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감자 잎마름병에서 시작된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을 지워버리는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던 데에는 당시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의 자유주의적인 복지관의 지분이 꽤나 컸었다. 모든 개인들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고자 노력해야 하며 정부는 그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역할만을 해야 한다. 따라서 더이상 자신을 위해 노력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도 그러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다른 사람보다 못한, 그러므로 더욱 스스로 노력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만 이루어져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닌가? 내가 2030 남성들이 떠드는 공정이라는 주제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이미 19세기에 나온 이야기들일 테니.

 

그러니까 당장 감자농사를 망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실제 도움이 될 만한 지원을 하기보다 그럼에도 그보다 못한 사람들까지 고려해서 겨우 목숨만 붙여 놓을 만큼의 지원조차 아껴서 제한해가며 최소한으로 했던 탓에 대부분 아일랜드 농민들은 그런 도움을 받기 전에, 아니 도움을 받는 와중에도 수도 없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작 감자잎마름병의 피해를 받지 않았던 아일랜드의 밀과 소고기와 유제품은 여전히 영국으로 실려나가고 있었고. 괜히 아일랜드인들이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편에서 영국과 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자기들이 마음대로 쳐들어와서 땅까지 다 빼앗아 가 놓고는 정작 아일랜드인들이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본격화되고 과격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영국인은 아일랜드의 원수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을 국가가, 혹은 공동체가 구제하려 할 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가난해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그보다 형편이 나은 탓에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하게 후자보다 전자가 조금 더 어렵게 사는 것이 얼핏 옳아 보이는 것은 분명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더 형편이 나은 사람까지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러면 그보다 조금 더 형편이 나은 사람이라는 순환고리에 걸리고 만다. 더구나 재정의 효율적인 지출이라는 측면에서도 지원은 가능한 최소한으로만 하는 것이 더 영리해 보이기도 한다. 재정지출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최대한 공정하게 지원을 하는 방법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 그보다 나은 사람들보다 못하게 돕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지원이란 것이 과연 그 대상이 될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적정한 수준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했기에 아일랜드 대기근이 그토록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영국 국내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자 운영한 구빈원은 진짜 최소한의 대상만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끔찍한 환경에 내몰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바로 이것이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는 사회적으로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20대 남성도 그리 말하더라. 복지는 낭비다. 사회적 자원은 보다 가치있는, 사회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진짜 어려운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삼는 선별적 복지가 옳다. 그러면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재원을 쓸 수 있으니 오히려 낫다. 거짓말이다. 일단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부터 재원을 아끼기 위한 것이다. 예산은 똑같이 쓰면서 대상만 선별해서 최소한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최소한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할 경우 그보다 조금 형편이 나았던 사람들과의 형평성이라고 하는 그들이 주장하는 공정한 복지라고 하는 논리와 모순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나는 집에서 신김치 하나 겨우 반찬으로 싸왔을 뿐인데 집이 가난하다고 학교에서 급식을 받아먹는 아이들의 식판에는 카레도 있고 고기도 있더라. 과연 신김치를 반찬으로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에 가난한 아이들의 식판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고추가루조차 없는 배추절임 하나 정도여야 다른 사람들도 불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무엇인가?

 

미국 학교들의 급식이 그토록 엉망인 이유는 별 것 없다. 진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립학교에 비싼 돈을 내가며 자식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돈으로 자식들 밥을 먹이고 있을 것이기에 학교 급식에 신경쓸 이유가 없고, 공립학교 다니면서 급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거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즉 어차피 돈도 좀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사람들에게 공교육의 급식이란 처음부터 해당사항이 아니고, 그러므로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어쩔 수 없이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그와 같은 급식을 감수하며 자식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급식에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일 이유가 없다. 사실 보편적인 무상급식이 시작되기 전 우리나라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었다. 사는 동네, 다니는 학교, 학부모의 부와 지위에 따라 급식도 천차만별이었으니. 그런데 돈 있는 사람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자식들이 학교에서 같은 급식을 먹어야 하니 사정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급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선별적 복지란 사회적으로 부와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볼모로 잡혀 있는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을 남기기 위한 그들만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을 때 자신들은 더 많은 재원을 아껴서 다른 곳에 쓸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것은 지금 모두가 누리고 있는 이하로 복지의 수준을 떨어뜨림으로써 더 극대화될 것이기도 하다. 일론 머스크와 트럼프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선별적 복지의 진짜 목적일 것이다. 그래야 자기들이 내는 세금을 줄일 수 있다. 더 적은 세금만을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내게 될 수 있다. 더 나은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적은 더 낮은 그럼으로써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을 딱 그 정도만. 그래야 개인들도 노력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자유의지주의자들의 주장과도 맞닿는다. 개인이 알아서 살아야지 사회가 그들의 삶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산술적인 효율과 공정이 젊은층들의 일차원적인 감정과 본능과 충동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고. 내 세금이 저런 열등하고 한심한 인간들을 위해 쓰이는 것은 낭비다.

 

다시 말하지만 복지예산을 어차피 똑같이 쓸 것이라면 선별적 복지를 이야기할 이유따위 없다는 것이다. 예산을 더 적게 쓰자. 더 효율적으로 쓰자. 그래서 대상을 좁힌 대신 지원을 더 늘리고자 한다면 결국에 차상위라고 하는 현실의 문제와 부딪힌다. 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공정과도 맞지 않는다.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적게. 못하게. 그렇게 마침내 이르게 될 결론이 바로 영국의 구빈원이다. 그리고 미국의 노숙자들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오히려 고통과 모멸감을 느껴야 비로소 스스로 살아갈 동기를 가지게 된다. 휘황한 말로 포장을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세금도 내지 않은 어린 놈의 새끼들이 따라 주장할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참 우습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젊은 세대들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었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의 주장이 공정과 정의의 이름으로 떠돌고 있다. 시대가 바뀐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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