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살아있는 동안 몇 천, 아니 몇 백 단위로만 학살을 저질러도 오만 욕을 쳐먹는다. 역모와 같은 죄를 저질러서 법에 따라 연좌하여 벌을 주는 경우에조차 상황에 따라서는 평가가 안 좋은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사람을 너무 함부로 죽였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 권력을 남용하여 너무 쉽게 사람을 죽였었다. 그래서 정도전도 다른 건 몰라도 이숭인과 스승이었던 이색의 죽음에 관여된 것으로 여겨지곤 해서 꽤나 욕을 들어먹고 했었다.

 

왕 한 번 되어보겠다고 아버지의 신하들은 물론 서모와 서형제와 친형제, 그리고 단종에게 충성했던 신하들과 심지어 단지 그 모의가 있었던 지역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죄다 죽여버린 수양대군이 말년에 벌을 받아 문둥병을 알았었다는 민담도 그런 한 예가 될 것이다. 그 결과 수양대군의 후손으로 왕위에 오른 숙종에 의해 대부분 수양대군에 의해 죽어간 이들이 수 백 년이나 지나 신원되고 있기도 했었다. 아니 그 전에 당대에조차 세조에 의해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통해 돌려깠다가 부관참시까지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조 때도 경연에서 세조의 즉위에 반대하다가 죽은 사육신을 두고 신하들과 왕이 논쟁을 벌이고 있기도 했었다. 혈연에 의해 세습되는 전제왕조 조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물론 유럽에서였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다. 아주 최근까지도 유럽에서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들고 일어나면 일단 잡아다 목부터 매달고 보았었다. 직접 잡아죽이진 않더라도 아주 있는 것을 탈탈 털어 더이상 살지 못할 지경으로까지 내모는 것도 서슴지 않았었다. 신도 없어서 맨발로, 더구나 옷이라고 해봐야 넝마나 겨우 걸친 채 힘겹게 일상을 살아가던 농노의 모습이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고용된 병사들의 급료와 보급을 아끼고자 기꺼이 자기 영지를 약탈지로 내놓는 경우마저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제물로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근대화 이후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유교란 곧 악이었을 테니.

 

삼국지의 인물들 가운데 유독 조조을 좋아하는 대부분 경우들이 그같은 유교적 가치와 질서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들이다. 고루한 유교적 관습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능력껏 호쾌하게 모든 것을 이루어가는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기도 할 터다. 그런 점에서 군주가 백성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고루한 관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서주대학살은 충분히 재평가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반공을 위해서 이승만과 조병옥은 제주도민을 아예 몰살시킬 결심으로 군사를 보내 토벌케 했었고, 역시나 빨갱이를 때려잡겠다고 신군부와 진압군 병사들은 광주에서 아무 죄의식없이 사람들을 죽여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요즘 또 반PC가 대세이다 보니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는 가치가 그리 쓰잘데기없이 여겨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제주도와 광주에서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나라를 빨갱이에게 넘겨주자는 것이 또한 요즘 2030 남성들 사이에서 흔히 들리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조조가 서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당시에도 '잔륙'이라는 표현으로 그 참혹함을 거침없이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고는 한다.

 

조조가 서주에서 수 십만의 백성을 학살한 데에는 그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위적인 목적과 목표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주의 대학살은 조조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조위로부터 정통성을 물려받은 서진에서조차 황제에게 바칠 사서를 편찬하며 그건 잔륙이라, 즉 잔학한 도륙이었다 단정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누구도 서주에서 저질러진 학살에 대해 차라리 은폐하면 은폐했지 대놓고 옹호하는 경우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조조가 서주에서 학살을 저지르고 연주에서 진궁이 불러들인 여포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뒤를 쳤던 인사 중 하나인 장막은 조조와 오랜 친구이기도 했었다. 명망이 높아서 당시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해 천하를 떠돌던 진궁과 여포 등이 그에게 의지해 찾아오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장막 혼자서만 군사를 일으켰었는가? 정욱과 순욱을 제외한 연주의 거의 모든 성과 고을이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덕분에 유비는 고작 공손찬 휘하에서 활약 좀 했던 인물이 공융을 구원하고 조조와 맞서 도겸을 도왔다는 이유로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르고 있었다.

 

유비가 신야에서 도망칠 때 10만에 이르던 백성들이 조조 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며 정든 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 그저 유비가 좋아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우가 번성에서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을 격파했을 때도 조조가 허창을 버리고 천도할 마음까지 먹었을 정도로 각지에서 그에 호응하는 군사들이 일어나고 있었기도 했다. 우금이 뭐했다고 오자양장에 꼽히는가 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실제 조조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대부분 무장들에게 주요 전장은 외부의 다른 제후가 아닌 내부의 반란군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민심의 이반이 조조가 생전에 황제가 되지 못하고 조비에게, 그마저도 유비가 손권부터 조지겠다고 나섰다가 이릉에 참패하지 않았다면 꽤나 곤란한 상황에 놓였을지 모를 정도로 내내 조위를 위협하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조조의 천하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아섰던 적벽대전마저 원래 서주출신이던 제갈량과 노숙의 사실상 합작품이지 않았던가. 그것이 바로 명분을 잃는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조조는 한 왕조를 개창하고 그 정통성이 남조로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동아시아의 전통사회가 무너지기 전까지 망탁조의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걸 아주 면밀하고 정교한 전략에 의한 결정에 의해 저지른 것이라고?

 

그래서 과연 서주가 그들이 주장하는 그대로 조조에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약해진 것이었는가? 그런데 정작 유비가 도겸으로부터 물려받고 조조에 의해 내려진 칙명을 받아 당시 유력 군벌 가운데 하나인 원술을 상대로 대치할 정도까지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여포가 조표와 함께 장비를 몰아내고 하비를 차지한 탓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었지만 당시 황제를 자처하기까지 했던 원술에게 그다지 밀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그 뒤로는 아다시피 하비에는 여포가 소패에는 유비가 각각 자리잡고서 서로 대치하는 상태였었고, 조조가 여포를 토벌하러 왔을 때는 소패의 유비까지 함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조가 너무 사람을 죽여서 서주에 사람이 없어 여포가 박살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때는 조조의 세력이 그만큼 커져 있었고, 서주도 여포가 온전히 차지하지 못했기에 그런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설사 서주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여포든 유비든 다 때려잡고 다녔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고 지금 기준으로 욕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런 것도 아닌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여 그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앞에서도 말한 것이다. 그냥 유교가 싫은 것이다. 유교에 의해 지배되던 동아시아가 싫었던 것이다. 유럽의 유명한 인물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니는 것이 그리 호쾌하게 보였던 것이었다. 죽기 싫었으면 죽을 짓을 하지 않았으면 된다. 그러고보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대해서도 그리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카이사르와 강희제도 갈리아인들과 오이라트부에 대해 잔인한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외부의 적이다. 자기 지배 아래, 다른 말로 보호 아래 있는 백성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자기네가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했다고 반성하는 걸 얼마나 보기는 했는가. 그나마 알량하게나마 반성하는 사람이 보이기도 하는 자체가 문명이 그만큼 성장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물며 이제 와서 조조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이 공공연히 떠돌아다닌다?

 

당시 조조는 후한의 황제도 아닌 일개 신하였었다. 그리고 아직 헌제를 모시기 전이라 황제의 명에 따라 군사를 일으켰던 것도 아니었다. 즉 이후의 전쟁들과 달리 황제의 명으로 죄를 지은 신하를 토벌하는 성격조차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조조는 또한 후한의 황제로부터 벼슬을 받은 황제의 신하였다. 한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에게는 마땅히 자신의 지배 아래 있는 백성들을 온전히 보살필 책임이 있었을 텐데, 하물며 그 신하인 조조가 황제의 명도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던 것이었다. 황제가 그랬어도 욕을 들어 쳐먹을 일인데 일개 신하가 사사로이 군을 일으켜 그 지랄을 저질러 놨다. 그런데 그게 유교니까. 고리타분한 유교의 가르침이니까. 그냥 통쾌하게 마음에 안 들면 다 죽이고 돌아다니는 게 더 합리적이고 멋있지 않은가. 게임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게임에서도 내가 먹지 못할 것 같으면 그냥 약탈하고 불지르고 말려버린 다음 후퇴하기도 한다. 토탈워가 안 좋은 점 가운데 하나다. 코에이 시리즈에서 그 짓 했으면 게임진행이 어려워질 정도로 많은 페널티가 주어진다. 역시나 토탈워 만든 개발진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깊은 고려가 없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무튼 별 것 아닌 허튼 소리들에 다시 괜히 열받아 버리고 말았다.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제주에서도 아예 도민들을 씨몰살하려던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목소리들을 너무 많이 들었던 때문인지 모르겠다. 딱 비슷한 것들이다. 노조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과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것을 빨갱이라 욕하는 바로 그 부류들인 것이다. 요즘 유독 그런 소리들이 많이 들리는 것도 아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PC와 반유교주의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사람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죽여도 되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공정이고 상식이고 정의다. 참 흥미롭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내면의 충동이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많은 순간 머릿속에서 혹은 몸이 시켜서 떠오르는 말못할 무언가를 겪고는 할 것이다. 차이라면 그것을 실제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흔히 천재적인 예술가에 대해 가지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면에서 치솟는 충동에 자신을 맡기며 창작에 매진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를테면 정신병원에 갇혀서도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충동속에 살다가 세상을 떠났던 이중섭처럼.

 

그냥 그리고 싶으니 종이가 없어도 맨바닥에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싶으니 악기가 없는데도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드럼의 비트를 흉내내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쓰고 잎은데 원고지도 뭣도 없으니까 작은 메모지에 짧은 문장으로 적어나간 것이 영원한 스테드셀러라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란 소설이었다. 그래서 관광지에 가면 그렇게 낙서가 많은 것이다. 비단 우리나라나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아주 유구한 어쩌면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다가 진짜 기념할만한 인물이 와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또 하나의 작품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소설들에서 경치좋은 누각에 올라서 기둥에 시를 쓰는 장면이 괜히 등장하는 게 아니다. 바로 내면의 충동에 이은 자기확신적인 실천의 결과가 결국 작품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히틀러가 젊었을 적 화가를 지망했더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그래서인가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국가수반으로서 히틀러가 보여준 행보란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나 사유의 결과라기보다 즉흥적인 충동에 따른 것들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즉흥적으로 행동으로 옮기고, 그래서 결과가 좋으면 확신에 차서 그를 고집하며 밀어붙인다. 유대인 학살 역시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자신의 알량한 경험에 의한 순간적인 충동에 충실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살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능률과 효율을 따져가며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 독일답다면 독일다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조의 일생도 그와 비슷하다. 조조는 아들 조식과 함께 후한말 가장 뛰어난 문인 일곱 명을 뜻하는 건안칠자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재능과 역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일까? 실제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의 일대기를 보더라도 그런 예술가적인 충동에 자신을 맡기는 듯한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된다. 여백사를 죽인 장면도 그렇고, 동탁을 토벌하겠다고 격문을 돌리는 것도 그렇고, 집안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키더니 혼자서 장안으로 물러나는 동탁을 쫓다가 죽을 뻔한 위기도 겪었었다. 장수를 토벌하러 갔다가 미망인 추씨에게 마음을 빼앗겨 틈을 보인 탓에 아끼던 장수 전위와 큰아들 조앙마저 잃었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정치가로서, 그리고 지휘관으로서 그가 가진 역량이 또한 그 이상이었기에 마침내 후한말의 혼란 속에서 가장 크게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 아버지는 물론 일족들까지 누군가에게 모조리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내릴 수 있는 판단이란 무엇이었겠는가? 더구나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고 군사까지 일으켰는데 정작 도겸을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실제 당시 조조가 서주에서 백성들을 학살에서 당시든 이후로든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당장 도겸을 토벌하는 것조차 당시 조조가 서주에서 저지른 학살이 너무 잔혹했던 탓에 공손찬의 휘하에 있던 유비가 개입하면서 잠시 저지되었었고, 서주에서 무려 수 십만의 백성들이 아예 강물의 흐름마저 막을 정도로 무참히 학살되었다는 소식에 근거지였던 연주의 유력자들이 이반하며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릴 뻔까지 했었다. 오죽하면 조조와 막역한 사이였던 장막마저 진궁과 더불어 외부에서 여포를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었겠는가 말이다. 장막의 모반이 조조에게도 꽤 큰 충격이었는지 누가 조조 아니랄까봐 장막에 대해서는 그 일족을 아예 절멸시켜가며 복수를 하기도 했었을 정도였다. 더구나 서주의 학살 이후로 조조의 밑에는 못 있겠다며 뭇 뛰어난 명사들이나 백성들이 조조에게 등을 돌리고 떠나가기도 했었다. 신야의 백성들이 조조 밑에서는 못살겠다고 목숨걸고 유비를 따라나섰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조조의 천하만은 막아야 한다며 제갈량과 노숙 등 당대의 명사들이 연대하고 나섰던 이유이기도 했다.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자 각지에서 호응하니 조조가 천도까지 고민했다는 것도 그만큼 조조가 지배하던 지역에서마저 민심이 좋지 않았다는 한 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조조가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그게 더 사이코다. 철저히 냉정하게 합리적으로 계산에서 그 필요에 따라 학살을 저지를 수 있을 정도면 그건 그냥 인간이기를 포기한 학살기계라 봐야 좋을 것이다. 그게 과연 조조를 위한 변명이 될 수 있을 지.

 

그냥 조조의 생애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는 뒤를 생각하지 않는 충동의 결과라 보는 것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젊은 시절 조정을 초급장교로써 쥐락펴락하는 십상시의 조카를 때려죽일 수 있었던 것도 순간의 정의감에 도취된 결과였을 테고, 그래서 동탁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자 바로 도망쳐서는 황실을 보위하려 의군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동탁을 몰아내자고 모인 제후들이 지리멸렬하고 있으니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가 서영에게 제대로 털리고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이 서영이 이전에도 용맹을 자랑하면 화웅까지 죽인 바 있는 손견까지도 패퇴시켰던 대단한 인물이었다. 다만 나중에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러도 뒷수습이 될 만큼 사람도 권력도 세력도 다 갖추고 있었기에 그다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도 한중에서 유비와 지리한 대치가 이어지자 무심결에 계륵이란 말을 내뱉고, 그 의도를 양수가 알아채자 바로 죽여 버리고는 그 김에 군을 물려 버리는 것을 봐서는 죽을 때까지 그 버릇을 고치지는 못한 듯하다. 그래서 아들이라는 것들도 조비나 조식이나 그 모양들이었던 것이고. 

 

한 마디로 그냥 아버지랑 가족들이 죽었으니 슬프고 화난 김에 다른 것은 아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떠오르는 대로 저지른 결과가 바로 서주대학살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한 힘을 가져서는 안되는 인간이 그러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당연하게 이어지는 결과라고나 할까? 하필 그런 인간이 천 수 백 년 뒤에 태어난 어느 코털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재능이 뛰어났던 것이 수 십만의 생명과 나아가 그로 인해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던 그 이상의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제는 그를 어떻게든 합리화하고자 하는 시도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어느 교수를 사람취급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 십만의 무고한 목숨을 논리로 이해하려는 자체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니. 그런 걸 계산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차라리 즉흥적인 충동이 더 인간적일 수 있다. 다만 그럼에도 성공하고 승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의 어두운 일면이겠지만. 아무튼.

대한민국이 다른 신생독립국처럼 되지 않은 데에 이승만이 기여한 바를 꼽으라면 역시 한민당을 나와 자유당을 만든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신생독립국들에서는, 아니 일본을 비롯한 기존의 열강들 가운데서도 어느 특정한 정파가 정권을 독점하고 전횡을 저지를 때는 그 사회의 주류 기득권집단과의 결탁의 거의 필수적으로 선행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의 집권에 협력했던 독일의 융커와 자본가, 구귀족, 그리고 가톨릭교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 역시 프랑코와 무솔리니의 독재에 협력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승만은 한민당의 주류였던 토호지주들과 등지고 친일관료집단과 결탁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지배는 불안했고 이는 박정희까지 이어지게 된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중앙의 행정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는 소수 유력자들이 토호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지역행사에 정치인과 검찰, 경찰, 깡패가 나란히 참석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다. 방대한 토지와 자본을 소유하고 그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수 유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질적일 수 있는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아직 중앙집권이 지금처럼 고도화되지 않은 해방직후에는 더욱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비할 수 없이 컸었다. 이승만이 어울리지 않게 조봉암의 농지개혁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농지야 말로 이들의 기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이들과 완전히 척질 수 없었기에 유상몰수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된 것은 이들 토호집단의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붕괴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다른 신생독립국들과 달리 한국은 중앙권력을 독점한 독재자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지점이 달랐을 것이다. 이승만이 조봉암은 죽일 수 있었어도 조병옥이나 신익희, 장면까지는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진보당을 만든 조봉암은 사법부를 이용해서 죽일 수 있었지만 이후 진보당을 해산하고 민주당으로 합류한 소장정치인들까지 감히 건드리지는 못했었다. 그것은 박정희도 마찬가지여서 아직 지역기반이 건재한 토호들은 그 성향과 상관없이 강력한 군사독재와 맞설 수 있는 야당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후 부산경남의 김영삼과 호남의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지역정치구도는 그런 연장에서 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 말기 정부의 잘못으로 촉발된 4.19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직 자기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방권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국민이 들고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여론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에 미국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북한이 저 모양이 된 이유는 별 것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병신짓하는데 그것을 뜯어말릴 견제장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처럼 아예 목숨걸고 그 앞에 드러누워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이 북한에는 없었다. 북한만이 아니다. 중국 역시 마오를 중심으로 비타협적인 혁명원리주의를 추구했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수 천 년 역사가 한 줌 잿더미로 변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때 우리보다 더 잘나갔던 필리핀 역시 마르코스의 장기독재로 말미암아 동력을 잃고 그저그런 저개발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박정희의 중공업우선정책이 실패로 돌아갈 듯하자 정권말기 아예 정권 내부에서까지 동요가 일어나며 끝내 독재자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승만이야 눈치보지 않고 지랄을 하다가 아예 내쫓기고 박정희는 그것을 교훈삼아 여론의 눈치라는 것도 봐가며 정치를 해야 했던 것이었다. 심지어 전두환조차 최소한 드러나는 모습 만큼은 국민의 여론에 신경쓰는 시늉 정도는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처럼 독재자라고 막나가는 상황은 최소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아직 농업국가이던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집단인 토호지주들과 결별한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어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주류기득권집단인 토호지주들이 중앙의 독재권력과 분리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 반대편에서 견제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의 목소리가 야당인 민주당에도 깃들 수 있었고 민주당이라는 이름 아래 보호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미국이 조금만 자극을 주면 어쩔 수 없이 독재자들도 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김대중이 미국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김영삼도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목숨만큼은 위협받지 않았었다. 다만 덕분에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기득권집단이 민주당의 방향을 결정하곤 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2찍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이승만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일 것이다.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 주류기득권들과 결별하고 주변에서 겉돌던 친일관료집단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여전히 중앙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지방 기득권들을 적으로 돌리며 그들이 독재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원래는 한 편이었어야 할 독재권력과 지방권력이 경쟁관계가 되면서 무모하게 독주하는 경우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4.19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김대중이며 김영삼이며 젊은 정치인들이 아예 대놓고 독재권력과 들이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1987년 시민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냥 병신이란 것이다. 지 권력욕을 감당하지 못해서 괜히 일을 키운 멍청함에 대한미국이 빚을 진 것이다.

 

이승만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가 어떤 식으로 낭비되고 있었는가 알면 감히 이승만을 들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 역시 중공업위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와 낭비가 발생하며 자칫 1970년대 말 대한민국의 경제 자체가 붕괴할 위기에 내몰린 바 있었다. 부가가치세가 그래서 그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에 반발해서 부마항쟁이 일어난 것이었고. 현대가 조선소를 가지게 된 이유도 기껏 정부가 투자해서 조선소를 지어 놓고는 감당하지 못해서 억지로 떠넘긴 것이었다. 그 돈이 다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이었다. 그러고도 말년에는 그렇게 자기가 키워 놓은 재벌과 측근들에 휘둘리며 아무것도 못하던 무능한 인간이 바로 박정희였었다. 그나마 김대중이 없었고, 김영삼이 없었고, 재야와 야당이 없었으면 당시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래저래 많은 사람들이 솔직해지고 있는 듯해서 요즘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영애는 버린다. 나얼도 잊는다. 하다하다 이승만을 추앙하며 그것을 아예 대놓고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이야. 이승만이 죽인 사람의 수가 김일성보다 조금 적은 정도다. 박정희보다도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도 폴포트보다는 적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보다 이승만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며 독립무용론을 떠드는 2찍 진보새끼들까지 있겠는가. 그냥 버러지새끼들이다. 년놈들이다.

망하기 직전 중소기업을 보면 그런 분위기가 있다. 어차피 매출도 별로고 남는 것도 거의 없다 보니 이대로 좋은가 하는 회의가 들게 된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대부분 회사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정신을 쏟을 때가 많다. 다른 직장을 알아보거나, 아니면 그나마 붙어 있는 동안 뭐라도 더 챙길 수 있는게 없는지 궁리하고 살핀다거나. 그러다가 기회가 오면 알아서 순서대로 능력껏 탈출하게 된다.

 

오와 촉의 차이는 사천분지 자체가 워낙 험준한 지형으로 고립되다시피 한 지역이라 다른 곳으로 뻗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나마 남만까지는 어찌어찌 점령했는데 그 아래로는 말 그대로 밀림지역이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 아래쪽으로 그나마 문명이라는 것이 들어서게 된 것은 교주까지 밀려났던 월족이 더 서쪽으로 쫓겨가서 베트남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서쪽으로 티베트를 넘어 인도가 있기는 했지만 차라리 거기까지 가는데는 장안에서 서량을 통해 가는 쪽이 더 빠르고 편하다. 그렇게 사방이 막혀있다시피 한데 그나마 땅조차 좁다. 서촉에 조조가 인구를 모두 소개한 한중 정도가 촉이 차지한 영토의 전부다. 그에 비해 위는 중원을 거의 차지하고 있고, 오 또한 영토만 놓고 보면 상당한 넓이에 바다를 통해 외부로의 진출이 가능하다. 인구도 9분의 1에 지나지 않는데 과연 그런 촉이 얼마나 위를 상대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구한말 조선의 상황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여말선초의 왕조교체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어차피 망할 것을 안다. 언제 어떻게 망하느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선택해야 한다. 무너져가는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인가, 새로운 왕조을 통해 기회를 노릴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황제라는 지고의 자리에 있었기에 유선 또한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의가 강유에게 했던 말도 비슷한 맥락이다. 제갈량 같은 인물도 감히 위를 상대로 정벌에 성공하지 못했는데 과연 남아있는 이들이 위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상황에 사람들의 선택은 양 극단으로 갈리게 된다. 어차피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니 나가서 싸우기라도 하자는 강경파와 어차피 희망이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현실파다. 그래도 한을 계승한다는 명분과 촉이라는 체제 아래에서 누리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더해지며 강경파의 의도가 어느 정도 먹히기는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촉한이 처해 있던 한계상황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너무나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강유관을 지키던 마막이 등애군의 존재를 알자마자 바로 항복부터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더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위군이 후방인 강유관까지 나타난 상황 자체가 촉한의 멸망을 확정지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산을 내려와 진을 친 등애군을 상대로 제갈첨이 성급하게 승부를 걸려 한 것도 그런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볼 수 잇을 것이다. 내면에 잠재해 있던 불안이 현실로 드러나자 자연스럽게 행동도 성급하고 과격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경향은 유선의 항복으로 정점을 찍게 된다. 너무나 허무하게 제갈첨의 패배를 들은 순간 유선은 더이상의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함으로써 변방왕조의 고단한 황제역할을 자기 손으로 끝마치게 된다. 이제는 더이상 언제 나라가 망할까 걱정하며 마음 조이지 않아도 된다. 기왕에 망할 것이면 그냥 이렇게 확실하게 망하는 쪽이 더이상 불안하지 않고 편하다.

 

말하자면 제갈량 사후 촉한이라는 나라는 멸망할 날짜를 받아놓은 시한부 왕조라 할 수 있었다. 어찌어찌 연명은 하지만 그러나 결국 언젠가는 멸망할 것이다. 그것이 유선 자신의 대일 것인가, 아니면 다음의 누군가 때일 것인가. 그렇다고 촉한이 뭔가를 해 보기에 현실은 그저 암담하기만 했다. 동맹이라고 있는 오는 호시탐탐 촉의 영역을 노리는 믿지 못할 놈들이고, 다른 동맹할만한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땅도 좁고, 인구는 적고, 인재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했을 당시 촉한의 내부에서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위와의 최일선에서 전쟁을 치러왔던 강유와 같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그랬었다. 유선을 딱히 암군이라 여기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암군이라기에는 재위기간이 오히려 손권보다도 더 길었는데 결정적으로 실정이라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황호를 중용한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국정을 크게 그르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제갈량과 장완, 동윤, 비의 등이 있을 때는 그들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어 적절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말년에도 주위의 수많은 견제와 모함에도 강유를 끝까지 지켜주고 있었다. 강유가 괜히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촉한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의 한계란 유선의 내부에 이미 오래전부터 의식과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작년 민주당의 지방선거도 그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 말기 열린우리당이 박살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어차피 망할 것을 알기에 그 순간 사람들은 선택하게 된다. 기왕에 망할 거라면 그 안에서 자기 이익이라도 찾자. 그 놈들이 그 고집을 포기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의 수박들이다. 이낙연을 따라서 수박들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이재명은 대통령에 떨어질 것이고 민주당은 해체될 것이니 그 안에서 살 길을 찾자던 놈들이 그대로 하던 짓을 이어나가니 수박인 것이다. 망할 것을 알면 자기 살 길부터 찾는다. 언제는 또 안 그랬을까? 박근혜 탄핵될 때 새누리당도 그랬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게 있다. 다만 내 일이면 이해보다는 분노가 우선이다. 유선이 아두인 이유일지 모르겠다.

흔히 차를 탄다고 한다. 너무 당연하게 쓰이는 말이다 보니 무협소설을 보다가도 차를 탄다는 표현을 흔히 보게 된다. 원두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를 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에 원래 차를 탄다는 자체가 인스턴트 커피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 다방커피 만드는 방법이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 커피와 프림, 설탕을 차숟가락으로 떠서 타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차보다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커피가 차를 대신하게 되었고 차까지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원래는 차를 우린다고 썼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것이다. 찻잎을 따뜻한 물에 넣어 자연스럽게 그 성분이 녹아들도록 하는 것이었다. 커피는 내리는 것이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일반화되기 이전까지, 그리고 차가운 물에 우리는 더치커피가 유행하기 이전에는 대개는 드립커피가 원두커피를 마시는 대표적인 방법이었었다. 모카포트는 사실 아주 최근까지도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긴 원두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자체가 그리 오래지 않다. 박근혜 정권까지 나 역시 커피는 인스턴트만, 그것도 믹스커피만 먹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쓰이는 표현이 '곤다'는 것이다.

 

한국의 차는 차가 아니다. 오래전 보았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다. 중국인이 조선에 와서 차를 마시고는 일갈하는 장면이 있었다. 원래 차라는 것은 차나무 잎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스민차나 말리차 같은 것들은 찻잎이 들어갔으니 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차나 관음차, 홍차 같은 발효차들 또한 찻잎으로 만드는 것이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차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못한 조선에서 차를 대신하던 이름만 차인 음료들이었다. 이를테면 생강차, 대추차, 귤차, 꿀차, 오미자차, 유자차, 모과차 같은 것들이다. 분명 이름에는 차가 들어가는데 정작 찻잎은 쓰이지 않았다. 차와 만드는 방법도 다르다. 그래서 여기서도 쓰이는 어휘가 달라진다. 어떤 것들은 그냥 뜨거운 물에 섞기만 하면 되는데, 어떤 것들은 일정 시간 물을 끓이거나 해서 강제로 성분을 추출해야 한다. 전자는 인스턴트 커피와 같이 타는 것일 테고, 후자의 경우는 곤다는 표현을 썼었다. 차를 아주 잘 고았다. 그 장면에 등장한 차가 바로 밤차였다. 조선의 차가 차가 아닌 이유일 터다.

 

아무튼 비슷하게 술을 만드는 것도 몇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이 공존해 왔었다. 이를테면 술을 빚는 것은 누룩을 만드는 과정을 묘사한 것이었다. 전통주를 만들려면 먼저 누룩부터 빚어야 했다. 정확히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어 그 위에 누룩이 내리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그 누룩이 생쌀이든 고두밥이든 재료의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한 뒤 효모로 하여금 알콜발효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이 다음의 과정에서 주로 막걸리나 청주에 쓰이는 술을 거른다는 표현이 나왔다. 곡물을 발효하고 난 뒤 맑은 술만 거른 것이 청주, 그리고 남은 찌꺼기에 아직 다 걸러지지 않은 알콜을 물을 섞어 거칠게 마시는 것이 탁주, 그 탁주마저 거리고 나면 남는 진짜 찌꺼기가 지개미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술을 만든다는 것이 공장에서 생산된 희석된 주정에 재료를 섞어 성분을 추출하는 의미로 바뀌면서 술은 담그는 것이 되었다. 더이상 집에서 술을 빚지 않게 되니 대부분 사람들에게 술이란 그렇게 희석된 주정을 사다가 재료를 넣어 담그는 것이 되었다. 참고로 그래서 소주는 원래 내리는 것이었다. 소줏고리에서 소주를 받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아, 술을 받는다는 표현도 있는데 이건 술을 구매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 한국말이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한국말의 표현들은 적확한 어휘의 의미보다 정황적인 묘사나 연상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냥 make가 아니다. 그냥 造가 아닌 것이다. 집을 지을 때도 어떤 때는 짓는다 하고 어떤 때는 올린다 한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차이를 거의 구분해서 알아듣는다. 어떤 때 짓는다 하고 어떤 때 올린다 하는가. 그리고 연상하기도 한다. 세운다 했으면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 된장찌개를 어디선가는 끓인다 하고 어디선가는 담근다 한다. 아, 그래서 김치는 담근다는 것이다. 김치의 어원 자체가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는 침채에서 온 것이다. 글을 쓰기도 하고 끄적이기도 하고 휘갈기기도 하며 두드리기도 한다. 다만 그런 만큼 그런 차이를 무시하면 또 글이 매우 어색해진다.

 

글을 쓰면 쓸수록 어렵다 여기는 이유다. 단어 하나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보는가, 살펴보는가, 돌아보는가, 지켜보는가, 바라보는가,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훑어내리고, 쓸어내리고, 헝클이고, 그때그때 어울리는 표현을 찾아 쓰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더욱 글을 쓰면서 사전을 끼고 살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지금 상황에 이 표현은 적절한가. 예문을 보면 얼추 이해가 된다. 아직 나는 무척이나 한국말에 서툴다. 지금에 와서도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듯하다.

 

노릇노릇과 누리끼리의 차이를 이해한다. 노란과 누런의 차이를 바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까무잡잡한 것과 거무스름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파란 것과 푸른 것도 전혀 다른 색인 것이다. 빨갛고 붉은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달콤하고 달큰한 것이 다르고, 산뜻한 것과 선뜻한 것이 다르다. 이런 글 쓰면 또 어떤 인간들은 선비질한다 지랄하겠지만. 내가 어린 놈들을 싫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뭔 말을 못하게 한다. 무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병신들인 이유다.

공명功名이란 한 마디로 기회이고 인정이다. 과거제도가 정착되기 전, 고대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실력만 있다고 누구나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를 사용할 여건과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과 재능에 확신을 가질수록 개인들은 그를 활용할 기회를 바라게 되었고 그를 위한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누군가 인정해주고 발휘할 기회까지 허락해 준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전근대사회의 군신관계란 쌍무적 계약관계에 가까웠다. 관료제가 정착된 이후의 관계가 사용자와 고용인의 관계에 더 가깝다면 이전의 관계는 별개의 사업자간의 계약관계에 더 가까웠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적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얼마든지 등지고 떠날 수 있다. 정당하게 인정해주지 않고 댓가 또한 지불하지 않는다면 배신도 배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예양이 조양자 앞에서 자신이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한 이유를 털어놓은 대목일 것이다. 다른 군주들은 자신을 그저 여러 선비의 하나로만 여겼지만 지백은 자신을 나라의 소중한 인재로 예우했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자병법에도 보면 자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나겠다는 말이 아주 당연하게 쓰여 있는 것이었다. 충성이란 충분한 예우와 대가를 지불하는 이를 위한 것이지 그저 자신을 고용했다고 일방적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바로 공명이란 것이다. 공을 세우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자신의 계책을 고용주인 군주가 들어주어야 한다. 자신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존중하여 기꺼이 그를 위해 수고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공만 세우면 끝나느냐? 공에 따른 대가도 충분히 지불되어야 한다. 공을 세웠으며 명성이 오르고 지위가 오르고 부귀가 함께 따라오게 된다. 자신이 누리는 부귀란 자신의 실력으로 이룬 공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한 군주의 은혜인 것이다.

 

아마 삼국지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꽤나 당황스러운 부분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유비가 선인이고 유비에게 명분도 있을 텐데 어째서 악인이고 명분도 없는 조조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저토록 많은 것인가. 그렇다고 모두가 조조처럼 잔인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악인들인 것도 아니다. 조조를 주군으로 삼아 충성을 다하며 조조가 다스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모든 것을 내걸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은 원래 조조를 섬기던 이들도 아니었다. 장합이나 가후처럼 스스로 항복해 온 이들도 있었고, 혹은 장료처럼 포로로 잡혔다가 전향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같이 죽을 때까지 조조와 그 아들들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쳤다. 왜? 그래서 공명인 것이다.

 

조조의 휘하에서 그들은 그동안 얻지 못했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각이나 장제, 장수 누구도 주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원소나 여포의 휘하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관직을 주고 녹봉을 내리고 병사와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당사자가 바로 조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역할에 또한 조조는 적절한 관직과 녹봉과 권한과 책임으로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물론 그래서 조위가 그렇게 쉽게 망한 것이었다. 구품중정제가 시작되면서 관리들을 평가하고 등용하는 역할을 당시 중정을 맡고 있던 사마의가 가로채 버린 때문이었다. 실제 관리들 입장에서는 조위가 아닌 사마의가 더 직접적인 은혜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삼국지 시대에만 통용되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제가 정착된 명청시대에도 그와 같은 공명의 고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사회에서는 실제 누구에게 학문을 배웠는가가 더 중요했지만 명청사회에서는 누가 시험장에서 자신의 답안을 채택하여 합격시켜주었느냐가 더 중요했다. 학문이야 돈만 내면 아무에게서나 배울 수 있었지만 과거에 나가고 관직에 오르는 기회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명청사회에서 관료사회의 파당은 그같은 임용의 통로를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누군가의 은혜로 공명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오히려 사대부로서 너무나 당연한 미덕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비를 따르던 이들이 후대에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기도 했다. 유비가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그에 어울리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된 것은 적벽대전의 승리 이후 형주에 거점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쥐뿔도 없었다. 평원현은 공손찬이 임명하여 그 휘하로써 다스렸던 것이었고, 서주에서도 도겸이 죽고 지역의 유력자들에 의해 추대된 것이라 실권은 유비에게 있지 않았었다. 유비가 너무 쉽게 여포에게 쫓겨나고 조조에게 기반을 잃었던 이유였다. 황제가 있던 허도로 올라갔을 때는 조조가 아예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고, 원소의 휘하에서는 객장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남에서도 또한 유벽이 실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신야를 다스린 것도 유표의 객장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지 온전히 그의 영토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 망명한 유비를 조운이 찾아가 따랐고, 이리저리 조조에 쫓기는 와중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그 휘하로 몰려들고 있었다. 차라리 그런 유비에게 실망해 떠나간 진군이 정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형주에 정착하기까지 도대체 뭘 보고 그리 뛰어난 인재들이 유비에게 모여드는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결국은 공명이었다. 다만 조조가 자신의 신하들에게 제공했던 공명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상이었다. 정의였고 당위였다. 유비가 옳다. 유비가 이루고자 하는 방향이 더 가치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를 통해 자신 또한 더 가치있는 목표를 이루려 한다. 그래서 제갈량도 고작 촉한의 승상이라는 자리마저 큰 은혜라며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것이었다. 강유 또한 더 크고 더 부강한 조위에서 더 높은 관직과 더 큰 영화를 보장했음에도 차라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촉한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비참하게 죽더라도 촉한이 추구한 가치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 하지만 그런 어쩌면 바보같은 선택들이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십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던 고향을 떠나 유비를 따라 나서고, 결국 조조군에 군대가 와해되고 신하들마저 흩어진 상황에서 조운 또한 목숨을 걸고 그 자식과 부인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조조의 환대에도 관우는 자신이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한 유비를 찾아 굳이 먼 길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보다 유비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조조는 이익으로 신하들의 충성을 샀지만 유비는 가치로써 신하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유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충성을 다하는가. 그를 위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가고자 하는가. 예양이 조양자를 죽이기 위해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까지 버리고 심지어 끝내 목숨까지 내던졌던 것처럼. 군주가 자신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으면 배신 또한 배신이 아니었지만 다만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었다. 서황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양봉을 굳이 죽이지 않은 것이 그런 예다. 그런 관계를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써 아우른 것이 바로 후대의 충忠이란 것이었고. 그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무역은 지배층의 사치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전근대사회에서 대부분의 피지배층들은 굳이 다른 곳에서 생산된 물품을 구입해서 소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을 가지지 못했었다. 조금 아쉽더라도 그냥 인근에서 생산된 것들만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건을 가져오기 위한 적지 않은 비용과 수고를 감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의 영주들의 삶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양산형 판타지에서 묘사되는 것과 달리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는 것들로만 먹고 입고 쓰며 살았었다. 영지에서 경작한 밀들과 영지에서 농민들이 직접 길러서 바친 닭과 돼지와 양과 농민들이 직접 집에서 만든 치즈와 버터와 와인과 맥주를 먹고 마시며 살았었다. 영주와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들 또한 농민들이 직접 집에서 짠 천들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그 천들로 옷을 짓는 것 역시 농민들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때때로 자기 소유의 숲에서 사냥도 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농민들보다야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고 입고 쓸 수 있었으므로 크게 불만을 없었을 것이었다. 이슬람과 무역하며 사치품을 실어 나르던 상인들만 아니었어도.

 

중세유럽의 장원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유였다. 귀족은 사치를 해야 했다. 다른 어느 귀족들에 뒤지지 않도록 사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치는 귀족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영지의 농민들을 쥐어짜야 했다. 정확히는 상인들이 요구하는 금화를 만들기 위해서 농민들이 생산한 작물과 수제품들을 팔아야 했는데 상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다 보니 결국 농민들의 수탈에 가까운 손해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자기가 직접 생산물들을 세금으로 거둬들여 상인들과 거래하기보다 농민들에게 직접 상인들로부터 화폐를 구해 바치도록 한 탓에 거래에서 우위에 있던 상인들은 농민들로부터 착취에 가까운 폭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런 짓거리를 국가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 바로 중상주의였다. 그런 권리조차도 돈받고 팖으로써 프랑스의 군주들은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어째서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인도를 찾겠다고 아프리카의 남단을 항해해야 했던 것일까? 콜롬부스에게 인도를 찾으라고 세상 밖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배와 막대한 비용까지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감자가 유럽 농민들의 영양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나마도 악마의 작물이라며 아예 감자를 먹지 않던 나라도 적지 않았다. 영국에서도 감자는 아일랜드의 거지들이나 먹는 부도덕하고 사악한 식품이었다. 오히려 초기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막대한 금은 에스파냐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바 있었다.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대부분의 금과 재화들은 에스파냐의 군주들을 위해서 쓰였을 뿐 일반 국민들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하긴 근대 이전의 국가란 곧 지배층이었다. 아니 근대 이전의 국민이란 곧 세금을 낼 수 있고 국가를 위해 동원될 수 있는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지배 아래 있는 농민들을 용병들의 약탈대상으로 기꺼이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유럽의 전쟁에서 농민들을, 심지어 도시까지 약탈했던 이들은 비단 적들만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고용주의 마을과 도시까지도 얼마든지, 심지어 허락을 받고 약탈할 수 있었다. 그래도 되었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대 이전의 역사란 그런 대부분의 피지배층을 배제한 지배층의 역사였던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근대 이전 지배층이 아닌 이의 이름이 과연 얼마나 나오고 있을까?

 

그래서 유럽인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미지의 위험을 감수해가며 인도를 찾기 위한 항해에 나섰던 것이었다. 인도에는 향신료가 있었다. 후추가 있었고 정향과 육두구가 있었다. 더 동쪽으로 중국에서는 차와 비단과 도자기를 수입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피지배층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들여 온 수입품들은 너무 비싸서 일정 이상의 부를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감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모험가와 상인들은 기꺼이 그런 수고를 감수할 수 있었다. 일단 항해만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그만한 이익이 있을 터였다.  그런 확신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위험한 모험에 뛰어들게 했다.

 

그러면 조선은 어땠을까? 아니 조선에서 오히려 고려보다 상공업이 쇠퇴한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고려의 귀족들은 사치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사치를 과시하는 여느 다른 지배층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상인들은 뻔질나게 배를 몰고 그 사치를 위한 물품들이 있는 중국으로 항해를 떠나야 했었고, 마찬가지로 중국과 아랍의 상인들까지 물건을 잔뜩 싣고 배를 몰아 고려까지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달랐다. 물론 실제로는 조선의 사대부들도 상당한 사치를 누리기는 했었다. 하지만 드러내서는 안되었다. 사치는 사대부로서 기피해야 할 부적절하고 부도덕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이항복이 친구인 이덕형의 별장을 두고 돼지집이라며 청청당이라 이름을 지어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차라리 맹물로 배채우며 초가집에서 학식을 닦아야지 이런 사치스런 별장을 두고 호사를 누리는 건 사대부와 맞지 않는다. 그런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굳이 멀리까지 배를 몰아 찾아가서 사치품을 사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겠는가.

 

아마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것이다. 금욕과 절제를 앞세웠던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부르주아들조차 자신의 신분에 맞는 사치는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다. 중국의 지배층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중국의 부자들은 버는 만큼 사치하는 것을 오히려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에도시대 일본의 사무라이들 또한 그만한 수입을 갖지 못해서 그렇지 돈이 있으면 그 이상 사치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도 한국인들은 부자들이 사치한다고 언론까지 나서서 생지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이 있으니 쓰려는 것이고, 그만한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니 지불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당사자도 아닌 것들이 왜 남 돈 쓰는 것을 가지고 지랄하는가. 한국인의 도덕관에 돈이 있다고 마음대로 쓰고 사는 것은 그만큼 부당하고 부적절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이들이 개인적으로 사들고 온 것을 어찌어찌 구해서 쓰는 정도는 괜찮지만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중국까지 사람을 보내 사오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를테면 외국에 나갈 일이 있는 사람을 통해 구매대행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소량으로 구매하는 것이야 이전부터도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정식으로 수입해서 유통하는 것은 별개로 더 엄격한 기준과 관리가 필요한 지금의 체계와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렇게까지 사치를 누리는 것이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치품들을 조선의 상인들이 공공연히 유통할 수 있었을 것인가.

 

결국은 수요가 생산을 이끌고, 소비가 유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요와 소비가 검약이라는 이름으로 억제되었으니 생산과 유통이 자극되었을 리 없다. 그런 도덕적인 엄격함과 엄숙함이 완화된 조선후기에 들어, 더구나 지배층인 사대부가 아닌 중인 이하의 상공인들에 의해 조선에서도 유통의 발달이 촉진되고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사치에 있어 더 자유로웠던 중인 이하의 계층들이었기에 사대부들보다도 가진 재산보다 더 많은 소비가 가능했다. 물론 당시까지도 대부분의 유통은 사치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어차피 전근대사회에서 운송수단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수레 한 대, 배 한 척으로 실어 나를 수 있는 물품의 양은 제한되어 있었고, 따라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기란 어려웠다. 그러므로 적은 양으로도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치품이 무역과 상거래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 밖의 생필품들은 대부분 필요한 당사자가 직접 생산해 소비하는 자급자족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을 기준으로 보면 곤란하다는 이유다. 

간단한 비유다. 그저 평범한 농민이었다. 아니면 비천한 노비였을 수 있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었다. 그런데 타고난 능력으로 큰 공을 세우면서 높은 신분을 얻고 신분에 맞는 새로운 아내도 얻었다. 그렇다면 먼저 결혼한 평민, 혹은 노비 출신의 아내와 나중에 결혼한 높은 신분의 아내 가운데 누가 정처가 되고 누가 첩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실제로는 어지간하면 일단 이혼부터 시키고 결혼시켰다. 아니면 아예 당사자를 제거하여 그 원인을 없애거나. 후자의 경우는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로 흔히 쓰이고 있기도 하다. 아니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먼저 결혼했으니 정처라면 나중에 결혼했지만 신분이 높은 여성이 신분이 낮은 여성에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신분을 따지자니 이미 먼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많은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어낸 전력이 걸린다. 그래도 역시 신분제 사회였기에 그나마 이 가운데 납득할만한 합리적인 해법은 타고난 신분을 따르는 것이었다.

 

더구나 신분이 높으면 그냥 신분만 높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분이 높은 친정이 당연히 배후에 있었을 터다. 기껏 신분이 높은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 처지가 열악하다면 여자의 친정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대대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성을 죽을 때까지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저 여성 개인이 아닌 특정한 집안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신분증명이며 그를 통해 여성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문제,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이민족이 들끓는 변방의 토호의 딸과 해동갑족이라 불리우던 개경의 유력호족의 딸 가운데 누가 더 신분이 높았을까?

 

워낙 남성중심주의적인 사고가 강하고, 더구나 승자인 태종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료를 근거로 많은 2차 창작들이 이루어진 터라 많은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일 것이다. 과연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 이성계의 주위에서 가장 크게 역할을 한 사람은 누구였었는가? 조선의 모든 초석을 다진 정도전이었을까? 아니면 정몽주를 죽이고 고려왕조의 마지막 저항의지를 꺾어버린 이방원이었을까? 그 전에 지금도 산밖에 볼 것이 없는, 더구나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조정의 통제에서 벗어난 변경밖에서 야만족들과 어울려 살던 촌뜨기 이성계가 개경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세력까지 갖출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드라마에서는 이성계가 동북면에서 나오는 생산으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한다 묘사했는데, 그러나 지금도 함경도는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실어 나르지 않으면 당장 한 해를 넘기기도 어려운 척박한 동네다. 당시는 함경도에서 그나마 재배할 수 있는 감자도 없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처럼 아는 것과 달리 이성계의 아들 이방우가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탈락한 것은 이방우가 스스로 물러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처가가 문제였다. 이인임의 측근이자 그와 함께 고려의 국정을 농단했던 지윤이 바로 이방우의 장인이었다. 이인임이 정권을 잡고 있던 우왕 시절 신돈이 실각하며 역시 함께 권력에서 멀어졌던 이성계가 다시 고려의 주류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명문호족들과 통혼하는 과정에서 하필 큰아들 이방우가 그래도 당대의 권력자였던 지윤의 딸과 결혼한 것이었다. 아다시피 지윤은 이성계가 최영을 쫓아 이인임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사형당한, 말 그대로 아버지 이성계의 정적이자 국가적으로는 역적이었다. 그런 처가를 두고 있는 이방우에게 이성계의 후계를 맡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 그러면 당시 이성계는 도대체 뭐가 있어서 지윤이나 이제현이나, 민제와 같은 명문들과 자식을 결혼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당연히 이성계는 당시도 별 볼 일 없었다. 별 볼 일 있었던 것은 해동갑족 가운데 하나인 곡산 강씨 문중의 딸인 신덕왕후 강씨였다.

 

그래서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후계문제에 있어 감히 신덕왕후에게 한 마디 이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조차 조선 조정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저 이방원마저 신덕왕후가 죽기 전까지는 그저 납죽 엎드린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신덕왕후가 죽자마자 이숙번이 확보한 군사력을 사용해서 물리적으로 신덕왕후를 따르던 핵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정치적으로 완벽한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마저도 이성계의 와병과 정도전의 방심이 아니었다면 어찌되었을지 모르는 상당한 도박과 같은 한 수였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자신의 권력으로 신의왕후를 정처로 만들고 신덕왕후를 계비도 아닌 그저 후궁으로 첩으로 만들었던 것이었다.

 

어째서 이성계는 자신의 정처인 신의왕후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가 아닌 후처인 신덕왕후의 아들 가운데, 그것도 막내를 후계자로 삼았던 것인가?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어째서 이성계는 그런 어리석을 결정을 한 것인가? 하지만 당시 정도전이나 조준 같은 이들조차 그런 이성계의 결정에 딱히 반대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도 후계자 문제가 아닌 왕자로서 자신의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정도전의 조치에 반발하면서부터였고, 그러다가 아주 큰 빈틈을 발견하고 아예 상황을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당시 이성계에게 정처는 다름아닌 신분도 고귀하고 더구나 조선건국에 큰 공도 있던 신덕왕후였었고, 막내 이방석은 죽을 때까지 한심했던 그 형 이방번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방원이 모든 정통성을 가지면서 그 사실들이 완전히 비틀리고 말았다.

 

이성계가 처음부터 고려에서 잘나가는 군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시작은 그래도 쓸만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변방의 토호 가운데 고려조정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놈이 있어서 공민왕이 받아준 것이었고, 그래서 인질 겸 해서 개경에 와 있을 때 당시 명문 가운데 하나였던 곡산 강씨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성계를 선택하여 혼인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혼맥을 바탕으로 신돈이 집권할 당시 이성계는 신돈의 신임을 받으며 한때 잘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신돈이 실각하면서 같이 한미한 처지로 내몰리고, 이인임의 집권기에 곡산 강씨를 배경으로 여러 명문과 혼맥을 맺으면서 그 위치를 공고히한다. 그리고 최영이 요동정벌이라는 결정적인 악수를 두면서 비로소 여전히 주변을 맴돌던 이성계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여기서 곡산 강씨를 빼면 그때는 이성계를 주인공으로 한 무협활극이 된다. 재미있기는 한데 당시 고려사회를 떠올려보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게 이해하면 모든 것이 간명해진다.

 

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이다. 역사를 볼 때 남자만 봐서는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유럽 군주들의 생모나, 혹은 계모, 아니면 그들 자신들의 부인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들의 출신과 성향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래야만 했던 동기들과 그런 것들이 어떻게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러니까 결국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두 나라의 왕들이 혹은 사촌이었고, 혹은 종질간이었고, 혹은 동서지간이었다. 삼국지에서도 하후패가 촉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장비의 딸인 유선의 비가 하후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조선건국 역시 마찬가지다. 신덕왕후 없이 이해하면 그 치밀함이 많이 떨어진다.

 

우연히 1차 왕자의 난과 관련한 어떤 컨텐츠를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달린 댓글 가운데 첩의 말에 현혹되어 어쩌고 하는 말이 괜히 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신덕왕후가 첩이 된 것은 왕이 된 태종에 의해서였다. 그런 조치들이 부당하다고 숙종이 다시 신원하여 계비로 올린 것이었다. 조선사회의 폐해 가운데 하나인 서자에 대한 차별도 거기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면 누가 적자고 서자였는가? 우리 외할머니가 전주 이씨이시다. 그래도 할 말은 한다.

삼국지 정사의 기록을 보면 흔히 보이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누구의 병사를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군이란 당연시 중앙정부에 속해 있는 것이고, 지휘관 역시 중앙정부에서 임명해서 내려보내는 것인데, 어째서 굳이 병사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그 소속까지 바꾸는 것인가. 더구나 일찌감치 중앙집권이 완료되어 관료적인 체계가 정착되어 있던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근대 이전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봉건적인 질서를 떠올려 본다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명망있는 사대부들에게는 그 명성을 쫓아 보여드는 또다른 사대부들이 있다. 당장 글씨부터 대부분 사대부들은 굳이 자신의 글씨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글 잘 쓰는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대필을 맡겼다. 문장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역시 그에게 문장까지 맡겼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토지와 노비에 집착했던 것이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지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챙겨야 한다.

 

하물며 전국시대 일본은 각 다이묘들이, 아니 사무라이 개인이 독립된 단위였었다. 사무라이마다 각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신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가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영지가 간절히 필요했다. 영지가 없으면 다른 수단을 통해서라도 수입을 만들어 그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해적질이나 인신매매가 딱히 죄악으로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신들을 책임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신들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지휘관급의 전사자가 적지 않았던 조선군에 비해 일본군에서는 다이묘급의 전사자가 드물었던 것이었다. 다이묘와 가신단이 하나가 되어 싸우고, 따라서 위기의 상황에서는 마땅히 자신들의 머리인 다이묘를 살리기 위해 가신들이 희생해야 한다. 다이묘는 뒤에서 지켜보며 지휘하고, 가신들은 그 손발이 되어 앞장서서 싸운다. 그리고 그 모든 공적은 다이묘의 것이 되고, 그 공적에 따라 획득한 전리품과 상급은 다이묘에 의해 가신단에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더욱 가신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다이묘를 지키고, 다이묘의 공적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신들의 이익을 높이고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다이묘와 가신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삼국지의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최근까지 중국에서는 유력자들이 다수의 식객을 거느리고 자신을 위해 그들을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유력자일수록 더 큰 토지와 저택을 가지려 했던 것이었다. 그래야지만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재우고 먹히고 입히며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거둔 유력자가 움직이면 그를 따라 움직였고 그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높은 관직과 재산과 부귀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유력자들이란 그런 다수의 군중을 거느린 대표자를 뜻하는 것이었단 것이다.

 

삼국지의 조인을 단지 조인 개인으로만 봐서는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표의 휘하에 있던 채모 역시 채모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형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력호족이었다. 그 영향 아래 있던 인물들이 형주에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그 의견을 받아 쓴다면 그것이 곧 채모 자신의 능력이 되었다. 삼국지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식읍이란 바로 그를 위한 재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혼자 먹고 사는 정도를 넘어서 얼마나 자신을 위한 세력을 꾸릴 수 있을 정도의 재화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식읍을 회수하고 병사를 회수한다는 것은 더이상 그와 같은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당히 가혹한 처벌이었다. 이후로는 그저 개인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분명 한계가 있다. 개인의 재능도, 역량도, 경험도 분명 명확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다른 인물들로 보충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 또한 넓어진다. 그래서 게임에서도 삼국지든 신장의 야망이든 신분이 높을수록 비례해서 능력 또한 높아지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의외로 현실적이다. 그만큼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다양한 경험을 더욱 직간접적을 얻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부족한 능력과 경험을 빌릴 수 있는 대상이 주위에 있었다. 젊은 시절 사이토 요시타쓰 하나만으로도 전전긍긍해야 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어느새 다케다나 우에스기, 미요시 등의 유력 다이묘들까지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조조도 젊은 시절에는 실수도 많았고 패배도 적지 않았었다. 조인은 여남에서 유비를 박살내고서야 비로소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보여준 것도 별로 없는 유비나 관우, 장비, 조운 등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높았던 것도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개인의 역량이 그만큼 뛰어났었다.

 

한중에서는 조조를 몰아붙였던 유비가 관우도 잃고 장비도 잃고 법정과 조운과 제갈량과 황권마저 주위에 없는 상태에서 육손을 상대로 얼마나 한심한 졸전을 벌이고 있었는가. 유비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를 시행하는 주위의 인물들의 역량이 이전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유비의 실력이 되고 실적이 된다. 그런 만큼 강동의 호족이었던 육손 역시 그 승리가 자신의 실력이 되고 실적이 된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살짝 회의를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아마 와키자카가 말년까지 겨우 7만석의 다이묘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뻑하면 100만석 운운하는 대다이묘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다. 잘난 조상을 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영지나 가신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 불리며 그 최측근이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 한계는 명확했다. 와키자카가 이후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며 보신에 힘쓴 이유거니와 그럼에도 여전히 7만석이란 영지 이상은 누리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 와키자카가 유일하게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전장이 그런 점에서 토요토미의 명령으로 다른 다이묘들의 병력까지 아우를 수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이 아니었을까.

 

다케나카 한베에나 구로다 간베에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이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결국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실력에 의한 것이었다. 다케다 신겐의 군사이던 야마모토 칸스케 역시 우에스게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작전에 실패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가신들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명성과 영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빈익빈부익부인 것이다. 관우에 비해 명성에서 밀리던 서황이 정작 형주에서는 관우를 이길 수 있었다. 황충이 하후연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 법정의 계략이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그를 모두 포함해야 하는 것이 또한 현실의 냉혹함이기도 한 것이다.

 

이재용 개인의 능력이야 어떻든 삼성의 경영진들은 뛰어나다. 삼성이란 기업 자체는 강하다. 누가 총수로 있는가보다 그 총수의 주위에 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것이기도 하다. 기껏 주위에 모인 놈들이라는 게 임종석이나 윤영찬, 박수현 같은 놈들 밖에 없었다. 고민정 같은 찌그래기들이 더 행세하는 상황이었다. 전해철과 양정철이 친문을 앞세우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처럼. 그리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지만.

고려시대 전국의 대형사찰들은 당연하게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대규모의 농장까지 경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왕실이나 귀족으로부터 시주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는가?

 

불교신자라면 알지 모르겠다. 불교 교리에는 고리대금에 대한 금기가 딱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고리대금을 교리로써 금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고려에서는 사찰에 의한 고리대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기는 아예 일본에서는 사찰이 사병까지 보유하고 조정과 다이묘들을 상대로 무력으로 맞서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런 현실을 당시 고려의 사대부들은 현실로써 바로 눈앞에서 겪고 있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내세를 지향한다. 현실을 고통이라 여기고 그 고통이 사라진 내세의 피안을 추구한다. 그렇다 보니 불교의 교리에는 현실에 대한 고려가 그다지 충분치 않다. 그래서 불교의 경전을 보더라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굳이 구체적으로 설파한 내용을 찾기가 힘들다. 있다면 대부분 위경일 것이다. 불성부모은중경이 그 대표적인 예다. 현실의 가치인 효를 강조한 경전의 내용은 그러나 현실의 삶은 의미없음을 주장한 불교의 교리와 충돌한다. 그렇게 현실을 무시한 내세지향의 교리는 현실의 수많은 죄악을 무시하고 방관하고 심지어 동조케 만들었다. 어느 유명승려의 성폭행한 친부에 대한 조언은 그런 한 예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불교 자신이 그 죄악에 일조하는 것도 그리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부처를 부정하고 사찰을 훼손하는 폐석훼불이 주기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거대한 사찰이야 말로 악의 근원이다. 비대해진 사찰은 곧 현실의 악이다. 그리고 고려의 사대부들은 그 폐단이 고도로 일어나던 현실을 직접 몸으로 겪던 이들이었다. 그나마 돈도 있고 힘도 있던 권문세족 출신은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면 그런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겪었을 터였다. 불교에 대한 이색과 정몽주의 태도가 정도전 등의 그것과 달랐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억불숭유를 국가시책으로 정하고서도 그를 확정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었다. 여전히 다수 사찰들은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유착해 있었다.

 

그런 역사를 이해한다면 문화재관람료랍시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돈을 뜯어내는 행위가 당연하게 이해가 된다. 하긴 그러니까 대통령이 작업중인 자재 위에 앉아 있었다고 지랄하는 승려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역시 고려말 나타났던 불교의 폐해 가운데 하나였다. 사찰을 절대화하고, 사찰이 소유한 불교의 상징들을 신성시하며, 그를 통해 대중을 억압하고 강제하며 수탈하기까지 했다. 그저 억압하는 주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교는 어느새 바로 이전의 폐단으로 지적되던 시절로 돌아가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고려말의 사대부들은 불교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들 역시 사찰이 불을 지르고 승려들을 때려 내쫓으려 했던 것이었는가. 현세를 위한 도덕과 규범이 없는 내세의 종교는 때로 현세의 욕망 앞에 너무 무력하다. 과거 기독교가 그랬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역시 내세가 아닌 현실의 규범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톨릭에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종교란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성직자와 종교인들은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떠올렸다. 고려말의 사찰들이 어떤 꼬라지였었는가. 아니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유력자들과 결탁한 사찰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해인사를 약탈한 이유였다. 차라리 죽고 나서 내세만 포기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야. 현실에서 더 큰 부귀영화만 누릴 수 있다면 윤회든 해탈이든 아랑곳할 것이 있는가. 그다지 믿고 있지도 않다. 내가 불교를 믿었었다. 지금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땡중인 것이다. 버러지들인 것이다. 그런 놈들을 부처는 가장 혐오했을 테지만.

 

해탈을 포기한 승려란 그저 밥버러지들인 것이다. 그래서 대승을 그리 많은 이들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대승은 사람의 역할이 아니다. 대승을 이루려면 먼저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승려는 사람이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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