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른바 회귀물이라 불리는 장르소설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일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무엇부터 할까? 생각밖에 답은 명확했다.

"더 열심히 더 잘 놀아야겠다."

의외로 가난이라는 것도 견딜 만 하다. 내 적성과도 맞지 않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인데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고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굳이 더 열심히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는 건 없구나.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낙관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나 희망 또한 없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사람은 살 것이고 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운명론에 빠지는 모양이다. 다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면 현실의 어떤 고단함도 괴로움도 어떻게든 타협하며 넘길 수 있다.

그래서 이름붙인 것이 비관적 낙관론이다. 아마 한국인이 가지는 한과 신명이라는 이율배반적 정서도 바로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어차피 얼마의 곡식을 거두든 하늘이 정할 일이고, 기껏 곡식을 거두어 들이더라도 어느 놈이 와서 다 빼앗아 간다. 오늘만 산다. 내일따위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구한말 선교사들이 와서 보고 경악할 정도로 억척스레 먹어대고 있었다. 때되면 잔치를 열고 제사를 벌이고 그렇게 춤사위와 노랫가락 속에 현실의 시름을 잊는다.

희망이 있으면 절망 또한 따라붙기 쉽다. 기대가 있기에 실망하고 믿음이 있기에 배신감에 떤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마음다칠 일 따위 없게 된다. 그래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면 때로 날카로워지고 때로 예민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현정부와 여당에 실망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도 한 편으로 이해가 된다. 이런 정부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정책들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바란 개혁적인 여당의 모습이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터다. 그런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까. 딱 참여정부 당시 내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가졌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까 참여정부에도 열린우리당에도 지지를 보내지 못하겠다. 단 한 표도 주지 못하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회당이었었다. 지금도 남아있는가는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나는 더이상 정치에 대해 더이상 아무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문재인이 처음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내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다는 자체부터 어울리지 않는 선택인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 구성원들부터 고만고만한 것들이고,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인간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모르지 않기에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자유한국당보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그럴 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잘하면 칭찬할 마음이 생긴다. 아마 지금이라면 아이가 생겨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면서 잘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그래도 바라는 것도 있고 기대하는 것도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진 더 좋아진 세상에 대한 희망이 가시기 전이라 그런 것이다. 그래서 실망도 크고 분노도 크다. 절망은 때로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게 딱 꼰대짓이란 것일 게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그래봐야 어차피 모두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인 때문이다. 온전히 아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째서 젊은 층에서 민주당과 정부에 대한 비토가 높은가. 특히 젊은 남성 가운데 민주당과 정부에 등돌리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인가.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섰는가. 바른미래당은 자유한국당과 다르다. 최소한 드러난 이미지로 전혀 다른 정당이라 할 수 있다. 보수화된 것은 맞지만 어차피 민주당도 보수정당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선택을 과연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20대에서 가장 많이 지지하는 정당이 민주당이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젊은 층에서 가장 기대하기에 그만큼 가장 비판도 받는 정당이란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답이 없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설훈도 민주당 관계자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를 모르면 답도 없다.

정의란 누군가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도 주나라 종묘에 가서는 예를 묻는다. 무엇이 옳고 어떤 것이 바른가. 내가 왜 그토록 여성주의자를 혐오하며 비판을 쏟아내는가. 다시 한 번 저 놈들은 구제불능임을 떠올리며. 이제는 더이상 예전과 같은 혈기를 드러내지 못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니. 3,40대에서 지지율 높은 것을 자기들 잘해서라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게임하면서 순간의 선택으로 수 만 골드를 날리고 겨우 몇 천 골드의 행운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산다는 게 그렇다. 시간을 거스른다고 더 큰 야망을 가지기보다 그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늙은 모양이다. 사람이 잘아진다.


간단히 현행법에 불법으로 적시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이트가 있다. 당연히 정부로서는 그런 사이트들에 국가에 속한 구성원들이 접속하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단순히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 특정 사이트로 인해 그와 같은 불법행위들이 국내에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그런데 그를 위한 정부의 조치에 사소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불법인데도 정부가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다른 방법을 찾으라 한다.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해외에서 사이트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그들 나라에서는 합법이라는 뜻이다. 다른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운영중인 사이트들에 대해 한국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가 무엇이 있을까? 결국 그들 사이트들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면 국내에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서 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정작 반대하는 사람 가운데서 그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냥 하지 말라. 그러므로 정부가 불법사이트도 마음대로 접속할 수 있도록 풀어달라.


도박은 국내법상 불법인데 서버가 해외에 있고 해당 국가에서 합법이면 정부가 막아서는 안된다. 포르노도 불법인데 포르노가 합법인 나라에 서버를 두고 운영한다면 국민이 보든 말든 전혀 상관해서는 안된다. 아니 막아야 하고 상관해야 한다면 다소간의 개인의 권리침해는 양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정부의 행사 가운데 개인의 권리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 정부가 가진 권한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형태로 행사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비례의 원칙이란 것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과연 그를 통해 얻게 되는 공적인 이익이 침해당하는 개인의 권리에 비해 얼마나 가치를 가지는가.


개인의 통신정보는 당연히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중요한 정보이므로 타인이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 개인의 금융거래내역 역시 통계청이 동의없이 볼 수 있게 한다고 추진했다는 뉴스만으로도 난리가 날 정도로 중요한 개인정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수사에 필요하면 열람한다. 공식적으로 영장을 신청해서 공적인 집행의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사생활보호가 반드시 절대적인 헌법적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라도 내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그러니까 도박도 포르노도 모두 합법으로 풀어달라. 그리 주장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하여튼 우습다. 아니 솔직히 하는 소리들이 그냥 똥이다. 불법이다. 지금도 피해자가 수도 없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는 피해자들보다 자신의 사소한 개인정보가 더 소중하다. 그런 억울한 피해자들보다 내가 포르노를 마음껏 보고 도박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이미 훨씬 전부터 20대는 보수화되어 있었다. 다만 그 보수화는 기존의 권위주의적 보수가 아닌 자유의지주의적 보수다. 누가 어디서 죽건 말건 내 권리만 소중하며 정부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그것 말고 그들의 주장에 어떤 논리가 존재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개인의 사생활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개인정보란 것 역시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가치 같은 것이 아니다. 정부의 권한은 바로 그런 것들과 충돌하며 생성되고 조정되며 유지되어 왔다. 정히 불안하면 더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한 법과 조치들을 요구하던가. 자유한국당 정권에서 악용당할 소지가 있으니 정부와 여당을 비토하고 자유한국당을 지지하겠다. 정신분열도 이 정도면 중증이다. 웃지 않을 수 없다.

  1. 고로 2019.02.23 19:51 신고

    독재정권이 하는 검열은 민중에 대한 탄압이지만
    촛불정권이 하는 검열은 개 돼지들에 대한 계몽이라는게 촛불민주주의입니다..

최저임금인상 이후 저소득층의 소득이 18%나 줄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최저임금을 내려야지만 저소득층의 소득이 올라간다.


실제 일하면서 신문기사에 대해 그와 관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워낙 신문을 열심히 읽는 사람이라 말하는 내용도 비슷했다. 최저임금이 낮아져야지만 일자리도 많아지고 그래야 저소득층의 소득도 늘어난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면 내 월급도 깎아야 하는가?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오르기 전 2년 전 받던 월급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최저임금 안 올리고 2년 전 월급 그대로 받으면 내 소득이 늘어나는가? 그러면 내 삶이 더 나아지게 되는가? 고소득층과의 격차도 줄어드는가?


통계의 함정이다. 평균의 함정이기도 하다. 물론 최저임금인상의 영향이든 다른 이유로 인해서든 일자리를 잃은 저소득층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한 편으로 여전히 자기 일자리를 지키면서 최저임금인상으로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생활이 나아지게 된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그동안 줄곧 주장해 왔던 것이다. 한겨레, 경향, JTBC, 어차피 공중파 뉴스는 기대도 않지만 그래도 시민의 편에서 보도한다는 이들 언론들이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하나라도 제대로 들려주었다면 어땠을까? 더 좋아지고 더 나아진 사람이 있기에 정책이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통계의 함정에 빠진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최저임금 낮추면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나는가. 실제 일하며 임금을 받는 저소득 노동자들의 실제 소득이 늘어난다는 것인가. 그러면 소득격차는 줄어들까? 현실도 모르는 놈들의 숫자놀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임금을 더 높여 받고 더 많이 받고 그 만큼 더 많은 소비를 하고. 그런데 시간이 걸린다. 당장 나만 해도 최저임금 오르기 전에 비해 지금 소비가 크게 늘거나 하지 않았다. 씀씀이를 줄이는 것 만큼 갑자기 늘리는 것도 힘들다. 얼마나 돈을 더 많이 받은 만큼 사람들이 돈을 쓰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아껴야만 경제가 아니다. 아껴야지만 경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격도 없는 기자놈들이 기사를 쓴다. 그 기사 내용을 맹목적으로 믿는다. 그 말이 맞다. 기자놈들이 한국경제를 망친다. 쓰레기들이다.

  1. 고로 2019.02.23 19:48 신고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백년넘게 연구해 증명해낸... 최저임금을 올리면 일자리가 줄어들어 사회의 전체후생이 감소한다는 경제학원리는 적폐이론이니 촛불정신으로 불태웁시다!!!

솔직히 설훈 의원이 아주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공교육을 통해 제대로 민주주의와 인권, 무엇보다 공동체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다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그것이 비단 이명박근혜만의 문제였는가 하는 것이다.


공교육의 문제란 바로 그런 부분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로지 대학입학만을 목표로 모든 교육이 이루어지다 보니 정작 공동체를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들은 쉽게 배제되고 만다. 대학입시에 더 중요한 것들만 집중해서 가르치면서 정작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다양한 것들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젊은 세대의 정의감은 매우 막연하고 무모하고 그래서 때로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당장 지금 민주당 내 여성주의자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공동체가 없는 오로지 여성만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다.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벌써 80년대에도 국영수 이외의 다른 과목들은 쉽게 무시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예 학교에서 예체능 수업이나 학력고사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의 수업은 국영수를 비롯한 중요과목들의 보충수업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을 공산주의이고,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천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때려잡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가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선배들이 쉽게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선명한 이데올로기 서적을 읽고 배운 그들의 민주주의는 온건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동안은 달랐을까? 다른 것 없었다. 단지 군사독재라는, 그 군사독재의 후신이라는, 권위주의라는 적이 존재하고 있을 뿐.


말 그대로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 그 후신이야 말로 그들의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에 반하는 권위주의 정부와 정당, 정치인들에 반대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드러난 것이 바로 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의 분열이었다. 오만 놈들이 다 모여 있었다. 차라리 한나라당이 더 어울리겠는 놈들부터 그보다 몇 걸음 더 나간 듯한 인간들까지 모두 모여서 한 목소리로 노무현 지지를 외치며 민주주의와 개혁을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분열했다. 원래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집단이었던 때문이다. 당시 내가 민주화따위 하지 않아도 좋았겠다 생각하게 된 계기도 어느 젊은 노빠 대학생이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 따위 개에게나 주라.


과연 모든 민주당 지지자들이 노조에 우호적이었을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들에 우호적이었을까? 가난으로 인해 아이가 죽은 부모에게 기를 능력이 안되면 아예 낳지 말라던 지지자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하고 있으니까. 진정으로 이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여기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지지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은? 지지자들만이 아니었다. 열린우리당 시절 안개모부터, 아니 이전 김대중의 민주당 시절의 면면만 해도 정말 화려했었다. 그냥 오만 잡탕들이 모인 것이었다. 권위주의 정당의 집권을 막고 진짜 민주주의를 해보자. 그러나 정작 그 진짜 민주주의가 뭐냐 묻는다면 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어제 쓴 보수화된 젊은 층에 대한 이야기도 벌써 10년도 넘게 관찰해 온 결과라는 것이다. 당장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벌써 10년도 전부터 인터넷 등에서 관찰되어 온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보다 더 오래된 내 학창시절의 기억으로까지 거슬러올라가게 된다. 다만 군대 갔다 오고 학교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직접 보고 듣고 겪으며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대부분 젊은 세대들은 누구보다 정의롭다. 다만 그 정의의 방향이 기성세대가 기대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보수적인 기성세대가 보기에는 빨갱이일 테고, 진보적인 기성세대가 볼 때는 그저 수구꼴통일 수 있을 테고. 그러나 자신들의 현실에서 그것은 그들보다 더 가치있는 정의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왜 이제 와서 그동안 꾸준히 진보정당을 지지해 오던 젊은 층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늘고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도 높아지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나도 반권위주의를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민주당에 표를 주거나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민주당이 아닌 차라리 다른 군소정당의 후보들에 표를 주고 있었다. 이미 말했다. 그들의 진보도 그들의 보수도 그 어느 것도 아닌 제 3의 길도 그들 나름의 정의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동안 민주당이 그에 어울리는 정의를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는가. 도대체 뭐가 그리 당당해서 젊은 층이 지지하지 않는 것을 교육의 문제라 치부하는 것인가. 자기들이 진짜 지지받을만한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장 서영교 의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사법거래의 당사자인데도 제대로 징계조차 안하고 있었다. 그동안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 온갖 추문에 얽힌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그에 대한 엄중한 처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과연 민주당은 제대로 된 진보정당인가? 과연 민주당이 이 사회의 시급하고 중요한 사회적 가치와 정의를 지키고 실현할 수 있는 정당일 것인가?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가 높다지만 민주당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결국 정치 자체를 불신하는 것이다. 그 책임은 그렇다면 누구에게 있겠는가? 그리고 결국 그런 모습들이 누적되며 더이상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은 참고 지켜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이상 아니다.


그냥 일개 시민인 나는 젊은 층이 보수화되었네 지랄해도 상관없다. 같은 유권자니까. 같은 시민이니까. 나이가 좀 더 많다고 꼰대질해도 그럴 나이가 되었으니 그런다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무엇보다 유권자를 설득해서 한 표라도 더 끌어모아야 하는 정치인이라는 작자가. 20대가 민주주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래서 설훈 자신은 민주주의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동안 민주당이 보여 왔던 반민주적인 행태들에 대해 어떤 태도들을 취해 왔었는가? 민주당은 과연 이름처럼 정당의 운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정당인가? 그에 대해 설훈 자신은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인가?


보수화되었어도 설득해서 끌어들이면 되는 것이다. 촛불시위 당시도 그랬었다. 광우병 파동 때도 다르지 않았었다. 그들이 모두 진보적이어서 박근혜 탄핵에 나섰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정의니까. 한 눈에 보기에도 박근혜가 악이었으니까. 충분한 명분과 이유만 주어지면 그들은 언제든지 진보와도 손잡을 수 있다. 그 손을 누가 먼저 내밀어야 하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이 이렇다 저렇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그럴 자격이 있는가.


별로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과연 민주당이 민주주의와 반권위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지지할만한 이유를 보여주던 정당이었는가. 늬들 주제를 알라. 차라리 한나라당보다도 더 비민주적이던 것이 과거 민주당이었고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듯하다. 당신들의 현실이다.

아침 신문기사들을 읽고 있으니 그냥 헛웃음만 나온다. 최저임금을 올려서 저소득층 소득이 줄고 소득격차가 커졌다. 그래서 묻고 싶다. 최저임금 올리지 않으면 저소득층 소득이 늘고 소득격차도 줄어드는지.

재작년 월급을 기억한다. 그나마 딱 최저임금만 받는 사람보다는 조금 더 받았다. 진짜 허리띠 졸라매며 조금의 여유도 없이 한 달을 겨우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최저임금을 올리지 않았으면 가만히 있어도 내 소득이 오르고 상위소득과의 격차도 줄어들었을까?

더 웃기는 건 그리 기사를 쏟아낸 언론들이 고소득자에게서 세금 더 걷겠다 하면 게거품을 물던 언론들이라는 것이다. 세금을 더 걷어서도 안되고, 복지를 더 늘려서도 안되고, 최저임금도 올리지 않으면 어떻게 저소득층은 소득을 올리고 소득격차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일까?

작년 경제가 안좋았던 이유는 하나다. 중국 경기가 안좋다. 미중무역전쟁으로 중국경기가 안좋아지며 중국에 대한 수출의존도가 높던 우리까지 큰 타격을 입었다. 더불어 더이상 돈을 쓴다고 고용이 늘어나는 시대가 아니다. 키오스크의 예가 아니더라도 이미 산업현장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할 첨단설비가 대부분 생산을 대신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업이 설비를 늘려도 전처럼 고용은 늘지 않는다. 그러면 어째야 하겠는가?

최저임금을 올려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어차피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는 계속 줄어든다. 임금이 그대로면 생산으로 인한 소득은 감소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경제를 유지하는 바탕은 생산으로 인한 소득이다. 그 소득에 기대어 서비스업도 유지된다. GM이 철수하고 군산의 서비스업이 어떻게 되었는가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다각도로 접근해야지 그저 통계상 소득이 줄고 소득격차가 벌어졌으니 최저임금 때문이다. 그러면 최저임금 올리지 않았으면 소득은 그대로였을까? 그대로여도 문제다. 그 정도 월급으로는 생계조차 간당하다. 그러면 저소득층을 위해 좋은 것인가?

경제지 기자가 아닌 무당이나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기승전최저임금. 모든 원인도 결과도 최저임금. 그래서 경제를 알려면 경제지같은 건 보지 않는 게 좋다. 아침부터 그냥 어이없다.

게임의 룰이 공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게임을 밸런스 잘 잡히고 시스템도 합리적인 좋은 게임이라 말하는 것일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게임이 재미있으려면 돈을 쓰거나, 아니면 시간을 들이거나, 그도 아니면 마음을 비우라. 돈을 쓰면 쓴만큼 강해진다. 시간을 들이면 들인 만큼 좋아진다. 이도 저도 아니면 마음이라도 비우면 게임이 편해진다. 


얼핏 불합리해 보이기도 한다. 고작 게임을 하는데 왜 비싼 돈을 쓰고 귀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가? 돈 안 쓰고도 시간 안 들이고도 게임이 재미있을 수는 없는가? 그러면 게임이 재미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안해도 더 쉬워지고 더 잘하게 될 수 있다면 아무도 그딴 게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에서 성장은 보상이다. 더 높은 레벨과 더 좋은 아이템과 그로 인해 더 강해진 캐릭터와 쉬워진 게임은 자신이 게임에 들인 돈과 시간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보상을 바라고 사람들은 비싼 돈과 귀한 시간을 들여가며 게임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항상 그렇게 가르친다. 대부분 선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공부만 잘하면. 시험만 잘 보면.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을 가지면.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 벌써 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학습시킨다. 공부 잘하고 시험 잘봐서 성적이 좋으면 어지간한 잘못은 그냥 눈감아준다. 대놓고 편애하며 누구보다 귀하고 특별한 존재인 양 대우해 준다. 그리고 당연히 공부 못하고 시험 못봐서 성적이 나쁘면 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그나마 벌이라도 받으면 관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예 어디서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며 사람취급도 않는 경우가 현실에는 적지 않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은 자라게 된다.


그래야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지만 주위의 수많은 유혹에도, 자기 안에서의 수많은 욕망과 충동들에도 오로지 스스로 자유를 억압하며 공부에만 열심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코 달갑지만은 않은, 오히겨 고통스럽기까지 한 그 과정들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그 대가여야 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이며 사회적 존재로서 가지는 모든 권리들마저 그에 대한 보상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운다. 아니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게 된다. 아니면 지금 자신들이 하는 모든 노력들이 의미없어진다. 전혀 노력하지 않아도 자신들과 같은 것들을 누리고 가질 수 있다면 그동안 자신들이 노력한 보람을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벌받고 노력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진다. 그럼으로써 노력한 사람들에게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곧 정의이고 합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식 자유의지주의란 정확히 노력과 시험을 통해 개인을 서열화하는 노력시험주의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보일러공을 채용하고 기업에서 미화원을 고용하는데도 정직원이면 시험을 치러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마저 있는 지경이다. 보일러공을 뽑는데 필요한 시험이 무엇인가? 미화원은 어떤 과목들을 시험보고 뽑아야 한다는 것일까? 같은 정직원이라고 대학까지 졸업한 자신들과 경쟁할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시험을 치러야지만 공정하다. 왜? 그 노력을 봐야 하니까. 시험을 치르기 위한 노력을 검증해야 하니까. 그래야만 정규직이란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고용도 불안한 비정규직으로서 자신들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사회적 평등을 위한 정부의 많은 정책들에 대해 오히려 젊은 층에서 더 큰 반발이 터져나오는 이유인 것이다. 저들과 내가 같아져서는 안된다. 저들이 나와 같아져서는 안된다. 차라리 나보다 더 돈도 많고 실력도 있는 누군가가 특권을 누리며 권리를 독점한다면 그것은 참고 넘길 수 있다. 그 전에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 못한 누군가와 나와 같아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들인 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 그동안 자신과 그들이 들인 노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나는 달라야 한다. 다르게 대우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성이든, 고졸이든, 지방대생이든, 혹은 외국인이거나 다른 누구이든 상관없다. 그들이 그와 같은 불리한 위치에 있는 자체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결과이므로 그에 대해 어떤 인위를 가하려는 행위는 정의를 벗어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평등이란 곧 불공정이고 불합리이며 자신들의 노력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으려는 악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이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불과 얼마전 많은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말하는 '노력'이라는 단어에 분노하고 있었다. 젊은세대가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 더 노력하면 그들이 말하는 모든 불만은 해결될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이들만이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는다. 여성들은 노력하지 않는다. 고졸자도 비정규직도 지방대 출신들도 노력하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이다. 최저임금이나 받는 저임금저숙련 노동자들도 노력하지 않아서 그리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양보하거나 배려할 필요가 있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그들을 위해 자신들이 손해보고 희생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보다는 차라리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격이 있는 내 월급은 올라야 하고 자격이 없는 그들의 월급은 오히려 깎아야 한다. 최소한의 생활조차 불가능한 임금을 받고서도 차라리 그런 자리에서라도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다. 젊은 꼰대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다리에서의 작업을 금지한 정부의 지침에 대해서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해가며 더 적은 돈을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저들이 그토록 사법시험과 수능 정시에 집착하는 것도 그래서다. 돈 많은 집안에서 과외까지 시켜가며 명문대 진학을 독점하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만한 비용과 노력을 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방의 촌구석에서 성적도 변변치 않은 학생이 명문대학에 입악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판사나 검사가 되어 법을 마음대로 주무르려면 그만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가 되어 사회적으로 명성도 얻고 상당한 부를 쌓기 위해서는 그만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다. 더 어렵고 더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자신들의 노력을 계량해서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과정과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판사가 되어 사법농단을 저지르고, 검사가 되어 온갖 비리와 불법과 결탁한다. 그마저도 옳다. 당장 그렇게 어려운 사법시험을 통과해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된 이들이 사법부와 검찰이 그동안 저질러 온 불법들에 대해 보이는 태도들을 보라. 가장 개혁적이라던 대법원장마저 결국은 팔이 안으로 굽고 있다. 그래도 되니까. 그만한 자격이 되니까. 그만한 자격을 인정받아야 할 테니까.


과거 누구보다 사회적 평등에 앞장섰던 젊은층들이 이제는 오히려 사회적 평등에 대해 더 강한 반감을 보이게 된 이유인 것이다. 평등해서는 안된다. 절대 모두가 평등해서는 안된다. 내가 더 많은 돈을 썼는데 나보다 캐릭터의 아이템이 더 좋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게임을 했는데 나보다 캐릭터의 스펙이 더 높다. 정작 많은 돈을 쓰고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노력한 자신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가 너무 작아서 의미가 없다. 화가 나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패치한다고 그동안 애써 만든 귀한 아이템이며 높은 스펙을 무력화시키면 누구나 화가 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이만큼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리 나보다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것들을 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나와 같은 곳까지 올리겠다 말한다. 내가 이만큼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도 내가 노력한 시간에 대한 보상일 텐데 그를 전혀 알아주려 하지 않는다.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 보자. 게임은 수틀리면 그냥 그만둬 버리면 된다. 당장 오늘이라도 아이템 모두 팔아버리고 게임을 접어 버리면 된다. 그런다고 뭐라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당장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도 실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뭣같아도 어찌되었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태어난 이상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많은 돈을 쓰고 많은 시간을 들여 스펙이 남다른 이른바 고인물들만 남아 있으면 그런 게임이 재미있을까?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인 만큼 보상을 주겠다고 아예 넘볼 수 없도록 차이만 벌린다면 사람들이 계속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고인물만으로는 게임이 유지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유저가 들어와서 기대를 가지고 게임에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야지만 게임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현실의 사회라면 어떨까?


어쨌거나 오래전부터 특히 젊은층에서 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른바 장르소설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일 것이다. 심지어 그래도 명문정파에서 제자들의 배분을 정하는데도 시험을 치러 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실력이 미치지 못하면 배분과 상관없이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물론 그런 행동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의식에 비판하면서도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또다른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실력이 되는 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을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 실력만 된다면 세상의 정의나 도의 같은 것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도 된다. 그렇게 모든 인간을 넘볼 수 없는 실력의 차이에 따라 나누어 계량해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 사회문제들을 대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을 가지게 된다. 게임이 문제가 아니다. 게임 이전에 이미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가르쳐 오고 있었다.


젊은 남성들이 문재인 정부에 반발하는 이유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반드시 페미니즘 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현실을 이해하는 방향과 기준이 전혀 다르다. 젊은 남성들에게 평등이란 노력에 따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공정이란 노력으로 인한 결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란 것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다. 더 노력한 더 실력있는 이들에게는 더 큰 보상을,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더 적은 보상과 심지어 징벌을. 여성은 그런 그들이 생각한 불평등과 불공정과 부정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일관된 방향을 보인다. 그래서 저들에게 그런 차이를 더 벌리고자 하는 자유한국당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편견일까? 물론 모두는 아니다. 일반적인 경향을 말한다 해서 그것이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60대 이상의 노인 가운데서도 진보적인 이들이 있는 것처럼 20대라 해도 보다 공동체적인 관점에서 문제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주 눈에 띄는 모습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이 정부에 반발하는 이유이며, 진보에 혐오감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이유다. 평등은 옳지 않다. 평등은 악이다.


설득하는 것이 의미없다는 이유다. 이만큼 생각하는 게 다르면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넘어가면 된다. 다만 이런 생각들을 가지게 된 원인들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만 잘되면 된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 사회가 강요하는 것들이다. 너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 잘 봐서 잘 먹고 잘 살라. 그런 삶이 성공한 삶이다. 보수가 성공한 이유다. 아주 오랜 의도하지 않은 계획이었을 것이다. 성과가 나타났다.

어차피 50보 도망치나 100보 도망치나 같다. 그러므로 모두 도망친 것이니 똑같이 처벌하겠다. 그래도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살피고 되돌아 반격할 궁리도 하면서 50보 도망쳤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100보를 도망친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러면 과연 다음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병사들은 50보를 도망칠까? 100보를 도망치게 될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을 펴면 그저 모자르다고만 아우성이다. 여당도 과반에 못미치고 기성 권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은데 그저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았다고 비난부터 쏟아낸다. 당연히 반대쳔에서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 여론몰이에 나설 것이다. 한 마디로 현정부의 정책은 모두가 받아들이지 않는 잘못된 것이다. 거기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쉬울까? 뒤로 물러서는 것이 더 쉬울까?

당장 최저임금만 해도 그렇다. 기존의 사용자들과 자영업자들의 저항이 거셌다. 그에 따른 시민들의 불안도 상당했다. 그런데 자기들 원한 대로 안 됐다고 보수언론과 보조를 맞춰 비난을 퍼부어댄 결과가 무엇이던가? 이미 대중은 최저임금인상이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고 정부는 여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꺼리던 soc 재벌을 위한 규제완화로 노선을 수정한 것이다. 그래야지만 어렵더라도 기존에 추진하던 소득주도성장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진보언론이나 지식인 시민사회단체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며 그저 정부를 밀어네려고만 하고 있다.

차라리 성에 차지 않더라도 그래도 오른 최저임금 덕분에 삶이 나아진 이들을 적극 알리려 했으면 어땠을까? 최저임금 인상이 어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내었는지 대중이 알게 했으면 어땠을까? 진보언론에서도 나처럼 최저임금이 올라 다행인 사람들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내보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정책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들의 불만만을 내보냈을 뿐이었다. 하긴 권력을 비판하는 것만이 언론의 존재이율라는 이들이니. 더 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정부 쪽이 그들에게는 더 좋을 수도 있겠다.

명말 명의 국력이 결코 여진의 후금보다 약하지 않았었다. 군사력도 더 강했다. 문제는 너무 엄벌을 남발했다. 차라리 조정의 처벌을 피해 한 번의 패배에도 그대로 항복해버리는 장수들이 너무 많았다. 빚도 자산이도 패배도 전과다. 잠시의 후퇴와 양보에도 하물며 더 나아진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부가 아니면 전무다. 내가 원한 대로가 아니면 이명박근혜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명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또다시 그들은 패장도 아닌 단지 더 큰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을 뿐인 대장의 목을 베려 한다.

자살도 권리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깨달음처럼 되뇌게 된 화두다. 그러고 싶다면 그럴 밖에. 모두가 바란다면 그리 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니까. 자유한국당이 안타까울 것이다. 선명하게 싸울 수 있을 때 그들은 누구보다 정의로울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이 곧 권력이다. 일은 곧 자기를 확인하는 수단인 동시에 증명하는 도구다. 그래서 괜히 은퇴할 나이가 되어서도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업하네 뭐네 일을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제법 번듯한 회사에서 임원까지 했던 사람이 굳이 경비원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찾아 나선다.

공직사회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권력과 가까운 곳에 있기에 그런 것에 더 민감하다. 하나라도 더 일을 자기 부서로 가져와야 하고 하나라도 더 자기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여성가족부라고 딱히 내놓을 만한 일이 얼마 없지 않은가. 대부분 다른 부처의 업무와 겹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쓸데없이 성인지교육이네 뭐네 일을 벌리는 것이다. 방송사에 보내는 가이드라인도 그런 맥락이다. 어차피 따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여성과 양성평등을 위해 이런 일도 하고 있다.

찾아 보면 이번 말고도 꽤 있을 것이다. 여성가족부의 이름이든 다른 기관이나 단체의 이름이든. 그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당연히 방송국들과 마찬가지로 대중 역시 그냥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한가한 것들이 별 헛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는다는 이상의 인상은 없었다. 물론 가만 보면 눈여겨 볼 만한 부분티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부부처에서 이런 강제성도 없는 공문까지 보낼 일인가. 말 그대로다. 강제성따위 1마이크로그램도 없다. 법제화된 것도 아니고 그것을 강제할 권한 따위 여가부에는 애초부터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누가 눈여겨 보고 귀담아 듣겠는가.

현정부와 특히 여가부, 그리고 장관 진선미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그러니까 더이상 강제성따위 없는 습관적인 헛소리로 여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저것들은 한다면 하는 것들이다. 어떻게든 그 내용을 강제하려 수단을 찾을 것이다. 이건 더 이상 대충 지나쳐서는 안되는 현실의 문제가 된 것이다. 왜? 그동안 진선미 등 현정부의 여성주의자들이 내놓은 헌법마저 무시하는 듯한 과격한 주장들 때문이다. 여가부 말고는 정부에 다른 부처도 없고 여성 말고 이 나라에 다른 인간도 없다. 그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한 안하무인의 태도가 심지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연상시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위험하다. 진짜 이렇게 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정치를 모르는 것이다. 전에 말했다. 여성주의자 대부분이 좋은 집안에서 자라 세상 무서운 걸 잘 모른다고. 캐어나면서부터 남성들의 보호 아래 어떻게 저 무서운 세상과 타협하며 어우러져 살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을 것이라고. 말이 그냥 말로 끝나지 않는다. 물론 진선미 장관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는 일방적인 진심이다. 박근혜와 다르지 않다.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넌는 찰떡처럼 알아들으라. 못알아들으면 네가 나쁜 것이다. 내가 장관인데. 내가 국회의원인데. 어디 너희들이 감히. 아니라 장담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결국 항상 하던 가이드 놀음마저 방해받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은 앞뒤 가리지 않는 무모함과 오만함의 대가다. 다른 정책들은 어떨까? 여가부 이름으로 추진했거나 추진하려는 여러 정책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페미니즘에 대해 우호적이던 언론들마저 더이상 여가부의 편만 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누구 때문인가?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자기 실력도 아닌 빌린 권력으로 위세를 부려봐야 결국 화무십일홍일 것이라고. 더이상 여가부 하는대로 놓아두지 않겠다. 남성들의 경계와 적의가 여가부의 행태에 질린 일부 여성들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 원래는 다수 남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여성을 위한 양성평등을 이루고자 했을 텐데. 그 남성들의 손을 먼저 뿌리친 것은 누구일까?

현정부의 여성정책으로 말미암아 여성들이 더 곤란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은 벌써 오래전부터 들고 있었다. 몇 번 그에 대해 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효과가 나타날 줄이야. 이제는 남성들도 더이상 참고만 있지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이 외면한 보편적 가치를 앞세운 남성들의 반격은 거세다. 여성주의에 우호적이던 언론마저 돌려세울 정도로. 정치권은 어떨까? 단지 그런 반감이 여성주의를 넘어 여성들에게 직접 미치는 경우만을 걱정할 뿐. 그럴 실력도 없는 주제에 쓸 데 없이 너무 자극만 하고 있었다. 소를 잡을 때도 설잡으면 자칫 사람이 다칠 수 있다.

그냥 헤프닝이다. 그런데 그 헤프닝을 헤프닝이 아니게 만든 주체가 있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은 대책없이 무모하고 오만한 발언을 쏟아낸 진서미 장관과 그에 보조를 맞춘 여가부에 있다 하겠다. 덕분에 다른 부처도 일하기 어려워졌다. 저런 주제조차 할당제 덕분에 장관까지 되었으니 여성할당제란 또 얼마나 쓸데없는 짓일 것인가. 여성할당제의 취지에 동의하고 있음에도 이 순간 만큼은 반대가 옳다고 여기게 만들고 있다.

자업자득이다. 물론 자신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저 못배우고 무식해서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원망이나 안 하면 다행일 뿐. 몇 번이나 말하지만 보는 세상이 좁으면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결국 멍청해진다. 극단이란 원래 멍청이들을 위한 선택일 것이다. 한 마디 변호하는 말이라도 덧붙여 볼까 했지만 지금으로선 그마저도 의미없다. 정말 병신같다. 박근혜가 차라리 저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남녀간에, 아니 모든 직종과 계층 간에 갈등이 심화되는 이유는 내가 가장 불쌍하기 때문이다. 나만 불쌍하다. 나만 힘들다. 그러니까 네가 좀 양보해라. 네가 좀 희생해라. 그래야 내가 살겠다. 그런데 상대 역시 그러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아예 내가 더 힘들고 불쌍하니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더 힘들고 불쌍하니까 어떤 말도 해서는 안된다. 서로 그러고 상대의 입까지 틀어막으려 하니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이 감정적 대립으로 이어진다. 씨발 그래서 네가 더 힘드냐? 좆까 네가 더 불쌍하냐? 그런데 다 힘들고 불쌍하다. 싯달타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원래 산다는 자체가 힘들고 불쌍한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서로 힘들면 나눠 들고, 아프면 위로하며, 불쌍한 이들을 돕고 보듬는다. 원래 개잡는 백정도 만인지상의 왕을 동정할 수 있는 것이고, 시구문밖 거지도 만석꾼 부자를 연민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조금씩 부족한 것이 있고 그래서 안타까운 것도 있다. 그것을 서로 이해하며 사는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언론이 개새끼라는 이유다. 사실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집단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충실히 객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더 지식인들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한 나라의 리더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함부로 구성원 사이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한다. 속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화합과 포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트럼프가 괜히 미국의 주류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런 사정이 있고, 저들에게는 저런 입장이 있고, 그러므로 이런 부분에서 서로 이해하고 타협하며 함께 화합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내가 여성주의자들이나 반여성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하는 지점도 이것이다. 그냥 하잘 것 없는 갑남을여 장삼이사 필부필부들이야 상관없을 것이다. 무시하는 게 아니고 실제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 그렇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그러하다. 그래도 한 사회, 한 집단의 리더라는 것들이다. 하물며 정부부처의 장이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어느 일방의 주장만을 대변하면서 갈등을 부추긴다. 어느 일방의 입장만을 대변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조장한다. 역대 여성가족부 장관 가운데 진선미야 말로 최악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장관이면 장관다운 신중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위임한 정부의 요인으로서 자칫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국민들에 미치게 될 영향을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여성들도 남성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남성들도 여성들의 불리함을 이해한다. 여성만 남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만 여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째서 여성에는 남성이 없는가? 여성주의에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여성가족부에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남성 없이 여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여성 없이 남성이 존재할 수 없는가? 이 사회는 여성 혼자만, 아니면 남성 혼자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서로 자기가 불쌍하다 경쟁할 필요 없다. 그런 식이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가장 불쌍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쌍하지 않다. 나름대로 힘들기도 하고 어려운 일도 있고 그래서 때로 살기 싫을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만큼 남들보다 좋은 점도 분명 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을 테고, 나보다 더 어렵고 불쌍한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러면서 나보다 더 잘나고 더 형편도 좋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질시할 필요도 그를 원망하거나 비난할 이유도 없다. 우습게 여기고 깔아볼 필요도 없다.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존재한다. 다만 어떻게 그런 가운데 조화를 이룰까.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포용국가의 시작이다. 그 포용국가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 진선미 장관이고 여성가족부이며 정부에 기생하는 극단적 여성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여성주의에는 남성이 없다. 그냥 여성들만 사는 아마존을 꿈꾸던가. 남성들이 무지해서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과 여성에 대한 비난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그마저 안되는 자체가 스스로 여성은 피해자라 의심없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성은 가해자이기만 할까? 그러면 가해자인 남성이 없으면 여성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사장은 직원을, 직원은 사장을, 선생은 학생을, 학생은 선생을,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가난한 이들은 부자를,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 답게,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고려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최선을 다한다. 일부러 갈등을 조장하려는 양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지면을 채우는 언론들을 보면서. 거의 모든 언론들이 그렇다. 지식인도, 정치인도, 심지어 정부부처마저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이 공동체는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만을 위한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공존은 서로에 대한 이해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성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 남성 혼자서도 살아갈 수 없다. 사용자도 노동자도 결국 함께 살아남아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이다.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공존을 꾀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언론 개새끼를 외치며. 나라가 썩는 이유일 것이다.

이른바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교육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원래 대등한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개는 일방적 관계일 때다. 일방적으로 보호해야 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받들어야 하거나. 상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알아서 보호하고 알아서 받들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란 단지 그런 관계일 뿐인가?


과연 남성이 여성을 몰라서만 그런 수많은 성간문제들이 일어나는가? 물론 육체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강하고, 사회적으로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남성이 여성을 더 배려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이 사회에 남성이 절반이고 여성이 절반인데 항상 여성들이 남성들의 배려에만 기대어 보호만 받으며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무엇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높이자면서 여성이 남성을 배려해야 하는 상황이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어머니가 아들을 배려할까? 아들이 어머니를 배려할까? 남성인 김대리가 여성인 한차장을 배려할까? 여성인 한차장이 남성인 김대리를 배려해야 할까? 어차피 남성인 장과장이 여성인 강부장에게 무례를 범하면 위계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


흔히 성희롱이네 성추행이네 크게 문제삼는 사안 가운데서도 가만 보면 단지 습관적으로 같은 남성들에 하던 행동을 여성들에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경우도 적지 않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흔히 하는 말이고 하는 행동들인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여성이 되니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성인지교육도 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말하고 행동할 때 조금 더 조심하고 배려하라. 마찬가지로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과 행동들에 대해서 여성들도 충분히 남성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실 실제 현실에서 많은 여성들이 그러고 있기도 하다. 아니라면 경찰은 성범죄로 신고한 여성들과 신고당한 남성들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원만하게 남성의 선의를 이해하고 악의를 걸러내며 함께 어루어지며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항상 강조하던 공동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성만 따로 사는 것도, 여성만 따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에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남성들만의 일방적인 이해와 배려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성이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이고 습관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여성들도 남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당히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며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불편함이나 불쾌감 정도는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동료로써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배려하며 넘어갈 필요도 있다. 내가 미투나 성범죄와 관련해서 남성들에게 주장한 바도 바로 이것이다. 조금 더 불편하고 때로 더 불쾌하더라도 그러나 여성들의 불리한 처지를 이해해서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과연 여성들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남성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렇게 굳이 남성들에 대해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남성들에 대해 평소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그래서 남성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서 항상 적확하게 어김없이 판단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상관없다. 남성의 선의를 이해하고 악의를 판단해서 거를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남성들에 대한 여성의 판단은 항상 옳을 테니까. 여성들의 행동 또한 항상 옳을 테니까. 그렇지 못하니 결국 남성들의 반발을 사고 마는 것이다. 여성들의 부당한 오해와 심지어 음해가 억울함을 낳고 분노로 이어지며 불만이 혐오와 증오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여성은 남성을 모른다.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판단되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공포다. 여성주의에 의해 남성은 결국 잠재적 범죄자로 억압받게 될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성인지교육이란, 아니 성인지감수성이란 자체가 여성에 한정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경우 여성들도 남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여성주의가 그런 것들을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 남성은 오로지 가해자로. 남성의 선의는 무시한 채 오로지 악의만을 강조하며. 그럼으로써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심을 가지도록 몰아가고 있다. 그것만이 오로지 남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전제로 남성들에게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라 강요한다. 이런 건 성인지감수성도 뭣도 아니다. 그냥 여성이든 남성이든 오로지 자신들의 편견 아래 가두고 싶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성들을 적대하고 남성들이 그 적의에 굴복하게 함으로써 그 위에 자신들이 서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도 아래 오로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일 절반의 남성들과 함께 앞으로도 살아야 하는 여성들 역시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에 여성이 없다는 이유다.


여성들이 마음놓고 살기 위해서도 남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는 만큼 여성도 남성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이 왜 그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 남성이 어떤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그런 생각들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인 자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인지 악의가 있어 그러는 것인지. 그런데 사실 남성도 남성을 잘 알지 못한다. 여성도 여성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닌 토론이어야 하는 것이다. 남성 자신도 자신이 모르던 남성을 알고 여성 자신도 자신이 모르는 여성을 알아가며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야 양성평등도 이루어질 것 아닌가.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오로지 권력에 기댄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평등이 진짜 평등일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순간 권력이 여성들에게서 등돌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무엇으로 양성평등을 지킬 것인가.


그러고보면 그동안 남성들은 그래도 양성평등이라는 대의 아래 꾸준히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해 왔던 것 같다. 오히려 그래서 그런 불만들이 여성주의 만큼이나 극단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성주의자들은 단 한 번도 남성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남성이란 존재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회적 약자라 여겨 그런 오만함을 참고 넘겼었는데 이제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현실에서 위력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언제까지 남성들만 일방적으로 여성들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인가. 여성은 남성에 대해 전혀 알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인가.


일방적인 관계는 일방적인 위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양보하며 배려하니 겉으로 보기에 양성평등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남성 역시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서 정확한 현실에 대한 이해 없이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런 양성평등이 오래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마저도 결국 남성중심의 위계 아래 존재하게 된다. 남성의 이해와 배려와 양보가 사라질 때 그런 것들은 허깨비처럼 하루아침에 함께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양성평등인가? 어떻게 양성평등을 이룰 것인가. 그래서 이화여대와 관련한 음모론도 썼던 것이다. 저들이 과연 양성평등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기는 한가. 단지 여성을, 여성주의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부분 여성들은 그러고 함께 살아가려 하는데 저들만 유별나다. 그럼에도 그런 여성들까지 양보하고 배려하려는 것은 여성을 보호하려는 남성들의 슬픈 속성이다. 안타깝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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