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결혼해서 배우자가 있음에도 다른 이성과 바람이 났다. 개인 사이에 해결할 일이다. 개인적인 정의감이나 도덕관으로 비난을 할 수는 있지만 어찌되었거나 남의 일이고 개인이 알아서 어떤 식으로든 풀어갈 문제인 것이다. 한 순간의 실수라 여기고 그냥 봉합한 채 살 것인가, 아니면 배우자로서 신뢰를 저버린 이를 용서하지 않고 끝내 갈라설 것인가. 그래서 결국 어떤 식으로 용서하고 어떤 식으로 갈라서든 그러한 과정과 결론들이 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통죄가 사라진 것이다. 개인의 문제를 국가가 나서서 강제할 수는 없다.

 

반면 수사기관에 의한 피의사실 유포와 언론의 사생활 파헤치기는 다수의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는 사회적인 문제인 것이다.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도 않은 피의자에 불과한데도 그를 다수의 기자들 앞에 세우고 단지 혐의에 지나지 않는 사실들을 공공연히 퍼뜨려 여론재판을 시도한다. 수사가 채 시작도 되기 전부터 언론에 의해 선입견을 만들고 다수 여론의 공격을 통해 당사자를 궁지로 내몰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려 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생활은 물론이고 주변까지 피폐해지는 경우를 그동안 수도 없이 보아 왔었다. 더구나 언론이라는 것들이 자기들이 직접 취재한 것도 아닌 누군가로부터 받은 일방적인 사실들을 진실인 양 보도하는 것은 언론이라는 권력을 이용한 폭력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피해자인 개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있으므로 그러한 행위들이 정당하다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바로 이런 것들을 두고 나오는 말이 인권감수성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 자체가 가능한가, 아닌가? 내가 2찍 진보 새끼들을 진보가 아니라 단언하는 이유인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지만 정작 필요한 시점에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인간의 존엄을 시궁창에 내팽개쳐 버린다. 배우 이선균의 죽음에 진보를 떠들어대던 언론들도 한 몫 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때문이다. 내가 손석희라는 나이만 쳐먹은 버러지새끼에게 결정적으로 혐오감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단지 개인이 자신의 방어권을 행사하는 것마저 부정하는 그 행태를 보면서 너는 왜 검찰에 출석해서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반박했는가 물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검찰이 의심하고 언론이 떠들면 그 순간 유죄인가?

 

아니나 다를까 관련인사들이 모여서 발표한 성명에 대해서도 태도들이 한결같다. 그래서 불륜을 잘했다는 것인가. 수사기관은 수사하고 언론은 보도한다. 행실이 발랐으면 언론이 무어라 보도하든 상관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게 보도한 사실들이 수사기관이 수사한 내용들인 것이고, 수사과정에서 흘러나온 것들이라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 수사기관은 비공개수사를 요청하는 피의자를 다시 한 번 기자들 앞에 세웠고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흘림으로써 사회적인 비난을 유도하고 있었다. 개인의 잘잘못을 떠나 그것이 드러나고 여론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공적인 힘들이 쓰이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인가.

 

파시즘이 다른 게 파시즘이 아니다. 개인이 사라진 다수를 파시즘이라 부르는 것이다. 파시즘을 오히려 전근대의 유산이라 여기는 이유다. 근대의 가장 큰 발견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개인이기 때문이다. 오롯이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의 존재야 말로 근대의 가장 큰 성과 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개인을 다시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전체에 매몰시키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 즉 파시즘이라 불리는 것이다. 다수가 저지르는 폭력에 무감각하다. 오히려 개인의 사소한 잘잘못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것이야 말로 다수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은 다수의 편에서 마음편하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놈들이 2찍을 선택하는 것이다. 배우 이선균의 죽음에 대해 연예관계자들이 나서서 발표한 성명에 반감을 드러내는 대부분이 그런 2찍들이었다. 2찍 진보 포함이다. 평소 그리 인권 떠들어대더니 이런 경우 그들은 철저히 권력의 편에 선다. 다수의 편에 선다.

 

마약으로 수사를 시작했으면 마약과 관련해서만 떠들어야 한다. 마약으로 수사를 시작해서 알게 된 개인의 사생활까지 퍼뜨리는 건 분명한 월권이다. 무엇보다 수사기관에는 개인이 누구와 사랑을 하든 관여할 어떤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언론은 취재를 하는 곳이지 받아쓰기 하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공적인 수사기관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위치에 있는 언론이 수사기관과 결탁해서 그들을 돕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결국 수사기관으로부터 혐의를 받는 개인과 주변을 무너뜨리고 재판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공적인 구조의 문제가 과연 개인의 사생활보다 가치가 없는 것인가.

 

이마저도 정치로 이해하는 버러지새끼들은 굳이 상대할 가치도 없다. 2찍이 어째서 2찍인가. 민주당 안에 있던 2찍들이 결국 이낙연을 따라 나간 것이 어째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기쁘고 반가운 호재로 여겨지는 것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새끼들은 인간으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내가 특히 2찍 진보들을 혐오하는 이유다. 차라리 2찍 수구들은 평소 하는 말과 행동이 같기라도 하지. 사람같지도 않은 것들이다. 저런 새끼들도 인간이라는 게 그저 끔찍하다.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빨간 완장을 찬 인민복 차림의 남자가 끌려나온 마을사람들 앞에서 한 사람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한다.

 

"이놈은 반동이다!"

 

그러면 군데군데 총을 들고 서 있는 인민군의 강압에 못이겨 사람들도 따라서 외쳐야 한다.

 

"저놈은 반동이다!"

"죽여라!"

 

혹시라도 아무말 않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총을 든 인민군이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위협하기도 한다. 아니 아예 앞에 나온 남자가 지목해서 말하게 하기도 한다.

 

"이 반동에 대해 말하라!"

 

그렇게 강압으로 시작된 증오와 적개심은 어느새 고조되기 시작하고 그 이유를 너도나도 떠들기 시작하면서 당연하게 그 사람은 죽일 놈이 되어 간다. 그리고 죽는다.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에서는 그 죽이는 도구가 죽창이어서 더 극적이었다. 바로 인민재판이라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한 사람을 모두의 앞에 내놓고 증오와 적개심을 강요하여 죄인으로 만들고 공범으로 몰아간다. 내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다. 아무리해도 저 인민재판만 보고 있으면 도무지 공산주의라는 게 사람을 위한 이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째서 한겨레와 정의당이 저토록 검찰과 유착해 있는가. 검찰과 찰싹 달라붙어서 아예 떨어지려 하지 않는가. 유시민이 검언유착을 고발하고 김어준이 그것을 받자 한겨레의 기자란 놈이 그랬다. 유시민은 사악하다. 김어준은 주제도 모른다. 언론이 검찰과 유착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이며 권리다. 검찰의 무한한 권리와 자유는 정의롭고 언론의 그것 또한 정의롭다. 그를 담보하는 것은 검찰과 언론의 합작에 의한 여론몰이다. 검찰이 흘리고 언론이 받아 여론으로 만들면 그것이 정의가 된다. 재판부마저 그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김건희 여사의 말이 옳다. 현정부는 좌파정부다. 진보정부다. 정의당과 한겨레가 그리 굳게 믿고 있는 이유다. 어쩌면 그래서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더 현정부에 비판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바로 저 인민재판과 닮았다. 박원순의 경우처럼 언론이 정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여성이라도 직장에서 내쫓기고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그런 부조리한 구조가 인민재판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것이다. 아, 이래서 2찍 진보들이 검찰과 붙어먹는 것이로구나. 아직도 지난 시대의 이념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와서 이선균이 죽은 이유 어쩌고 지랄하고 있는데 원래 한겨레도 하나였었다. 한겨레 뿐인가? 정의당도 언론이 무어라 떠들면 받아서 욕하는데 조금의 주저가 없었다. 탈원전이 문제라니 탈원전 욕하고, 김학의 출국금지시킨 게 잘못이라니 청와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던 것이 한겨레였다. 자기들이 취재까지 해놓고도 조선일보가 주장하니 의혹이다. 자기들이 취재한 것이 있는데도 검찰이 그렇게 주장하고 다른 언론이 떠드니 그것이 진실이다. 그리고 그 증거를 그러한 폭력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진 대상을 통해 찾으려 한다. 그러므로 한 번 찍었으면 악마로 만들어 죽여야만 한다.

 

괜히 노무현 죽었을 때 한겨레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명숙 잡아넣을 때 가장 앞장서서 좋아했던 것도 바로 한겨레였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재명 살았다고 가장 안타까워한 곳도 한겨레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겨레는 오래전부터 정의당과 한몸이었다.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노란봉투법 반대한 이원욱을 또 그렇게 좋아하는 곳이 한겨레일 테니까.

 

아무튼 이선균의 경우를 통해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저놈들이 저 지랄을 어디서 배웠는가. 그래서 더욱 2찍 진보들은 검언유착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고발하는 것은 사악하고 보도하는 것은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하긴 댓글읽어주는 기자들에서도 그러더라. 기자가 검찰로부터 받아 기사쓰지 그럼 취재해서 쓰느냐고. 그것도 다른 언론들은 이익을 위해 그런다면 한겨레는 신념이다. 그것을 진실로 정의라 믿는다. 그래서 더 쓰레기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4050 남성들을 아예 배제해야 한다. 그들을 아주 도려내야만 한다. 바로 한겨레에 올라왔던 기자의 기사 내용이다. 한겨레가 보수화되었다는 이유일 것이다. 선동만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죽창부터 든다. 그것이 정의라고. 그래서 정작 2찍 진보들이 피의자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다. 무관심한 것이다. 저들의 인권이 검찰의 수사를 받는 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2찍 진보의 자유고 인권이고 정의다. 혐오스런 이유다.

지금 군대에 장교와 부사관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들려오니 2찍 놈들의 반응이 진짜 가관이다. 더이상 2030 남성들을 위해 정치권에서 뭔가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새삼 확인하게 된 이유다. 문재인 정부에서 사병들 월급을 올려준 것이 문제다. 사병들 월급 올려줬으니 장교와 부사관들이 굳이 복무할 이유가 없어 그리 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 새끼들 남자새끼들이다. 하긴 자기 군대 갔다왔으니 상관없을까?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당연히 사병의 월급은 올라야 하고, 복무기간은 줄어야 하고, 핸드폰도 쓸 수 있어야 하니 그런 것을 2030 남성들을 위한 혜택도 배려도 아니다. 그래서 그 모든 정책에 반대하고 오히려 이전으로 돌리려는 정당에 투표했던 놈들이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 역시 자기들더러 중소기업에서 일하라는 것이냐며 중소기업 다니는 놈들만 혜택을 주는 제도라고 반대가 아주 극심했었다. 기왕에 세금을 쓰려면 보다 더 가치있는 곳에 써야 한다면서 나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부분에 써야 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삼성이나 SK같은. 같은 맥락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으니 의사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야 하므로 의료보험 민영화에도 찬성한다. 가난한 놈들이 너무 펑펑 써서 정작 필요한 사람이 쓰지 못할 수 있으므로 전기와 가스, 수도도 민영화해야 한다는 놈들이다.

 

그런 점에서 확실히 국민의힘이 2030 남성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정당인 만큼 청년정책을 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2030 남성들은 중소기업따위 들어가지 않고, 조그만 원룸따위 돌아보지도 않는다. 대기업에 전문직, 그리고 대형 평수의 아파트만이 그들을 위한 혜택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저임금도 낮추고, 근로시간도 늘리고, 주휴수당도 없애고, 중대재해법도 폐지해야 한다. 그런 놈들이랑 취미가 같다는 이유로 어울리고 있으려니 새삼 인간에 대한 혐오의 감정만 더 커지는 중이다. 이런 새끼들 마음 잡아보겠다고 펨코까지 찾아갔던 김남국이 그저 병신이랄 밖에.

 

2030 남성들은 자기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줘 봐야 그냥 당연한 것이란 놈들이란 뜻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당연하기에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정당에도 투표할 수 있는 놈들이다. 나중에는 그런 것들을 해주었다고 탓을 할 수 있는 놈들이기도 하다. 더불어 일제강점기 가르쳤다고 반일교육했다고 지랄하는 새끼들이기도 하다. 지금 일제강점기였으면 정말 편했을 것이다. 저새끼들 그냥 입대하라면 신난다고 황군이 되어 동남아로 중국으로 잘만 달려갔을 테니. 유시민이 그럴 만하다 말한 것도 그래서 도무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그럴만한 놈들이 오히려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펴는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가.

 

아무튼 사병들 월급 올려주어 문제였다는 놈들을 보면서 역시나 2찍남 새끼들은 사람취급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더욱 자기들은 이미 제대했으니 이후 군대 가는 같은 남성 청년들이야 알 바 아니다. 그저 여성들만 군대 보낼 수 있으면 된다. 남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이다. 어쩌다 이런 병신새끼들이 한 세대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웃길 뿐이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마다 화폐의 유통을 위해 수도 없이 고심하고 실제 실행도 해 보았음에도 매번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전황이라는 것이었다. 뭔 말이냐면 시장에서 쌀이나 포목대신 쓰라 만들어 내놓았더니 그를 치부의 수단으로 보아 가진 재산을 모두 돈으로 바꾸어 창고에 쟁여놓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화폐라는 것이 당연하게 현물화폐였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금화라고 하면 금화 하나에 함유되어 있는 금의 가치 만큼 실제 시장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화라고 다르지 않았고 동화라고 당연히 다를 리 없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론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금이나 은의 비율이 높은 화폐와 낮은 화폐를 함께 시장에 유통할 경우 비율이 높은 화폐는 개인이 소유하고 시장에서는 비율이 낮은 화폐만 유통되게 된다.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은 쪽이 더 가치가 높기에 치부의 수단으로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화폐 쪽을 더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 쓰게 된다.

 

그래서 실제 조선에서도 관청마다 예산을 배정할 때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구리 자체를 나누어주어 알아서 동전을 찍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구리가 부족해서 가치가 올랐을 때는 동전의 무게를 줄이기도 했었고, 은의 가치가 높아지면 은화와 구리동전의 교환비가 바뀌기도 했었다. 괜히 당백전이 조선말 조선의 경제를 박살냈던 것이 아니었다. 동전 하나에 들어간 구리의 가치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시장에서의 가치만 100배로 늘렸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당오전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조선 경제를 망쳐 놓았던 명성왕후 민씨는 참으로 여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손에 목이 따였어야 하는 년을 국모니 뭐니... 아 씨발.

 

아무튼 그런 이유로 쌀이든 포목이든 죄다 동전으로 바꾸어 창고에 쟁여 놓으면 어차피 구리의 가치 자체가 크게 떨어질 일이 없으니 오히려 부피도 줄고 보관상에도 유리했기에 많은 부자들이 시중의 동전을 모두 사들여 창고에 쳐박아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유통되는 동전의 모양이 바뀌면 그냥 녹여서 구리로 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실제 조선에서는 내내 구리가 부족해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써야 했기에 필요한 경우 동전을 직접 녹여서 쓰는 경우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될 정도로 무척이나 많았었다. 그러니 시장에는 항상 동전이 부족하고, 더구나 구리가 부족한 상황에 항상 충분한 양을 공급할 수 없는 탓에 여전히 시장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유통수단으로 쌀이나 포목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면 쌀보다 아무래도 보관이나 이동에 편리한 포목을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시장에도 실제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는 오로지 거래만을 위한 포목이 등장하고 있기도 했었다. 옷으로 만들어 입기에는 너무나 성기게 짜여진, 그러나 거래의 용도로 쓸 만큼의 구색은 갖춘 면포들이 시장에서 화폐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는 것은 어차피 이것들은 실제 옷으 만들어 입거나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화폐 대신 쓸 수 있으면 되었기에 구색만 갖출 수 있으면 되었다. 시장의 요구도 그랬고 제작자들도 딱 그 만큼만 만들 수 있으면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시장에 주택공급이 부족하다 여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혼자서 수 십 채 씩을 집을 소유한 투기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에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미리 대출등을 통해 독점하는 세력이 존재하기에 그만큼 주택공급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집이란 단지 시세차익만 올리면 되는 대상이기에 굳이 안전하고 튼튼한 집이란 그리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건설사가 아무리 부실공사를 해도 오히려 집값이 떨어질까 어디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알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그런 것을 알기에 건설사들도 아무렇지 않게 대충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고.

 

90년대 DDR이 한창 유행할 따 나 역시 DDR 장판을 사서 집에서 열심히 구른 적이 있었다. 아파트였는데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었다. 윗집에서 뭐 한다고 아래층에서 들리는 경우도 일단 내 경우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위에서 뭐 해서 성가신 것은 베란다에서 뭐 할 때나, 욕실 벽을 통해 지나가는 배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가는 경우 정도였다. 그래서 솔직히 처음 층간소음 어쩌고 했을 때 단독주택에서 세를 살고 있던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작은 소리까지 들린다고? 어떻게? 어차피 아파트란 가격만 알아서 올라주면 되는 것이고, 집값을 결정하는 것은 그 집의 완성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집을 사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조용한데 그런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맞기는 하다. 조선이 미개해서 화폐유통이 늦었던 것이 아니었다. 원래 금은 워낙 가치가 높아서 실제 시장에서 유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은은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원했고, 그렇다고 구리를 쓰려니 효종 전에는 조선에서 구리가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구리마저 독점하려는 놈들이 있었다. 화폐의 독과점으로 인해 현물을 교환해야 하는 생산자가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사대부들이 지적하며 경계하고 있기도 했었다. 요즘 아파트 부실공사 논란들을 보며 문득 떠올린 사실이다. 너무 닮아 있다. 조선후기 화폐의 상황과. 유통의 수단과 치부의 수단, 그리고 실제의 쓸모에 대해서. 새삼스럽기도 하다.

오늘 우연히 보았다. 어느 경찰이 배우 이선균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며 올린 글이 여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글을 보는 사람들마다 경찰을 욕하는 반응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글에서 아주 흥미로운 맥락을 보았다. 결국은 위에서 성과를 재촉했기 때문이라는 것 아닌가.

 

원래 월급쟁이들 일이라는 게 그렇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더 빠른 일처리를 원하는가? 더 정확한 일처리를 요구하는가? 더 안전하게 사고없이 일하는 것을 바라는가? 더 빠른 일처리를 원하면 중간과정 생략하고 그냥 빠르게만 움직이면 된다. 정확한 일처리를 바라면 그때는 일이 밀리더라도 철두철미하게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진행한다. 더 안전하게 사고없이 일하기를 바라면 그런 와중에도 자기 몸 사려가며 일하게 된다. 그래야 윗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배치든 급여든 승진이든 혜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경찰이라고 다를까?

 

그래서 정권이 바뀌면 경찰이 일하는 방식도 당연히 바뀌게 된다. 인권을 무엇보다 중요시여기는 정권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정권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무리하지 않으려 조심하게 된다. 인권따위 상관없고 실적만 중요시여기면 무리한 수사로 적잖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는 무리한 수사로 인한 무고한 피해자들의 사례는 대개 그런 배경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더구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방향까지 제시해가며 실적을 요구한다면 아예 승진을 포기하지 않은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심지어 이미 그를 실적삼아 승진까지 했다면 더이상 되돌리지 못한다. 어떻게든 그것을 실제 실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긴 경찰만일까? 다른 대부분 공무원들 또한 마찬가지다. 윗사람의 성향이 어떠한가에 따라 원리와 원칙을 중요시여기거나, 혹은 융통성을 더 크게 열어주거나, 아니면 자기 욕심부터 채우게 된다. 오죽하면 검찰마저 정권이 바뀌면 갑자기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봐주던 이들을 앞장서서 수사해서 처벌받게 하는 경우마저 심심찮게 일어나겠는가? 지금 대통령이 바뀐 정권의 입맛에 맞게 검찰개혁을 부르짖고 검찰총장의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법무부 안에 검찰국을 만들어 경찰에 대한 인사권을 넘어 직접적인 통제까지 가능케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법무부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치적으로 만들고자 사활을 걸고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일선 경찰 입장에서 어떻겠는가?

 

그냥저냥한 잡범 수준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를 떨어울릴만한 유명인과 관련한 사건인 것이다. 혐의만 입증할 수 있으면 그야말로 더 높은 자리까지 노려볼 수 있는 대단한 실적이 될 터였다. 아마 그렇게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언론을 통해 퍼뜨리고 아예 기자들 앞에 유명인들을 세우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런 실적을 바탕으로 상당수 관계자들이 승진까지 했었다. 그런 상황에 무혐의로 결론이 나면 수사한 당사자들이나 경찰의 입장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니 국민의 비난이야 그동안 수도 없이 받아온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마약과의 전쟁을 밀어붙인 윗선의 심기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하나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더라도 하나를 잡아야 한다.

 

그동안 수사기관들이 흔히 써오던 수법이다. 별건을 통해 주변을 압박해서 피의자 자신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지경까지 몰아붙여 어쩔 수 없이 체념 끝에 자신들이 원하는 자백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공범으로써 항상 동참하는 것이 바로 언론들이다. 내가 이런 수사기관의 몰이사냥에 2찍 진보들이 하다못해 중립이라도 지키는 것을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오히려 진보랍시고 정의와 상식과 윤리를 앞세워 더 지독하게 몰아갔으면 몰아갔지. 2찍 진보들의 인권타령이 얼마나 썩은내나는 개구라인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래서 피의자인 배우 이선균으로부터 어떤 증거도 자백도 확보하지 못하자 그를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려 그동안 써오던 방식을 답습해 온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언론들 역시 충실히 수사기관의 의도에 호응해 주었고. 개인의 인권이야 알 바 없이 수사기관이 원하는대로 된다면 자신들도 특종거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흥미롭다는 것은 원래 기자들이 검찰은 자기 윗사람이라 여겨 철저히 복종하고 따르더라도 경찰은 자기보다 아래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검찰과 달리 경찰의 수사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받아쓰기보다 적당히 어깃장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 검찰과 경찰의 위상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일 텐데 이선균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마지막까지 언론은 철저히 경찰의 입장에서만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어느 경찰의 자백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어 준다 할 수 있다. 어째서 경찰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었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런데도 어째서 그나마 경찰에는 가끔 비판도 하던 언론들이 하나같이 침묵하며 따라쓰기에 바빴었는가? 무엇보다 괜히 상관없는 검찰을 옹호한다고 바쁜 언론들의 태도에서 의심은 확신이 된다. 결국은 그놈의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실적을 밀어붙인 주체에 가장 큰 책임이 있지 않은가.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서라도 경찰을 감시해야 한다면서 결국 그런 상황을 조장한 주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정권을 다시 가져와야 하는가? 아무리 개새끼 씹새끼 버러지새끼 욕해도 최소한 민주당 당적을 가진 인사들은 저런 상황을 태생적으로 용납하지 못한다. 용납한다면 그 새끼는 진짜 당적을 다시 찾아 온 것이다. 최소한 위선일지라도 피의자의 인권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만큼은 동의하는 이들인 것이다. 당연히 2찍 진보들이 지지하는 보수정당은 그 반대의 위치에 있다. 2찍 진보들이 재소자의 인권은 말해도 피의자의 인권은 말하지 않는 이유다. 일반 재소자의 인권은 말하더라도 민주당 관련 인사들의 인권을 말하지 않는다. 저들의 인권이란 선별적인 인권이다. 그래서 민주당이어야 하는 것이다. 2찍 진보들조차 더이상 대안이 되지 못한다.

 

아무튼 어째서 이런 참혹한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진짜 공무원다웠다. 아니 월급쟁이 다웠다. 내 책임이 아니다. 나야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해야 하는 입장이다. 피의자의 인권따위 인사까지 틀어쥔 상급자의 지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도 그랬겠다. 먹고 산다는 게 그렇게 힘들다. 그냥 승진이 아니다. 받는 월급과 가족들에 대한 대우까지 달라진다. 동정하지 않을 만하다. 인간은 나약해서 악한 존재다. 슬픈 이유다.

섹스 피스톨즈라면 아마 아는 사람은 거의 아는 이름일 것이다. 대중음악을 넘어 현대 대중문화의 흐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당장 핑크패션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옷핀과 피어싱, 왁스, 찢어진 옷과 가죽 등이 바로 이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펑크문화라는 자체가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펑크를 막장의 다른 말로 만든 놈들도 바로 이놈들일 터다.

 

갑자기 놈들이라고 호칭을 바꾼 이유란 다른 게 아니다. 이 새끼들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유명해지고 싶다고 악기상을 털어서 시작했다. 악기라고는 배워 본 적 없는 놈들이라 기본적인 코드도 짚을 줄 몰라서 음악까지 무척 단조로운데 거기에 더해 베이스도 칠 줄 모르는 놈을 얼굴마담으로 세워서 핸드싱크까지 했었다. 펑크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시드 비셔스가 바로 그놈이다. 허구헌날 마약과 술에 취해서는 무대에서까지 헤롱거리던 놈들이 바로 이놈들이었다. 무대에서 자해하는 짓거리도 이놈들이 시작했다. 방송 도중 사회자에게 대놓고 욕설을 내뱉어서 방송출연금지까지 당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흔히 펑크밴드라 하면 떠오르는 모든 막장짓을 이놈들이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고구마가 카메라에 침을 뱉은 행위나 카우치가 느닷없이 방송 도중 바지를 벗어던진 행위 역시 이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당당했으면 막장이라도 멋이기나 했지 끝까지 비겁했다는 게 카우치가 지금까지 욕먹는 행위일 것이다. 아무튼 그러면 이런 막장새끼들에 대한 언론이나 대중의 평가는 어떠할까? 그냥 레전드다. 그동안 저지른 짓거리에 대해 욕은 할 지언정 그래도 그들의 음악이 가지는 가치를, 아니 그들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헤비메탈의 시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레드제플린이지만 정작 따지고 보면 히트곡 가운데 상당수가 표절곡으로 의심받거나 심지어 법적인 판결까지 받은 터였다. 사생활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라 이른바 그루피라 부르는 팬들과의 추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 로버트 플랜트는 자기 처제와 불륜을 저질러서 꽤나 화제가 되었을 것이었다. 드러머인 존 보넴은 약물중독에 결국 술을 있는대로 쳐마시고 자빠져 자나가 토사물이 목에 걸려 죽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었다. 하긴 레드 제플린 뿐인가. 롤링 스톤즈의 믹 제거는 막장인 사생활을 아예 자랑처럼 떠벌리는 인간이고, 블랙 사바스의 보컬이던 오지 오스본은 술과 마약에 쩔어서 오죽하면 부인이 이러다 이 인간 죽겠다 싶어 결혼했다 이야기까지 했었을까. 최초의 락밴드라 불리우는 후는 호텔 벽에 구멍을 뚫는 전통 아닌 전통을 만들었고, 오아시스도 그 전통을 물려받아 베개 훔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역시 대중과 언론의 평가는 어떠한가?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지미 헨드릭스나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아직까지 전설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사생활이야 어찌되었든 그가 이룬 업적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들은 단지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의 일일 뿐 공적인 영역에서는 대중적인 그들의 역량과 업적을 우선해서 판단해야 한다. 사생활에 대한 비판은 비판대로, 그러면서 아티스트로서 그들이 대중문화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인정해야 한다.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동안에도 그의 사생활에 대한 가십을 보도하던 언론들 역시 아티스트로서 마이클 잭슨의 이룬 업적과 현재의 위상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를 존중하면서 한 편으로는 그의 사생활을 파헤쳤다. 찰리 채플린이나 파블로 피카소의 사생활이 그들의 위대함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런 문제들조차 사소하게 여길 정도로 그들이 남긴 업적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어쩌면 이야말로 군사독재의 유산일 것이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일본 새끼들은 조선인들을 억압하면서도 조선인 개인이 가진 역량 자체는 어찌되었거나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용운을 몇 번이나 잡아넣고, 그때마다 고문까지 했으며, 더구나 일상생활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식민지 조선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로써 일정한 활동을 하며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까지 강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 지도자들이 어찌되었거나 식민지 조선인들의 구심점으로서 저술도 하고, 강연도 하고, 언론에 기고도 하는 등 최소한의 활동은 보장받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박정희는 어땠는가? 단지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중현을 아예 매장시켜 버렸었다. 오죽하면 대마초관리법이 만들어진 것보다 대마초혐의로 대중예술인들을 처벌한 것이 더 앞서고 있었겠는가. 그냥 활동만 정지시킨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나온 음반들까지 모두 파기해 버렸다. 그래서 신중현의 오래된 음반을 찾으면 옆나라 일본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것을 전두환이 물려받았었고, 이명박과 박근혜가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시켰었다. 뭐라도 하나 문제가 있는 새끼들은 아예 아무것도 못하게 매장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마초 관리법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개인이 도덕적이지 못하니 매장해야 한다. 정확히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하니 당연히 매장해 버려야 한다.

 

대중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이제 대중에게로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사소한 문제라도 있으면, 아니 단지 그런 의심만 있어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여론이라는 칼날을 앞세워 아예 난도질하고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타블로였다. 단지 일부가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입증의 책임을 떠넘기고, 그 입증의 사소한 오류들을 빌미삼아 끝끝내 그 부모까지 죽음으로 내몰았었다. 그때 그 새끼들 가운데 제대로 반성한 새끼를 내가 거의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똑같은 새끼들이 이후 여러 이슈들에서 희생양을 만들었었다. 지들은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서 확실하지도 않은 정황들을 가지고 어느 개인을 단정짓고 낙인찍었으며 단죄하려고까지 했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존엄까지도 아닌 그 개인이 이 사회를 위해 이룬 기여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된다. 그보다 내가 위다. 내가 절대자다. 그러고보니 조선왕조시대에도 그랬었다. 명필로 이름높았던 안평대군의 글씨가 지금 남아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수양대군과 경쟁하다가 도태되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역적은 글씨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명초의 거유라 일컬어지는 방효유가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대단한 평가를 들었는가 지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은 게 없다. 거의 그 정도로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난도질하는 것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결국 나중에 기자까지 된다. 어떻게 되겠는가?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그동안 연기자로서 이 사회에 남긴 기여를 생각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기자새끼들이야 그럴 수 있다. 경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혐의가 있다 생각했으니 수사를 했고, 기사거리가 된다 여겼으니 취재를 했다. 그렇더라도 대중의 조롱거리로 난도질하도록 내던지지는 말았어야 했다. 한 인격을, 그리고 그가 그동안 이루고 이 사회에 남겨놓은 성과와 업적들을 배제하고 부정해서는 안되었다. 역시나 2찍 진보 새끼들은 그냥 2찍이라 부르는 이유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코로나 방역 때문에 집회를 제한한다고 지랄하던 2찍 진보 새끼들의 인권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점에서 의혹이 불거졌어도 철저히 인권을 위해 보호받고 있는 특정인들이야 말로 저 새끼들의 진짜 정체성을 보여준다 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야 어차피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새끼들이니 취급도 않는다. 그런 결과인 것이다. 살아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혹이나 정황이 있기에 그 죽음마저 추모하지 못하겠다. 안타까워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욕하고 침뱉는 것이 당연하다. 그건 고결함조차 아니다. 도덕적인 순결함이란 최소한 타인의 죽음이나 불행에 대해 최대한 냉정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순간에조차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확인하려 든다. 권력을 확인하려 든다. 그것을 과연 도덕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도덕적이지 못한 자들의 도덕성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욕망을 가지고 충동에 휩슬린다. 더 엄격하게 자제하고 절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인 이상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완전함 가운데 진정으로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항목들을 정의해 둔다. 그마저도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들이지 개인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들이 아니다. 인간이란 당연하게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이고 따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므로. 타인에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공동체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따라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에 대해 일방적으로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월권이다. 딱 그 만큼만.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말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러는 자신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완벽한가. 도적적으로 순결한가.

 

그런 대중을 바라고 언론이 내던진 것이었다. 그러라고 수사당국도 언론에 흘린 것이었다. 경찰만의 책임이라기에는 그런 경찰을 제어하라고 경찰국을 법무부 안에 바로 현정부에서 만들어 놓았었다. 아직도 대부분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는데 검찰이 장악한 법무부로부터 경찰 자체가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구도인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다. 수사도중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언론에 흘려 여론을 만든다. 개인을 망신주고 모욕주어 흔들리도록 압박한다.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그로 인해 재판부까지 판결에 영향을 받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것을 오히려 편승하려드는 언론에 더해 그러라고 더 부추기는 대중이 역시나 또 한 번 이런 비극을 불러 온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 도중 죽어나갔음에도 오히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던 사회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고나면 또 다시 입바른 소리 하며 아닌 척 하는 자칭 진보새끼들도 있을 것이다. 다 똑같은 새끼들이다.

 

대중예술인을 예로 삼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유명한 학자일 수 있고, 대단히 뛰어난 경영자거나 군인일 수도 있다. 하나만 잘못해도 모든 것을 부정당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래서 암담함을 더한다. 어쩌면 그래서 민주주으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로서의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 자유가 아니라 강제되는 자유다. 민주를 넘어선 자유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넘어선 자유일 것이다. 그런 새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도 출범할 수 있었을 테지만. 네가 잘못했으니 나는 이제부터 뭘 해도 자유다. 쓰레기는 쓰레기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죽은 이들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간이 슬프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의혹이란 단지 의심일 뿐이다. 의심은 오로지 자신의 일방적 생각일 뿐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의심만으로 상대를 단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 주체가 단지 경찰이라는 이유로. 단지 검찰이라는 이유로. 수사기관이 의심했으니 근거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근거없는 의심은 없다. 역사상 있었던 모든 무고와 음해와 모함과 오해는 모두 어찌되었던간에 특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기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그러면 그 의심의 근거들이 타당한가? 그래서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는 그것들이 엄연한 사실로써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인가? 그래서 모든 의심에는 입증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로써 입증한 다음에야 의심은 판단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전에 판단을 강요한다. 의심이 있으니 저놈은 나쁜 놈이다.

 

2찍 진보를 그냥 2찍이라 여기는 이유일 것이다. 보편적 시민의 권리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던 놈들이 정작 검찰의 발표 앞에서는 인권따위 아무렇지 않게 똥구덩이에 쳐박아 버린다. 아마 민주당 관련인사여서 그럴 것이다. 민주당만 죽일 수 있다면 인권이야, 시민의 권리따위야, 검찰의 전횡과 인권유린이야. 그동안 검찰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선택을 했음에도 그토록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던 2찍 진보 가운데 누구도 검찰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은 사람이나 아니면 관계된 다른 사람을 욕했지. 그나마 이선균씨는 민주당과 관련된 인사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건 경찰이 저지른 것이지 검찰과는 무관하다. 마약과의 전쟁을 누가 시작했을까? 이선균씨와 지디에 대한 수사는 어떤 목적으로 그렇게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것일까? 무엇보다 검찰에 의해 수사지휘를 받는 곳이 바로 경찰이다. 그러려고 시행령으로 검수완박을 무력화시키고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이슈를 들고 나왔던 것이었다. 검찰이 장악한 법무부에 경찰국 신설한다고 난리난 것이 불과 1년 조금 전이다. 아니 그 전에 경찰이 떠든다고 언론이 언제 일방적으로 받아쓰기만 했었느냐는 말이다. 경찰수사단계에서 이렇게 커지는 경우도 이전에는 별로 없었다. 단지 검찰이 수사성과를 가져가기 전에 무고로 판단이 되었을 뿐.

 

의심을 받았으니 죽을 만하다. 경찰이 아무 근거없이 의심했을 리 없으니 자기 책임이다. 그 밖에 부적절한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 새끼들도 공범이다. 사실이 사실로써 밝혀지기 전까지는 판단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지금 재판부가 과연 공정하게 객관적인 사실만으로 판단하는 곳이던가?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가는 새끼들 역시 공범이다. 명징하게 사실만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사실의 조각들만으로 전체를 판단하고 그를 절대시한다. 그러라고 부추기는 것들이 바로 언론일 것이고. 그것을 전혀 감시도 비판도 않는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다. 2찍 진보 새끼들. 그러고도 진보라 그런다.

 

아무튼 처음 어떠한 반론도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아직은 아니라 여기고 판단을 미루어 왔었다. 결국 몇 번이나 검사결과 음성이 나왔음에도 수사를 밀어붙이는 상황을 보고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가. 수사하고 있으니 유죄라는 병신들에 어이가 다 없었다. 그리고 결과가 이렇다. 그런데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모두가 그냥 지나친다. 어이없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태어난 것이 죄인 것일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버러지새끼들의 나라다.

그렇게 한 목소리로 이동관의 사퇴를 아쉬워하더니만 아예 방심위원장이 주변사람들을 시켜 민원을 사주하고 그를 근거로 과징금을 때리는 상황에서도 역시나 자칭 진보 언론들은 조용하기만 하다. 문재인 정부였으면 과연 자칭 진보 인사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생각해보면 바로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과연 저들에게 언론의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정부가 KBS를 장악하는데 앞장서서 문을 열어 준 것은 결국 KBS 자신이었다. KBS 직원들 스스로가 기존의 사장 쫓아내고 정권의 낙하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정권의 개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 하긴 언론의 사명 어쩌고 하더니 그 첫마디가 바로 문재인 목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내 검찰의 대변인이 되어 대선까지 한결같은 태도를 취했었다. 그러다 내쫓긴 놈들이야 어차피 윤핵관들도 떠밀려나는 상황이니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 언론들에 언론의 자유라는 것이 필요하기는 한가. 언론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언론을 탄악하고 정권이 장악하여 마음대로 휘둘러도 감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사를 찾아보기가 너무 힘들다. 그나마 MBC 정도일까? 진보를 자처하는 새끼들은 조선일보가 나서지 않는다며 징징거리는 중이고. 그런 놈들에게 언론의 사명이며 공정성이란 어떤 의미일 것인가?

 

제 2의 언론통폐합이 필요한 이유다. 지금도 정부의 지원만 끊으면 대다수 언론들을 문닫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한국사회 전체에 크게 안좋은 영향까지 끼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좋으면 좋았지. 방송국은 하나만 있으면 된다. 신문사도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기자새끼들이 많이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 윤석열 정부가 하는대로 그보다 더 세게 밀고 나가면 찍소리 못할 것이 언론이고 기자라는 새끼들인 것이다. 제발 한겨레부터 일단 문닫게 했으면. 저 새끼들 볼 때마다 열불 터져서 내 명에 못 죽는다. 경향일보야 지금 원래 자리 찾아가는 중이고. 원래 창간부터 어용으로 시작한 언론이었으니.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망한 언론이야 말로 좋은 언론이다. 새삼 깨닫게 되는 격언이다. 기자새끼들 죄다 좋은 기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검찰보다 더 혐오하는 게 바로 저 기자새끼들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쓰레기에 대한 모독이다. 쓰레기가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저 새끼들은 재활용도 안된다. 곱게 갈아 거름으로 주어도 오히려 농작물이 썩는다. 기자라는 단어를 치는 순간도 손가락이 썩는 것 같다. 더러운 새끼들. 

이를테면 월세의 경우 싼 것은 보증금이 천만 원도 안하는 곳이 아직도 제법 많다. 월세 조금 더 준다고 하면 일단 보증금에 대한 부담은 없다고 보면 된다. 지금 최저임금 수준으로도 혼자서 열심히 아끼며 모으면 어떻게 제법 그럴 싸한 집을 구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하는데 몇 년 걸리지 않는다. 둘이라면 더 빠르다. 그런데 전세는 아니다. 어지간하면 거의 1억 가까이서 노는 전세금을 과연 지금 최저임금 기준으로 얼마나 아끼며 모아야 과연 마련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단 월세 보증금이라는 것부터 거의 한국에만 있는 이상한 제도라는 것이다. 사실 법적으로도 월세 밀렸다고 보증금에서 까는 것은 아마 안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월세는 월세, 보증금은 보증금이다. 그런데 굳이 따로 보증금을, 그것도 몇 배 이상 받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한 번에 목돈을 들여야만 월세를 얻을 수 있는 구조라는 것도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당장 일본만 해도 몇 달 치 월세만 선불로 내면 얼마든지 바로 월세로 들어가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른 선진국에서도 월세가 밀리면 바로 경찰을 동원해서 내쫓을 수 있는 대신 보증금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결혼해서 살 집을 구하려는 사람들에게 당장 다가올 현실적인 부담에 대해서.

 

전세가 없다면 모르지만 월세로 들어가서 다달이 월세를 내면서 사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수입이 알량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꽤나 부담일 터다. 거의 대부분 최저임금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받는 수준일 텐데, 거기서 월세라고 매달 수 십만 원씩 내고 나면 저축까지 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울 것이다. 반면 전세는 어찌되었거나 계약기간이 끝나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있으니 돈을 고스란히 아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전세금을 돌려받고 올려주면서 돈을 모으다 보면 어떻게 집도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결혼을 결심하면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당장 전세집부터 알아보게 된다. 그런데 그 돈이 만만치 않다.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서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딛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 그냥 결혼하기를 포기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장 크지 않을까. 당장 살기 어려운 것도 있는데 장래를 위해서도 함께 살 집을 구하는 것조차 현실적으로 너무 큰 부담이다. 그렇다고 보증금이 싼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구차하게도 느껴진다. 번듯하게 신혼답게 결혼생활을 시작하려면 그래도 어느 정도 되는 집을 구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월세조차도 너무 부담이다. 하물며 집을 구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그렇게 시작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까지 하고 싶어도 현실의 문턱 앞에 주저앉고 마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이유일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체념하고 그런 기회 자체를 거부해버리는 이들마저 있다. 결혼하고 나서도 아이를 갖는 것은 감히 언감생심일 테고.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위해서도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그건 더 난이도가 높다. 주변의 환경과 학교까지 고려해서 집을 구하려면 진짜 그때는 없는 돈도 끌어와야 할 지 모른다. 결국에 전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합리성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전세가 너무 많은 것들을 왜곡하고 또한 망가뜨리고 있다.

 

그냥 사는 만큼 내며 살 수 있는 만큼 쓰면서 함께 지금만 살아갈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고 딱 자기 수준에 맞게만 살 수 있으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기조차 어렵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바로 우리가 만들어온 이 사회의 현실인 것이고. 문득 든 생각이다. 여러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아마도.

아주 어릴 적 동네에 하우스를 하는 형이 있었다. 정식으로 하는 하우스는 아니고 자취방을 동네에서 도박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하우스로 빌려주고 그 돈을 받아 생활하던 사람이었다. 나도 자연히 그를 통해 도박이라는 것을 몇 번 맛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도박하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도박과 투기가 서로 닮은 부분일 것이다. 빠지기가 어렵다. 돈을 따면 따서, 혹은 잃으면 일어서 손털고 일어나기가 도저히 쉽지 않다. 돈을 땄으면 더 딸 것 같다는 생각에, 돈을 잃었으면 잃은 돈을 벌충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 아예 망하기 직전까지 도박판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는 망하고 싶어도 망할 돈 자체가 없었기에 그래봐야 며칠 일당 날리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설마 플러시 잡고 지르는데 포카드가 나올 줄이야. 물론 그러고도 인터넷 고스톱으로 한 번 크게 망한 적이 있기는 하다. 진짜 올인 앞두고 괜히 호기 부리다 내가 올인당했었다. 그러고서도 몇 번이고 다시 덤볐다가 오히려 평정을 잃은 상태에서 그때마다 모두 잃고는 이제는 인터넷도박도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내가 주식이며 코인 같은 투기에는 얼씬도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오르면 좋은데 올랐다고 팔기가 어렵다. 팔고 나서 오르면 아쉽고, 그렇기 때문에 더 오를 것을 기대하면 팔고 나오기가 어렵다. 그러다가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올랐던 것이 생각나서 자꾸만 미련을 가지게 되고 손해를 보는 순간부터 본전생각에 더욱 놓지 못하게 된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있다. 세상에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 부류가 담배 한 번에 끊는 사람과 도박 돈따고 잃어나는 사람, 사법고시 1차 합격하고 손터는 사람이라고.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 물론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곳은 지금껏 어디에도 없었다.

 

영끌족들을 그다지 동정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오를 때는 오르는 것만 보고 가능한 모든 돈을 끌어들여 집을 샀을 것이다. 그러면 올랐으니까 팔아서 차익만 얻었으면 되는데 더 오를 것을 기대하고 마냥 붙잡고 있었다. 언제까지? 그게 문제다. 최고점이란 곧 하락이 시작되는 지점이란 뜻이니까. 오르는 동안에는 팔지 못하고, 당연히 떨어지기 시작하면 더 팔지 못한다. 그러면 결국 집을 안고 같이 죽어야 한다. 그런 계산도 못한 것이다. 언론이 부추기니까 벼락거지 되기 싫어서 아무 생각없이 뛰어든 결과다. 집값이 떨어지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일찌감치 팔고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하긴 팔고 나오려 했어도 어차피 사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차익을 기대하고 투기에 뛰어든 바보들 제외하고는.

 

영원히 오르는 것은 없다. 오르는 것은 언젠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때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인가. 떨어질 때 다시 오를 때까지 기다리며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돈을 잃기 시작했을 때 버틸 수 있는 여력만 있으면 도박에서도 다시 기회가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영끌족과 진짜 꾼들의 근본적인 차이다. 그리고 결국 언제나 승자는 그럴 능력을 가진 꾼들인 것이고. 언론이 떠든다고 휘둘리는 건 그런 꾼들이 움직이는 언론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꾼들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몰랐다면 교훈으로 삼으면 되는데 과연 그럴 주제라도 될 것인가.

 

남들 돈버는 것 부러워하다 보면 결국 자기만 힘들어지고 불행해진다. 그런 단순한 상식조차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몸으로 직접 겪으며 배워야 한다. 교훈이라 여겨야지 별 수 있을까. 그렇게 집값이 언제나 오르지는 않을 거라며 살 집을 장만하라 해도 듣지 않더니만 직접 대가를 치르고 마는 것이다. 크게 염두에 둘 것은 아니다. 별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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