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식는다니까 그 의미를 잘못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이 식었다니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여전한데 단지 그 정도만 다른 것이다. 전만 못하게 좋아할 뿐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식었다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연애라도 한 번 해 본 사람은 안다. 마음이 식으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다.
일단 서로에 대한 마음이 식으면 더 이상 싸울 일도 없어진다. 이게 제일 무서운 것이다. 싸운다는 것은 뭐라도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를 바라고 무리해서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도 지르고, 울며 악다구니도 쓰고 하는 것이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남아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싸우는 것도 포기하고 그냥 내버려두게 된다.
"어차피 쟤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오래된 연인일수록, 오래 함께한 부부일수록, 평생을 함께한 친구일수록 한 번 틀어지면 회복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부모자식간에 틀어지면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동안 쌓여 온 감정이 상대를 그렇게 단정하고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원래 그런 사람이니 굳이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기대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설사 상대가 태도를 바꿔서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려 해도 사람들은 의심부터 한다.
"저 사람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지? 무슨 꿍꿍이가 있나?"
의심이란 또다른 확신이다. 상대에 대한 너무나 확고한 믿음이 그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의심부터 하게 만든다. 그는 그런 사람이기에 또한 그럴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보인다면 속에 숨긴 다른 계산이 있는 것이다. 이미 상대의 진심에 대한 확고한 단정이 있기에 그로부터 벗어난 말과 행동들에 대해 그 계산을 의심하며 헤아리려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이 단계에 이르면 아무리 진심으로 다가가려 해도 온전히 그것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거기에 계산이 더해자면 다시 확신만 더해준다.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니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아직 관계가 유지된다면 바로 한국인이 말하기 좋아하는 바로 '정'이 마지막 끈이 되어 줄 것이다. 오래 사귄 연인이니까,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부부니까, 그동안 평생을 함께 해 온 친구니까, 피를 나눈 가족이니까, 정확히 그건 정이라기 보다 의무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동안의 신뢰를 배신하는 파렴치일 테니까. 그래도 마지막까지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존중만큼은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을 다른 말로 의리라 한다.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유지되는 관계인 것이다. 최소한 내가 이 관계를 파탄내는 당사자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네가 나쁜 놈이다를 바로 시전하면 어떻게 될까?
말하자면 내가 관계를 깨기는 싫은데 상대가 나서서 먼저 네가 배신자라며 비난하고 나서면 그때도 여전히 그저 의리만으로 관계를 붙잡고 버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여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쌍팔년도도 아니고 이혼이 두려워 그저 남편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버텨야 하던 시절도 아니고 네가 배신자라며 비난하는데도 이미 마음이 식은 상태에서 그에 대한 의리를 지킬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리마저 사라진 공간에 남는 것은 이미 자리잡고 있는 상대에 대한 확신, 어차피 너는 그런 놈이란 한 가지 사실만 남게 된다. 어차피 너는 그런 놈이고 그러므로 나랑도 맞지 않는데 나를 비난하기까지 했으니 이제는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즉 이재명이 먼저 나서서 문조털래유로 반명몰이만 하지 않았어도 잘만 했으면 반명까지 갈 필요도 없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그래도 민주당 대통령이니까 지지는 해 주겠다는 의리 정도로 꽤나 오래 관계가 유지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문재인이 그랬었다. 문재인 정부 막바지에 이르면 나도 역시 어려가지로 실망한 것들이 겹쳐서 그다지 별 기대도 없는 상태로 임기부터 무사히 마치자며 그냥 반쯤 방관모드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를 앞장서서 비난하지 않은 것은 아직 그 정도로 감정이 틀어지지 않은 상태라 그냥 이대로 주욱 유지만 하자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도 아예 지지를 철회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적당히 미련이 남은 상태에서 외부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함께 방어하는 정도는 되었었다. 노무현 퇴임하고 나서도 그를 크게 좋아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그를 공격하면 마주 방어하며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재명만은 왜 다른가? 그가 먼저 반명이라며 공격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아직 이재명에 대한 태도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반명이라며 공격에 나서니 오히려 마음이 식을 사이도 없이 반발만 먼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분노였다. 이 새끼가 지금 나를 공격했다.
유시민의 ABC론이 그의 주장과 다르게 적용된 이유일 것이다. 유시민이 처음 ABC론을 이야기했을 때 대통령이 먼저 지지자를 공격하는 상황까지는 가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도 대통령과 지지자 사이에 최소한의 유대가 남은 상태에서 더 이상 전과 같은 열정이나 애정이 사라진 상황을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한 것이었다. 그럴 경우에도 지지자의 마음은 충분히 위험할 정도로 식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통령이 아예 먼저 나서서 지지자들을 공격하고 나섰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식기 보다 먼저 반발하고 분노하며 가속화된 냉각은 상대에 대한 불신을 더욱 강한 확신으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닌 인상에 대한 것이었다. 바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지금 식어버린 지지자들의 마음을 되돌리기가 어려운 것인가. 바로 그것이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논리는 설득할 수 있지만 감정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감정을 되돌리는 것은 감동인데, 그러나 감동이란 것은 상대에 대한 전적인 신뢰 위에 가능한 것이다. 대상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동의할 수 있을 때 감동이란 것도 가능한 것인데 과연 그런 신뢰가 이재명과 지지자들 사이에 남아 있을 것인가. 사실 그래서 식었다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냉소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네가 뭐 어디 가겠어?"
팔짱을 끼고 한 걸음 물러서서 턱을 치켜들고 가만히 깔아본다. 코미디언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세다. 가수든 배우든 가장 싫어하는 관객의 태도일 것이다. 저러면 세상 누가 와도 웃기고 울리고 감동을 주지 못한다. 어떤 대단한 명곡을 들려줘도 그저 콧방귀만 돌아올 뿐이다. 그러면 그런 상황을 누가 만들었는가?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다. 지지자도 이따위로 대우하는 놈들이 외연을 확장하겠다? 중도층도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지켜보고 있다. 대통령이 자기 지지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한국사람들이 예로부터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인정없고 의리없는 놈들이었다. 정청래 찍어내는 것 보고 과연 중도층들이 이재명 잘했다 칭찬해줄 것 같은가. 그럴 것 같아서 내가 보는 사람마다 이재명과 정청래의 인연이 2007년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다니는 중이다. 20년 가까이 이어진 인연을 이따위로 끝낸 것에 대해 혀를 차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자업자득이다.
이재명의 개각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유일 것이다. 뭘 하든 이제는 그다지 흥미도 관심도 없다. 솔직히 비난하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이재명 자체가 싫은데 이재명이 뭘 얼마나 잘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재명이라는 인간에 대한 확인이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았는데 다른 것이 끼어들 자리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재명은 앞으로도 그냥 이재명일 뿐이다. 그래서 식는다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에 분노와 배신감을 끼얹는다. 불을 질러 버린다. 참 대단한 인간이다. 이렇게 자기 지지기반부터 박살낸 인간도 역사상 드물었다. 윤석열보다도 한참 밑이다. 훌륭한 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