정당이 민주당이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젊은 층에서 가장 기대하기에 그만큼 가장 비판도 받는 정당이란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답이 없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설훈도 민주당 관계자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를 모르면 답도 없다.

정의란 누군가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도 주나라 종묘에 가서는 예를 묻는다. 무엇이 옳고 어떤 것이 바른가. 내가 왜 그토록 여성주의자를 혐오하며 비판을 쏟아내는가. 다시 한 번 저 놈들은 구제불능임을 떠올리며. 이제는 더이상 예전과 같은 혈기를 드러내지 못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니. 3,40대에서 지지율 높은 것을 자기들 잘해서라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게임하면서 순간의 선택으로 수 만 골드를 날리고 겨우 몇 천 골드의 행운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산다는 게 그렇다. 시간을 거스른다고 더 큰 야망을 가지기보다 그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늙은 모양이다. 사람이 잘아진다.


솔직히 설훈 의원이 아주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공교육을 통해 제대로 민주주의와 인권, 무엇보다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다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그것이 비단 이명박근혜만의 문제였는가 하는 것이다.


공교육의 문제란 바로 그런 부분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로지 대학입학만을 목표로 모든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정작 공동체를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들은 쉽게 배제되고 만다. 대학입시에 더 중요한 것들만 집중해서 가르치면서 정작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다양한 것들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의 정의감은 매우 막연하고 무모하고 그래서 때로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당장 지금 민주당 내 여성주의자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공동체가 없는 오로지 여성만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벌써 80년대에도 국영수 이외의 다른 과목들은 쉽게 무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예 학교에서 예체능 수업이나 학력고사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의 수업은 국영수를 비롯한 중요과목들의 보충수업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을 공산주의이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때려잡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가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쉽게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선명한 이데올로기 서적을 읽고 배운 그들의 민주주의는 온건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동안은 달랐을까? 다른 것 없었다. 단지 군사독재라는, 그 군사독재의 후신이라는, 권위주의라는 적이 존재하고 있을 뿐.


말 그대로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 그 후신이야 말로 그들의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에 반하는 권위주의 정부와 정당, 정치인들에 반대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바로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의 분열이었다. 오만 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차라리 한나라당이 더 어울리겠는 놈들부터 그보다 몇 걸음 더 나간 듯한 인간들까지 모두 모여서 한 목소리로 노무현 지지를 외치며 민주주의와 개혁을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분열했다. 원래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집단이었던 때문이다. 당시 내가 민주화따위 하지 않아도 좋았겠다 생각하게 된 계기도 어느 젊은 노빠 대학생이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 따위 개에게나 주라.


과연 모든 민주당 지지자들이 노조에 우호적이었을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들에 우호적이었을까? 가난으로 인해 아이가 죽은 부모에게 기를 능력이 안되면 아예 낳지 말라던 지지자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하고 있으니까. 진정으로 이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여기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지지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은? 지지자들만이 아니었다. 열린우리당 시절 안개모부터, 아니 이전 김대중의 민주당 시절의 면면만 해도 정말 화려했었다. 그냥 오만 잡탕들이 모인 것이었다. 권위주의 정당의 집권을 막고 진짜 민주주의를 해보자. 그러나 정작 그 진짜 민주주의가 뭐냐 묻는다면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어제 쓴 보수화된 젊은 층에 대한 이야기도 벌써 10년도 넘게 관찰해 온 결과라는 것이다. 당장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벌써 10년도 전부터 인터넷 등에서 관찰되어 온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내 학창시절의 기억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다만 군대 갔다 오고 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대부분 젊은 세대들은 누구보다 정의롭다. 다만 그 정의의 방향이 기성세대가 기대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보수적인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빨갱이일 테고, 진보적인 기성세대가 볼 때는 그저 수구꼴통일 수 있을 테고. 그러나 자신들의 현실에서 그것은 그들보다 더 가치있는 정의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 그동안 꾸준히 진보정당을 지지해 오던 젊은 층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늘고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도 높아지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나도 반권위주의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민주당에 표를 주거나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민주당이 아닌 차라리 다른 군소정당의 후보들에 표를 주고 있었다. 이미 말했다. 그들의 진보도 그들의 보수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제 3의 길도 그들 나름의 정의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동안 민주당이 그에 어울리는 정의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는가. 도대체 뭐가 그리 당당해서 젊은 층이 지지하지 않는 것을 교육의 문제라 치부하는 것인가. 자기들이 진짜 지지받을만한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장 서영교 의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사법거래의 당사자인데도 제대로 징계조차 안하고 있었다. 그동안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온갖 추문에 얽힌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에 대한 엄중한 처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과연 민주당은 제대로 된 진보정당인가? 과연 민주당이 이 사회의 시급하고 중요한 사회적 가치와 정의를 지키고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일 것인가?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높다지만 민주당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정치 자체를 불신하는 것이다. 그 책임은 그렇다면 누구에게 있겠는가? 그리고 결국 그런 모습들이 누적되며 더이상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은 참고 지켜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아니다.


그냥 일개 시민인 나는 젊은 층이 보수화되었네 지랄해도 상관없다. 같은 유권자니까. 같은 시민이니까. 나이가 좀 더 많다고 꼰대질해도 그럴 나이가 되었으니 그런다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무엇보다 유권자를 설득해서 한 표라도 더 끌어모아야 하는 정치인이라는 작자가. 20대가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설훈 자신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동안 민주당이 보여 왔던 반민주적인 행태들에 대해 어떤 태도들을 취해 왔었는가? 민주당은 과연 이름처럼 정당의 운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정당인가? 그에 대해 설훈 자신은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인가?


보수화되었어도 설득해서 끌어들이면 되는 것이다. 촛불시위 당시도 그랬었다. 광우병 파동 때도 다르지 않았었다. 그들이 모두 진보적이어서 박근혜 탄핵에 나섰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정의니까. 한 눈에 보기에도 박근혜가 악이었으니까. 충분한 명분과 이유만 주어지면 그들은 언제든지 진보와도 손잡을 수 있다. 그 손을 누가 먼저 내밀어야 하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이 이렇다 저렇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그럴 자격이 있는가.


별로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과연 민주당이 민주주의와 반권위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지지할만한 이유를 보여주던 정당이었는가. 늬들 주제를 알라. 차라리 한나라당보다도 더 비민주적이던 것이 과거 민주당이었고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듯하다. 당신들의 현실이다.

게임의 룰이 공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게임을 밸런스 잘 잡히고 시스템도 합리적인 좋은 게임이라 말하는 것일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게임이 재미있으려면 돈을 쓰거나, 아니면 시간을 들이거나, 그도 아니면 마음을 비우라. 돈을 쓰면 쓴만큼 강해진다. 시간을 들이면 들인 만큼 좋아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마음이라도 비우면 게임이 편해진다. 


얼핏 불합리해 보이기도 한다. 고작 게임을 하는데 왜 비싼 돈을 쓰고 귀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돈 안 쓰고도 시간 안 들이고도 게임이 재미있을 수는 없는가? 그러면 게임이 재미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안해도 더 쉬워지고 더 잘하게 될 수 있다면 아무도 그딴 게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에서 성장은 보상이다. 더 높은 레벨과 더 좋은 아이템과 그로 인해 더 강해진 캐릭터와 쉬워진 게임은 자신이 게임에 들인 돈과 시간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보상을 바라고 사람들은 비싼 돈과 귀한 시간을 들여가며 게임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항상 그렇게 가르친다. 대부분 선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공부만 잘하면. 시험만 잘 보면.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을 가지면.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벌써 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학습시킨다. 공부 잘하고 시험 잘봐서 성적이 좋으면 어지간한 잘못은 그냥 눈감아준다. 대놓고 편애하며 누구보다 귀하고 특별한 존재인 양 대우해 준다. 그리고 당연히 공부 못하고 시험 못봐서 성적이 나쁘면 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그나마 벌이라도 받으면 관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예 어디서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며 사람취급도 않는 경우가 현실에는 적지 않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라게 된다.


그래야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지만 주위의 수많은 유혹에도, 자기 안에서의 수많은 욕망과 충동들에도 오로지 스스로 자유를 억압하며 공부에만 열심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달갑지만은 않은, 오히겨 고통스럽기까지 한 그 과정들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그 대가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이며 사회적 존재로서 가지는 모든 권리들마저 그에 대한 보상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운다. 아니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게 된다. 아니면 지금 자신들이 하는 모든 노력들이 의미없어진다. 전혀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들과 같은 것들을 누리고 가질 수 있다면 그동안 자신들이 노력한 보람을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벌받고 노력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진다. 그럼으로써 노력한 사람들에게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곧 정의이고 합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식 자유의지주의란 정확히 노력과 시험을 통해 개인을 서열화하는 노력시험주의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보일러공을 채용하고 기업에서 미화원을 고용하는데도 정직원이면 시험을 치러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있는 지경이다. 보일러공을 뽑는데 필요한 시험이 무엇인가? 미화원은 어떤 과목들을 시험보고 뽑아야 한다는 것일까? 같은 정직원이라고 대학까지 졸업한 자신들과 경쟁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험을 치러야지만 공정하다. 왜? 그 노력을 봐야 하니까. 시험을 치르기 위한 노력을 검증해야 하니까. 그래야만 정규직이란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고용도 불안한 비정규직으로서 자신들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회적 평등을 위한 정부의 많은 정책들에 대해 오히려 젊은 층에서 더 큰 반발이 터져나오는 이유인 것이다. 저들과 내가 같아져서는 안된다. 저들이 나와 같아져서는 안된다. 차라리 나보다 더 돈도 많고 실력도 있는 누군가가 특권을 누리며 권리를 독점한다면 그것은 참고 넘길 수 있다. 그 전에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 못한 누군가와 나와 같아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들인 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그동안 자신과 그들이 들인 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나는 달라야 한다. 다르게 대우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성이든, 고졸이든, 지방대생이든, 혹은 외국인이거나 다른 누구이든 상관없다. 그들이 그와 같은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자체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결과이므로 그에 대해 어떤 인위를 가하려는 행위는 정의를 벗어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평등이란 곧 불공정이고 불합리이며 자신들의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으려는 악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이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불과 얼마전 많은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말하는 '노력'이라는 단어에 분노하고 있었다. 젊은세대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 더 노력하면 그들이 말하는 모든 불만은 해결될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이들만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는다. 여성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고졸자도 비정규직도 지방대 출신들도 노력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 최저임금이나 받는 저임금저숙련 노동자들도 노력하지 않아서 그리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양보하거나 배려할 필요가 있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그들을 위해 자신들이 손해보고 희생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격이 있는 내 월급은 올라야 하고 자격이 없는 그들의 월급은 오히려 깎아야 한다. 최소한의 생활조차 불가능한 임금을 받고서도 차라리 그런 자리에서라도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다. 젊은 꼰대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다리에서의 작업을 금지한 정부의 지침에 대해서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해가며 더 적은 돈을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저들이 그토록 사법시험과 수능 정시에 집착하는 것도 그래서다. 돈 많은 집안에서 과외까지 시켜가며 명문대 진학을 독점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만한 비용과 노력을 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방의 촌구석에서 성적도 변변치 않은 학생이 명문대학에 입악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판사나 검사가 되어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려면 그만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가 되어 사회적으로 명성도 얻고 상당한 부를 쌓기 위해서는 그만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더 어렵고 더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자신들의 노력을 계량해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과정과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가 되어 사법농단을 저지르고, 검사가 되어 온갖 비리와 불법과 결탁한다. 그마저도 옳다. 당장 그렇게 어려운 사법시험을 통과해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 이들이 사법부와 검찰이 그동안 저질러 온 불법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들을 보라. 가장 개혁적이라던 대법원장마저 결국은 팔이 안으로 굽고 있다. 그래도 되니까. 그만한 자격이 되니까. 그만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할 테니까.


과거 누구보다 사회적 평등에 앞장섰던 젊은층들이 이제는 오히려 사회적 평등에 대해 더 강한 반감을 보이게 된 이유인 것이다. 평등해서는 안된다. 절대 모두가 평등해서는 안된다. 내가 더 많은 돈을 썼는데 나보다 캐릭터의 아이템이 더 좋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게임을 했는데 나보다 캐릭터의 스펙이 더 높다. 정작 많은 돈을 쓰고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노력한 자신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가 너무 작아서 의미가 없다. 화가 나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패치한다고 그동안 애써 만든 귀한 아이템이며 높은 스펙을 무력화시키면 누구나 화가 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이만큼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리 나보다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것들을 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나와 같은 곳까지 올리겠다 말한다. 내가 이만큼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도 내가 노력한 시간에 대한 보상일 텐데 그를 전혀 알아주려 하지 않는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 보자. 게임은 수틀리면 그냥 그만둬 버리면 된다. 당장 오늘이라도 아이템 모두 팔아버리고 게임을 접어 버리면 된다. 그런다고 뭐라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당장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도 실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뭣같아도 어찌되었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태어난 이상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시간을 들여 스펙이 남다른 이른바 고인물들만 남아 있으면 그런 게임이 재미있을까?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인 만큼 보상을 주겠다고 아예 넘볼 수 없도록 차이만 벌린다면 사람들이 계속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고인물만으로는 게임이 유지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유저가 들어와서 기대를 가지고 게임에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야지만 게임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현실의 사회라면 어떨까?


어쨌거나 오래전부터 특히 젊은층에서 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른바 장르소설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일 것이다. 심지어 그래도 명문정파에서 제자들의 배분을 정하는데도 시험을 치러 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력이 미치지 못하면 배분과 상관없이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그런 행동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의식에 비판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또다른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실력이 되는 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 실력만 된다면 세상의 정의나 도의 같은 것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도 된다. 그렇게 모든 인간을 넘볼 수 없는 실력의 차이에 따라 나누어 계량해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 사회문제들을 대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게임이 문제가 아니다. 게임 이전에 이미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가르쳐 오고 있었다.


젊은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에 반발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반드시 페미니즘 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현실을 이해하는 방향과 기준이 전혀 다르다. 젊은 남성들에게 평등이란 노력에 따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공정이란 노력으로 인한 결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란 것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더 노력한 더 실력있는 이들에게는 더 큰 보상을,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더 적은 보상과 심지어 징벌을. 여성은 그런 그들이 생각한 불평등과 불공정과 부정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일관된 방향을 보인다. 그래서 저들에게 그런 차이를 더 벌리고자 하는 자유한국당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편견일까? 물론 모두는 아니다. 일반적인 경향을 말한다 해서 그것이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60대 이상의 노인 가운데서도 진보적인 이들이 있는 것처럼 20대라 해도 보다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문제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주 눈에 띄는 모습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부에 반발하는 이유이며, 진보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다. 평등은 옳지 않다. 평등은 악이다.


설득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이유다. 이만큼 생각하는 게 다르면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면 된다. 다만 이런 생각들을 가지게 된 원인들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만 잘되면 된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 사회가 강요하는 것들이다. 너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 잘 봐서 잘 먹고 잘 살라. 그런 삶이 성공한 삶이다. 보수가 성공한 이유다. 아주 오랜 의도하지 않은 계획이었을 것이다. 성과가 나타났다.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김경수가 유죄판결을 받든 말든. 구속되어 감옥에 갇히든 말든. 김경수랑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판결문 문장들을 하나씩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그냥 판사가 개새끼다. 성창호 개인만이 아닌 그따위 판결을 옹호하는 판사라는 새끼들 자체가 개새끼들이다.


하긴 출세를 위해 법을 공부했다. 출세해 보겠다고 판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법은 자신의 출세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법도 원칙도 정의도 상식도 도덕도 윤리도 없다. 그런 성창호따위를 옹호하는 자체가 판사들의 수준이 원래 성창호와 같았기 때문인 것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라고 다르지 않다. 결국 판사란 놈들은 이 따위밖에 안되는구나.


결국 앞으로 판사에게 재판받을 일 있으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빚을 내서라도 해결사를 고용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한국 사법부의 수준을 보여준다. 과연 양심적인 판사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내가 아는 좋은 인디언은 모두 죽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양심적인 판사란 법원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이제야 관심을 가지고 찾아봐서 조금 미안하기는 하다. 그만큼 김경수라는 개인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경기도민이기도 하고.


판사는 그냥 개새끼다. 외워야 할 것이다. 판사는 사람새끼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2002년 당시 나는 노무현이 초인인 줄 알았었다. 이명박을 지지하며 눈물흘리던 어느 아주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무현이 대통령만 되면 뭔가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당시 워낙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터라 정치따위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던 탓이 컸다. 그래서 어땠을까?


내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에 초인이란 없다는 것이다. 혁명이 아니고 한 번에 세상을 뒤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곧 국민수준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책임은 곧 그 정부를 선택한 국민의 책임이다. 그래서 지난 9년간 이 나라 정치가 어떠했었는가.


처음에는 이명박을 선택한 국민들에 실망했지만 이내 그런 국민들이 있으니 이명박 같은 이가 대통령이 되었구나 납득하게 되었다. 박근혜 역시 2012년 당시 국민들 수준에 맞는 대통령이었다. 1:1대결에서 더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문재인보다 더 적합하다 판단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40%가 넘는 지지로 정부는 견제조차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 박근혜가 탄핵당했을 때 그런 박근혜를 선택했던 국민들 역시 탄핵당했던 것이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국민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수치여야 한다.


어차피 민주당이 쓰레기라는 건 그동안 민주당을 지켜봐 온 대부분 국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자유한국당보다 그나마 조금 낫다는 것이지 한국사회에서 주류로 올라선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정부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도 시큰둥한 것은 이 사회 주류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그에 대해 무감각한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50보 100보지만, 아니 어쩌면 90보 100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한 번에 10걸음씩 줄여나가면 언젠가는 그 차이를 더 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정부와 여당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에 대해서도 그다지 불만이 없다. 때로 아프기는 하지만 그런 가혹한 비판들이 민주당과 정부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다만 합리적이지 못한 비판은 그냥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내게는 민주당이나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가 요만큼도 없다. 문재인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한 나라의 정치란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제왕조에서도 그런 건 불가능했다. 모두가 찬양하는 세종조차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그 치세 동안 백성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못했었다. 실제 백성들이 태평성대라 부르며 좋은 시절을 보냈던 것은 한참 뒤인 성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그렇다고 성종이 세종보다 정치를 더 잘했는가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실패했다고 나쁜 군주가 아니며 성공했다고 좋은 군주도 아니다. 하물며 아무것도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임에야. 민주당의 실체는 그동안 도저히 민주당에 표를 줄 수 없어 진보정당을 찾아 헤매며 다닌 지난 선거들로도 증명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민주당과 현정부를 지지하는가. 바로 그 10걸음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아주 미미하지만 그래도 자유한국당보다는 낫다. 어쩌면 사소할 수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유한국당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들이 쌓여서 정치가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뒤바꾸는 혁명보다는 지루하고 답답해도 그렇게 한 걸음씩 바꿔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잘한 것이 있으면 순수하게 잘한다 칭찬할 수 있다. 못하는 것은 뭐 어차피 그런 것이겠거니.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로 자유한국당이 민주당보다 더 잘한다면 지지해 줄 수도 있다. 그러기를 바라기에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당보다 더 나은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에 표를 주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에도 민주당보다 조금은 낫다 여긴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왔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민주주의라는 말 그대로 국민의 선택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자유한국당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민주당보다 더 나아지는 수밖에 없다. 바른미래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민주당보다 더 좋아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면 정말 헛웃음만 나올 뿐. 소수정당인 정의당을 제외하고 그나마 의석이 좀 된다는 정당 가운데 그나마 봐줄만한 정당이 민주당 뿐이라는 게 지금으로서는 그저 어이없기만 할 뿐이다.


원래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었다. 김영삼에 대해서도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이었었다. 아마 나같은 지지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30대와 40대에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도 그런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다. 어차피 국민 수준이 그런데 그런 국민이 선택한 정치인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일 터다. 이 사회의 주류라는 것들이 크게 다를 리 없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조금이라도 나은 놈들이 있다. 그래도 기대할 만한 놈들이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모든 정책에서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도 바른미래당보다도 민주평화당보다도 정의당보다도 낫다. 그 이상 무슨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절대 초인도 혁명도 허락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을 지지하면서도 여론에 못이겨 속도조절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토목으로 경기부양은 않겠다던 정부에서 예타면제로 토목을 통한 경기부양에 나서겠다는 것도 역시 그러려니.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민주당이 포르노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하겠다는 것도 그럴 수 있겠거니. 여성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대의 만큼은 동의한다. 다만 그 디테일에서 너무 미숙하다. 비판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유한국당을 찍을 것인가? 자유한국당이 지금보다 나아지면. 자유한국당이 그래도 민주당의 대안정당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면. 그러나 과연 지금 자유한국당이 그러한가? 그런데도 민주당이 싫어 자유한국당을 지지한다면 원래 성향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은 못견디겠는데 자유한국당은 괜찮다? 최소한 내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에서 그것은 성립할 수 없는 논리다.


현정부가 모든 부분에서 잘하고 있는가. 모든 부분에서 유능한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이해찬은 내가 지금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의 첫머리에 올라 있다. 민주당이야 원래 죽도록 싫어하던 정당이다. 하지만 필요하니까. 지금은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한 걸음이 너무나 절실하니까.


원래 몽골로이드가 코카서시안과 유전적으로 갈라지게 된 계기가 불과 수 만 년 전 고작 2천 년 동안 빙하에 갇혀 고립되면서였다. 혹독한 추위와 심각한 식량부족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당시 동아시아로 이동했던 인류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체열의 발산을 최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다. 정확히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해당 형질을 가진 아이들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았으므로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그 차이는 아주 미미했을 테지만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수 백 세대가 지나면서 원래 같은 뿌리에서 갈라졌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코카서시안과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지금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당시 동아시아인들과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하지만 어느새 그 결과는 너무 큰 차이로 벌어져 있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그럼에도 역사의 반동과 퇴보에 대해서도 이해한다면. 그럼에도 인류는 여전히 앞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그런 차이들로 인해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 사회는 궁극적으로 더 나아지고 더 진화하게 될 것이다. 원래는 그것이 진보여야겠지만. 뿌리깊은 절망과 회의는 그마저 온전히 믿지 못하게 만든다.


세월이 가르쳐 준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쉬운 일도 어려운 일도 없다.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 아마 이런 것을 중용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나라도 낫다면 나은 것이고 하나라도 좋다면 좋아지는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내가 유일하게 믿고 지지하는 한 가지 진리다.

여성주의자들의 남성혐오가 여성주의에 대한 막연한 혐오마저 부끄럽게 만들더니, 그런 여성주의에 반대하는 다수 남성의 인권과 공동체에 대한 태도가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민망하게 만든다.

현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해 별 사소한 것까지 가져다가 멋대로 상상력까지 동원해가며 전혀 사실과 다른 비난들을 정의롭게 쏟아내던 몇몇 남성위주 커뮤니티에서 과연 어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5.18에 대해 쏟아낸 막말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가만 지켜보고 있었다. 페미가 더 큰 문제라 민주당이 아닌 자유한국당을 지지하겠다는 그들에게 5.18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하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서 항상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바로 80년대로 돌아가 민주화운동하던 선배들을 목숨걸고 뜯어말릴 것이다. 심지어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보이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메갈과 워마드로 대표되는 여성주의의 남성에 대한 혐오에는 그리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한 사건에 대해서 거의 완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전정부에서 저지른 국정농단을 실시간으로 보았으면서도, 당장 사법거래로 피해입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동안 자유한국당이 저지른 불법과 탈법, 비리 등을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페미가 아니니 민주당이 아닌 그들을 지지하겠다.

원래 그런 성향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여성주의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남성으로서 감히 정부가 여성의 권리를 챙겨주는 것을 참고 보아주지 못하겠다. 여성을 위해 정부가 조금이라도 나서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겠다. 그냥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의 남성혐오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남성의 권리를 위해서라면 설사 정부가 수천의 여성을 학살해도 지지하겠다. 남성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수 만, 혹은 그 이상의 여성을 강제로 체포하고 구금하고 고문해도 여전히 정부를 지지하겠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내 권리와 내 이익만 소중하니까. 그래서 5.18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끔찍한 인식에도 그들은 여전히 반페미라는 이유로 자유한국당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남성혐오나 해대는 여성주의를 한 인간으로서 지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저버린 저들을 위해 내가 감히 한 마디라도 보탤 수 있을까?

왜 저들의 반페미니즘이 사회의 보편적인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가? 그저 반이성적인 충동과 감정에 의한 것이라 비웃음당하겠는가? 그들이 함께 하는 그 가치가 이 사회의 보편의 가치와 전혀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메갈이나 워마드가 그랬던 것처럼 이 사회 보편의 윤리와 정의와 한참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반페미를 위해서 군사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의 편에 서겠다. 페미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을 무참히 학살한 이들의 편에 서겠다. 그들의 주장은 누구도 함부로 혐오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보편적 정의에 의한 것이 아닌 단지 누군가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성주의자가 아니기에 그런 행동들에 대해서까지 여성주의가 싫다고 지지해 줄 수 없다.

난감하다. 이래서야 더이상 여성주의를 비판했다가는 저런 놈들과 하나로 묶이겠다. 차라리 여성혐오나 일삼는 한남이라는 비난은 달게 받겠는데 국민을 학살한 군사독재의 추종자들과 하나로 묶이는 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치욕이고 모욕이다. 내가 여성주의를 비판한 것도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고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지 저런 인간으로서 벗어난 행위들에 동조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그런 의심을 받는다는 것조차 나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치욕이고 모욕일 것이다. 이대로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일까?

참 사소한 것들도 여성주의와 관련해서는 미친 듯이 비판해댄다. 아주 작은 꼬투리도 놓치지 않겠다 별 상관없는 이슈에마저 정부와 여성들을 비판한다. 비판을 넘어 비난과 모욕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작 이 사회 보편의 정의와 관련해서는 침묵한다. 기껏 하는 말이 현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도낀개낀이다. 더 솔직한 표현이 그보다 페미가 더 큰 문제고 적폐다. 저들의 수준이다. 이미 알고 있던 바이기도 하다. 생각을 바꾸었다. 저런 것들이 주장한다고 다 들어준다면 그건 정부도 아니다. 사람 봐가며 요구도 들어주고 하는 것이다.

새삼 혐오만 늘게 된다. 여성주의나, 반여성주의자들이나. 극단이란 항상 같다. 주장이 현실을 넘어선다. 이념이나 신념이 인간을 넘어선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도 페미를 막기 위해서 자유한국당을 지지해야 한다. 지지해라. 말리지 않는다. 다만 사람취급은 않는다. 내가 한국 보수를 보수라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인간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역겹다.

리더는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된다. 생각이 많으면 걱정도 많고, 걱정이 많으면 두려움이 생기게 된다. 두려움이 생기면 움츠러들게 된다.


리더의 역할은 하나다.


"나를 따르라!"


모두가 두려워하며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가장 앞에서 모두를 독려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문재인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중심을 지키며 당의 개혁을 일정부분 이루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문재인의 지지율은 당시 야권에서도 최고라 할 수 없었지만 이후 문재인은 부동의 야권후보로 바로 직전의 총선결과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대선후보로서 유승민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결격사유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나마 대선 직전 상당수 의원들이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며 당이 존재마저 위협받던 상황에 그래도 끝까지 따뜻한 보수라는 가치를 밀고 나가겠다 외쳤을 때는 호응도 상당했었다. 그래도 희생을 감수하며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것이로구나. 나름 자유한국당의 대안으로서 따뜻하고 합리적인 보수에 대한 대중의 요구도 상당하던 터였다. 참고로 당시에도 20대의 상당수는 자유한국당과 다른 바른정당의 보수에 대해 기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가?


정작 중요한 고비마다 유승민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과감하게 바른정당이 치고 나가야 했을 때, 그리고 바른미래당으로 합당하고 승부수를 걸어야 했을 때 유승민은 그 자리에 없었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모든 언론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하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흔들림없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반대정파의 공격에 쉽게 감정을 드러내며 불안한 현실에 쉽게 좌절하며 주저앉는다. 과연 리더의 모습인가?


하긴 지난 총선에서의 모습도 그랬었다. 정히 승부를 걸려 했으면 근거지인 대구가 아닌 수도권에서 출마해서 자신을 증명했어야 했다. 격전지인 수도권에서 당선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국민들에 각인시킬 수 있어야 했다. 그토록 수많은 바보짓들로 알아서 자멸한 안철수가 지금도 유승민보다 윗급으로 평가받는 이유인 것이다. 안철수도 충분히 비겁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힘든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한 서울시장에 당의 이름을 걸고 출마해서 상처입으며 낙선한 바 있었다. 그러고보면 바른미래당의 합당 당시도 지금 민주평화당에 있는 반대파와의 힘겨운 싸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언론을 통해서 안철수의 이름이 거론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도대체 유승민은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바른정당 출신의 새누리당 탈당파들이 동요하며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려 안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유승민이 제대로 리더십을 보여주었으면. 당장은 어렵더라도 언젠가 가능성이 보일 것이라는 확신만 심어주었다면. 아니면 최소한 망하더라도 의미있게 망하는 것이라는 기대라도 가질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당장 리더라 할 수 있는 유승민마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기가 중심을 잡지 못하는데 누가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르겠는가. 다만 아무것도 없이 돌아갈 경우 진짜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을 것이 두려워 유승민을 앞세우려는 것 뿐.


이제와서 유승민이란 잊혀진 이름일 뿐이다. 단지 바른미래당 안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갈 일부 국회의원들의 구심점으로 그 가치가 거론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대선후보 이전에 과연 다음 총선에 출마나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동안 그래도 전국구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구 주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가?


원래 유승민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았었다. 말 뿐이다. 그저 말 뿐인 샌님이다. 똑똑하고 많이 알고 말도 잘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순욱이나 제갈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스스로 리더가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마 순욱과 제갈량은 지조라도 있었지 유승민은 그마저도 없다. 끝까지 박근혜도, 새누리당도, 이제는 바른정당도 바른미래당도 지키지 못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책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유승민이라. 그래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잊혀진 이름이기에. 잊혀진 리더에게 미래란 없다. 항복하고 남의 밑으로 기어들어갈 뿐이다. 그러고도 그 끝이 좋았던 경우란 역사에도 드물었던 것 같지만. 안타깝지도 않다. 딱 거기까지가 제 그릇인 탓이다.

80년대말 3저 호황기에 언론사에서 구로동의 어느 변두리 식당을 찾아간다.


"요즘 살기 좋으세요?"


아니면 난곡동 달동네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요즘 경기 어떠세요?"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이상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자고 날뛰다가 망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다. 하긴 그러고보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일본제국주의의 만주개발과 닮았고, 일본제국주의의 만주개발은 스탈린의 경제정책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보수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은 공산주의인 것인가?


개별 사례가 가지는 한계인 것이다. 주관적 경험이 객관적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셈이다. 모두가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성장률도 높고 잘 살았다 말하고 한다. 하지만 그때 볕도 들지 않은 좁은 단칸방에서 끼니마저 굶으며 버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도 장사 안되어서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있었고, 사업하다가 망하는 중소기업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국제그룹같은 대기업이 정권에 밉보여 한순간 망해버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경제성장률은 높았고 이후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오게 되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누가 그것을 부정하는가?


굳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며, 오히려 괜찮은 사람들에게까지 어렵다 하소연하도록 유도한다. 경제가 어렵다. 민생이 힘들다. 그래서 언제는 안 어렵고 언제는 안 힘들었는가? 그렇다고 전부터 그런 소외된 계층들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오던 언론들도 아니다. 평소 아예 눈도 돌리지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천지개벽이라도 한 듯 그들을 찾아가 나라가 망해간다 한목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한겨레와 경향이야 내일모래면 나라 망한다는 게 주 레파토리였고. 최저임금 기껏 올려놨어도 최저임금 올라서 좋아진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지 않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괜찮아도 주위가 어려우니 정말 나라경제가 망해가나보다. 그러나 진짜 그런가?


경제성장률도 그만하고, 소비도 그만큼 늘고 있고, 고용률도 지표상 그렇게 나쁘지 않다. 최저임금 올라서 해고되었다는 경비원, 미화원 일자리도 오히려 늘어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절대 그런 기사는 내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보도만 믿고 경제는 나쁘다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경제가 마냥 좋기만 한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10% 넘는 고도성장을 하던 시절에도 경제가 어려운 사람들은 있었다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경제성장률은 높았지만 정작 양극화도 심해지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미국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없는가? 잘 사는 독일에는 폐업하는 자영업자가 없는가? 경제대국 일본에는 노숙자가 없을까? 그런다고 경제가 나쁘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얼마나 허무한 주장인가?


SBS에서도 그러더만. 부동산 가격이 4배로 올랐다는 건 기준에 따라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기준이 무엇인가. 어디를 기준으로 하는 것인가? 언론사 경제기자들이 무식한 것은 신재민 사건으로 이미 느낀 바 있다. 국채가 뭔지도 모르는 기자새끼들이다.


언제까지 저런 언론보도에 휘둘릴 것인가. 저널리즘 J에서 그러더만. 국민을 바보로 안다. 원래 국민이 바보다. 한심하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양반의 자식이라는 것 말고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양반이라는 신분에 아주 작은 흠집을 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미 학문으로도 스승이나 주위로부터 인정받고 대과에도 급제해서 관직의 길이 열린 사람과 분명 다를 것이다. 실제 일제강점기나 지금 미국에서 더 조선인과 유색인종을 멸시하고 차별했던 것은 사회의 하층부를 이루던 이들이었다. 어차피 일본사회에서 상층부를 이루던 이들이나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부유한 백인들 입장에서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다.


자기가 판사라는 사실만이 자랑거리인 이들이 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가르침받아 왔었다. 판검사만 되어라. 사법시험 합격해서 판검사만 되어 봐라. 실제 판검사가 되고 나서도 주위에서 그렇게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판사다. 그런데 누군가 그 판사라는 신분에 아주 작은 흠집이나 티끌을 묻히려 한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나아가 판사를 위한다는 누군가의 선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명예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가 아는 명예이고 다른 하나는 주위가 알아주는 명예다. 판사로서 자신의 양심을 지키겠다. 판사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겠다. 그보다는 주위가 자신의 양심과 존엄을 알게 하겠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잡는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등에 업는다. 그것은 판사의 자존감을 높이는 행위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검찰을 독립시키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에 대해 검찰이 배신이라고까지 여겼던 이유였었다. 처음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아마 당시 대기업 회장 하나를 구속해서 기소하는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철저히 대통령의 수족이 되어 대통령의 지향에 맞추겠다. 그런데 거절당했다. 이후 검찰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가진 악감정이란 그 연장이라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초기 굳이 논란을 무릅써가면서까지 이석렬 검사를 중심으로 검찰 내부에 정부의 목표 가운데 하나인 적폐청산을 위한 태스크포스팀을 두었던 이유였다. 검찰을 버리지 않겠다. 검찰과 함께 가겠다. 그러니까 검찰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충실히 따라달라. 검찰의 논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검찰의 양보를 바란다. 검찰이 자기가 원한 대로 일정한 양보만 해주면, 아니 그 과정에서도 검찰의 목소리를 충실히 들어주겠다. 검찰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닿을 수 있는 끈이 아직 남아 있다. 이해하는가? 지금 판사들이 가지는 분노를?


차라리 김명수 대법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밥먹고 사진찍으며 친분을 과시했다면 이렇게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끈떨어진 연이 되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대통령이라는 배경을 두고 사냥개처럼 위세를 떨칠 수 있었는데 김명수 대법원장 아래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더욱 양승태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양승태마저 잡혀들어가면 자신들이 판사라는 자부심도 자존감도 모두 쓸려가고 만다. 그래도 한때 권력의 사냥개였던 그 위세등등함을 영영 잃고 만다. 그들이 진정 바라는 것이다. 다시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들을 사냥개로 써주기를. 그저 개처럼 벌레처럼 발밑에 두고 맛있는 고기나 던져주기를. 그래야 세상이 자신들을 두려워 할 테니까. 자신들이 판사란 사실을 우러르며 부러워 할 테니까.


특히 김경수 재판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판결에 대한 판사들의 반응을 보면서 더욱 강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사법농단 관련 수사에 대해 법원이 어떤 태도를 취해 왔었는가. 심지어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그나마 양심적이라던 판사들조차 그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여 왔었는가. 아무리 그래도 판사라는 자신의 이름까지 건드리는 것은 용납지 못하겠다. 누구도 판사라고 하는 자신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겠다. 그를 위해 그들은 판사가 되었던 것일 터다. 검사가 검사가 되었던 것처럼. 그야말로 스카이캐슬의 미래버전이라고나 할까? 누가 이런 괴물들을 만들었을까?


여전히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사법시험을 부활시켜서 개천의 미꾸라지들도 용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용이 되었다. 스스로 용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 용들이 용이 되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판사로서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최소한의 자각이나 사명감도 없이 그저 판사라고 하는 자신의 명예만을 소중히 여긴다. 자기가 아는 명예가 아닌 남들이 알아주는 명예다. 그를 위해 판사라는 직위마저 수단으로 여기고 만다. 저들은 용이다. 용에게는 용에 어울리는 논리와 대우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저들이 적폐가 된 이유다. 그러니까 너희는 대통령의 개가 되라.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의 개가 되어 그만 못한 이들의 위에 서라. 그것을 진정 명예라 여긴다. 자신들을 버린 대통령에게 복수심까지 갖는다. 참여정부의 재판이다. 독립하랬더니 오히려 원망하며 배신감마저 느낀다. 사람취급할 필요도 없는 이유다. 사법농단과 관련해서 그동안 뉴스들을 꼼꼼히 지켜봐 온 결론이다. 판사들에게는 양심이란 없다. 사명감도 없다. 바로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정확히 그런 놈들만 판사로 만들었다.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리고 그것을 더 그리워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현실이다.

오래전 선비들은 왕에게 정통성이 없고 나라에 정의가 없다면 권력을 탐하여 출사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었다. 고려를 찬탈한 이성계를 섬기는 것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후학을 기르는데 힘썼던 길재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당장 일제강점기만 해도 정통성없는 불의한 권력이기에 많은 이들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아주 작은 하나라도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용운 같은 이는 딸을 일본의 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자기가 직접 품에 안고 가르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것을 곧 절개요 지조요 정의라 여겼었다.


물론 조선총독부라고 하는 실체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조선 인민들의 삶과 권리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고자 애썼던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다만 그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의 지배를 인정했기에 굳이 일본과 적대하려 하지 않았었다. 만일 누군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관리로 임명받아 일본인을 적대하는 정책을 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조선총독부라는 실체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관직까지 받았는데도 그저 일본인을 적대하는 정책을 폈으니 그들도 독립운동가라 인정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일본인의 권리마저 무시한 악덕관리라 욕해야 하겠는가?


많은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아마 한국은 남성강점기일 것이다. 남성에 의해 여성이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침탈당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남성을 극복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여성해방을 이루고 남녀평등에 이르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남성과 관련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바로 여성주의다. 그런데 어째서 여성주의자들은 다름아닌 남성인 대통령이 임명한 여성가족부 장관과 여러 공직을 받아들이고 그를 등에 업은 채 남성을 윽박지르며 억압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일까? 저들이 가장 앞장서서 거부하고 부정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한남인 대통령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나는 워마드가 상당히 솔직하고 일관성있다 생각한다. 기왕에 반사회투쟁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현실의 법도 원리도 가치도 모두 무시한 채 오로지 여성만을 앞세운다. 정당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도 무시한 채 하야를 외치며 헌법에 의해 탄핵당하고 재판을 통해 유죄판결까지 받은 전직대통령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돌려세우려 앞장선다. 남성과 관련한 모든 것을 부정하겠다. 남성과 연관된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 그런데 정작 그들을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은 남성의 권력을 받아 그를 등에 업으려 한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남성이 싫으면 여성가족부도 거부해야 한다. 정부와 관련한 모든 권력과 지위를 남성인 대통령과 연관되어 있으니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아니라면 인정해야 한다. 남성강점기가 아니라 단지 일시적으로 남성이 우위에 있는 사회임을. 그럼에도 남성과 여성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반자임을. 그래서 대화하고 설득하고 이해하고 타협하면서 함께 나가야 할 상대임을. 그렇다면 여론이 반대한다는데도 자기 자리까지 걸고 밀어붙이겠다는 헛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당장 당과 정부에 부담이 될 것을 알면서도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헛짓거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년들이다. 그나마 그동안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여성주의에 대한 호감마저 깡그리 지워버린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충분한 기회만 주어지면 잘해낼 것이라는 기대마저 날려버린다. 정부에 대해서도 당에 대해서도 어떤 연대도 책임감도 가지지 않는 저 버러지들을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그렇게 여성이 우선이면 남성의 정부를 알아서 걷어차고 나오던가. 그래서 차라리 진선미류보다 워마드가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진선미류야 말로 진정 워마드가 남성정부에 심어놓은 스파이였던가. 정부를 망치고 여당을 망치고 여성대통령을 다시 돌려세운다.


그런 게 바로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억압이라는 것이다. 중간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그저 정부끼리만, 정부부처끼리만,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와 권력만을 앞세워서. 다른 말로 독재라고도 부른다. 큰일 날 뻔했다. 저딴 게 혹시라도 어디 지자체 장이라도 되었다면 그 지역은 어떻게 되었을지. 기생이라는 말도 과분하다. 기생충 가운데는 덕분에 숙주의 생존에 더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있다. 저것들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차라리 여성운동가로서 워마드와 함께 시위라도 나선다면 인정해 주겠다. 역겨운 것들이다. 이른 아침부터 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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