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전부터 영국에서는 차브족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젊은이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었다. 문화적으로는 고급문화를 저질스럽게 소비하는 계층일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그야말로 막장에 가까운 일탈을 일상화한 이들일 것이다. 원인은 방치였다. 출산률을 높여보겠다고 막대한 지원을 퍼부었는데 정작 저소득층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낳기만 하고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서 방치된 아이들이 반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원래 정의니 도덕이니 가치같은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대부분 하층민들은 성리학의 윤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양반네들이 지키는 예의나 윤리가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 여겨지면 자연스럽게 평민들도 양반의 그것을 본받아 따르려 하게 된다. 그렇게 양반들이나 지내던 제사도 예절도 조선후기에 이르면 평민들 사이에까지 깊숙이 파고들게 된다. 그만큼 양반들의 도덕적인 지배가 평민들의 일상까지 지배하게 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양반들의 지배조차 미치지 않는 조선사회의 주변에 이르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할 수 있다. 누가 왕이고 누가 원님이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전혀 상관할 바가 없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방식과 논리가 더 중요하다.

 

사실 차브족이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는 펑크족이 있었고, 그 전에는 스킨헤드가 있었고, 그 전에는 모드족이 있었다. 하나같이 주류사회와 차별되는 자신만의 방식을 추구하던 새로운 문화로서 주로 하층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다. 일탈적이고,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차피 착한 아이 흉내 낸다고 누가 알아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히 사회가 바라는 바르고 성실한 모습을 한다고 대단하게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태어난대로 사는 것인데 그저 비슷한 자신들끼리 서로 통하고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면 된다. 한 편으로 반사회적이면서 한 편으로 집단에 매몰되는 이중성이 그 안에서 나타난다.

 

영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는 특히 백인 하층계급에서 상당부분 지지층을 공유하고 있었다. 민주당에서도 이단이었고 공화당에서도 이단이었지만, 그래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주류로부터 강하게 비토당하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대부분 하층 백인들에게 이들은 새로운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도널드 트럼프는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을 만큼 더 솔직하고 노골적인 언어로써 그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미국의 정치가 자신들에게 해 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미국의 주류 정당과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무어라도 제대로 해 준 것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 저들이 말하는 미국의 가치와 정의란 것이 자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새로운 대안을 찾고 그런 가운데 미국의 주류들이 정당과 정파를 떠나 공통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트럼프라는 괴물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트럼프야 말로 자신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들과 같은 언어로써 이야기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일본에서도, 극단적인 주장에 쉽게 휩쓸리는 젊은 세대들은 그렇게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국가로부터, 정치로부터, 주류들 - 즉 사회의 어른들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아예 방치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은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주류사회와 다른 그들만의 논리와 방식을 찾아내게끔 만든다. 당연히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주류사회의 주장과 논리란 것은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현실은 다른데? 자신들이 실제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르기만 한데? 일베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팩트'란 그런 그들의 무의식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주장들 말고 논리들 말고 실제란 무엇인가?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 자신들이 듣고 자신들이 생각해서 자신들이 판단한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아이들은 보호받고 있는가.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고 있는가. 단순히 수단으로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그나마 IMF전까지는 고도성장의 영향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사회 전반에 여유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IMF 이후 모두가 쫓기듯 숨도 쉬지 못하고 내달리며 살아야 했었다. 좋은 대학에 가라. 좋은 직장에 들어가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른들에게 간절한 믿음이며 절실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을 때 그런 어른들의 기대는 전혀 터무니없는 허튼 것이 되고 말았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래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 취직도 어렵고, 기껏 취직되어봐야 생활도 안되는데 당장의 자리마저 불안불안하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행복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에, 더구나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가지고 서열을 매기고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계량한다. 자신을 정의당한다. 그래서 당신들은 그렇게 옳은가. 당신들이 추구하는 정의란, 윤리란, 도덕이란, 이 사회의 질서와 가치란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그래서 되묻는다. 그래서 따져묻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성세대가 추구해 온 모든 정의와 가치들이 의미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그들은 보수화되는 듯 보일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 그들은 빨갱이에 물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째서 자신들에 반대하는가. 어째서 자신들에 동의해주지 않는가.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한 것일 텐데. 그들을 위하자는 것일 텐데. 물어 본 적 있는가.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 본 적 있는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를 실제 해주기보다는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답을 들려주는 것일 터다. 최근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하태경과 이준석이 주목받고, 불과 얼마전까지 유시민을 추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안철수라면 다르지 않을까. 문재인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 가운데 대부분은 정작 들어줄 것이라 믿었던 사람이 전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배신감 같은 것일 터다. 처음부터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명박이나 박근혜보다 더 분노하고 더 원망하게 된다. 단 한 번도 어느 어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최근 사회문제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특히 젊은 남성과 여성들 사이의 젠더갈등이라는 것도 서로의 배후에 버티고 선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가 오로지 남성의 편에서만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지듯 언제부터인가 오로지 여성을 중심으로만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생각되어진다. 아직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 층 가운데 실제 그렇게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거의 드물다. 대리전이 되는 것이다. 정작 여성, 혹은 남성의 편만을 일방적으로 들고 있는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가만 따져보면 결국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그 너머 그 뒤에 버티고 선 다른 누군가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젊은 세대는 보수화되었는가. 벌써 전부터 느껴온 바이기도 했다. 보수적인 듯 보수적이지 않다. 진보적인 것 같은데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자유의지주의를 떠올렸지만 그와도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결국은 공동체를 믿지 않는다. 공동체의 질서를 만든 기성세대를 믿지 않는다. 자신들과 상관없는 것이다.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들이다. 공동체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유리된 채 방치된 채 그저 어른들의 욕망에 의해서만 지금까지 떠밀려 오고 있었다. 그래서 뒤늦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신들의 언어와 자신들의 논리로써. 오로지 자신들의 경험과 자신들의 사유와 자신들의 판단을 통해서. 그래서 때로 반지성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기성의 지성보다 자신들의 논리와 주장이다.

 

젠더갈등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다. 세대갈등조차도 아니다. 그냥 묻고 있는 것이다. 방황하며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진지하게 들어주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 분노의 정체다. 원망의 실체다. 그럼에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공교육이 그들이 공동체로부터 아주 엇나가지 않도록 지탱해주고 있다.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다만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다. 과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냥 예만 하나 들겠다.

 

대기업 공장이다. 월급 200만원,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에 비정규직이라 해고도 자유롭다.

 

동네 작은 식당이다. 월급 220만원에 하루 9시간 주 5일 근무, 해고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과연 노동자 입장에서 어느쪽이 더 나은 일자리이겠는가. 물론 동네 작은 식당이야 언제 어떻게 망할 지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설마 대기업인데 망하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망하지 않더라도 그 전에 노동자가 내쫓길 수 있다.

 

당장 공무원만 하더라도 받는 임금만 놓고 보면 다른 직업에 비해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법으로 정한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고 무엇보다 신분이 보장됨으로써 실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공무원연금의 존재가 나중에 정년을 맞아 일을 그만두더라도 경제적으로 크게 곤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무원에 매달리는 것이기도 하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오히려 연장근무에 휴일근무까지 해야 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그래서 공무원이 좋은 일자리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하긴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제조업 일자리라는 것이 반드시 생산직 일자리는 아닐 수 있을 것이다. 대기업도 사무직이 연봉을 많이 받는 것이지 생산직이 연봉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생산직도 정규직이 더 안정적이고 대우도 받는 것이지 비정규직은 아예 어림도 없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대기업에서도 생산직 노동자를 직접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보다 용역업체를 끼고 계약직으로 간접고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나면 노동자에게는 좋은 것인가. 그보다는 더 급여도 처우도 지위도 안정적인 다른 서비스업 일자리는 과연 나쁜 일자리인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보조하며 보살피는 요양보호사는 당연히 노인이 존재하는 이상 일자리를 잃을 걱정 따위 없는 것이다. 일이야 힘들지만 만일 정부에서 지원해서 이들 요양보호사들의 급여와 처우를 개선하면 딱히 나쁜 일자리라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장애인을 돕는 일은 어떨까? 어린이집 교사나 유치원 교사도 오히려 더 충원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더 많은 급여를 받고 더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며 보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과연 이런 일자리들이 제조업 일자리들에 미치지 못할 것인가.

 

개소리들인 것이다. 지금도 떠들어대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너무 많은 돈을 받으면서 너무 많이 놀고 또 아예 해고도 안되는 철밥통들이다. 그러니까 월급도 줄이고 일하는 시간도 늘리고 쉽게 해고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 너무 좋은 일자리라 그러는 모양이다. 그러다가는 그런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으니 일자리 정책이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정작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4차산업혁명이란 자체가 그런 것이다. 아예 무인공장까지 속속 지어지고 있는 것이 제조업의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었으니 전체 일자리가 늘어도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것은 네놈들 대가리속이 아닐까.

 

그냥 편의점 알바라도 좋은 일자리로 만들면 된다. 하다못해 물류센터 상하차조차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있는 일자리가 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문제다. 그러려면 급여도 올려야 하고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 보다 사회안전망도 강화해야 한다. 단기일자리라도 장기일자리처럼 안정적일 수 있도록 보다 사회적인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다. 제조업도 편의점 알바처럼. 대기업 정규직도 물류센터 상하차처럼. 그러니까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드는 게 잘못인 것이다. 다른 일자리는 그럼에도 제조업 생산직만 못해야 한다. 기준인 것이다. 그 밖의 다른 일자리는 나쁜 일자리여야 한다. 차라리 그런 바람이 담겨 있다.

 

진보언론이라고 다르지 않다. 결국에 일자리도 같지 않다. 노동자라고 같지 않다. 무엇이든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라는 같은 존엄과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생활인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편성이고 일반성인 것이다. 그래서 대중이다. 서비스업이 나쁜 일자리라 말할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 역시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도록 변화하는 시대에 함께 노력해야 한다. 절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일단 기자새끼들부터 모두 자르고 일용직으로 만든 다음에 시작하자.

 

제조업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인가. 하긴 당장 중소기업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토록 좋은 일자리인데 중소기업으로, 더구나 생산직으로 가려는 사람이 이리 적은 것인가. 많은 중소기업들이 정작 사람이 없어서 불법체류노동자를 써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 좋다는 조선업마저 이제는 사람이 없어서 수주가 있는데 일을 하지 못할 지경이다. 무엇이 원인인가 고민해 볼 시점이다. 물론 몰라서 그리 떠드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하여튼 언론의 경제기사같은 것은 일부러 찾아볼 것이 못된다 할 수 있다. 혹시라도 우연히 봤다면 눈을 씻어야 한다. 진짜 몰라서 그리 쓰는 것인지 알면서도 그리 쓰고 있는 것인지. 역겨운 것들이다. 

 

하여튼 기자 개새끼들 기사쓰는 것 보면 정말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그토록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수출해야 하기 때문 아니던가.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인건비 오르고 원가가 높아지면 더이상 수출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니 노동자들 쥐어짜서 원가 낮추고 이익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경제전망을 하면서 대외요인은 깡그리 무시하는가.

말 그대로다. 한국경제는 수출의존도가 유난히 높다. 거의 수출로 먹고 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그 수출을 하려 해도 정작 물건을 사줄 세계의 경기가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당장 무역량부터 증가세가 확연히 둔화되고 있는 중이다. 즉 우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마저 수출이 줄며 내수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우리만큼이나 수출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1% 이하의 성장률을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조건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떤 모습이겠는가. 정부가 추경을 하려는 이유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냥 나라 망하라는 것이다. 그냥 죄다 망해서 다시 한 번 박근혜를, 아니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불러서 그 개노릇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불러주는대로 다소곳이 손모으고 받아쓰는 쪽이 훨씬 폼나니까. 아니면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최저임금과 근로시간, 그리고 규제완화가 전부라서 그러는 것일수도. 워낙 공부만 열심히 하느라 사고능력도 언어능력도 모두 잃어버렸다. 어차피 수출로 경제를 끌고가기가 더이상 어려워진 상황에 정부가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원래는 소비주도성장이었고 그마저 한계에 이르렀으니 소득주도성장이어야 한다고. 빚을 내서 소비하며 경기를 이끌었던 기억은 없는 모양이다. 뇌가 없거나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양심이 없거나.

한국의 경제규모도 이제는 상당하다. 인구는 고작 5천만 정도지만 소득수준이 높아 어느 정도는 지금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할 여력이 된다. 그런 국민들에게 재정이 되었든 어쨌든 돈을 쥐어주고 소비하게 만든다. 당장 조선업체들만 보더라도 수주 없다고 노동자며 설비며 내팽개친 결과 수주가 있는데도 당장 작업을 시작하기 곤란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는가. 생산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그를 위한 투자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소비가 필요하다. 무엇으로 소비케 할 것인가. 가계부채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공포만 조장하고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철늦은 무당처럼 같은 말들만 주문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경제를 망치는 것은 바로 언론이다. 언론사 기자들이다. 언론을 잘안다고 떠드는 기자새끼들이 정작 경제를 망치고 있다. 미래도 보지 못하고 과거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척수반사로 맥락없는 기사만 언론의 권위를 빌어 배설한다. 기자새끼들만 죄다 모아서 후쿠시마 원자로에 인신공양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리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못하게 된 게 안타까운 듯하니. 쓰레기들. 사회의 암이다. 경제의 종양이고.

이미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위험하다. 자기를 지나치게 불쌍하게 여기는 나머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되기 쉽다. 이른바 한국인의 정이란 것이다.

 

한국인의 정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자기보다 너무 잘난 사람에게도 자기보다 너무 못한 사람에게도 그 특유의 정이란 것이 발현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정이란 것이 실제 발현될 때도 대개는 상대의 입장에서보다 자기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베풀고자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자신의 선의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분노하고 원망하게 된다. 정이란 이름의 선의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이라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그보다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내가 가장 불쌍하다. 내가 가장 가난하고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렵고 내가 가장 불행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를 얻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는다. 서로 돕는 가운데 있을 곳을 찾은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도 같이 힘드니까. 같이 어렵고 괴로울 테니까. 그래도 나누면 조금 더 수월하게 견딜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 그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보인다. 자기보다 더 불쌍하거나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이 전혀 불쌍하지 않아 보이거나. 타인이 되는 것이다.

 

확실히 보수언론이나 보수정당이나 그런 점에서 대중의 심리를 제대로 읽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적확하게 한국인의 심리가 가지는 허점을 꿰뚫었던 것이다. 같은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잃은 심정에 공감하기보다 그로 인해 그들이 받게 된 보상들에 집중하게 만든다. 피해자 자신이나 그 가족들이 그로 인해 받게 된 관심과 누리게 된 혜택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들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 내가 더 힘들고 어렵다. 그러니까 저들이 말하는 것은 들을 필요가 없다. 아니 저들이 떠드는 괴롭고 슬픈 사연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식이 된다. 심지어 적대하게 된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이, 혹은 그를 지지하거나 그와 연관된 인사들이 세월호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망언을 뱉어내고 그럼에도 오히려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단한 시절을 지나온 이들일수록. 그만큼 힘든 현실을 견뎌야 하는 이들일수록. 그럼에도 작은 성공이라도 이룰 수 있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자기들은 이런데. 자기들은 이렇게까지 살아왔는데. 그러면 저들은. 그런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과연 세월호 망언으로 인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일정 이상 떨어지는 경우란 있을 것인가. 오히려 당장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희생자를 모욕하고 피해자를 부정할수록 그들의 지지는 더욱 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최저임금 논란도 비슷하다. 근로시간단축에 대해서도 맥락은 비슷하다. 보수언론이 항상 떠드는 소리다. 네가 더 힘들다. 네가 더 불쌍하다. 그러니 남의 사정따위 돌아보지 말라. 사회를 파편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 생각하게 만든다. 입으로는 국론분열을 걱정하며 사회통합을 외치는 그들이.

 

원래 한국인의 정이란 것을 잘 믿지 않았었다. 그 정만은 이웃의 실체를 수도 없이 아프도록 겪어 온 때문이다. 가난한 동네에 정은 넘친다. 물론 정이 넘친다. 다만 그 정의 실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뿐.

 

망언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 속시원한 용기있는 발언이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더구나 기성세대에서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의 비극이기도 할 것이다. 보편적인 정의나 윤리 같은 것이 아니다. 공감능력도 없다. 슬픈 것이다.

원래 총선은 대선에 비해 투표율이 낮다. 한 마디로 거의 투표하던 사람들이 투표하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총선에서 중요한 것은 투표장에 나올지도 확실치 않은 중도층을 잡는 것보다 확실하게 투표장에 나와줄 지지층에게 자신들에게 투표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일단 확실한 집토끼부터 단속해야 승산이 생기는 것이다.

 

원래 한국 유권자들은 대부분 보수성향이 강하다. 그동안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낮게 나왔던 것은 박근혜의 구속 이후 너무 지리멸렬한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문재인이라는 확실한 대세 앞에서 분열한 자유한국당의 모습은 한심 그 자체였었다. 그런 기존의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에 대해 정부와 확실히 각을 세우며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만큼 자신들이 강하고 힘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을 지지한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이유다. 새삼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기보다 원래 지지율을 찾아간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주당에서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에 대해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자유한국당에게 35% 지지율은 상수와도 같았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자유한국당 지지할 유권자가 전체의 35%였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아직도 낮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자신들을 봐달라. 자신들을 지지해달라. 더 선명하게 날을 세우며. 더 극단적인 주장들을 펴면서. 그동안 유권자의 눈치를 보며 자제하던 색깔론도 당당히 외치고 탄핵당한 박근혜를 사면하라는 주장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무엇 때문이겠는가.

 

언론의 역할이 크다. 그럼에도 그런 부분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언론이 적지 않다. 심지어 진보언론 가운데서도 오로지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에서 자유한국당의 편에 서는 언론들마저 있을 정도다. 이번 WTO심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아 패소한 것을 문재인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기사를 쓴 것이 바로 한겨레였었다. 정부와 여당의 사소한 농담고 큰 잘못이 되지만 자유한국당의 큰 잘못도 단순한 논란이 되고 정쟁이 된다. 그런 언론을 믿고 차명진도 정진석도 김순례도 김진태도 당당히 망언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이다. 이언주가 저리 막나가는 것도 그런 언론을 믿는 것이다. 이들 정치인들의 수준이야 말로 한국 언론의 수준이다. 

 

어찌되었거나 결국에 총선용 이벤트라고 할 수 있다. 대선까지는 보지 않는다. 당장의 총선에만 집중한다. 중도층 입장에서야 국회의원들이 의회를 내팽개치고 길거리에서 저리 극단적인 주장이나 펴는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언론이 이끄는대로 정치불신과 혐오에 빠지면 바로 투표를 포기하게 될 것이 바로 그들 중도층인 것이다. 대선은 몰라도 총선에서는 쓸모 없다. 그리고 총선에서만 승리하면 다시 문재인 정부를 식물정부로 만들어서 다음 정권도 노려 볼 수 있다. 나라가 망해도 자기들만 정권을 잡을 수 있으면 된다. 지지자들의 바람과도 같다. 다시 일제강점기가 와도 자유한국당만 정권을 잡을 수 있으면 기꺼이 지지해 줄 수 있다.

 

내가 이래서 자유한국당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 지지자들까지 혐오하는 것이다. 차라리 극단을 추구하더라도 이념적으로 순수한 모습만 보인다면 이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정략적이다. 모든 것을 이해로 판단한다. 이념도 신념도 신의도 도의도 무엇도 찾아볼 수 없다. 그에 비하면 민주당은 진짜 순진할 정도다. 너무 순진해서 화가 날 정도다. 나라경제가 어렵다면서 하는 꼬라지들이란. 야당을 비판하던 그 날선 언론들의 다소곳한 모습은 또 낯설기조차 하다.

 

총선은 벌써 시작되었다. 황교안도 벌써 총선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 하고 있다. 당의 현재도 미래도 오로지 내년의 총선에 달려 있다. 바른미래당도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내년 총선에서 어떤 구도로 선거에 임할 것인가. 그래서 과연 어제의 퍼포먼스가 선거에 얼마나 영향을 주기는 할 것인가. 참 바빠졌다.

아주 오래전 장승업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라는 양반이 장승업의 그림을 혹평하고 있었다. 좋은 그림에는 석왕기 문자향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장승업 그림에는 그런 게 없다. 하지만 정작 장승업이 제주도까지 김정희를 찾아갔을 떼 지금 네가 그리고 있는 것이 너만의 석왕기 문자향이란 말을 듣는다. 원래 김정희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도무지 장승업으로서는 알아먹을 수 없는 석왕기 문자향이란 단어가 그를 폄훼하는 의도로 사용된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그런 것이다. 상식이니 예의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블리제 오블리주라는 말도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는 편이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저들과 다른 만큼 저들과 다른 신분과 지위, 그리고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부터 지식이란 신분과 계급을 나누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었다. 오죽하면 가톨릭으로 하나가 되었던 중세 유럽에서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교회에서 강제하고 있었겠는가.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성직자의 권리이며 의무여야 한다. 그렇게 내가 너희들보다 더 많이 알고 따라서 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므로 내가 너희를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

 

국제사회에서는 아닐까. 입으로는 자유무역을 떠들어대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자유로운 무역을 막는 수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치적 올바름이다. 물론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에게는 아예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만만하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나라들만 골라서 정치적 올바름을 이슈로 문제삼고 규제하고 그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 대표적으로 개고기 논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하필 개고기였고 우리나라여야 했는가. 개고기를 먹는 나라나 민족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하필 우리나라의 개고기만 유독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었다. 딱 어떤 이유로든 규제가 필요한 대상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국제무역에서 선진국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지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필요가 생긴 것이었다.

 

이제는 탄소배출권까지 거래한다. 유럽과 전혀 상관없는 나라에서도 유럽이 제시한 환경기준을 지켜야만 한다. 어린이들에 노동을 시켜서는 안되고, 숲을 더이상 파괴해서도 안되고, 환경에 유해한 무언가를 사용해서도 안되고. 그래서 LNG선 수주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기도 하다. 해양오염을 막기 위해서 선박의 동력원을 규제한다. 규제가 반드시 산업에 피해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덕분에 갑작스럽게 LNG선의 수요가 늘면서 우리나라 조선업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새로운 규제가 더해지더라도 얼마나 사전에 잘 준비해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국제사회는 어떤 분야들에 대해 더 규제할 것이고 따라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대비가 필요한가.

 

애플을 비롯한 상당수 국제적인 기업들이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를 친환경에너지로 바꾼 사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이미 대부분 선진국들, 심지어 중국마저도 친환경에너지에 대한 많은 투자를 하며 그런 미래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명분상으로는 지속가능한 지구환경과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라지만 결국은 자칫 친환경에너지 자체가 규제가 되고 장벽이 될 지 모르는 장래를 대비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를 장벽으로 삼고 비대칭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친환경에너지로 생산되지 않은 제품은 수입하지 않겠다. 수입하더라도 더 많은 관세를 매기겠다. 친환경에너지로 생산한 자국 제품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여 경쟁력을 높이겠다. 실제 그런 행동들이 나타났을 때 그에 맞춰 준비하면 되지 않겠는가. 세상 일이란 게 그리 마음대로 쉽게 이루어지는가.

 

결국은 노하우다. 지식이고 기술이고 경험이다. 그래야 경쟁력도 생긴다. 어떻게 신재생에너지로 새로운 시대에 맞게 산업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기준으로도 이제 거의 초보단계다. 겨우 첫걸음이나 떼어 놓은 상태다. 그나마 이명박근혜 정부에서도 미래를 대비하며 꾸준히 투자해 온 결과가 지금 수준인 것이다. 원전은 사양산업이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원전의 발주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기껏 원전발주가 있어도 폐기물 처리에 폐로비용까지 요구하면서 채산성이 사라진 상태다. 오죽하면 일본 기업들마저 기껏 수주한 원전을 막대한 손해까지 감수하며 포기하고 물러나겠는가. 그런데도 익숙하니까 원전. 익숙하니까 예전 하던대로. 대안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독일은 이미 신재생에너지로 에너지 수출까지 하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남겨서 다른 나라에 팔고 있다. 오랜동안 투자해 온 결실을 지금 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세계 태양광시장은 중국이 거의 점유했다. 다른 나라들은 미래를 보고 가는데 우리만 과거로 돌아가지 못해 안달하는 중이다. 언론이 문제고 정치인이 문제고 지식인들도 문제다. 부화뇌동하는 것들이야 원래 그런 대중에 불과할 테니까.

 

어떻게 규제가, 정치적 올바름이 장벽이 되고 불이익이 되기도 하는가. 국제사회란 얼마나 치사하고 야비하고 저열하고 지독한 것들인가. 그냥 옳아서 옳은 것이 아니다. 그 옳음이 자기에게 유리하니 옳은 것이다. 그만큼 냉정하고 계산적인 것이다. 정치적인 올바름 이전에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해야겠다. 가치적인 옳음보다 경제적인 이익을 먼저 지켜야겠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미래가 없는 현재란 단지 과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심하다.

바로 언론보도로도 나온 내용이다. 이래서 내가 더욱 기자새끼들을 사람취급도 않는 것이다. 정작 사실보도나 분석기사가 정부비판과는 전혀 따로 놀고 있다. 도소매업 일자리 감소에는 최저임금을 비판하다가 정작 마트의 출혈경쟁에 대해서는 제대로 사실을 분석해서 보도한다. 온라인쇼핑의 증가로 대형마트의 매출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

온라인쇼핑몰보다 더 싸게 팔겠다. 온라인에서 소비자들이 사는 것보다 더 싸게 사도록 하겠다. 그렇지 않아도 생산자들을 쥐어짜가며 다른 재래시장은 물론 동네 중소소매업까지 아예 씨를 말리던 것이 대형마트들이었다. 나도 뭐라 말하지 못하는 게 오죽하면 이사온 지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주변에 어떤 상점이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냥 편하게 대형마트 가거나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라인보다 싸고 동네 상점들보다 더 싸면 그 피해는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니까 온라인 쇼핑이 늘어 자영업이 어려워진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 월급까지 깎아야 한다는 것인가.

굳이 버스타고 10분 걸리는 마트까지 가는 것도 귀찮다. 그렇다고 집 근처 상점들을 매번 필요할 때마다 찾는 것도 성가시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건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끝나는 일이다. 대부분 기술의 발전이란 그런 것이다. 열 사람 하는 일을 여덟이서, 다섯이서, 혼자서, 나중에는 아예 한 사람이 백 명, 이백 명의 몫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갈까? 대학에서 도대체 뭘 배우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그 지랄들 하는 것인지. 대형마트들의 출혈경쟁으로 정작 진짜 피해보는 것은 누구일 것인지. 이런 새끼들이 기자들이다. 역겨운 것들.
이러니 무당새끼들이라 하는 것이다. 무당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언가. 당신 그러다 큰 일 난다. 큰 일 날 테니 굿을 하든 부적을 쓰든 하라. 그런데 굿이든 부적이든 효과가 있다는 확신 같은 건 없다. 그냥 자기 돈벌어 먹자는 수작이다.


하여튼 뭐만 하면 최악이고 참사다. 진중하게 원인이 무어고 대책은 무엇인가 하다못해 전문가라도 찾아가서 의견을 듣기보다 그냥 자극적인 말로 감정부터 움직인다. 왜겠는가? 자기도 원인이나 대책같은 건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가 혹은 시청자가 한 번이라도 더 클릭하게 하려고 자극적인 제목만 붙이는 것이다. 혹은 자신들이 바라는 정치적 의도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기자새끼들은 기본적으로 개만도 못한 새끼들이라 개들도 싫어하는 목줄을 목숨처럼 사랑한다. 기자새끼들에게 언론의 자유란 권력의 개가 될 수 있는 자유다. 하긴 검찰도 법원도 개가 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정부가 일자리를 위해 재정을 투입하는 것도 반대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추경하는 것도 반대하고,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그러니까 결론은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낮추라. 노동시간을 늘리라. 해고를 쉽게 할 수 있게 하라. 사용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해달라.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가. 그냥 늘 하던 소리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만 말고 그것들이 진짜 대안인가 한 번 고민이라도 해 보라고. 신자유주의가 끝장난 게 언제적인데 아직 그딴 소리나 반복하고 있다. 무당의 주문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진짜 그러면 해결되는 것인가.

차라리 사실을 전달할 것이면 조금 더 건조해져도 좋을 것이다. 그냥 현실이 이렇다. 드러난 지표로 현재 상황이 이렇게 안 좋다. 이런 부분들에서 대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기사를 꼼꼼히 읽을 테니까. 문제들도 알게 될 것이다. 자기가 뭔 소리 하는 지도 모른다. 기사 안에서도 앞뒤가 서로 안맞는 경우도 생긴다. 정부를 비판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조금만 뭣해도 최악, 아니면 참사. 그놈의 최악이며 참사들의 기준도 다양하다. 30초만의 최악은 또 없을까?

서비스업이 왜 어려운가? 도소매업이 왜 이토록 힘든 것인가? 우리 동네에는 문구점이 없다. 체육사도 없다. 그 밖에 없는 것들이 많은데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고 산다.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진실을 말하라는 것이다. 믿음을 말하지 말고. 그러니까 변화하는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며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가.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저 보이는 현상에 본능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뇌가 없는 것을 그런 발작적인 반응으로 대신한다. 사람이기는 한 것인지.

고용유연화란 무엇인가. 도대체 누구의 고용을 유연하게 만들자는 것인가. 40대의 고용률을 걱정하는 언론들이 고용유연화를 지지하는 이유를 듣고 싶기도 하다. 임금을 낮추면 양극화가 사라지고, 해고를 쉽게 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 기적의 논리다. 재미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얼마전까지 결혼한 여자에 대해서는 밖으로 내돌린다는 표현이 일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여자가 집에서 살림은 않고 자꾸로 밖으로 다니며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다. 여자는 그저 집에서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면 되는데 괜히 밖으로 돌며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여자를 집에 붙잡아두지 못한 남편에게 돌아가고는 했었다.

 

실제 결혼한 여자가 돈벌이를 위해 나가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주변에서 남편에게 손가락질을 하고는 했었다. 오죽 남자가 변변치 않으면 여자가 밖으로 나가 돈을 버는가. 그래서 괜한 자격지심에 힘들여 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건사고들도 많았었고 여러 매체들에서도 여자가 일하고 남자는 노는 그런 가정들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일상적으로 보여지고 있었다. 정말 얼마전이다. 아니 지금도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관성으로 인해 결혼하고 아내가 집에서 살림만 했으면 바라는 남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뿐이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들 스스로 함께 맞벌이할 수 있는 여성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자기는 결혼하고 임신해서 애까지 낳은 여성들이 그를 이유로 불편을 끼치는 것을 극렬 싫어하면서도 내 아내만큼은 계속해서 직장에 다니며 월급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저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여성들을 아예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하면서도 내 아내만큼은 별다른 차별 없이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며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물론 더 솔직한 속내는 내 수입이 얼른 일정 이상이 되어 그냥 내 월급만으로 아내가 살림만하며 살 수 있게끔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다. 더이상 남자 혼자 벌어서는 아이를 낳을 수도 제대로 기를 수도 없다. 내집마련도 최소한의 여유와 사치까지 모두 불가능하다.

 

여성들이 밖에 나가 일하기 시작한 이유였다. 어느 순간 까지는 남성 혼자 벌어서 그 월급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했었다. 열심히 아끼면 나중에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도 보낼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권 같은 것이 되었다. 그나마 아이들 학원에라도 보내겠다고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보태보겠다고 허드렛일이라도 구하게 된다. 경단녀라는 단어가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었다. 조금씩 더 많은 결혼한 여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나서면서 이전의 전공이나 경력과 상관없는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리게 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결혼한 여성들도 자신들의 노동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은 결혼한 여성들마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게 만든 현실이 경단녀라는 사회문제도 만들어냈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 대해 미국 사회와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짚는 유튜브 동영상이 여러 커뮤니티를 떠돈 적이 있었다. 거기서도 이야기하는 맥락은 비슷했었다. 처음에는 남성들의 월급만으로 가계에서 충분한 소비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오르는 물가 만큼 남성들의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언젠가부터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여성들이 나가서 일하게 되었다. 결혼한 여성의 노동은 여권신장의 결과가 아닌 가계소득의 상대적 감소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자본의 이익을 위해 권장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렀을 때 차라리 가계로 하여금 빚을 내서라도 소비를 하도록 부추긴 결과가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것이었다. 딱 우리 상황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남편들이 돈 벌고, 그다음에는 아내들이 함께 돈 벌고, 그리고 이제는 빚을 내서 소비를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경제교과서에도 소득으로 성장을 주도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뒤집어보자. 소득이 성장을 주도한다는 것은 곧 소득의 증가를 통해 소비를 늘려 경제를 선순환케 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한국 경제는 오로지 생산과 투자만으로 성장해 오고 있었는가. 산업화 초기 아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내수를 기반으로 기업들이 성장하던 시기까지는 굳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다. IMF 이후 그야말로 바닥을 꿰뚫던 한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세운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까지 무엇이 특히 내수에 기대는 많은 기업들을 먹여살리고 있었는가. 자영업자들은 과연 어떤 소비자들을 통해 지금껏 이익을 얻고 생활을 해오고 있었겠는가. 바로 IMF 직후 카드규제완화로 인한 이른바 카드대란이 있었고, 이명박근혜 이후로는 부동산담보대출이 있었다. 한 마디로 카드빚이든 부동산을 담보로 잡은 빚이든 빚을 얻어 소비를 하고 경기를 살리라. 박근혜시절 성장률을 끌어올린 건설투자의 상당부분이 바로 이같은 부동산을 담보잡은 가계의 대출에 기대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소득주도성장은 없었어도 소비주도성장은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꾸준히.

 

그러나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이미 가계부채가 폭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경제에 큰 위협요인으로 자라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빚을 내다가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정도가 아니다. 그나마 미국과 일본은 단위가 다른 경제의 기초체력으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런 정도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내수의 위축으로 경제의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화폐개혁까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가계부채의 부담을 줄이고 한 편으로 내수를 다시 살려야 한다. soc투자를 반대했던 장하성에게 지금도 많은 비판이 몰리는 이유다. 소득주도성장은 그저 단순히 최저임금만 높이자는 정책이 아니다. 최저임금이 높아진 만큼 시장에 더 많은 돈을 풀어 실제 개인의 소득을 늘려주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시 소비를 통해 경제를 살릴 수 있다. 특히 언론사 기자가 이 사실을 몰랐다면 병신인 것이고 알면서 그따위 기사를 쓰고 있다면 쓰레기인 것이다. 

 

지금껏 우리 경제를 지탱해 왔던 것은 생산과 투자 만큼이나 민간의 소비였다는 것이다. IMF 이후 오랜동안 정체되었던 임금소득을 대신해서 카드빚과 부동산 대출로 경제가 성장한 만큼 소비를 하며 경제를 지탱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수에 기대는 기업들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수 없이 그 많은 기업들이 고용도 하고 투자도 하고 이익도 올릴 수 있었을까? 내수 없이 기업들이 해외에서 유수의 메이커들과 경쟁할 만큼 실력을 쌓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여전히 부동산 투자를 부추기며 부동산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자. 부동산을 통해 경제를 살리자. 언제까지? 이미 가계부채가 위험한 수준에까지 이른 지금 도대체 무슨 돈으로 개인더러 집을 사고 부동산 경기를 살려야 한다 말하는 것인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언론도 지적하지 않는 부분이다. 왜 소득주도성장인가. 과연 이전에는 없었는가? 소득주도성장이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맥락없고 뜬금없는 누군가의 주장에 지나지 않는가. 최저임금 때문에 물가가 올랐다고? 그런데 물가는 최저임금이 그대로일 때도 항상 오르고 있었다. 내 월급이 오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더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제야 겨우 임금상승이 물가상승을 따라잡는다.

 

소비야 말로 경제의 근간이다. 소비란 욕망이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 인간은 일을 하고 굳이 멀리까지 가서 비싼 돈을 주고 그것을 구입하기도 한다. 그를 목적으로 모든 경제활동은 이루어진다. 하지만 인간이란 수단에 불과하니까. 경제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애써 숨긴다. 어째서 역대 보수정부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빚을 내도록 떠밀었는가. 모르면 속는다. 속으면 당한다. 추악한 것이다. 같은 것들이 여전히 같은 짓을 하고 있다. 

무당을 찾아가 물으면 대답은 대부분 비슷하다. 묫자리를 잘못 썼다. 집터가 안좋다. 귀신이 씌었다. 그러니 부적을 쓰고 굿을 하고 새로운 터를 알아보라. 내가 해 주겠다. 아주 비싼 값에.

 

세상에 수많은 일들이 있고 각각의 일들마다 그만큼이나 많은 원인과 이유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원인과 이유에 따른 해결방법들이 모두 다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이 무어고 이유가 무어고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당장의 곤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무당에게 그만한 지식이나 능력이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러니까 가장 쉽게 귀신을 말하고 터를 말하고 부적과 굿을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부터 한다.

 

한국 언론의 기사라는 것도 거의 비슷하다. 한참 열심히 떠들다가 나오는 답이란 결국 최저임금, 아니면 탈원전, 아니면 미세먼지의 경우는 중국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않는 듯하다. 다른 대안들에 대해서도 전혀 고민같은 것은 해 본 적 없는 듯하다. 세계경제가 안좋아도 최저임금이 문제이고, 국제무역량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데 근로시간을 줄여서 수출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제대로 기술투자도 않고 기업을 사유화하여 오히려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는 사이 경쟁상대인 중국에 추월당한 상황에서조차 반기업정서가 기업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금호그룹과 한진해운을 망친 것은 반기업정서인가? 기업을 사유화한 경영자들이었는가?

 

하지만 그런 면밀한 분석 따위 없다. 어째서 자영업자들은 어려운가. 어째서 자영업자들은 곤란을 겪고 있는가. 내수가 침체된 이유는 무엇인가? 수출이 부진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정부는 어떤 정책을 통해 당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대안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있기는 하다. 벌써 수십년째 떠들어대는 소리들이다. 규제를 풀고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지난 이명박근혜시절 그렇게 했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과연 지금 경제상황에서 그런 정책들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알 리 없지 않은가. 아는 것도 없이 그저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쓰려니 그냥 집터 타령이나 귀신 타령처럼 익숙한 레파토리만 반복해 읊어댈 뿐이다.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기업이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당장 한진해운과 금호그룹이 그러다 망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조양호를 대한항공 이사에 선임되지 못하게 한 것은 과연 국민연금이었는가? 조양호 일가로 인해 실추된 대한항공의 이미지에 대한 주주들의 분노였는가?

 

고용지표가 나빠지면 왜 나빠졌는가? 오히려 장기적인 추세를 보며 고용이 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는 왜 그런가? 고용이 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어째서 그런가? 그러면 정부의 역할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앞으로 구성원들은 이같은 현실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그런 현실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저 하는 말이란 IMF 이후 최악, IMF보다 더 최악, 어찌되었든 최악, 어찌되었든 최저, 어찌되었든 최고, 그러니까 나라 망한다. 경제 망한다. 그래서 뭘 어째야 하는가? 눈앞에 있는 저놈들부터 때려죽이자! 이런 게 선동이다. 다른 게 선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소득을 올려 내수를 키우고 그를 통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세계경제가 안좋고 국제무역이 줄어들며 수출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국내경기를 살려야 한다. 답이 무엇이겠는가. 소비를 하라. 기꺼이 국내에서 소비를 하며 돈을 쓰라. 그렇게 돈을 쓸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돈을 풀라. 그래서 더 어이없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의 재정이 가정에서 가계부 쓰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는 모양이다. 기업에서마저 필요하면 과감히 빚을 내서라도 투자를 하고는 한다. 오히려 더 많은 빚을 지더라도 공격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우마저 있다. 정부의 재정이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재정에서 이익을 남겨서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따라서 당연히 있는 재정은 모두 소모하는 것이 옳다. 필요하다면 빚을 내서라도 경기를 살리고 국민들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다. 몰라서 그리 떠드는 것이든 아니면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든 언론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저 공포심만 자극한다. 혼란만을 조장한다. 그동안 한국정부의 경제정책들이 표류하게 된 원인 가운데 대부분은 언론들이 제공한 것이다. 당장의 단기적 처방들에만 급급하다. 고등수학보다는 그저 초등학교 산수 수준의 정책들만을 선호한다. 재정적자가 어떻고, 성장률이 어떻고, 기업의 이익이 어떻고, 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고 고용을 희생해서 기업의 이익을 높이면 경제도 좋아진다. 그냥 믿음이다. 신앙이다. 종교다. 그래서 더욱 그리로 사람들을 내몰려 한다. 다른 생각은 감히 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 원인은 무엇이고 해법은 무엇인가. 단기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 경제는,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당장 무엇부터 고민해야만 하는 것인가. 주제가 안되니 기사도 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기자랍시고 아는 척 써대려니 할 수 있는 것이 무당짓 밖에.

 

IMF가 대한민국 경제를 분석해서 전망치를 내놓았다. 그리고 조언도 곁들였다. 세계경제의 일부로서 대한민국 경제를 철저히 살피고 있었다. 그런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고도 자기들이 언론이라 말한다. 똥도 거름으로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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