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기 직전 중소기업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있다. 어차피 매출도 별로고 남는 것도 거의 없다 보니 이대로 좋은가 하는 회의가 들게 된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대부분 회사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정신을 쏟을 때가 많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거나, 아니면 그나마 붙어 있는 동안 뭐라도 더 챙길 수 있는게 없는지 궁리하고 살핀다거나. 그러다가 기회가 오면 알아서 순서대로 능력껏 탈출하게 된다.

 

오와 촉의 차이는 사천분지 자체가 워낙 험준한 지형으로 고립되다시피 한 지역이라 다른 곳으로 뻗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만까지는 어찌어찌 점령했는데 그 아래로는 말 그대로 밀림지역이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 아래쪽으로 그나마 문명이라는 것이 들어서게 된 것은 교주까지 밀려났던 월족이 더 서쪽으로 쫓겨가서 베트남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서쪽으로 티베트를 넘어 인도가 있기는 했지만 차라리 거기까지 가는데는 장안에서 서량을 통해 가는 쪽이 더 빠르고 편하다. 그렇게 사방이 막혀있다시피 한데 그나마 땅조차 좁다. 서촉에 조조가 인구를 모두 소개한 한중 정도가 촉이 차지한 영토의 전부다. 그에 비해 위는 중원을 거의 차지하고 있고, 오 또한 영토만 놓고 보면 상당한 넓이에 바다를 통해 외부로의 진출이 가능하다. 인구도 9분의 1에 지나지 않는데 과연 그런 촉이 얼마나 위를 상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구한말 조선의 상황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여말선초의 왕조교체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어차피 망할 것을 안다. 언제 어떻게 망하느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선택해야 한다. 무너져가는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인가, 새로운 왕조을 통해 기회를 노릴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황제라는 지고의 자리에 있었기에 유선 또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의가 강유에게 했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제갈량 같은 인물도 감히 위를 상대로 정벌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과연 남아있는 이들이 위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상황에 사람들의 선택은 양 극단으로 갈리게 된다. 어차피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니 나가서 싸우기라도 하자는 강경파와 어차피 희망이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현실파다. 그래도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과 촉이라는 체제 아래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더해지며 강경파의 의도가 어느 정도 먹히기는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촉한이 처해 있던 한계상황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너무나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강유관을 지키던 마막이 등애군의 존재를 알자마자 바로 항복부터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더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위군이 후방인 강유관까지 나타난 상황 자체가 촉한의 멸망을 확정지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산을 내려와 진을 친 등애군을 상대로 제갈첨이 성급하게 승부를 걸려 한 것도 그런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볼 수 잇을 것이다. 내면에 잠재해 있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나자 자연스럽게 행동도 성급하고 과격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경향은 유선의 항복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 너무나 허무하게 제갈첨의 패배를 들은 순간 유선은 더이상의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함으로써 변방왕조의 고단한 황제역할을 자기 손으로 끝마치게 된다. 이제는 더이상 언제 나라가 망할까 걱정하며 마음 조이지 않아도 된다. 기왕에 망할 것이면 그냥 이렇게 확실하게 망하는 쪽이 더이상 불안하지 않고 편하다.

 

말하자면 제갈량 사후 촉한이라는 나라는 멸망할 날짜를 받아놓은 시한부 왕조라 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 연명은 하지만 그러나 결국 언젠가는 멸망할 것이다. 그것이 유선 자신의 대일 것인가, 아니면 다음의 누군가 때일 것인가. 그렇다고 촉한이 뭔가를 해 보기에 현실은 그저 암담하기만 했다. 동맹이라고 있는 오는 호시탐탐 촉의 영역을 노리는 믿지 못할 놈들이고, 다른 동맹할만한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땅도 좁고, 인구는 적고, 인재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했을 당시 촉한의 내부에서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위와의 최일선에서 전쟁을 치러왔던 강유와 같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그랬었다. 유선을 딱히 암군이라 여기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암군이라기에는 재위기간이 오히려 손권보다도 더 길었는데 결정적으로 실정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황호를 중용한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을 크게 그르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제갈량과 장완, 동윤, 비의 등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어 적절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말년에도 주위의 수많은 견제와 모함에도 강유를 끝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강유가 괜히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촉한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의 한계란 유선의 내부에 이미 오래전부터 의식과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작년 민주당의 지방선거도 그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말기 열린우리당이 박살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어차피 망할 것을 알기에 그 순간 사람들은 선택하게 된다. 기왕에 망할 거라면 그 안에서 자기 이익이라도 찾자. 그 놈들이 그 고집을 포기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의 수박들이다. 이낙연을 따라서 수박들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이재명은 대통령에 떨어질 것이고 민주당은 해체될 것이니 그 안에서 살 길을 찾자던 놈들이 그대로 하던 짓을 이어나가니 수박인 것이다. 망할 것을 알면 자기 살 길부터 찾는다. 언제는 또 안 그랬을까? 박근혜 탄핵될 때 새누리당도 그랬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게 있다. 다만 내 일이면 이해보다는 분노가 우선이다. 유선이 아두인 이유일지 모르겠다.

흔히 차를 탄다고 한다. 너무 당연하게 쓰이는 말이다 보니 무협소설을 보다가도 차를 탄다는 표현을 흔히 보게 된다. 원두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를 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에 원래 차를 탄다는 자체가 인스턴트 커피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 다방커피 만드는 방법이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 설탕을 차숟가락으로 떠서 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차보다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커피가 차를 대신하게 되었고 차까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차를 우린다고 썼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것이다. 찻잎을 따뜻한 물에 넣어 자연스럽게 그 성분이 녹아들도록 하는 것이었다. 커피는 내리는 것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일반화되기 이전까지, 그리고 차가운 물에 우리는 더치커피가 유행하기 이전에는 대개는 드립커피가 원두커피를 마시는 대표적인 방법이었었다. 모카포트는 사실 아주 최근까지도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긴 원두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자체가 그리 오래지 않다. 박근혜 정권까지 나 역시 커피는 인스턴트만, 그것도 믹스커피만 먹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쓰이는 표현이 '곤다'는 것이다.

 

한국의 차는 차가 아니다. 오래전 보았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다. 중국인이 조선에 와서 차를 마시고는 일갈하는 장면이 있었다. 원래 차라는 것은 차나무 잎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스민차나 말리차 같은 것들은 찻잎이 들어갔으니 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차나 관음차, 홍차 같은 발효차들 또한 찻잎으로 만드는 것이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차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 차를 대신하던 이름만 차인 음료들이었다. 이를테면 생강차, 대추차, 귤차, 꿀차, 오미자차, 유자차, 모과차 같은 것들이다. 분명 이름에는 차가 들어가는데 정작 찻잎은 쓰이지 않았다. 차와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그래서 여기서도 쓰이는 어휘가 달라진다. 어떤 것들은 그냥 뜨거운 물에 섞기만 하면 되는데, 어떤 것들은 일정 시간 물을 끓이거나 해서 강제로 성분을 추출해야 한다. 전자는 인스턴트 커피와 같이 타는 것일 테고, 후자의 경우는 곤다는 표현을 썼었다. 차를 아주 잘 고았다. 그 장면에 등장한 차가 바로 밤차였다. 조선의 차가 차가 아닌 이유일 터다.

 

아무튼 비슷하게 술을 만드는 것도 몇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이 공존해 왔었다. 이를테면 술을 빚는 것은 누룩을 만드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었다. 전통주를 만들려면 먼저 누룩부터 빚어야 했다. 정확히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그 위에 누룩이 내리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그 누룩이 생쌀이든 고두밥이든 재료의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한 뒤 효모로 하여금 알콜발효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이 다음의 과정에서 주로 막걸리나 청주에 쓰이는 술을 거른다는 표현이 나왔다. 곡물을 발효하고 난 뒤 맑은 술만 거른 것이 청주, 그리고 남은 찌꺼기에 아직 다 걸러지지 않은 알콜을 물을 섞어 거칠게 마시는 것이 탁주, 그 탁주마저 거리고 나면 남는 진짜 찌꺼기가 지개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술을 만든다는 것이 공장에서 생산된 희석된 주정에 재료를 섞어 성분을 추출하는 의미로 바뀌면서 술은 담그는 것이 되었다. 더이상 집에서 술을 빚지 않게 되니 대부분 사람들에게 술이란 그렇게 희석된 주정을 사다가 재료를 넣어 담그는 것이 되었다. 참고로 그래서 소주는 원래 내리는 것이었다. 소줏고리에서 소주를 받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 술을 받는다는 표현도 있는데 이건 술을 구매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한국말이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한국말의 표현들은 적확한 어휘의 의미보다 정황적인 묘사나 연상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make가 아니다. 그냥 造가 아닌 것이다. 집을 지을 때도 어떤 때는 짓는다 하고 어떤 때는 올린다 한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거의 구분해서 알아듣는다. 어떤 때 짓는다 하고 어떤 때 올린다 하는가. 그리고 연상하기도 한다. 세운다 했으면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된장찌개를 어디선가는 끓인다 하고 어디선가는 담근다 한다. 아, 그래서 김치는 담근다는 것이다. 김치의 어원 자체가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는 침채에서 온 것이다. 글을 쓰기도 하고 끄적이기도 하고 휘갈기기도 하며 두드리기도 한다. 다만 그런 만큼 그런 차이를 무시하면 또 글이 매우 어색해진다.

 

글을 쓰면 쓸수록 어렵다 여기는 이유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보는가, 살펴보는가, 돌아보는가, 지켜보는가, 바라보는가,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훑어내리고, 쓸어내리고, 헝클이고, 그때그때 어울리는 표현을 찾아 쓰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욱 글을 쓰면서 사전을 끼고 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지금 상황에 이 표현은 적절한가. 예문을 보면 얼추 이해가 된다. 아직 나는 무척이나 한국말에 서툴다. 지금에 와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듯하다.

 

노릇노릇과 누리끼리의 차이를 이해한다. 노란과 누런의 차이를 바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까무잡잡한 것과 거무스름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파란 것과 푸른 것도 전혀 다른 색인 것이다. 빨갛고 붉은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달콤하고 달큰한 것이 다르고, 산뜻한 것과 선뜻한 것이 다르다. 이런 글 쓰면 또 어떤 인간들은 선비질한다 지랄하겠지만. 내가 어린 놈들을 싫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뭔 말을 못하게 한다. 무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병신들인 이유다.

공명功名이란 한 마디로 기회이고 인정이다. 과거제도가 정착되기 전, 고대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실력만 있다고 누구나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를 사용할 여건과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과 재능에 확신을 가질수록 개인들은 그를 활용할 기회를 바라게 되었고 그를 위한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누군가 인정해주고 발휘할 기회까지 허락해 준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전근대사회의 군신관계란 쌍무적 계약관계에 가까웠다. 관료제가 정착된 이후의 관계가 사용자와 고용인의 관계에 더 가깝다면 이전의 관계는 별개의 사업자간의 계약관계에 더 가까웠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적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얼마든지 등지고 떠날 수 있다. 정당하게 인정해주지 않고 댓가 또한 지불하지 않는다면 배신도 배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예양이 조양자 앞에서 자신이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한 이유를 털어놓은 대목일 것이다. 다른 군주들은 자신을 그저 여러 선비의 하나로만 여겼지만 지백은 자신을 나라의 소중한 인재로 예우했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자병법에도 보면 자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나겠다는 말이 아주 당연하게 쓰여 있는 것이었다. 충성이란 충분한 예우와 대가를 지불하는 이를 위한 것이지 그저 자신을 고용했다고 일방적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바로 공명이란 것이다. 공을 세우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자신의 계책을 고용주인 군주가 들어주어야 한다. 자신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존중하여 기꺼이 그를 위해 수고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공만 세우면 끝나느냐? 공에 따른 대가도 충분히 지불되어야 한다. 공을 세웠으며 명성이 오르고 지위가 오르고 부귀가 함께 따라오게 된다. 자신이 누리는 부귀란 자신의 실력으로 이룬 공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한 군주의 은혜인 것이다.

 

아마 삼국지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꽤나 당황스러운 부분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유비가 선인이고 유비에게 명분도 있을 텐데 어째서 악인이고 명분도 없는 조조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저토록 많은 것인가. 그렇다고 모두가 조조처럼 잔인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악인들인 것도 아니다. 조조를 주군으로 삼아 충성을 다하며 조조가 다스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모든 것을 내걸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은 원래 조조를 섬기던 이들도 아니었다. 장합이나 가후처럼 스스로 항복해 온 이들도 있었고, 혹은 장료처럼 포로로 잡혔다가 전향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같이 죽을 때까지 조조와 그 아들들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쳤다. 왜? 그래서 공명인 것이다.

 

조조의 휘하에서 그들은 그동안 얻지 못했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각이나 장제, 장수 누구도 주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원소나 여포의 휘하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관직을 주고 녹봉을 내리고 병사와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당사자가 바로 조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역할에 또한 조조는 적절한 관직과 녹봉과 권한과 책임으로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물론 그래서 조위가 그렇게 쉽게 망한 것이었다. 구품중정제가 시작되면서 관리들을 평가하고 등용하는 역할을 당시 중정을 맡고 있던 사마의가 가로채 버린 때문이었다. 실제 관리들 입장에서는 조위가 아닌 사마의가 더 직접적인 은혜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삼국지 시대에만 통용되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제가 정착된 명청시대에도 그와 같은 공명의 고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사회에서는 실제 누구에게 학문을 배웠는가가 더 중요했지만 명청사회에서는 누가 시험장에서 자신의 답안을 채택하여 합격시켜주었느냐가 더 중요했다. 학문이야 돈만 내면 아무에게서나 배울 수 있었지만 과거에 나가고 관직에 오르는 기회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명청사회에서 관료사회의 파당은 그같은 임용의 통로를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누군가의 은혜로 공명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오히려 사대부로서 너무나 당연한 미덕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비를 따르던 이들이 후대에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기도 했다. 유비가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그에 어울리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된 것은 적벽대전의 승리 이후 형주에 거점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쥐뿔도 없었다. 평원현은 공손찬이 임명하여 그 휘하로써 다스렸던 것이었고, 서주에서도 도겸이 죽고 지역의 유력자들에 의해 추대된 것이라 실권은 유비에게 있지 않았었다. 유비가 너무 쉽게 여포에게 쫓겨나고 조조에게 기반을 잃었던 이유였다. 황제가 있던 허도로 올라갔을 때는 조조가 아예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고, 원소의 휘하에서는 객장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남에서도 또한 유벽이 실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신야를 다스린 것도 유표의 객장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지 온전히 그의 영토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 망명한 유비를 조운이 찾아가 따랐고, 이리저리 조조에 쫓기는 와중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그 휘하로 몰려들고 있었다. 차라리 그런 유비에게 실망해 떠나간 진군이 정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형주에 정착하기까지 도대체 뭘 보고 그리 뛰어난 인재들이 유비에게 모여드는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결국은 공명이었다. 다만 조조가 자신의 신하들에게 제공했던 공명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상이었다. 정의였고 당위였다. 유비가 옳다. 유비가 이루고자 하는 방향이 더 가치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를 통해 자신 또한 더 가치있는 목표를 이루려 한다. 그래서 제갈량도 고작 촉한의 승상이라는 자리마저 큰 은혜라며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것이었다. 강유 또한 더 크고 더 부강한 조위에서 더 높은 관직과 더 큰 영화를 보장했음에도 차라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촉한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비참하게 죽더라도 촉한이 추구한 가치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 하지만 그런 어쩌면 바보같은 선택들이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십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던 고향을 떠나 유비를 따라 나서고, 결국 조조군에 군대가 와해되고 신하들마저 흩어진 상황에서 조운 또한 목숨을 걸고 그 자식과 부인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조조의 환대에도 관우는 자신이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한 유비를 찾아 굳이 먼 길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보다 유비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조조는 이익으로 신하들의 충성을 샀지만 유비는 가치로써 신하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유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충성을 다하는가. 그를 위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가고자 하는가. 예양이 조양자를 죽이기 위해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까지 버리고 심지어 끝내 목숨까지 내던졌던 것처럼. 군주가 자신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으면 배신 또한 배신이 아니었지만 다만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었다. 서황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양봉을 굳이 죽이지 않은 것이 그런 예다. 그런 관계를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써 아우른 것이 바로 후대의 충忠이란 것이었고. 그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무역은 지배층의 사치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전근대사회에서 대부분의 피지배층들은 굳이 다른 곳에서 생산된 물품을 구입해서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을 가지지 못했었다. 조금 아쉽더라도 그냥 인근에서 생산된 것들만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을 가져오기 위한 적지 않은 비용과 수고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의 영주들의 삶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양산형 판타지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는 것들로만 먹고 입고 쓰며 살았었다. 영지에서 경작한 밀들과 영지에서 농민들이 직접 길러서 바친 닭과 돼지와 양과 농민들이 직접 집에서 만든 치즈와 버터와 와인과 맥주를 먹고 마시며 살았었다. 영주와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들 또한 농민들이 직접 집에서 짠 천들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그 천들로 옷을 짓는 것 역시 농민들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때때로 자기 소유의 숲에서 사냥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농민들보다야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고 입고 쓸 수 있었으므로 크게 불만을 없었을 것이었다. 이슬람과 무역하며 사치품을 실어 나르던 상인들만 아니었어도.

 

중세유럽의 장원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귀족은 사치를 해야 했다. 다른 어느 귀족들에 뒤지지 않도록 사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치는 귀족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영지의 농민들을 쥐어짜야 했다. 정확히는 상인들이 요구하는 금화를 만들기 위해서 농민들이 생산한 작물과 수제품들을 팔아야 했는데 상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다 보니 결국 농민들의 수탈에 가까운 손해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직접 생산물들을 세금으로 거둬들여 상인들과 거래하기보다 농민들에게 직접 상인들로부터 화폐를 구해 바치도록 한 탓에 거래에서 우위에 있던 상인들은 농민들로부터 착취에 가까운 폭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짓거리를 국가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 바로 중상주의였다. 그런 권리조차도 돈받고 팖으로써 프랑스의 군주들은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어째서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인도를 찾겠다고 아프리카의 남단을 항해해야 했던 것일까? 콜롬부스에게 인도를 찾으라고 세상 밖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배와 막대한 비용까지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감자가 유럽 농민들의 영양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악마의 작물이라며 아예 감자를 먹지 않던 나라도 적지 않았다. 영국에서도 감자는 아일랜드의 거지들이나 먹는 부도덕하고 사악한 식품이었다. 오히려 초기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막대한 금은 에스파냐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바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대부분의 금과 재화들은 에스파냐의 군주들을 위해서 쓰였을 뿐 일반 국민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하긴 근대 이전의 국가란 곧 지배층이었다. 아니 근대 이전의 국민이란 곧 세금을 낼 수 있고 국가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지배 아래 있는 농민들을 용병들의 약탈대상으로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럽의 전쟁에서 농민들을, 심지어 도시까지 약탈했던 이들은 비단 적들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고용주의 마을과 도시까지도 얼마든지, 심지어 허락을 받고 약탈할 수 있었다. 그래도 되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의 역사란 그런 대부분의 피지배층을 배제한 지배층의 역사였던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근대 이전 지배층이 아닌 이의 이름이 과연 얼마나 나오고 있을까?

 

그래서 유럽인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미지의 위험을 감수해가며 인도를 찾기 위한 항해에 나섰던 것이었다. 인도에는 향신료가 있었다. 후추가 있었고 정향과 육두구가 있었다. 더 동쪽으로 중국에서는 차와 비단과 도자기를 수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피지배층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들여 온 수입품들은 너무 비싸서 일정 이상의 부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감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모험가와 상인들은 기꺼이 그런 수고를 감수할 수 있었다. 일단 항해만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그만한 이익이 있을 터였다.  그런 확신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게 했다.

 

그러면 조선은 어땠을까? 아니 조선에서 오히려 고려보다 상공업이 쇠퇴한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사치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사치를 과시하는 여느 다른 지배층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상인들은 뻔질나게 배를 몰고 그 사치를 위한 물품들이 있는 중국으로 항해를 떠나야 했었고, 마찬가지로 중국과 아랍의 상인들까지 물건을 잔뜩 싣고 배를 몰아 고려까지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달랐다. 물론 실제로는 조선의 사대부들도 상당한 사치를 누리기는 했었다. 하지만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사치는 사대부로서 기피해야 할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이항복이 친구인 이덕형의 별장을 두고 돼지집이라며 청청당이라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차라리 맹물로 배채우며 초가집에서 학식을 닦아야지 이런 사치스런 별장을 두고 호사를 누리는 건 사대부와 맞지 않는다. 그런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굳이 멀리까지 배를 몰아 찾아가서 사치품을 사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겠는가.

 

아마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것이다. 금욕과 절제를 앞세웠던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부르주아들조차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사치는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중국의 지배층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중국의 부자들은 버는 만큼 사치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 또한 그만한 수입을 갖지 못해서 그렇지 돈이 있으면 그 이상 사치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도 한국인들은 부자들이 사치한다고 언론까지 나서서 생지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이 있으니 쓰려는 것이고,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니 지불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닌 것들이 왜 남 돈 쓰는 것을 가지고 지랄하는가. 한국인의 도덕관에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쓰고 사는 것은 그만큼 부당하고 부적절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들이 개인적으로 사들고 온 것을 어찌어찌 구해서 쓰는 정도는 괜찮지만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중국까지 사람을 보내 사오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를테면 외국에 나갈 일이 있는 사람을 통해 구매대행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소량으로 구매하는 것이야 이전부터도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정식으로 수입해서 유통하는 것은 별개로 더 엄격한 기준과 관리가 필요한 지금의 체계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렇게까지 사치를 누리는 것이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치품들을 조선의 상인들이 공공연히 유통할 수 있었을 것인가.

 

결국은 수요가 생산을 이끌고, 소비가 유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요와 소비가 검약이라는 이름으로 억제되었으니 생산과 유통이 자극되었을 리 없다. 그런 도덕적인 엄격함과 엄숙함이 완화된 조선후기에 들어, 더구나 지배층인 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의 상공인들에 의해 조선에서도 유통의 발달이 촉진되고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사치에 있어 더 자유로웠던 중인 이하의 계층들이었기에 사대부들보다도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소비가 가능했다. 물론 당시까지도 대부분의 유통은 사치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어차피 전근대사회에서 운송수단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수레 한 대, 배 한 척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물품의 양은 제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기란 어려웠다. 그러므로 적은 양으로도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치품이 무역과 상거래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밖의 생필품들은 대부분 필요한 당사자가 직접 생산해 소비하는 자급자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이유다. 

간단한 비유다.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다. 아니면 비천한 노비였을 수 있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다. 그런데 타고난 능력으로 큰 공을 세우면서 높은 신분을 얻고 신분에 맞는 새로운 아내도 얻었다. 그렇다면 먼저 결혼한 평민, 혹은 노비 출신의 아내와 나중에 결혼한 높은 신분의 아내 가운데 누가 정처가 되고 누가 첩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실제로는 어지간하면 일단 이혼부터 시키고 결혼시켰다. 아니면 아예 당사자를 제거하여 그 원인을 없애거나. 후자의 경우는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로 흔히 쓰이고 있기도 하다. 아니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먼저 결혼했으니 정처라면 나중에 결혼했지만 신분이 높은 여성이 신분이 낮은 여성에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신분을 따지자니 이미 먼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많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어낸 전력이 걸린다. 그래도 역시 신분제 사회였기에 그나마 이 가운데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해법은 타고난 신분을 따르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분이 높으면 그냥 신분만 높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분이 높은 친정이 당연히 배후에 있었을 터다. 기껏 신분이 높은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처지가 열악하다면 여자의 친정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대대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성을 죽을 때까지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저 여성 개인이 아닌 특정한 집안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신분증명이며 그를 통해 여성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문제,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민족이 들끓는 변방의 토호의 딸과 해동갑족이라 불리우던 개경의 유력호족의 딸 가운데 누가 더 신분이 높았을까?

 

워낙 남성중심주의적인 사고가 강하고, 더구나 승자인 태종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료를 근거로 많은 2차 창작들이 이루어진 터라 많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일 것이다. 과연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 이성계의 주위에서 가장 크게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었는가? 조선의 모든 초석을 다진 정도전이었을까? 아니면 정몽주를 죽이고 고려왕조의 마지막 저항의지를 꺾어버린 이방원이었을까? 그 전에 지금도 산밖에 볼 것이 없는, 더구나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변경밖에서 야만족들과 어울려 살던 촌뜨기 이성계가 개경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세력까지 갖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드라마에서는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나오는 생산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한다 묘사했는데, 그러나 지금도 함경도는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실어 나르지 않으면 당장 한 해를 넘기기도 어려운 척박한 동네다. 당시는 함경도에서 그나마 재배할 수 있는 감자도 없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아는 것과 달리 이성계의 아들 이방우가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탈락한 것은 이방우가 스스로 물러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처가가 문제였다. 이인임의 측근이자 그와 함께 고려의 국정을 농단했던 지윤이 바로 이방우의 장인이었다. 이인임이 정권을 잡고 있던 우왕 시절 신돈이 실각하며 역시 함께 권력에서 멀어졌던 이성계가 다시 고려의 주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명문호족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하필 큰아들 이방우가 그래도 당대의 권력자였던 지윤의 딸과 결혼한 것이었다. 아다시피 지윤은 이성계가 최영을 쫓아 이인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사형당한, 말 그대로 아버지 이성계의 정적이자 국가적으로는 역적이었다. 그런 처가를 두고 있는 이방우에게 이성계의 후계를 맡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 그러면 당시 이성계는 도대체 뭐가 있어서 지윤이나 이제현이나, 민제와 같은 명문들과 자식을 결혼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당연히 이성계는 당시도 별 볼 일 없었다. 별 볼 일 있었던 것은 해동갑족 가운데 하나인 곡산 강씨 문중의 딸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그래서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후계문제에 있어 감히 신덕왕후에게 한 마디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 조선 조정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저 이방원마저 신덕왕후가 죽기 전까지는 그저 납죽 엎드린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덕왕후가 죽자마자 이숙번이 확보한 군사력을 사용해서 물리적으로 신덕왕후를 따르던 핵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정치적으로 완벽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이성계의 와병과 정도전의 방심이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르는 상당한 도박과 같은 한 수였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자신의 권력으로 신의왕후를 정처로 만들고 신덕왕후를 계비도 아닌 그저 후궁으로 첩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이성계는 자신의 정처인 신의왕후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후처인 신덕왕후의 아들 가운데, 그것도 막내를 후계자로 삼았던 것인가?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성계는 그런 어리석을 결정을 한 것인가? 하지만 당시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이들조차 그런 이성계의 결정에 딱히 반대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도 후계자 문제가 아닌 왕자로서 자신의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정도전의 조치에 반발하면서부터였고, 그러다가 아주 큰 빈틈을 발견하고 아예 상황을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시 이성계에게 정처는 다름아닌 신분도 고귀하고 더구나 조선건국에 큰 공도 있던 신덕왕후였었고, 막내 이방석은 죽을 때까지 한심했던 그 형 이방번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이 모든 정통성을 가지면서 그 사실들이 완전히 비틀리고 말았다.

 

이성계가 처음부터 고려에서 잘나가는 군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작은 그래도 쓸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변방의 토호 가운데 고려조정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놈이 있어서 공민왕이 받아준 것이었고, 그래서 인질 겸 해서 개경에 와 있을 때 당시 명문 가운데 하나였던 곡산 강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성계를 선택하여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혼맥을 바탕으로 신돈이 집권할 당시 이성계는 신돈의 신임을 받으며 한때 잘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신돈이 실각하면서 같이 한미한 처지로 내몰리고, 이인임의 집권기에 곡산 강씨를 배경으로 여러 명문과 혼맥을 맺으면서 그 위치를 공고히한다. 그리고 최영이 요동정벌이라는 결정적인 악수를 두면서 비로소 여전히 주변을 맴돌던 이성계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여기서 곡산 강씨를 빼면 그때는 이성계를 주인공으로 한 무협활극이 된다. 재미있기는 한데 당시 고려사회를 떠올려보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게 이해하면 모든 것이 간명해진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이다. 역사를 볼 때 남자만 봐서는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유럽 군주들의 생모나, 혹은 계모, 아니면 그들 자신들의 부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들의 출신과 성향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래야만 했던 동기들과 그런 것들이 어떻게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니까 결국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두 나라의 왕들이 혹은 사촌이었고, 혹은 종질간이었고, 혹은 동서지간이었다. 삼국지에서도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장비의 딸인 유선의 비가 하후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선건국 역시 마찬가지다. 신덕왕후 없이 이해하면 그 치밀함이 많이 떨어진다.

 

우연히 1차 왕자의 난과 관련한 어떤 컨텐츠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달린 댓글 가운데 첩의 말에 현혹되어 어쩌고 하는 말이 괜히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신덕왕후가 첩이 된 것은 왕이 된 태종에 의해서였다. 그런 조치들이 부당하다고 숙종이 다시 신원하여 계비로 올린 것이었다. 조선사회의 폐해 가운데 하나인 서자에 대한 차별도 거기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면 누가 적자고 서자였는가? 우리 외할머니가 전주 이씨이시다. 그래도 할 말은 한다.

삼국지 정사의 기록을 보면 흔히 보이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누구의 병사를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군이란 당연시 중앙정부에 속해 있는 것이고, 지휘관 역시 중앙정부에서 임명해서 내려보내는 것인데, 어째서 굳이 병사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그 소속까지 바꾸는 것인가. 더구나 일찌감치 중앙집권이 완료되어 관료적인 체계가 정착되어 있던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근대 이전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봉건적인 질서를 떠올려 본다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명망있는 사대부들에게는 그 명성을 쫓아 보여드는 또다른 사대부들이 있다. 당장 글씨부터 대부분 사대부들은 굳이 자신의 글씨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글 잘 쓰는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대필을 맡겼다. 문장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역시 그에게 문장까지 맡겼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토지와 노비에 집착했던 것이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지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챙겨야 한다.

 

하물며 전국시대 일본은 각 다이묘들이, 아니 사무라이 개인이 독립된 단위였었다. 사무라이마다 각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신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가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영지가 간절히 필요했다. 영지가 없으면 다른 수단을 통해서라도 수입을 만들어 그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해적질이나 인신매매가 딱히 죄악으로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신들을 책임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신들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지휘관급의 전사자가 적지 않았던 조선군에 비해 일본군에서는 다이묘급의 전사자가 드물었던 것이었다. 다이묘와 가신단이 하나가 되어 싸우고, 따라서 위기의 상황에서는 마땅히 자신들의 머리인 다이묘를 살리기 위해 가신들이 희생해야 한다. 다이묘는 뒤에서 지켜보며 지휘하고, 가신들은 그 손발이 되어 앞장서서 싸운다. 그리고 그 모든 공적은 다이묘의 것이 되고, 그 공적에 따라 획득한 전리품과 상급은 다이묘에 의해 가신단에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더욱 가신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다이묘를 지키고, 다이묘의 공적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신들의 이익을 높이고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다이묘와 가신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삼국지의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최근까지 중국에서는 유력자들이 다수의 식객을 거느리고 자신을 위해 그들을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유력자일수록 더 큰 토지와 저택을 가지려 했던 것이었다. 그래야지만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재우고 먹히고 입히며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거둔 유력자가 움직이면 그를 따라 움직였고 그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높은 관직과 재산과 부귀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유력자들이란 그런 다수의 군중을 거느린 대표자를 뜻하는 것이었단 것이다.

 

삼국지의 조인을 단지 조인 개인으로만 봐서는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표의 휘하에 있던 채모 역시 채모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형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력호족이었다. 그 영향 아래 있던 인물들이 형주에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그 의견을 받아 쓴다면 그것이 곧 채모 자신의 능력이 되었다. 삼국지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식읍이란 바로 그를 위한 재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혼자 먹고 사는 정도를 넘어서 얼마나 자신을 위한 세력을 꾸릴 수 있을 정도의 재화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식읍을 회수하고 병사를 회수한다는 것은 더이상 그와 같은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당히 가혹한 처벌이었다. 이후로는 그저 개인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분명 한계가 있다. 개인의 재능도, 역량도, 경험도 분명 명확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다른 인물들로 보충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 또한 넓어진다. 그래서 게임에서도 삼국지든 신장의 야망이든 신분이 높을수록 비례해서 능력 또한 높아지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의외로 현실적이다. 그만큼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다양한 경험을 더욱 직간접적을 얻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부족한 능력과 경험을 빌릴 수 있는 대상이 주위에 있었다. 젊은 시절 사이토 요시타쓰 하나만으로도 전전긍긍해야 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어느새 다케다나 우에스기, 미요시 등의 유력 다이묘들까지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조조도 젊은 시절에는 실수도 많았고 패배도 적지 않았었다. 조인은 여남에서 유비를 박살내고서야 비로소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보여준 것도 별로 없는 유비나 관우, 장비, 조운 등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높았던 것도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개인의 역량이 그만큼 뛰어났었다.

 

한중에서는 조조를 몰아붙였던 유비가 관우도 잃고 장비도 잃고 법정과 조운과 제갈량과 황권마저 주위에 없는 상태에서 육손을 상대로 얼마나 한심한 졸전을 벌이고 있었는가. 유비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를 시행하는 주위의 인물들의 역량이 이전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유비의 실력이 되고 실적이 된다. 그런 만큼 강동의 호족이었던 육손 역시 그 승리가 자신의 실력이 되고 실적이 된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살짝 회의를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아마 와키자카가 말년까지 겨우 7만석의 다이묘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뻑하면 100만석 운운하는 대다이묘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다. 잘난 조상을 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영지나 가신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 불리며 그 최측근이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 한계는 명확했다. 와키자카가 이후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며 보신에 힘쓴 이유거니와 그럼에도 여전히 7만석이란 영지 이상은 누리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 와키자카가 유일하게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전장이 그런 점에서 토요토미의 명령으로 다른 다이묘들의 병력까지 아우를 수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이 아니었을까.

 

다케나카 한베에나 구로다 간베에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이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결국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실력에 의한 것이었다. 다케다 신겐의 군사이던 야마모토 칸스케 역시 우에스게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작전에 실패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가신들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명성과 영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빈익빈부익부인 것이다. 관우에 비해 명성에서 밀리던 서황이 정작 형주에서는 관우를 이길 수 있었다. 황충이 하후연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 법정의 계략이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그를 모두 포함해야 하는 것이 또한 현실의 냉혹함이기도 한 것이다.

 

이재용 개인의 능력이야 어떻든 삼성의 경영진들은 뛰어나다. 삼성이란 기업 자체는 강하다. 누가 총수로 있는가보다 그 총수의 주위에 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것이기도 하다. 기껏 주위에 모인 놈들이라는 게 임종석이나 윤영찬, 박수현 같은 놈들 밖에 없었다. 고민정 같은 찌그래기들이 더 행세하는 상황이었다. 전해철과 양정철이 친문을 앞세우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처럼. 그리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지만.

고려시대 전국의 대형사찰들은 당연하게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대규모의 농장까지 경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왕실이나 귀족으로부터 시주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는가?

 

불교신자라면 알지 모르겠다. 불교 교리에는 고리대금에 대한 금기가 딱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고리대금을 교리로써 금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고려에서는 사찰에 의한 고리대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기는 아예 일본에서는 사찰이 사병까지 보유하고 조정과 다이묘들을 상대로 무력으로 맞서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런 현실을 당시 고려의 사대부들은 현실로써 바로 눈앞에서 겪고 있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내세를 지향한다. 현실을 고통이라 여기고 그 고통이 사라진 내세의 피안을 추구한다. 그렇다 보니 불교의 교리에는 현실에 대한 고려가 그다지 충분치 않다. 그래서 불교의 경전을 보더라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굳이 구체적으로 설파한 내용을 찾기가 힘들다. 있다면 대부분 위경일 것이다. 불성부모은중경이 그 대표적인 예다. 현실의 가치인 효를 강조한 경전의 내용은 그러나 현실의 삶은 의미없음을 주장한 불교의 교리와 충돌한다. 그렇게 현실을 무시한 내세지향의 교리는 현실의 수많은 죄악을 무시하고 방관하고 심지어 동조케 만들었다. 어느 유명승려의 성폭행한 친부에 대한 조언은 그런 한 예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불교 자신이 그 죄악에 일조하는 것도 그리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부처를 부정하고 사찰을 훼손하는 폐석훼불이 주기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거대한 사찰이야 말로 악의 근원이다. 비대해진 사찰은 곧 현실의 악이다. 그리고 고려의 사대부들은 그 폐단이 고도로 일어나던 현실을 직접 몸으로 겪던 이들이었다. 그나마 돈도 있고 힘도 있던 권문세족 출신은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면 그런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겪었을 터였다. 불교에 대한 이색과 정몽주의 태도가 정도전 등의 그것과 달랐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억불숭유를 국가시책으로 정하고서도 그를 확정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었다. 여전히 다수 사찰들은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유착해 있었다.

 

그런 역사를 이해한다면 문화재관람료랍시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돈을 뜯어내는 행위가 당연하게 이해가 된다. 하긴 그러니까 대통령이 작업중인 자재 위에 앉아 있었다고 지랄하는 승려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역시 고려말 나타났던 불교의 폐해 가운데 하나였다. 사찰을 절대화하고, 사찰이 소유한 불교의 상징들을 신성시하며, 그를 통해 대중을 억압하고 강제하며 수탈하기까지 했다. 그저 억압하는 주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교는 어느새 바로 이전의 폐단으로 지적되던 시절로 돌아가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고려말의 사대부들은 불교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들 역시 사찰이 불을 지르고 승려들을 때려 내쫓으려 했던 것이었는가. 현세를 위한 도덕과 규범이 없는 내세의 종교는 때로 현세의 욕망 앞에 너무 무력하다. 과거 기독교가 그랬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역시 내세가 아닌 현실의 규범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톨릭에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종교란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성직자와 종교인들은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떠올렸다. 고려말의 사찰들이 어떤 꼬라지였었는가. 아니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유력자들과 결탁한 사찰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해인사를 약탈한 이유였다. 차라리 죽고 나서 내세만 포기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야. 현실에서 더 큰 부귀영화만 누릴 수 있다면 윤회든 해탈이든 아랑곳할 것이 있는가. 그다지 믿고 있지도 않다. 내가 불교를 믿었었다. 지금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땡중인 것이다. 버러지들인 것이다. 그런 놈들을 부처는 가장 혐오했을 테지만.

 

해탈을 포기한 승려란 그저 밥버러지들인 것이다. 그래서 대승을 그리 많은 이들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대승은 사람의 역할이 아니다. 대승을 이루려면 먼저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승려는 사람이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할 때도 최씨정권의 뒤를 이은 무신 실력자들은 강력하게 반대했었다. 그래서 하극상으로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김준을 주인공으로 드라마까지 만들어진 것이었다. 몽골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으니 이들이야 말로 민족의 영웅 아니겠는가. 한때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까지 몽골에 대한 항복에 반대하여 목숨을 걸고 맞싸웠었다. 하지만 지금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평가는 전과 다르다. 왜일까?

 

인조가 청에 항복하고 조선은 군비에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조선의 군비에 대해 항상 감시당하고, 성을 수리하거나 할 경우 보고하고 허락까지 받아야 했다. 당연했다. 기왕에 종주국이 되고 속국이 되었는데 그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최소한 무효화시킬 수 있는 힘을 속국이 가지는 것을 허락할 종주국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바쿠후도 참근교대 등을 통해 전국의 다이묘들을 무력화시켰던 것이었다. 실제 고려 역시 몽골에 항복하고 영토도 떼주고 상당한 내정간섭까지 받으며 당연하게 군비까지 제한당해야 했었다. 문제는 무신정권들이 그동안 고려의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던 그거가 바로 그 군사력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려의 최씨정권이 거란의 침략과 몽골의 침략이란 국난에서도 정작 자신들의 사병인 중앙군을 아끼며 개경과 강화도에 주둔시키고 있었던 이유였다. 이들은 오로지 안전한 후방에서 백성들을 수탈하며 거부하는 백성들을 도륙하는 역할만을 하고 있었다. 그놈들이 바로 얼마전까지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었던 삼별초란 것들이었다. 백성들이 곳곳에서 죽어나가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동안에도 그놈들은 강화도에 숨어서 온간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감히 누구 하나 그에 저항하지 못했었다. 그에 도전할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결국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것도 최씨정권의 군사력을 중간에서 착복한 다른 무신들이었다. 최씨정권의 가신이었던 김준과 같은. 그리고 그들 역시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시금 이전의 무신정권처럼 되고자 하고 있었다. 문제는 더 이상 고려의 중앙군이란 것이 그들의 권력을 지탱해줄 만큼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이 장악하고 있던 고려의 군사력이란 고작 강화도와 아직 몽골군이 약탈하지 않았거나 이미 약탈하고 지나간 일부 지역에나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몽골군이 만에 하나라도 무신정권의 대적자에게 힘을 실어 줄 경우 아무런 명분도 체계도 없이 그저 군사력만으로 일어선 무신정권은 그대로 무너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의 국왕과 태자가 몽골군을 등에 업고서라도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항복조건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순조롭게 항복협상이 이루어졌다면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몽골을 등에 업고 고려의 국정을 다시 고려의 왕가가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신들은 끝까지 저항했고 그 과정에서 항복조건은 더 나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과연 고려를 위한 것이었는가? 고려의 백성들을 위한 우국충정에서였겠는가? 그리고 몽골이 고려 국왕의 편에 선 순간 예정대로 무신정권은 철저히 몰락하고 말았다. 고려말의 무신들이란 그래서 몽골항쟁기와 달리 대부분 권문세족 출신으로 자신들의 사병을 기반으로 중앙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들이란 것이다. 그것이 고려의 항복과 무신의 저항이라는 역사의 진실이다. 이면도 아니다. 다 드러나 있었으니. 그래서 삼별초도 뒈지기 싫어서 항복을 거부하고 날뛰었던 것이었다.

 

얼마전부터 남송의 명장 악비의 죽음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과연 악비가 마지막까지 금과 맞서 싸우려 한 것이 오로지 우국충정 때문이었는가? 설사 사실이더라도 당시 남송의 조정이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고 있었을 것인가. 악비가 금군과 싸워 연전연승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대부분 전해지는 승전기록이란 악비의 후손들이 작성한 행장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의 승전은 매우 초라하고 정국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임경업이 병자호란 당시 백마산성을 잘 지켜서 청군이 우회케 했다 할지라도 결국에 청군이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는데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남한산성에서도 아주 작은 승리라 할 만한 싸움이 아주 없지 않았었다. 그래서 과연 악비의 승리는 남송의 열세를 뒤집고 금에 대한 반격을 시도할 만큼 거세고 압도적이었는가? 그렇다면 악비의 주장을 받아들여 끝까지 금과 적대하는 것이 남송의 입장에서 과연 좋기만 한 일이었겠는가?

 

그러고보니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강유다. 촉의 마지막 충신이자 명장이랄 수 있는 강유였지만 그러나 촉에서의 대우는 악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쓸데없는 싸움으로 촉의 국력만 소모시킨다. 자잘한 승리는 몇 번 있었지만 결정적인 승리 없이 촉의 내정에 크게 부담만 지운다. 더구나 강유의 존재로 인해 언제부터인가 한중의 군사력은 촉의 조정과 별개로 따로 움직이는 경향마저 보였다. 장완과 비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비의마저 죽고 나자 강유는 자기 마음대로 한중의 군사를 움직이며 위와의 전쟁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촉은 아직 결정적으로 위에 패퇴한 적 없이 오히려 위에 대한 공세를 이어나가던 상황이었다. 황제와 황족들이 죄다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아예 절딴나다시피 했던 남송의 상황과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금과의 강화를 반대하며 군사행동만을 주장하는 악비의 존재가 남송의 조정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과 강화가 이루어질 경우 군사적인 적대관계가 일부라도 해소되면 군부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욱 줄어들고 말 것이다. 과연 악비와 한세충의 강화반대에는 이같은 상황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는가?

 

아마 그래서 이전까지 우국충정에 불타는 능력까지 갖춘 충신이었던 진회가 악비의 죽음에 즈음해서부터 갑자기 간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일 게다. 당시 남송의 입장에서 봤을 때 금과의 강화는 불가피했다. 아직 남송이 자리한 강남 전역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에는 남송 조정의 행정력도 지배력도 충분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혼자서 도망쳐 온 황제의 권위는 매우 미약했고, 전대 황제들마저 금에 포로로 잡혀 있었기에 정통성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오죽하면 조정이 중앙군을 제대로 만들고 운영하지 못해 몇몇 군벌들이 병사를 모집해서 독자적으로 금과의 항전을 이어나가고 있었겠는가. 그러고보면 선조가 이순신을 경계한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군사도, 배도, 무기도, 식량도, 물자 하나까지 차라리 몽진해 있던 조정이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이순신이 조정으로부터 전쟁이 일어난 이후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런 상황에 그런 무신들에 의지해서 금과의 기약없는 전쟁을 이어나간다? 남송 조정에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남송의 황제 고종과 진회가 악비를 죽이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악비와 한세충 등 군벌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던 사병들을 중앙군으로 재편하는 당연한 과정도 거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서는 악비가 자신의 사병을 중앙군에 편입하는 것을 반대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에 군벌이 소유한 사병은 중앙정부에 위협이 되고, 그 사병을 중앙군으로 재편하기 위해서라도 군벌의 해체는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숙청이란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악비의 죽음을 계기로 한세충까지 은퇴하면서 남송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군벌은 어찌되었거나 최소한 사라지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경우 악비의 죽음이 그렇게까지 무리한 일이었겠는가. 다만 민간의 입장에서는 그런 정치적 사정과 상관없이 침략자인 금과 끝까지 맞서 싸우자고 주장한 악비에게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후 어느 정도 내정이 안정된 뒤에는 남송 조정에서도 금과 맞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악비를 다시 복권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런 사정들이 지금의 악비와 진회의 위상을 만들었다.

 

악비가 죽어야 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악비가 충신이었고 명장이었을지 모르지만 당시 남송에 필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 남송에 필요했던 것은 북송이 망하고 막 남송이 일어난 혼란스러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누군가였다. 금과의 전쟁은 그 다음에 생각했어야 했다. 당장 금을 군사적으로 패퇴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면. 진만인적이라던 한세충도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남송으로 후퇴해 있었다. 당연했을 것이다. 역사란 때로 너무 당연해서 부조리하다.

과연 선사시대 인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특히 농경을 시작하기 전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들은 실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크고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을까? 실제 원시적인 삶을 여전히 이어나가는 오지의 부족들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특히 유전적으로 근육발달에 다른 인종에 비해 우월하다 여겨지는 아프리카인들의 경우를 본다면 더욱 답은 명확해질 것이다. 그런 일 없다.

 

말하자면 근육이란 군대와 같은 것이다. 확실히 많이 가지고 있으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동안 쓸데없이 부족한 열량만 소모한다. 다이어트하려면 일단 근육부터 키우라는 이유다. 먹는 것만 줄여서 다이어트 해봐야 배만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근육이 많으면 대사량도 늘어난다. 같은 움직임으로 더 많은 열량을 소모하게 된다. 문제는 근대 이전 대부분의 인류는 충분한 열량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는 것이다. 멜서스가 주장한 그대로 아무리 식량생산이 늘어나도 그보다 인구의 증가가 더 앞서기 때문에 항상 식량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거의 항상 영양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충분한 영양을 항상 섭취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의 지배층 뿐이었으며 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을 확보하는 것조차 항상 버거웠다. 그런 사람들에게 근육이란 과연 필수기관일까? 아니면 유지조차 버거운 잉여기관이었을까?

 

아니 이와 같은 진화는 인류의 역사 이전, 지구상에 생물이라는 존재가 출현하면서 지속적으로 반복적인 시행착오를 통해 획득하고 유전되어 온 형질인 것이다. 항상 먹을 것은 부족했고, 따라서 부족한 가운데서 생존을 위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필요이상의 근육은 잉여이므로 따라서 굳이 단백질을 더 먹는다고 근육을 키우는 경우란 거의 없다. 일정 이상의 근육을 획득한 상태라면 대부분의 단백질은 대사과정을 거쳐서 다른 영양분으로 전환되어 에너지로 쓰이게 된다. 당연히 그러니까 육식동물들이 단백질로 이루어진 고기만 먹고서도 잘도 돌아다니는 것이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곡물도 채소도 없이 오로지 고기만 먹어도 다른 필수 비타민과 무기질만 충분히 공급하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일정 이상의 열량을 지속적으로 소모하는 노동에 종사할 경우 주기적으로 에너지로 사용할 탄수화물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지방과 함께, 아니 지방에 우선해서 단백질을 에너지로 사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대부분 노동자들이 앙상하게 마른 근육을 가지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른바 실전근육이란 것이다. 근육이 너무 많으면 몸이 무거워진다. 에너지도 너무 많이 소모하게 된다. 분명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힘도,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힘도, 심지어 유연성이나 민첩성에서까지 근육이 많은 쪽이 더 우월할 테지만, 그러나 필요한 최소한의 힘만 사용하며 지속적으로 노동할 경우 필요 이상의 근육은 오히려 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분해하려 한다. 분해해서 에너지로 쓰려 한다. 그리고 줄어든 근육 만큼 약화된 활동대사는 이후 보충된 열량을 다시 지방으로 저장하려 한다. 팔다리는 깡마르고 배만 튀어나온 노가다체형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배만 나오는 것도 영양이 넘쳐나는 현대에서나 나타나는 현상일 테고 대부분 시대에서는 그냥 깡마른 몸에 겨우 필요한 근육들만 단단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면 혹시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조각들은 어찌된 것이냐? 과거 인류가 마른 근육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떻게 그리스 조각상에서 남성들은 그처럼 우람한 근육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에 연구한 결과가 나와 있다. 한 마디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에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근육은 상상의 산물이었다. 실제 남성의 근육을 모델로 그것을 최대한 크게 키운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상상속의 근육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도 대부분 남성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하든 지식노동에 종사하든 현대의 대부분 평범한 남성들과 다르지 않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근육은 환상이다.

 

오죽하면 20세기 초반 한 차력사가 자신의 힘자랑을 하려 돌아다녔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 근육에 매료되어 그것을 구경하겠다고 돈까지 지불했겠는가. 바로 보디빌딩의 시작이었다. 이후의 보디빌딩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의 근육이었지만 그조차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다. 육체노동을 시작하고 오히려 근육이 줄어든 것은. 작년까지 줄어든 근육을 이제서야 겨우 1 kg정도 만회할 수 있었다. 어째서 사람은 근육이 많을수록 보수적이 되는가? 답이 나오지 않았을까? 근육을 키우고 유지할 수 있다는 자체가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심지어 직장에서 동료들이 나를 두고도 그런 말을 한다. 저런 몸은 보충제 먹어가며 빡세게 운동하고 관리해야 가능한 몸이다. 그렇게 대단한 근육도 아닌데 그마저도 매일매일이 힘들고 고단한 동료들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긴 나 역시 지금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기도 하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운동하고 씻고 밥먹고 그냥 바로 잠들어 버린다. 일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을 오로지 운동과 식사와 휴식만으로 보내는 것이다. 동료들과 밥을 같이 먹거나 술을 마시는 등의 사회적 관계를 위한 투자는 등한히 할 수밖에 없다. 고작 주말이나 되어야 겨우 시간을 내서 이것저것 할 수 있지 일과 운동을 병행하는 평일에는 인터넷에 글쓰는 것조차 때로 너무 버겁다. 민주당 깽판짓에 아예 글쓰는 자체를 포기해버린 또 하나 이유다. 운동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다.

 

더구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 주 52시간이 정착되기 전에는 이나마조차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종료들이 나를 대하는 시각이 그때 내가 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 12시간 이상, 심지어 때로 주 6일까지 일하고 나면 그야말로 지쳐서 운동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다. 겨우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고작 5년 전에서야 겨우 운동이란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와 같은 노동자가 근육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참고로 저 연구가 나온 곳은 계급의식이 벌써 오래전부터 강하게 정착된 영국이었다. 계급과 정치성향이 상당부분 일치하는 동네라는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과는 다르다. 그래서 근육이 많으면 보수적이 되는 것이다. 근육을 키우고 유지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계급적으로 상위에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더 적은 시간을 더 저강도의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근육을 키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란 것이다. 남는 여윳시간동안 정교하게 계산된 프로그램 아래에서 자신의 근육을 위해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고, 더불어 그렇게 키운 근육이 불필요한 에너지 대사에 소모되는 것을 피하면서도 적절한 영양섭취를 위해 필요한 비용까지도 너끈히 감당할 수 있다. 요즘 물가 올라서 삼시세끼 고기로 필요한 단백질 섭취하려면 허리가 뽀개질 지경이란 것이다. 닭가슴살도 맛있게 먹으려면 돈이 오지게 깨진다. 그런 것들이 가능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내가 하루에 먹는 고기양 들으면 역시 동료직원들은 경악한다.

 

그나마 내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몸이 문재인 정부가 이루어낸 성과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의 어떠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좋은 걸 알면서도 운동할 시간도, 체력도, 돈도 부족하다. 너무 힘들고 너무 버겁고 너무 가난하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2번남은 2번남인 것이다. 더 적은 돈을 받으며 더 오래 일함으로써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 살면서 하다하다 그런 병신들은 정말 참신할 지경이었다. 버러지새끼들이다.

말갈靺鞨의 중고대 중국어 발음은 대충 무앝핱 정도가 될 것이다. 물길勿吉은 미웉깉으로 읽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일단 남아 있는 사료만 보더라도 말갈을 모두 하나의 부류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여겨진다. 특히 만주 서부에 거주하던 백산말갈과 속말말갈에 비해 흑수말갈은 발해가 건국된 이후로도 상당한 이질성을 유지하며 긴장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더구나 흉노나, 몽고, 선비의 예를 보더라도 여러 계통의 다양한 부류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 시도가 이전부터도 매우 흔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말갈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고려 이후 한반도에 존재했던 이질적 천민집단을 부르던 무자리란 것이다.

 

흔히 대표적으로 화척이라 불리는 그들은 혹은 수척, 혹은 양수척이라 불렸으며 이두식으로 무자리라 번역되고는 있다. 그리고 이들 무자리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주로 도축과 피혁가공, 버들고리가공, 수렵 등 한반도의 주류인 정착농경인과 상반되는 특징을 매우 강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차라리 만주에 살던 만주족의 그것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실제 조선 중기까지도 이들은 한반도 사회에 녹아들지 못하고 이질성을 유지하며 한반도 정부의 지배에 저항하다가 결국 천민으로 그 신분이 고착되고 있었다. 화척을 굳이 일반 백성을 뜻하는 백정이라 부르면서까지 조선에 동화시키고자 했던 조선조정의 노력이 결국 백정을 천민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끝나고 만 것도 그런 고칠 수 없는 이들 집단의 이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했더니 견디지 못하고 곳곳에서 살인에 강도에, 심지어 무리를 지어 약탈까지 일삼았다. 임꺽정이 그런 가운데 전국구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신라, 백제, 고구려는 상당히 일찍 하나의 집단으로 동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니 최소한 신라의 지배집단이 이들 피정복민인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차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들 사이에 이질성으로 인해 분란이 일어났다는 기록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후고구려라 했지만 궁예의 세력에는 신라의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후백제라 이름한 견훤 역시 후기신라의 군벌을 기반으로 발호한 집단이었다. 고려말 신라의 부흥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아다시피 그냥 흐지부지 진압되고 마는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이미 신라 하대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유구한 무자리는 심지어 일제강점기까지도 곳곳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조선사회와 겉돌고 있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결국 서로 언어와 문화에서 일정 정도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서로 동질성을 느낄 정도의 공통점은 있었을 것이란 점과, 더불어 아직 야만상태에 있었던 이민족들과 다른 문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결국 문명화된 삼국은 문화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나라마다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문명 이외의 것이라 치부할 정도의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신라의 지배가 이전 지배층의 지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차이가 없다면 굳이 거스를 필요가 없으니 동화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생존에 이익이 된다. 그런데 무자리는 한반도의 그런 보편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착할 수 없었다. 태종이 그렇게 무자리들을 모아 한 곳에 정착시켜 농사를 지으며 살도록 만들고자 노력했음에도 그들은 끝내 주변의 농민들과 싸움을 일으키고 정착지를 떠나 곳곳을 떠돌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반도의 집시가 되었다. 내가 무자리에 대해 알면서 떠올린 집단이 바로 집시였다. 남사당의 기원도 바로 이들 무자리였다. 무자리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순종적이지 않은 무자리들로부터 여자들을 빼앗아 관기로 삼았었는데 이때 여자 없이 떠돌던 무자리들이 남사당이란 이름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남사당이 곡예를 보이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버들고리를 짜고, 가죽제품을 팔고, 혹은 도축과 수렵으로 조선의 일반백성이 꺼리는 일을 대신하면서 그들은 조선사회의 경계에서 조선인의 밖에 존재하며 생활을 영위해 왔었다. 그리고 무자리들 자신도, 조선백성 누구도 그들을 자신들과 같은 무리라 여기지 않았었다. 그런 적개심은 신분적인 차별로 발전해서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첫째 생각하는 것은 삼국시대 삼국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만큼 한반도 북부에서 이후 이주한 무자리들의 이질성은 생각한 이상으로 컸었다. 무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 만큼. 그래서 무자리들, 정확히 말갈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타칭설을 지지하는 이유다. 바로 조선사회에서 백정이라, 혹은 이전 고려에서 화척이나 양수척을 대하던 당시 한반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화가 되어 있던 삼국인들이 문명화가 되지 않은 주변의 이민족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 말갈이 아니었을까. 시작은 자칭이었을지 몰라도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그냥 말갈이 그들을 아우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를테면 만주족이든 몽골족이든 타타르족이든 죄다 뭉뚱그려 오랑캐라 부르던 것처럼. 여진이든 한족이든 화척 출신이든 일본인이 아니더라도 해적은 일단 왜구라 부르고 본다. 그래서 미추왕 때 고작 경주 인근이나 지배하던 말갈이 왕성까지 쳐들어와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민족으로서의 말갈이 아니라 야만집단을 일컫는 이름으로서의 말갈이다.

 

그러니까 부여 일대에 살던 야만인들은 속말말갈일 테고, 만주 남부에 거주하던 비교적 순종적인 고구려와 이질성이 크지 않던 야만인들은 백산말갈이었을 것이다. 옥저나 동예와의 관계도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흑룡강을 따라 내려온 집단은 검은 물 근처에서 산다 해서 흑수말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과 그래도 같은 한반도에서 아웅다웅하는 문명인인 자신들은 다르다. 다만 여기서 또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좀 배우고 가졌다는 놈들은 식민지 조선의 무지렁이 백성들이 아닌 일본의 지배자들과 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차라리 혈연적으로는 속말이나 백산과 더 가까우면서도 문명적으로 고구려 지배자들 입장에서 신라가 더 가깝게 여겨졌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야만인인 말갈과 동류로 남기보다 신라에 동화되는 것을 선택했다. 

 

아무튼 나로서는 말갈과 만주족과의 연관성을 하나의 민족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나바호와 코만치가 다른 것처럼, 오환족과 탁발부의 선비가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처럼, 말갈이라는 이름 안에 서로 다양한 이질적 집단이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의 차이보다 더 작았다. 그나마 그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것이 고구려였을 텐데,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조차도 너무나 쉽게 짧은 시간 안에 고려사회에 동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직 말갈만이 한반도 사회에서 겉돌았던 것이었고. 그만큼 말갈과 한반도인 사이에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정체성의 간극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냥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