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기본적인 상식이라 설마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정작 언론의 취사선택에 이은 왜곡보도에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많아서.


첫째 가장 중요한 전체 인구 가운데 취업한 사람의 수를 무엇으로 나타내는가.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알릴레오 나와서 한 말이 맞다. 고용지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아닌 고용률이다.

 

고용률 = 취업자수/생산가능인구


여기서 생산가능인구란 15세 이상 실제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인구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전체 일할 수 있는 인구 가운데 실제 취업한 사람의 수를 비율로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실질적인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실업률은 어떨까?


실업률 = 실업자수/경제활동인구


여기서 경제활동인구란 생산가능인구에서 비경제활동인구를 뺀 것이다. 가정주부나 학생, 혹은 취업을 포기했거나, 취업에 아예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잠시 휴직중인 사람을 포함한다. 아마 여기서 눈치챈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정작 고용률이 늘어나도 비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취업의사를 밝힌 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나면 실업률이 늘어날 수 있다. 반대로 고용률은 떨어지는데 취업 자체를 포기한 사람이 늘어나면 실업률은 떨어진다. 다시 말해 실업자수가 늘어났다고 반드시 고용률이 나빠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취업자수는 줄어드는데 고용률은 늘어나는가? 당연히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니까. 작년 취업대란이라며 취업자수가 가장 적게 늘었다 난리쳤을 때 고용률은 정작 전정부인 2016년보다 8월 한 달을 제외하고 꾸준히 높았다는 것이다. 평균으로 치면 역시 문재인 정부 임기였던 2017년을 제외하고 2016년 이전보다 모두 높았었다. 그런데 왜 고용대란이라는 말이 나오는가. 즉 취업자수가 이전보다 턱없이 적게 올랐다는 것인데 결국 분모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고용률이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그냥 분모가 작아져서 취업자수가 적어져도 고용률이 그대로다. 이해가 가는가.


더불어 고용률을 이해할 때는 연령대별, 혹은 계절별 고용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겨울에는 농한기라 대부분 농업종사자들이 휴식을 취한다. 겨울에도 계속해서 농사를 짓는 경우를 제외하면 이들은 모두 실업자로 잡힌다. 방학 동안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학생들도 늘어나지만 학기가 시작하면 그마저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혹은 50대 이상에서는 정년을 맞아 퇴직하는 인구가 늘어난다. 바로 얼마전부터 60년대 1차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하기 시작했다. 작년 퇴직자수가 그래서 사상 최대란 말도 나온다. 당연히 고용률은 떨어지고 이들 가운데 계속 일하고자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 실업자수도 늘어나게 된다. 분모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 현실에서 50대 이상이 취업하기 쉬운가. 결국 이들 가운데 또 상당수는 창업을 통해 자영업으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 자영업자들 곡소리나는 뉴스가 또 하나 늘었다.


사실 나도 언론보도가 나오면 그렇겠거니 그냥 스쳐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언론보도가 아무리 봐도 너무 고약스러우니까. 전체 통계를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가운데 문제가 될 만한 일부만 똑 떼어 크게 확대해 보도한다. 조중동매경한경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한겨레, 경향, 오마이, JTBC, 어차피 KBS와 MBC, SBS도 크게 기대는 하지 않으니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들이 앞세우는 숫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하필 문재인 정부의 임기인 2017년과 비교해서 2018년이 최악이라 말하는 저들의 주장이 옳은 것인가. 더구나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2016년 이전의 지표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전보다 지금의 지표가 어찌되었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다못해 상용근로자가 더 늘어났음에도 임시근로자나 일용근로자의 감소를 문제삼는 보도에 대해서는 그저 할 말을 잃는다. 고용원 있는 자영업이 늘어난 것은 외면한 채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줄어든 것만 이야기한다.


그냥 기자가 개새끼들이다. 언론사를 굳이 특정할 필요도 없다. 모든 언론사 경제기사 쓰는 기자새끼들은 그냥 어디 가서 고개 쳐박고 뒈지는 쪽이 나라 경제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산수도 할 줄 모르고 국어도 할 줄 모르고 영어는 더더욱 할 줄 모르고. 아무리 기자가 지성을 상징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지만 이건 인간이기를 부정하는 정도다.


요즘처럼 성가신 때가 없다. 그냥 언론이 보도한 기사만 읽고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은가. 기사 하나 읽으면 그것 사실확인하느라 그 몇 배의 시간을 써야 하니.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하는 시대다. 아니면 바로 속아넘어가고 만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숫자를 가지고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 이 쯤 되면 속아넘어가는 게 더 문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뻔히 속이려는 의도가 보이는데 속아넘어간다. 진짜 지랄같다.

최저임금 관련해서 글을 쓰고 화장실 갔다가 일본에서 재미있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다. 지난 20년 동안 일본 노동자의 시급만 9% 감소했다는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기사다. 원래 중국과 일본의 임금정책과 거시경제의 문제에 대해 글을 써보려 준비하던 참이라 나름 참고가 되었다. 사실 글을 쓰려는 목적보다는 그냥 개인의 호기심이다. 생각하고 글을 쓰는 타입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라 더 그렇다.


아무튼 흥미롭다.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최저임금이 오르면 경제는 오히려 침체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지난 20년 간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며 경기부양에 힘썼음에도 정작 노동자의 시급이 떨어지고 있는데 불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저임금인상에 반대하는 사람들 주장대로라면 시급이 오히려 떨어졌으니 노동생산성도 올라가고, 기업이며 자영업자들의 경기도 좋아져야 할 텐데, 물가까지 오르지 않으니 경제는 더 나아졌어야 하는데 오히려 작년 마이너스 성장까지 기록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하나 틀렸다. 물가가 오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올리지 못한 것이다. 아베 정부에서 추진한 정책 가운데 하나가 오랜 불황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을 끝내는 것이었다.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가 위축되었다는 뜻이며, 소비가 위축되었다는 것은 소비의 주체들이 충분한 소득과 전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돈이 없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소비를 꺼리게 된다. 여기에 소비세까지 더해진다. 시장에 돈이 돌아야 기업도 확신을 가지고 투자도 하고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기업의 경쟁력마저 전만 못한 상황이 이어진다. 수출은 여전히 흑자지만 경제성장률은 오히려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어째서 일본 경제는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일본 정부가 막대한 빚까지 져가면서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리고 수많은 필요도 없는 공사에 돈을 쓴 이유도 사실 이같은 침체된 국내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정부에서 돈을 쓰면 그만큼 시장에도 돈이 돌 테니 경제가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대부분의 돈은 노동자의 임금보다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기사에 나온 그대로다. 이제는 오히려 일본의 최저시급이 사실상 한국보다 못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물가 역시 어떤 부분에서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비싸기까지 하다. 임금이 안 오른 만큼 물가도 오르지 않았으니 일본이 한국보다 더 살기 좋은가. 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인건비 부담도 노동자의 생활비 부담도 한국보다 더 적으니 일본경제가 한국경제보다 전망이 더 좋은 것인가.


그러고보면 한때 일본 정부의 아베노믹스를 칭송하며 한국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기사가 넘쳐났었다. 지금 내가 인용한 저 기사는 지금 한국의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일본의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 일본의 고용과 임금수준이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을 닮자. 아베를 배우자. 그래서 어떻던가. 작년 2.6%의 경제성장률이 폭망이면 사실상 마이너스인 일본경제는 그냥 붕괴 수준이다. 물론 그마저도 언론은 전처럼 크게 보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을 쫓아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기업에 대한 투자와 지원에만 돈을 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직 살아남은 기업들의 경쟁력은 여전하거나 더 강해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는 일본의 경제를 보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임금만 올리지 않으면 경제는 나아진다. 노동자의 임금만 낮추면 경제는 더 나아질 수 있다. 바로 옆나라에 그 살아있는 예가 있다. 사실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경제가 가진 가장 큰 약점 가운데 하나다. 해결하기도 쉽지 않고 해결한다고 해도 이후의 상황을 낙관할 수 없다. 너무 짧은 시간 빠르게 성장해 온 부작용일 것이다. 이상한 부분만 참고한다. 어째서 선진국들은 하나같이 경제가 좋지 않은가. 답은 거기 있을 텐데도.


쓸데없이 최근 경제기사에 너무 관심을 가진다. 하다못해 부동산 관련 뉴스들까지 꼼꼼히 챙겨본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한국 언론들은, 특히 경제관련 기사들은 그냥 무당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건 언론도 뭣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외의 언론은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지만. 외신기자클럽의 성명을 보면서 내가 괜한 환상을 품고 있었구나. 과연 제대로 경제를 보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기사를 내는 언론이 몇이나 될까. 웃고 만다. 그냥.

이를테면 최저임금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전 2016년 내 월급수준은 처참했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최저임금 안 오른다고 물가까지 안 오르지는 않는다. 겨우 한 달을 살기 위해 들어 두었던 보험까지 몇 개 해지해야만 했었다. 지금도 후회한다. 그 실손보험 참 좋았었는데.


당영히 자영업자들 입장에서 나는 기대할만한 손님이 아니다. 일단 밖에 나가서 음식을 사먹는 경우도 거의 없고, 집에서 주문해 먹는 일도 거의 드물다. 당연히 돈이 없으니까. 부모와 함께 살면서 집에서 먹고 자는 것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 대부분의 사정이 그렇다. 그런데 그런 직장 앞에서 식당을 한다면 얼마나 장사가 되겠는가.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몇 년을 그곳에서 일했으면서 편의점 말고 주변 식당을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다. 뭘 파는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래서 편의점 도시락 매출이 날이 갈수록 오르는 것이다. 싸거든. 아무데서나 쉽게 살 수 있고. 굳이 도시락 안 싸고 밖에서 먹어야 하면 차라리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다. 그마저 부담스러우면 편의점 김밥으로 때운다. 실제 그런 식으로 편의점에서 한 끼 때우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아직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제대로 된 한 끼를 먹기도 부담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지금 회사 앞에도 식당들을 많다. 그러면 그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장사를 하겠는가. 덕분에 식당 상가도 공실이 아직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게 자영업의 현실이다. 정작 돈 쓸 사람은 적은데 그 돈 바라고 시작한 자영업은 갈수록 넘쳐난다. 아마 작년 퇴직한 부장들 차장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은 수가 그냥 놀 수 없다며 퇴직금 받아서 아무거라도 창업을 시도하려 할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도 기술도 없이 무작정 얼마간의 돈만 믿고 창업에 들어간다. 그래서 돈을 버는 곳이 프렌차이즈다. 요식업에 대한 최소한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쌓지 않은 상태에서도 돈만 있으면 아무나 창업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그 비용이 과연 쌀까? 그렇게 새롭게 자영업자가 유입되면 그만큼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런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돈을 쓸 고객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경제가 성장하고 물가가 오를수록 그 수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영업자는 오히려 늘어난다.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악순환이다. 임금이 오르지 않으니 소비자는 돈을 쓰지 않고, 소비자가 돈을 쓰지 않으니 자영업자의 매출도 떨어지고, 그렇다 보니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의 경우 월급 주기도 빠듯하다. 그래서 최저임금의 차등적용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자기들 가게에 돈을 쓸 손님들은 월급이 오르는 것이 좋고, 그러나 자기들이 월급을 주어야 하는 고용인들은 임금이 낮은 것이 좋다.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는 함께 공멸할 뿐이라는 걸. 이 많은 자영업자들을 모두 먹여살리기에는 소비를 해야 할 대부분 임금노동자의 수입이 충분치 못하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해서 내 부담은 줄이면서 손님들의 지갑은 두둑하게 만들어주자.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선순환이다. 그런데 과연 최저임금인상에 저항하는 것이 자영업자들 뿐이던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자영업자들이 요구하는대로 최저임금을 억제하면 정작 자신들이 상대할 손님들의 소득도 늘지 않게 된다. 자영업자들은 지금도 너무 많다 할 수 있는데 손님들의 소득이 늘지 않으면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도태될 테고, 그것이 어쩌면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최저임금을 올리자니 당장 내가 힘들다. 그러면 어째야 하겠는가. 무엇보다 정부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도태될 자영업자를 위해서 최저임금을 억제할 것인가, 아니면 전체 시장을 위해서 최저임금을 올려서 개인이 소비할 수 있는 여력을 늘려 줄 것인가. 망해가는 영세자영업자와 그래도 경쟁력을 갖춘 자영업자 가운데 누구를 우선할 것인가. 자칫 그러다 모두가 함께 자멸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다. 그러면 이대로 유지만 하면 자영업은 최소한 전처럼은 괜찮을 수 있을 것인가. 최저임금 관련한 기사 아니면 자영업의 구조변화에 대한 기사 또한 넘쳐나고 있다. 최근 내가 생활을 위해 구입하는 상품 가운데 거의 절대다수가 인터넷을 통해 주문되고 있다. 특정 쇼핑몰에서 할인을 더 많이 해 준다 해서 멤버십 가입까지 되어 있는 상태다. 쌀도, 김치도, 고기도, 나물도, 하여튼 그나마 대형마트가 더 싸고 할인까지 해주는 품목이 아니면 거의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고 있다. 예전에는 그래도 대형마트와 인터넷이 반반은 되었는데 이제는 거의 3대 7에서 2대 8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왜 그러느냐면 싸니까. 편하니까. 사실 외식하기보다 간편식품 사다가 대충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경우도 늘고 있다. 냉면은 진짜 차라리 육수랑 사리 사다가 집에서 해먹는 것이 대충 아무데서나 먹는 것과 큰 차이가 없고, 양념 맛이 강한 요리일수록 그냥 양념만 잘되어 있으면 사다가 취향에 따라 재료를 추가해 조리해 먹는 쪽이 더 싸고 맛있는 경우가 많다. 


당장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해 직장인들의 생활패턴까지 바뀌었다. 6시 넘어가면 회사에 사람이 없다. 그런데 벌써 6시부터 술마시기는 아무래도 그런 탓에 최근 가장 장사가 잘 되는 곳이 바로 카페다. 하긴 원래 커피가 크게 유행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술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혼자만의, 혹은 가족과의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된다. 그런 때 필요한 것은 고깃집도 술집도 아니다. 더구나 독신자의 수가 갈수록 늘면서 소비패턴 역시 그를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기존의 자영업 가운데 어려운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반면 기회를 잘 노려 성공하는 이들도 생기게 된다.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변하고 생활이 변하면 자영업도 변해야 한다. 더이상 주변에 시계수리점이나 전파상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처럼 시대가 바뀌면 그만큼 자영업 역시 변화의 압력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유지하려 강제한다. 소비패턴이 바뀌며 영업이 어려워졌는데 그것을 지탱하겠다고 정작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한다. 경제가 성장한만큼 물가도 오를 텐데 정작 노동자의 임금만을 도태될 사업장을 위해서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다가 굶어죽을 뻔했었다. 진짜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아끼고서야 겨우 한 달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노동자의 수를 더 늘리는 것만이 자영업자를 살리고 나라경제를 살리고 양극화를 해소할 방법이라는 것인가.


거시적으로 봐야 한다. 나라경제를 운용한다는 것은 보다 크고 넓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장에서 병사 한둘의 희생은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대대 하나, 연대 하나 정도의 희생은 전장의 거대함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개 군, 한 개 군집단, 아예 한 나라의 전력 모두가 투입되는 전장에서 사단규모의 희생조차 크게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의 산업이 저물고 또 하나의 새로운 산업이 일어난다. 하나의 자영업종이 쇠락하고 또 다른 자영업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키오스크로 알바의 수가 줄어드는 만큼 키오스크를 생산하는 새로운 산업이 자라나게 된다. 그런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회와 산업의 변화를 주목해야지 그저 망해가는 개별의 사업장에 집중하느라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하긴 언론부터가 그런 심도있는 이해나 분석보다는 개별사례의 보도에만 주목하는 것이 현실이다.


고용률이 늘어났다. 그러나 취업자수가 크게 늘지 않았다. 취업자수가 늘었다. 그러나 3, 40대에서는 취업자수가 오히려 줄었다. 끝도 없다. 그런 현상을 보다 크게 넓게 깊게 보고 이해하려는 시도보다 단편적인 현상만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려 한다. 그를 근거로 정부정책까지 이끌어내고자 한다. 이명박근혜만 욕할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런 언론과 그런 언론에 휘둘린 여론에 이끌리느라 제대로 장기적인 정책들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단기적인 땜질에만. 사회가 변하고 소비패턴이 바뀌었다면 그에 맞춘 새로운 유형의 자영업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며 필요하다면 지원도 한다. 다만 연착륙은 필요하다. 그렇다고 시장 자체를 위축시킬 수 있는 노동자의 소득저하가 그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마 정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레기 새끼들이 멋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휘둘리는 여론이 부담이 되어 과감히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 어떤 산업도 영원할 수 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언젠가는 저물게 된다. 내가 설마 그 망해가는 자영업자들을 위해서 더 비싼 돈을 주고 더 많은 수고까지 들여가며 굳이 인터넷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상품을 소비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하다못해 택배비라도 너무 비싸서 오프라인에서 사라고 택배기사들 투쟁을 지지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이기를 위해 왜 내 돈과 내 일상을 낭비해야 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저들은 지금 내 월급을 깎으라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괘씸해서라도 더 오프라인 자영업자들에게서 무언가를 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나 자신의 이해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내 월급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다. 최저임금이 올라야 월급이 오른다. 최저임금이 낮아지면 월급도 줄어든다. 2년 전 그 비참하던 생활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그때로 돌아갈수는 없다. 자영업자들의 이기처럼 이 또한 나의 이기다.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도 이명박근혜시절이 지금보다 문제도 없고 더 나았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는 세상이 시끄럽지도 않고 사는데도 문제가 없었는데 문재인 정부가 들어와서 너무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밖에 없다. 기자들이 거침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거짓말까지도 거리낌없이 기사로 내보내고 있으니까. 그러면 이명박근혜 시절에는 어땠을까?


언론통제나 언론탄압이란 한 마디로 언론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도에서 벗어난 기사를 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강제인 것이다. 이를테면 작년이었던가 자유한국당에서 아예 특정언론에 대해 아예 자당을 취재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 바로 그런 한 예일 것이다. 그나마 그런 정도로 그치는 것은 그들이 이미 권력을 잃고 야당이 된 때문이었고, 정권이 바뀌기 전 기자가 현장에서 내쫓기고 언론사가 정권의 직접적인 압력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심지어 아예 청와대 출입 자체를 금지당한 언론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세상이 조용했었다. 정부가 바라지 않는 기사는 아예 쓰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언론환경은 어떤가.


과연 이유경이라는 기자가 민주당에서 그리 말했다고 갑자기 기사의 논조를 바꿀 것인가. 아니 당장 외신기자클럽에서 그런 식으로 정면으로 공격하는 성명을 냈음에도 오히려 수세에 놓이면 놓였지 그에 대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비판과 비방은 전혀 다르다. 충분한 근거가 있어서 그를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단지 자신의 인상을, 혹은 목적을 위해 특정한 단어를 사용해서 상대를 정의하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취재원 가운데 누군가 실제 했던 말도 아니고 자기가 임의로 단정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모욕적이고 비하적인 것이었다. 단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보도까지도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보도하지 말라거나, 취재하지 말라거나, 아니면 인신상에 위해를 가하려는 어떤 시도도 없었다. 그런 논평이 있다는 자체가 위협이 된다. 그런 기사를 쓴 자체가 위협이 되는 것이다.


결국 밥그릇이다. 말 그대로 클럽인 것이다. 외신기자들끼리 모여서 서로서로 어울리다 보니 친분이 생기고 결국 자기들끼리 편을 들게 된다. 외신기자를 건드려서는 안된다. 하다못해 외신기자가 쓴 기사에 대해서도 단 한 마디 비판도 해서는 안된다. 외신기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기사를 특정해 비판하는 것은 더욱 안된다. 그 비판의 강도가 일정 이상 세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기레기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언론이 권력이 된다. 누구도 감히 비판할 수 없는 절대권력이 된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뭐단 해도 된다. 아무렇게나 해도 모두 자신들의 권리다. 그래서 분노한다. 확실히 언론도 현지화되었다. 외신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부마저 특별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이를 근거로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려는 언론들이 있다. 세력들이 있다. 진짜 같잖다. 사실 민주당의 논평 자체는 그리 세련되지 못했다. 누가 운동권 아니랄까봐 과거 80년대 독재정권을 상대로 하던 그대로 하려는 듯한 모습마저 보인다. 한 마디로 구리다. 그런데 표현이 구린 것과 비판이 정당하지 못했는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언론도 비판받을 수 있다. 기자도 비판받을 수 있다. 정부도 여당도 정치인도 개인도 모두 언론을 비판할 수 있다. 언론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언론의 취재대상에게도 언론의 보도에 대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래야 옳지 않은가.


확실히 외신기자 클럽도 한겨레 경향 만큼이나 지난 정부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참 편했다. 어떤 기사를 써야 하고 어떤 기사를 써서는 안되는지 친절하게 가이드해주고 있었다.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송까지 불사했었다. 하지만 그런 정부에는 언론탄압이라는 비판을 정면으로 입에 올리지 않았었다. 사람 봐 가며 게기는 것도 딱 기레기 그대로다. 기자가 어디 가겠는가. 하물며 한국같은 변방으로 쫓겨온 주제들이면. 하찮다.

자본주의란 무엇을 위해 돌아가는가. 자본주의는 어떤 원리로 굴러가는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자본주의란 자본 그 자체를 생산수단으로 삼는 경제체제다. 따라서 당연히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구성원의 이기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원리이고 동력이다. 여기서 답이 나오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자본의 이익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모든 기술의 발전과 혁신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더 적은 자본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모든 기술의 발전과 경영상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 자본을 가진 사람은 누구이며 자본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은 결국 노동자의 임금이 아무리 올라도 그 이상 자본의 이익이 다양한 이유로 실현되기에 그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되는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노동자의 임금이 정체되어도 자본의 이익은 계속 늘기만 한다.


비유하자면 봉건사회에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지주는 토지를 생산수단으로 삼고 소작농은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는다. 같은 생산수단이라도 토지는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그 소유를 늘릴 수 있는 반면 개인이 소유한 노동력은 한정되어 있다. 즉 각자 자기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계산하더라도 지주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 비례해서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더구나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소작농의 노동력은 지주의 토지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소작농의 노동으로 증가한 생산은 곧 토지에게 상당부분 귀속되기 쉽다. 소작농 자신의 노력에 의해 실현된 이익이 오히려 지주의 이익으로 귀속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소작농 한 사람이 이전보다 두 배의 경작지에서 세 배의 농작물을 거둬들였다 했을 때 지주는 단지 소작농 한 사람을 더 줄이고 지대를 더 올림으로써 오히려 더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작농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주는 가만히 앉아서도 계속해서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가는 자본을 생산수단으로 삼고 임금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는다. 물론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임금노동자 역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노동력으로 더 많은 이익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또 문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양극화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에도 양극화가 일어난다. 대체하기 어려운 지식노동자의 경우 자본의 이익이 실현될수록 더 많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의 경우 그 임금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결국 지식노동자들이 일한 결과 또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 많은 이익은 자본가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구조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자본이익의 증가를 막을 수 있을까?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정부에서 자본가들의 자본이익 대부분에 세금을 매겨 거둬들인 다음 복지를 통해 재분배하면 자본소득과 임금소득의 격차로 인한 양극화는 사라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다면 더이상 자본주의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건 그냥 사회주의다. 자본을 통한 이익의 실현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자본주의가 아니게 된다. 그런 것을 바라는가.


당장 자영업자들의 인건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키오스크라는 무인단말기를 만들었다. 당장 키오스크는 더 적은 노동력을 사용해서 더 적은 비용만을 지출하며 자영업자들이 업장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국 키오스크가 보급되면서 키오스크 제조업체와 자영업자들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지만 그에 비례해 키오스크가 담당하던 업무에 종사하던 이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이 줄어들며 임금이 줄어드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래서 키오스크를 금지할까? 키오스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조차 반자본주의적인 것이다. 그렇게 자동차공장에도 로봇이 늘고, 거대한 컨테이너선에도 최첨단 항법장치로 최소한의 선원들만이 탑승하게 된다. 더구나 키오스크로 당장의 인건비 지출을 줄였어도 결국 그 상당부분은 임대한 건물주와 프렌차이즈 업체에 로얄티로 지불될 것이다. 아니 키오스크마저 패키지로 프렌차이즈 업체에서 로얄티를 더 요구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구조인 것이다. 그를 통해 최소한 자본을 소유한 자영업자나 키오스크생산업자, 혹은 건물주, 프렌차이즈 업체들만 일방적으로 돈을 버는. 그런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발전이라 부른다. 문재인 정부가 아니었다면 과연 언론은 키오스크를 지금처럼 부정적으로만 보도하려 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자본의 이익만 늘어난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건 이미 20세기 대공황으로 모두 겪어 알고 있다. 결국 2008년 금융위기 역시 그같은 너무 넘쳐나서 주체할 수 없게 된 자본의 이익이 갈 곳을 잃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흘러간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자본의 안정성이다. 자본이 안정적으로 순환할 수 있도록 자본가들과 타협해야 하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자본이 시장에서 순환하여 일정한 이익을 꾸준히 거둘 수 있도록, 그러니까 소작농들이 굶주리다 못해 결국 쓰러지게 되면 더이상 지주들도 마냥 앉아서 이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더 많은 소비가 꾸준히 이어지며 결국 자신들의 이익실현에도 도움이 된다. 소비가 사라지면 바로 시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시장을 유지하는 동력은 생산이 아닌 필요이며, 공급이 아닌 소비다. 그 소비의 주체는 결국 임금노동자일 것이다.


어째서 저소득층의 소득은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가. 어째서 최저임금을 올렸는데도 고소득층의 소득만 계속해서 오르고 있는가. 그나마 최저임금을 올려서 이 정도였다는 것이다. 4차산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더욱 저숙련노동자들의 자본시장에서의 지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진실이다. 이데올로기다. 자본주의만이 모든 구성원들에 멋진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건 우리보다 양극화가 더 극심한 선진국들이 말해준다.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양극화는 비례관계에 있다. 그나마 그런 가운데서도 어디까지 노동자의 소득은 기대한 만큼 늘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시장에 맡기라고. 정부는 가만히 있고 규제만 풀며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라고. 그런데 자영업자들도 임금노동자는 아니지만 자영노동자로 분류되어 있다. 사실 자영업자들도 자신의 자본에 더해 자신의 노동력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자영업자보다 상위에 프랜차이즈라는 더 큰 자본이 존재한다. 참 어렵다. 경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나도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어딘가 언론의 기사나 저명인사의 말을 빌어 내 말에 권위를 더하고자 하는 짓거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굳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할 때는 단지 논거의 하나로서지 결국에 내가 주장하는 바는 오로지 내 말을 통해서만 전하고자 한다. 내 글이기 때문이다. 내 블로그기 때문이고.


참 재미있다. 국회의원이라면 보좌관도 여럿 두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학벌도 좋은 그야말로 인재들이다. 조선일보에서 여야 4당이 합의한 새로운 선거제도를 가지고 시뮬레이션 해보았다면 국회의원 개인은 무리더라도 당차원에서 시뮬레이션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조선일보 기사를 근거로 들며 여야 4당의 합의안을 비판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사람이 굳이 남의 말을 빌어 자신의 말을 대신할 때는 대부분 한 가지다. 그만큼 자신의 주장에 자신이 없을 때다. 자신이 하는 주장의 정당성에 확신이 없을 때 권위있는 누군가의 말을 대신 빌리고자 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필 그 빌린 대상이 조선일보라는 사실이다. 아직까지 저들에게 조선일보란 객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언론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야말로 조선일보야 말로 자신들이 하고픈 말을 대신해 주는 언론이었던 것일까.


항상 자유한국당이 무언가 애매한 주장을 펴려 할 때 주로 선택하는 방식이다. 대부분 국내 언론, 혹은 외신, 정작 자신들의 주장은 없다. 자신들의 생각은 없다. 자유한국당이 많이 망가졌구나 느끼게 되는 이유다. 그런 주장 하나 자기 이름을 걸고 당당히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한겨레나 경향이 정부나 여당의 인사들 비판하듯 자유한국당도 비판했다면 벌써 바닥을 드러냈을 것인데. 그래도 JTBC가 정부와 여당 비판하든 자유한국당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경제뉴스는 그야말로 쓰레기지만 그런 점 때문에 아직 뉴스룸을 끊지 못하고 있다.


하다못해 정부와 여당에 대한 비판도 자기 주장과 논리로 하지 못하는 제 1야당이라니. 그런 야당을 지지해야 하는 국민들도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다. 하긴 그와 도낀개낀인 여당을 지지하는 나도 참 할 말이 없다. 어쩌겠는가. 그게 대한민국인 것을. 또 하루 웃는다.

차라리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제재보다 폭격이 더 나을 것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제재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 그동안 오바마가 그토록 북한을 경제적으로 봉쇄하며 제재를 이어갔지만 북한은 핵개발을 이어가고 있었다. 트럼프가 더 강력한 제재로 북한을 옭죌 때도 미사일 발사를 하고 핵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냥 이렇게 간단히 이해하면 된다. 누군가 칼을 들이밀고 협박한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자살해라!"


과연 칼에 찔려 죽고 싶지 않다고 자살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지금 볼턴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핵무기도 포기하고, 중단거리 포함해서 미사일도 다 내놓고,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도 모두 내려놓으라. 그런데 당장 김정은, 아니 역대 김씨 왕조가 북한사회를 지배해 온 힘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런데 자신의 가장 강력한 권력수단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 주도한 강력한 제재로 말미암아 북한 경제가 무너지면 자신의 권력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미국이 원하는대로 다 포기하고 다 내놓고 다 내려놓으면 더이상 자신의 권력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의 삶을 무척이나 걱정하고 일일이 챙기는 애민군주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 놈이 독재를 하겠는가. 김정은이 집권하고 북한의 인권상황이 그래서 얼마나 더 나아지기는 했는가. 권력자의 속성이다. 그렇게까지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의 삶을 걱정했다면 벌써 미국의 제재가 시작된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이 요구한대로 따랐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3대를 이어 온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기꺼이 그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그랬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제재로 아무리 북한을 압박해봐야 북한사회 내부의 동요로 인해 김정은이 권좌에서 내쫓기지 않는 이상 별다른 변화는 없을 것이란 것이다. 확실한 체제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어차피 미국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자기가 권좌에서 내쫓길 것이 뻔한 상황에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버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가된다. 다름아닌 북한이라는 존재로 인한 한국사회와 경제의 리스크는 비용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그리고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중요한 것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인가? 아니면 대한민국 국민의 이익인가? 북한 사회가 올바로 바뀌는 것인가? 아니면 당장의 위협을 제거하고 불안요소를 줄이는 것인가?


아니 전에도 말했지만 그로 인해 결국 북한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문제다. 과연 김정은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고 100만이 넘는 북한군이 모두 새로운 권력에 순순히 복종하겠는가 말이다. 리비아가 아니더라도 세계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중앙의 권력이 약화되면 지방의 군벌들이 난립하게 된다.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더구나 훈련까지 받은 100만이 넘는 폭도가 바로 휴전선 너머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내전을 벌여도, 혹은 약탈을 위해 휴전선을 넘어와도, 그나마 귀순하겠다고 떼거지로 몰려와도 모두 한국사회에는 부담이다. 그 와중에 난리를 피하겠다고 난민화된 북한주민들까지 밀려오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재앙을 맞게 되는 것이다. 북한의 거지떼 2천만을 먹여살려야 한다며 통일에도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과연 한국사회는 그런 북한의 난민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그로 인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혼란과 동요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북한 주민의 인권은 이상이고 북한 정권의 안정은 현실이다. 최악의 권력조차 권력부재의 무정부상태보다는 낫다. 아니면 누군가의 말처럼 아예 북한을 중국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넘겨주기라도 할 것인가.


결국은 어떻게 해도 북한 사회에 동요가 일고 그로 인한 리스크를 끌어안아야 한다면 차라리 행동으로 나서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기와 셔먼, 커티스 르메이, 아서 해리스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가장 잔혹한 전쟁이 가장 평화로운 전쟁이다. 평화로운 시대의 상식과 원칙을 지키느라 전쟁을 길게 끌기보다 차라리 더 잔혹하게 더 악랄하게 짓밟음으로써 더 빨리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불확실성도 줄일 수 있다. 북한 정권의 붕괴로 군벌이 난립하고 난민이 발생하더라도 사전에 휴전선을 차단해서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한국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통해서 더이상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선제조치를 취할 수 있다. 중국이 개입하여 북한의 내부를 정리하게 된다면 미리 협상을 통해 보다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전략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 무엇 하나 제재로 인해 만에 하나의 상황을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 그것이 싫다면 답은 협상 뿐이다.


중간은 없다. 중간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것이다. 북한이 내부에서 붕괴하기까지 핵개발을 하든 미사일 실험을 하든 그로 인해 한국과 미국을 위협할 수단을 갖추더라도 그냥 지켜만 보자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자는 것인가. 만에 하나 최악의 가능성마저 불확실한 상태로 내버려둔 채로. 그런 건 정책도 전략도 아니다. 그냥 무책임한 회피일 분. 그래서 나는 자유한국당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정 북한에 강경한 대응을 하고자 한다면 폭격까지도 당당히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무력응징도 선택지에 올려야 한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강경론을 내뱉는다. 겁쟁이들이 입으로는 항상 용감하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서 방법은 현재로서 둘 뿐이다. 무력 응징인가. 아니면 협상인가. 어중간한 것은 그냥 시간만 끌 뿐인 것이다. 불확실성만 늘리고 불안요인을 방치한다. 진심으로 문재인 정부에도 건의하는 바다. 만일 북한이 더이상 대화에 응하지 않는다면 미국과 더불어 폭격하라. 그쪽이 개혁에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정부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는 때는 바로 전쟁이 시작된 이후다. 


호전광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를 보더라도 너무 분명한 사실이다. 과연 역사상 권력자가 백성의 삶이 위협받는다고 스스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성문을 열고 권좌에서 내려오는 경우가 몇이나 되었겠는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내부의 반란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혹은 죽임을 당하고서야 성문은 열렸었다. 벌써 몇 년 째인가 하는 것이다. 한 시 빨리 문제가 해결되어야 미래도 있다. 그저 답답하다.

새벽에도 썼지만 도대체 왜 탈원전 이야기가 나왔는가를 한 번 살펴봤으면 좋겠다. 단순히 원자력이라서 그 위험성을 경계하는 것 말고 무엇이 한국사회에서 탈원전 논의를 불지피게 되었었는가. 어째서 탈원전이 대선공약으로까지 나왔고 공론화까지 거치며 높은 지지를 받게 되었는가.


사실 별 것 없다. 그저 많은 국민들이 기억에서 지워 버린 것 뿐이다. 원자력발전소가 사실은 부실시공되었었고, 원자력발전소를 유지하는데 규격외의 부품이 사용되기도 했었고, 원자력발전소의 인사관리에도 많은 허술함이 있었다. 여기에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자력발전 사고가 사실은 인재라는데 다름아닌 원자력발전소가 몰려 있는 포항에서도 크게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째야겠는가.


결국 대부분 원자력발전 사고는 인재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를 관리하는 인력들의 사소한 오판이나 실수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체르노빌이 그랬고 후쿠시마가 그랬다. 그러면 우리라고 안전하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째서 모든 사안들에 대해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 난리치면서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만큼은 그 인원들에 대해 철석같이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면 원자력발전소에서 그 많은 부정과 비리들이 터져나왔겠는가. 그것때문에 가동을 중단해야 했던 경우마저 나왔을 정도다.


제일 큰 원이는 결국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한국사회가 그렇게 사람을 믿었다고. 언제부터 한국사회에서 사람들이 전혀 사심없이 사욕없이 엄정하게 메뉴얼대로만 주어진 책임을 다해 왔었다고. 그러다 한 번 실수하면 후쿠시마가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허점 하나에도 체르노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이 다른 발전비용보다 싸다는 것은 그런 비용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겠는가. 다 어떤 식으로는 비용을 청구하도록 되어 있다. 원자력발전은 그 가운데서도 좀 큰 것으로 한 번에 비용을 청구하는 편이다.


방폐장건설이나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하긴 그것 때문에 벌써 일본도 한국을 제치고 영국과 터키에서 원전을 수주했다가 손털고 물러날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방사성폐기물과 더불어 원전폐로와 관련한 비용까지 모두 책임져야만 한다. 그러면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다. 원전이 싸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러 배제하는 비용들이다. 그것 때문에 추가적인 원자력발전소 건설마저 제약을 받고 있다.


진짜 한국인의 뇌에 이상이 있는 것인가. 너무 김치를 많이 먹어서 뇌가 소금에 절여진 것은 아닌가. 그래서 원자력발전소를 그따위로 운영했던 자유한국당에 원자력발전과 더불어 정권을 넘겨주겠다 한다. 자살도 사실은 인간의 권이리이기는 하다. 참 웃긴다. 바보같다.

내가 북한폭격론을 주장하는 이유는 하나다. 제재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강력한 제재도 북한의 핵개발 자체는 막을 수 없다. 과거 오바마 정부가 이른바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으로 그냥 아무것도 않고 지켜본 결과가 어떠했었는가. 아니 설사 제대로 인해 북한 체제가 안에서부터 붕괴해도 문제다. 무려 100만이 넘는 무장한 폭도들이 정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한순간에 정부가 사라져버린 리비아와 이라크의 경우를 보라. 원래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할 때도 중동에서 원리주의의 확산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하던 세속주의자가 후세인이었다는 경고가 나왔었다. 결과가 어떠했는가.


차라리 무력으로 응징하여 북한의 핵능력을 제거하면 이후의 사태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무력으로 북한의 핵능력을 제거하고 중국군의 진주를 허용하면 큰 피해없이 북한의 핵능력을 김정은 정권과 함께 영구히 불능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북한을 폭격하겠다는 것은 만일의 사태에도 주도권을 한국과 미국이 가져가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다가 북한 체제가 먼저 안에서부터 붕괴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장한 100만의 폭도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난민들이 중국과의 혹은 한국과의 국경으로 밀려들게 된다. 딱 미국으로 향하던 캐러반들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혼란스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란 그 최악의 정부조차도 사라진 상황을 듯한다. 설마 그런 상황을 바라는 것일까? 그런 상황을 바라는 것은 세계에서 단 하나 일본 뿐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북한이 예뻐서 북한과 대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북한 정권을 사랑해서 북한 정권이 하는 말을 들어주자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우리에게는 손해다. 대화로 푸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오바마가 했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ICBM의 개발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던가 말이다. 심지어 수소폭탄 실험까지 했었다. 그래서 그렇게 제재하며 지켜보는 사이 북한의 핵능력이 지금보다 더 고도화되면 그 피해는 누가 보겠는가. 그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면 그 영향은 누가 받겠는가. 일본만 좋다니까. 


세상에 좋아서 하는 협상이란 없다. 그저 좋아서만 하는 계약이라는 것도 없다. 필요하니까 하는 것이다. 필요하니까 이것은 양보하고 저것은 타협해가며 어떻게든 결과를 내놓으려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북한이 영구적으로 핵개발을 포기케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게 대화의 장으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고, 그럴 수 있도록 당근을 주어 유인하는 것이다. 그래도 안되면 차라리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실력으로 북한의 핵능력을 불능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미국 하는대로 맡기고 지켜보기만 하자? 북한의 핵개발의 남의 나라 문제인가? 북한의 핵개발을 포기케 하는 것과 북한에 경제적 이익을 주는 것 가운데 어느것이 우리에게 더 큰 피해이고 손해인가?


지금 상황에서 어차피 우리에게 손해가 될 테니 가만 있으라 하는 것은 그냥 북한 핵개발을 용인하자는 말과 같다. 더불어 북한에서 혹시 벌어질 만일의 사태에 대해 주도권을 놓아 버리자는 것과도 같다. 하긴 차라리 북한을 중국에 넘기자는 사람마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감정과 이성을 구분하지 못한다. 합리를 주장하면서 정작 지금의 선택으로 인해 잃게 될 기회비용을 계산하지 못한다. 북한이 착해서도 옳아서도 아니다. 북한이 좋아서도 북한을 믿어서도 아니다. 세상에 그런 협상따위 없다. 서로 좋아하고 믿으면 계약도 없다. 조금이라도 불신이 있으니 계약이라는 형식을 갖춘다. 어이없어지려 한다.

이를테면 취업자수가 늘었다. 특히 20대와 60대 이상에서 취업자수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언론에서 주목하는 것은 그런 가운데 떨어진 30대와 40대의 고용률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정책은 잘못되었다. 말이 된다 생각하는가?

실업률이 전달보다 낮아졌다. 그러면 전년 동월과 비교한다. 사실 그게 맞다. 그런데 전년 동월보다 나아지면 이번에는 전달과 비교한다. 그래도 나아졌으면 어떻게든 안좋아진 부분을 찾으려 실업자수든 취업자수 증가든 아무것이든 찾아서 그것만 대서특필한다. JTBC KBS MBC 한겨레 경향 모두가 하고 있는 짓거리다. 이를테면 자식이 학교에서 시험성적을 받아왔는데 모두 100점인 가운데 하나 틀렸다고 나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같은 경우 아예 공부를 포기했었다. 그건 어떻게 안되는 것이다.

고도화된 현대사회에서 완전무결한 정책을 펼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거의도 아니다. 다 좋아도 어느 하나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두가 좋아해도 특정한 한둘은 반드시 반발할 수밖에 없다. 역사상 어느 위대한 군주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단 하나의 흠결도 없는 완벽한 정책같은 건 펼쳐 보지 못했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정책마저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안좋은 부분만 계속 지적하면 그나마 좋아지던 정책마저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장 노년층 일자리 늘어났는데 중장년층 일자리 줄었다고 노년층 일자리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마저 나온다. 왜? 어느 언론도 그 정책이 잘된 정책이라 말하지 않고 있으니까. 20대의 고용률이 늘었는데도 그마저 잘했다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하던 정책을 포기하라. 아니 아예 정권을 내려놓으라.

지금 진보언론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가 그것이다. 잘한 것을 잘한다 하지 않고 오로지 못한 것만 찾아서 보수언론들과 함께 공격한다. 그것이 언론의 본분이라고. 권력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보수언론들이야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런 기사들을 내놓는다. 그래서 그런 비판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당장의 문제있는 정책들을 철회시키는 것인가? 최저임금을 낮추고, 근로시간을 늘리고, 필요한 규제들마저 모두 풀면서, 부동산경기를 부양시킨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가? 차라리 지금 어떤 정책이 어느 만큼 자신들의 현실을 낫게 만들었으니 그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들을 궁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럴 머리들은 없으니까.

그냥 게으른 것이다. 원래 인터넷에서 남 까는 글이 넘쳐나는 이유가 그것이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쉽다. 꼬투리 하나 잡아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것은 어렵다. 자칫 함께 욕을 들어먹을 수 있고, 사실관계까지 확인하고 논리를 찾아내려면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니다. 차라리 잘못된 하나만 찾아서 아예 모두가 잘못인 것처럼 몰아붙인다면 얼마나 편하고 그럴싸한가. 손석희는 역시 그냥 산에 들어가 똥이나 싸는게 나은지 모르겠다. 갈수록 실망이다. 쉬운 기사를 너무 쉽게 보도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언론이 지켜야 할 본분인가.

비판이란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지르면 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더구나 언론의 비판은 그만큼 무거워야 한다. 아예 비판할 것이 없으면 보도조차 안해 버린다. 비판할 것이 없으면 정부든 여당이든 아예 뉴스에서 사라져 버린다. 비판만이 보도의 전부다. 비판만이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의 전부다. 어디서 언론학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정권 초기부터 정작 기자며 관계자들이 하던 말들이다. 그래서 비판을 통해 이루고픈 것이 무엇인가. 한심한 것이다. 병신은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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