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곤 한다. 어떻게 사람이 2살 때 일을 기억할 수 있지? 더구나 50이 되어서.

 

하지만 분명 2살 때 기억이 맞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때 바로 아랫 동생이 태어났다. 2살 터울이니 아랫동생이 태어난 그때가 내가 2살 때가 맞을 것이다.

 

원래는 청담동에서 태어났다 한다. 아직 청담동이 개발되기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강남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부모님은 구로동까지 떠밀려왔고, 그래서 2살 무렵에는 구로역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 구로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 사이에 위치한 오래된 주택가가 바로 당시 부모님이 이사가서 살던 동네였다.

 

그래서 어렸을 적 기억을 보면 철로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주변보다 조금 높게 철길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데 그 근처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그런 아이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 지하철이 - 아마도 당시는 경인선이 바쁘게 지날 때마다 전철을 따라 뛰어다니던 아이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뜻이다. 개구리도 아마 80년대 중반까지 거기서 잡혔을 것이다. 아이들이 백설기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스티로폼 조각을 맛있게 베어물던 것도 기억난다. 당시 동네 아줌마들은 내가 얌전하다고 좋아했다는데 사실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는 백설기와 쓰레기인 스티로폼 조각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과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여 놋그릇을 씻는 아주머니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았다. 진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놋그릇은 원래 기와를 부숴서 그 조각으로 씻는 것이었다. 기와가루를 짚새기에 뭍혀서 구리에 슬기 쉬운 녹까지 닦아내는 것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에 모여 나는 흙이라 여겼던 가루들로 설거지하던 모습이 그래서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이면 확실히 아직 놋그릇이 쓰일 무렵이기는 했다.

 

그리고 다음이 대림동이다. 그리고 다음이 아마도 도림동일 것이다. 다시 대림동으로 갔다가 그리고 여섯살 때 구로동으로 가서 거기서 아마 대부분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서 남아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마 찾아보면 서너살 때 살았던 집의 흔적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거기가 아마 대림역에서 구로구청앞 도림천로 다리 사이 어딘가일텐데, 어머니는 알 지 몰라도 나는 구체적인 기억까지는 없다. 다만 거기서 도림동으로 이사갈 당시 삼륜차를 탔던 기억은 선명하다.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삼륜트럭을 타고 이사했는데 그 기억이 여전히 꽤 생생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아무튼 당시 부모님 사정이 좋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밥을 먹지 못해서 나랑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외삼촌이 보리밥을 일부러 가져와서 어머니께 주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었고, 어머니는 동생을 안고 힘겹게 누워 있었다. 그래도 먹는 것은 주리지 않았던 외가가 바로 근처에 이사와 있던 탓에 다행히 외삼촌이 오가며 밥을 갖다 주고는 했었다. 그래서 기억하는 것이다. 두 살 아래 동생은 아직 갓난아이였고, 그런 동생을 낳고 어머니는 무척 힘들어 했으며, 외삼촌이 외가에서 밥을 가져다 어머니가 먹게 했다. 아마 20년 가까이 되었을 텐에 우연히 그 동네를 다시 찾을 일이 있었는데 여전하더라. 시간이 멈춘 듯 여기가 거기였던가 비슷비슷한 것이 바로 이 동네였구나.

 

외할머니는 이후로도 상당기간 그 동네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이모도 그래서 그 근처에서 꽤 오래 살았을 것이다. 구로라는 이름이 내개 항상 남다른 의미로 들리는 이유다. 구로동이란 다름아닌 구로역 근처다.

 

구로구청 공사장 옆에서 놀았던 늙다리의 옛추억이란 것이다. 어느날 구로구청이 지어지고 도림천에 놓였던 출렁다리가 진짜 다리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도림천은 똥물이었다.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다.

원래 '삽질한다'라는 말은 '언 땅에 삽질한다'는 말을 줄인 것이었다. 실제 그래서 나이 좀 있는 사람 가운데는 '삽질한다'고 할 때 앞의 말까지 붙여서 문장 전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리고 이 말의 유래는 바로 군대였다.


언 땅을 파려면 곡괭이가 필요하다. 사실 곡괭이로도 부족하다. 언젠가 삼성건설에서 아파트 건설한다고 재개발지역 철거하는 일을 했었는데 그때도 한겨울이었다. 그리고 주어진 것은 곡괭이와 삽. 참고로 그때 일을 한 것은 나와 아는 동생 두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돈 받을 때 보니 꽤 많은 사람 이름이 적혀있더라. 그리고 사실 굳이 그날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거의 일도 하지 못했었고. 뭐 그런 일도 있었다 치고.


곡괭이만으로 언 땅을 파려 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곡괭이가 잘 박히지도 않고 조금만 각도가 어긋나면 어이없이 튕겨나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자칫 다치기도 한다. 언 땅에서 곡괭이질하는 것도 보통 노련한 솜씨가 없으면 안된다. 그런데 하물며 삽질이라면야. 삽 하나 주고 언 땅을 파라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군대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나 역시 경험한 일이다. 한겨울에 땅을 파야 하는데 곡괭이 없다고 삽만 잔뜩 주고 일을 시켰다. 그러다가 삽이라도 부러지면 주임원사의 오만 소리를 다 들어야 했으니 진짜 보통 난감한 상황이 아니었다. 삽날 위에 올라가 체중을 실어 찍어보기도 하고, 그대로 수직으로 세워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내리찍기도 하고, 그래도 땅은 파이는구나 기적을 경험해야만 했다. 진짜 다시 하라면 못할 짓인데...


그게 바로 대한민국 군대다. 18개월로 줄이면 전투력 저하된다? 곡괭이만 제대로 보급해주어도 삽질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굳이 곡괭이로 팔 필요 없이 장비만 제대로 지원해도 땅파느라 허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요즘은 모르겠다. 가을이면 싸리비만든다고 하루왠종일 산을 돌아다니며 싸리나무를 꺾고, 연병장의 자갈이며 잡초 제거한다고 뙈약볕에 하루종일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러고서도 전투력이 유지될까. 정작 전투훈련을 할 때는 장비도 교보재도 부족해서 거의 말로만 설명하고 말 뿐이다. 말만 잘한다.


아무튼 군생활 이야기가 나오길래. 문재인을 군생활로 안철수가 저격하며 한바탕 또 군대얘기가 나오고 있다. 군생활을 경험했는가는 두 가지로 나뉜다. 군생활의 불합리를 경험했는가. 혹은 아닌가. 썰전에서 장교로 복무한 전원책이 군대에 불합리란 없었다 주장하는 것이나 같다. 병출신인 유시민은 안다. 그리고 같은 병출신인 나 역시 그런 유시민의 주장에 동조한다.


언 땅에 삽질할 경우도 없지는 않다. 겨울에도 땅은 파야겠지. 겨울이라고 전쟁 않는 것 아니고 참호 안 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냥 삽만 준다는 것이다. 기합과 근성. 딱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러다 망하고 있었다. 남 일 아니다. 생각났다.


지난 글에 이어서, 그러면 FHD라고 하는 같은 조건에서 경쟁하며 그 격차가 확연해진 가정용게임기의 그래픽은 이제 PC와 비교해서 도태되는 과정에 있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이제는 가정용게임기보다 PC의 그래픽이 더 좋다. 더 좋은 환경에서 게임을 즐기고자 한다면 당연히 가정용게임기가 아닌 PC에서 게임을 즐겨야 한다. 가정용게임기는 서서히 사양세에 접어들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그래서 굳이 지난 글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가며 원래부터 가정용게임기의 게임그래픽이 PC의 그것에 비해 우위에 있지 않았음을 역설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그랬었다. 사람들이 가정용게임기의 게임그래픽이 PC의 그것에 비해 훨씬 우위에 있다 여겼던 시절에도 PC의 게임그래픽은 가정용게임기보다 최소한 한 발 이상 앞 서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차이가 나오는가. 바로 거기에 답이 있다.


PC로 게임을 할 때 모니터와의 거리는 아무리 멀어봐야 1미터 이내다. 그런데 가정용게임기로 게임을 할 때는 TV와의 거리 만큼 자연스럽게 벌어지게 된다. 아무리 TV가 좋아도 PC모니터처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머리까지 바짝 갖다대고 보지는 않는다. 거실에 있는 TV는 항상 그 이상 거리가 벌어진다. PC모니터로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40인치 이상의 크기마저 자연스러워지는 거리다. 과연 그 정도 거리에서 게임화면의 픽셀 하나가, 이펙트 하나가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거나 느껴지게 될까?


320*240의 저해상도지만 29인치 이상의 TV화면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만큼의 거리를 벌렸을 때 낮은 해상도로 인한 픽셀의 크기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세세한 표현 하나 효과 하나가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PC의 환경과 다르다. PC환경에서는 27인치 크기에 FHD의 해상도도 픽셀이 너무 크게 눈에 들어오기도 하지만, TV에서는 그보다 더 큰 화면에 그보다 적은 해상도에서도 픽셀의 크기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느껴지지 않는다. 보다 더 생략하고 간소화해도 거리가 멀어진 만큼 그 크기는 상쇠된다. 대신 PC모니터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화면만이 남는다. 서로가 느끼는 체감도 목적도 다르다.


더구나 PC에서 가능한 최상의 그래픽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아직도 가장 성능 좋은 그래픽카드는 대부분의 소비자에게는 아직 너무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메인스트림급 그래픽카드조차도 적지 않은 추가비용을 요구한다. 지난 글에서도 말한 바 있는 사람들이 사실과 전혀 다르게 가정용게임기의 게임그래픽이 PC의 그것에 비해 훨씬 뛰어났다 기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최고사양으로 모두 맞추려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사양만으로 컴퓨터를 맞추고 그 범위 안에서 사용한다. 가정용게임기는 이미 모든 것이 최적의 게임환경을 위해 맞춰진 채 출시된다. 게임만을 목적으로 하기에 불필요한 부분이 제거되어 가격까지 저렴하다. 가정용게임기의 운영과 관련한 수익모델 역시 한 몫한다. 그래픽카드 하나 살 돈이면 아예 가정용게임기 본체 하나를 살 수 있다.


매번 하고 싶은 게임을 위해 최적의 하드웨어를 갖추지 못할 것이면 아예 하드웨어에 맞게 세팅되어 게임들이 출시되는 가정용게임기 쪽이 훨씬 경제적으로 이익일 수 있다는 말이다. 최소사양이 어떻고 권장사양이 어떻고 따지기 전에 개발사에서 이미 기존의 가정용게임기를 기준으로 게임을 만들고 세팅해서 내놓는다. 유저가 게임을 위해 해야 할 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메뉴얼에 적힌 대로 전원을 넣고 게임을 구돌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PC는 간단한 작업을 하려 해도 부팅부터 번거로운 일이 적지 않다.


어째서 외장형 그래픽카드의 시장이 가정용게임기의 시장보다 더 커진 지금도 사람들은 가정용게임기만을 이야기하는가. 그동안 리테일시장에서 팔려나간 외장형 그래픽카드의 절대다수는 가정용게임기 이하의 보급형 모델인 경우가 많다. 게임을 즐기는 거의 상당수의 사람들이 가정용게임기 이하의 환경에서 게임을 즐긴다. 당장의 하드웨어에 대한 투자가 부담스러워 게임 자체를 망설이는 경우마저 적지 않다. 가정용게임기는 게임기 하나만 있으면 된다. 지금의 모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전혀 아무런 걱정도 궁리도 필요없이 그저 가정용게임기만 구동할 수 있으면 모두 즐길 수 있다.


가정용게임기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것, 바로 게임을 하는 장소다. TV는 거실에 있다. PC는 개인의 방에 있다. 가정용게임기는 거실에서 가족은 물론 찾아온 모두와 함께 즐길 수 있다. PC용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니터 앞에 앉은 한 사람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정용게임기에 대해 부정적인가. 이미 첫머리에 썼다. TV와 PC는 최적의 거리가 다르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에서 아직 게임은 가족과 같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방에서 자기 혼자서 즐기는 것이다. 자기 방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TV와 PC의 거리차이란 사실 의미가 없어진다. 오히려 크기의 차이로 인해 TV의 단점이 두드러질 수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아직 게임은 혼자서 즐기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다. PC와 가정용게임기가 놓이는 장소다. 그것이 두 하드웨어의 차이를 만들었다. 두 하드웨어에 대한 오해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고려하여 각자 자기가 원하는 플랫폼에 맞춰 게임은 발매된다. PC의 성능이 아무리 가정용 게임기의 그것을 한참 넘어섰어도 여전히 가정용게임기가 유효한 이유다. 하드웨어의 차이와 상관없이 가정용게임기여야만 하는 게임들이 있다. 

그러고보니 오래전 후배녀석과 논쟁한 적이 있었다. 과연 언제부터 PC의 게임성능이 가정용게임기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는가. 필자의 경우 처음부터 PC의 게임성능이 가정용게임기보다 우월하다 주장했었고, 훨씬 오래전부터 가정용게임기로 게임을 즐겨온 후배는 원래는 가정용게임기가 PC에 비해 우월했다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사실 둘 다 맞다. 그리고 둘 다 틀리기도 하다. 당장 1990년대 초반까지도 하드 없이 플로피디스크만으로 구동되는 개인용컴퓨터가 적지 않았다. VGA는 커녕 EGA조차도 아닌 CGA의 4색이 전부인 시스템마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레 비하면 당장 1985년에 출시된 닌텐도의 패밀리만 해도 25색을 사용할 수 있었고, 1990년 출시된 슈퍼패미콤은 256색에 축소확대회전까지 다양한 효과까지 구현할 수 있었다. 동시대 경쟁기종이었돈 세가의 마크3나 메가드라이브 역시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과연 그 차이가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그런데 한 가지 함정이 당시 - 아니 200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TV들은 아날로그방식이었고 그 해상도가 320*240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정용게임기는 TV를 디스플레이로 사용한다. 반면 이미 1980년대 초부터 IBM이 제안한 PC는 그보다 거의 4배 가까운 640*400이라는 고해상도 환경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당연히 그래픽 해상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그래픽연산의 부하도 커지게 된다. 더 높은 해상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것들을 양보하고 희생해야만 한다. 지금도 더 높은 해상도에서 게임을 구동하려면 많은 부분 옵션을 타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장 1987년 IBM이 발표한 VGA만 하더라도 320*200의 해상도에서는 슈퍼패미콤과 같은 256칼라를 동시에 출력할 수 있었지만 원래 해상도인 640*480에서는 16칼라만을 겨우 구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슈퍼패미콤이 발매된 1990년 역시 IBM이 발표한 XGA는 무려 800*600 해상도에서 1600만 칼라를, 그리고 1024*768 해상도에서는 65536색을 구현하고 있었다. 다만 이 VGA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 추가로 들어야 했다. 슈퍼패미콤 한 대만 사면 모두 들어있는 사운드칩조차 외장카드의 형태로 따로 구입해서 달아야 했던 것과 같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외장그래픽 없이 내장그래픽만으로 구동하는 컴퓨터의 게임성능은 가정용게임기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심지어 보급형 엔트리급 그래픽카드의 성능마저 가정용게임기의 그것에 미달하는 겨우마저 적지 않다. 가정용게임기의 성능을 뛰어넘으려면 그만큼의 추가적인 지출과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즉 더 많은 돈과 수고를 들여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한다면 개인용컴퓨터는 가정용게임기의 게임성능을 넘어설 수 있다. 반면 최소한의 부품만으로 구성된 컴퓨터라면 가정용게임기의 게임성능을 따라갈 수 없다. 서로 경험한 것이 다른 것이다. 거의 하이엔드에 가깝게 부품을 구성한 컴퓨터를 직접 보았던 필자로서는 가정용게임기보다 훨씬 월등한 성능의 PC를 떠올릴 수밖에 없고, 최소한의 부품만으로 구성된 저가의 컴퓨터만을 보았던 후배는 동시대 훨씬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이 가능했던 가정용게임기의 우세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항상 같은 상황은 반복되어 왔었다. 닌텐토의 패밀리와 세가의 마크3, 그리고 슈퍼패미콤과 메가드라이브, 이어진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까지. 아니 한 번 가정용게임기가 PC보다 기술적으로나 성능적으로 앞서 있던 때가 잠시 있기는 했었다. 바로 플레이스테이션이 출시되고 부두2가 대중화되기까지 1994년부터 1996년까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자신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로부터 2년 뒤인 1998년 발매된 롤플레잉게임 '마이트앤매직6'에서 굳이 3D카드의 하드웨어가속을 빌지 않고서도 CPU의 연산만으로 방대한 오픈월드를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두2를 통해 처음으로 외장 3D그래픽카드라는 것이 일반화된 것이지 이미 그전에도 CPU의 막강한 연산력을 활용한 3D게임이 적지 않았다. 전문젹인 외장 3D그래픽카드가 일반화된 뒤에도 그 구현 목적과 동기에 따라 그 방식이 갈리기도 했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마이트앤매직의 경우는 방대한 오픈월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스퀘어의 '파이날판타지'시리즈들은 스토리를 따라가며 만나는 협소한 세계만을 구현하고 있었다. 굳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직접 경험하게 될 부분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위해서 한정된 하드웨어의 자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 게임 유저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체험적인 영역만이 중요했다. 그에 비하면 PC용 게임개발자들은 무모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게임에 담아내려 했었다. 아마 그 차이가 콘솔의 전성기 세계의 게임을 주도하던 일본의 게임개발사들이 지금 미국의 게임개발사들에 밀려 그 존재감마저 미미해진 이유이지 않을까. 하드웨어의 한계가 더 넓어진 지금 더 넓어진 환경을 충실히 활용할 수 있는 개발사들에게 더 유리해진 것은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같은 경험의 차이들도 편견과 오판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최근에 와서야 가정용게임기의 게임성능을 PC가 비로소 뛰어넘었다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인가. 그것은 과거 어느때보다 가정용게임기들에 불리해진 현재의 게임환경과 직접 관계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 과거의 가정용게임기들은 320*240의 아날로그TV를 디스플레이삼아 게임을 구현했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가 PC의 게임들은 대부븐 640*480이상의 환경에서 구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디지털TV가 일반화되면서 가정용게임기 역시 PC와 크게 다르지 않은 최소 1280*720 이상의 HDTV를 디스플레이로 삼아 게임을 구현하게 되었다. 지금은 아예 1920*1080의 FHD가 일반화되어 있다. 같은 디스플레이환경에서 PC와 경쟁한다. 그동안 서로 다른 환경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차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PC와 마냥 성능경쟁을 하기가 어려운 것은 태생적으로 가정용게임기가 추구하는 그것이 PC와 전혀 달랐다. 최소한의 전력과 부담되지 않는 크기 안에 게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집중시켜야만 했었다. 얼마든지 더 큰 케이스에 더 큰 용량의 파워서플라이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PC와 전혀 다른 방향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도 최고의 하이엔드 컴퓨터들은 기괴할 정도의 덩치와 상상을 초월한 가격을 자랑한다. 구매자가 부담없이 가정용게임기를 구입할 수 있도록 가격도 신경써야지만 한다. 그래도 과거에는 환경의 차이로 어느 정도 눈속임이 통했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렵다. 그러면 가정용게임기는 이제 PC에 밀려 도태되는 것인가.



나머지는 다음에. 벌써 글이 너무 길어졌다. 자료없이 쓰는 글이라 체력의소모가 크다. 내일일지 모레일지. 일단 킵. 여기까지다.

아주 어릴 적 일이다. 그렇다고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쫓아 시장에 갔었다. 그냥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그것도 기특하다고 시장안 허름한 식당에서 순대국이라는 것을 사주셨다. 내가 그 뒤로 상당이 오랜동안 순대국이라는 것을 먹지 않게 된 이유였다.


제대로 냄새도 제거하지 않아서 거의 악취에 가까운 노린내가 나는 내장들이 시뻘건 고추국물 안에 담겨 있었다. 순대국에 순대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 지인이 맛집이라며 끌고 들어간 순대국집에서였다. 그래도 거기 순대는 고기며 야채며 듬뿍 들어간 순대였다. 당면순대를 넣은 순대국이라니. 거의 컬처쇼크급이었다. 요즘은 아예 돼지국밥 아류로 뽀얗게 국물을 우려 내놓는다.


아마 그 비슷한 무렵 학교 다니던 길에는 이것저것 안주와 함께 소주를 팔던 식당이 하나 있었다. 항상 지나면서 보면 노란 들통이 식당 앞에서 보글거리며 끓고 있었다. 그 안에 끓고 있는 돼지뼈며 감자며 손님이 주문하면 덜어서 내놓는 것이 바로 감자탕이었다. 손님더러 알아서 끓여먹으라고 - 하기는 이미 돼지뼈와 감자는 다 익어서 나온다. 국물도 거의 우려 내온다. 그냥 야채며 몇 가지만 손님 앞에서 익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그때는 삼겹살은 진짜 돈 없어서 먹는 값싼 고기였다. 대학교 다닐 때도 싼값에 그것도 고기라고 푸짐하게 먹고 싶을 때 시켜먹는 것이 바로 삼겹살이었다. 돈있으면 돼지불고기, 그보다 더 돈에 여유가 있으면 돼지갈비. 요즘은 갈비보다 어째 삼겹살이 더 비싸진 것 같다. 과연 삼겹살이 그렇게 비싸게 먹을 부위인가는 지금도 그다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는 노마 하나가 자기네 이모네 식당에서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고기를 다 먹고 나면 밥 볶아준다고 자랑하던 게 그것도 그리 오래지 않았다. 아, 그런 것도 있구나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예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의외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이 그다지 오래지 않은 것이 많다. 어려서 감자탕이라 하면 감자국 비슷한 것이라 여겼었는데. 들통 안에는 빨간 국물 위로 노란 감자만 동그라니 떠있는 듯 보였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기억이다.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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