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달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 당연하다. 일은 힘든데 급여는 짜고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아무때고 그만둬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 경력 좀 되면 오히려 그 경력을 바탕으로 다른 더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찾아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다닌다. 그렇게 일에 지쳐서 그만두고, 더 좋은 곳을 찾아 떠나고, 덕분에 경험없는 신입들만 벌써 우리 조에 절반이 넘어간다. 문제는 참 젊은 친구들이 너무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


전에는 그래도 신입이라고 해봐야 한둘이니 말을 하면 들어먹는 시늉은 했었다.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 그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짧은 기간 동안 갑자기 젊은 신입들이 늘어나니 자기들끼리 패거리를 만든다. 한 달 먼저 들어왔다는 이유로 선배노릇하면서 신입을 포섬해서 자기 패거리로 만든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합의해서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오히려 저렇게 하는 게 더 불편하고 성가시기만 해!"

"괜히 저런 인간 말 들을 필요는 없어!"


엄하게 말해서 바로잡아도 그때 뿐이다. 자기들끼리 담배피러 갔다 와서는 다시 원래 그대로다. 그래도 상관없는 것이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자기가 옳다고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그것이 더 옳을 테니까. 그리고는 패거리를 믿고 대놓고 게기기 시작한다. 대놓고 무시하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다만 내게 그럴 권한이 없고 따라서 그럴 책임도 없기에 안 되는 일은 손놓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나마 잔소리라도 할 때가 애정이든 기대든 남아있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결국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도저히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도대체 그것을 왜 아무도 말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기에 설마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전혀 모른 채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결과만 통보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웃고 있다. 자기들끼리 웃으며 떠들고 있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인가.


나한테도 변명을 시도한다. 이래서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명백한 피해가 발생했다. 보고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말해주었다.


"응석부리지 마라!"


아직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른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좋으면 그냥 좋은 것이겠거니. 자기들끼리 괜찮으면 그저 괜찮은 것이겠거니. 그래서 사고를 치고서도 그 사고가 얼마나 큰 사고인가 자각조차 없었다. 오히려 쉬는 시간이 적다, 일이 괜히 피곤하고 힘들다 투덜거리기 일쑤다. 대놓고 막말 나올까봐 오히려 내가 참아야 했다. 아마 이런 놈이라도 없으면 사람이 부족해서 남은 사람들이 힘들어질 테니 참으려 한 것이겠지. 


결국은 그 사고로 인해 일만 더 힘들어졌다. 서로 편의를 봐주던 것이 더이상 편의를 봐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규정대로 돌아가면 오히려 불리한 것은 우리들이다. 회사를 탓하기 전에 적당히 타협하며 그나마 덜 힘들도록 편의를 봐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서 사고를 쳐 버렸다. 회사 쪽에서는 더이상 봐 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단지 일이 힘들어졌다 회사만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모두가 그리 말하는데 왜 너만 달리 말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간단한 비유로 학교 다닐 때 시험을 치고 나면 자기들끼리 답 맞춰보고는 몇 점 맞았다 좋아하는 머저리들이 있었다. 서로 틀린 답을 맞추고는 그 답을 전제로 자기들끼리 채점하고 좋아한다. 심지어 그 답은 문제를 낸 선생이 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책임지면 된다. 내가 잘못한 만큼 내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먼저 그럴만한 위치에 오르고 나서 그런 말도 해야만 한다. 주제도 안되면서 확신만 넘친다.


블로그질하면서도 그래서 친목질은 아예 하지 않는다. 다른 블로거가 누가 있는지 관심도 없고 알아도 찾아가서 댓글을 남기거나 하지 않는다. 여기 누가 댓글을 남겨도 그냥 읽고 무시하고 지나간다. 글은 내가 쓰지만 결론까지 내가 내리는 것은 아니다. 나의 답이 틀릴 수 있다. 그것을 내가 이렇다 저렇다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쓰고 찾아오는 사람은 그저 읽는다. 거기에는 어떤 관계도 친목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야 최대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누구의 주관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보다 객관적인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최소한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들만큼은 그저 친분을 과시하기 위한 댓글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사납고 적대적인 댓글이 오히려 많으면 많았지.


아침부터 카톡이 시끄럽다. 어제 저녁부터 시끄러웠다. 그냥 잘라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내가 일하면서도 일정 이상 동료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이지 친구가 아니다. 형제도 아니다. 그래서 나이나 경력과 상관없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옳게 지시하고 가르칠 수 있다. 그래서 대개는 나더러 싸가지없다 욕하는 모양이지만. 피곤하게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쉽고 편한 일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에는 신성부대라는 이름의 동성애자로 이루어진 정예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고작 300명 정도였는데 바로 이들의 힘으로 군사강국이던 스파르타를 전투에서 물리치고 그리스의 패권을 잡고 있었다. 당연하다. 일부러 병사들의 전우애를 북돋기 위해 자살부대까지 운용하는 경우마저 있는데 이들에게 전우란 곧 목숨바쳐 지켜야 할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물론 신성부대라는 이름 만큼이나 이들이 군사훈련에 매진할 수 있도록 여러 배려와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바로 인류에게 동성애가 필요했던 이유다.


자연상태에서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다른 남성은 경쟁자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은 어떻게든 최대한 많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으로 남기고 싶어 하고, 여성 역시 어떻게든 더 우수한 남성의 유전자를 받아 더 유전적으로 훌륭한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연에서도 보듯 그같은 경쟁은 동성간에 파멸적인 투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 그나마 다른 종들은 경쟁자와 싸워 이겨서 물리치는 정도로 끝나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는 잔인성은 그런 정도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당장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학살들만 보아도 그렇다. 신체적으로 다른 동물들보다 우월한 부분이라고는 지구력 하나밖에 없던 상황에서 그런 식으로 개체수가 줄고 집단이 해체되면 인간의 생존 자체에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동성간 경쟁은 하면서도 집단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한 마디로 번식을 포기한 일벌들과 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벌집 안에서 혹시라도 여왕벌의 수명이 다하거나 해서 더이상 번식을 할 수 없게 되면 일벌 가운데 로얄젤리를 먹고 일벌을 생산하는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일벌이라고 아예 번식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종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 다수 일벌들이 생식을 포기하고 단일 개체의 생식을 돕는 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개미는 바로 이 벌로부터 진화한 곤충이다. 집단을 유지하는데 있어 경쟁자일 수 있는 번식가능한 개체만 무작정 늘리는 것보다 그들이 안정적으로 번식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개체 또한 존재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그를 위해서 생식기관 자체가 퇴화하는 것도 한 방법일 테지만, 그보다는 성적인 역할 자체에 변화를 주는 것도 매우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 바로 이들을 통해서 생식을 하고 번식을 꾀할 수도 있다.


어째서 인간의 유전자에 동성애 유전자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최근의 이론이다. 여성에게 있어 남성간의 경쟁은 더 우수한 유전자를 고르기 위한 선별의 과정일 뿐이다. 남성의 입장에서도 여성의 경쟁이란 더 생존에 유리한 후손을 남길 수 있든 개체를 고르는 과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성의 경쟁에 직접 관여하여 중재에 나선 경우가 매우 드물다. 오히려 그것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같은 극한의 경쟁으로부터 번식할 남성과 여성들을 보호하고 보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동성애의 유전자를 가진 남성과 여성들은 동성인 다른 남성과 여성들을 경쟁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자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정의 대상으로 여겨 보호하려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런 동성애자들의 동성에 대한 애정을 통해 번식을 위한 극한의 경쟁 가운데서도 더 많은 개체들이 효과적으로 보호받게 된다. 어쩌면 이들 동성애자들로 인해 인간은 그 혹독한 환경에서도 집단을 유지하며 개체를 번식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었다면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상 벌써 오래전에 인간은 경쟁으로 인해 자기 손으로 자기 종을 절멸했을 가능성마저 높다.


그러니까 동성애란 인간이라는 종에게 있어 아주 자연스런 현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여러 성소수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일반적 개체들과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는 만큼 동성과 경쟁하지 않으면서 집단을 유지하고 종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성소수자의 유전자도 인류의 번성과 함께 지금까지 널리 유전되어 온 것이었다. 성소수자에 있어 인종의 차이란 없다. 민족의 차이도 없다. 인종이 갈라지기 전부터 인간에게는 성소수자의 유전자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째서 왜 그런 것일까? 이성과의 일반적인 성행위가 불가능한 특성이란 번식에 있어 매우 불리한 조건일 텐데도. 하지만 분명 아주 오래전에는 동성애의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가지지 않은 개체가 나뉘어 존재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 개체들은 동성애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중이다. 어느 쪽이 더 생존에 유리했겠는가. 물론 그럼에도 자연상태에서 동성애 유전자가 발현되기란 매우 확률이 낮은 편이다.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 자신은 번식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았을 테니.


어느새 잊고 있는 것이다. 과거 남성을 사랑한 남성들이 위험한 사냥터에서 어떤 식으로 같은 남성들을 지켰었는지. 여성을 사랑한 여성들이 어떻게 같은 여성과 아이들을 보살피고 도왔었는지. 그렇게 도움을 받았던 이들의 후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집단이 그동안 너무 커졌으니까. 동성간의 경쟁이란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개체수도 들었고, 굳이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그를 대신할 윤리와 가치가 생겨났다. 망각의 산물인 것이다. 병도 죄도 악도 아닌 그냥 망각이 그들의 소중함을 잊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들에게 크게 빚져왔다. 물론 아직 가설이다. 나는 지지하지만.

오래전 보았던 어느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다. 당시 고 구봉서씨가 한의사를 연기했었는데 환자를 앞에 두고 장기만 두는 이상한 한의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려 세 판이나 마저 장기를 두고 나서야 네 번 째 진료에서 구봉서씨는 이리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위가 헐었네."


고작 그 말 한 마디 하려고 이리 시간을 끌었는가? 자꾸 편견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마음이 이리저리 쏠리는 것이 느껴져서 장기를 두어 마음을 정리하고 세 번이나 더 진찰해서 겨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시경으로 했으면 바로 나왔을 진단이기는 했다. 차라리 조선이 배경이었다면 더 그럴싸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오히려 확신에 찼을 때 나는 회의한다.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을 때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천천히 고민한다. 그래서 내가 글이 늦다. 남들 다 결론을 내리고 나서도 여전히 혼자서 고민 중이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때가 확신에 찼을 때다. 역사상 수많은 범죄들이, 아니 범죄를 넘어선 죄악들이 바로 그런 확신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확신에 필요한 것은 그 확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다. 먼저 결론을 내리는데는 근거가 필요해도 일단 결론을 내리고 나면 근거따위는 필요없다.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맞는 근거들만 취사선택하면 된다. 혹시나 나는 그러지 않는가.


남들이 뜨거울 때 오히려 나는 차갑다. 남들이 열심일 때 나는 오히려 게으르다. 인터넷의 장점이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그렇게 냉정하게 거리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 한 바탕 뜨거워졌구나. 그래서 차갑게 타자가 되어 그것을 지켜본다.


대중을 믿지 않는다. 벌써 몇 년이 지났다. 타진요 사태 때 그 잘난 네티즌들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를 기억한다. 언론이 먹고 사는 것도 그런 선동에 잘 넘어가는 대중이 있어서다. 대나무 그림자만 비쳐주면 알아서 칼인 줄 알고 신방을 뛰쳐나간다.


역시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그것이 문제라면 드루킹은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유력 인사들이 직접 메신저도 주고받고 심지어 강연까지 했던 이들마저 있다. 정황은 정황일 뿐 증거가 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뭔가 새로운 게 있는가 싶었다. 난감하다.

흔히들 말한다.


"모르고 그런 건데 어쩌겠느냐?"

"알면 설마 그랬겠느냐?"

"알면서도 그랬으니 더 나쁘다."


과연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선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5가지 욕구중 3번째 인정의 욕구에 해당한다. 선하다는 것은 집단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이고 지독한 악당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주위에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그런데 어째서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은 그런 나쁜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


결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와 목적을 위해 잠시 양심을 접어두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합리화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차피 그리될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필요만 사라지면 어떤 범죄자도 악당도 다시 선량한 사람으로 돌아온다. 밖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가 집에서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가장이 되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래야 할 필요 자체가 사라지면 알면서 나쁜짓을 저지르던 사람은 그러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자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나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기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평가할 능력 자체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동기도 이유도 없이도 그들은 쉽게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된다. 필요가 사라지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 일반이 선하다 여기는 행위가 무엇인지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나쁘다 여기는가도 마찬가지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부모로부터 배우고, 조금 더 자라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주위사람들과 소통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정보들이 있다. 바로 상식이라는 것이다. 은행은 몇 시까지 문을 여는지,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체크카드를 쓰려면 자정 무렵은 피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범죄가.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다. 그런 나쁜 짓을 해서는 안되고 만일 했다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려 하지 않은 것이고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무지를 가장 큰 죄라 여기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고 무엇이 나쁜지도 모른다. 분별없이 그저 본능이 시키는대로만 행동에 옮긴다. 그러고서도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반성조차 없다. 최소한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아무리 나쁜 놈들도 자기가 나쁜짓을 저질렀다는 자각 정도는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마저도 거의 없다 보아야 할 것이다. 반성을 하지 않으니 결국 다시 반복된다. 자각이 없으니 멈추지도 않는다. 과연 무엇이 더 나쁘다 할 것인가.


사이코패스가 달리 사이코패스가 아닌 것이다. 자기가 하는 행동이 악이라는 자각조차 없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는 의식조차 없다. 무심하게 행동에 옮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그저 냉정하기만 하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다. 제한도 없고 한계도 없다. 무지한 자가 죄를 저지르면 그래서 무섭다. 차라리 합리화할지언정 결코 사과도 반성도 후회도 하지 않는다. 절대 바로잡는 법이 없다.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던 당연한 상식이다. 알 수 있는 것을 끝내 모르고 행동으로까지 옮겼다. 무엇이 더 큰 잘못인가. 인간의 양심은 의지다. 의지는 행동을 수반한다. 거역할 얌심조차 없다. 차라리 알고 저지르던 인간들이 모르게 되어간다는 쪽이 옳을 정도다. 분명하다.

간단히 장사를 하는데 실수로 500원짜리 물건에 5000원짜리 가격표를 붙였다. 누군가 그 가격표를 보고 500원짜리 물건을 사면서 5000원을 지불한다. 그러면 장사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먼 나중은 생각지 않는다.


물에 빠졌다. 가방 하나가 마침 물살에 휩쓸려 바로 앞에까지 떠밀려 와 있다. 가방에는 한 사람만 겨우 매달릴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친형제가 가방을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다. 만일 자신을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그때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겠는가?


독일인들은 합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자신들이 만든 차의 연비를 그토록 철저히 속이고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면 묻고 싶다. 만일 자신이 그 기업의 경영자이고 임원이고 기술자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신들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이겠는가?


당장 아버지가 매를 들고 달려오면 살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의심해서 따져묻는데 거기서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합리와 도덕은 원래 전혀 다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해하는 부분이다. 합리를 정의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인과다. 들어온 원인과 나가는 결과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 그 값을 계량한 것이 바로 합리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이익일 것인가. 반드시 자기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직장이나, 혹은 특정한 지역이나, 국가, 결국 단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 어떤 계산을 해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답이 나올 것인가. 


바로 거기에서 20세기 초중만 인류사회를 휩쓸었던 파시즘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로지 기계적으로 결과에 대해 계산하려고만 할 때 인간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장애인을 굳이 보호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더이상 쓸모가 없는 노인들을 공경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느가. 여성은 그저 아이만 잘 낳아 기르면 나라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이다. 필요없는 것은 배제하고, 효용이 떨어지는 것은 수정하고,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주저없이 그것을 선택한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수용소에까지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을 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도 고민하지 않는다. 기왕에 죽일 것이면 어떻게 죽일 것인가만을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노력으로 더 쉽게 더 빠르게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더 효율적으로, 더 쉽게, 더 편하게, 더 빠르게, 더 능률적으로, 근대 이후 인류의 문명이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파시즘에 대한 반성은 정확히 이성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합리에 대한 반성이다. 사람들이 이성이라 믿었던 비이성에 대한 반성이다. 세상은 인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과의 한가운데 인간이 있다. 후기구조주의는 바로 그 개별의 인간에 집착한다. 정신분석학마저 일반화된 정신분석이론을 거부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이 세계는 거대한 계산기가 아니다.


즉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과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전혀 별개라는 것이다. 도덕에서 말하는 이성은 선험적인 판단하는 이성이다. 합리에서 말하는 이성은 단지 기계적인 계산하는 지능에 불과하다. 조직폭력배가 이익을 위해 무고한 개인을 협박하고 갈취하는 것은 분명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 그러나 조직폭력배 개인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결정이다. 그러는 쪽이 자신에게 더 이익이 된다.


사람들은 때로 말한다. 그러는 것이 모두에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굳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 손해보는 선택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양혜왕이 물었다. 과연 당신이 이 나라에 와서 무슨 큰 이익이 되겠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오로지 인의가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는, 그리고 바로 여기 우리들이라는 편협함을 버렸을 때 당장의 손해가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역시 도덕과 합리의 차이를 가장 잘 갈파한 한 마디라 할 수 있다.


도덕의 이성은 보편의 세계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에 굳이 구분을 두지 않고 모든 시간과 공간에 두루 존재한다. 그렇게 여긴다. 그것을 느끼는 감수성이다. 그에 비해 합리의 이성은 개별적 존재에 귀속된다. 당장 나의 처지. 우리의 형편. 모두의 이익. 단지 그 범위가 합리의 범위를 정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서 그래서 때로 도덕과 합리는 만날 수 있다. 아니 그것이 옳다. 원래 인간의 이성이 정의를 추구한 것은 그를 위한 것이었으니.


도덕적인 인간은 합리적인가? 의외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반대로 부도덕한데 합리적이라 하면 반발하게 된다. 합리적인데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말하면 이상하게 여긴다. 도덕이 자신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안다. 자신에게 도움되는 것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인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의외로 모든 경우 매우 합리적이다. 인풋과 아웃풋을 맞추는 본능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사회가 유지된다.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와 상관없이. 그리고 무한의 시간 속에서 평가받는다. 먼 훗날의 평가도 자신들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는가. 역사의 무서움이다. 인간의 무서움이다.

여러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를 보았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여자를 구한다. 아니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여자의 위험을 외면한다. 과연 무엇이 이성이고 무엇이 감정일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일까? 


본능으로 안다. 직관으로 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자신에게 해가 되는지. 단지 알고 난 뒤에 이유가 따라붙을 뿐이다. 어째서 옳은가. 어째서 틀렸는가. 무엇이 이익이고 무엇이 손해인가. 그래서 그것들은 사실인가. 의심없는 진실인가.


어쩌면 이성처럼 사람에게 많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합리화라 말한다. 합리가 아니다. 정당화라 말한다. 정당이 아니다. 논리는 인간이 가진 고도의 지적활동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옳았고, 그러므로 손해였다. 이유가 판단을 결정한다.


강간은 나쁘다. 강간당하는 여자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여자를 도우려다가는 강간범들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다. 강간범들을 물리치고 여성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내 힘이 못미치므로 나라도 살아야겠다. 그래서 틀렸는가.


EU체제에 대한 영국인들의 불신은 그동안 축적된 경험의 결과다. 실제 자신이 경험한 현실들의 누적이다. 그러므로 EU체제는 잘못되었다. EU가 자신들의 삶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 다만 그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고 빠른 답을 찾는다. EU에서 탈퇴한다.


이미 여러 매체들을 통해 어째서 많은 영국인들이 EU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는가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다. 그래서 의미가 있다. 무엇이 영국인들로 하여금 EU를 불신하고 EU에 반감을 가지도록 했는가.


실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모든 대중의 판단은 옳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인간을 긍정함으로써 그 이유를 보다 객관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직관은, 본능은, 인간을 이루는 이미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영국인들은 어리석은가. 브렉시트에 찬성한 영국의 대중들은 지적으로 열등한 대상들인가. 그런 섣부름이 정작 중요한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이들이 원하지 않았던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는가.


아마 저 맨 위의 물음은 앞으로도 몇 번 더 인용될 것이다. 아주 오래전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화두였다. 어느 정도 답을 찾은 듯하다. 인간은 정의로운가. 인간은 이성적인가. 인간은 동물이기 이전에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것은 악이고 반대하는 것은 선인가. 전자는 감정이고 후자는 이성인가. 전자는 무지이고 후자는 지성인가. 인간을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다면 세상에 혼란 따위는 없다. 냉정해진다. 흥미롭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는 불인하다 말한 바 있었다. 인仁이란 곧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해량할 수 없는 의지가 깃들어 오히려 마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날 전혀 의도치 않게 고양이와 동거하게 되면서 문득 깨닫게 된 것이다.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고양이는 나와 전혀 별개로 존재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의도는 아랑곳없이 고양이는 고양이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받아들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고양이를 버리게 되더라도 고양이는 결국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은 아닐까?


쉽게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혹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다. 자신의 인지가 닿는 범위까지 결국 인식하게 된다. 의식하게 된다. 그 연장에서 인지를 넘어선 미지를 인식하고 의식한다. 모든 것이 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의 논리와 의도가 모든 것과 상호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가 내리는 것도, 바람이 부는 것도, 태풍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우주에서 신성이 폭발하고 유성이 떨어지는 것까지. 오히려 오래전에는 그런 것이 더 당연했다. 일상을 벗어난 현상에는 분명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나무를 심겠다고 땅을 파는데 정작 그 땅에 살고 있던 개미에게까지 그같은 의도가 전해질 것인가. 인간은 나무를 심지만 개미에게는 그저 살던 집이 어느날 느닷없이 부서지는 재앙이 닥쳤을 뿐이다. 인간이 나무를 심은 것이지만 살던 집이 부서진 자리에 난데없는 나무가 자라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어떤 의지도 의도도 개미를 위해 있지 않다. 개미에게 닿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인간은 개미에게 무심한 것이다. 설사 집을 잃고 헤매는 개미들이 불쌍하다고 구해주려 하면 그 마음은 개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인간은 작다. 그리고 무지하다. 무능력하다. 당장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이미 존재한다. 그것마저 모두 이해하려는 것은 오만이고 만용이다. 사실 거기서 모든 문제들이일어난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억지로 이해한다. 결코 이해할 수 없는데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고 만다. 비틀린 인과를 억지로 끼워맞춘다. 이를테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넘치면 자르고, 모자르면 늘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고통받고 희생당하더라도 자기의 직관에 딱 들어맞는 결과가 아름답다. 인간이 세계를 파괴하게 되는 이유다.


그냥 존재한다. 그냥 일어난다. 그래서 알 수 있는 만큼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한다. 동양과 서양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차이였다. 신은 해량할 수 없다. 신의 의지를 계량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은 신의 것으로 내버려둔다. 인간의 인지와 의지가 부족함을 인정한다. 무모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억지로 이해하려 허구의 개념들을 만든다.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안주하게 된다. 천지는 무심하다. 자연에는 인간의 정이나 마음이 없다. 무심하게 그저 별개의 독립된 존재로서 받아들인다. 과학의 시작이다. 현상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어째서 진화론이 그토록 어려운가. 진화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많은 경우가 결국 인간의 존엄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다. 존엄하다고 반드시 필연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존엄과 인과 역시 단지 별개로서 존재한다. 다른 과학의 분야도 마찬가지다. 과학은 인간을 위해 있지 않다. 과학은 오로지 과학으로서만 존재한다.


어느날 사고가 일어난다. 전혀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고, 누구도 잘못하거나 실수하지 않았다. 누구도 원인이 아니었고 책임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일어났다. 이미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신은 필요하다. 아무라도 아무것이라도 대답은 필요하다. 답을 구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간은 너무 가혹하다.


어쩌면 이것이 부처가 말한 입멸인지도 모르겠다.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이다. 자신은 독립된 유일한 주체이며 객체다. 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순간 자신은 객체가 된다. 독립적으로 작용한다. 인과는 단지 우연일 뿐이다. 누구로부터도 무엇으로부터도 비롯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조차 우주에 비하면 너무 짧다. 인간의 삶에 있어 천 년도 아득하게 긴데, 지구의 시간으로는 백만년도 너무 짧다. 우주의 시간으로는 수억년은 거의 금방이다. 수백억년의 시간 속에서 고작 수십년이다. 차라리 막막함을 느낀다. 무모하며 무지하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냥.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아주 작다. 지구도 아주 작다. 심지어 태양계마저 아주 작다. 인류가 - 아니 생명이 지구상에 타나난 시간도 아주 짧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다. 인간은 매우 특별한 존재다. 생명이란 매우 특별한 의미이며 가치다. 우주적인 스케일에서 지구와 인간을 살펴본다. 생명의 존재와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과연 수백억광년의 우주에서 먼지와도 같은 지구위의 어떤 현상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이 지금까지 알려진 물리법칙을 거스를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어차피 태양계를 벗어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은하계도 언감생심이다. 빛조차 닿지 않는 먼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인간이 우주적 규모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의식을 확장해간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우연이다. 무한에 가까운 우주에서 아주 우연히, 어쩌면 어디선가도 같은 과정이 일어났을 우연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마치 얼굴에 난 여드름처럼. 팔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그렇게 접근하면 진화란 매우 이해하기 쉽다. 진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진화라는 과정으로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존엄을 설명할 수 없기에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조차 때로 너무 하찮기만 하다.


무한이다. 가끔 상상해 본다. 먼 우주로 나간다. 별조차 없는 막막한 공간과 시간에 자신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본다.


별로 대단한 게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의식 안에서 인간은, 그리고 생명은 대단하다. 인간에게 대단하고 특별하다. 아마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태양계는 커녕 자기가 사는 동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진화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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