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은행이라면 돈 빌려주는 곳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지만 역시 은행은 돈을 맡아두는 곳일 것이다. 현금을 쌓아 둘수도 직접 들고 다닐 수도 없을 테니 은행에 일단 맡겨두었다가 필요할 때 찾아 쓴다. 그리고 일정 기간 이상 돈을 은행에 맡겨 놓으면 알량하나마 이자도 받을 수 있다. 아예 이자를 목적으로 일정기간 정기적으로 정해진 금액을 예금하는 상품도 있을 정도다. 그러면 묻는다. 은행은 어떻게 고객이 맡긴 돈을 불려 이자까지 지급할 수 있는 것일까?

 

이자만이 아니다. 은행에 속한 임직원들의 급여며 은행지점들이 지불해야 하는 임대료나 각종 공과금등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도 주주에게 배당까지 하고 예금주들에게는 적으나마 이자까지 지급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물론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고객이 맡긴 저금을 종잣돈으로 빌려주거나 혹은 직접 투자해서 이익을 남기는 것 또한 은행의 일이기도 하다. 아니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쪽이 더 중요한 역할이자 기능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자본이란 곧 생산수단이며 은행은 그 자본을 공급하는 창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자본을 보다 수월하게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더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해진다. 은행을 포함한 금융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은행 뿐 아니라 대부분 금융이라고 하는 자체가 고객의 돈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구조인 것이다. 보험이든 증권이든 기본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결국 고객이 맡긴 - 다시 말해 언젠가 고객에게 돌려줘야 할 돈으로 사업을 하고 있으니 은행은 고객에게 빚을 진 것인가. 근본적으로 맞다. 그래서 은행이 부실화되거나 심지어 파산하게 되면 맡겨놓은 자기 돈을 찾으려 사람들이 몰려들고는 하는 것이다. 이때 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을 찾은 고객들은 채무자들인 것이다. 갚지 못하면 결국 빚이 된다. 하지만 어째서 은행에 대해서는 빚을 진다 하지 않고 돈을 맡겨둔다 하는 것일까. 빌려준다 하지 않고 저금한다 말하는 것일까. 한 마디로 떼어먹힐 일이 없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은행이 건재한 이상 언제 어느때든 자기가 필요하면 다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원래 고객이 받는 이자보다 은행이 대출로 받는 이자가 항상 더 높다.

 

국채란 역시 빚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채의 채債는 빚 채인 것이다. 일단 빌렸으면 언젠가 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당장은 필요해서 돈을 빌렸지만 언젠가는 그 돈을 갚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은 빌린 돈으로 어떻게 필요한 곳에 쓸 수 있었지만 나중에 그것을 갚을 때 부담이 될 지 모른다. 하지만 그 돈을 빌리고 갚아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빌리고 무엇으로 갚는가. 외채와 다르다. 외국에서 외화로 빌린 빚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언론이 그동안 집요하게 장난쳐 온 부분이기도 하다. 보유한 외화가 부족하면 자칫 나라가 부도날지도 모른다. 이미 1997년 IMF사태로 아직까지 트라우마로 남아있을 정도로 직접 겪어 본 바 있었다. 혹시 그리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넘은 공포마저 그래서 강하다.

 

그러나 국채란 자국의 화폐로 자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빌리는 빚이란 것이다. 때로 그 대상이 중앙은행이 되면 국채는 중요한 통화정책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사들이는 만큼 정부는 더 많은 화폐를 시장에 공급할 수 있다. 이때 정부가 시장에 공급하는 화폐 역시 당연히 자국의 화폐인 것이다. 그래서 경제후진국의 경우 정부의 무분별한 국채발행으로 인해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겪기도 한다. 화폐의 공급이 많아지면 그만큼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게 된다. 그래서 누구에게 빌리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중앙은행에서 빌린다면 통화정책일 것이고, 시장에서 빌린다면 재정정책일 것이다. 시장이란 곧 국민이다.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발행국의 화폐로 바꾸어 국채를 사야 하기에 그 돈은 모두 국민의 자산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그러면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할 대상은 누구이겠는가. 정부가 빚을 낸다면 누가 그 빚을 돌려받게 될 것인가.

 

국민인 것이다. 돈을 빌리는 것도, 그 돈을 갚아야 하는 것도 국민인 것이다. 빚을 지는 것도 국민에게 지는 것이고 빚을 갚는 것도 국민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제는 자국의 화폐를 단위로 이루어진다. 기축통화고 뭐고 상관없다. 기축통화국만 자국의 화폐로 국채를 사고 파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정부가 빚을 지면 그만큼 장래에 국민 가운데 누군가 그 빚을 받아내게 된다. 그러면 그 돈은 어디로 가겠는가. 정부가 아예 빚을 갚을 능력이 안된다면 모를까 정부에 돈을 빌려준 만큼 결국 언젠가 이자까지 포함해 돌려받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부는 지금 돈을 빌린 만큼 다시 갚을 능력이 되는가. 만일 갚을 능력이 된다면 이것은 빚이라기보다 돈을 맡겨두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다. 국채란 그래서 자본소득을 바라는 개인에게 있어 상당히 훌륭한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마치 예금처럼 보험처럼 오히려 더 큰 이익과 함께 돌려받을 자산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바로 국민에게.

 

괜히 상관없는 외국인들이 굳이 원화를 사들이면서까지 한국의 국채를 사모으려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만큼 한국의 경제나 정부의 재정이 안정적이고 따라서 떼어먹힐 일 없는 안정적인 투자처로 여겨지는 때문이다. 돈을 빌려준다기보다 한국 정부의 신용을 믿고 한국 정부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한국 정부의 국채에 돈을 묻어두는 것이다. 기한이 다 되면 국채를 다시 돈으로 이자까지 더해서 돌려받을 수 있다. 아니 기한이 안되더라도 이자를 할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팔아 이익을 남기고 자본을 회수할 수 있다. 그런 확실한 보장이 있다. 그래서 은행의 비유를 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정부에게 그만한 빚을 갚을 능력이 되는가. 된다고 여기니 외국인들도 기꺼이 돈까지 바꿔가며 너도나도 한국의 국채를 사들이려 하는 것이다.

 

굳이 원금을 갚을 필요도 없다. 국채는 그 자체로 화폐처럼 유통될 수 있다. 국채를 갚기 위해 새로 국채를 발행하고 그렇게 발행된 국채는 발행한 정부의 신용도에 비례해서 일정한 가치를 가지는 재화로서 시장에 유통된다. 결국 정부가 직접 갚아야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자비용밖에 없다. 일본이 200%가 넘는 국가채무에도, 미국 역시 막대한 재정적자에도 여전히 문제없이 국채를 발행하며 정부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다. 일본이나 미국 정도면 그동안의 경제성장만으로 그만한 이자비용 정도는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그 한계가 아마 240% 남짓, 한국은 그보다 조금 부족한 200%이상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IMF는 평가하고 있다. 더구나 그 사이 경제가 그만큼 성장한다면 채무비율은 줄어들게 된다. 얼마전 국가총생산의 산정기준을 바꾼 결과 국가채무비율이 30% 중반으로 떨어진 것이 그 한 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이 그렇게 빌린 채무를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결국 정부의 재정이란 자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쓰이게 될 돈이란 것이다. 굳이 경기부양씩이나 할 필요 없이 그저 국민을 대상으로 돈을 쓰는 것만으로 시장에는 돈이 돌게 된다. 그만큼 경제는 성장하게 된다. 경제가 성장하면 당연히 세수도 늘고 채무에 대한 부담도 줄어든다. 선순환일 때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한국경제에 국가채무비율 60%가, 혹은 80%가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큰 부담인가. 그만한 돈이 시장에 풀렸을 때의 긍정적인 효과에 비해서 심각할 정도로 큰 타격을 줄 것인가. 지난 1분기 성장률이 -0.4%를 기록했을 당시 정부지출이 거의 기여하지 못했던 점을 떠올려보라. 내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정부지출이다. 정부의 재정정책은 그 자체로 이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다만 정도가 지나칠 경우 앞서 말한 인플레이션의 우려까지 있다. 하지만 지금은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로 물가까지 안정적이다.

 

자기 금고처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의 재정을 책임지는 기재부 공무원이다 보니 들어오고 나가는 돈들이 마치 자기 책임처럼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수입은 늘리고 지출은 줄여야 한다. 본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채무를 늘려서는 안된다. 지출을 지금보다 더 늘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경제에 대해 무지한 언론은 그런 전문가인 기재부 공무원들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쓴다.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에서 함께 부화뇌동한다. 논란의 이유다. 국채란 무엇이고 어떤 성격의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한국경제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인가. 얼마나 큰 위협이 될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 없이 마치 개인이 지는 빚처럼. 갚지 않으면 당장 망하는 개인간의 채무처럼. 단편적이다. 일차원적이다. 언론의 기사도 지면도 딱 그 수준이다. 그러니까 겁주고 협박하고 절대 안된다고. 그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국채란 세금 대신 여유가 되는 국민들에게 돈을 빌리는, 더 정확히 정부가 마치 은행처럼 채무라는 형식으로 시장에 남아도는 돈을 유치해서 그를 정부의 목적에 맞게 당장 필요한 곳에 쓰고자 하는 정책인 것이다. 어차피 직접 시장에서 소비에 쓰이지 않을 돈을 자본으로 시장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를 통해 세수라는 수입도 늘리는 수단인 것이다. 빚이라 하니 그냥 빚인 줄 알지만 빚이라고 다 같은 빚은 아닌 것이다. 만일 확실하게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을 보장만 있다면 오히려 돈을 빌려주는 쪽에서 사정해가며 빌려주는 경우란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심지어 외국인이 국채를 많이 사들이는 것마저 문제있다 비판하는 언론은 무엇하는 곳인가.

 

외국인들이 한국의 국채를 많이 사들인다. 이미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꺼번에 국채를 팔거나 하면 상당한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외국인들이 한국의 국채를 그토록 많이 사모으고 있는가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고약한 것이다. 도대체 국채란 무엇인지. 어떻게 발행하고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채무라면 어떤 식으로 상환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 그러는 것인지. 항상 답은 정해져 있지만. 썩을 것들이다.

내가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결국 민주주의란 주권자인 국민이 또다른 주권자인 군주를 선출하는 제도이기 쉽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대신하여 전적으로 자신을 지켜줄 절대적인 존재를 갈구하게 된다. 그것은 우두머리 원숭이를 중심으로 무리지음으로써 맹수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야 했던 아주 오랜 본능의 흔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회자되는 말이 있다.

 

"그분이 다 해 주실 거야."

 

선거때마다 새인물을 통한 새바람이 부는 이유인 것이다. 이미 검증된 정치인이란 그냥 인간이다. 단점도 약점도 모두 드러난 그저 자신들과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는 초월적인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있는대로 자신들의 바람과 욕망을 투사하여 우상으로 만든다. 노무현의 바람이 멈춘 것도 그래서 김영삼을 찾아가 자신이 그로부터 받은 시계를 자랑하면서부터였다. 우상은 인간의 때가 묻어서는 안된다. 초경을 시작하면 여신으로 섬겨지던 소녀들은 가차없이 버려진다. 남들과 다르기에, 오히려 기성 정치인들과 다르기에, 그래서 그 무지와 어색함마저도 선지자에 어울리는 순수함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는 질린다.

 

그러므로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라면 자신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아서 다 이루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 문제 없이, 어떤 논란도 혼란도 없이, 누구도 양보하거나 희생할 필요 없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유권자들은 보수적이면서 한 편으로 진보적이다. 개혁을 바라지만 안정을 바란다. 안정을 바라지만 개혁을 바란다. 전대통령이 말한 증세없는 복지와 같은 것이다. 변화는 바라지만 그로 인한 혼란이나 부작용까지 감수할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위해 자신이 양보하거나 희생할 생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까지 대통령이 알아서 다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 자신들이 기껏 지지도 하고 표도 주었던 것이다. 차라리 혈통으로 계승되는 전제왕주의 군주였다면 어느 정도 포기하는 부분도 있었을 테지만 하필 자신들이 지지해서 만들어준 대통령이기에 그 바람과 요구는 끝이 없어진다.

 

최저임금과 관련한 논란만 하더라도 그렇다. 내 월급은 올라야 한다. 당연히 내 월급은 내가 일한 만큼, 내가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오르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상이 시끄럽다. 경제가 안 좋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 월급만 올리고 다른 사람들 월급은 올리지 말라. 내 월급을 올려주는 최저임금인상은 지지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최저임금인상은 안된다. 그래서 나오는 논리가 속도조절론이다. 그러면 얼마를 올리면 최저임금인상으로 인한 부작용이 사라질까. 그러면 부작용이 없을 만큼 최저임금을 적게 올리면 불만은 사라질 것인가. 물론 그런 것들까지 모두 감수해야 하는 것이 정치인이라는 직업일 것이다. 대통령이란 그런 부당한 요구에도 모두 응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이미 법으로 남성 직장인들의 육아휴직도 상당부분 보장하고 있는 중이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지원하며 공공부문을 시작으로 사기업까지 그 적용범위가 확대되는 중이다. 물론 시작은 어렵다. 남들 다 안 쓰는데 혼자서 쓰겠다고 나서기가 꺼려지기도 한다. 그래도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육아휴직을 쓰게 될 경우 혹시 모를 불이익이나 손해를 감수하기 싫다. 혹은 다른 사람이 육아휴직을 씀으로 인해 겪게 될 불편함과 불리함을 받아들이기 싫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권장하는 남성의 육아휴직은 현실을 모르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아예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면 모른다. 벌써 많은 곳에서 그렇게 바뀌어가고 있는데 자신들만 스스로가 만든 한계 안에 갇힌 채 정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재정을 늘리거나 하면 그마저도 반대한다. 혹시라도 내가 세금을 더 내게 되지 않을까. 혹시라도 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될까봐. 그래서 불평불만 뿐이다. 증세하지 않고 복지만 늘리라. 복지는 늘리지 말고 사회안전망부터 갖추라. 고용을 늘리기 위해 기업이 해고를 손쉽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 자영업자들을 위해서 대기업의 규제를 풀어달라. 개혁은 해야 하지만 안정적이어야 한다. 지금 이대로 가면서 세상은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임금에 대한 태도와 같은 것이다. 내수도 더 커져야 하고 노동자의 임금도 올라야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치러야 할 비용까지 올라서는 안된다. 그들이 무당층인 이유다. 정치혐오층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상은 너무 높고 현실은 절대 그 이상을 채워 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분노로 투표한다. 분노보다는 증오와 공포로 투표한다. 그래서 대부분 안된다는 말 뿐이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그렇기 때문에 무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타락해 있다.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부터 현실과 유리되어 있으니. 그를 위해서 어디까지 희생하고 어디까지 양보하며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를 위해서 어디까지 자신은 비용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 모두를 다 가질 수는 없다. 여성들을 비판할 때 하는 말이다. 결혼 할 것 다하고, 아이 낳을 것 다 낳고, 기르기까지 하면서 남성과 경쟁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남성도 그렇게 되기까지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비용을 얼마나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나 논의 없이 그저 부정만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벌써부터 누군가를 시작으로 육아휴직이 일상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실제 그런 직장들에 대한 사례들을 들으면서도. 그러나 남의 일이다. 그들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안 될 것이다. 자신들은 되어서 안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 비용도 치르지 않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사회로 만들고 싶다. 그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다. 그런 바람마저 부정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현실과 다르다. 자신들이 만든 자신들의 현실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며 그 어떤 주장도 제안도 거부한 채 모든 것을 바란다. 과연 민주주의 시민의 모습인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먼저 움직이지 않는데 정부와 정치권이 어디까지 앞서갈 수 있을까.

 

여성들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출산휴가며 육아휴직을 쓰는 것마저 부정적이다. 심지어 그를 이유로 기업이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역차별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육아휴직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사고의 틀이다.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고 불이익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신념에는 현실같은 건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어디 얼마나 하는지 두고보자. 답이 없는 것이다. 이미 답은 내려져 있고 결론도 나와 있다. 이유는 그냥 뒤에 따라붙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부인이 현실을 모른다. 현실을 외면한 말을 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주장하는 현실이야 말로 자신들이 만든 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누군가 먼저 한 걸음을 내딛고 뒤따라 그것이 상식이 되어 버린 회사들이 있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가는 현실 또한 존재한다. 그러면 그들은 과연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그런 불편이나 불이익을 전혀 생각지 않았던 것일까.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로 인해 현실 또한 바뀌어 간다. 의미가 없다. 그냥 한심하다.

사실 나도 어렸을 적 책을 많이 읽는 것에 대해 부모님의 우려가 상당히 컸었다. 학교공부만 잘하면 된다.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학교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고보면 동아시아 문명이 어느 순간 서양문명에 추월당한 이유일 것이다. 공부가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출세에 도움이 되는 유교경전 이외의 공부란 존재할 수 없었다. 잡학이라 여겨졌고 방술이나 좌도로 불리기도 했었다.

 

아마 얼마전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한줄 영화평이 여러 커뮤니티에서 꽤나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명징과 직조라는 표현이 너무 어렵다.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단어를 쓴 것은 지적허영이며 대중과 유리되어 있으므로 잘못된 평론이다. 하지만 과연 이 두 단어가 그렇게 어렵고 쉽게 보기 힘든 단어들인가. 그런데 정작 그다지 유식하지 않은 나 역시 가끔 글을 쓰며 저 단어들을 쓰고는 했었다는 것이다. 굳이 사전 끼고 일일이 찾아볼 필요조차 없이 포털에서 검색만 하면 바로 단어의 뜻을 알 수 있을 텐데도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부정부터 하고 본다.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 굳이 그런 것들을 알려 해서도 안된다. 당장 사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최근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의 말버릇 하나가 여러 미디어 등을 통해 화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모른다. 몰랐다.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전혀 난처하거나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이 당당하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아니 당연하지는 않아도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모를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모른 채 산다고 크게 아쉽거나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사법고시에도 합격했고 검사까지 될 수 있었다. 공안검사로서도 꽤나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출세와 관계되지 않은 것들은 굳이 알거나 알려 할 필요도 없다. 지극히 한국적인 실용주의의 모습일까.

 

원숭이와 인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라 한다. 자연상태에서 미지의 상대란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굳이 알려 살 필요도 없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해서도 안된다. 이미 익숙하게 아는 대상만이 안전하고 마음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동물들은 새끼때가 지나면 더이상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내보이지 않는다. 원숭이도 다르지 않다. 인간과 가장 닮았다는 유인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인간만이,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인 인간만이 끊임없이 위험을 무릅써가며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래서 산넘고 바다건너 심지어 빙하까지 가로지르며 인간은 거의 지구위의 모든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탐구열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를 통해 인간은 본능을 거스르며 불을 소유할 수 있었고, 수많은 도구를 만들고, 자신이 속한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인류의 수많은 위대한 발견과 발명들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굳이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통나무배 하나에 의지해 바다로 나서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메마른 사막을 가로지르며,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필요없으니까. 괜히 위험하고 성가시고 번거롭기만 하니까.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동아시아 사회는 그래서 활력을 잃고 어느새 정체되기 시작했다.

 

공부란 단지 출세를 위한 수단이다. 자기가 사회생활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만큼만 공부하면 된다. 아니 굳이 공부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시험문제를 빼돌리고, 뒤에서 담합과 부정을 저지르고, 어찌되었거나 결과만 같으면 공부같은 건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들이 대학에만 진학하면 아예 책을 손에서 놓기 일쑤다. 대학에서도 전공공부보다는 취직에 도움이 되는 공부에 더 열심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필요치 않는 것들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것은 낭비다.

 

무지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전혀 당황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는 행위가 부당한 것이다. 굳이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고 지적하는 행위야 말로 잘못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드는 여론들을 곧잘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알려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아는 한계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관성만으로 자기들끼리 떠들며 대세를 만든다. 당장 몇 년 전 타진요 사태만 해도 조금만 찾아보면 너무나 명확한 것을 그저 자기들끼리 자기들만 아는 근거와 논리만으로 검증하려다가 개망신당한 것 아니던가. 그럼에도 자기들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또 변명하고 위로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다.

 

엘리트라는 것이다. 그래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 1야당의 대표에 유력한 대통령후보로까지 꼽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마저 무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내대표인 나경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우겨대면 사람들이 알아서 넘어가 줄 것이다. 판사출신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그동안 추구해 온 엘리트들의 민낯이 이런 것이다. 양승태와 우병우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일까. 그와 똑같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증오하고 적대하며 알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마저 포기하는 수많은 익명의 네티즌처럼. 유력대선후보를 통해 한국사회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무지는 당연히 부끄러운 것이다. 무지란 명사가 아닌 동사다. 알지 못하는 자체가 아닌 앞으로도 알려 하지 않는 행위 자체를 뜻한다. 예전과 다르다. 책도 귀하고 배울 곳도 드물었던 전근대사회와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냥 인터넷에서 잠시 검색만 해도 대부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자칭 네티즌이라는 것들마저. 인터넷에 기생하는 그들마저. 그리고 유력대선후보가 모른다는 말을 당연하게 하고 있다. 그냥 현상인 것이다. 괜히 내가 낯뜨거운 현실이다.

원래 벽이란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기에 아주 작은 틈 하나 때문에도 얼마든지 허물어질 수 있다. 둑이 무너지는 이유고 성벽이 주저앉는 이유다. 문제는 벽이란 또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내부를 분리하는 구조물이란 것이다. 그렇게 벽이 허물어졌을 때 그로부터 지켜지던 안은 어떻게 될까? 둑이 무너지고 성벽이 사라진다.

 

그래서 중국은 수 십 년 전 천안문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청년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진압했던 것이었다. 아마 덩샤오핑이 말했을 것이다. 피해는 최소화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야 한다. 다시는 중국의 인민들이 그처럼 일어나지 못하도록. 감히 공산당 정부에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아니면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억압적 체제는 바로 그 중국의 인민들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지금껏 지탱해 온 체제였다. 반체제인사들을 잡아가두고, 심지어 고문하고, 처형하며,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겨우 유지하고 있던 체제였다. 그를 위해서 인터넷까지 통제하며 막대한 재정을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는데 쏟아붓고 있는 중이다. 중국 밖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경제적 풍요로 중국의 인민들을 길들인다. 그렇게 위험한 수준까지 부채를 늘린 상황에서도 다시 미중무역전쟁으로 경기가 안좋아지자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하려 시도한다. 아니면 공산당 일당독재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홍콩에서 반중국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중국의 일방적인 지배에 반대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겠는가.

 

천안문사태 당시와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는 미국도 유럽도 중국에 바라는 것이 있었다.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어찌되었든 중국공산당이 하는대로 가만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전쟁중이다. 미국이 총대를 메고 나선 상황에 유럽 국가들이 신중하게 관망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편을 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중국과 손을 잡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중국이 자칫 홍콩에서 유럽국가들의 시민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을 보이게 된다. 중국을 굴복시키는 것은 유럽국가들 입장에서도 리스크는 크지만 그렇다고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닌 것이다. 그동안 중국의 불공정한 행태에 가장 크게 피해입은 곳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럽의 기업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명분이 부족하기에 그만한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할 결심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중국이 빌미를 주고 유럽국가들의 시민사회가 움직이면 유럽국가들 입장에서도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홍콩시위가 중국정부 입장에서 무척이나 곤란한 일방적 외통수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미국이 괜히 한 마디 거들고 나서는 이유인 것이다. 유럽 정부들도 은근슬쩍 숟갈을 올리려 하고 있다. 어디 한 번 천안문사태 때처럼 해보라. 그때처럼 힘으로 진압해 보라.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결국 중국공산당 정부는 그 지배력에 한계를 보이는 것이 되고 홍콩시위는 중국 내부까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인민들이 그저 중국공산당의 지배가 마음에 들어서 참고 숨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어차피 될 리도 없고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에 아닌 척 자신을 억누른 채 순응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런데 홍콩에서 중국공산당도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된다. 더이상 중국공산당이 과거처럼 잔인해질 수 없게 된 상황을 알게 된다. 어떻게 되겠는가.

 

잔인하게 힘으로 진압할수도, 그렇다고 자칫 중국 내부로 확산되도록 손놓고 지켜만 볼 수도 없다. 전자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손잡고 자신들에 대항할 빌미를 줄 것이고, 후자는 자신들의 지배가 안에서부터 허물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만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미국과 타협하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항복을 선언한 뒤 미국의 용인 아래 다시 전처럼 힘으로 홍콩을 진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근본적인 대처는 못되는 것이 결국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주게 될 경우 중국의 경제에 타격은 불가피하고 그 책임마저 모두 중국공산당 - 특히 시진핑에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시진핑을 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나마 최선일 수 있을 것이다. 시진핑을 버리고 중국공산당은 적당한 양보와 타협 끝에 여전히 중국의 지배자로 살아남는다.

 

중국이 미국을 의심하는 이유인 것이다. 너무나 절묘한 순간에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어떻게 손을 쓰기에는 상황이 너무 공교롭다. 아마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 특히 시진핑으로서는 지금 상황을 불러일으킨 캐리 람을 어떻게든 잡아들여 책임을 묻고 싶지 않을까. 미국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다. 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도. 항상 전쟁과 침략은 자본에게 기회가 되어 준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누는 전리품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다. 중국정부의 불공정한 규제 없는 중국시장이란 유럽 기업들 입장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켜볼 일이다. 시진핑이 과연 G20에 참석해서 트럼프와 담판을 지을지. 트럼프에게 항복을 선언한다면 자칫 홍콩에서 천안문이 재현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다고 끝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어느 쪽이든 곤란할 것이다. 일당독재의 함정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오래 갈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중국을 너무 사랑하는 모양이다.

아마 2016년까지 당시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면 한국은 중국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중국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한국상품이 중국에서 팔리고 있었고 덕분에 지금도 중국은 미국을 넘어 한국에게 가장 큰 교역상대이자 무역흑자국이다. 하지만 사드보복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가장 직격타를 맞은 것은 롯데지만 롯데 말고도 많은 한국기업들이 이후 중국시장에서 고전하며 이미 철수했거나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중이다. 더이상 중국시장에 미련을 가질 필요 없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나서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은 그런 일환이다.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중국은 믿을 수 없다. 언제고 중국과 미국이 충돌하게 되면 다시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안에 더이상 중국에 우호적인 여론이 발붙일 여지가 사라지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에 대한 입장은 여와 야가,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중국에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중국과 더 가깝게 지내야 한다. 미국보다 중국과의 관계를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마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LG가 화웨이 장비를 도입한다는 사실만으로 지금까지 온라인에서 거의 일방적인 비난을 듣고 있다. 이전에도 화웨이 장비는 국내에서 적잖이 쓰이고 있었음에도 새삼 5G장비를 화웨이 것으로 쓴다는 사실에 비난이 폭주한다. 그런 상황에 과연 한국정부는 중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미중무역전쟁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국에 비해 우위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무엇보다 미국이 더 많은 중국의 상품들을 수입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에 상품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의 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고 수입을 금지했을 때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중국일 수밖에 없다. 원래 장사를 할 때는 사는 사람이 갑이 되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적용해 보자. 그동안 한국 정부가 중국에 대해 약세를 보였던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시장이 더이상 한국 기업이 노려볼 시장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면 더이상 중국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상황을 중국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삼성의 스마트폰을 배제한 결과 삼성은 아예 스마트폰 공장을 베트남으로 인도로 옮겨 버렸다. 현대도 기아도 공장을 폐쇄했다. 그러면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더이상 무엇으로 중국은 한국정부에 큰소리를 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둘 한국기업이 빠져나가고 더이상 중국이라는 시장이 한국 기업들에 매력적으로 비쳐지지 않게 된다면 한국정부도 더이상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 기업들의 제품을 제재했을 때 중국기업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소비재는 더이상 팔리지 않고 중간재만이 중국기업들을 상대로 주로 수출되고 있다. 그같은 상황이 가속되고 있다.

 

지금이 청나라 시대라 착각한 모양이다. 물론 그동안 단 한 번도 한국은 전체 경제규모에서 중국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이미 많은 분야에서 기술력이나 자본에서 한국기업들을 따라잡고 있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아직 중국이 한국을 완전히 앞서가게 된 것도 아니다. 미국에 대해서도 성급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도 성급했다. 이만하면 굴복하겠거니.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굳이 홀대를 감수하면서까지 낮은 자세로 먼저 손을 내밀었음에도 스스로 외면함으로써 더이상 여지를 없애 버리고 말았다. 아직까지 한국은 쉽게 중국에 굴복할만큼 약한 상대가 아니다. 더구나 한국의 뒤에는 미국도 있고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일본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미국에 우호적인 나라가 또한 한국이기도 하다.

 

안타깝다면 조금만 시간의 여유가 주어졌다면 오히려 단호하게 미국의 편에서 중국을 압박하는데 힘을 보탤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국의 사드보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고 한국기업들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자유무역이라는 말 자체가 중국 정부에게서 나온 순간 형용모순이 되고 마는 상황인 것이다. 공정하지도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하긴 한창 중국붐이 이는 와중에도 중국 관계자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중국을 믿지 말라. 중국 당국을 믿지 말라. 그리고 노골적으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깨달음은 크다. 교훈을 뼈에 새겼다. 더이상 중국을 믿지 않으며 중국에 기대지도 않는다. 신남방정책은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중국은 친구가 아니다. 될 수도 없다.

 

확실히 중국은 크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전처럼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절실한가.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오히려 중국을 두드리는 미국을 응원한다. 여전히 정신을 못차린 몇몇을 제외하고 다수는 이미 중국에 적대적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사나운 적을 만든다. 외교든 어디서든 절대 해서는 안되는 짓거리다. 중국정부의 수준이다.

아주 오래전 친노사이트 서프라이즈에서 잠시 어울리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모아 놓으면 극단으로 치닫기 쉽다. 그런 극단들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커뮤니티는 분열되고 더 극단적인 주장들만 남게 된다. 내가 인터넷 여론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된 이유다. 대부분 사람들은 분위기에 취해서 자기 생각인지 판단인지도 헷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세가 여론을 만든다.

 

요즘 자유한국당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일단 넓은 곳으로 나가 다양한 사람과 만나고 대화도 나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 더 다양한 의견들도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너무 번거롭고 피곤하기만 하다. 괜히 싫은 소리라도 듣게 되면 기분만 상하게 된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단 잘한다 칭찬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깨에 힘도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더 듣기 좋은 말, 듣고 싶은 말만 찾아듣게 되고 사고도 그리로 치우치게 된다.

 

처음에는 사소했던 것이 더 칭찬받기 위해서, 더 인정받기 위해서,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눈에 띄기 위해서 더 극단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이 극단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 있으니. 자기들끼리 논리를 만들고 자기들끼리 그 논리를 정당화한다. 그를 또 검증해준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옳다. 자신들은 아무 문제도 없다. 그래서 골방놀이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좁은 커뮤니티에 갇히는 걸 무지 싫어한다.

 

개인이면 상관없는 것이다. 아무 공적 책임 없는 개인이 그저 자기 좋다고 그리 하는 것이면 오로지 자신의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위치에 있다면 더욱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란 중개다. 그리고 중재다. 자신들을 편드는 특정 사람들을 위해서만 정치를 하겠다. 공존을 배제하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만다. 대한민국 제 1야당이란 것이다. 그냥 유튜브나 하라. 딱 어울린다.

아마 며칠 전부터 매일경제에서 무려 1면에 경제관료들이 겪는 어려움 같은 것들을 연속해서 기사로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정부의 정책과 관련한 기사나 커뮤니티의 댓글 가운데 유능한 관료와 무능한 정치인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의 댓글들이 적잖이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유능한 공무원들이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무슨 뜻일까?

결국은 국가채무비율 논란의 연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유능하다. 특히 경제관료들은 이 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경제관료들이 주장하는 것이면 당연히 옳다. 그런 경제관료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꺾으려 하는 정치인들은 무능하다. 그러므로 국채비율을 늘려서는 안된다. 재정을 확대해서는 안된다.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하자는 대로 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것은 대통령과 정치인들로 이루어진 그 보좌진, 그리고 장관들의 무능으로 생긴 일이므로 경제관료들이 책임지고 그를 막아서서 해결해야만 한다.

한 마디로 경제관료들의 항명을 독려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민주정부에 맞섰던 군부도 검찰도 심지어 사법부마저 그 민낯이 드러난 상황에 이제 믿을 것은 공무원들 뿐이다. 그것도 고위직에 있는 경제부처 공무원들 뿐이다. 이들이야 말로 지난 수 십 년 간 보수정부와 이해를 함께 해 온 이들인 것이다. 보수정부 아래에서 보수적인 경제논리에 길들여진, 그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집단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청와대가 의도한 대로 경제정책이 돌아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지하고 보이지 않게는 훼방놓아 실패토록 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과연 경제관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능하기만 한가. 실무적으로는 유능할 지 모르겠다.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만한 이론적 토대 위에 실무적인 경험을 모두 갖추고서야 비로소 그만한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대부분의 국가와 사회가 아래로부터 무너지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들 고위공직자들의 관행과 관성인 것이다. 그래서 관료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대로 익숙한 방식만을 고수하려 고집한다. 사회는 이미 누적된 모순들로 인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데 그 길목에 선 관료들이 그를 막아서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경제관료들이 주장한대로 해서 한국 경제가 잘 돌아가고 있었는가. 당장 많은 기업들이 가장 불만을 말하는 대상이 누구이던가.

군인들이 잘 싸운다고 그들에게만 싸움을 맡겨서는 안되는 것은 전쟁이란 그저 싸워서 이기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싸워도 보급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다. 보급이 생산량의 한계를 넘어서면 싸움에서 이겨도 사회는 붕괴하는 것이다. 이겨서 안되는 상대와 싸워 이기는 것도 결국에 국가전략에 해를 가져온다. 과연 몽골의 침입 이후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던 무신들의 말을 쫓았다면 고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수 십 년을 전란에 시달려야 했던 백성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그같은 결사항전의 주장에 무신들 자신들의 사적인 이유는 없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이전에 하던대로 계속 하자는 주장에는 단지 편리하고픈 자신들의 사정이나 욕심 같은 것은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인가.

하긴 기자들도 그쪽이 더 편하기는 할 것이다. 생소한 다른 무언가가 도입되면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고 이해도 해야 하니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니다. 가만 사무실에 앉아서도 쓸 수 있는 기사를 발로 뛰어 취재도 해야 하고, 쓰던대로 관성으로 쓰던 기사도 새롭게 공부해가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도 새로운 정책이 나오면 그냥 관성으로 비판부터 쏟아내고는 했었다. 장관은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질의를 통해 들려주었다는데 나온 기사는 그냥 하던 그대로의 비판기사가 전부였었다.  다른 의도가 있다기보다 언론 자체가 권력이 되어 가며 기자들 자신도 관료를 닮아 버린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당장 어떤 문제가 있고, 앞으로 어떤 더 큰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든 관료들이 지키고자 하는 관성과 관행들이 자신들과 더 가깝다.

물론 그나마 가장 호의적인 해석이고 더 본질은 늘어나기 시작한 댓글의 경향과 더 관계가 있지 않을까. 정부는 무능하다. 청와대와 장관들은 정치인이기에 무능하다. 관료들은 유능하다. 그러므로 관료들의 뜻을 따르라. 과거 검찰이 그랬던 것처럼. 사법부가 그랬던 것처럼. 언론이 그랬었던 것처럼. 관료들이야 말로 저들의 마지막 보루일까. 그러므로 관료들을 앞세워 청와대의 앞을 막고 마침내는 주저앉히겠다. 그 일단에 신재민이 있고 김태우가 있고 얼마전 외교부의 참사관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민주정부를 망칠 마지막 고리는 공무원이다. 그것도 고시출신의 고위공무원들이다.

최배근 교수의 우려가 옳은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예상한 바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 당시와 노무현 정부 당시 공무워들이, 특히 고위공무원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모르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정부의 앞을 막고 개혁정책들을 좌절시켰는가. 정치적 중립이란 보수정부를 기준으로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지령이 내려졌다. 과연 관료집단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보여줄 것인가. 욕부터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수 십 년 보수정권의 폐해가 도대체 어디까지 미치는 것인지. 그래도 믿는 수밖에. 문재인은 노무현과는 다르다. 단 하나 희망이다. 뭣같은 상황이다.

그토록 보수언론이 한 목소리로 찬양하던 일본마저 지난 4월 무역수지가 90%나 감소하고 있었다. 여전히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는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역시 중국에 대한 수출이 부진한 탓에 흑자폭이 줄어든 것이다.

 

비단 올 4월만이 아니다. 작년에도 무역수지는 적자였고, 지난 5월 상순 무역수지도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현재 가장 큰 수출국가이면서 가장 큰 수입국가인 중국의 경기가 미중무역전쟁의 여파로 하강하면서 바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출로 먹고 사는 독일도 작년부터 올해까지 계속 경기가 안 좋았다. 모든 언론이 나서서 지난 1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라고 난리를 치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지난 4분기 성장률이 1%에 이른 기저효과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작년 3분기 성장률이 0.6%였는데 일본 독일과 비교하면 각각 작년 3분기와 4분기 -0.7%, -0.2%와 0.3%, 0%를 기록한 위에 올 1분기 각각 0.6%와 0.4%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기저효과로 작년 성장률이 안좋았던 결과 그만큼 더 많이 성장한 것처럼 보인 것이고 반대로 한국의 경우는 작년 하반기 성장률이 높았던 탓에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낮게 나오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아니 사실 오해할 것도 없다. 성장률이라는 자체가 상대적인 것이다. 기존에 성장한 위에 새롭게 성장한 만큼을 비율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전분기에 성장률이 낮았다면 다음 분기에는 실적이 조금 낮아도 성장률은 높아질 수 있다. 반대로 전분기 성장률이 높았다면 그만큼 실적이 어지간히 좋아지지 않으면 성장률이 그만큼 높아지기가 힘들다. 그래서 경제규모가 일정 이상 되면 전처럼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저 중국마저 성장률은 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중이다. 전년 3, 4분기에 각각 0.6%와 1.0%로 일본과 독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기에 그만큼 1분기에는 상대적으로 수치가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절대 이전 한국의 성장률이 훨씬 높았던 분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미중무역전쟁의 여파로 국제무역이 줄고 있다.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이 제품을 생산해서 팔기 위해서는 그만큼 세계로부터 필요한 부품과 자원들을 수입해야 하는데 미국의 제재로 인해 수출길이 막히면서 내수까지 하강하기 시작한 탓이다. 세계시장에 제품을 내다파는 만큼이나 막대한 양을 사들이던 중국의 사정이 안좋아지면서 중국에 수출하던 나라들의 사정까지 덩달아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가장 먼저 독일과 일본이 직격탄을 맞고 뒤늦게 한국까지 그 대열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반도체 수출로 버티다가 반도체 가격까지 하락하며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그렇지 않아도 높은 한국마저 그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수지나 경제지 모두 그런 국제경제의 사정따위 아랑곳 없이 오로지 최저임금을 올린 탓이다. 주당근로시간을 줄인 탓이다. 그래서 묻는다. 국제무역이 지금처럼 침체되고 물건을 만들어도 해외에 내다 팔 방법이 없을 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보수지나 경제지들은 말한다. 보수정치인과 지식인들도 그리 주장한다. 규제를 철폐하라. 최저임금 낮추고, 근로시간 늘리고, 그리고 기업을 옭죄는 규제부터 철폐하라. 그래서 과연 규제만 풀면 안되던 수출이 늘어나는가. 당장 수입할 사정이 안되는 중국이 그 규제들만 풀리면 더 많은 우리 제품을 사들이게 될 것인가. 그래서 어떤 분야에서 어떤 규제들을 풀어주면 최저임금 낮추고 근로시간 늘려줘도 국민들의 삶까지 비약적으로 좋아질 수 있게 될까. 물론 그에 대한 어떤 대안도 제시해주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토록 규제완화를 외치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도 경제가 한 번에 좋아지는 규제철폐나 완화같은 건 한 번도 해보지 못했었다. 그런 것이 있었으면 벌써 지난 정부들에서 써먹었을 것이다. 아니겠는가. 그냥 정부를 비판하면서 내세울 대안이 없으니 습관처럼 떠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규제개혁은 벌써 IMF 당시부터 반복해서 읊어대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그토록 보수지와 경제지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보수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일본의 사정을 살펴보자. 국민의 소득이 줄고 있다. 거시경제가 아닌 국민의 실질수입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지난 수십년 전보다 노동자의 수입이 줄어들며 소비도 줄고 일본이 자랑하던 저축률까지 0%까지 떨어진 상태다. 그래서 일본이 자랑하던 내수시장마저 수입이 줄어들어 무역흑자가 유지되는 악순환을 이어가는 중이다. 아베도 그래서 몇 번이나 기업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높여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노동자의 실질 소득이 늘어야 소비도 늘고 일본의 경제도 다시 성장할 동력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완전고용에 오히려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하는 기업이 생겨나는 상황에서도 노동자의 임금은 정체, 심지어 감소 중이다. 그럼 일본의 경제에는 미래가 있을 것인가.

 

인플레이션은 나쁜 것이 아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그만큼 시장에 유통되는 화폐의 양도 늘어나고 그만큼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며 물가도 올라가게 된다. 한 마디로 그만큼 화폐를 구하기가 쉬워진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쌀 한 가마로 겨우 교환할 수 있었던 돈을 이제는 쌀 한 말이면 남겨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화폐를 재화의 하나로 간주해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래서 역시 일본 정부도 그동안 부단히 일본의 정체된 물가를 올리려 애써 왔었다. 올 초 물가가 너무 안 오르니 여러 경제지들에서도 디플레이션은 아닌가 우려하는 - 그보다는 신난 듯한 -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러면 그 인플레이션을 무엇이 주도해야 하는가. 기업의 생산인가. 아니면 개인의 소비인가. 지금 중국도 그동안의 경제성장의 결과로 인건비가 오르며 기업들이 견디지 못하고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진짜 대안없이 떠들어대고 있는 중이다. 기껏 대안이라는 것이 IMF 이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떠들어대던 이야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규제를 풀라. 시장에 맡기라. 그래서 지난 9년 간 보수정부 아래에서 그렇게 해 왔었다.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그보다 과연 지금 경제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 무엇이 한국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가. 사이비무당이 조상탓 무덤탓 전생탓 하듯 입만 열면 그저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대안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도 떠들던 그것 말고 새로운 방법들이다. 그래서 지금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치 최저임금 낮추고 근로시간만 늘리고 기업들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것인가. 그래서 그들이 모범으로 삼는 지금 일본의 경제상황이 어떠한가. -0.4%로 이 난리들인데 무려 -0.7%다. 그나마도 작년 1분기에도 -0.2% 이후 겨우 0.6%성장했다가 -0.7%로 고꾸라진 것이다.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습게도 그토록 세계경제가 좋다던 보수지나 경제지의 지면에는 이런 진짜 해외의 뉴스들은 아예 보도조차 안되고 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독일과 일본의 경제가 어땠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보도를 찾아보기가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세계의 경제는 좋은데 우리나라 경제만 안 좋다. 특히 우리처럼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들의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어쩔 수 없이 언론을 통해서만 경제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개인들은 현혹될 수밖에 없다. 진짜 무엇이 문제이고 그 대안은 무엇인가.

 

사실 경제뉴스에 대해서만큼은 뉴스룸도 신뢰하지 않고 있다. 뉴스룸 기자들이 거의 중앙일보 출신들이다. 전문성도 없는데다 논조도 거의 중앙일보와 비슷하다. 사회정의는 알지만 경제정의는 알지 못한다. 경제현실은 더욱 알지 못한다. 참 답답한 것이다. 덕분에 시간 날 때마다 여기저기 경제뉴스 찾아다니느라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우리도 일본처럼 하자. 우리 대통령도 아베처럼 해야 한다. 일본을 보라. 일본을 배우자. 그래서 어떠한가. 하찮은 것이다. 저런 것들이 자칭 전문가들이다. 웃어야 하는 것인가. 이른 아침부터. 잠까지 설쳤는데. 

1인칭이면 공포고 2인칭이면 비극이고 3인칭이면 희극이다. 아, 내가 만든 말이다. 내가 코미디를 잘 보지 못하는 이유다. 지나치게 이입해 버리는 탓이다. 한참 이입하다 보면 이게 코미디인지 공포물인지. 당장 대표적인 바보캐릭터인 영구와 맹구가 나 자신이라 생각해 보라. 혹은 내 가족이다. 웃을 수 있을까? 자 자신이 그러고 있고 혹은 가족이 그리하고 있는데 마치 남의 일처럼 마냥 웃고 있을 수만 있을까?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을 보며 웃을 수 있는 것도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실수로 가방에서 돈이 빠져나와 허공에 뿌려진다면 자신이나 주변의 일이 아닐 때 신기하게 여기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이나 혹은 가까운 누군가가 넘어졌는데도 오히려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큰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크게 넘어지지도 않았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돈은 날아가는데 기껏 천 원 짜리 몇 장이다. 한 수 억 버는 사람이라면 만 원 짜리 몇 장 정도는 그냥 웃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특정한 대상에 대해 마음껏 조롱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은 결국 내 일이 아니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도 한 나라의 정치인이다. 무려 원내 1야당의 대변인이다.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에 자신도 국회의원이 되었을 것이고, 그런 국민의 지지가 모여서 당도 국회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야당으로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국민의 뜻과 이익을 대변하라고 굳이 투표까지 해가며 그들을 그리로 보냈을 터였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의 일이 남의 일인가? 국가의 일이 상관없는 남의 일이기만 할 것인가? 나라 경제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데 웃을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 정치인일까? 아니 심지어 상관없는 남의 나라라 할지라도 책임있는 정치인이라면 쉽게 비웃거나 조롱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외여건의 악화로 하방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 한 사람만 신난 것 같다.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한 편으로 솔직한 사람이다. 정치인을 하기에는 너무 순진하다. 정치인이야 말로 진정한 사이코패스여야 한다. 슬프지 않아도 학습으로 슬퍼해야 하는 것을 알고, 아프지 않아도 경험으로 아파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계산과 훈련을 통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일도 필요하다면 누구보다 더 깊이 공감하며 앞장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남의 일이다. 내 일이 아니다. 세월호 당시도 그랬다. 당시 정부와 여당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결국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의 실언같은 발언이야 말로 정부의 여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경제가 어렵다는데 '우짤긴데?' 그게 그리 신나할 일인가? 하지만 정작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마중물로 그나마 타협해서 내놓은 추경조차 통과시키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것이 자유한국당인 것이다.

 

당장 언론을 봐도 알 수 있다. 미중무역전쟁도 신나고, 그 와중에 서로 경쟁하듯 한국정부와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도 신나고, 덕분에 한국경제가 더 어려워지는 것도 신난다. 가만 보수지나 경제지를 읽어 보면 논조라는 것이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그것 보라며 통쾌해하는 듯한 표현이나 수사들이 더 많이 눈에 뜨인다. 나라 경제가 망해도 현정부만 무너뜨릴 수 있으면. 현정부만 곤란케 할 수 있으면. 노동문제에서 조금 후퇴하더라도 현정부에게 상처만 입힐 수 있기를 바라는 진보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와 자신을 분리하면서 정작 정부가 맡은 책임과 자신까지 분리하고 만다. 정부가 맡은 국정에 대한 책임에 대해 자신을 분리하는 사이 국가와도 자신을 분리하게 된다. 그게 바로 이 나라 보수의 민낯인 것이다. 내가 정권을 잡지 못하면 이 나라따위 망해도 상관없다. 물론 자신들이 정권을 잡아도 그다지 크게 신경쓰는 것 같지는 않지만.

 

민경욱 대변인의 저 발언이야 말로 그동안 꾸준히 자유한국당이 한국경제, 아니 한국이라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입장이자 태도였고 자유한국당을 지원하는 보수언론들이 주장해 온 논조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지는 않은데 저리 노골적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하다. 자유한국당도 안에서 당황하고 있지 않을까. 말은 맞는데 너무 눈치없이 솔직하다. 느끼는 사람은 새삼스럽지도 않을 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저 막말이라 여길 테고.

 

보통사람의 반응이란 나라 경제가 어렵다면 어떻게야 하나 먼저 걱정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라도 해야 할 까 고민도 해야 하는 것이다. 당장 정책을 바꾸기는 어려우니 최대한 협력해서 당장의 위기는 벗어나야겠다.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대부분 야당들도 그런 식으로 위기상황에는 전적으로 정부에 협력한다. 그것이 장차 정권을 쥐게 될 책임있는 정당으로서 당연히 보여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내 일이라 슬픈 것이다. 아픈 것이기도 하고.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하여튼 이런 게 바로 보수의 민낯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보수만이다. 그래도 문명화된 나라 가운데 아주 극단적인 부류를 제외하고 이와 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보수야당의 대표는 군인더러 국방부의 명령도 듣지 말라고 말하더니 보수경제지라는 곳은 경제관료들더러 아예 정부를 무시하라는 듯 선동한다.

청와대와 국무위원들을 얼공이라 폄하하며 늘공인 경제관료들이 그들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받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경제라면 경제관료들이 전문가일 텐데. 그동안 이 나라의 경제를 이끌어 온 것이 바로 그들일 터인데. 그런데 일방적으로 통보만 받고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키는대로만 일해야 한다. 이 얼마나 부당한 상황인가. 그러나 원래 그러라고 공무원이란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부 각부처 공무원들이란 기술자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에서 신상품을 개발할 때 일선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기술자들이 주도하는가. 아니 설사 기술자들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도 생산과 판매를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영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유능한 경영자들은 숙련된 기술자들보다 심지어 몇 천 배의 연봉도 받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경제지들도 그같은 숙련된 기술자들의 연봉이 너무 많다며 그동안도 비판해 온 것 아니던가 말이다.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많이 받는다. 아무리 숙련된 대체불가능한 기술자라도 그 역할에 비해 너무 많은 돈을 받는다. 공무원이라고 다를까?

결국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매일경제'가 말하는 얼공들인 것이다. 그러라고 선거를 치르고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을 대신할 이들을 뽑는 것이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그리고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이들이 방향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공무원들은 각자 자기의 전문분야에 따라 그를 실현할 방법을 찾고 만드는 것이다. 반드시 공무원들과 협의할 필요도 없다. 사전에 협의를 마쳐야 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하고자 하는 방향과 의지이고 그에 대한 기술적인 뒷받침이다. 그를 위해 공무원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이 부당하다. 그러고보면 올 초 한 신출내기 공무원이 국채도 자기들 동의 없이 발행했다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대통령도 청와대도 부총리도 자기들의 허락을 받고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괜한 것이었을까?

최배근 교수의 의심이 맞았다. 괜히 매일경제가 그와 같은 기사를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경제관료들 사이에서 전부터 있어 왔었다. 그를 조금 더 극대화하기 위해 보수경제지가 힘을 보탠다. 자기들이 주인이다. 자기들이 주도한다. 그렇게 경제관료들이 관성대로 정책을 펴다가 망한 사례가 바로 이웃나라에 있는데도. 그래서 그 잘난 경제관료들 덕분에 이명박근혜 당시 나라살림이 조금 나아졌던가. 그때도 이명박 박근혜 탓이다. 이번에는 문재인 탓이다. 자기들 잘못은 없다. 편리하다. 기술자로서 권리는 요구하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 상급자에게 떠넘긴다. 그런 비열함을 오히려 언론이 부추긴다.

매일경제를 언론취급 않기는 했었다. 다만 그나마 한국경제보다는 덜 촌스럽다. 더 교활하고 더 치밀하다. 그럼에도 가끔씩 이렇게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원래 매일경제를 읽는 사람들도 그런 매일경제의 성향에 동의하는 이들일 것이다. 어째서 신문이 갈수록 팔리지 않는가. 갈수록 보수의 민낯만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국가도 체계도 질서도 원칙도 규범도 깡그리 무시한 채 아예 국가전복마저 기도한다. 쿠데타 아니면 무엇인가. 기술관료더러 선출된 권력을 무시하라 한다면. 그에 반항하라 부추긴다면.

문민통제란 비단 군을 상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 자체로 또 하나 권력이 될 수 있는 행정관료들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선출된 권력에 의해 견제받고 통제되고 관리된다. 그것이 정상적인 나라다. 현대의 문명화된 국가다.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황교안이나 매일경제나. 하긴 그런 인간들이니 이명박근혜가 그리 훌륭해 보였을 것이다. 수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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