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이라고 하면 그저 막연히 뭔가 크게 좋아지고 덕분에 내 삶도 나아지겠구나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실상을 보면 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당장 노동의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더 정확히 노동이 사라질 수 있다.


하긴 원래 기술발전이란 것이 그랬었다. 하나의 기술이 발달하면 그만큼 그와 관련한 노동의 재편이 일어났다. 대부분 그런 재편들은 노동수요의 감소, 즉 실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농업기술의 발달로 개인이 더 많은 면적을 경작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도시노동자의 증가다. 농촌에서 일자리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저임금노동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나마도 기계가 더 빨리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게 되면서 도시에서도 대량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러다이트 운동이란 것이다.


더이상 나이많은 숙련된 노동자가 필요치 않게 되었다. 괜히 인건비도 비싸고 다루기도 불편한 건장한 남성보다 그저 기계만 가르쳐준대로 조작할 수 있으면 어리고 약한 아이들이 자본가들에게는 더 유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여성과 아이들의 임금은 남성보다 훨씬 낮았고 이는 곧 노동계급의 소득과 생활수준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하긴 이제 4차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그런 여성과 아이들마저 공장에서는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생산을 기계가 대신하고 단지 소수의 전문인력들이 그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할로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 나머지 노동자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마 학교 다닐 때 다들 배웠을 것이다. 1차산업, 2차산업, 그리고 3차산업이라고. 처음에는 농사짓고, 가축 기르고, 물고기 잡고, 광물을 캐다가, 조금 더 지나서는 그것들을 가공해서 더 가치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나중에는 그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드는 일에 직접 종사한다. 마지막이 서비스업이다. 첫째 더이상 많은 노동력과 노동시간이 필요없게 되니 노동자의 수도 줄이고 노동시간도 줄이는 대신 임금을 높여서 그를 통해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나머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그 높아진 임금을 받으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서비스업이 발달하는 것이다. 그저 사람만 값싸게 많이 동원하는 제조업에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들을 중심으로 경제구조가 바뀌며 나머지 인력들은 다양한 서비스업으로 흘러들어간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충분히 쓸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지 못하면 서비스업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당장 선진국들에서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는 자체가 더이상 전처럼 임금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인식 때문인 것이다. 더이상 임금노동으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지 못하게 되면 이전과 같은 복지정책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불어 갈수록 일자리는 줄어들텐데 더 적은 임금으로도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 필요도 있다. 즉 일자리가 줄어드는 대신 더 적은 임금만 받고 더 적은 시간만 일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사람들이 일자리를 나눌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그 재원은 역시 노동자의 수를 줄인 대신 더 많은 이익을 거두게 된 기업들이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자리가 사라진 시대에도 시장은, 수요는 유지될 수 있다.


어쩐지 감이 잡히지 않는가. 소득주도성장론의 전제도 바로 기술의 발전으로 더이상 생산부분에서는 일자리를 전처럼 늘리기 힘들다는 현실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보다는 소비를 늘려야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이미 소비를 늘려보겠다고 땅도 파보고, 아파트도 지어 보고, 대출규제도 풀어보았다. 그러나 생각처럼 소비는 늘지 않았다. 당장 소득이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의 비판은 참으로 쉽다. 왜냐면 과거의 논리를 가지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전의 논리들로 새로운 정책들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정부의 반론은 어렵다. 왜냐면 아직 증명되지 않은 단지 가능성이고 실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편하다고 쉽게 이해가 된다고 과거의 방식들을 답습하기에는 벌써 지난 정부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론들은 지난 정부의 경제에 대해 절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지금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지난 정부에서 경제가 어땠었는가 절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비교대상은 없다. 중국도 미국도 우리의 비교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와 비교대상이 될만한 나라들 가운데 우리보다 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는가. 그래서 과거의 논리를 소환해 오는 것이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아무일도 없었던 시절의 경제모델들이다. 이미 실패한 모델들이고 앞으로도 더 크게 실패할 모델들이다.


끔찍하다. 공장은 자동화되고 그래서 실업자는 늘어나는데 임금수준은 그대로다. 공장을 늘려도 더이상 노동자의 수는 늘지 않는데 임금수준만 여전히 그대로다. 경제가 성장하는 만큼 물가도 따라서 오를 텐데 노동자의 임금소득만 그대로다. 자영업이 왜 어려운가. 당장 소비를 하려 해도 소비할 돈이 없다. 대부분 소비하고 싶어도 소비할 돈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무슨 자영업이 살아나겠는가.


자영업 어렵다는 이야기는 지난 정부에서도 나왔었다. 최저임금 오르기 전에도 자영업의 폐업률은 높았었다. 역시 언론에서 말하지 않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과거 정부로 돌아가자. 그래서 뭘? 더구나 4차산업혁명시대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다면서.


기자가 아닌 무당이라 부르는 이유다. 정치인들이야 원래 그쪽 방면에는 무식한 놈들이 대부분이니. 대중들이야 익숙한 논리가 옳은 논리로 여겨질 터다. 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더이상 투자를 늘린다고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다. 공장을 더 많이 지어도 일자리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는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고 있다. 줄어든 일자리마저 쪼개야 하는 미래가 이제 곧 나가온다. 얼마 멀지도 않았다. 저들만 지난 시간 속을 산다. 어이가 없다.

외교든 거래든 상대의 입을 보지 말고 손을 봐야 한다. 무슨 말을 하는가가 아닌 무엇이 손에 들렸는가를 봐야 한다. 외교는 말로 하는 것이지만 결국 결론은 손에 무엇이 들렸는가로 난다. 그래서 과연 그 말이 자신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고 어떤 타당성이 있는가.


최선희가 뭐라고 떠들기는 했는데 사실 이번 하노이 회담으로 북한은 밑천을 거의 까발린 상태라. 그래서 트럼프가 저리 강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봐야 제재가 조금 더 강해지고 조금 더 연장될 뿐일 테니. 지금 김정은에게 남은 것은 미국의 제안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둘 중 하나 뿐이다. 그리고 둘 중 김정은이 살 수 있는 길도 하나 뿐이다. 다만 조금 더 완화된 길일 수는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빨리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김정은을 위해 그림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어떤 그림으로 김정은의 독재자로서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그가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인가. 못하면 마는 거고.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제재따위보다 그냥 폭격해버리는 쪽을 지지하는 터라. 걍 시원하게 폭격기 보내서 조져버리고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여론이 그리 흐른다면 정부도 어쩔 수 없겠지. 오히려 그쪽이 정부를 위해서도 좋다. 전쟁은 항상 정부에 대한 지지율을 높여준다. 기회가 될 수 있다. 좀 짜증난다.

최근 유튜브 경제채널을 보면 중국경제 망한다며 좋아라 날뛰는 이들을 적잖이 볼 수 있다. 이제 중국경제는 망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 경제가 대신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경제가 살아나려면 당장 수출이 늘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가장 많은 수출을 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일까?

언론이 허구헌날 최저임금 탓만 하니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째서 지금 한국 제조업의 사정이 이렇게까지 좋지 않은가. 당장 사드배치에 따른 중국정부의 경제보복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너무 큰 타격을 받아서 아예 중국시장에서 철수해버린 대기업도 상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겨우 사드보복을 철회시키려니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전쟁이 일어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시장이 무역전쟁으로 말미암아 사정이 안좋아진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볼까?

괜히 대부분 자본주의 선진국들마저 성장률이 2% 미만으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란 것이다. 중국 상품과 경쟁하지 않으니 더 좋아질 것 같지만 그만큼이나 중국에 자신들의 상품을 많이 팔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반드시 미중무역전쟁 때문이 아니더라도 중국경제가 가지는 내적 모순도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수출을 위해 임금을 억제한 결과 중국시장 자체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기업들의 위기도 내수에 크게 기대 성장해 왔는데 중국 내수시장이 한계를 맞이한 영향이 상당히 크다. 그런데 여기에 미중무역전쟁까지 일어났으니. 그런데도 우리 경제는 2.6%의 성장을 하고 그 가운데 상당부분을 소비를 통해 이루고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런데도 정작 그런 사실들을 보도하지 않으니까. 왜 제조업이 어렵고 어째서 수출이 전만큼 좋지 못한가 제대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니까. 오로지 모든 것이 최저임금 때문이고 소득주도성장 때문이다. 수출이 안되는 것도, 경기가 안좋은 것도 외적 요인 없이 오로지 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니까 멋도 모르는 것들이 중국경제 망한다니까 좋아서 날뛰고 있는 것이다. 진짜 중국경제가 망하면 어떤 큰 일이 벌어질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망하는 거다. 다같이 폭삭 망해 죽는 것이다.

괜히 대통령이 신남방정책이라며 뻔질나게 동남아로 인도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인도의 인구가 거의 중국과 비슷하다. 동남아시아의 인구를 모두 더하면 대충 중국 시장과 비슷한 정도가 된다. 중국을 대신할 시장을 찾는다. 중국을 대신해서 우리 상품을 사줄 시장을 찾아서 뚫는다. 그런데 이 역시 언론은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어째서 대통령이 동남아시아를 찾고 거기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아예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니 대통령이 카타르 정부로부터 60척의 LNG선을 발주받은 사실을 정작 경제신문만 보면서 모르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경제를 알려면 신문 경제면같은 건 보지  말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신문 경제면이나 경제신문들은 스폰서의 요구를 대변하는 홍보지같은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보도가 아닌 주관적인 일방적 요구와 바람만을 담는다. 아주 가끔은 상당히 심도깊은 분석기사도 물론 내놓기는 한다. 아주 가끔이라 문제기는 하지만.

과연 지금 중국경제가 망하면 어떻게 될까?중국 제조업이 망하고 기업들이 망해 나가떨어지면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는 좋기만 할가? 당장 국내 제조업 경기가 안좋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 없다. 그냥 아무것에든 최저임금만 갖다 붙이면 논리가 되고 근거가 된다. 한국 기레기들이 기사쓰는 방식이다. 미중무역전쟁의 심각성에 대해 그래서 한국사람들만 잘 모르는 것 같다. 웃긴다.
평소 경제신문만 읽으면서 경제에 대해 무척 아는 척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무심코 최근 조선경기가 살아나서 정부와 지자체에서 직업훈련을 지원하고 있다니 바로 놀란 표정을 짓는다. 몰랐던 것이다. 경제신문이라면서 정작 정부에 유리할 것 같은 기사는 아예 내지 않으니 금시초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대 뿐만 아니라 도요타 등 세계 유수의 메이커들도 전기자동차와 수소자동차를 동시에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는데 정작 정부가 수소에너지를 지원하겠다 하니 세상에 쓸데없는 돈낭비가 되어 버린다. 전기자동차의 해결할 수 없는 약점 때문에라도 수소자동차를 병행해서 연구해야 하는데 수소자동차는 쓰레기고 따라서 정부도 허짓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바로 이 수소에너지 때문에라도 LNG 운반선은 앞으로 중요하고 그래서 시장성이 높다. 이 부분도 자칭 경제지들은 잘 다루지 않는다.

속으로 웃었다. 항상 경제 어쩌고 하며 정부를 비판하던 사람인데 정작 경제지 보느라 경제 돌아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게 한국 언론의 수준이다. 경제지면 경제지답게 사실만 보도해야 하는데 정치질이나 하고 있으니. 사회상부구조가 사회하부구조를 지배하려 할 때 나타난 대표적인 부작용이 바로 소비에트의 공산당독재였다. 어쩜 닮았을까.

아무튼 그럼에도 최저임금타령만 없으면 경제기사들도 한 번 읽어 볼 만하기는 하다. 어째서 지금 경제가 이 모양이고 자영업이 어려운가에 대한 답이 바로 거기 있으니. 멀쩡한 기사를 쓰다가도 기승전최저임금이니 문제지. 그래도 대학도 나온 기자들이 멍청해서 그런 기사나 쓸 리는 없다. 그게 더 나쁘기는 하지만. 하여튼.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초기피해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당시 영국사회가 믿고 있던 한 가지 공리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 때는 도움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가난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가난이란 가난한 이들이 더 노력하게 만들기 위한 채찍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대기근 당시도 도움을 받지 않는 다른 가난한 농민들보다 더 적은 양의 먹을 것만을 더 열악한 환경에서 겨우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모든 구성원에게 도덕적 당위로 받아들여질 때 가난은 그같은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데 따른 징벌이 된다. 당연히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부와 높은 지위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자긍심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수치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마땅히 성공한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동정하는 한편 경멸하고 혐오할 수 있어야 한다. 동정과 연민이 다른 이유다. 그러므로 모든 구성원은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본보기다. 그래서 어려서 부모님들도 항상 자식들에게 그리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어릴 적 교과에서도 실렸던 개미와 배짱이의 이야기도 결국 배짱이가 겨울에 얼어죽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개미가 배짱이를 돕게 되면 여름 내내 놀며 지냈던 배짱이와 배짱이가 노는 동안 피땀흘려 일했던 개미의 결론이 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짱이는 얼어죽는 것이 옳고, 그런 배짱이를 비웃으며 개미는 자신이 노력한 결과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한다며 개미가 배짱이를 돕는 장면으로 끝내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배짱이가 얼어죽고 개미는 풍요롭게 겨울을 나는 결말이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송곳'에서 노무사 구고신은 자신의 강의를 듣는 노동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벌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아서.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서. 혹은 남들보다 운이 없어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한 가지 정답을 제외한 다른 답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에 따른 징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은 가난이어야 하고, 멸시여야 하고, 차별이어야 하고, 때로 학대여야 한다. 그래야 열심히 공부를 한다. 그래야 열심히 일하고 노력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처럼 될 수 없다면 그를 통해 다른 이들을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3대가 가난하면 상종하지 말라. 오로지 모든 것을 개인의 의지의 문제로 돌리고 만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그렇게 어렵게 힘들게 고통받으며 사는 것은 네가 올바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처럼 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 말한 한국사회에서 특히 젊은 층들이 보수화되는 이유에 대한 보론이다. 사실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은 아닐 것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특히 젊은 층들을 적잖이 봐 왔었다. 당장 참여정부 시절에도 노무현을 지지하던 지지자 가운데 비정규직에 대해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 비정규직 된 것이라며 그들의 정규직화나 처우개선에 대해 강한 반대를 내보이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아마 당시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 40대가 되었을 것이다. 고작 하는 일이 그런 것인데, 그런 것들밖에 아무 재주도 기술도 능력도 가지지 못했는데, 그러므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우를 보다 낫게 하기 위한 어떤 행동에도 동의할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당장 자신의 문제임에도 젊은 층들이 오히려 최저임금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등에 대해 심지어 적대적이까지 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양성평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극단적인 여성주의나 반여성주의 모두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편에 대한 보다 엄하고 가혹한 사회적 징벌이었을 것이다. 사회로부터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그러면서도 그마저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결과다. 상대가 해 온 행동들에 대한 결과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다. 심지어 무심해질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곤란하고 불리한 처지에 놓이든 그것은 그동안의 행동들에 대한 결과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공정함이며 정의일 것이다.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이야 말로 자신들의 노력을 증명하는 증거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 노력했다면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또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면 더 적은 것들만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마땅히 반성하고 다시 노력할 수 있도록 아예 큰 벌을 받아야만 한다. 더 적은 임금과 더 열악한 대우와 더 가혹한 조건이 그들을 다시 남들처럼 노력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은 정의롭다. 성과 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에, 대학졸업자와 고졸 사이에, 서울과 지방출신 사이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그리고 아르바이트들에 대해서도. 그래야지만 사람들이 경쟁에서 이기려 노력할 테니까.


누가 가르쳤겠는가? 그래서 말하지 않는가.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말해왔었다. 바로 이 한 마디 말이 이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노라고.


"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저 아저씨처럼 돼!"


그래서 성공한 이들을 동경하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하고,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조차 실패자라며 멸시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월호 당시 일베가 저지른 폭식투쟁인 것이다. 강자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을 멸시함으로써 대신해서 만족감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정당한 승자인가 타블로의 학력을 그리 헤집어댔던 것이었다. 스탠포드씩이나 나와서 힙합따위나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정당한 보상인가. 고작 그런 보상을 받으려 타블로는 스탠포드에서 석사까지 받았던 것인가. 자신들이 지금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고작 그런 정도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월급을 적게 받는 것이 옳다. 비숙련노동자라면 스마트폰도 필요 없고 문화생활도 필요 없고 그저 딱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벌 수 있으면 된다. 비정규직이면 비정규직 답게 고용도 불안하고 처우도 열악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과거보다 더 솔직해지고 더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정부의 평등정책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그 출발조차 평등하지 않다. 정당한 차별이야 말로 평등이고 공정이고 정의다. 여기는 여성도 남성도 없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세대에 따른 생각의 변화는 있었을까.


그냥 생각이 미쳤다. 최저임금에 대한 젊은 층들의 적의에 가까운 반발을 보면서. 현실의 많은 차별들을 줄이기 위한 노력들에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과 정의로운 결과에 대한 문재인의 약속을 들먹이며 조롱하기까지 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동안 특히 젊은 층에서 소비하던 장르소설들을 함께 읽으며 느낀 감상들까지 더한다. 많은 부분 반복되었다. 결국 같은 사람이 비슷한 주제로 쓰는 글일 테니까.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이다. 아마 이런 이유들 때문은 아닐까. 시험에 익숙하고 경쟁에 익숙하다. 그렇게 길들여져 왔다. 과연 틀린 것인가. 다르다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세대와는. 어쨌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득주도성장이란 자체가 양적완화의 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이해했었다. 어차피 내수가 침체되었으면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 돈을 풀어야 하는데 위에서부터 풀 것인가, 아니면 아래에서부터 풀 것인가. 중국이나 일본이나 주로 자본투자 형태로 위에서 돈을 쏟아부었었다. 미국 역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당시 막대한 돈을 금융기업들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가 어땠는가?


이미 세계의 소비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른 지 오래다. 생산이 늘어나는 속도를 소비가 아주 오래전부터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갈수록 생산은 느는데 시장의 소비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대부분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어떻게 현상황을 타개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정부가 나서서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시장에 돈을 풀어야 한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그래서 우리 정부가 선택한 것이 바로 노동자에게 소득을 늘려주는 소득주도성장인 것이다. 처음부터 급격한 최저임금인상은 정부재정에서의 지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하성의 실책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급격하게 최저임금을 올리면서 노동자의 소득을 중심으로 내수를 늘리려 했다면 그만한 재정의 확대가 동반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위해 기업들에 풀고, 한 편으로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정부주도의 공공사업들을 더 많이 벌린다. SOC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의 성공을 위해서는 분명 더 많은 투자가 시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냥 노동자의 최저임금만 올려주면 되겠거니. 그 말을 그대로 믿은 문재인 대통령도 잘못이 아주 없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타면제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SOC에 투자하고 경기를 불러일으키겠다. 정부가 재정을 투입해서 더 많은 토목공사를 일으킴으로써 그만큼의 고용과 수요를 불러일으키겠다. IMF의 경고도 바로 그런 맥락이다. 세계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부분이다. 오히려 오른 최저임금이 든든하게 소비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경제수준에 맞는 적극적인 재정정책들을 펼치라. 더 공격적인 통화정책을 펼치라. 그런데 언론들은 거꾸로 말하고 있다. 내가 경제지 기자들을 무당이라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의사가 있는데 혼자서 귀신들린 소리나 하고 있다.


더 많은 공무원을 고용하고, 더 많은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더 많은 토목과 건설을 계획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든 정부가 재정을 통해 통화를 늘리고 시장에 돈이 돌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렇게 어느 정도 경기를 부양하고 나면 그때부터 고용개혁이든 뭐든 가능해질 것이다. 1년을 허송세월한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최근 내린 결론이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소득주도성장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작은 정부란 신자유주의의 실패 이후 흘러간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서 시장을 지탱하며 엇나가지 않도록 이끌어야만 한다. 부동산 규제도 그런 맥락이다. 개인들에게만 맡겨 놓았을 때 시장은 때로 거대자본에 의해 너무 쉽게 왜곡될 수 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거대한 국가라는 자본 뿐이다. 아직도 철지난 이야기를 부여잡고 죽은 아기에 젖을 물리고 있다. 대단한 대한민국 언론들이다.

내가 여성주의자들을 그토록 싫어하고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대로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를 지지하는 글도 쓰는 이유는 별 것 없다. 그냥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아예 쌍욕까지 하며 멱살잡고 싸우다가도 상대가 하는 말의 논거가 탄탄하고 주장이 타당하면 그렇구나 인정하게 된다. 인정하면 당연히 동의하는 것이고 동의했으니 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과 다른 이성의 판단이다.


내가 지금 여성가족부에 분노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사실 나는 얼마전까지 여성가족부에 대해 그다지 나쁜 감정이 없었다. 정부에 여성가족부 같은 것 하나 있어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 어차피 대부분 정책들이 남성위주로 돌아가는데 여성만을 위한 정책을 펴는 부처가 당장 있어도 크게 문제는 되지 않겠다. 단, 전제가 필요하다. 잘한다면. 그래서 모두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그래도 여성가족부의 필요를 인정할만한 것이었다면.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현정부가 페미니즘 정부가 아닌 고도의 안티페미니즘 정부일 것이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에게서 보았던 내적 모순들이 오히려 더 많은 재량을 쥐어주었을 때 더 크게 노골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여성에게 하면 차별이지만 남성에게 하면 차별이 아니다. 여성은 그래도 되지만 남성은 그러면 안된다. 더 나아가 여성은 이렇고 남성은 이렇고, 여성은 이래야 하고 남성은 이래야 하고. 이런 게 차별 아닌가. 대상을 단정짓고 행동까지 강제하는 것이야 말로 억압이고 혐오이지 않는가.


여자아이가 인형을 가지고 놀고 싶으면 그러는 것이다. 남자아이가 로보트를 가지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마저 자신들의 선입견에 맞춰 아이들에게 강제하려 한다. 아이들이 하고싶은대로 최대한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 그럼으로써 아이들이 자신의 취향이나 지향이나 희망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서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서로 다른 차이가 드러나게 되면 그마저도 선선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억지로 무언가를 틀린 것으로,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획일적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권력을 가질 수 없으니까. 기득권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나아가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들의 좁은 시야와 세계에서 비롯된 얕은 편견들이 여성가족부의 정책을 통해 가감없이 드러난다. 차라리 적의라면 낫다. 차라리 여성주의자들을 적으로 여기고 그들과 싸우겠다는 것이면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대통령이다.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민주당이다. 저것들은 그냥 병신이다. 찌그레기들이다. 대통령과 민주당의 비호만 없으면 그대로 스러질 허깨비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이 저렇게 설칠 수 있는 것도 저들의 주장이 어떤 타당성을 갖춰서가 아닌 그저 권력이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시당하는데도 그저 대통령과 여당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니 뒤에 숨어 어깨에 힘만 잔뜩 준다. 이래서 여자와 소인들은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일까.


잘했으면. 그래서 비판하던 남성들도 설득할 수 있었더라면. 쉽지는 않다. 그런데 그 쉽지 않은 일을 바로 잘 해내는 것이 능력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실력이 부족한 것이다. 실력이 부족하니 억지를 부리고 통하지 않으면 악쓰고 윽박지르고 그래도 자기들만 옳다 자기위안에 빠지는 것이다. 과연 여론의 비판에 대해 저들은 무엇이 어떻게 틀렸고 잘못되었는지 반성이라는 것을 할까. 또다시 자기들 안으로 파고들어 정신승리나 지껄여댈까.


그래도 이번 정부 전에는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도 때로 옳은 말도 했으니까. 귀기울여 들을만한 가치있는 말들도 적잖이 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정부서는 그런 것 없다. 저것들은 그냥 병신들이구나. 쓰레기들이구나.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보장해 줬을 때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래서 여성가족부는 안된다. 여성주의는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내린 결론이다.

아니나 다를까 고상하신 국민들께서는 대통령을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며 모욕한 것보다 감격이 격해져 나온 국가원수모독죄라는 말이 그리 거슬리는 모양이다. 언론보도도 그따위다. 심지어 군사독재와 당당히 맞섰던 과거 김옥선의원의 발언까지 소환한다.

자유한국당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이 그래서는 안된다. 왜? 내가 그래야 하니까. 너는 그래서는 안되니까. 보수정당이 이미 내면화된 것이다. 여기서는 젊은 20대를 변호하지도 못하겠다. 그들의 정의감은 오로지 민주당을 향해서만 발현된다. 자유한국당의 모든 죄악은 그럴 수 있지만 민주당의 잘못은 그래서는 안된다. 역시나 자기들이 그런 기득권이 되어야 할 테니까.

너무 예상한 대로라 기운이 빠진다. 나야 원래 한국 대중들을 그다지 신뢰하거나 하지 않았다. 촛불혁명도 여전히 의심하며 회의하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한국 국민 수준에 맞는 것은 박근혜였을까? 문재인이었을까? 더이상 실망같은 건 않는다. 기대를 아예 않으니.

며칠 전 김정은이 써서 보냈다는 서한의 내용에 문득 생각이 미쳤다.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채널이며 기사며 찾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김정은의 이 메시지에 모든 답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첫째는 지금 당장 북한이 직면한 최우선의 문제는 경제라는 것이다. 반드시 인민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 선대서부터 약속했던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배두드리며 살게 해 주겠다. 그리고 둘째가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라. 무슨 뜻인가?


이번 북미회담을 두고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김정은이 체면을 구겼다. 약속까지 받고 잔뜩 기대하고서 갔는데 단순히 물먹는 것을 넘어서 큰 모욕까지 당하고 돌아갔다. 그래서 구겨진 체면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해 미사일 시설도 복구하고 핵시설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 보자. 처음부터 구겨질 체면이 없다면 김정은 입장에서도 그렇게 심각한 타격이랄 것도 없지 않은가. 체면따위 필요없이 그저 인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겠다면 오히려 그것으로 지도자로서 김정은의 면은 더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더이상 미국과의 관계에서 선대와 같이 자신의 체면을 최우선에 두지 않겠다. 체면이 구겨지고 깎이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즉 지난번 트럼프에게 당한 망신을 더이상 개의치 않겠다. 더불어 오로지 인민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미국으로부터 제재해제를 받아들이는 한 가지 목표에만 최선을 다하겠다. 다만 명분이 필요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그림이 만들어져야 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트럼프가 직접 평양으로 가서 김정은에게 약속해주는 것이면 어떨까. 그 대신 김정은도 트럼프가 바라는대로 한 번에 모두 내줄 수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도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꼼수도 써 볼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핵폐기와 관련한 전체 로드맵을 주고받는다. 형식은 한꺼번에 모두 주고받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단계적으로 절차들이 진행된다. 즉 북한이 내놓은 핵시설들을 검증하고 폐기하는 동안 미국은 평양에 대표부를 설치하고 일부 제재를 완화한다.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들을 폐기하는 동안 나머지 제재해제 조치를 완료한다. 다만 어느 정도 절충이 가능하다면 중장거리 미사일 정도는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핵무기이니 생화학무기 역시 어느 정도 유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차근히 관계를 정상화한 다음에 진행하면 된다.


아마 우리 정부와 북한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간다면 이런 부분들이 아닐까. 너무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당장 북한 자신이 급하다는 사실을 트럼프에게 들키고 말았다. 더이상 다른 선택지란 없는 막다른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모른다면 그냥 앉은 채 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부분들을 설득해야 하고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아마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그같은 방안들에 대해 구체화시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이 무겁다. 지금 북한이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다름아닌 문재인 대통령이다.


행복회로를 활활 불태워 본다. 그럴 것 같아서가 아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도 아니다. 그래야 하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과연 가능할까? 그래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만큼 절박하다. 문재인 대통령만 믿는다. 역시 모두가 하는 말이다. 지금 모든 문제를 풀 열쇠는 문재인 대통령의 손에 쥐어져 있다. 자물쇠는 김정은이 가지고 있지만.


부디 선의보다는 일방적 바람으로만 가득한 지금의 추측이 사실로 이루어지기를. 성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에 북한은 약자고 미국은 강자다. 국제질서는 오로지 강자가 옳고 선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이제라도 알았으면. 부디 바랄 뿐이다.

원래 한국 보수는 근본이 없다. 수 백 수 천 년 한 사회를 지배하다 보면 그 자체로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된다. 그만한 권위와 품격도 갖추게 된다. 정확히는 지배신분으로서 피지배신분과 자신들을 구분짓던 행동양식들이 누적되며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것을 품위라 부르는 것이다. 엄격한 예절과 절제된 행동이야 말로 그들이 남들보다 위에 군림하는 존재임을 증명해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삼국시대 이래로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이같은 지배의 전통이 외적 요인에 의해 깡그리 부서지고 뒤집혀 버리고 말았다. 충효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던 사대부가 침략자인 일제에 협력한 순간 그들은 지배신분으로서 정당성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제에 항거하면 일제의 탄압으로 사회적인 모든 기득권을 잃기 일쑤였다. 심지어 전통적인 사대부조차 일제강점기 그저 일제에 아부해서 출세한 시정잡배들과 다르지 않았고 실제 그 대부분은 더이상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배신분으로서의 가치와 행동양식들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과 일제강점기 일제에 부역하던 부일배들의 행동양식은 그만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국전쟁을 거치며 아예 사회의 모든 기반이 무너지다시피 했으니.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일어난 것이 권력에 기생하는 기회주의자들이거나 혼란을 기회로 삼고 크게 부를 쌓은 졸부들이었다.


바로 한국 보수의 뿌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 진보는 지식인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당장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래도 고등교육까지 받은 엘리트들이었고, 그같은 전통은 해방 이후에도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반권위주의 투쟁을 통해 이어지게 된다. 철저히 지식인의 관점에서, 오히려 과거 전통적인 사대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엄격하게 절제된 행동양식들을 보이며 속물적인 권력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다. 한국사회에서 유독 더 엄숙하고 고상해야 할 보수가 천박한 말과 행동을 일상으로 보이고, 더 자유분방해야 할 진보가 엄격하고 고상한 도덕과 예절을 강요받는 것은. 보수정치인이나 언론, 지식인들이 아무리 경우에 없는 막말을 쏟아내도 사회는 관대하지만, 진보적인 정치인이나 언론, 지식인들이 조금이라도 경우에 벗어난 말을 하면 온 사회의 비난이 그리로 쏠리고 만다. 보수정치인의 부정이나 비리, 범죄는 그럴 수 있는 일들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진보적이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일탈마저도 크게 여겨진다.


과연 박근혜 정부 당시 민주당 정치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더러 아베의 앞잡이라 이야기했다면 과연 언론들은 무어라 떠들어대고 있었을까? 아니 언론을 말하기 전에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었을까? 오히려 5.18에 대해 막말을 하고, 그에 대한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더욱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유총과 관련해서 정작 아이들을 볼모로 잡고 학부모들을 겁박하는 행동을 보면서도 오히려 편드는 자유한국당에 대해 학부모들의 지지가 올라가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그래도 된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그래서는 안된다. 왜냐면 원래 자유한국당은 그런 정당이었고, 더불어민주당은 그와는 다른 정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오히려 자유한국당은 지지율이 올라가는 반면 크게 잘못한 것이 없어도 더불어민주당은 온갖 비난을 들으며 지지율이 폭락하고 만다. 이미 그렇게 관성적으로 길들여진 것이다. 아니 알고 있는 것이다. 한국 보수의 뿌리가 무엇이고 어디인가에 대해서.


그래도 제 1야당의 원내대표로서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였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마저 비판이 아닌 인신모독성 발언으로 대통령을 욕보이려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당연히 비판은 할 수 있다. 비난도 할 수 있다. 사실 그냥 평소의 대변인 성명 정도라면 그런 정도 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엄격하게 품위와 예절을 지켜가며 표현도 가려서 해야 할 자리에서 굳이 대통령을 모욕하는 표현을 앞세워 쓰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장담한다. 여론은 오히려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로 몰릴 것이다. 진보정당은 안되지만 보수정당은 그래도 된다. 한국 정치의 슬픈 단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평소에도 특히 보수야당 정치인이나 관련자들의 일반인들도 차마 하기 힘든 상스럽고 저질스런 발언이나 표현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언론이나 대중의 반응, 무엇보다 해당 정당에 대한 지지율 변화를 보았었다. 민주당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들이었다. 보수정당의 정치인이 성추행을 저지르든, 뇌물을 받든, 인사청탁을 하든, 아니면 다른 범죄를 저지르든, 심지어 전국민을 분노케 했던 국정농단에 대해서도 그러나 여전히 여론은 관대하기만 하다. 어째서? 보수야당은 원래 그런 정당이었고 그런 모습들이야 말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의 본모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보수야당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 해서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온당치 않다. 오히려 평소 아닌 척 하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진보정당 관련 인사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물려야 한다. 당장 방심위의 언론에 대한 심의방향도 그렇다. 보수언론은 그럴 수 있지만 보수적이지 않은 언론은 그래서는 안된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원래 한 사회의 도덕적 기준은 지배계급을 기준으로 그를 모방하며 성립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평범한 농민들이 양반들을 본받아 성리학적인 규범과 질서를 내면화하며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도 원래 출신이야 어떻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경제적으로 큰 부를 쌓으면 당연하게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따른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를 위해 스스로 사회적 발언도 하고, 그를 위해 통큰 기부도 하면서 자신이 미국사회에서 특별한 지위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 그 지배층들이 보이는 모습이란. 그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기준이란. 오히려 엄숙하고 엄격한 진보가 위선이라 비난받고 정작 그들의 일탈과 부정을 비난하면서도 일상에서는 그들을 닮으려 노력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갑질이 일상화된 이유다. 특정 신분이나 계층만 갑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딜 가나 흔히 쉽게 아무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갑질이란 것이다. 그 갑질은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역시나 이번 나경원의 발언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문제삼는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로 역풍이 불게 될 것이다. 원래 한국 사회가 그랬었다. 한국국민들의 행동방식이 그랬었다. 차라리 보수야당의 갑질을 본받으면 본받았지 진보정당의 위선을 동경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이상인 것이다. 대통령에게도 막말하는 보수정치인의 모습이란. 물론 진보정치인이 그래서는 온갖 비난과 맞서야 했을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막말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노무현 전대통령의 발언을 굳이 헤집어 비난하며 그를 끌어내리려 했던 대중들은 그러나 반대편에서 가해지던 온갖 저질스런 모욕과 저주들에 대해서는 관대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국 보수의 근본을 헤집어 본다. 한국 진보의 문제점도 돌이켜 본다. 지금 한국사회를 이루고 있는 뿌리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어디서 시작되었고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던 것인가. 아니라 자신하는가. 저들과 같은 특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출세해야 하고 저들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야 한다. 한국인을 움직이는 단 하나 욕망이며 동기다. 슬픈 것이다. 안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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