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조선사회에서 과거란 양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실력만 되면 합격도 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었다. 그래서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과거에 합격해서 입신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단, 여기서 농사짓다가라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 땅도 가지고 있고, 그 땅을 경작한 노비며 소작인도 상당히 거느리고 있어서, 굳이 자기가 직접 뼈빠지게 농사지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향리나 호족들을 겸손하게 일컫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진짜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공부도 해서 과거에 급제한 예는 내가 아는 바로 없다.
당연하게 조선시대에는 책이 무척 비쌌다. 제대로 한 번 배워보려 선생님이라도 부르려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서 유학이라도 가려 하면 그동안 들어가는 돈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공부하려 하면 그동안 집안일은 아예 손을 놓아야만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생각보다 그리 낮지만은 않았던 것이었다. 남편이 과거공부한다고 책만 들이파는 사이 집안일을 대부분 책임지는 것은 아내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주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진 것도 없는 농민들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심지어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양반이 넘쳐나게 된 만큼 경쟁도 치열해져서 더이상 한 가정단위의 지원만으로는 급제를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어지간한 양반집안이라도 한 집안만으로는 그 비용이 감당이 안 되어서 아예 문중 전체가 나서서 될만한 이들을 밀어야 하는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비용이 감당이 안될 것 같으면, 어차피 대과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갈 기대가 없을 경우 그냥 과거에 합격했다는 명예 하나만 챙기고 포기하는 경우도 조선후기에는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초시니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면 원래 양인이면 다 볼 수 있는 시험이던 과거가 양반 가운데서도 선택된 일부만을 위한 제도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해서 관적에 나갈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과거도 볼 수 있었던 소수의 양반들을 벌열이라 불렀다. 어차피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얻을 수도 없고, 아예 과거 자체를 포기한 지방의 양반들은 달리 향반이나 잔반이라 불렀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는 주위 어딘가에는 실제 있는 사실들일 터다. 그나마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방 하나에 모든 가족이 모여 사는 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부방조차 없이 식구들과 부대끼며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이 학원까지 다니며 공부하는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참고서 한 권 사려 해도 눈치가 보이고, 학원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해도 옆에서 봐주고 챙겨줄 사람조차 없다면 그래도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더 잘살고 더 좋은 조건에서 공부하는 아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는 곳이 농촌이라서, 저기 멀리 외딴 섬이라서 더욱 그러고 싶어도 학원조차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인종적으로 그리 다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는 편이지만 인종과 민족이 다양한 사회라면 각자가 속한 집단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개인의 노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단지 드러난 결과만으로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해서 그들에게 기회에 차등을 두는 것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학창시절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들로 인해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기에 같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을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보니 오바마가 어린 시절 마약을 했었다 그랬던가? 그렇게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는 시간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개인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부르주아라는 착취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피착취자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층위을 가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저 착취만 하고 착취를 당하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면 고도로 복잡해진 구조 속에서 각자 일저부분 착취도 하면서 착취를 당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고민이자 마르크스주의가 공격받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드러난 학업성적만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이고 공정한 대우인가.
역시 조금 전 썼던 글과 이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인 것이다. 그래서 포용이고 관용인 것이다. 그래서 평등이고 그래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정치적인 올바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관성적으로 믿어왔던 행동들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더 복잡하고 번잡하고 성가신 대안을 찾아서 고민해 보자. 그러니까 당장 보이는 능력과 상관없이 각자가 놓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기회를 동등하게 주고 그 안에서 서로가 대등해질 수 있도록 사회가 만들어 보자. 그럼에도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중간에 도태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능력이 부족해서 도태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한 사회의 불만과 불안을 줄이는 과정일 것이다.
사회가 개인화될수록 정의 역시 파편화된다. 그래서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정의와 가치와 윤리와 도덕에도 개별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개인에 대해서도 그에 맞는 해석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구조상 그렇게 모든 구성원들에게까지 필요한 해석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 모든 개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배려란 기회라고 하는 가능성을 일반화하여 열어주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다. 역시나 반PC주의자들이 극혐하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는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역시 두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일 것이다. 일극의 세계와 다원성의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 더 쉬운 것은 전자일 타다. 후자를 설득하기란 너무 어렵다. 안타깝게도. 직관으로는 알아도 논리로 설명하기란 너무 지난한 과정이다. 하물며 설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