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왕 선조가 이후 조선의 역사에 끼친 가장 큰 해악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기축옥사를 첫손에 꼽는다. 사실 이순신을 죽이려 한 것도 그럴 수 있다 보고, 아예 일본군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가려 했던 것도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다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이순신을 고문했지만 아예 죽이지 않았기도 하고,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맞아서도 왕권을 지키면서 복구까지 국정을 나름 잘 수행하기도 했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안되었다는 부분도 당시 10만이 넘는 병력을 바다 건너로 투사할 수 있는 나라가 드물었었고, 지리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일본이 조선보다 영토도 크고 인구도 많다는 사실을 일본조차도 아직 알지 못하던 때이기도 했다. 오히려 진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면 바로 기축옥사일 텐데...

 

기축옥사 이전까지 조선조정에서 당쟁이라고 해봐야 서로 무리를 지어서 상대의 뒷담화나 하고 조정에서 논의할 때 상대의 논리를 깎아내려 우위를 점하려는 정도였다. 그렇게 국왕의 신임을 자신들에게 돌리고 상대정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서 더 많은 좋은 관직을 자기들이 가지고 싶다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고 있었다. 일단 연산군 때부터 수도 없이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죽어나간 선비들이 당시 조정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림 자신들에게도 스승이거나 선배이거나 일문이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인 가운데 누군가는 연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사림 자신이 대개 학맥을 따라 나뉜 경우라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단한 학자를 배경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유학자로서 딱히 그 이상의 적대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도 했었다. 그런데 선조가 갈수록 비대해지는 신료들의, 정확히 사대부들의 힘을 꺾기 위해 송익필의 무고를 빌미로 정여립의 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부터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송익필이 정여립을 무고한 이유부터 노비로써 자신의 주인을 무고하여 몰락케 한 가문의 범죄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존경받는 유학자에서 노비로 신분이 추락한 데 대한 보복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선조가 정여립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까지 섞어서 크게 옥사로까지 이어지면서 당연하게 증오와 혐오와 경멸이 더해진 크나큰 피바람이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 몰아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때도 선조는 역적에게 자비는 없다며 그동안 늙은 여인이나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는 고문하지 않던 전례까지 무시하고 연루된 사대부들의 늙은 어머니나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까지 고문하게 하는 등 상황이 더 극단으로 치닫도록 부추기고 있기도 했었다. 실제 사화라고는 하지만 연산군 때부터 정작 죄를 지었다는 사대부들 자신은 죽거나 귀양을 갔더라도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일가족까지 고문받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었다. 그런데 기축옥사에 이르면 그런 것 상관없이 아예 호남에서는 사대부의 씨가 말랐다 할 정도로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 그 희생자만 물경 천 단위를 넘어갈 정도였었다. 괜히 조선의 유학사를 이야기할 때 호남 유림은 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때 가장 큰 희생자를 냈던 것이 바로 호남유림이었었고, 그 결과 아예 그 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호남유림은 조선사회에서 주변으로 내몰리게 되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렇게나 크게, 그것도 전례없이 잔혹하게 피바람이 분 결과 조선의 유림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의 골이 패이기 시작했다.

 

조선 광해군 때 북인들이 당시 기축옥사에서 선조의 의도대로 남명 조식의 학맥들로 이루어진 호남의 유림을 절딴내는데 앞장섰었던 서인은 물론 그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남인들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였었다. 아니 그 전에 이산해는 세자의 책봉을 둘러싸고 정철을 꼬드겨서 나서게 한 뒤 바로 뒤를 쳐서 그를 모함해 귀양을 가게 한 전력이 있었다. 이때도 선주는 이미 쓸모가 다한 정철을 제거하고 조정에서 힘을 얻기 시작한 서인을 누르기 위해 이산해의 모함을 기꺼이 이용해주는 면밀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아예 서인 전부를 호남의 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씨몰살하려 했던 이산해의 의도를 선조의 뜻을 받든 류성룡이 막아서면서 다시 동인 안에서 북인과 남인이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피로써 쌓은 원한이니 피로써 씻어야 한다. 서인이 집권하고 북인은 아예 조정에 출사조차 못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칠순을 넘기면 사사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또 깨고서 서인이 정인홍을 사사하여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여기가 당쟁의 1막이다. 인조반정이 비단 인조 개인의 왕위에 대한 욕심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튼 그렇게 선조가 씨앗을 뿌린 피로 피를 씻는 증오와 원한에 의한 당쟁이라는 줄기는 다시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적장자로 즉위하면서 정통성에 대해 감히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었던 숙종대에 다시 크게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즘 자칭 중도들 사이에서 꽤나 현명한 투표방식으로 회자되고 있는 환국이었었다. 처음에는 서인으로, 그 다음에는 남인으로, 그러다가 다시 서인에게로, 그러면서 그때마다 상대 당파의 중요인물들을 죄다 죽이고 귀양보내고 하다 보니 학연과 혈연으로 이어진 당파 사이에 원한과 증오가 쌓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 더 악착같이 상대 당파를 죽이고 벌주고, 그러니까 더욱 그 복수를 위해서라도 왕에게 잘보이기 위해 경쟁하면서 상대 당파를 죽이고 벌주려 하고,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상대 당파가 인정하는 왕은 자기 당파에서 인정할 수 없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인좌가 노론의 당여이기도 했던 영조를 인정하지 못했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나, 노론의 선비가 경종은 자기들의 왕이 아니라면서 그 능 앞을 말을 탄 채 지나간 사건들이 그 결과인 것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환국이 정작 너무 깊이 패인 원한의 골로 인해 왕마저 무시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괜히 영조가 탕평을 내세운 게 아니란 뜻이다.

 

너무 서로 죽고 죽이다 보니 그 원한으로 인해 왕마저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당파간의 결집이 강해지면서 신하로써 충성을 바쳐야 할 왕마저 그 이후로 밀리는 상황마저 벌어지게 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서도 구선복을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보내야 했던 이유였다. 오히려 사저에 있으면서 노론과 자주 교류했었기에 영조 자신이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노론에게 경종은 왕이 아니었고, 소론에게도 영조는 그러했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조정 안에 두 당파가 공존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앞에서 충성을 경쟁하도록 몰아갔던 것이었다. 바로 기축옥사 이전 선조의 조정이 그러했었다. 돌고 돌아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정작 왕권을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는 자신의 친위세력을 만들려다가 세도정치의 판을 깔아주고 말았었으니...

 

바로 주권자로서 중도적인 국민들의 가장 현명한 투표방식으로 극찬받는 환국투표의 현실일 것이다. 환국투표의 전제 자체가 그렇다. 정치인들은 모두 썩어 있고 믿을 수 없으니 매번 정권을 바꿔주어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정책의 일관성이고 나발이고 얼마나 좋은 정책과 인물로 정당들이 경쟁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죽임으로써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대립하고 대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 깨끗해진다. 하지만 그같은 복수의 정치에는 결국 국민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실컷 정치보복하고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다가 다시 내어주려 하니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 헌법마저 무시하는 상황이 바로 그 예일 것이다. 인물이 좆같고 정책이 똥같으면 조금이라도 나은 정당에 계속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조금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으면 그를 심판하기 위해서 죽일 수 있는 상대정파를 인물도 정책도 따지지 않고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그 결과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어도 역시나 그렇게 투표하도록 만든 상대 정당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야말로 무오하다는 전제왕조의 군주나 쓸 법한 논리 아니던가.

 

조선시대에 환국이 가능했던 이유는 어찌되었거나 당시 조선에서 주권자는 국왕 자신이었고, 따라서 국정 또한 국왕 자신이 주도해서 직접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바뀌지 않고 행정부와 국회만 바뀌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 대통령까지 바꿔 버린다. 내정이고 외교고 죄다 내다버리고 그냥 서로 죽고 죽이는 일에만 몰두하도록 의도적으로 유권자가 몰아가 버린다. 그것을 현명한 투표고 올바른 정치라 여긴다. 이번에는 문재인과 이재명 감옥에 보냈으니 다음에는 윤석열과 김건희 감옥에 보내자. 교육을 탓하기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이 대개 특정 세대 특정 성별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그냥 미친 것이다. 대가리가 썩은 것이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정치가 곧 현실이라는 자각이 없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삶까지 정의할 수 있다. 당장 내 월급과 내 일하는 환경과 조건과 직접 닿아 있을 것임에도.

 

아직 문재인과 이재명을 감옥에 보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대선을 치르면 이재명이 나오게 될 것이다. 현재 계엄에는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는 이들의 논리일 것이다. 아직 환국이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환국을 할 수는 없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아, 드라마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왕권강화는 선이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악이다. 정치란 곧 신하들이 하는 짓거리와 같다. 당시의 당파싸움과 같다. 자기들이 왕이라 여기는 것일까?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아직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새삼 가르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 자란 어른의 생각을 어찌 바꿀까? 한심스러운 것이다.

전근대 왕조들을 보면 어쩌다보니 왕이 되었기에 그냥 왕위를 지키고 있었을 뿐인 경우를 아주 넘치도록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삼국지에서 암군으로 이름높은 유선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하필 아버지가 유비였다 보니 철도 들기 전에 태자가 되었다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황제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고명을 받든 제갈량이라는 신하가 아버지의 유명을 받들어야 한다며 북벌까지 추진한다. 그 뒤를 이은 장완도, 동윤이나 비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황제가 되고 한실부흥의 대의를 받들게 된 모든 과정이 유선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의한 것이었는가.

 

유선이 항복하는 장면을 보면서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진짜 황제노릇 하기 싫었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황제라는 게 보기에는 좋을 지 몰라도 황제로서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황제에게는 평범한 개인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친구나 가족과 같은 것들이 없었다. 황제에게 황후는 아내가 아니었고 태자는 아들이 아니었다. 신하는 더욱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역사상 많은 황제들이 환관에 의지했던 것이었다. 마음붙일 곳이 없는 황궁에서 환관은 황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시피 했었다. 

 

그러면 과연 유선만 그랬었는가? 중국 명왕조에 이르면 그냥 아예 대부분 황제들이 그 꼬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수 십 년 동안 아예 조회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암군 만력제서부터, 목공에 심취해서 국정따위 환관에게 맡겨 버렸던 천계제라든가, 코스프레하느라 정치따위 안중에 없었던 정통제, 그리고 그 모든 서막을 열었던 세종 가정제까지. 그렇다고 이들이 자신의 황제 자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느냐면 사실 그보다 좋은 자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황제에서 내쫓기면 그 처지가 차라리 평범한 백성들보다도 더 비참해진다. 대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그것만 잘 지킬 수 있으면 조금 외로운 것 빼고는 하고 싶은 건 거의 다 해 볼 수 있다. 딱히 황제의 자리를 자기 손으로 박차고 나올 이유가 없기에 주위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반란군을 토벌하고 역적들을 주살하며 황제의 자리를 지키고는 있는데 그러나 딱히 그것으 무언가를 해 보려는 의지도 동기도 없다. 그래서 암군이다. 무능해서도 암군이지만 뭔가를 해 보려는 의욕 자체가 없어서 암군이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럽의 왕들은 그래서 허구헌날 하는 것이 파티고 사냥이고 기사시합이었다. 하긴 유럽의 군주들에게는 딱히 백성들에 대한 책임같은 것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백성은 단지 군주의 소유물일 뿐이었고, 군주의 통치행위란 자신이 물려받은 군주라는 자리와 그에 딸린 것들을 지키고 늘려가는 일련의 행위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럽의 역사를 보면 그나마 군주들이 의욕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라는 게 남의 나라와 전쟁을 해서 영토를 빼앗거나, 혹은 자신의 혈통에서 비롯된 권리들을 쟁취하고 지켜내는 것들 정도였다. 그마저도 자기가 귀찮으면 안하고 놀기만 해도 된다. 매일 궁정에서 파티나 열고, 사냥이나 다니다가, 혹은 직접 기사시합에 참여하기도 하고, 괜히 예쁜 여자 있으면 애첩으로 삼기도 하고. 그를 위해서 필요하면 그때그때 자신의 소유로 있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기 위한 결정들을 내린다. 그래도 되었던 이유는 당시 유럽의 군주들이 거의 그러했으니까. 그래서 세계사시간에 배우는 유럽의 역사에는 군데군데 빈 자리들이 오히려 더 길고 많다. 사실상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왕들의 자리다.

 

정도전이 재상총재제를 주장한 이유였다. 아니 이전부터도 사대부들은 그와 같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송대와 원대를 거치면서 자신도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한고조 유방과 촉한의 선주 유비가 그저 신하들의 능력에 기댈 뿐인 인물들로 묘사되기 시작한 이유였다. 그러니까 군주는 그저 덕을 가지고 군림하며 모든 정치는 그의 신임을 받는 사대부인 대신들이 전담한다. 황제에게만 모든 국정을 맡기기에는 함량미달인 놈들이 역사에는 오히려 더 많았다는 것이다. 당나라만 해도 그나마 쓸만한 황제는 태종과 고종, 현종 딱 셋이 전부이고, 그나마 고종과 현종은 말년을 그대로 말아먹었었다. 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송나라 휘종이라는 놈은 차라리 예술가로 태어났으면 족했을 놈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들을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그냥 황제의 자리에 올렸으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 있나. 그렇다고 능력을 따져 자리를 물려받게 하면 로마 꼴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위는 알아서 핏줄을 따라 물려받고 다스리는 건 검증된 사대부가 하겠다.

 

결국 영국이 채택한 입헌군주제도 같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왕이란 놈들이 능력은 둘째치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의지나 동기조차 가지지 못하는 놈들이 태반이니 그럴 목적과 동기를 가지는 이들이 국정을 책임지고 왕은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으라. 역사를 보더라도 단지 핏줄만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놈들치고 변변한 놈이 없고, 그런 놈들로 인해 왕조가 한 번 휘청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었다. 지금 전세계에서 혈연에 의해 권력을 세습하는 왕조국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다.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핏줄만으로 왕위를 물려받게 하면서 권력까지 쥐어주면 나라 씹창난다. 그러니 왕위는 혈연으로 물려주더라도 다스리는 건 다르게 하자.

 

그냥 삼성 돌아가는 꼬라지 보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사실은 유선에 대해 쓰다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이재용은 꼭 유선과 같다. 집안의 가업이니 삼성을 물여받아야겠고, 아버지의 유산이니 회장자리에도 올랐지만, 그러나 과연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총수로써 이재용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진정 무엇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고 싶은 것인가? 그러면 차라리 물려받은 삼성전자라도 잘 꾸려가야 할 텐데 딱히 거기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 그런 때 신임받는 측근들이 날뛰기 딱 좋다. 오너는 자리만 지킬 뿐 관심이 없을 때 바로 그 측근들에서 그 권위를 등에 업고서 마음대로 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건 보잉이나 인텔보다 더 최악인 경우다. 보잉이든 인텔이든 도저히 안될 것 같으면 주주들이 경영진을 갈아치울 수 있지만 삼성은 오너가 모든 판단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재용에게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을 이끌어갈 능력을 넘어 그러고자 하는 의욕이라도 있기는 한가.

 

혜강 최한기가 미국의 대통령제에 대해 들었을 때 만국의 공법에 맞는다며 극찬한 바 있었다. 천하는 대동으로 모두의 소유인데 단지 핏줄로써 왕위를 물려받는 것보다 백성들이 뜻을 모아 그때그때 걸맞는 대표를 뽑는 것이 유학의 가르침에 비추어도 지극히 옳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망명지에서 출범했던 임시정부의 이름이 대한제국이 아닌 대한민국이 되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디즈니든 휴렛팩커드든 MS든 창업자나 혹은 그 후손인 대주주가 있음에도 전문경영인에게 모든 판단을 맡기는가. 답답한 것이다. 심지어 이재용이 가지고 있는 삼성의 지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오너의 판단이 한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일하는 직원들 수 십만과 돈을 투자한 주주들의 이익까지도. 무서운 일이다. 당사자에게는 아닐지라도. 생각해 볼 일이다.

평소 장르소설을 즐겨 읽는 편인데 요즘 지뢰를 계속 밟고 있는 중이다. 사이다라 해서 봤더니만 이게 왜 사이다?

 

이를테면 던전 안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았다. 예전 같으면 일단 구해주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히 구해준다고 했다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을 지 모르므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다. 더 압권은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동정은 사치라 말하는 부분이다. 아니 그냥 잠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미안하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속으로만 감정을 가져보는 것이 뭐가 그리 사치라는 것일까?

 

더 심한 것은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없다면 그냥 떠나간다. 능력이 없으면 죽는 것이 옳다. 내 능력을 호구처럼 공짜로 남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 몬스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지금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면 호구처럼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내 가족들만 챙기겠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불행은 외면하겠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나아가 나는 고구마가 아니다.

 

실제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하는 말이다. 괜한 인정이나 동정에 휩쓸려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고구마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등치고 저버리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해도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주위만 챙기는 사이다다. 사이다의 기준이 그동안 많이 바뀐 건가?

 

물론 깽판물이라는 말처럼 이전에도 깽판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깽판물에도 일정한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최소한 나쁜놈들 때려잡는 깽판이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주관적이나마 자기가 생각하기에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데 먼치킨적인 능력을 써먹는 나름 착한 깽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고구마가 되어 버렸다. 옆에서 바로 직전까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일하던 회사의 동료직원들이 죽어나가는데도 그들을 돕는 것은 고구마다. 그들을 버리고, 아니 희생양 삼아 혼자서 살아남는 것이 사이다다. 요즘 내가 마가 낀 걸까? 어째서 이런 것들만 자꾸 걸리는 건지. 심지어 어떤 건 첫권 보고서 돈까지 내고 빌렸다. 아, 내 돈...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저런 사이다물일수록 말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냥 푹 찍 끝 해버리면 될 내용 가지고 몇 페이지 심할 때는 챕터 하나가 그냥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은 뭐 어떻고, 인간의 본성이 뭐 어떻고, 도덕이네 윤리네 정의네 운운운운운...사이다라면서?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논리가 꼭 어디서 본 것만 같다는 것. 이런 게 세대차이구나.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두고 도와주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동정조차 가지지 않는 것이 어째서 사이다인 것인가?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해가 깊어진다. 원래 그런 것이다. 아무튼.

고려 때 한반도에는 무자리라 불리우는 유민집단이 있었다. 달리 화척이라고도, 혹은 수척이나 양수척이라고도 불리던 이들은 고려의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떠돌면서 각종 천직에 종사하던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여진이거나 혹은 몽골에 쫓겨왔던 거란의 유민들이거나, 아니면 고려인 가운데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던 말 그대로 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고로 삼국시대 북방의 이민족을 부르던 말갈을 고대 중국어 발음으로 읽으면 역시 뭍잣이 된다.

 

물론 고려야 워낙 중세의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백성들을 단지 생산을 위한 수단이자 소유의 대상으로만 여겼었기에 굳이 떠돌이 유민들에게까지 크게 신경쓰거자 하지 않았었다. 기존에 정착해 있는 백성들도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었는데, 더구나 무신난 이후 원의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중앙집권이 와해되다시피 했던 고려조정에서 이들을 대상으로 무언가를 해 볼 여지 자체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에 의해 다스려지는 농업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은 달랐다. 단 한 뼘이라도 농지를 늘리고 생산을 늘려야 하는 입장에서, 더구나 고려말의 혼란기를 거치며 인구가 크게 줄어들기까지 한 상황에서, 이와 같이 제도의 밖에서 통제를 벗어나 존재하는 인구라는 것은 꽤나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선조정은 조선전기 내내 이들의 정착과 동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아마 학교 다니면서 배웠을 것이다. 원래 백정은 평범한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던 호칭이었다. 말했듯 원래 천업에 종사하던 이들 이질집단들은 화척이나 수척, 양수척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조정에서 이들을 조선사회에 동화시킬 목적으로 백정이라 부르기 시작하니까 그에 대한 반발로 백정이란 이름은 그들에게 던져주고 기존의 백성들은 달리 백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조선조정의 강력한 의지에도 백정은 원래 화척이라 불리우던 천민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을까? 바로 이질적 집단에 대한 정착과 동화정책들이 달리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가 떠올려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원래 기존의 자신들만의 방식을 지키며 살던 사람들에게 다른 조선의 백성들처럼 살도록 공권력을 사용해 강제했다. 요즘 기준으로 이런 정책들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맞다. 민족말살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일제강점기까지 함경도 산간지방에는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사는 여진족의 후예들이 적잖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더구나 북한에 공산주의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모두 잃고 철저히 북한사회에 동화되어 사라져갔다. 말이 좋아 동화지 그냥 하나의 민족과 문화가 권력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고 사라진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원래 보르도 지방에서 쓰이던 언어를 다시 복원하자는 운동이 한 때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이 역시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가 국민국가가 되면서 철저히 제도적으로 탄압당하고 강제당했던 결과였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 사는 사람들을 한족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원래 중권을 제외한 지역들에는 저족이니 강족이니 장족이니 해서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원래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잃고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 그것을 두고 동화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일이 조선 전기 무자리들에 대해서도 이루어졌다.

 

아예 잡아다 한 지역에 땅까지 주어가며 정착케 했더니만 여전히 떠돌아다니려고만 하니까 심지어 그들로부터 여자들을 모두 빼앗아 관기로 삼기도 했었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남사당들이었다. 그러고보면 무자리들과 유럽의 집시들 사이에 비슷한 점이 제법 많기도 하다. 일단 무자리들도 자기들만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그것을 기존의 정착민들에게 공연의 형식으로 보여주며 곡식과 돈을 받아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로부터 여자를 죄다 빼앗아 관기로 삼고 나니 기존의 정착민 가운데 남자아이들을 납치하든 유인해서든 사들이든 데려다가 계속해서 무리를 이어나간 것이 바로 남사당인 것이었다. 역시나 원래 가축을 기르며 떠돌던 이들인 만큼 가죽 만지는 기술이 좋아 가죽제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혹은 광주리 같은 나무나 다른 재료로 만든 자기들만의 공예품을 만들어 기존의 정착민들에게 공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들의 대표적으로 업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 고려 때까지 불교를 믿었었던 만큼 도축에 종사하는 이가 없었던 정착민들을 대신해서 소와 돼지와 개 등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정이라고 하면 일단 도축업에 종사하는 천민들부터 떠올리게 된다. 갖바치도 있었고 고리백정도 있었고 남사당도 당연히 비슷한 유래를 갖는 천민들이었다.

 

이렇게 당시 상황을 정주집단 내부에 존재하는 이주민 유랑집단으로 정리해 놓고 나니 대충 그림이 보인다. 어째서 임꺽정은 무리를 이끌고 도적질에 나섰고 그 규모가 당시를 떨어울릴 정도가 되었는가? 사실 임꺽정이 아니더라도 조선전기 내내 정착과 동화를 거부하는 무자리들로 인해 소요가 끊이지 않았었다. 그냥 무작정 정착지를 버리고 도망치면 양반이고 아예 대놓고 다른 정착민들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원래 하던대로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납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선 전기 내내 그토록 무자리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인내하며 많은 정책들을 내놓았던 조정에서도 아예 손을 놓아 버리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백정들에게는 세금도 걷지 않았었다. 군역도 살지 않았었다. 신분은 천민인데 세금도 걷지 않고 군역도 살지 않으니 알부자들이 제법 많았었다. 물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으니 돈이 많다고 마냥 행세를 하며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었다. 그냥 저 놈들은 천민으로 내버려두고 살자. 그것이 어느 정도 백정들도 조선을 이루는 천민으로 인식하게 된 후기까지도 이어져서 일제강점기 형평사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 임꺽정이 도적질을 시작한 조선 명종대에 척족인 윤씨일파에 의해 황해도 간척이 이루어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수탈까지 극심해지게 되었다.

 

아마 지금 나더러 드라마로 만들라 하면 이렇게 만들 것이다. 여진은 좀 식상하고 원래 고려를 위협하던 거란 귀족의 후예로써 거란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자기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살았었는데 어느날 조선이 건국되더니 자기들더러 고려인이 되라 강요한다. 땅을 주고 정착해서 농사나 지으며 살라는데 그것은 자기들이 그동안 지켜온 전통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선가는 여자들을 죄다 납치해가고, 어디선가는 아예 마음대로 이동조차 못하게 울타리까지 쳐놓고, 어디선가는 그래서 참다못해 산으로 도망쳐 도적이 된 이들마저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필 척족 윤씨일파와 닿아 있는 탐관오리가 와서 자꾸만 자기들을 긁어댄다. 참아야 하는가? 아, 이러고 나니 오래전 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영화가 생각나네? 그래서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도 산으로 들어갔더니 당시 조선조정에 불만을 품은 조선백성들까지 다수 합류하게 되었다. 물론 안되겠지? 어디 감히 백의민족이 다른 민족을 탄압씩이나 했겠는가?

 

사람에 따라서는 임꺽정이 힘이 장사였다는 점에서 그가 북방에서도 코카서스계인 유목민의 후손이 아니었는가 추측하기도 한다. 구한말의 기록 가운데 백인을 보았다는 내용도 있고 보면 아주 근거가 없는 것만도 아닐 터다. 당장 몽골인들만 보더라도 몽골고원에서 당시 수많은 유목민족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9천 년 전까지 함께 생활했었다는 일각의 가설이 무색할 정도로 다부진 몸과 강한 근력을 보이고 있지 않던가. 그런 점에서 어쩌면 고려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몽골인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다 가능성일 뿐이지만. 이미 사라진 역사이고 전통이었을 테니. 지금은 백정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지 않은가. 그리 많았던 백정이건만 후손조차 남기지 못했다. 아무튼.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장비를 비판하는 게시물이나 영상에 반드시 따라오는 댓글이 있다. 사실 역사도 유구하다. 저 비슷한 내용의 글을 무려 20세기에 하이텔에서도 보았으니.

 

"그때 소달구지나 끌던 조선..."

 

사실 정치권에도, 그리고 정부 요직에도, 나아가 그들을 지지하는 지지층에도 일뽕들이 넘쳐나는 이유일 것이다. 일제강점기까지, 아니 불과 80년대까지 똥오줌도 못가리던 미개하고 가난한 조선반도 엽전들과 달리 일본분들께서는 이때부터도 벌써 대단하셨다. 그러니까 일본분들은 매우 대단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남들 비행기 만들 때 소달구지나 끌고 다닐 정도로 미개하고 열등하기만 했는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엔진과 부품들을 뚝딱 조립해서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한국전쟁 끝나고 10년도 되기 전이었다. 대충 주위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들 뚝딱거려 원리를 알아내고 구할 수 있는 부품 가지고 조립해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강점기에는 그런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대학이라고는 경성제국대학 오로지 하나 뿐이었었다. 그것도 사실 조선반도에 이주해 살고 있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조선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대신 대학도 아닌 전문학교를 통해 고등교육을 받았었다. 이때 전문학교들이 이후 서울대를 제외한 사립대학들의 전신이 되고 있었다. 연희전문이라든지 세브란스 의전이라든지 이화여전들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들 전문학교들까지 모두 통틀어 조선반도에서 이루어진 이공계교육이라는 것은 기술의 습득 이상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문적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야 했는데 이마저 일본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괜히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한 자리 하는 새끼들이 죄다 친일파였던 게 아닌 것이다. 친일파 아니면 제대로 된 고등교육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다. 오죽하면 서울대에서 부전공이든 교양이든 역사 배운 놈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쪽발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까? 

 

대학도 그런데 사기업들의 사정은 더 처차무인지경이었다. 경술강제병탄이 있고 나서 조선총독부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이 회사령을 통해 전국에 난립하던 민족자본들을 대거 정리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소수의 협력적인 인사들에게만 회사를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일정 이상의 자본을 획득하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었다. 식민지조선에서 그나마 규모가 있는 회사나 공장들은 거의가 일본인들의 소유였고, 그래서 한국 기업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회사와 공장들이 해방 이후 한국인 기업가들에 불하되는 과정이 오래된 기업일수록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대가리가 빡대가리들이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으로 경쟁해서 이길 수 없었으니 식민지 조선에 조선인에 의한 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이라 주장할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시발택시만 하더라도 일본이 서구의 선진적인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일단 악착같지 자국 국민들의 등골을 빨고 나중에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피를 쥐어짜셔 선진국들에게 발주를 준다. 이러이러한 것들을 만들어 달라. 혹은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직접 기술을 배우거나 설계도를 가져와서 사들인 공구와 기계등으로 공장을 세워 직접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때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들여온 기술이라는 것은 대개 시대에 뒤떨어진 도태된 것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거기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자랑하던 군함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영국에 발주를 주어 생산한 것을 사왔었고, 나중에는 영국으로부터 받아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개량해가며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뻘짓도 어마무지하게 했었다. 도대체 이런 게 굴러가기는 하는가 싶은 것들도 그때 꽤 많이 만들었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써먹어야 하기도 했었다. 일뽕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제로센 또한 그렇게 이미 미국에서 생산중이던 전투기의 디자인과 설계를 응용해서 자기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성과라면 성과겠지만 그래서 시발자동차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한국인들 역시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래봐야 이미 있는 부품들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미 있는 중고엔진과 부품들을 조립해서 굴러가게만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라니까. 그리고 지금도 많은 자동차들이 해외의 검증된 부품들을 사들여 와서 자기네 공장에서 조립한 뒤 완제품을 만들어낸다. 일본이 처음 자체적으로 엔진을 설계까지 해서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 언제라 생각하는가. 그런데 바로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일제강점기 식민지조선에는 없었다. 대학도 없었고, 당연히 이공대생들도 없었고, 그를 현실에서 시도하고 이루어낼 수 있을 만한 자본도 기업도 없었다. 누구에 의해서? 그러니 식민지근대화론따위에 솔깃해하는 2030 남성이니 2찍 진보니 하는 것들에 혐오와 환멸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2030 남성들은 일관되기라도 하지 2찍 진보 새끼들은 미제국주의에 의해 제 3세계 국가들에서 자원약탈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그리 비분강개하면서 대일본제국님들께서 식민지조선에 베풀어준 경제발전의 은혜에 대해서는 찬양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하긴 2찍 진보도 따지고 보면 그 주류가 경성제국대학일 테니까. 그런데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들은 소달구지나 끌고 다녔다면 이를 어찌 이해해주어야 하는가?

 

제국주의열강의 식민지지배가 가져온 최대 폐해일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제국주의 열강의 후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지배는 해당 당사국과 민족들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를 차단해 버렸다. 그들 스스로가 노력과 도전으로 이루어낼 수 있었을 지 모르는 수많은 선택지들을 지워 버렸다. 식민지조선에서도 일본제국주의는 가장 먼저 수많은 기존의 학교들부터 통폐합하고 있었다. 아직 존재하던 서당들 역시 거의 대부분 문닫게 만들고 말았다. 그나마 서구 열강들도 인정하는 가장 관대한 형태의 지배를 했던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나마 일본이 다른 서구의 열강들에 비해서는 식민지에 대해 관대한 편이기는 했었다. 괜히 아직까지도 대만에서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을 향수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일본을 찬양하면서 그 지배를 받아야 했던 조선인들을 모욕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래서 더 신기한 것이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가장 극심했던 것은 1970년대, 그러니까 1990년대까지도 일본은 대부분 한국인들에게 아직 동경의 대상이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양국의 격차가 이렇게 좁혀진 지금에 일빠들이 저리 늘어나고 있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독립운동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정부를 오히려 지지하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일뽕들이야 예전부터도 있어 왔었다. 레파토리도 사실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요즘 일뽕들은 앞에 반드시 스윗을 붙인다. 이전의 일뽕들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그들의 자신감이기도 할 터다. 역시나 야동이 그들을 그리 만든 것인지. 저들의 주된 주장 중 하나가 포르노의 허용이고 보면 크게 잘못된 판단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연구할 가치가 있겠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아직 어렸었다는 참작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단종이 결국 자신의 왕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재위시에는 김종서와 황보인, 민신 같은 세종 때부터 국정에 참여해 온 대신들이, 왕위를 잃고 난 뒤에는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 그리고 종친인 금성대군등이 왕을 지키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찬탈자인 수양대군에 의해 그 일족들까지 멸족당하고 말았다. 아니 이들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의 찬탈에 반발한 이징옥의 함경도군이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상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간 백성들까지 포함하면 죽어간 숫자가 물경 천 단위를 넘어간다. 왕이 왕위를 지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고려에서도 결국 공민왕이 자신의 안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아들인 우왕이 불안하게 왕위에 올랐고 결국 손자인 창왕까지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우왕이 자신의 왕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죽어나간 이들 역시 장인이던 최영부터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당연하게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난 뒤 왕조교체의 과정에서 죽어나간 이들 역시 넘쳐날 정도였었다.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는 또 어땠을까? 그가 잠시 마음을 놓음으로 해서 아들인 방번과 방석, 사위인 이제, 친구와도 같았던 공신 정도전과 남은 등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었는가? 광해군이 방심한 탓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정인홍은 전례를 깨고 칠순의 나이로 사약을 받아야 했었다. 

 

일본 에도시대에도 번주가 자신의 지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가이에키라 하여 영지를 몰수당하는 형벌이 내려지는데, 그냥 단순히 번주 혼자 지위를 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스리던 번 전체가 보호자를 잃은 채 약탈에 내몰리는 결과로까지 이어질 때가 많았다. 즉 번주가 행실을 잘못해서 쇼군에게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가신들은 실업자가 되고 백성들은 약탈의 희생양이 되는 등 그 피해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도 그래서 막부의 편에서 유신파와 맞섰던 아이즈번 역시 번주의 선택에 의해 가혹한 보복을 당해야만 했었으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내리는 한 순간의 판단과 선택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무엇보다 자신의 왕위부터 지켜야 한다. 아무리 현명하고 자비로운 왕이 새로 들어선다 할지라도 왕위가 바뀌는 순간 이전의 왕을 따르던 이들은 새로운 왕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다. 너무너무 운도 좋게 이전의 왕을 따르던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전처럼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역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이의 판단에 달린 만큼 이미 이전의 왕의 손을 떠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란 이미 왕으로서 존재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한 몸에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그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운명을 다른 군주에게 맡긴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를테면 모두가 바라는 가정인 선조가 이순신에게 왕위를 넘겼을 경우에도 과연 모든 선조의 신하들이 새로운 왕인 이순신을 반겼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전히 선조의 충신이고자 하는 신하와 백성들에 대해 이순신은 온전히 자비와 관용만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혹시라도 선조의 복위를 위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이들에 대해서마저 무작정 자비와 관용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선조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이순신을 죽이는 것이 옳았을 수 있다.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것이 곧 왕이 된 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왕위와 왕으로서의 권위까지 모두 지켜낸 결과 선조는 자신의 치세 동안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수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다른 낭비 없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어느 영화에서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전후복구는 이미 선조 재위 동안 상당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잡혀갔던 백성들을 다시 돌려받기 위한 노력 또한 바로 선조 재위 기간 동안 실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괜히 요순의 전례를 따르겠다고 섣부르게 왕위를 넘기기라도 했다면 그것 안정시킨다고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어째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결국 장강이라는 천혜의 방벽을 두고서도 오히려 수군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손호보다도 유선에 대한 평가가 더 낮은 것인가.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렸던 조예나 사마염보다도, 무고한 옥사를 수도 없이 일으켰던 조비나, 권신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조환이나 조모와 같은 허수아비 황제들보다도 유선에 대한 평가가 더 처참한 것인가. 심지어 중국에서는 무려 천 년 넘게 유선의 아명인 아두를 바보를 뜻하는 욕으로 쓰고 잇었을 정도였다 한다. 단지 아버지가 유비라서? 제갈량을 신하로 두었어서? 강유의 최후가 너무 비장해서? 그러니까 어째서 사람들은 선조가 차라리 한양에서 백성들과 싸우다 죽었기를 바라는 것인가? 왕이기 때문이다. 황제이기 때문이다. 황제로서 자신의 나라와 신하와 백성들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유선이 항복할 당시 촉한에 전혀 남은 희망이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검각에는 강유가 있었고, 영안에는 한때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나헌과 염우가 적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실제 촉한이 항복하고 조위가 내역을 살폈을 때 촉한에 남아 있던 병사의 수가 무려 10만이 넘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더이상의 보급도 불가능한 등애군을 상대로 성도에서 농성하면서 보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한 편 각지에서 구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산길을 넘어왔는데 공성병기까지 챙겼을리는 없으니 도성을 지키면서 버티다 보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조위가 촉한을 공격하는 것을 알고 마침 손오에서도 구원군을 보내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그때 구원한다고 보낸 군사들이 유선이 항복한 것을 알고 남은 영토라도 차지하겠다고 밀고 들어왔다가 나헌에게 털리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도저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나같은 경우 당시 유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기는 한데, 솔직히 아무리 황제 자리가 좋아도 황제노릇만 40년 넘게 하다 보면 질릴 때도 되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황제노릇을 시작했으니, 고작 익주 하나 차지하고 있을 뿐인 조그만 나라에서 어디 멀리 놀러가지도 못하고 황궁에만 쳐박혀 있는 세월이 지겹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예나 사마염처럼 사치라도 제대로 부려 봤었는가? 후궁이라도 많이 들여서 여자랑 노는 재미라도 누려 봤었겠는가? 손호처럼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사람을 죽여 본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환관을 하나 발견해서 그를 총애하며 이것저것 하자는대로 들어준 정도가 고작이었었다. 자기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었고, 황제가 되기 위해 피똥싸며 다른 형제들과 계승권을 두고 다투거나 한 적 없이 그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적이 쳐들어와서 다시 버티며 싸우려 하니 그게 또 귀찮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때 유선 나이 정도면 그럴 때도 되었다. 문제는 그같은 유선의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이다.

 

당장 아버지와 형제와도 같았던 관우의 후손들이 점령군으로 들어온 방회에 의해 아버지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씨몰살당하고 있었다. 강유가 유선의 복위를 위해 종회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분노한 조위군에 의해 많은 공신의 후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며 약탈당하고 고통받았을 백성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렇게 되도록 황제로서 자신의 책임을 무책임하게 놓아 버린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나라와 신하와 백성들을 지켜야 할 황제가 다른 이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항복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이다. 더욱 유비와 제갈량을 잊지 못하고 이후로도 오랜동안 망해버린 나라를 추억했을 촉한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니까 문재인이 정권연장에 실패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을 테지만, 주어진 여건이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윤석열의 난동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결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었다. 노무현도 다르지 않았다. 좋은 사람으로 정권을 내주기보다 차라리 더럽고 추악하고 악랄한 권력욕의 화신으로써 주어진 권한 안에서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정권을 지켜내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달리 권력의지라 부른다. 정치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남들보다 강한 동기와 의지일 것이다. 그것은 같은 목적과 동기를 공유하는 정치적 동지들을 위한 가장 강하고 순수한 선의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왕이 왕위를 지키는데만 골몰한다. 왕이 오로지 자신의 권위만을 탐욕스럽게 지키려 한다. 그래서 역사상 그나마 왕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돌아왔는가 보라는 것이다. 왕조가 교체될 때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유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종도로 피바람이 불었었다. 괜히 왕은 무치라고 후궁도 여럿 두어가며 2세 생산에 열을 올렸던 것이 아니다. 왕이 후손을 제대로 남기지 못해도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받을 수 있다. 아니 후손 이전에 자기가 건강해서 오래 살아야 많은 이들이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으면 굳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이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었다. 괜히 대통령 경호한다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대통령의 안위를 위해 쓰는 비용은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위한 필요비용이다.

 

그래서 유선이 무능한 것이다. 멍청한 것이고. 한심한 것이고. 당시에도 이후로도 그보다 더 무능한 황제는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보다 더 자격없는 왕이나 황제들은 드물었었다.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왕으로서 자신을 지키려 했던 그들이야 말로 유선보다도 더 왕같은 왕이었을 테니. 그래서 병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아두란 바보병신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쓰인 것이었고. 능력이 없어 무능한 것보다 더 심하다. 그래도 그룹총수라면서 그룹의 가장 중요한 기업이 어찌되는지도 신경쓰지 않는 어느 이씨네 재모시기란 분처럼. 교훈이다. 유선은 그래서 병신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진짜 너무 자주 보인다. 그냥 너무 흔하다. 삼국시대에 백성 수 십만 정도 학살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 중대한 일도 아니었고 당연히 죄악조차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조조를 빨고 싶다고 이런 개소리를 당연하게 늘어놓나?

 

백기가 죽으면서도 후회했던 것이 조나라 병사 40만을 생매장한 것이었다. 그냥 백성도 아니다. 자국의 백성도 아닌 바로 직전까지 목숨걸고 싸우던 적국의 병사들이었다. 그런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둘수도 풀어줄수도 없으니 그냥 생매장해 죽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백기는 자기가 그런 죄를 저질렀으니 죽을 만하다 말하고 있었다. 그게 조조가 서주에서 백성들을 학살하기 거의 500년 전의 일이었다.

 

항우가 당대에 악명을 떨친 것도 자신이 모시던 왕인 초회왕을 폐위시키고 유배지에서 죽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항복해 온 진나라 병사 10만을 마찬가지로 생매장해 죽인 것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죽여대니 그 악명이 천하에 울리면서 어지간한 제후들은 백성들의 뜻을 쫓아 항우가 아닌 유방의 편에 섰으니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전쟁만 계속하다가 패망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그것도 40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는 400년 동안 도덕적인 가치기준이 후퇴해서 사람 좀 죽이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공손찬 밑에서, 그것도 전해의 명령을 받아 싸우다가 공융을 한 번 구원했을 뿐인 유비가 어떻게 천하에 그 이름을 떨치는 명사가 되었었는가. 당대의 명사 중 하나인 공융을 구원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조조가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르던 서주를 구원했기 때문이었다. 무고한 백성을 수 십만이나 무참이 학살하는 조조에 맞서 직접 싸우기까지 했었다는 사실이 이후 그를 조조와 맞서는 인의의 대명사로 여기게 만든 것이었다. 그냥 그 한 번의 싸움이었다. 그저 공손찬 휘하에서 시키는대로 싸움이나 하던 인사가 그 한 번의 싸움으로 서주를 물려받고 중원에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군웅으로 거듭났던 것이었다. 조조의 학살이 당시에도 별 것 아니었다면 고작 도겸 한 번 도와줬다고 그렇게까지 되었겠는가?

 

물론 진림이 조조를 토벌하기 위해 격문을 썼을 때 서주에서의 학살 부분이 빠져 있기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군웅들 가운데 무고한 백성들에 대한 약탈과 학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이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괜찮을 수 있어도 군웅들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는 실제 도적무리를 만들어 곳곳에서 살육을 일삼던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런 인물들은 결국 도태되어 어떤 이들은 아예 후손조차 남기지 못한 것이었다. 인심을 잃고 단지 세력만 있는 경우 그런 이들은 너무 쉽게 망하고 그리고 잊혀졌다. 조조 역시 조비가 황위에 오르고 망하기까지 고작 50년도 걸리지 않았는데 그를 동정하는 이들조차 거의 없었을 정도로 그 후손들의 최후는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괜히 망탁조의에 조조와 사마의가 들어가는 게 아니란 뜻이다.

 

지금 기준으로나 죄악이었다. 동탁의 악행을 언급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인근의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학살한 일이었다. 백성을 함부로 죽이고 군주로서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삶을 피폐하게 만든 경우 반드시 역사에 그 기록이 남아 있었다. 전혀 아무 상관도 없다면 원술의 치하에서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백성들의 사정은 어찌 기록에 남아 있을까? 무엇보다 지금 사람들이 서주에서의 학살을 그토록 상세하게 알고 있는 자체가 그로부터 조금 후대의 사람인 진수가 자신이 지은 사서에 '잔륙'이라고 명확히 정의하여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조위로부터 이어진 왕조라 조위의 시조인 무제에 대하 상당히 미화하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표현해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아니다?

 

하긴 이준석이 윤석열과 김건희의 공천개입에 같이 관여했다는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와중에도 논란의 중심에 섰으니 정치인으로서 체급이 올라갔다 좋아하는 병신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검찰을 아예 수족으로 부리고 있는 정권과 무관하지 않은 인사를 검찰수사 운운하며 빨아대는 놈들도 있는 것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래도 그런 주장을 대표해서 퍼뜨리고 있는 인사가 대학교수이기까지 하고 보면. 참 세상은 넓고 병신들은 많다고나 할까?

 

아무리 난세라도 정도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아, 유럽은 또 다르다. 거기는 토지에 속한 농노들은 영주의 사유물취급받았었다.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노가 좀 죽어나간다고 재산이 축나는 것을 걱정하긴 했어도 그 죽음을 안타까워한 영주는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래서 유교를 싫어하는 걸까? 조조가 유교적 가치를 거부해서 도덕과 인의를 무시하고 학살을 과감하게 저지른 것이었다. 역시나 위빠가 지껄이는 주장 중 하나다. 참 병신들도 많다. 지랄들도 풍년이다.

이릉대전에서 유비가 촉의 인재를 다 말아먹었다는 주장에 대해 내가 회의를 가지는 이유는 하나다. 그 인재들이 손오군의 방어를 제대로 뚫지 못했었다.

 

이릉에서 유비의 진영이 늘어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손오군의 성과 진영을 하나씩 들이쳐 공격하는데 정작 대장을 맡은 풍습과 장남이 그것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 진격로를 따라 진영이 길게 늘어진 것이었다. 물론 방어전을 지휘한 육손 역시 그것을 노린 것이었고. 지키고만 있으면 반드시 유비의 진영에서 허점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유비군은 손오군과 장기전을 치를만한 여력이 사실상 없다시피 했었다. 그것은 이후 제갈량이 북벌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드러난 바 있었다. 대군을 일으키기에는 익주는 너무 작았고, 그런데다 북쪽에는 강대한 조위군과도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익주를 완전히 장악했다기에는 불안요인이 아주 없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유비가 가장 신임하는 지휘관들인 위연과 조운을 각각 조위군과의 한중전선과 익주의 후방에 남겨둔 채 군을 진격시켰던 것이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유비의 나이도 한 몫했다. 차근히 하나씩 적의 진영을 함락시키며 나아가기에는 더구나 유비의 남은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하필 유비는 전쟁 직전 친형제와도 같던 장비까지 잃었던 터였다.

 

그런데 사실 유비군의 약점은 손오군의 약점이기도 했는데, 특히 이 가운데서도 북쪽의 조위군의 위협은 내가 여몽을 전략가로서 절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형주에서 관우의 뒤를 치고 심지어 그를 죽이기까지 하면 유비가 복수에 나설 것은 조위군의 참모들까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사안이었는데 이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었다. 더구나 자칫 유비가 손오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왔을 때 북쪽에셔 조위군까지 움직이면 손오는 양면에서 둘러싸여 그대로 패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때 조위의 황제가 조비라서 멍청하게 때를 놓치고 뒤늦게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고 끝나고 말았었다. 이릉에서도 육손이 잘 막았으니 망정이지 유비가 조금만 더 느긋하게 군을 움직였으면 또 결과가 달라졌을지 몰랐다. 그런데도 형주 하나 먹겠다고 유비와의 동맹을 박살내 놨었으니. 그리고 결국 유비를 백제성까지 몰아붙인 육손도 조위군의 위협에 군을 돌려 사실상 유비군 자체를 끝장내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것은 육손이 잘한 것이지 형주에서의 배신이 현명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아무튼 아무리 전투에서 방어가 더 유리하다고 하더라도 당시 유비군의 장수들 가운데 손권군의 방어를 제대로 뚫어낸 이가 사실상 없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패해 쫓기면서 분전한 이들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만 그렇다고 손권군의 방어를 뚫지 못해 전선이 늘어지게 만든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당시 이릉에서 유비가 잃은 인재들이라는 것이 손권군이 작심하면 그 방어조차 제대로 뚫지 못할 정도의 인재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정도라면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북벌에 종사했던 인재들만 하더라도 크게 뒤쳐져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진짜 아쉬운 인재가 둘 있으니 바로 백미의 어원이 된 마량과 북쪽에서 조위를 견제하다 고립되어 항복했던 황권이었다. 한중공방전을 처음부터 설계한 두 사람이 법정과 황권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유비로서는 꽤나 뼈아픈 손실일 수밖에 없었다. 마량은 내정에 있어 장완이나 비의 이상을 기대해 볼 수 있었던 인재였다. 하긴 풍습이나 장남 중 하나만 있었어도 최소한 가정에서 마속의 병신짓 정도는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기대해 볼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어차피 전선도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때 잃은 인재들 수준이 그리 대수로웠을까는 회의가 있다.

 

물론 육손이 지휘한 손오군이 잘막은 것도 분명 있다. 그런데 그런 방어를 뚫으라고 일선지휘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비가 직접 군을 이끌면서도 대장을 따로 두어 군을 지휘케 하는 것은 최전선에서 적의 방어를 뚫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을 해내면 유능한 것이고 못하면 무능한 것이다. 한중에서는 장비와 황충이 초전에서 그 목표들을 제대로 달성해냄으로써 이후의 대치과정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끝내 승리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리이리하면 이길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리이리가 안되었다. 그래서 제갈량도 그리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도 위연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게 안되면 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들까지 고려해서 전략을 짜는 것이 최고지휘관의 역할이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관우가 죽었을 때 조위측의 반응이 사실 정답이었던 것이다. 유비군에 명장이라고는 관우밖에 없었다. 장비가 여러 방면에서 크게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역시 유비군 안에서 하나의 방면을 맡아 책임질만한 장군은 관우 정도였었다. 그런데 그 장비마저 죽었다. 제갈량이 북벌에 나섰을 때 조진군은 그나마 남은 조운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다. 그러게 평생 쫓겨다니기만 한 유비의 군중에 인재라고 해봐야 얼마나 있었을까? 손오군과 그 기본부터 달랐던 터다. 그래도 이릉의 패전이 뼈아팠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관우가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손권과의 우호를 다졌으면 번성에서 뒤통수맞고 죽는 일은 없었지 않겠는가. 그래서 또 말하기도 한다. 유비가 손권에게서 빌린 형주를 제때 돌려주었으면 관우가 죽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일단 관우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었으면 손권이 뒤를 치지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는 유비와 손권 사이에 빚어진 갈등의 원인을 호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관우가 손권에게 까칠하게 굴기 전부터 이미 유비와 손권 사이에는 상당히 첨예하게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간단히 손권에 자신의 동생 손씨로 하여금 유비의 후계자인 유선을 납치해 오도록 시킨 것이 유비가 유장의 부탁을 받고 파촉에 가 있던 무렵이었다. 당연한 일로 이때 손오로 돌아간 손씨는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관우가 까칠해서 손권이 유비를 적대한 것이냐고.

 

그러면 손권이 유비와 갈등을 빚은 가장 큰 원인인 형주반환에 대해서도 한 번 살펴보자. 유비가 언제 손권에게서 형주를 빌렸을까? 아니 손권이 유비에게 빌려줄 정도로 형주를 점유한 적이 있기는 한가? 손권이 형주가 원래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근거는 사실 다른 것 없다. 자기가 가질 수도 있었는데 근거지가 따로 없는 유비를 위해 알아서 가질 수 있도록 봐 준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강하와 강릉을 포함한 남형주의 군현들은 유비가 직접 군을 동원해서 항복을 받아내고 점령한 곳들이었다. 거기서 손권이 기여한 바는 말 그대로 방해하지 않고 지켜본 것 단 하나였다. 

 

더구나 그렇게 유비가 남형주를 차지하는 것을 두고만 보겠다고 약속하게 된 원인인 적벽에서의 군사동맹은 어떠했을까? 오히려 이 부분은 삼국지연의가 지나치게 손권의 편을 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적벽대전 당시 손오가 동원한 군사가 대략 3만, 유비가 동원한 군사가 또한 대략 2만, 그리고 삼국지연의에서와 달리 직접 주유의 손권군과 같이 적벽에서 조조군과 싸우고 있기도 했었다. 소설에서처럼 겨우 한 줌 정도 되는 병력으로 숟가락만 얹었다가 퇴각하는 조조군의 뒤를 추격하는 역할만 맡았던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래서 적벽대전의 결과 유비만 좋았는가? 거기서 손권 역시 유비와 동맹을 맺지 않았다면 유종처럼 조조에게 항복하거나 아니면 혼자서 싸우다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의 결과를 맞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적벽에서 조조를 이기고 났더니 유비가 자기 힘으로 차지한 형주도 자기가 빌려준 것이라?

 

이게 뭐와 같냐면 가츠라 태프트 조약에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먹는 것을,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먹는 것을 각각 양해하기로 했었는데 나중에 상황이 바뀌니까 일본이 느닷없이 필리핀도 내가 먹을 수 있는데 봐준 것이라며 내놓으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손권의 주장처럼 유비가 차지하지 않았으면 조조가 쫓겨간 틈을 노려서 손권이 군사를 움직여 대신 차지할 수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가능성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유비가 내내 손권의 저같은 무리한 주장에 익양에서 군사적인 대치까지 했었음에도 결국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천하의 대부분을 차지한 조조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손권과의 동맹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릉대전에서 조위를 쳐야지 손오를 공격하는가고 조운과 제갈량이 반대하고 나섰을 때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손권에게 내내 양보하면서 기껏 점령한 땅까지 절반이나 내주었는데 돌아온 건 통렬한 뒤통수였다. 그런데도 다시 천하의 대의를 위해 양보하고 인내해야 한다 말한다면 과연 누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혼자서는 어떻게해도 조조를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필생의 꿈이었던 조조의 타도와 한왕조의 부흥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손권과 힘을 합쳐야만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 손권이 오히려 조조와 손을 잡고서 한창 조조와 싸우고 있던 관우의 뒤를 치고는 아예 형주 전체를 날름 삼켜 버렸다. 거기서 참을 수 있으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닌 것이다. 관우더러 손권의 감정을 자극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손권은 그 전부터 계속 유비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의를 위해서 유비는 인내하며 무리한 요구들을 하나하나 들어주었던 것이었고. 그런 사정을 아는 관우가 과연 손권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게 가능한 인재는 삼국지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마 두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일 것이다. 한 방면을 책임질만한 무재를 겸비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이게 정사와 연의가 뒤섞인 결과인 것이다. 어떤 것은 정사를 따르고 어떤 것은 연의를 따른다. 그리고 대부분 똑똑한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촉한정통론에 반대되는 방향을 쫓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야말로 유비가 망할대로 망해서 한 줌 정도나 되는 병력을 겨우 거느리고 있었을 뿐이니까. 당장 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노숙이 마침 동맹을 제안해왔기에 손권의 도움으로 겨우 구사일생할 수 있었다. 적벽대전도 사실상 손권 혼자 치른 전쟁이었고, 유비는 겨우 뒷처리만 하다가 싸움이 끝나고 어부지리만 얻었다. 이 역시 제갈량을 띄우느라 주유를 바보로 만든 연의의 부작용 중 하나일 것이다. 비겁하게 적벽에서 손권이 힘을 다 빼도록 지켜보다가 손권이 남군에서 조조의 군사들과 드잡이하는 틈을 노려 빈집털이를 한 것이었다. 그런 과정들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형주는 원래 손권 것이 맞았다. 유비가 비겁하게 빈집털이로 손권의 정당한 몫을 훔쳐간 것이다. 하지만 정사의 기록대로라면 이건 진짜 생떼가 따로없다. 그런데도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참았으니 유비가 진짜 대인배는 대인배다.

 

그래서 내가 여몽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노숙보다 여몽을 더 높이 평가하는 손권을 유선보다 아래로 두는 것이고. 사실상 거의 유일한 기회였었다. 이미 천하의 판도를 결정한 상태에서 조위에 역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그나마 만만한 유비의 뒤를 쳐서 형주 하나 얻는 것으로 끝내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그로 인해 어제까지 동맹이었던 유비와 큰 전쟁까지 치러야 했었고, 자칫 육손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손오 전체에 큰 피해를 입힐 뻔하기도 했었다. 실제 유비가 처음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손권 역시 꽤나 긴장해서 달래기 위한 사신을 보내고 있었던 터였다. 육손이 잘 막아서 이릉대전으로 끝난 것이지 거기서 조금만 삐끗했으면 얻은 것 없이 잃는 것만 많았을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손권이 이후에도 고구려나 요동과의 외교에서 비슷한 짓을 많이 하기는 했었다.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지 과정 자체만 놓고 보면 손권의 여러 병신짓 중에 하나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었다.

 

아무튼 워낙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이 유비이다 보니 그에 대한 반감 때문인가 뭐만하면 죄다 유비쪽 책임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중요한 것은 관우가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을 때까지 아직 손권과 유비는 공식적으로 동맹관계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동맹관계인 채로 계략을 꾸며 조조와 내통하는 한 편 미방을 포섭하고 있기도 했었단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단 한 번도 자기 땅이었던 적이 없는 형주를 유비로부터 돌려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책임까지 관우와 유비, 심지어 제갈량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으니. 관우와 유비만 잘했으면 손권도 배신하지 않았었다. 그 전에 이미 손권은 동생 손씨로 하여금 유선을 납치케 했었다. 명백한 사실이다. 유비가 분노를 참지 못한 이유인 것이다.

간단히 같은 중국의 사대기서 중 하나인 수호전을 보더라도 당대의 호걸이라 하는 인물들은 자기가 호걸임을 드러내기 위해 안달인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굳이 멀리서 유명한 호걸이 찾아오니 굳이 빚을 내서까지 술과 안주를 대접하고, 그를 위해서 괜히 주위와 싸움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런데 또 그 사정을 들으면 모두가 그럴 만했다며 칭찬해주기도 한다.

 

중국 무협드라마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다. 우연히 강호의 영웅이라 할 만한 두 사람이 술집에서 만난다. 호기로움을 과시하고자 서로 술잔을 나누는데, 굳이 또 여기서 술을 한 잔 마실 때마다 술잔을 창밖으로 던져 깨뜨리고 있다. 뭐 그러다가 아예 동이째로 들고 마시는 건 나도 술집에서 한때 많이 해 본 추잡한 짓거리 중 하나다. 설사 서로 반드시 죽여야 하는 원수일지라도 그처럼 영웅다움을 과시하는 장면에서만큼은 겸손을 강요하지 않는다.

 

워낙 검약과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고 지켜왔던 우리와 달리 중국에서는 부자가 돈자랑하고 권력자가 힘자랑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으로 더 여겨지고 있었다. 돈이 있는데도 없는 척하고, 권력이 있는데도 아닌 척하고, 지위가 높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이야 말로 겉과 속이 다르고 다른 속내를 감추는 음흉한 행동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놓고 자기를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이야 말로 호방하고 영웅적인 행동이라 여겼었다. 돈이 있는 놈이 그 돈으로 돈자랑을 해야지 그것 뒤에 감춰두고 뭐하겠느냐는 것이다.

 

돈 많은 부자가 그 돈을 기방에서 펑펑 쓰면 기루 주인이나 기녀들이나 일하는 점소이들이 혜택을 보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 돈과 지위를 앞세워서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소해주는 것도 자신의 돈과 재력을 과시하는 만큼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일 수 있는 것이다. 역시나 수호전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이다. 돈도 좀 있고 지위도 좀 되는 인사가 호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중간에 끼어들어 술과 고기를 사주고 금전도 집어주고 옷과 재물도 안겨주어 화해토록 주선한다. 돈지랄인데 이게 또 재물을 아끼지 않고 호걸들을 우대한다며 평판이 좋아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돈이 있어도 없는 척 간결하고 단촐한 것을 지향하는 우리와 달리 개방 이후 중국의 부자들은 대놓고 자기 돈 많은 것을 과시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더 선호하기도 했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보이는 오만함이나 장비가 보이는 난폭한 성격에 대해 정작 중국사람들 가운데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보기에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관우나 장비 정도 되면 오히려 그러는 것이 맞다. 아마 실제 관우한테 쥐새끼라 모욕을 당한 손권도 화는 났겠지만 그만한 인물이기는 하다며 속으로 납득했을 것이다. 실제 관우의 뒤를 치면서 정작 손권은 관우나 유비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었다. 끝내 관우를 참수하면서도 그를 굳이 모욕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시에 깨끗하게 적장의 목을 베어 죽이고 장사를 지낼 때 예우를 갖추는 것은 상대를 지극히 존중하는 행동이었었다. 관우가 그래서 방덕을 죽였을 때에도 예우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었다. 그래서 방덕의 아들인 방회가 관우의 일족을 죽인 것 때문에 부모의 복수를 했다는 칭찬보다 졸렬했다는 비난만 더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형주 같은 요충을 맡으려면 관우 정도 오만함이, 그러니까 자기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 정도는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손오의 말기에 양양에서 대치했던 육항과 양호의 관계도 서로를 존중할지언정 자신을 함부로 낮추는 듯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거기서 한 방면을 책임지는 인물이 섣불리 자신을 낮췄다가는 오히려 얕잡힐 위험이 있다. 손권이 도와주겠다 한다고 이미 자기가 주도하고 있는 전장에 구원군을 들이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삼국지 어디에 자기 주군을 제외한 다른 세력의 인물에게 함부로 자신을 낮추는, 그래도 영웅이라 할 만한 인물이 보이는가 말이다. 그런 유형의 인물들은 대개 소인배거나 표리부동한 기회주의자거나 혹은 배반자다. 다만 그렇더라도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나 상관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해야 한다. 그마저 없으면 그건 그냥 싸가지없는 것일 테고.

 

그리 술취해서 사람 패고 돌아다녔다는 장비를 중국 민간에서 더 좋아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수호전에서 그런 장비의 캐릭터를 모티브로 이규같은 더 막나가는 캐릭터를 만들어 등장시켰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이규도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그야말로 폭발했었다. 술에 취하면 그냥 닥치고 절의 나무까지 뽑아버리던 노지심이, 그럼에도 자신과 대등하다 여겨지는 임충이나 양지, 그리고 송강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모습 등도 그런 연장에 있을 것이다. 송강도 가만 보면 진짜 이런 관종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하는 행동에 꽤나 많은 신경을 쓴다. 시진은 원래 그것을 즐기던 인물이었고. 뭐 산적두목들과 우정을 다지다가 아예 관군과 척을 지고 도적떼가 되어 버리는 사진도 있었지만.

 

한 마디로 그냥 정서가 다른 것이다. 당장 미국만 해도 돈만 충분하면 개인저택에 개인비행장을 만들든 말든, 호화로운 요트에 여자들을 갈아치워가며 호사스럽게 놀든 말든, 우리야 대통령후보까지 된 전직 변호사가 요트도 탔었다고 오만 지랄들이 쏟아지지만. 그래도 현직 변호사인데 안경테 좀 비싼 것 썼다고 지랄할 건 무언가. 그러니 관우와 장비가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째서 조조를 간사하다고 싫어하고 하는 것인지도. 가장 유교와 거리가 먼 것이 그래서 중국인이라 하는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이라도 따라야 이 사람들도 좀 멀쩡해지지 않을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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