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곤 한다. 어떻게 사람이 2살 때 일을 기억할 수 있지? 더구나 50이 되어서.

 

하지만 분명 2살 때 기억이 맞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때 바로 아랫 동생이 태어났다. 2살 터울이니 아랫동생이 태어난 그때가 내가 2살 때가 맞을 것이다.

 

원래는 청담동에서 태어났다 한다. 아직 청담동이 개발되기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강남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부모님은 구로동까지 떠밀려왔고, 그래서 2살 무렵에는 구로역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 구로역에서 가산디지털단지역 사이에 위치한 오래된 주택가가 바로 당시 부모님이 이사가서 살던 동네였다.

 

그래서 어렸을 적 기억을 보면 철로와 관련된 것이 적지 않다. 주변보다 조금 높게 철길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데 그 근처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그런 아이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 지하철이 - 아마도 당시는 경인선이 바쁘게 지날 때마다 전철을 따라 뛰어다니던 아이들 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뜻이다. 개구리도 아마 80년대 중반까지 거기서 잡혔을 것이다. 아이들이 백설기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스티로폼 조각을 맛있게 베어물던 것도 기억난다. 당시 동네 아줌마들은 내가 얌전하다고 좋아했다는데 사실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는 백설기와 쓰레기인 스티로폼 조각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과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여 놋그릇을 씻는 아주머니들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았다. 진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놋그릇은 원래 기와를 부숴서 그 조각으로 씻는 것이었다. 기와가루를 짚새기에 뭍혀서 구리에 슬기 쉬운 녹까지 닦아내는 것이었다. 비오는 날이면 처마에 모여 나는 흙이라 여겼던 가루들로 설거지하던 모습이 그래서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이면 확실히 아직 놋그릇이 쓰일 무렵이기는 했다.

 

그리고 다음이 대림동이다. 그리고 다음이 아마도 도림동일 것이다. 다시 대림동으로 갔다가 그리고 여섯살 때 구로동으로 가서 거기서 아마 대부분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모두 아파트가 들어서서 남아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마 찾아보면 서너살 때 살았던 집의 흔적 정도는 찾을 수 있을 테지만, 거기가 아마 대림역에서 구로구청앞 도림천로 다리 사이 어딘가일텐데, 어머니는 알 지 몰라도 나는 구체적인 기억까지는 없다. 다만 거기서 도림동으로 이사갈 당시 삼륜차를 탔던 기억은 선명하다. 포장도 되지 않은 길을 삼륜트럭을 타고 이사했는데 그 기억이 여전히 꽤 생생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아무튼 당시 부모님 사정이 좋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밥을 먹지 못해서 나랑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외삼촌이 보리밥을 일부러 가져와서 어머니께 주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었고, 어머니는 동생을 안고 힘겹게 누워 있었다. 그래도 먹는 것은 주리지 않았던 외가가 바로 근처에 이사와 있던 탓에 다행히 외삼촌이 오가며 밥을 갖다 주고는 했었다. 그래서 기억하는 것이다. 두 살 아래 동생은 아직 갓난아이였고, 그런 동생을 낳고 어머니는 무척 힘들어 했으며, 외삼촌이 외가에서 밥을 가져다 어머니가 먹게 했다. 아마 20년 가까이 되었을 텐에 우연히 그 동네를 다시 찾을 일이 있었는데 여전하더라. 시간이 멈춘 듯 여기가 거기였던가 비슷비슷한 것이 바로 이 동네였구나.

 

외할머니는 이후로도 상당기간 그 동네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은 이모도 그래서 그 근처에서 꽤 오래 살았을 것이다. 구로라는 이름이 내개 항상 남다른 의미로 들리는 이유다. 구로동이란 다름아닌 구로역 근처다.

 

구로구청 공사장 옆에서 놀았던 늙다리의 옛추억이란 것이다. 어느날 구로구청이 지어지고 도림천에 놓였던 출렁다리가 진짜 다리가 되어 있었다. 여전히 도림천은 똥물이었다.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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