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럽국가들의 군사력이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이유는 단 하나다. 군사력에 투자하는 돈이 낭비로 보인다. 사실 그럴만도 하다. 군사력이라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야지만 의미가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가치도 없는 일에 돈을 쏟아붓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나라들이 전성기를 지나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군사력에 소홀하다가 결국 그로 인해 멸망에 이르고는 했었다. 고대 지중해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더이상 러시아와 전쟁을 하거나 할 것도 아니고 군사력에 쓸 적지 않은 돈을 다른 데 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일견 합리적이지만 러시아가 실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미국이 유럽을 버리는 듯한 행보을 보이면서 비로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자기 나라를 자기 힘으로 지켜야만 한다.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대부분 연구개발은 일정한 성과 없이 그자 돈과 시간만 쓰고 끝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없던 것을 만들고 모르던 것을 알아내고 하지 않던 것을 하는 과정 아니던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고 원리를 밝혀내고 그를 응용하는 방법까지 알아내는 과정에서 실패가 없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더구나 무엇보다 항상 모두가 납득하고 인정할만한 연구주제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항상 의미있고 가치있는 그 결과 더 큰 이익으로 이어질 연구만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외토픽에나 나올만한 별 생뚱맞은 연구도 사이사이,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주인 것처럼 연구를 해야 하는 경우도 뜻밖에 적지 않다. 그래야지만 지금의 연구팀을 유지하면서 연구역량도 정비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연구개발이라는 게 평소에 하는 일 없이 놀다가 필요할 때만 불러서 시키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해당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에 대한 스킬도 쌓아가야 한다. 해당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나 과정들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더불어 그 결과로 얻어진 데이터 역시 제대로 분석해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건 그저 책으로만 혹은 강의만 들어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대수롭지 않고 그저 돈낭비에 지나지 않더라도 실제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습득해야 하는 말 그대로 스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만 들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주제에 대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가며 연구개발을 진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장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고 일론 머스크에 의해 불필요하다 판단한 연구들이 중단되자 미국내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상황이 그 직접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불필요한 연구를 중단한 순간 장차 미국이 필요로 할 때 필요한 연구에 종사하며 경쟁력을 강화해 줄 연구인력들이 일자리를 잃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경쟁상대가 될 다른 나라로 떠나려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미국 정부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을 끊자 다수의 인력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경쟁상대인 중국과 유럽으로 떠나려 하는 중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인력들도 있는 모양인데 그러나 한국은 이미 윤석열이 선제적으로 작살내 놓은 상황이라. 그리고 그것은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항상 모든 신기술이 시장에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당장 특허청만 들어가 봐도 한 해에 수도 없이 많은 특허들이 쏟아지지만 정작 그 가운데 실제 상품화되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는 것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도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물며 어떤 것들은 단지 흥미본위로, 연구개발팀 자체의 호기심이나 충동에 의한 것들일 수 있다. 이런 것도 있으면 재미있겠다. 저런 것도 만들어 보면 의미가 있겠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도 찾아지는 것이고, 아니더라도 필요한 때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데 투입할 수 있는 인력도 걸러지고 길러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술을 중요시하는 기업들에서는 철저히 연구개발진들의 자율성을 북돋고 보장하고 있었다. 오래전 미국 기술기업들의 연구개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도 아무나 필요하면 자재나 설비들을 이용해서 개인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제재가 없는 모습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가능할까 싶은 신기술들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효율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될 것 같은 연구에만 돈을 지원한다. 성공할 것 같고 돈이 될 것 같은 기술개발에만 인력을 투입한다. 그 외에는 전혀 어떤 투자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연구인력을 놀리고 설비와 자재를 방치하더라도 낭비를 줄이기 위해 더이상의 연구개발에 돈을 쓰지 않는다. 물론 그런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실제 연구개발에 쓰이지 않는 인력과 설비와 자재는 낭비이므로 하나씩 배제되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새로운 것도 나오지 않고, 기존의 것들을 개량하고 발전시키려 해도 그 역량이 보존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잉과 인텔이다. 삼성도 지금 그 대열에 합류하려는 모양이다. 재무계열에서 기술기업의 경영을 맡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흔한 부작용일 것이다. 돈을 아끼려다 가능성까지 팔아먹는다. 그런데 그런 짓거리를 나름 엔지니어 계통일 일론 머스크가 저지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골때리는 상황인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너무 성공하는 연구만 하려 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정치인과 대중들은 낭비가 많다고 줄여야 한다 이야기한다. 민주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민주당 정부는 실패하더라도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를 거리껴하지 않고, 보수장 정부는 비용을 줄인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연구들을 중단시킨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적 역량은 언제 길러졌는가? 그런데도 정부가 주도하는 것은 안된다며 핏대를 올리는 것이 보수정당과 그 지지자들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정당 지지자 가운데는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의 추종자가 그리 많다. 똥을 싸도 그들은 옳다. 웃기는 일이다.

원래 조선사회에서 과거란 양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실력만 되면 합격도 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었다. 그래서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과거에 합격해서 입신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단, 여기서 농사짓다가라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 땅도 가지고 있고, 그 땅을 경작한 노비며 소작인도 상당히 거느리고 있어서, 굳이 자기가 직접 뼈빠지게 농사지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향리나 호족들을 겸손하게 일컫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진짜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공부도 해서 과거에 급제한 예는 내가 아는 바로 없다.

 

당연하게 조선시대에는 책이 무척 비쌌다. 제대로 한 번 배워보려 선생님이라도 부르려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서 유학이라도 가려 하면 그동안 들어가는 돈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공부하려 하면 그동안 집안일은 아예 손을 놓아야만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생각보다 그리 낮지만은 않았던 것이었다. 남편이 과거공부한다고 책만 들이파는 사이 집안일을 대부분 책임지는 것은 아내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주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진 것도 없는 농민들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심지어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양반이 넘쳐나게 된 만큼 경쟁도 치열해져서 더이상 한 가정단위의 지원만으로는 급제를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어지간한 양반집안이라도 한 집안만으로는 그 비용이 감당이 안 되어서 아예 문중 전체가 나서서 될만한 이들을 밀어야 하는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비용이 감당이 안될 것 같으면, 어차피 대과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갈 기대가 없을 경우 그냥 과거에 합격했다는 명예 하나만 챙기고 포기하는 경우도 조선후기에는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초시니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면 원래 양인이면 다 볼 수 있는 시험이던 과거가 양반 가운데서도 선택된 일부만을 위한 제도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해서 관적에 나갈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과거도 볼 수 있었던 소수의 양반들을 벌열이라 불렀다. 어차피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얻을 수도 없고, 아예 과거 자체를 포기한 지방의 양반들은 달리 향반이나 잔반이라 불렀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는 주위 어딘가에는 실제 있는 사실들일 터다. 그나마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방 하나에 모든 가족이 모여 사는 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부방조차 없이 식구들과 부대끼며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이 학원까지 다니며 공부하는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참고서 한 권 사려 해도 눈치가 보이고, 학원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해도 옆에서 봐주고 챙겨줄 사람조차 없다면 그래도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더 잘살고 더 좋은 조건에서 공부하는 아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는 곳이 농촌이라서, 저기 멀리 외딴 섬이라서 더욱 그러고 싶어도 학원조차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인종적으로 그리 다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는 편이지만 인종과 민족이 다양한 사회라면 각자가 속한 집단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개인의 노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단지 드러난 결과만으로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해서 그들에게 기회에 차등을 두는 것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학창시절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들로 인해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기에 같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을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보니 오바마가 어린 시절 마약을 했었다 그랬던가? 그렇게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는 시간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개인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부르주아라는 착취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피착취자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층위을 가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저 착취만 하고 착취를 당하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면 고도로 복잡해진 구조 속에서 각자 일저부분 착취도 하면서 착취를 당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고민이자 마르크스주의가 공격받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드러난 학업성적만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이고 공정한 대우인가.

 

역시 조금 전 썼던 글과 이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인 것이다. 그래서 포용이고 관용인 것이다. 그래서 평등이고 그래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정치적인 올바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관성적으로 믿어왔던 행동들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더 복잡하고 번잡하고 성가신 대안을 찾아서 고민해 보자. 그러니까 당장 보이는 능력과 상관없이 각자가 놓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기회를 동등하게 주고 그 안에서 서로가 대등해질 수 있도록 사회가 만들어 보자. 그럼에도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중간에 도태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능력이 부족해서 도태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한 사회의 불만과 불안을 줄이는 과정일 것이다.

 

사회가 개인화될수록 정의 역시 파편화된다. 그래서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정의와 가치와 윤리와 도덕에도 개별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개인에 대해서도 그에 맞는 해석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구조상 그렇게 모든 구성원들에게까지 필요한 해석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 모든 개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배려란 기회라고 하는 가능성을 일반화하여 열어주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다. 역시나 반PC주의자들이 극혐하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는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역시 두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일 것이다. 일극의 세계와 다원성의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 더 쉬운 것은 전자일 타다. 후자를 설득하기란 너무 어렵다. 안타깝게도. 직관으로는 알아도 논리로 설명하기란 너무 지난한 과정이다. 하물며 설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1억짜리 전세집을 예로 들어보자. 전세금 1억을 모으려면 도대체 얼마씩 얼마나 모아야 하는 것일까? 대충 지금 최저임금 기준으로 한 달 실수령액 200 정도를 기준으로 매달 100만원씩 모아도 무려 100개월, 햇수로 계산하면 8년 4개월 쯤 된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모아도 사실상 매달 100만원씩을 주거비 명목으로 쓰지 않고 모아야 1억짜리 전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100만원이라니, 월급의 절반을 쓰지도 못하고 모아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 그리 말할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모아놓은 1억은 남아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 1억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가? 전세 한 번 들어가고 말 것인가? 기존의 전세계약도 연장해야 하고, 또 계약이 끝나면 다른 전세집도 알아봐야 한다. 그때마다 기존의 전세금은 그대로 인상분을 더 지불해야 할 텐데 그 돈까지 계속해서 정해진 급여 안에서 모아야 한다. 사실상 월세다. 그 돈이 몇 년 전 개정된 임대차보호법 기준으로 2년에 5%정도였는데 그것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심지어 세입자들까지 나서서 난리였었다. 그 정도로는 안된다는 것이니 그 이상을 법으로 보장된 4년 뒤까지 생각해서 계속해서 모아야만 한다. 그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 써보지도 못할 돈을 전세금으로 묻어둔 채 인상분을 모아야 하는 구조다.

 

물론 도중에 잘 풀려서 전세금에 보태서 집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모아서 어디 아주 싼 아파트 한 2억에 샀다고 쳐보자. 역시 200만원 월급 기준으로 2억을 모으려면 한 달에 100만원씩 16년 8개월을 모아야 한다. 그냥 산수다.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계산이다. 당장 집이 2억이라는 것부터 혼자 살 것 아니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고려의 대상조차 아닐 것이다. 2억짜리 자산이 생겼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집을 팔아야 생기는 이익이다. 완전한 주거의 안정이 보장되어 죽을 때까지 평생 일정한 월세만 세면서 살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쓰며 살 수 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돈을 모아서 집을 사야 할 의미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내가 전세라는 제도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당장 부모님이 따로 나와 살 때 전세금까지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었던 터라 처음부터 내가 벌어서 월세까지 내야 했던 때문이었다. 최저임금도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한 달에 얼마씩 모으면 단칸방 전세금이라도 모을 수 있을까? 괜히 사람들이 전세금 사기로 날렸다고 자살하고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한 달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쓰지도 않고 모아야 젊은 나이에 전세금도 모으고 하는 것이다. 진짜 먹고 입고 쓰는 돈을 최대한 아껴가며 모았는데 날렸으면 그때 느꼈을 절망감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 얻고, 그리고 다시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금 올려주고, 그렇게 또 악착같이 모아서 내 집 마련하면... 결국 좋은 것은 내 자식들 아니겠는가. 결혼도 않고 혼자 살 것이라면 그렇게 집이라고 남겨봐야 물려줄 사람도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살고 싶은 만큼 일정한 월세만 내고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있다면 더 여유롭게 벌어놓은 돈 다 쓰고 깔끔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전세든 내집마련이든 - 전세라는 제도 자체가 내집마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어차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결국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경우 그들에게 물려줄 자산으로서 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혼자 살다가 물려줄 사람 없이 죽을 것이면 내 집이라는 게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영구적으로 임대해서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쪽이 더 나 자신의 이해와도 맞는다. 더구나 부모들도 자식의 부양을 바라지 않고 자식들도 부모의 상속에 기대지 않는 개인주의사회에서는 더욱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 많은 집을 공급하라면서 공공임대주택에 대해 적대적인 젊은 세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이야기는 벌써 10년도 더 전에 내집도 필요없고 그냥 월세전세 살면서 쓰고싶은 만큼 쓰다 가겠다는 세대들 중심으로 널리 퍼지고 있던 것이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아무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도 한국사회에서 결혼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일 수 있다. 당장 일본만 해도 결혼하면 관공서에 신고하고 자기들 경제수준에 있는 월세 아무거나 얻으면 된다. 아마 월세 몇 달 분을 사례금조로 지불하고 밀리지만 않으면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구조일 것이다. 그러므로 딱히 결혼했다고 전세집 마련하기 위해 집에 손을 벌릴 필요도 없고, 전세금 마련하겠다고 결혼을 미룰 이유도 없다. 그냥 마음 맞아서 하고 싶으면 결혼해서 적당한 월세집 찾아 들어가면 된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시작부터 전세로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도 벌려야 하고, 전세금 부담에 결혼도 늦춰야 하고, 그러다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월세로 하기에는 전세에 비해 당장의 부담이 또한 너무 크다. 전세가 모으기 어려워 스렇지 일단 전세로 들어가면 인상분을 생각하더라도 상당히 경제적인 부담이 줄어드는 이점이 큰 것은 분명한 사실인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전세를 옹호하는, 특히 젊은 세대들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세가 서민들에게 유리한 제도일 수 있는 것은 맞다. 단, 그것은 이미 전세금을 마련한 경우다. 그런데 그래도 혼자서 살 만한 전세집을 구하려 해도 최소 몇 천만 원 이상의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막 사회에 나와 직장을 얻은 초년생이 그 돈을 모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부모의 지원 없이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그 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아껴가며 악착같이 모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부모의 지원을 배제했을 때도 전세는 일반 서민들에게, 특히 사회초년생인 청년들에게 유리한 제도일 것인가? 더구나 임대차보호법에 반대하던 논리 그대로 5% 정도의 인상률에 4년이나 계약을 보장해주면 전세라는 제도를 유지할 매리트가 없을 만큼 불안한 제도이기까지 하다.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면서 그 이상의 인상분을 마련해 올려주어야 한다. 그동안 그 돈으로 먹고 입고 쓰고 혹은 투자를 잘 해서 자산을 불리는 경우를 가정해 보라. 이익일까?

 

뭔가 요즘 청년세대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을 다시 재생시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PC와 관련해서 저들이 말하는 그동안 문제없이 잘 굴러왔는데 괜히 세상만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 있으면 진짜 나이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 전세가 서민을 위한 제도이던 것은 아직 금리도 높고, 따라서 급여도 빠르게 올랐던, 그래서 목돈을 묻어두고 있어도 그만큼 빠르게 모아서 더 많은 돈을 모아서 집도 살 수 있었던 시절에나 통하던 이야기다. 그때는 전세금을 목돈으로 받아서 이자만 받아도 집주인들 역시 안정적으로 월세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예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도일 것인가. 

 

아무튼 결론은 이거다. 내가 살고 싶은 만큼 일정한 임대료만 내면서 이사하지 않고 정착해 살 수 있으면 그냥 임대주택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기상환한다고 번 돈 대부분을 은행에 때려넣느라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못 사먹는 지지리 궁상인 지금 처지를 본다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매달 일정하게 월세 내면서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더 여유롭게 쓰는 쪽이 더 내 삶의 질을 위해서도 낫다. 아파트는 사는 게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물며 전세야.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 지 모르겠다. 그 역시 나와는 상관없지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음에도 더이상 어쩌지 못하는 상황을 천재라 부르는 것이다. 사람의 힘을 넘어서 일어난 일이기에 하늘이 내린 재앙이라 해서 천재지변인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지 않아서 일어난 것을 사람이 일으킨 재앙이라 해서 인재라 부른다.

 

암이 그렇다. 최고의 의사들이 최신의 설비와 장비로 최상의 치료를 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죽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병이라 암을 불치병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적절한 치료를 받고 완치되어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아직은 반드시 일정 이상 존재한다. 그래서 제대로 치료 못했다고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눈오는 밤 최대한 조심한다고 운전해도 아주 작은 변수에 의해서도 타이어가 떠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혹은 눈에 가려진 이물질을 보지 못해서 중심이 흐트러져 사고가 나기도 한다. 그런 모든 가능성까지 대비해가며 운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역시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다. 하긴 아무것도 없는 한낮 넓고 평탄한 도로를 달리다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로 사고가 일어나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또 교통사고이기도 할 것이다.

 

그때 기장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더 나은 선택이 있지 않았겠는가? 공항의 활주로는 어째서 그리 짧았던 것인가? 등등등등... 그러니까 비행 도중 날아다니는 새와 부딪히는 버드스트라이크는 한 해에만 수 만 마리의 새가 비행기와 부딪혀 죽는다 할 정도로 일상적인 것이고, 또 그때 새와 어느 부위를 어느 정도로 부딪히는가 하는 것 역시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이 모두를 위한 최선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당사자는 당시 항공기를 책임지고 있던 기장인 것이다. 사후에 이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저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가정들이 당시의 초단위조차 쪼개서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사람의 인지와 닿아 있는 것들이었을 것인가. 최선이란 반드시 최고라거나 최상의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적확하거나 정확한 것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당사자의 인지 안에 존재하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무엇을 가리킨다. 그것을 과연 밖에 있는 누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사고보도에서 속보경쟁이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아직 밝혀진 것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속보를 내보내겠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내용들을 사실처럼 내보낸다. 사실이기만 하면 좋게? 때로는 진실마저 미리 예단해서 내보낸다. 그렇게 초기에 언론이 보도한 속보에 의해 선입견이 생기면 이후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여전히 오해속에 사실을 판단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째서 사고가 일어났고, 왜 사고가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래서 모든 사실들을 취합해 봤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가 사고보도에 대해 빠르게 반응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다.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사고 뿐만 아니다. 특정인에 대한 루머성 보도 역시 시간을 두고 걸러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 모르겠다. 나로서는 알지 못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기레기라는 것이다.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분노와 애통함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버러지새끼들. 참사의 와중에도 분노할 대상을 찾아 만드느라 오만 억측들을 사실처럼 쏟아낸다. 정보의 오염속에 사실에 대한 확인과 판단조차 더 힘들어진다. 그런 언론이 과연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어떤 기레기놈은 아예 대놓고 윤석열 탄핵 말라고 계엄의 책임을 민주당에 모는 기사까지 썼더만. 이건 진짜 악마새끼지.

 

지금 단계에서 마치 사실처럼 확정하고 떠드는 새끼들은 다 목적이 있어 그러는 버러지 새끼들이다. 전문가들이 조사를 마치고 정확한 내용을 발표한 다음에야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든 따져야 하는 것이다. 정치병자는 바로 저런 새끼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인데. 날벼락과 같은 사고소식에 한동안 멍해졌다가 쏟아지는 헛소리들에 분노해서 끄적이게 된다. 이런 사고는 그저 애도하고 추모부터 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잘하고 있다. 일단 사고수습이 먼저다. 그 다음은 나중. 안타깝고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곧 2025년이 밝아오는데.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그래서 천명이라 하는 모양이다. 당황스럽다.

요즘 미국에서 해고가 쉽다는 글이나 영상에서 흔히 보이는 댓글들이다.

 

"저러니까 일자리가 많아지는 거다."

"저래야 능력있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온다."

 

우리나라도 원래 그랬었다. 어느날 사장이 갑자기 나오지 말라면 그냥 나가면 안되었었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더 이상 이전처럼 일할 수 없게 되면 그냥 퇴직금이라고 몇 푼 주고, 아니 더 심하면 그냥 바로 내쫓기 일쑤였었다. 그래서 아파도 숨기고, 심지어 아픔을 이기기 위해 마약까지 먹어가며 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아마 아는 사람 있을지 모르겠는데 오래전 구로공단 근처에는 각성제라 해서 노란색 알약을 대놓고 팔고 했었다. 먹으면 잠 안 온다 해서 고3 수험생들까지 사서 먹다가 문제가 되면서 그 뒤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바꾼 것을 그것 때문에 자기들 일자리 안생기고 능력없는 놈들이 안 잘리고 버티고 있다고 없애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그들이 말하는대로 사용자가 원하는 때 아무렇게나 고용인을 자를 수 있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사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계약직 직원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몇 달을 억지로 참아가며 버티다가 겨우 어쩔 수 없이 병가를 내면서도 혹시라도 그 사이에 계약종료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들의 모습과 당연하게 병가를 권리라 여기고 아프면 회사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마음껏 휴식이라 여기고 쓸 수 있는 정규직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일단 돈을 받고 일해서는 안되는 지능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진짜 몇 달을 진통제 먹어가며 버티며 일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병가를 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몸이 아픈 이유부터 계약연장에 도움이 될까봐 다들 꺼려하는 힘든 일을 자청해서 고정으로 하게 된 때문이었었다. 그래서 어떻게 몇 번이나 계약이 연장되면서 1년 넘게 다닐 수 있게 되기는 했는데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자리로 바꿔달라 하기에는 역시나 재계약이 걸린다. 병가를 쓰려 했더니 병가 기간 동안 계약이 종료된 직원이 그동안 두 명이나 되었었다. 그래서 병가 쓰면서도 그리 걱정하더니만 다행히 짧은 기간 겨우 당장의 통증만 가실 정도로 쓴 덕분에 계약은 연장될 모양이다. 바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 어머니 세대가 그랬었다. 어머니가 그래서 지금도 손목이 불편하시다. 그에 비하면 아프면 아프다 말하고 굳이 힘든 일을 찾아서 하지 않아도 되는 신분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말이다.

 

회식하자고 하면 평판도 무시할 수 없으니 계약직들은 어떻게든 얼굴 한 번 비추려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나는 그냥 생깐다. 그렇게 몇 번 그냥 생깠더니 그냥 아예 나오라는 말도 않는다. 일이 많다고 연장이든 조기출근이든 회사에서 요청하면 나는 내 사정에 따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데 계약직들은 그마저도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하긴 나 역시 계약직이던 때는 언제 그만둘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말과 휴일까지 나가서 일하고는 했었다. 당장 계약이 종료돼서 그만두면 모아놓은 돈이라도 있어야 당분간 버틸 수 있을 테니. 실업급여 받으려 해도 일정기간 이상 계속해서 근무해야 하는데 단기계약직은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니 몸은 몸대로 축나고 그러고 나서도 재계약이 되지 않아 잘리면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래도 젊은 친구라 그런지 생각하는 게 너무 긍정적이어서 그렇게 계약직 직원들 자주 내보내니까 자기들에게도 기회가 온 것 아니냐고 말하더라. 너무 정규직으로만 고용하면 자기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계약직을 짧게 쓰고 내보내기를 반복하니까 자기도 일자리를 얻어서 좋다는 것이다. 바로 내가 여기서도 말한 그 젊고 성실하고 긍정적이고 예의바르고 착하기까지 한 2030 남성 중 하나가 바로 그다. 주휴수당도 폐지해야 하고, 최저임금도 낮춰야 하고, 근로시간도 늘려야 하고 등등등... 진짜 애국자 아닌가? 

 

솔직히 부모 세대가 고생하는 것을 옆에서 보아 왔고 내가 실제 일하면서도 여러 부당한 상황들을 겪어 봤었던 경험으로는 도저히 저들이 생각하는 노동개혁이라는 것이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내가 아프면 쉬어야 하고, 너무 힘들고 하기 싫으면 거절할 수도 있어야 한다. 노동력이란 나 자신의 수단이기에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공정이고 정의이며, 그것을 위해 그동안 이 사회를, 나라를 끊임없이 바꿔 온 것이었다. 보다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인 자신들을 위해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조차 세월의 흐름속에 부당하고 불공정힌 강제이고 억압이 되고 말았다. 타파해야 할 구태고 적폐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옳은가?

 

물론 내가 정년을 맞고 난 다음이라면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래서 더 저들의 목소리를 적대하며 막아서고 있는 것이고. 확실히 세대전쟁 맞다. 나더러 이전 부모세대와 같은, 혹은 그동안 내가 겪었던 부당하고 억울한 일들을 또 다시 겪으며 일하라면 그건 도저히 못참는 것이다. 나는 싫으니까 늬들이 기성세대가 되면 그때 바꾸라. 나는 나이 먹어서 갑자기 일자리 잃기 싫으니까 늬들 세대가 나이를 먹으면 솔선수범해서 그때 젊은 세대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라.

 

아무튼 현정부의 정책기조 덕분에 계약직들도 계약기간이 더 짧아지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통로도 더욱 좁아지고 말았다. 일하는 시간도 줄어서 충분한 급여를 기대하기도 힘들어졌다. 덕분에 정규직들도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 있을 정도면 그냥 애국자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나라를 위해서 지지를 포기하지 않겠다. 감탄하는 이유다. 역시 나이가 젊어서 그런가 몸을 아끼지 않는 그들의 정의가 감탄스럽기조차 하다. 나와 상관만 없으면. 그냥 떠올라 써보는 글이다. 해고가 쉬운 환경이라... 도저히 상상도 하기 싫다. 최소한 정년까지는 일단 붙어 있어야겠다. 이재명을 믿는 이유다. 정권을 가져와야 하는 현실적 이유이기도 하다. 당연하다.

반PC에 목숨거는 놈들이 습관처럼 목놓아 부르짖는 말들이 있다. 오만하다. 가르치려 든다. 강요하려 든다. 그런데 처음 이 말들을 들었을 때 나는 어떤 기시감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어디서였을까? 얼마전 떠올랐다. 아, 그거였구나.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평론가 하나가 자기가 본 영화에 대한 평론을 쓰면서 '명징'과 '직조'라는 단어를 쓴 적이 있었다. 인터넷이 난리가 났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단어를 썼다고. 평범한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선별하여 쓰는 것은 오만하고 무례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반응들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역시 이야기했었다. 가르치려 든다. 강요하려 든다. 

 

사실 계기는 어느 유튜브 컨텐츠에 달린 댓글 하나였다. 바보들에게 마이크를 쥐어준 때문이다. 바보들이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게 되고 그 목소리에 다른 바보들이 모이면서 바보가 더이상 바보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바보가 정의가 되고 신념이 되고 가치가 된다. 그래서 세상은 바보가 되어 버린다. 

 

실제 그보다 몇 년 전 심형래의 영화에 대해 진중권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단어를 썼을 때는 반응이 또 상당히 달랐었다는 것이다. 진중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무엇을 뜻하는가 찾아보았고 인터넷에서도 그 의미를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그를 닮아 자신 또한 지식을 갖기를 바라는 열망이 그때는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단어라면 어떻게든 알려 하고, 알지 못하는 개념에 대해서도 물어서라도 배우고자 한다. 그것은 원래 반PC를 주장하는 그놈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 필요없고 내가 아는 단어로만 써달라. 내가 아는 개념으로만 풀어달라. 아니면 오만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알게 하는 것은 가르치려는 것이고 강요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악인 것이다. 무지가 지성을 억압한다.

 

PC라는 것은, 즉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기존의 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백인우월주의가 아직 만연해 있는 미국과 유럽 사회에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아직 성소수자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나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것들을 바로잡아 나가려 한다. 부유하고 빈곤한 차이는 있더라도 그것이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고, 사는 곳이 어딘가에 따라 현실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위적인 차별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아가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물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환경에 대해서까지 과연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더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지금 PC라 이야기되는 것들은 그 가운데 답이라 여겨지는 것들일 것이고. 그런데 그런 모든 과정들을 이해하려니 머리도 딸리고 의욕도 없고 만사가 귀찮으니 한 마디로 뭉뚱그리고 만다. 오만하다. 가르치려 든다. 강요한다. 그래서 대안은 무엇인가?

 

그래서 반PC 주장하는 놈들이 단골로 언급하는 것이 바로 본능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성소수자를 배격하고, 장애인을 멸시하면서, 빈부의 차이에 따라 차등을 두며 살아 왔었다. 수 천 년 넘게 그러고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그러지 말자는 건 인위적이고 억압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그래왔으니까 그러지 말자고. 그래서 원래 그래왔으니까 옳다는 것인가? 하긴 반PC 주장하는 놈들 대부분이 그 잘나신 능력주의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 주류가 바로 능력에 의한 줄세우기와 차별을 주장하는 이른바 2030 남성들인 때문이다. 백인이 우월하니까 백인을 최우선으로 두고, 자신들은 그래도 흑인보다는 피부가 하얀 편이니까 흑인 위에 있겠다. 성소수자라는 존재에 대해 굳이 이해하고 그들과 공존하려 하기보다 그냥 대놓고 멸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면 그쪽이 더 자기가 잘난 존재가 된 것 같지 않은가. 시골 산다고 우대받지 말고, 가난하다고 배려가 주어져서는 안되고, 사회적 약자라고 지원이 돌아가서도 안된다. 왜? 내가 그들의 위에 존재해야 하니까. 그것이 곧 본능일 테니까. 그들이 입만 열면 떠드는 신분상승이라는 말처럼 다시 원래의 신분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이 지배신분에 속하는 신분제로. 왜? 그쪽이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직관적이니까.

 

물론 예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아니 원래 PC의 반대편에 있던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도덕과 정의를 고수하던 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더 첨예하고 정교한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들과는 별개다. 그냥 막연하게 쟤 싫으니까. 저것들 마음에 안드니까. 그런 것들따위 거부하고 싶어지니까. 다만 그런 부류들에게 과거에는 마이크가 쥐어지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들을 대변하는 보다 첨예하고 정교한 논리를 펴는 이들이 대신해서 마이크를 쥐고는 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막나가는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그런 놈들이 마이크를 쥐고 비슷한 놈들을 선동해서 아예 세력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남의 나라에서 반PC라 그러니까 그게 뭔지도 모르고 말 그대로 원숭이 새끼들마냥 답습해서 떠드는 수준들로 말이다. 아니 언제부터 일본 학부모단체의 압력에 의한 검열들까지 PC가 된 것인데? 미국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와 역시나 학부모 단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도덕주의적인 검열들까지 죄다 PC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심지어 판타지세계에는 성소수자란 없다는 막말까지 떠든다. 그동안 판타지소설이나 만화, 영화, 게임 등에 등장한 LGBT들에 대해 한 번 떠들어볼까? 그런데 통한다. 왜? 생각이 없으니까. 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생각이란 걸 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냥 지금까지 살던 그대로 살도록 하는 것을 오로지 바란다. 그러면서도 신분은 상승했으면 좋겠다. 돈은 많았으면 좋겠고, 신분은 높았으면 좋겠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았으면 좋겠다. 이야, 이러고나니 또 얼마전 봤던 판타지 지뢰가 생각나네. 반PC란 반지성주의의 다른 말이라는 이유다. 그나마 미국에서는 미국의 주류 백인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관습과 가치라는 것이 있으니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동안 자기들이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전혀 문제없었으니까. 그래서 더 나았었으니까. 그런데 먼 한국땅에서 제대로 PC라 할 만한 어떤 교육도 정책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더 과격한 모습까지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바보는 답이 없다. 그리고 바보는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 수 천 년 인간은 그러고 살아왔다라? 그러지 말자고 인류는 지금까지 문명을 발전시켜온 것이 아니던가. 과연 진정 무엇이 인간의 진실한 본능일 것인가. 새삼 깨닫는 것이다. 저 새끼들은 답이 없다. 한숨만 나온다.

어째서 미국에서는 민주당이 PC라는 이미지를 가져가게 되었을까? 정치적 올바름이라면 미국 공화당 역시 나름의 정의가 있었고 역시 미국사회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을 텐데 미국 민주당에만 PC란 굴레가 씌인 것일까? 내가 하다하다 미국과 일본에서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학부모 단체 등의 압력에 의한 검열까지 PC라 주장하는 걸 볼 줄이야.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만화가 미국으로 넘어갈 때는 우리나라로 올 때 이상의 수정이 가해지고는 했었다. 저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토토로'에서도 아빠와 딸이 같이 목욕하는 장면이 수정되어 나왔었다. 작품에서는 뻔히 미성년자로 설정되어 있는 캐릭터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성인이 되기도 했다. 당연히 노출이 심하거나 너무 잔인하다 싶은 장면을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그것도 PC때문에?

 

전설적인 록그룹 퀸이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이유 중 하나가 멤버들이 여장하고 찍은 뮤직비디오였었다.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 감히 게이로 의심되는 놈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마 이때도 미국 학부모단체가 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터였다. 지금 기준으로 하면 상당히 PC적인 아티스트인 마릴린 멘슨을 악마숭배니 뭐니 해서 기독교 단체들이 압력을 가한 적도 있었다. 일본도 사정은 비슷해서 학부모단체의 압력에 나가이 고는 아예 연재하던 '파렴치학원'이라는 만화을 깽판내며 연재종료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들이 PC란 것일까?

 

원래 미국사회는 매우 보수적이다. 특히 금욕적인 청교도 교회의 영향이 강한 지역일수록 더 보수적인 성향을 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지금도 성매매 자체가 불법인 주들도 많고, 성인이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지면 그 순간 바로 아동성폭행범으로 체포되어 인생이 쫑나기도 한다. 참고로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없어서 남학생과 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한 여교사가 성폭행혐의로 기소되어 처벌받은 예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적인 엄격함은 대중예술 전반에도 영향을 미쳐서 미국 대중예술계는 이러한 보수적인 교회와 그와 같은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도덕적 기준으로 무장한 학부모단체 등 시민사회와 갈등을 빚어야 했었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 과정에서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은 어떤 포지션에 있었겠는가.

 

보수적인 미국사회가 아예 그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동성애자들이 그나마 자유롭게 커밍아웃도 하고 자기들끼리 살 수 있게 되기까지 미국 사회에서도 엄청난 갈등과 충돌이 있어왔던 것이었다. 그래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선거 때마다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어지간히 보수적인 교회들조차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가 아닌 그들의 결혼여부에만 초점을 맞주게 되었는가. 그렇게 노력해 왔으니까. 많은 법과 제도로써, 그리고 왕성한 저술과 강연 등의 활동들을 통해, 그리고 대중문화를 통해서 그렇게 설득해 왔으니까. 그러니까 기존의 관습적이고 관성적인 미국사회의 도덕적 관념에 대해 도전하고 투쟁하여 쟁취한 결과인 것이다. 지금 흔하게 PC라 부르는 것들이 바로 그 대상들이었던 것이고. 그런데 원래 미국사회의 보수적인 도덕관에 기초한 삭제와 편집까지도 PC라 부르면 이 뭔 개소리가 되는 것인가?

 

반PC가 이런 게 문제인 것이다. 반PC에 매몰되다 보니 사실관계를 무시한다. 한 마디로 무식하다. 미국 게임 캐릭터들이 못생긴 것도 PC 때문이다. 그보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미국의 게임들은 플레이어 자신의 가상체험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미연시에서 주인공이 못생기고 한심하게 묘사되는 것과 같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찐따새끼에 맞춰서 캐릭터를 설정해 놔야 쭉쭉빵빵 여리여리한 미소녀들과 썸씽이 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현실의 유저들이 모두 잘생기고 멋있을 수 없는데 게임캐릭터들만 그래봐야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성인게임인 스트립포카조차 여자들이 하나같이 못생기기만 했을까. 하아... 못생긴 정도가 아니라 인종에 따른 스테리오 타입으로 선정해 놓은 탓에 아시아인은 진짜 못봐줄 정도다. 걔들 아시아인에 대한 미적 기준은 진짜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었다.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에서 포르노가 하도 많이 나오니까 일본이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줄 아는데, 일본에는 포르노라는 게 없다. 성인용 영상물만이 있을 뿐이다. 일본에는 매춘도 없다. 성인용 풍속업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가 혼네와 다테마에의 나라 아니랄까봐 제도와 현실이 이렇게 다르다. 그 말인 즉 일본에도 나름대로의 도덕적 엄격함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일본은 이것이 갈수록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동누드집이 버젓이 팔리던 나라에서 이제는 비키니 갑옷까지 검열당하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중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PC적인가? 하긴 1980년대 어느 애니메이션 감독은 흑인 나오면 화면 버린다고 아주 싫어했었지.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니 그것이 PC인 것인가?

 

더 웃기는 것은 그나마 미국에서 PC에 대해 강제적이고 강압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실제 그러한 교육과 제도적 강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누가 감히 다른 인종이나 성소수자에 대해 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면 그 순간 바로 제재를 받는다. 유럽에서도 손흥민을 상대로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했던 선수가 징계를 받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아시아 원숭이 새끼인 한국인 네티즌 나부랭이가 미국에 가서 차별을 받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미국 사회가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서 과연 PC적인 어떤 강제나 강요가 현실에 존재하는가? 왜 미국 영화나 게임에서 백인이 아닌 흑인이나 히스패닉, 혹은 아시아인이 등장한다고 그리 지랄들이냐고.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지금 게임에 성소수자가 등장하느냐 마느냐 수준이 아닌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미성년자의 성전환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로 한창 논쟁중이라는 것이다. 판타지 게임에 성소수자 나온다고 경악하는 늬들 수준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사회에서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도덕적 관념에 따라 이루어져 온 검열들마저 PC라 부르는데서 이들의 지적 수준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은 죄다 PC다. 도덕주의적인 것은 죄다 PC다. PC가 있기 전에는 도덕도 없었다. 모든 도적적 관념과 강제를 자신들은 부정한다. 하긴 그러니까 n번방 성착취물에 대해 성인의 즐길 권리를 주장하며 떼로 몰려서 찾아다니곤 했던 거겠지. 그러니까 PC가 뭐냐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PC이고 그에 반대하는 것인가고? 마음에 안 들면 죄다 PC다. 그런 놈들이 떼로 모여서 떠드니 그게 정의처럼 보인다. 병신은 답이 없다. 고래의 진리다.

전통적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게임을 비롯한 대중문화들에 대해 검열과 규제를 시도한 주체는 대개 보수적인 개신교 교회와 역시나 보수적인 학부모단체들이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들은 이른바 말하는 PC의 가장 큰 적대자들이기도 하다. 당장 아이들이 보는 게임이나 만화에 동성애가 소재로 등장한다면 누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다. 게임을 비롯한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보수적인 도덕적 가치에 기반한 검열과 그와 반대되는 다양성과 공존을 위한 새로운 가치로서의 PC에 대한 추구를 같은 것으로 놓고 하나로 뭉뚱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전통적으로 검열과 규제에 앞장서 왔던 그들과 행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니까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의 반PC들이 추구하는 것이 완전한 표현의 자유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설마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교회들이?

 

유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의뢰로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것 같으면서도 무척이나 보수적인 동네가 또 이쪽이다. 일본만화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피가 튀고 팔다리가 잘리는 장면들 같은 건 이들 나라로 가면 죄다 검열되어서 나온다. 일본만화에서 그냥 눈요기로 집어넣는 속옷이나 신체부위에 대한 노출 역시 미국 가면 바로 가위질되어 나온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들이 반대하는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내용들에는 이른바 PC라 불리는 것들도 포함된다. 이를테면 성소수자 같은 것들. 어째서 이런 웃기지도 않는 일들이 가능해졌는가?

 

일단 반PC라는 자체가 최근 들어 이슈가 되었을 뿐 과거에는 전혀 그에 대한 어떤 인식도 판단도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말한대로 동성애가 게임에 등장하면 그게 게임에 어울리는가만 봤지 PC라며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형제인데 어째서 아시아인과 흑인과 히스패닉이 함께 있는가. 입양이겠지. 그러니까 어려서 바이오가족이니 뭐니 애니메이션 볼 때도 그럴 수 있겠거니 그냥 납득하고 넘어갔었다. 대신 그때 이슈가 뭐였느냐면 보수적인 단체들의 기존의 가치에 기댄 검열과 규제를 위한 시도들이었다. 아니 좀 그냥 자유롭게 놔주라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트럼프의 당선을 계기로 반PC가 중요하게 대두되자 이전의 검열들까지 죄다 싸잡는 것이다. 아니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검열들에 대해서조차 싸잡으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검열과 규제를 시도하는 모든 주체는 PC주의자들이다.

 

그러면 과연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서 한창 뜨거웠었던 성매매금지법을 주도한 것은 과연 PC로 대변되는 진보주의자들이었을 것인가, 아니면 보수적인 개신교세력들이었겠는가. 성적자기결정권은 개인의 존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내가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 내가 내 몸을 수단삼아 몸을 팔든 포르노를 찍든 내가 알아서 나를 위해서 쓰겠다. 그래서 유럽 나라들에서는 성매매가 합법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아마 지금도 성매매가 불법일 것이다. 여성의 순결하고 고결한 성을 대가를 전제한 매매라는 행위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누구의 가치일 것인가. 그런데 규제했으니 그게 다 여성주의자들에 의한 것이다. 물론 유럽에서도 진보주의자 가운데 성매매와 포르노에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이들도 도덕적인 이유로 성매매와 포르노에 반대한다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가해지는 외부의 강요와 강제,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범죄들로 인한 것이었다.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사창가에서 동유럽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여성들이 강제로 몸을 팔고 있는 현실 같은 것들이 원인이 된다. 결과가 같다고 이유와 동기까지 같지는 않다.

 

그래서 과연 PC가 검열을 시도하는가. 아직까지 이른바 PC주의자들이 이미 나온 결과물에 대해 검열을 시도한 정황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또 웃긴 것이다. 나오는 게임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두고 PC가 있나 없나를 살피고 그를 응징하려 눈에 불을 켜는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단지 자신들의 상품인 컨텐츠들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같은 자신들의 사상이나 신념을 적용하려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잘못되었느냐면 아주 오래전부터 문화컨텐츠에는 제작자의 신념과 사상과 가치와 추구가 당연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또 찾아내고 평가하는 것이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재미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아예 그러지 말라 그러는 것은 과연 검열에 반대하는 자유와 일치하는 행동일 것인가. 그리고 그를 통해 얻어지는 것은 새로운 검열과 통제일까, 아니면 자유로운 표현들일까.

 

그러고보니 타진요 사태 당시 내가 했던 말들이 있다. 나중에 방송에서 누군가 비슷하게 표현하고 있긴 하더라. 대중이 권력이 되면서 과거 권력기관들이 하던 짓들을 반복한다. 혹시라도 지금 여기에 PC가 조금이라도 묻어있지는 않은가. 제작자의 머릿속에 PC가 아주 조금이라도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감히 개발자 가운데 자신의 컨텐츠에 그 같은 자신의 사상을 결과물에 투영하려 시도하는 놈들이 없지는 않은가. 이런 걸 과거 누가 했느냐면 앞서 말한 개신교 교회와 학부모 단체와 혹은 국가기관에서 이런 짓거리들을 해 왔었다. 이런 것이 바로 검열이고 규제고 통제다. 아예 PC가 없는 세상. PC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 PC를 아예 가져서도 드러내서도 안 되는 현실. 그것이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인가.

 

그냥 재미가 없으니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것이 정확하다. 게임에 PC를 넣든 말든 만드는 놈들 자유다. 그래서 그 결과가 내가 보기에 굳이 돈을 지불할 정도가 아니면 그냥 망하는 게 옳은 것이다. 언제부터 게임하면서 그런 정치적인 신념 같은 걸 따졌다고. 무슨 이제는 영화까지도 좌파영화네 뭐네. 역시나 정치적인 이유와 목적에 의한 것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 그래서 결국 그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란 무엇일 것인가. 무엇을 위해 저들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그리고 덧붙이자면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진보라 불리우는 민주당도 유럽으로 가면 어지간한 보수정당보다 더 보수적이다. 가장 진보적이라는 정의당조차도 유럽으로 가면 기껏해야 중도좌파 정도다. 유럽 어느 진보정당이 원전에 찬성하고 수명다한 원전의 가동중단에 정치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핏대를 세우겠는가. 직권을 이용해서 향응을 받느라 여성들을 성폭행한 공직자를 출국금지시켰다고 대통령을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이 정도면 그냥 극우 아닌가? 아무튼 마찬가지로 똑같이 반PC를 주장한다 믿겠지만 미국의 다수 대중들은 한국의 어지간한 PC들보다 더 PC적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에서 성소수자와 관련한 이슈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느냐 마느냐고 이마저도 찬성여론이 더 높은 상황이란 것이다. 그나마 트럼프가 PC에 반대한다는 것도 미성년자의 성전환에 대해 정부보조를 금지하고 그와 관련한 교육도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이외의 다른 성소수자는 더이상 논란 거리도 아니다. 거기에 대고 무슨 판타지세계에 성소수자인가. 뭐 이런 병신새끼들이... 그리고 과연 저같은 반PC의 근거가 개인의 자유이겠는가? 아니면 특정한 도덕적 기준에 의한 규제이고 통제이겠는가.

 

역시나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좋게 보기가 힘든 것이 이른바 반PC라는 것일 게다. PC주의가 강요한다는데 그냥 안 사고 안 쓰면 그만인 그저 흔하게 널려 있는 여러 상품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들추고 찾아내서 응징하려는 시도가 바로 강제이고 억압인 것이다. 심지어 그 계기부터가 트럼프의 대통령당선이었다. 권력을 등에 업었다 여기는 오만은 아닌가. 트럼프가 이겼으니 자기들이 이겼다며 반PC는 틀렸다 주장할 수 있는 무모함처럼. 하는 짓거리가 진짜 내가 제일 싫어하던 놈들을 닮았다. 때만 되면 게임이며 만화책이며 죄다 거둬다 불태우고 파묻던 것들. 단지 지금 그 명분이 반PC로 바뀌어 있을 뿐. 역시나 나는 자유를 억압하는 놈들이 제일 싫다. 목소리 젊은 사내새끼들이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저 새끼들이 싫다. 진심으로.

밤늦게 사람도 없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이성과 마주쳤을 때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감정이 서로 다르다. 남자화장실에 여자가 우연히 실수로 들어왔을 때와 여자화장실에 남자가 그랬을 때도 역시 비슷하게 놀라고 당황하기는 하겠지만 느끼는 감정의 정도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지하철에 여성전용칸과 남성전용칸이 있을 때 남성이 전자에 올라카는 것과 여성이 후자에 올라타는 것이 당사자나 주위가 느끼는 감정이 다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솔직히 나라고 해도 남자들끼리 놀러가기로 해놓고 뜬금없이 여자를 끼워넣으면 당황할 듯하다. 여행사에서 남자들끼리 놀러가는 거라 해놓고서 여자를 끼워 넣으면 환불할 것 같기도 하다. 남자끼리 할 수 있는 것과 여자 있으면 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 분노하고 어느 정도로 분노하고 그것을 또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가는 각자 개인이 판단할 영역이다. 당연히 책임 또한 자신이 져야 한다. 남들 보라고 분노하는 게 아니다. 남들 이해하라고 분노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건 분노도 아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표출하는 것도 분노하는 당사자의 몫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화낼 일이 아닌데. 그러나 당사자가 보기에 화낼 일인 것이다. 왜 고작 그까짓 것 가지고. 그건 당신 생각. 내가 보기에 그건 충분히 그 정도로 화낼 수 있는 일이라면 화내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그 수단이 좀 과격해진다면 내가 그만큼 화가 났다는 증거겠지. 그러면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화나게 만든 당사자가 풀면 된다.

 

그냥 그런 논의가 있었을 뿐이다. 단지 아이디어 단계였을 뿐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긴 하다. 어떤 조치나 변화들이 문제가 될 것 같으면 항상 그 주체가 변명삼아 하는 말이다. 대개 밀실로 이루어지는 경우 아이디어가 곧 소수의 판단에 의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벌써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에서도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소수일 것이기에 그마저도 단지 검토단계라 말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현정부에서 그토록 수도 없이 보아 왔을 그 문구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절대시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단지 학교측에서 그리 주장했으니까 학생들은 모두 틀린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 근거란 과연 무엇일 것인가. 어차피 자기들도 당사자가 아닐 텐데.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학생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어, 마침내 이번 사태처럼 표출되게 되었는가 직접 보고 듣고 겪어서 아는 것은 아닐 터다. 간접적으로 들어서 아는 것인데 아예 아무 의심없이 확신까지 한다.

 

더구나 그런 것들이 단지 학교와 학생 사이의 갈등을 넘어 여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남자인 나 역시 남자끼리 가기로 한 여행에 누군가 독단으로 여자 끼워 넣으면 항의부터 하고 볼 것이다. 애초에 남자들끼리 가기로 하고 사람을 모으고 돈까지 받았으면서 거기다 독단으로 남녀평등을 앞세워 여자를 끼워 넣으려 한다. 여대란 그저 여성전용 카페나 노키즈존 식당처럼 시장의 수요가 만들어낸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다. 여성 가운데 남성과 같이 공부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선택지로서 존재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성들도 여성들과 같이 대학 다니는 게 싫다면 남자대학이란 것이 존재했을 테지만-아니다. 원래 195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대학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다시피 했었다.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워낙 낮다 보니 대학 갈만한 환경의 여성이면 당연하게 일반대학보다 여자대학을 선호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래서 남자들끼리 대학 다닐 거냐 물으면... 아, 지금 나라면 고민 좀 했겠다. 여자들과 어울리는 거 솔직히 많이 성가시거든. 이것저것 신경쓸 것도 많고 챙겨야 할 것도 많고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고. 하지만 누구도 그런 걸 바라지 않으니 남자대학은 없다. 그래서 그게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할 것인가.

 

더불어 여대라는 타이틀을 보고 대학을 선택해서 들어온 학생들이 그 여대라는 타이틀을 치운다 해서 반발하는 것을 두고 여성의 문제로 치부하더니 갑자기 페미로까지 급발진한다. 여기서 전가의 보도가 나온다. 외부의 불순세력. 부산쪽 대학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행사를 외부학생들이 포함되어 진행했다는 이유로 외부의 불순세력이라며 경찰력까지 동원했었다. 순수한 학생이란 무엇일까? 순수한 당사자들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래서 그것이 페미문제로 이어지더니 느닷없이 스윗한 4050까지 나오고 만다. 그 다음 수순은 당연하게 민주당이다. 남의 대학 문제에 이리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현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가 낮아지니 다시 전가의 보도를 이용해서 여론을 모아보려는 것이다. 4050과 민주당은 스윗한 페미이고, 페미가 지지하는 여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안이 남녀간의 문제냐는 것이다. 남자들만 쓰는 원룸이라 굳이 비싼 돈 주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여자를 받는 바람에 옷차림도 편하게 하고 다니지 못하게 생겼다. 상관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남자전용이라 들어온 사람에게는 절대 상관없을 수만은 없는 이유일 터다.

 

어째서 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고 있는가. 그럴만한 일이기는 한가. 또다시 작전이 시작되었고 넘어가는 놈들이 진영을 넘어서 수두룩빽빽 튀어나오고 있다. 거의 바퀴벌레 수준이다. 건드리면 반응한다. 어딘가는 반드시 숨어 있다. 단지 이유가 필요했을 뿐인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제공해 준다. 너무 투명해서 화도 나지 않는다. 병신은 병신이다. 그냥 과학이다.

내가 아주 어릴 적, 지금은 사라진 동네에 살던 아이들은 벌써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도둑질하는 방법을 알았다.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쉽게 물건을 훔칠 수 있는가 아예 학교 교실에서 방법을 공유하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술담배에 벌써 성경험이 있던 아이들까지 있었다. 아마 안내상이 방송에 나와 이야기했었을 것이다. 자기도 10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었다. 진짜 그랬었다니까?

 

그러면 지금은 왜 그런 일들이 많이 줄었느냐? 첫째는 올림픽 앞두고 빈민가들을 죄다 때려부순 것이 한 몫 했고,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던 빈민가들 역시 이전보다는 그래도 먹고 살만해지면서 굳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된 것도 한 몫 했다. 대신 그때 현실에서 지랄하던 게 남아서 지금은 인터넷에서들 지랄하며 산다. 실제 진짜 먹고 살 만한 놈들은 인터넷에서 굳이 그렇게 지랄까지 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 루저인 놈들이 인터넷에서만 여포장비노릇 하느라 인생을 낭비하지.

 

다시 말해 그래도 경제발전의 성과가 가난한 동네에까지 돌아오고 했으니 지금 우리 사회가 아직은 살만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쥐뿔도 없이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에서도 그래도 국가를 믿고 사회를 믿고 여전히 학교에 다니며 공부도 할 수 있으니까 이나마라도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는 동질성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최소한의 신뢰를 유지하며 살고 있으니 굳이 남에게 위해를 가해가며 이익을 얻으려는 동기가 사라진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아니다. 같은 사회에 존재하는,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보편의 윤리와 도덕과 법률과 가치로부터 유리된 또다른 사회를 제 4세계라 정의한 것이 불과 몇 십 년 전의 일이다. 미국 할렘에 사는 흑인들은 같은 미국인이 아니다. 그들은 당연하게 국가도 믿지 않고 공권력도 당연히 믿지 않으며 할렘 이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동질성 또한 없다. 그리고 할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룰 안에서 그 룰을 지키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간다. 아마 내가 살던 동네도 아파트단지로 만들지 않았으면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괜히 이전 세대들이 부의 재분배와 평등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온 것이 아니란 것이다. 세계유일의 최강대국이자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하는 선진국 미국에서 어째서 저토록 수도 없이, 심지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태연히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노력하지 않았으니 고용도 불안해야 하고, 더 적은 임금 받으며 더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일해야 한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일하는 미화원이나 시설관리원들은 정기적인 시험까지 치러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야 서울대에서 일하는 직원으로서 정당하게 급여와 복지를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자격이 없는 이들은 매일 실직의 불안 속에서 고통과 고난 속에 살아야 한다는 그들의 공정이 만들어낼 어쩌면 미래인 것이다.

 

그러고보면 참 신기하다. 그런데도 난 도둑질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다들 술먹고 담배피는데 성인이 될 때까지 술은 마셔본 적 없고 담배는 지금도 피지 않는다. 그놈들이 또 바로 옆집 친구들이기도 했다. 어디서 패싸움하다 경찰서에 잡혀갔네 하던 이야기도 진짜 자주 들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만나니까 어디 공장에 들어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잘 살더라. 나보다 더 잘 산다. 그럴 수 있는 이유, 그냥 근처 아무 공장에나 들어가도 최소한 결혼해서 가정 꾸리고 살 만큼은 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또 IMF 전이니. 그 뒤로 그 친구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아마 요즘 2030들은 모르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평등이라면 극혐하는 것일 테고. 평등을 강조하니까 좌파다. 역사물에서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조하니까 이건 좌파물이다. 공정이란 서로의 노력과 실력에 따라 차이를 두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서 가난한 놈들 자식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오히려 공정을 해치는 것이다. 동등한 기회를 누리려면 농민이든 어민이든 서울로 와서 좋은 학군에서 자식 학교 보내고 학원에도 보내라. 왜 이전 세대들은 그런 것들을 그리 극혐했을까? 역시 부모들 잘못이다. 늘 좋은 것만 보여주니 어둡고 그늘진 현실을 알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는 어떻게 백주대낮에 남의 차문을 부수고 물건을 훔칠 수 있는가. 대놓고 남의 가게에 들어가 물건들을 들고 나올 수 있는가? 프랑스나 독일같은 선진국에서 소매치기가 극성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니까 왜 그런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누가 그러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이 저렴하면 도덕도 저렴해진다. 현실이 비루하면 가치 또한 비루해진다. 항산이 없으면 항심도 없다. 맹자가 아성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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