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플레이어가 반드시 명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스타플레이어 가운데 지도자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흔히 이렇게 설명하고는 한다.

 

"아니 그 쉬운 걸 왜 못 해?"

 

이를테면 차범근이 감독이던 시절 선보였던 이른바 뻥축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양 사이드에서 치고 달리다 센터링 올리면 쾅! 쉽지? 차범근은 되었다. 그렇게 독일프로축구에서 전설이 되었었다. 하지만 모든 축구선수들이 차범근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이클 조던이 아예 구단을 사들여서 NBA 구단주가 되었을 때 그를 전설로 존경하던 선수들이 그를 뒤에서 욕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유명한 일화일 것이다. 마이클 조던 자신도 나중에 이야기하곤 했었다. 자기가 농구 지도자가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기 성격이 그걸 못 참는다고. 선수 시절에도 자기 눈에 차지 않으면 아예 대놓고 갈궈대던 인사였으니 코치가 되든 감독이 되었든 지도자가 되었으면 진짜 볼 만했을 것이다.

 

선동열이 정작 은퇴하고 감독이 되어서 투수운용 가지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보기에 이렇게 하면 되는데. 하지만 선동열만한 재능은 진짜 몇 십 년 만에 하나 나올까 한 것이었다. 물론 명선수가 지도자로서도 명감독이 된 예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꽤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자기를 기준으로 전술을 짜고 전략을 세우니 그에 미치지 못하는 선수들로는 결과를 내기가 힘들다. 

 

이릉대전 전까지 유비군에는 항상 관우와 장비라는 걸출한 장수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유비가 조조에게 져서 지리멸렬 쫓겨다닐 때도 유비의 옆에는 당시 만인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이 언제나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중에서 조조와 맞붙었을 때도 관우가 양양을 지키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었음에도 장비를 필두로 조운과 황충, 마초, 위연 등이 있어서 조조군의 명장들을 상대로도 법정 등의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 세운 유비의 전략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휘하 장수들을 믿고서 작전을 세우면 대충 그대로 이루어지는 전장만을 겪어 왔던 것이었다. 결국 세가 부족해서 생각한 만큼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어도 당대에 많은 명사들이 유비를 영걸이라, 관우와 장비를 만인을 상대할 장수라 인정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릉에서는 유비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

 

관우는 형주에서 손권에게 뒤를 맞아 잡혀 죽고, 장비는 유비를 만나러 오던 도중 부하의 배신을 당해 죽었고, 황충과 마초도 이미 병사한 뒤였다. 위연과 조운이 남았는데 위연은 한중에서 조조를 막아야 했으니 후방에서 본진을 지켜야 할 조운까지 빼고 나면 남는 것이 그동안 다른 장수들의 휘하에서 싸우던 풍습과 장남 같은 듣보잡들 뿐이었다. 실제 이릉대전에서 유비의 애초 전략이 틀어지게 된 이유부터가 유비가 대장으로 내세웠던 풍습과 장남 등이 제대로 손권군의 장수들을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손권군의 장수들이 버티기도 잘 버텼지만 그보다 오만하고 방만한데다 치밀하지도 강맹하지도 못했던 일선 지휘관들의 무능이 큰 몫을 했었다. 초전에 기세를 받아 일정 이상의 전과를 올리고 점령지를 넓혀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니 전선만 길어지고 진영과의 간격만 넓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틈을 노리고 육손이 화공을 걸어 오면서 유비는 이릉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결국 유비도 이미 나이가 60이 다 된 터라, 더구나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는데 일선에서 직접 군을 지휘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유비의 명을 받을어서 실제 군을 이끌고 싸워야 할 일선지휘관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맡을 인재가 사실상 없었다. 여기서도 번성공방전에서 관우가 먼저 공격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할 근거가 나오는데, 그런 와중에도 유비는 그나마 신임하는 장수인 조운을 후방에 남겨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손오와의 전쟁에 올인했으면 무장들도 그에 맞춰서 최선의 인선을 해야 했을 텐데, 정작 전공에서도 가장 앞서는 위연과 조운은 후방에 남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고 전선의 지휘관들은 이제껏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인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아니나다를까 손오군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사실상 그 자리에서 돈좌되며 공세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유비군의 진영이 늘어진 것도 수군을 이용해 보급을 하느라 강가는 제법 안정되었는데 정작 공세에 나선 손권의 진영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결과 강을 따라 늘어지는 결과를 낳은 것이었다. 

 

유비로부터 무려 천 수 백 년이나 뒤의 인물인 나폴레옹 역시 워털루 전투에서 비슷한 상황에 놓인 바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지휘하지 못했던 상황도 비슷했고, 러시아에서의 패배 이후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기면서 그 과정에서 죽거나 배신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로 합류하지 않았거나 못한 원수들의 존재를 아쉬워한 부분도 닮아 있었다. 무모할 정도로 저돌적인 돌격으로 나폴레옹의 승리를 앞장서서 일구었던 뮈라의 존재라던가, 나폴레옹의 명령대로 고지식하게 움직이느라 승기를 놓치고 말았던 그루쉬의 예라던가, 그 밖에 여러 전장에서 죽거나 다쳤거나 다른 이유로 등을 돌린 원수들의 빈자리는 몇 번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리고 오히려 승기를 넘기는 결과만 낳고 말았었다. 이릉대전에서 패전 이후 얼마 안 있어 유비가 죽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당시의 패배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겨질 것이다. 그만큼 당시 촉한의 인재풀은 이릉대전에서도 이미 상당히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진짜 하늘이 유비를 망하게 하려 작심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빨리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인재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서촉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방통부터, 한중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법정과 황충, 그리고 아마 이 무렵 마초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관우와 장비야 유비가 손권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결심한 이유였으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이들을 대신할만한 인물이 있었는가. 그래서 황권이 중요한 조위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가 이릉에서의 패전으로 퇴로가 막히자 항복했던 것이었고, 마량 또한 이민족들을 설득하다가 살해당했던 것이었다. 각자 역할이 있었는데 역시 야전에서 직접 군을 이끌고 싸울 지휘관이 절대 아쉬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수준의 무장들을 거느리고 전장에 나서 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조운 정도는 옆에 끼고서 전장에 나서도 나섰었다. 물론 그런 빈 틈을 제대로 노린 것부터가 육손의 대단한 점일 테지만.

 

유비가 병신은 아닐 텐데 누가 봐도 이상하다 여길만한 진영을 세운다는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방만하게 진영을 늘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유비 자신도 화공으로 재미를 본 적이 많았기에 아주 모르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육손이 세운 방어위주의 전술은 매우 견고했고, 더구나 일선의 지휘관들 또한 견실하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런 때 막힌 전선을 타개할 인물이 필요한데 유비군에는 당시 그런 인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유비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장을 만들었을 테고. 그냥 추측이다. 과연 어땠을까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언제나 역사는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사실이든 아니면 망상이든. 이 카테고리의 이름처럼. 아무튼.

원래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장군이란 상설직이 아닌 필요할 때마다 임명하는 임시직에 더 가까웠다. 당연히 장군이 임시직인 만큼 그를 보좌하는 역할들 또한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전한대에 이르러 제도화된 것이 바로 막부라는 것이었다. 전장에서 장군이 자신의 휘하를 막사에 모아놓고 의견을 모으고 지시를 내리던 것을 관청을 뜻하는 부府를 뒤에 붙여 막부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삼국지 정사를 보면 나오는 군사를 물려받아 이끌게 했다느니, 군사들을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느니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관련한 내용들이라 볼 수 있다. 어차피 남북조까지도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거두어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지급하기까지 하는 건 언감생심이었고, 따라서 대부분 녹봉은 직접 세금을 거두어 쓸 수 있도록 식읍을 나누어주는 식으로 지급되었다. 역시나 정사에 나오는 몇 백 호의 시급을 내렸다느니 몇 천 호의 식읍을 더했다느니 하는 내용이 이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병사들 역시 국가에서 직접 징집해서 무장시키고 녹봉도 지급하기보다 각 군을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지급한 식읍 안에서 해결하도록 할 때가 많았다. 말 그대로 봉건제다. 중세유럽의 봉건제가 여기서 각 장수들이 지급받은 봉지를 작당해서 돌려주지 않고 자손대대로 물려받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상속세도 나온 것이다. 원래 주군의 것이었던 영지를 돌려주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려니 일정한 세금을 댓가로 지불해야 했는데 이게 바로 상속세의 유래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는 상속세라고 하는 세금 자체가 없었다.

 

다시 말해 후한말에 장군의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지급받은 녹봉만큼 책임져야 할 식구까지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장군의 책임아래 들어온 군식구들 가운데는 그저 시키는대로 나가 싸우는 병사들 말고도 장군을 보좌하여 계책을 세우거나 혹은 장군을 대신하여 일정한 군을 이끄는 이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게 이들은 대부분 주군으로부터 관직을 받기보다 자신을 모시는 장군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지위와 함께 녹봉을 지급받았다. 그런 이들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장군부라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말 왜구로 인해 정상적인 세금수취와 운송이 불가능해지자 조정에서 각 지역의 유력자들에게 알아서 군사를 모으고 무장시켜서 싸우도록 특권을 허락했었는데 그때 원수라고 불리던 이들이 이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시 이지란이나 정도전, 정몽주 같은 이들의 경우 고려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과 상관없이 이성계의 군중에서 이성계를 도우며 같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위연이 유비 군중의 병졸출신이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일반 병졸이었다면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창 들고 활 들고 나아가 싸우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연은 이미 처음 사서에 등장했을 때부터 직접 군을 지휘하여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릉싸움에서 뜬금없이 유비를 대신해서 군을 지휘했던 풍습이나 장남과 같은 이들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가도 대충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단지 따로 부여받은 관직이 없었을 뿐이다. 유비 개인을, 혹은 장비나 관우 개인을 따르고 있었으니 다른 관직 없이 한 몸처럼 수족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탁되어 공식적인 직위에 오르면 그때부터 그는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위연이 병졸출신이라는 것도 아예 그냥 창 들고 활 들고 나가 싸우다가 어느 순간 장군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단계를 거쳤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결국 이릉에서 유비군의 주력을 이룬 것은 장비가 이끌던 군사들이었을 텐데 그들에 대한 지휘를 누구에게 맡겼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풍습과 장남도 결국 범강이나 장달처럼 장비의 군중에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장군의 직위에 올라 자기만의 막부, 혹은 장군부를 거느리게 되면 그 움직임이 상당히 둔해지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보좌하는 이들이 많으니 싸움에서 더 크게 실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대신 책임져야 할 이들이 많다 보니 그런 점들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조 진영에서도 하후돈이며 조인이며 조홍과 같은 일정한 지위에 이른 일족의 장수들의 경우 꽤나 조조와 별개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조가 어디로 가라 하면 혼자가 아닌 자신을 따르는 이들까지 모두 움직여야 하고, 그런 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에 그들을 동원하기란 군주로서도 무척 신경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조가 자신을 따라다니며 기병을 맡아 지휘하던 조인에게 한 방명의 군을 맡기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하후연에게 아예 한중전선 자체를 맡긴다는 것은 그 아래 속한 모든 것을 하후연에게 맡긴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유비도 한중태수를 자신의 손발 역할을 해야 할 장비가 아닌 위연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장비는 한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유비가 원하는 전장을 준비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자식에게 일가를 이루어 나가 독립케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혹은 기업에서 특정 부서를 독립시켜 사업부로 만들거나 아예 분사한 뒤 독자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촉한이라는 전체 기업 가운데 관우라고 하는 지사가 독립해서 계열사가 되는 것이다. 혹은 촉한이라고 하는 기업 안에 장비라고 하는 사업부가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기업 총수의 지근에서 그를 보좌하며 필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경우 특정한 사업을 맡겨 몸을 무겁게 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다. 삼성으로 치면 미래전략실 같은 경우일까? 더욱 통신도 교통도 아직 미비하던 시절 한 개인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 그같은 분업화 분사화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근대사회를 대표하는 봉건적 양식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사정들을 이해하면 전근대사회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 또한 함께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죄를 지으니 그 군사를 빼앗아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더라. 원래 누구를 따랐었는데 나중에 발탁되어 누군가의 아래에서 두각을 드러냈다더라. 누가 공을 세우니 누군가의 군사들까지 모두 아울러 이끌도록 했다. 삼국시대의 10만대군이란 각각의 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모여 만든 숫자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말까지도 그런 흔적들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단일한 체계를 가지는 관제와 군사란 고도의 행정력이 갖추어지고 난 뒤에나 존재한다.

흔히들 러시아 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세계와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한 끝에 결국 20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소비에트 자체가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러시아혁명 자체가 실패가 예견된 무리한 몽상의 결과가 아니었는가. 그런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당시로 돌아가면 어떨까?

 

러시아에서 농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어가던 것이 19세기말과 20세기 초, 러시아가 열강으로서 유럽의 여러나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워낙 땅도 넓고 인구도 많으니 유럽의 나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정작 국내의 산업기반이라는 게 처참하기 이를 데 없어서 20세기가 되도록 농노제를 유지하면서 그 농민들을 죽을 지경까지 쥐어짜서 겨우 나라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괜히 러시아의 젊은 귀족들 가운데서마저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의자들이 쏟아져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러시아혁명 자체가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 러시아를 이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되겠다 여긴 수많은 정파들의 연합에 의한 결과였고 보면 그 당시 러시아의 사정을 대충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열강이지 이렇다 할 산업도, 그 산업을 일구기 위한 자본도, 기술 또한 열악하기 이를 데 없어서 봉건적인 신분질서 아래에서 농민과 노동자를 쥐어짜가며 유지하던 체제가 혁명이 없었다고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어찌되었거나 레닌에 이어 스탈린을 지나면서 소련은 그래도 세계열강에 어울리는 산업력과 기술력과 군사력을 모두 갖추게 되었지 않은가. 국민들의 삶도 또한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었다.

 

그러면 말할 것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은 어쩌는가.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어나갔던 그 수많은 억울한 희생자들은 어찌 생각해야 하는가. 그러면 혁명 이전 제정러시아에서는 정치범도 없었고 학살도 없었을까?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카츄샤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던 시대의 배경이 바로 니콜라이 치세였다. 그래서 시베리아로 가던 도중 젊은 혁명가를 기차 안에서 만나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도 시베리아 정치범수용소는 악명이 높아서 그곳에서 죽어나간 젊은 혁명가들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도 전에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아니 그조차도 없이 체포되고 고문당하던 도중에 죽어나간 이들 역시 스탈린 시대의 그것에 비해 결코 적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러시아 사람들이 그 혹독하던 시절을 묵묵히 감내하며, 심지어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도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이들이 오히려 적지 않았을 정도였던 것이었다.

 

그만큼 혁명 이전 러시아의 상황 자체가 막장 중의 막장이었고, 그런 러시아의 내적인 한계가 결국에 러일전쟁의 패전이라는 치욕적인 결과마저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 러시아를 물려받아서, 더구나 공산주의의 확산을 우려한 기존 열강들의 포위와 차단 아래에서 오로지 소련에 기대서만 유지가 가능한 위성국들까지 먹여 살려가며 버텨낸 시간이 그래도 한 세기 가까이 되었던 것이었다. 출발지점부터 달랐다. 러시아와 미국은, 아니 러시아와 유럽의 열강들은, 심지어 이후 미국과 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의 강대궁들은 서로 적극적으로 교류도 하고 서로 지원도 하고 했었지만 러시아는 그마저도 없었다. 지금 딱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면 답이 나온다. 러시아 하나 막자고 온 유럽과 미국이 있는 돈 없는 무기 다 털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중이다. 그를 상대로 러시아는 중국과 북한에만 의지해서 전쟁을 치르는 중이고. 그렇게 한 세기 버텼으면 스탈린도 할 만큼 했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프랑스 혁명 이후 아무리 프랑스의 사정이 막장으로 치달았어도 혁명 이전의 프랑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패망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프랑스 내부에서 혁명을 위한 시도가 이어졌고, 끝내 프랑스의 왕정이 무너지고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 이어 완전한 공화정이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고도 정작 이전보다 나아진 게 없으면 영국의 청교도혁명처럼 다시 이전으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을 두고 1990년대 들어 소련이 해체되었으니 러시아혁명은 출발부터 실패가 예정된 잘못된 혁명이었다. 지금 러시아가 그래도 세계적인 군사강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누구 때문이라 생각하는가. 혁명 이전 제정러시아는 강대국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여전히 소련의 유산은 유럽 전체를 긴장케 만드는 러시아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소련의 해체만 볼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 이전과 이후, 그리고 소련해체 이후까지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혁명은 실패했는가. 러시아의 민중에게 있어 러시아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는가. 다만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한 다른 공화국들 입장에서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이야기가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그 소비에트를, 그 중심인 러시아를 지탱하기 위해서 다른 공화국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절대 작지 않았으니. 괜히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니 해방자라 여기고 호응하는 이들이 그리 많았던 것이 아닌 것이다. 아예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후퇴하는 독일군과 함께 피난을 떠나는 이들마저 있었을 정도였다. 우크라이나가 특히 심했다. 해방자인 줄 알고 독일군에 협력했더니 똑같은 슬라브놈들이라고 약탈하고 학살하고 강간하고... 나치즘이 병신이라는 이유다. 그때 조금만 시야를 넓혀 대처했다면 소련은 아예 안에서부터 무너져 사라질 수도 있었다. 가는 곳마다 적만 만들고 끝내 패망한 히틀러는 진짜 병신도 그런 상병신이 없다.

 

그러니까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해서는 안되는 혁명이었는가. 오히려 혁명으로 인해 피해만 더 커지고 말았는가. 의외로 한국 교육과정이 세계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하긴 한국의 근현대사도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그다지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았었다. 아마 1차세계대전이 아니었다면 자본주의 세계의 역사도 지금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공산주의자가 넘쳐나던 시기가 바로 2차세계대전 전후였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조인은 삼국지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이 인정하는 위를 대표하는 명장이다. 몇몇 전장을 제외하고는 거의 패배한 적이 없고, 심지어 조조와 육손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진 적 없는 유비를 야전에서 격파하기도 했다. 더구나 형주는 요충이라 그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을 리 없다. 다시 말해 관우가 전력에서 절대적인 우세라 번성에 틀어박혀 아예 나가 싸우지도 않은 것은 아니란 뜻이다. 우금의 7군이 수몰되기 전에도 이미 조인은 번성에 고립되어 있었고 관우의 포위에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삼국지를 읽다 보면 진짜 뜬금없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유비가 열심히 한중에서 조조와 싸워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한중왕까지 되었는데 느닷없이 관우가 조인이 있는 번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의 내용만 보자면 조인의 군대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고, 관우가 기습으로 방비하기 전에 친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 동네가 그렇게 방심하고 말고 할 만한 곳이 또 아니다. 오와 위와 촉이 대치하던 최전선이었고, 더구나 번성을 지나 완을 지나면 바로 허도에 이를 정도로 조위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요충이었다. 괜히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고 우금까지 포로로 잡으니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조조마저 도읍을 버려야 하는가 고민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부터 계획하고 관우가 조인을 쳤다기에는 본진이랄 수 있는 유비 진영이 전혀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도 걸린다. 관우가 조인을 이기고 번성을 점령하면 그 다음에는 어찌할 것인가. 번성에서의 대치가 길어질 경우 촉에서는 어떤 식으로 지원을 할 것인가. 그러니까 번성을 포위하고 서황과 싸우는 동안 그 기간이 꽤 길었음에도 정작 유비는 그다지 그를 지원하고자 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관우 혼자서 조조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면 관우가 혼자서 독단으로 유비의 명령과 상관없이 일단 조인한테 싸움부터 걸었던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또 손오의 움직임을 걱정해서 봉화대만 그 경계에 수도 없이 깔아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손권을 믿을 수 없는데 군사를 일으켜 조인을 공격하는 것은 물론 장기가 본진을 비워가며 포위전을 이어간다. 유비까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익양에서 손권과 대치한 것이 불과 얼마전이란 것이다. 결국 유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조인의 선제공격에 의해 우발적인 교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조인이 쳐발리면서 번성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조인의 공격은 조조가 한중에서 유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한중에서 유비를 이기려면 혹시라도 강릉에 주둔중인 관우가 양동이든 응원이든 군을 움직이는 것을 미연에 막았어야 하니까. 조조가 허도를 비우고 한중에서 유비랑 싸우고 있는데 혹시라도 관우가 형주에서 진군하거나, 아니면 형주의 군사를 한중으로 보내면 어떤 식으로는 조조군에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성에 조인이 있으니 그를 통해 관우를 견제하는 것도 필요한 조치이긴 했을 터다. 그런데 그것이 꼬이면서 역으로 조인이 번성에 쳐박히게 되었다.

 

사실 이게 웃긴 것이 삼국지연의에서 조인이 쩌리취급당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번성공방전이라는 것이다. 관우를 상대로 싸움 한 번 안 해보고 바로 번성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그런 조인을 재평가해야 한다면서 심지어 관우의 위에 올리려는 시도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없어지는 것인가. 관우 위에 위의 무장 누구를 올리려 해도 그들 가운데 조인보다 군공이 확실히 앞선다 할 만한 인물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예 싸움 한 번 없이 번성에 틀어박혔어도 꼴이 우스운데, 심지어 이미 야전이 있었고 거기서 깨져서 쫓겨들어간 것이면 더 상황이 안쓰러워진다. 즉 당시 관우의 명성이 조조마저 두렵게 만들 정도였던 이유가 비단 우금의 7군을 수몰시킨 한 가지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앞서 말한대로 관우의 번성포위가 지극히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촉의 유비 본진에서도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관우가 번성을 포위하는 내내 유비의 본진에서 어떤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조조는 우금과 서황을 연이어 구원하게 보냈었고 손권 역시 여몽과 육손으로 하여금 차근차근 뒤를 칠 준비를 마치고 있었는데 미리 계획되었다기에는 너무 안이하고 무력하다. 그 결과 남형주의 몇 개 고을만을 거느린 채 그 자원만으로 번성을 포위하고 이어 구원을 오는 조위의 군대와도 싸워야 했던 관우가 수세에 몰리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뒤에서 제때 보급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하필 그 역할을 맡은 사인과 미방이 배반하고 손권에게 붙고 있었다. 이 모든 장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당시 상황은 하나다. 마치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 한 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었는데 그 결과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한 쪽에 일방적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한 쪽 방면을 책임지는 지휘관이 싸움도 포기하고 성에 갇혀서 도망쳐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했을 정도로. 실제 당시 조인의 상황이 얼마나 불쌍했었냐면 주위에서 이대로 성을 버리고 도망치라고 조언하고 있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남군에서 주유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결론은 전술적인 승리가 반드시 전략적인 승리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때로 국지적인 도발이 전면적인 전쟁으로까지 번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왕에 야전에서 이겼으니 추격을 해야겠지. 성에 들어가 틀어박혔으니 포위도 해야 했을 터다. 그러다보니 구원을 온 우금까지 이겨 버렸네? 어찌어찌 계속 이겨나가는 동안 뒤에서는 그를 잡기 위한 계획들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 모든 일들이 계획에 없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정작 그를 지원해야 할 촉의 본진에서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었고. 그래서 상용에 있던 유봉과 맹달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인데 그들마저도 손을 쓰지 못하도록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럴 수 있도록 그림을 만든 점에서 여몽과 육손이 대단하다 해야 하겠지만. 그런데 과연 조인을 관우의 위에 놓아야 한다? 아니 조인보다도 평가가 낮았던 위의 명장들을 관우보다 높이 평가해야 한다? 글쎄... 관우가 어떤 장수였는가는 그냥 번성공방전 하나만 보면 대충 답이 나올 것이다. 당시 상황을 제대로 통제 못해 그렇게까지 몰고간 점은 대국적인 시야가 충분히 넓지 못했다 비판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삼국지에서도 촉한의 사정만 보면 유선만한 병신새끼도 또 없다. 아니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세우고 제갈공명이 그렇게 어렵게 지켜낸 나라를 그리 홀랑 항복해서 내 줄 수 있는 것인가 말이다. 더구나 환관 황호를 옆에 끼고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나라를 그따위로 다스린 것을 보면 죽음을 앞두고서까지 그리 절절하게 나라걱정을 하던 제갈량이 다 불쌍할 지경이다. 그래서 서진의 사마염도 저런 놈이 황제였으니 제갈량이 옆에 있었어도 촉한이 그리 패망했다 까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정작 유선과 같은 시기에 황제자리에 있었던 면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희석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비가 유선보다 조금 먼저 즉위했고, 그리고 조비에 이어 조예가 즉위했다가, 조방에 이어 조모와 조환이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었다. 심지어 저 조환으로부터 황제자리를 물려받아 서진을 세운 놈이 또 하필 사마염이다. 사마염 사후 서진을 작살낸 팔왕의 난이 사실상 사마염 자신이 싸놓은 똥들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평가 자체가 의미없다 할 수준이다. 그러면 오는 어떨까? 손권이 조금 더 오래 재위했지만 이 인간 살아생전 싸놓은 똥도 만만치 않은데다, 그 뒤를 이은 황제란 것들은 뭐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다. 그에 비하면 유선 재위시절 옥사가 크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강유나 제갈첨같은 인재들도 충실히 지켜주었었고, 특히 이 가운데 강유는 주위에서 참소가 상당했었음에도 끝까지 한중의 군권을 잃지 않고 북벌을 위해 전념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었다. 이렇게 보면 뭔가 좀 달라 보이지 않나? 유선이 무능한 것은 무능하다 치더라도 다른 나라의 황제들도 딱히 유선보다 나은 놈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의 선조도 그렇다. 나도 어릴 적에는 선조를 무척 싫어했었다. 그런데 선조와 비슷하게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였을 때 다른 나라 군주들이 보인 행보를 보니 어쩐지 선조를 다시 보게 되었다. 특히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그렇다. 선조는 그래도 이순신을 살려는 주어 다음을 기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숭정제는 원숭환을 아예 죽여 버림으로써 그를 따르던 일선의 무장들이 이탈하게끔 만들었다. 이자성의 반란군이 바로 북경까지 쳐들어오는 와중에 혹시라도 태자가 황위를 찬탈할까 걱정해서 피난을 늦게 보낸 탓에 그만 반란군에 붙잡혀 죽게 만들기도 했다. 선조는 전쟁이 나자마자 바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로 하여금 분조를 이끌게 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교가 되는 장면은 바로 열심히 튀어서 일본군에 잡히지 않고 왕조를 지켜냈던 선조에 비해 도망도 못치고 알아서 목매달아 뒈지는 바람에 후계도 없이 명의 남은 여력조차 지리멸렬 흩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마 조선도 만에 하나 선조가 일본군에 붙잡혔다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광해군이 아무리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이끌고 있다 하더라도 임해군도 왕자이니 다른 생각을 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렇더라도 명분이 확실한 이상 어찌되었거나 광해군이 이후 조정을 이끌면서 일본과의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을 것이다. 진짜 비교가 되지 않는가?

 

전쟁이 끝나고 의병들도 적절히 챙겨줬고, 공신들에 대한 예우 또한 논란이야 있어도 크게 무리없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서 백성들을 되찾아온 것도 바로 선조 때의 일이었다. 동의보감도 선조 때 왕명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었고, 전후복구도 나라사정이 어렵다고 창덕궁 하나 간소하게 지었을 뿐 큰 토목공사 없이 적당히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광해군보다 낫다. 아직 전쟁이 끝난지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궁궐을 더 짓겠다고 백성들을 노역으로 내몰다가 반정으로 폐위되고 동정도 받지 못했었다. 인조는 뭐... 이 새끼는 진짜 광해군 덕분에 왕이 된 놈이라 말할 가치도 없다. 아니다. 인조야 말로 선조를 재평가하는데 필요한 아주 훌륭한 비교대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도망치는 것도 못해서 식량도 없이 남한산성에 쳐박혀 있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항복하는 병신과 비교하기에는 선조가 너무 불쌍하다. 전쟁 이후 전후처리만 보더라도 씨발 이 새끼는 멀쩡한 지 자식과 손자들까지 죄다 죽여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크게 역할도 못했던 김자점같은 놈들을 옆에 끼고서 나라꼴 아주 작살내고 있었고.

 

비교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 아니 사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군주제가 폐지디고 민주정이 들어서게 된 이유일 것이다. 정도전이 제대로 군주제의 허점을 보았다. 핏줄만으로 왕위를 이으면 결국 이런 병신들이 더 다수를 이루게 된다. 그런 병신들로 인해 멀쩡한 나라도 한순간에 망하고 만다. 중국 명나라의 황제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데도 나라가 안 망했다는 사실에서 중국이라는 대륙이 가진 저력을 실감케 된다. 북송이나 청이나 다를 것 없이 황제라는 것들 수준을 보면 진짜 애저녁에 망했어야 하는 나라가 꾸역꾸역 잘도 버티고 있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 같은 걸 얻게 된다. 그에 비하면... 이전이나 이후의 조선왕들과 비교하면 선조보다 낫다고 할 인간이 진짜 몇 되지 않는다. 태종과 세종, 그리고... 영조와 정조? 아, 숙종도 포함. 그 밖에는? 

 

그래서 역사는 여러가지 각도로 더 폭넓게 다양한 대상을 통해 비교해가며 이해해야 한다. 왕으로서 선조가 불만스러울 수는 있지만 그러나 당시 전근대시대의 군주 가운데 그 정도면 꽤나 무난하다. 무난한 것을 넘어 충분히 유능하다 할 수 있다. 진짜 동아시아, 아니 세계의 역사를 보더라도 유선만도 못한 놈들이 왕이랍시고 너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놈들이 더 많다. 그래서 군주제가 역사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남은 곳들도 몇몇을 제외하고 왕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아 있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대에도 직급상 청와대 비서실장이 각부처의 장관과 동급으로 되어 있지만 그보다 아랫 직급인 수석들이나 심지어 그 아래에 있는 비서관들이 정권의 실세로 거론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긴 비서실장이나 수석등의 경우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실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의견을 전달하고 지시를 수행하는데 있어 그 아랫 비서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직급상으로 훨씬 위에 있음에도 각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대통령 바로 아랫 의전서열인 국무총리마저 청와대 비서관을 꺼려하는 경우마저 생기기도 한다.

 

청와대 참모진 뿐만 아니라 지난 정부 시절 검찰만 보더라도 검찰총장이 사실상 장관 위에서 노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아예 검찰이 작정하고 청와대까지 몇 번이나 압수수색하며 장관을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아마 정권 내내 수도 없이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검찰총장의 공무원으로서의 직급은 과연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장관 아래다. 법무부 아래 검찰청의 수장이 바로 검찰총장이다. 그 아래 일선 지검장이나 고검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전 정권에서는 국정원장 또한 그런 정권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는 했다. 당연히 국정원이 아예 정권의 개노릇을 하던 군사정권 때는 국정원의 전신인 중정이나 안기부의 장이 정권의 핵심 가운데 핵심으로 여겨지고는 했다. 하긴 아예 박정희 정권 말에는 박정희의 심기경호 및 하반신경호까지 맡았던 경호처장이 중정마저 누르고 있었다. 

 

현대에도 그런데 전근대시대야 말할 것도 없다. 환관들이 한 나라의 재상들마저 우습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품계가 재상들의 위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바로 나라의 권력 그 자체인 황제의 주위에서 전적인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더라도 조선의 경우에도 역시 왕과 왕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모신다는 이유만으로 내시들은 명목적인 천대와 달리 상당한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시대이다 보니 품계와 상관없이 아무래도 대부분 관직에 있는 이들은 지방직보다 왕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중앙직을 선호하고 있었다. 같은 품계라면 당연히 중앙관직이, 설사 어느 정도 품계의 차이가 있더라도 중앙의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관직이 선호되는 것은 따라서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신임하는 관리를 항상 가까이 두기 위해 품계를 조정하는 경우 또한 역사상 꽤나 빈번하게 있어 왔다.

 

어째서 유비의 장수들 가운데 조운은 초반부터 함께하며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었음에도 중용되지 못했는가? 중용되지 못했는데 나라의 명운을 걸고 손오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후방을 맡았겠는가?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면서 후방을 맡겼던 두 인물이 바로 제갈량과 조운이었었다. 제갈량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운은 유비의 명령으로 후방에 머물러 있다가 유비가 육손에게 패하자 군을 움직여 더 이상의 추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마 유비가 친정을 나간 사이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했다면 이 또한 조운이 진압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1차 북벌에 나섰을 때 조진의 본대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도 바로 촉한에서 홀대받았다는 조운과 등지였었다. 다시 말해 조운이 나섰기에 조진이 제갈량이 아닌 조운의 군대를 본대라 여기고 미끼를 물었던 것이었다. 위연이 있었음에도 당시 위는, 위연과 전투를 치러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조운을 더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진과의 전투에서도 조운은 별동대라는 한계로 인해 전력에서 열세였음에도 충분히 지연역할을 함으로써 제갈량의 본대가 조위의 빈틈을 공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속이 가정에서 패배하면서 전국이 퇴각할 때도 역시 후미를 지키면서 큰 피해 없이 대부분의 물자를 보전해가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투에서 이겨서 진격할 때보다 지고 퇴각할 때가 더 위험하다는 전장의 상식에 비추어 이때 보인 조운의 지휘력이란 매우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조운의 후미를 위협한 것이 다름아닌 조진의 본대였었으니.

 

원래 조조의 진영에서도 가장 정예라 일컬어지던 호표기를 지휘한 것은 조비 이후에나 두각을 드러내는 조휴와 조진, 조순 등 어찌보면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당연하게 모두 조조의 일족으로 조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측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방면을 온전히 맡거나, 높은 관직을 받아 한 지역을 다스리거나 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말 그대로다. 측근이니까. 조조군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장 정예의 기병을 지휘하고 있었으니까. 전장에서는 조조의 명을 받아 기병을 운용해야 했을 테고, 따라서 항상 조조의 곁에서 그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조운이 바로 유비군에서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공손찬 휘하에서도 기병지휘관으로 있었으며 유비 휘하에서도 역시 기병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항상 유비의 지근에 위치해 있었기에 당양에서 유비가 가족들과 떨어졌을 때 유비의 부인과 아들을 보호하며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만큼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서촉을 빼앗아 지배하게 된 뒤로도 조운은 유비의 지근에서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과연 유비 생전에는 유비의 지근에, 유비가 죽고 나서는 제갈량과 함께하던 조운과 직급상 위에 있으면서 한중을 다스렸던 위연 가운데 누가 실질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인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게 전근대사회에서 지방군이 중앙군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가지는 경우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단기간에 진압되고는 했던 이유였다. 여진족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이징옥조차 반란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에게 살해당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고려시대 서경이라면 무신들의 고향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음에도 그 서경에서 일어난 반란조차 오래 간 적이 아예 없다시피 했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수호전에 나오는 80만 금군이 바로 그 송왕조의 황도인 개경을 지키는 중앙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친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황제가 움직인다는 것은 바로 황제의 가까이서 지키는 중앙군이 같이 움직인다는 뜻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중앙군의 경우 직제에 따라 때로 지방의 행정까지 총괄하는 지방직보다 낮은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아무래도 고대의 경우 지방관직에 비해 중앙관직이 세분화되어 있다 보니 무관직이 문관직보다 낮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들까지 고려했을 때 항상 유비와 제갈량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때로 그 후방까지 맡았었던 조운이 중용되지 못했다 단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 진수가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역사서를 펴냈을 때 조운은 관우, 장비, 마초, 황충들과 같이 열전에 기록되며 황충과 함께 조아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그 바로 뒷세대였던 진수가 보기에는 이들 유비군의 주력장수들과 같은 급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촉한의 인물들 가운데 허정과 같은 경우는 관직은 무려 3공에 이르고 있었지만 정작 실권이라고는 없는 명예직에 더 가까웠었다. 그만큼 한나라에서 관직도 받았고 했으니 명성에 맞게 예우는 하지만 직급만 높을 뿐 실권은 그보다 낮은 관직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위연이 장비를 제치고 한중태수로 제수되었다 해서 위연이 반드시 장비보다 지위가 높았다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장비의 입장에서 한 지역을 다스리며 군대까지 총괄하고 싶었을 수 있지만 유비의 입장에서는 장차 있을지 모르는 전쟁을 위해서라도 장비가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명령을 받들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권력의 관계에서 보면 조운 역시 유비 생전에나 제갈량이 탁고를 받고 난 뒤나 촉한 조정으로부터 꽤나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이릉대전과 1차 북벌에서 그같은 촉한 내부의 신뢰와 외부의 인식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고. 조진이 추격한 것이 제갈량이 아닌 조운이었던 것이나, 조운이 구원에 나서자 조비를 경계하기도 했을 테지만 어찌되었거나 육손이 더 이상 유비를 추격하는 것을 멈춘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러니까 조운이 죽고 그 아들들까지 제갈량에 이어 강유의 군중에서 북벌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일 터다. 조조와 처음부터 같이 했던 인물들 가운데 아들까지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경우는 조운 말고 제갈량 정도가 유일하다.

 

관제만 보지 말라는 뜻이다. 전근대사회의 특징이다. 오히려 높은 관직인데 명예직일 때가 있고, 관직은 낮은데 오히려 권력자와 더 밀착해 있는 실세인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전근대사회에서 중앙관직은 항상 지방관직보다 우월했다. 장료가 아무리 높은 대우를 받았어도 조조의 일족인 조휴나 조진과 비교할 바가 아닌 이유와 같다. 서황이 그 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조조로부터 더 큰 신임을 받으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조조의 일족인 조씨와 하후씨들이었다. 관직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실제 그들이 가지는 지위와 권력은 권력의 중심과의 거리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단지 문자만으로 관직을 보려 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현대와 다른 전근대사회를 이해할 때 생기는 오류들이다.

 

 

유비가 멋진 옷과 개와 말, 음악을 좋아했다는 기록을 두고 돗자리를 만들어 팔았지만 가난하지는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는 모양이다. 하긴 그럴 것이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서 팔던 주제에 무슨 옷이고, 개고, 말이고, 음악일 것인가?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그런 것들도 좋아하고 즐겼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아도 일단 좋아하는 건 해야 하는 사람들.

 

한때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했을 것이다. 돈도 좆도 없는 주제에 명품만을 찾는다. 버는 것도 쥐뿔도 없는 주제에 사치스러운 것들만 즐긴다. 아니 세월호참사가 한창 이슈가 되었을 때는 이혼하고 위자료도 제대로 못 주는 주제에 국궁을 취미로 삼는다고 지랄하던 새끼들이 있었다. 물론 맞다. 인간은 일차적인 욕구부터 해결하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일단 살아야 한다. 안전해야 한다. 그러고 난 다음에 다른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흔하지는 않지만 그런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당장 하루 한 끼 라면만 먹더라도, 아니 이틀에 한 번 죽지 않을 만큼 설탕물로만 연명하더라도 다른 누구도 자신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초코파이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 눈으로 보고 확인했던 적이 있었다. 진짜 우유도 없이 초코파이만 먹고 살고 있더라.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취미가 있었거든. 그런데 자기 벌이가 그다지 충분치 않으니 다른 곳에서 아껴서라도 그를 누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론 굳이 자기가 좋아한다고 사서 즐길 필요는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중고시장이 의외로 당시에도 제법 발달해 있었으니. 그렇게 먹는 것까지 아껴가며 어떻게든 필요한 것들을 사서 즐기다가 진짜 중요한 순간에는 그동안 사서 모아 놓은 것들을 그 시장에 내다 팔아서 부족한 비용을 마련한다.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오타쿠들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굶어서 배고픈 것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저것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더 안타까운 것이다. 당장 먹은 것이 없어서 눈앞이 어찔한데도 그것을 위해서 그나마 있는 것들마저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뭔가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수호전과 같은 유협물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인물상이기도 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으면서 멀리서 대단한 사람이 왔다고 하니 있는 것이라도 팔아서 대접하고자 한다. 아니 아예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그 사람을 대접해야 한다는 강박마저 느낀다. 실제 유비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사귀는 것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동시대의 인물인 동탁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당시 서량의 이민족 추장들이 동탁을 찾아왔을 때 마침 밭을 갈고 있었는데 대접할 것이 없으니 그 소를 잡아서 대접했다고 한다. 당장 그 소가 없으면 밭을 갈 수 없을 텐데도 그렇다. 그러니까 동탁이 서량의 맹주가 되고 나아가 서량의 군사를 이끌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공통점은 무언가면 나 자신보다, 나라고 하는 개인의 생존이나 안전보다 더 중요한 다른 추구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비가 당시 좋아하고 즐겼다는 저 모든 것들은 원래 돈도 좀 있고 신분도 어느 정도 되어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유비 스스로도 자기는 장차 화려하게 장식된 수레를 타고 다닐 것이라 말했다지 않은가.

 

요즘 말로는 아마 이런 것을 허영이라 부를 것이다. 당시 기준으로는 다른 발로 호방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취직도 못했는데 항상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먹은 것도 없는데 오히려 더 멋지게 세련되게 머리도 만지고 몸도 깔끔하게 다듬는다. 그리 비싼 것은 아닐지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시계 하나 쯤 손목에 제대로 차고 다니기도 한다. 뭔 헛바람이냐고 그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평소 자신을 잘 가꾸는 사람은 그것이 평소 몸가짐으로도 드러나는 법이다. 가난한데도 먹는 건 제대로 차려먹어야 한다던 어느 가장의 이야기가 괜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인물이었으니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조차 천하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일 테고, 싸움에 져서 맨몸으로 쫓겨다닐 때도 천하에 대한 뜻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유비의 성격이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운과 같은 인물들로 하여금 어떤 경우에도 그를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일 게다. 이 사람이라면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이 되든 아니면 뒷골목 허풍선이로 끝나든 뭐든 될 것이다. 가장 의미없는 것은 그냥저냥한 아무것도 아닌 삶을 살고 끝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의외로 유비같은 경우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의외로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경우가 드물지 않게 보일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그러한 성향이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포부로 이어지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비는 그런 경우였고, 오타쿠들은 그냥 방구석에서만 끝나는 존재들이었을 뿐. 그래서 과연 돈이 많아야만 멋진 옷과 개와 말과 음악들을 즐길 수 있는 것인가. 주위에 친구가 많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짚신이나 삼고 돗자리나 만들면서도 그럴 수 있다는 자체가 유비라는 인물이 가지는 매력일 수 있는 것이다. 문득 생각나서 끄젹여 본다. 

유선과 같은 시기 황제노릇했던 인사들이 조위의 경우 조예, 조방, 조모, 조환이다. 손오는 손권부터 시작해서 손량, 손휴, 손화, 손호가 이어받는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아예 사마씨에게 실권을 내주고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다가 심지어 그 가신에 의해 살해당하기까지 했던 조씨의 위나라나, 이궁의변 이후 제대로 된 황제 없이 허구헌날 내분에 폭정에 실정에 바람 잘 날 없던 손씨의 오나라에 비해 촉한은 진짜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을 제외하고는 그저 잔잔하기만 했다. 심지어 제갈량이 죽고 장완과 비의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큰 일 한 번 없이 조용히 지나갔었다.

 

흔히 환관 황호가 후주 유선을 둘러싸고 국정을 농단했다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국정이 혼란스럽던 와중에도 정작 제갈량이 만들어 놓은 촉한의 체제 근간이 흔들리거나 하는 경우는 그다지 없었다. 여전히 강유는 북쪽에서 조위를 상대로 일진일퇴를 하고 있었고, 제갈량의 아들 또한 문제없이 유선의 사위가 되어 조정에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대단하게 억울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옥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권신들이 서로 권력을 두고 다투느라 정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대신들이 붕당을 나눠 서로 참소하거나 혹은 실제 무력을 투사하여  죽고 죽이는 일도 없었다. 이민족들의 소소한 반란은 있었어도 대규모 반란 역시 일어난 적 없었다. 그러면 된 거지.

 

그러니까 촉의 후주 유선이 재위한 기간만 40년이란 것이다. 이전이나 이후나 왕이 40년 넘개 재위하면서 크게 사고 한 번 없었던 경우란 청왕조의 강희제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니 강희제도 말년에 늙어서 그런가 실수가 좀 많았다. 왕조국가의 한계다. 왕이라고 해봐야 결국 부모 잘 만난 사람 중 하나에 지나지 않기에 같은 자리에서 오래 있다 보면 지치기도 하고 질리기도 하고 긴장감도 풀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조예도 초반에 잘나가다가 말년 되면서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소모하는 궁궐공사만 몇 번을 일으키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등 할아버지가 세운 나라를 말아먹는데 크게 일조를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말년에 긴장이 풀렸다기에는 그 재위기간이 유선의 절반도 안되는 13년에 지나지 않았었다. 뒤를 이은 조방이나 조모, 조환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조조가 아들을 낳으려면 이쯤은 되어야 한다며 칭찬했던 손권은 또 어떠할까? 손권이 형 손책으로부터 강동을 물려받은 것이 서기 200년, 죽은 것이 서기 252년이니 해쳐먹인 긴자 오래 해 쳐먹었다. 그런 만큼 사건사고도 많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손오의 내정을 한 방에 박살내다시피 한 이궁의 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궁정 내부의 갈등과 다툼을 방치하고 오히려 조장한 결과 육손마저 거기 휘말려 분사하고 말았을 정도였다. 수많은 인재가 죽어나갔고, 그 영향은 이후 손오가 멸망할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몇 번이나 합비를 공격했다가 참패만 당하고 온 것이나, 압도적인 조위를 상대로 유비와 연합하고 있던 상황에서 형주를 탐내서 결국 조위를 공략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던 것은 전적으로 손권 자신의 판단이었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형주는 얻지 않았느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형주를 차지하느라 유비와 아주 사생결단을 내 버린 결과 손오는 멸망할 때까지 강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관우의 뒤를 쳐서 형주를 차지하자 노숙은 못한 걸 여몽은 해주었다며 좋아하는 꼬라지를 보면 딱 그릇이 그 정도였던 것이었다. 하긴 아버지나 형을 보면 손씨의 근시안은 그냥 내력인 듯하다. 그런데 하물며 손권의 뒤를 이은 황제들이야 뭐 이름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기는 한가.

 

아니 굳이 조위와 손오만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조위를 물려받아 삼국을 통일했던 서진은 어떠할까? 이미 서진을 개창한 황제였던 사마염조차도 말년이 되면 사치와 향락으로 나라에 망조가 들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마염 죽고 나서는 그 유명한 팔왕의 난으로 나라가 절단나기까지 고작 50년 남짓 걸렸을 뿐이었다. 그나마 사마염이 재위한 25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간은 그야말로 온 나라가 작살나는 아싸리 판이었다. 그러면 뒤를 이은 이른바 5호 16국과 남북조시대는 어떠할까? 그 기간 동안 유선의 재위기간 만큼 이어진 왕조가 없었을 정도였다. 그 남북조를 통일한 수도 아들대인 양제에 이르러 그냥 망해버렸고, 수를 이어받은 당도 태종의 치세를 제외하면 중흥기를 이끌었다는 고종조차 말년이 좋지 못했다. 오대십국이나 이후 송왕조도 굳이 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과연 이들의 치세에 비해 유선의 재위기간에 얼마나 더 사건사고가 많았을 것인가. 

 

유선이 욕먹는 이유는 사실 다른 것보다 등애가 힘들게 산을 넘어왔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한 하나가 다라도 봐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힘들게 일으켜세운 왕조를 보급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처지였던 등애에게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고 넘겨주고 말았다. 무력하고 무능하다. 그런데 당시 촉한의 주력은 모두 대위전선에 몰려가 있었고 성도에 있던 것은 2선급 부대들이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미 조정의 다수를 차지 하고 있는 대신들은 건국초기와 달리 지역의 토호들이거나 그들과 유착한 이들로 중원을 차지해야 한다는 동기 자체가 약했다. 그보다는 위에 항복하더라도 기득권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이들이 더 많았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초창기 천하를 도모하여 한실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던 것은 대부분 외부에서 온 이들로 토착세력들에게는 그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표가 죽고 그래서 유종도 토착집단이던 채씨와 괴씨들에게 굴러싸인 채 조조에게 저항않고 항복했던 것 아니었던가. 그래도 조위와 싸우고자 하는 이들은 최전선에서 버티고 있었을 테니 성도에서 유선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부분은 단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무리들이었을 터였다.

 

괜히 유선이 실전경험도 없는 제갈첨에게 있는 병력 다 긁어모아 딸려보낸 것이 아니었다. 제갈첨 말고 맡길 만한 인사가 당시 성도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황제노릇한 짬밥이 있었는데 유선이 그것을 몰랐을까? 이후 서진으로 끌려간 뒤로도 유선은 황제노릇을 그냥 한 것이 아니라는 양 제대로 된 처세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망한 나라의 황제가 자기 잘났다고 나서봐야 자기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까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나라도 망했고 볼모생활까지 하고 있는 상황에 모의를 해봐야 승자에 줄을 대려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상황에 괜한 시도를 하기보다 그저 납죽 엎드려 지내는 것이 자신은 물론 주위를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강유가 괜히 유선을 복위시키겠다 나섰다가 성도에서 피바람이 불었던 것을 기억한다면 더 그렇다. 그때 공신의 일족들이 수도없이 분노한 위군에 의해 죽어나가고 있었다.

 

유선이 즉위하고 제갈량이 옆에서 보좌한 것이 초반의 11년이었다. 그리고 장완과 비의가 다시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이때 장완과 비의가 가지고 있던 실권은 제갈량과 같지 않아서 상당부분 권한을 조금씩 다시 유선이 가져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란 세월 동안 유선은 어찌되었거나 큰 혼란 없이 촉한 정권을 이끌며 북벌을 이어나가려는 강유 또한 후원해주고 있었다. 그동안 강유에 대해 참소가 올라온 것이 몇 건이었는데, 매번 대위전선에서 패배하고 쫓겨오던 강유를 끝까지 신임하면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해 준 이가 다름아닌 유선이었었다. 이전에도 장완과 비의에 대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거의 뜻대로 할 수 있도록 지켜보기만 했었다. 비의까지 암살로 죽고 나서는 자기가 직접 국정을 맡아 이전만 못해도 조위나 손오, 아니 이후의 다른 왕조들과 비교해서도 큰 혼란 없이 내정을 이끌어오고 있었다. 옥사가 크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 학정으로 반란이 빈발했던 것도 아니고, 조정의 부패나 무능이야 역대 대부분 왕조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였다. 아니 부패하기로 따지면 삼국을 통일한 서진을 넘어설 왕조가 중국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그냥저냥 나라를 이끌어 왔다 할 정도는 되는데 그래서 마냥 무능하다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에 아버지가 워낙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에 대한 평가가 아버지인 유비에 비해 한참 못미친 것이 가장 컸다. 조조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아쉬움을 느낄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조씨의 위나라야 망하든 말든, 아니 차라리 망했으면 좋을 왕조였기에 민중들이 그에 이입하여 안타까움을 느낄 이유따위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해 유비에 이은 촉한 왕조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며 보고 있었으니 그 왕조를 2대만에 말아먹은 유선이 무능해 보이는 것이다. 유선이 재위해 있는 동안 조위에서만 조비에서 조예, 조방, 조모, 조환까지 황제가 다섯이 갈렸고, 손오에서도 손권에 의해 손량, 손휴, 손화, 손호까지 다섯 황제가 즉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조위는 조비와 조예, 그리고 손오는 그냥 손권 하나다. 조예도 말년이 망조였었고, 손권도 노망이란 게 무언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촉한에서는 유선 혼자서 나라를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주 나라가 들썩들썩했던 이들 왕조들과 다르게 촉한은 조용하기만 했다. 황호가 국정을 농단했다는데 크게 옥사가 일어난 것도 없고, 대단하게 국정이 파탄나는 일도 없었다. 그냥저냥 중국 역사 전체로 보면 평탄한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다. 그 또한 제갈량의 공이라면 공이겠지만, 아니 그래서 유선이 폄하당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능하다 욕할 정도까지 되는가.

 

어째서 등애가 산을 넘어 후방을 치고 왔을 때 유선은 제대로 저항조차 않고 나라를 넘기고 있었는가. 등애를 막겠다고 군사들을 실전경험이라고는 전혀 없는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이끌고 있었다. 그를 보좌하는 인물마저 아버지가 위에 항복하며 끈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던 황권의 아들이었었다. 마막이 병신이라서 등애만 보고도 바로 항복했던 것일까? 나헌은 어째서 유선이 항복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위에 항복한 촉을 위해 오군과 맞서 싸웠던 것일까. 무엇보다 강유의 북벌은 어째서 내부의 수많은 반발을 불러왔으며, 유선을 복위시키고자 강유가 종회와 난을 일으켰을 때 다수 촉의 유신들은 침묵하고 있었는가? 그 맥락을 이해하면 유선의 항복도 마냥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유씨는 외부인이었고, 토착세력들이야 누가 천하를 차지하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과연 유선이 무능했는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유선과 동시대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실제 오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던 서진의 사마염만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사마염이 과연 유선보다 황제로서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갔었는가. 그 이후의 황제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남북조의 황제들은 더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유선을 무능했다 말할 수 있는 황제는 수문제와 이어서 들어선 당의 태종 정도가 그나마 자격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가 워낙 대단했어서. 따라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때문이다. 아버지가 하필 유비라는 것 말고 엄밀히 따져서 과연 유선이 무능했었는가 돌이켜보면 그렇게 판단할 이유는 그다지 없음을 알게 된다. 삼국지 후반의 내용이 그만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다. 기대치가 높았다. 그 뿐이다.

 

조선시대 여진부락을 토벌할 때 했던 일들이다. 일단 살던 사람들을 쫓아낸다. 그리고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우물을 메운 뒤 갈아먹던 땅에는 소금을 뿌린다. 다시는 그곳에서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원주민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니 굳이 저항하지 않는 사람까지 쫓아가서 죽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청나라 때 강희제가 오이라트부를 아예 씨몰살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도 워낙 오이라트부가 반복해서 반란을 일으키다 보니 일어난 일이었고, 청나라 건국 초기 강남에서 저지른 학살에서도 어찌되었거나 모든 사람을 죽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죽인 숫자만 놓고 본다면 조조보다 더 많기는 했다. 그만큼 당시 강남의 인구가 후한말의 서주의 인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큰 도시 하나면 수 십만은 훌쩍 넘어가던 시절이었으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때의 학살은 이민족인 만주족이 한족의 왕조인 명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역사상 초토화라고 하는 것들이 대개 이런 정도 수준들이었다.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도 단지 일정기간 동안 약탈을 허락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는 조금 더 상황이 끔찍하기는 했지만 이조차 이교도를 용납할 수 없었던 종교적인 이유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최소한의 포로와 같은 생존자를 남겨두기는 했었다. 학살의 규모도 최대로 잡아야 10만 이하였다. 정설로는 4만 정도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교도인데도 그렇다. 더구나 이 경우도 예루살렘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 그런 것이었지 굳이 작은 마을까지 뒤져가며 일일이 학살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전근대사회에서 그러는 자체가 상당한 비용과 수고를 요구하는 고단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조조는 굳이 수 십만이나 되는 백성들을 일일이 찾아서 닭과 개까지 모두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고대사회에서 일상적이었다? 

 

당장 삼국지를 보자. 삼국지의 인물들 가운데 그만한 학살을 저지른 인간이 또 있었는지. 심지어 낙양을 불사르고 수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내몬 동탁조차도 직접 백성들을 수 십만이나 살해하지는 않았었다. 낙양을 불사르고 저항하는 백성은 죽였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백성들을 장안으로 끌고가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있었다. 수도 없이 서량병을 동원해서 주변의 고을들을 약탈하면서도 그것이 조직적인 학살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그토록 조조빠들이 비웃는 원소는 또 어떤가? 공손찬이 욕을 들어먹는 것도 당시 명망이 높던 유우를 죽이고 사람들을 함부로 억압했던 때문이지 백성들을 함부로 학살해서는 아닌 것이다. 그래봐야 도적무리였던 장연이나, 동탁에 이어 서량을 장악했던 한수와 마초 등도 다르지 않았었다. 누가 또 조조처럼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했었는가? 아, 있다. 항우. 항우가 당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더구나 수도 없이 유방을 몰아쳐 승리하고서도 끝내 패자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이유였다. 심지어 항우가 학살을 저지른 것은 조조보다도 4백년도 더 전이었다. 과연 조조의 학살이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도 얼마나 일상적인 것이었는가?

 

아니 조선의 세조처럼 자기가 왕이니까 마음에 안 들면 다 죽여버리겠다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그래서 과연 조조가 왕이기는 했는가 하는 것이다. 조조가 왕이어서 왕을 거스르는 백성들을 모조리 죽인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조조가 헌제를 받들면서 그 명을 받들어 황명을 거스르는 죄인들을 징치한 것이라 말한다. 그래, 황명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치자. 그래서 그것이 과연 헌제의 의지였는가, 아니면 헌제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그를 포위하고 있던 조조의 의지였었는가? 헌제가 백성들을 학살하라 지시한 것인가? 아니면 조조가 자의로 저지른 것이었는가? 무엇보다 조조가 처음 서주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은 아직 헌제를 데려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조조 후방에서 연주의 고을들이 죄다 들고 일어나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될 뻔도 했던 것이었다. 왕도 아니고, 그저 일개 군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그래도 황제로부터 벼슬도 받았음에도, 나라의 구성원인 백성들을 학살한 것이다. 그냥 살지 못하게 쫓아내고 주거지를 파괴하는 정도를 넘어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인 것이다. 그런 행위가 어떻게 당시에도 일상이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조조와 같은 학살이 일상이었다면 최소한 정사든 소설이든 삼국지 안에서 그와 비슷한 사례가 보였어야 하는 것이다. 삼국지가 아니더라도 이후의 역사에서 그런 경우가 최소한 몇 번은 보였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실제 역사에서 보이는 학살들이란 이민족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이교도에 대한 것이거나,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거나, 그도 아니면 황제 개인이 미친 새끼여서 저지른 짓거리인 경우가 거의 대다수다. 그래서 그같은 학살을 저지른 놈들은 역사에서도 미친 놈이거나 폭군이라거나 하여튼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조조만 다르다. 조조의 학살만은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지 않은 지극히 냉정하고 이성적인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전략적 행동이었다. 이런 걸 이성이라고 논리라고 합리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기만일 따름이다.

 

조조와 비슷한 정도의 학살은 그런 점에서 거의 천 년 넘게 지난 명말청초나 아니면 태평양 전쟁시기에나 겨우 보이는 정도라는 것이다. 청이 강남을 점령하면서 저지른 학살과 일본군이 남경에서 저지른 학살 정도만이 그나마 조조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 사이에 정신나간 인간들이 있어서 미친 짓거리를 저지른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케일적인 면에서 그와 비견하려면 이 정도는 끌고 와야 한다. 그래서인가? 굳이 이제와서 청나라를 긍정하려는 건 아닐 테고 역시 일빠인 것일까? 일본의 남경대학살을 긍정하고 싶은 것인가? 하긴 일본군위안부도 역사적 사례를 들어 일반적인 경우였다며 옹호하고 나서는 일빠새끼들이 적지 않기는 하다. 다 늙은 새끼가 저따위 소리 지껄인 거 보고 있으면 역시 그런 새끼였구나.

 

다시 말하지만 당시는 물론 이후의 역사를 보더라도 조조 정도의 학살이란 그리 흔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 정도 규모로 그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죽여댄 경우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자국의 백성을 상대로 저질러진 경우가 매우 드물다. 아, 있구나. 4.3 제주도 대학살. 이걸 빼먹을 뻔했다. 결국 이게 의도였을까? 이승만과 조병옥을 미화하고 싶었다. 그런 의도라면 이해가 된다. 제주도민을 모두 씨몰살하려 했던 의도도 일반적인 것이었다. 개새끼들이란 것이다.

조비가 헌제로부터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자 한실의 부흥을 부르짖던 촉에서도 유비가 한의 계승을 천명하며 제위에 올랐다. 아직 헌제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산 사람을 죽었다며 제위에 오른 행위가 과연 명분상 정당한 것인가? 차라리 양위를 받고도 헌제로 하여금 작은 고을 하나 주고 그 안에서 황제노릇 계속하도록 해 준 조비가 차라리 유비보다 낫지 않은가? 그러면 어쩌라고? 역적놈들이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었으니 아직도 그냥 옛황제만 모시고 있으라고?

 

명나라 때도 당시 황제인 정통제가 오이라트부를 토벌하겠다고 친정에 나섰다가 포로로 잡히자 병부시랑이던 우겸이 나서서 경태제를 새로 옹립하여 북경에서 에센의 군대를 막아내고 있었다. 황제가 적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되어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영을 내려야 할 권력의 중심이 부재할 경우 자칫 분열로 자멸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조정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서라도 황제는 필요했던 것이었고, 에센이 정통제를 인질로 내세울 경우를 대비해서도 인질로서의 가치를 약화시켜야 한다. 더구나 상대가 황제를 칭했는데 내가 아직 왕이라면 의전이나 호칭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의 관제에서 황제가 임명할 수 있는 관직과 왕이 임명할 수 있는 관직의 차이가 크다.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를 칭하는데 그에 준하여 의전도 하고 관직도 내리는 상황에 아직 이쪽은 왕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명분상 손해가 상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와 촉이 각각 황제를 칭하자 오에서도 뒤질새라 황제를 자칭한 것도 그래서다. 구한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도 굳이 일본이 나서서 고종을 황제로 만들어 준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일단 조선을 청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려야 정당하게 청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일본이 대한제국의 내정까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아직 조선이 청으로 책봉을 받는 왕의 지위에 남아 있으면 외교적으로 청을 배제하고 조선을 건드리는데 장애가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 조위 치하에서 헌제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미 제위를 잃었는데 그 명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를 다시 되찾는다는 것도 지난한 노릇인 것이고, 그렇다고 아예 무시하기에는 또 명분이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양한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복위를 천명하기에는 이미 조비는 선양받아 황제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일단 헌제를 어떻게든 모셔와서 다시 황제로 받들던가, 아니면 헌제가 이미 황위를 잃은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던가, 그럴 경우 헌제가 살아있으면 곤란한 점이 있으니 아예 죽었다 말하는 것도 정치적으로 괜찮은 프로파간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사 헌제가 황위를 잃었어도 어떻게든 다른 황족을 통해서라도 한이라는 왕조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헌제를 무시해서도, 한실부흥이라는 명분이 기만이어서도 아니라는 뜻이다.

 

북송이 멸망했을 때도 황제를 비롯해서 대부분 황족들이 여진에게 끌려가자 겨우 남은 황족 하나가 강남으로 내려가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금의 영토에 황제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강남에서 따로 조정을 차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덕분에 금이 황제들을 다시 돌려보내겠다 했을 때 남송 조정에서 그것을 꽤나 곤란하게 여기고 있기는 했었다. 이전의 황제들이 돌아오면 지금 황제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황제가 없다고 그 자리를 비우면 왕조의 정통성 자체는 끊기고 마는 것이다. 새롭게 금에 맞설 구심점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황제가 사로잡히거나 혹은 강요에 의해 퇴위되었다 하더라도 그를 이유로 황위를 비우는 경우는 오히려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전부터 자신이 한나라 황실의 피를 이었음을 명분으로 삼았던 유비가 선양으로 황위를 내놓은 헌제를 대신해서 한의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헌제로부터 역적 조조를 토벌하라는 밀조도 맏았었기에 더욱 그를 명분삼아 한왕조를 무너뜨린 역적에 맞서 그 정통을 잇는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역적 조조를 토벌하고 한왕실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서. 그러면 만에 하나라도 유비가 조비를 무찌르고 다시 중원천하를 되찾았을 경우 헌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앞서 예시로 들지 않았던가. 북경공략에 실패한 에센이 다시 정통제를 돌려주었을 때도 이미 황제로 즉위한 경태제는 그대로 황제로 남아 있었고 정통제만 상황으로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경태제가 후사도 없이 죽고 나니 정통제가 다시 친위쿠데타로 황위를 되찾아 천순제가 되기도 했었다. 굳이 헌제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해서 비난하는 것은 그냥 사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튼 요즘 토탈워:삼국을 하면서도 새삼 느끼게 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서양 놈들의 왕위에 대한 이해가 또 동양의 그것과 너무 다르다. 정작 후한말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인데 가만 하고 있으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왕조의 정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벌어지는 결과다. 차라리 코에이 삼국지가 낫더라는 이유이고. 역사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코에이 삼국지 쪽이 훨씬 낫다. 정설이 정설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망상은 그냥 망상일 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