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고조선이 요하 유역에 세워진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원전 3세기 무렵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패하며 압록강을 건너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된다. 이어 기원전 2세기를 경계로 위만이 고조선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준왕은 남하해서 마한을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준왕이 아니더라도 고조선의 권력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많은 지배층이 이탈하여 남하하며 한반도 남부에서 정치세력을 이루었을 것이다. 고조선 세력을 한민족의 주류라 한다면 한민족의 주류가 한반도 남쪽까지 남하해서 정치세력을 이룬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들이 내려오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부정하거나 혹은 의문을 갖는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던 왜의 세력과 그를 증명하는 듯한 고분군 등의 유적들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이다. 어째서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와 더 가까운데도 일본인들이 사는 일본의 영토로 남아 있는가. 한 마디로 한국인의 주류가 만주와 요동을 거쳐 남하하기 전 한반도 남쪽에는 바다를 통해 건너온 일본의 주류와 같은 왜라 불리우던 이들이 살고 있었으며, 바로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인의 주류가 이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밀려나 아예 한반도에서 내쫓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아직 과도기이던 삼국시대 후기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던 왜의 세력과 일본 열도의 왜는 서로 교류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백제 왕실과도 소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즉 백제계라 전해지는 당시 일본의 권력자들 가운데는 백제와 연관이 있을 뿐 민족적으로는 오히려 일본의 주류와 같았을 이들 또한 상당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마도가 거리상으로 한반도와 더 가까운데도 지금까지 일본인이 사는 일본의 영토로 남은 이유는 북쪽으로부터 남하한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미처 바다건너 대마도까지 관심이 미치지 않은 결과란 것이다. 바다를 건너 정복한다는 자체도 많은 시간과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대마도는 그다지 탐나는 땅이 아니었다. 지금도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있다는 것 말고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어업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난한 지역이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대마도로 관광을 많이 가서 조금 형편이 피었을 뿐 역사상 항상 가난했고 그래서 또한 한반도의 해안가를 약탈하는 해적들의 소굴이 되고는 했었다. 태종이 한 번 토벌군을 보내고 나서 굳이 더이상 조공이나 받고 제한된 무역만을 허락할 뿐 군사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던 것도 그만큼 실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한국인의 남하는 한반도 해안가에서 멈췄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본서기의 기록들도 영산강 유역에 남은 흔적들도 모두 납득이 간다. 어째서 백제와 가야까지 참여하는 임나의 존재가 역사서에는 등장하는가. 그 먼 바다를 건너서 왜는 무려 수 만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해서 광개토대왕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과연 기원 2세기, 3세기 일본은 역시 바다건너 신라까지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영산강 유역에서 동해안과 가까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육지로 이동하기보다 바다를 통하는 편이 더 쉽고 빠르다. 여기서 혹시나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백제의 중심지는 호남이 아닌 호서 - 즉 지금의 충청도였다는 사실이다. 원래는 한강유역인 서울 인근이었다가 장수왕에게 박살나고 지금은 충청남도 여군에 속한 사비까지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전, 그리고 이후로도 백제 왕들과 긴장관계를 이루던 이 일대의 지배세력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냥 한민족이란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고 처음부터 한반도에 살았었다는 민족주의의 신화만 지우면 쉽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인 것이다. 최초로 한반도에 정착했던 초기인류들 역시 결국은 이주민들이었다. 중국을 지나서든, 혹은 바다를 통해서든, 만주를 거쳐 북에서 내려오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동해 온 이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며 차례로 한반도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땅으로 남하해 온 것이 아니란 것이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도,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도, 가야의 건국왕인 김수로 역시. 그리고 그 전에 이미 이땅에는 주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럴 경우 자칫 한반도 자체가 일본인들에게 회복해야 할 고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쫓겨나고 수백년 뒤에나 일어난 일인 것이다. 원래 한반도는 한국인의 땅이었고, 한국인이 한반도의 주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반도의 주인들을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아예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역사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의 문제다. 하필 그 대상이 일본이기도 해서.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역사의 한가운데 고대의 일까지 끼워넣기란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지우고 나면 나오는 결론은 하나. 처음 한국인들은 선주민인 일본인을 이기고 그들을 내쫓은 뒤 한반도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일이다.

내가 안철수라는 정치인에 대해 의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사실 별 것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라는 인물을 다시 발견했다는 '무릎팍도사' 출연분을 통해서였다.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지?

 

아마 그동안 내가 정치인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면 얼추 눈치챘을 것이다. 어차피 옷차림이나 몸가짐이야 주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글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판단을 빌리라고 따로 참모도 두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것 만큼은 어쩔 수 없이 길게 숨기거나 속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에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세심하게 세밀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적확하게 사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는가. 그만큼 듣는 상대를 배려하면서 최대한 자신의 의사를 오해없이 전달하기 위한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다양한 풍부한 어휘와 정교한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박근혜가 공주라는 이유다. 아마 정치를 하기 전까지 박근혜는 말도 거의 몇 마디 하지 않으며 대부분 혼자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나경원이 제멋대로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며 뻔한 거짓말과 말돌리기를 일상으로 하는 이유 역시 상대가 자신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교안 역시 그렇게 사려깊게 어휘를 선택하고 사용하는 타입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역시나 그리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다. 알아서 듣고 알아서 들어야 하는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언어란 습관이다. 그리고 그 습관은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누구와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하는가. 그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여기고 있는가. 그래서 말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됨됨이도 알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평소 주위와의 관계에 대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한 편으로 언어란 한 사회, 혹은 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고도로 거대화되고 복잡화된 사회에서는 그만큼 정교하고 체계적인 언어라 필요하게 된다. 의미를 세분화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며 전혀 이해가 없는 타인과도 소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각각 라틴어와 중국의 한자어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중해세계에서 로마는 가장 크고 강하고 가장 고도화된 문명을 가진 제국이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중국의 여러 왕조들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뒤에도 그들이 이룬 고도의 문명은 남아 다른 민족 다른 문명에게 전해졌다. 굳이 대상을 표현할 어휘를 찾기도 전에 먼저 어휘가 전해지고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그 과정에서 수도 없이 일어났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문명은 그같은 라틴어와 한자어의 토대 위에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닌 미국의 영어가 라틴어와 한자어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차라리 영어의 표현을 빌리는 것이 자기 언어에서 새로운 표현을 만드는 것보다 빠르고 쉽다. 전달하기도 이해하기도 더 편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명의 발달정도에 따라 영어로도 대체할 수 없는 표현들이 언어마다 존재한다.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는가. 얼마나 정교하고 세밀하게 의미의 차이를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가. 얼마나 의미는 적확하게 오해없이 전달될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 원시사회에서는 그렇게 고도로 발달한 언어체계 같은 것은 그다지 필요치 않을 때가 많다. 세계가 좁고 관계가 단순할 때는 그냥 '그것'이라 말해도 '그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충 두엇이라 말해도, 얼추 자작하다 표현해도 그 의미를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도화된 사회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은 명확해야 하고, 둘인지 셋인지, 물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야 한다. 선명과 분명과 또렷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명징 역시 굳이 풀어서 쓰는 이상의 의미를 단어 그 자체로서 가진다. 몰라도 상관없지만 알게 되면 더 다양한 상황에서도 더 많은 구체적인 의미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문명의 고도화이며 언어의 진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성의 발달이다.

 

과연 그렇게까지 고도화된 어휘와 표현들이 필요한가. 물론 필요치 않다. 말한대로 좁은 관계 안에서 관습적으로 대화할 때는 대충 의미만 통하면 알아서 이해하게 된다. 그런 때는 굳이 어휘를 고르고 걸러서 표현하는 자체가 의미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이에서도 더 구체적이고 더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하고자 한다면, 추상적인 의미들까지 더 적확하게 오해없이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은 더 다양한 더 풍부한 어휘들이 필요하다. 그런 표현들을 찾고 혹은 만들기 위해서 개인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사유하며 궁리해야만 한다. 그래서 또한 언어란 개인의 관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지성까지도 낱낱이 보여준다. 얼마나 많이 아는가 하는 지성이 아닌 그를 위해 노력해 온 과정들인 것이다. 얼마나 일상에서도 사려깊게 대상을 구체화하여 인식하고 전달하려 노력하는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냥 거시기면 거시기다. 머시기면 머시기다. 그것이면 그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단어들을 써가며 표현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런 단어들이 있기에 의미는 더 명확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 힘든 그 단어만이 가지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기호적인 선명함을 위해서 반드시 그 단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다.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러면 배우면 된다. 설마 그 글을 쓴 사람은 그 단어를 어디 인던에서 용이라도 잡고서 얻었겠는가. 그래서 있는 것이 사전이고, 굳이 사전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물어 그 뜻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단어를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면 다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명징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은 몰라도 대충의 의미조차 모르는 사람이 이리 많다는 사실에 놀라고, 직조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것을 넘어 아예 그런 단어를 쓰는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에 또 놀란다. 물론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아예 알려고도 않고 그런 단어를 쓰는 자체를 비난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을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당장 나만 해도 글 하나를 쓰며 가장 자주 많이 하는 행동이 포털을 띄우고 사전을 뒤져 내가 쓰고자 하는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는 것이다. 과연 지금 내가 쓰고자 하는 이 내용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이 적절한가. 혹시 의미전달에 오해가 있지는 않을까. 굳이 두꺼운 사전을 일일이 뒤지지 않아도 클릭 한 번으로 대부분 단어의 뜻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란 것이다. 반지성주의라 불러야 할까? 모르는 것을 넘어 아예 아는 자체를 거부하고 혐오하고 증오한다.

 

사회가 퇴화되고 있는 증거일 것이다. 그보다는 한국사회의 계급화가 상당히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인지 모르겠다. 그런 고도화된 정교한 표현과 단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었다.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아예 거부한다. 지금 자신들이 쓰는 언어로도 충분하다. 언어의 벽이 생긴다. 더 고도의 언어를 필요로 하고 실제 사용하고 있는 이들과 아예 그를 거부하는 이들 사이의. 너무 쉽게 소통하는 인터넷의 폐해일까. 문장만 조금 길어져도 읽기를 거부하는 쉬운 글쓰기와 읽기의 부작용일까. 설마 이런 논쟁이 벌어질 줄이야.

 

아무튼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당연하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고 싶은 충동이고 욕구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지성이다. 교육과정의 문제일까. 일방적으로 주입은 시켜도 스스로 알기 위한 노력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 알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배워야 하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것인지. 내가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안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지성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어쨌거나 그래도 한 나라에서 엘리트라 불리우는 이들의 언어사용을 보면서도 절망은 깊어진다. 무려 전직 판사들이다.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전직 검사였을 것이다. 언론인도 있다. 말하는 것이 직업이었던 이들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그들이 선택한 어휘들의 천박함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그냥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어떤 논쟁에 대한 감상일 것이다. 그런 것치고 너무 거창해졌다. 나도 평소에 흔하지는 않더라도 가끔 쓰던 단어가 명징과 직조였을 텐데. 아무튼 재미있다. 인터넷은 확실히 넓다.

 

아주 오래전 초기기독교에 있어 가장 큰 적이라면 - 아니 오히려 가톨릭보다도 더 기독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지주의란 것이었다. 다른 말로 비의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상징과 숨겨진 뜻이 있고 그것을 소수의 사제들만이 알고 선택된 이들에게만 그 진실한 의미를 전한다. 그런데 이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 아닌가.

그래서 가톨릭이다. 보편적인 교리란 이들 영지주의 사제들이 저마다 독점하며 설파하던 제각각의 비의에 대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교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숨겨진 비유나 상징같은 것 없이 오로지 문자로 기록된 성경의 내용 그대로 믿고 받들며 따라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성경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당시 로마 황제의 정치적 목적에 충실하게 황제가 주재하는 주교회의에서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초기교회란 로마 황제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조직이었고 이는 로마교회가 동로마황제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바로 이같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황청 중심의 성경해석에 반발하며 나타난 것이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었다.

문제는 교황청의 성경해석 독점에 반발해서 독립해 나오는 과정에서 역시나 종교개혁을 이끈 종교지도자들에 의한 해석이 더해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마다 종교지도자들마저 새로운 종파를 만들 때마다 새로운 해석을 더하게 되었으니 기독교에는 다시 서로 다른 수많은 해석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 수많은 해석들 가운데 어떤 것이 진짜이며 성경의 내용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런 가운데서 심지어 자기가 신에게서 계시를 받았다며 성경의 숨겨진 의미와 진실한 해석을 자기가 알고 있음을 주장하는 이들마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프로테스탄트라는 자체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작된 것이란 주장마저 나오고 있겠는가.

내가 성경을 안다. 내가 진실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 그러므로 나를 믿어야 한다. 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 개신교 목사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여전히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고, 그래서 악마숭배라며 비판할 때도 흔히 근거로 드는 것이 이들 영지주의와의 연관관계였다. 그런데도 자신만이 진실한 신의 뜻을, 성경의 의미를 알고 있다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보다, 예수보다, 어쩌면 여호와보다 목사인 자신을 더 믿으라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어째서 초기기독교의 주교들이 그토록 영지주의를 증오했고 아예 기독교의 역사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는가 최근 더욱 깨닫게 된다. 교리를 독점하면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고대 지중해세계에서 유행했다던 비의주의의 기괴한 의식들까지 떠올려보면 그래서 당시 가톨릭의 사제들은 그렇게 영지주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었구나. 신의 뜻은 모조리 성경에 그대로 들어 있는데 또다시 신과 만나겠다고 자신을 학대하고, 혹은 정상을 벗어난 행위를 하는 것은 과연 신을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신을 배반하는 것인가.

성경도 예수도 여호와도 아닌 목사를 쫓으려는 최근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목사 자신의 신을 대신하려는 최근 개신교의 모습들을 보면서. 심지어 아파트단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거대한 교회란 현대의 바벨탑은 아닌가.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사단인가. 무엇이 선이고 악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원래 기독교가 가고자 했던 길은 무엇일까. 어째서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었는가. 목사들과 오로지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다수의 신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깨달음같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이 상당했던 이유는 사실 별 것 아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사회주의자들 뿐이었다. 심지어 소련의 경우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계급해방의 연장에서 제국주의의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약소민족들을 해방시키겠다며 적극적으로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호치민도 이때 소련으로 가서 스탈린과 만나고 있었다.


고립무원이었다. 지금 서방이라 불리우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야 당장 자신들부터 식민지배를 하던 입장이었으니 조선의 독립투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중국은 청이 망하고 여러 군벌이 난립하며 당장 자신들부터 일본의 침탈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었다. 그래서 한 편으로 항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의기투합하여 중국공산당과 손잡은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일단 중국공산당을 도와서 일본을 무찌르고 나아가 조선과 조선인을 해방시키겠다. 바로 같은 목적에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도 자국의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해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던 조선의 민중과 연대하려 했었다. 이른바 국제사회주의라는 것일 터다. 자본가와 제국주의라는 압제자들과 싸우려는 자신들은 오로지 동지고 형제들이다. 다만 일본의 사회주의는 해방도 되기 전에 일본이 고도로 군국주의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침략이 시작되고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가 더욱 강화되며 식민지 조선 내부의 상황은 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사회주의자들은 이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마지막까지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을 유린하고 서구열강을 패배시키며 동남아시아까지 석권한 일본제국주의의 위세에 눌리며 조금씩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자신들만의 힘으로 유럽의 열강들마저 패배시키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무찌르고 독립을 이룰 수 없을 테니 그런 일본에 협력함으로써 최소한의 자치라도 얻어내자. 미국과 유럽의 열강들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일본의 힘을 배우고 일본의 지배 아래서 조선인의 자치와 발전을 이루도록 하자. 사실 일제강점기 말 친일로 전향한 이들에 대해서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어느 쪽이든 현실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한 최선인가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말 독립운동을 하려면 사회주의자여야 했고 사회주의자들만이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나마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거의가 친일로 돌아섰거나 최소한 타협노선을 걷고 있었기에 사실상 국내에 독립운동이라고는 좌익계열밖에 남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오죽하면 임시정부가 귀국하며 당시 조선 국내에 남았던 이들은 모두 친일파라며 일갈하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좌익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겠다 말하고 있으니. 그러면 좌익계열을 제외하고 당시 식민지 조선에 남았던 독립운동가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까 뉴라이트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며 옹호론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을 빼면 조선인들은 그다지 식민지배에 항거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해방 이후 노선투쟁은 노선투쟁이고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다. 일단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이루고 난 뒤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배제한 바로 그 해방까지의 행적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운형은 온전한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단지 그나마 당시 조선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사회주의자들 밖에 없었기에 그들과 연대해서 하루빨리 조선의 안정을 되찾고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시도들까지 깡그리 부정한다면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역사에 순종과 타협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하는 것이다.


좌파라서 안된다? 그 좌파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빨갱이 때려잡던 우익 우국지사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에 굴종하거나 혹은 타협하며 조선의 인민들을 약탈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 빨갱이 때려잡던 손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까지 때려잡고 있었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은 것일 게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빨갱이 때려잡던 그 우국지사들에 있다. 나경원의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다. 한국사회의 뿌리는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그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앞잡이들에게 있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역사다.


정말 뭣같은 것이다. 그래도 미국이든 유럽이든 서방의 열강들이 우리의 독립을 도왔었다면. 심지어 어느 개신교인은 일제의 지배가 있었기에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며 긍정하기도 한다. 차라리 개신교 있는 일제의 지배가 개신교 없는 독립보다 낫다. 현실이 그랬었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았고 단지 사회주의자들만이 우리를 도우려 했었다. 모두가 깡그리 잊으려 하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신화들을 보더라도 한반도의 왕조는 이주민에 의해 세워진 경우가 많았다. 당장 마한만 하더라도 위만에 쫓겨온 고조선의 준왕이 세웠다 하고, 백제는 졸본의 온조가 유리왕을 피해 내려와 세운 나라였다. 가야의 신화는 북방계인 김알지와 해양문명인 허황옥과의 결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사로육촌은 원래 조선의 유민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았었을까?


일본의 역사는 야요이인이 죠몽인을 정복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야요이인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다. 그런데 정작 일본어와 한국어가 계통적으로 갈라진 시기는 그보다 더 오래다고 말한다. 즉 한반도에서 건너가 일본을 정복한 야요이인과 지금의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한국인의 원형은 기존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선주민을 이주민들이 정복하거나 혹은 결합하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이들 야요이인이야 말로 한반도의 선주민이라 보아도 옳지 않겠는가.


상당히 이른 시대에 특히 영산강 일대를 중심으로 발견되는 일본과 연관된 유적이나 유물들도 그런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북쪽에서 내려온 이주민들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대에도 아직 한반도의 선주민들은 주로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어떤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었다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라는 단어는 그렇게 설명이 가능하다.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던 선주민들도 독자적으로 나라를 세워 마한이나 변한 등에 속해 있었다면 백제와 가야가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이질적 집단이었던 신라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선주민인 왜와 갈등을 빚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임나일본부란 한반도 주류세력에 의한 한반도 정복사의 한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다. 원래 한반도에 선주민이 있었고, 그들이 일본까지 일찌감치 진출했으며, 그들 사이에 바다를 사이에 둔 네트워크도 남아있었지만, 결국 이주민인 고구려, 백제, 신라에 의해 하나하나 정복당하고 멸망당하며 아예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연결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완성지은 것이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멸망이었다. 굳이 일본이 수만의 구원군을 보내 백제를 도우려 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것이다. 사료를 기준으로 분명 한반도 남부에 임나는 있었다. 바로 그 임나에 가야와 백제마저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임나는 무엇인가. 일본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반도 왜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왜가 한반도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쫓겨간 것이다. 원래 역사란 자체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니. 한반도인의 조상은 저 멀리 바이칼호에서 왔다고 하지 않던가. 그냥 생각이다.

우습게도 인류의 문명은 바로 그 자극적인 맛을 쫓으며 번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유럽이 위험을 무릎쓰고 먼 바다로 나가며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이유와 같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사츠마가 류큐를 침략하면서 설탕이 대량으고 공급되자 비로소 음식들이 달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그냥 짜기만 했다.


지금이야 워낙 이런저런 양념들이 넘쳐나니 차라리 아무것도 치거나 바르지 않은 순수한 재료의 맛이 최고라 여기는 것이지 이전에는 아니었다. 하다못해 소금이라도 쳐야 했고, 돈이라도 조금 있으면 진귀한 향신료 정도는 듬뿍 발라주어야 했었다. 어떻게하면 기존의 재료로 더 새롭고 더 맛있는 맛을 만들 수 있을까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저 고기를 구워 소금에 찍어먹던 고기구이가 갖은 양념에 재워 굽는 불고기로 발전한 것이다. 그냥 굽는 것은 그대로 달고 짠 간장양념에 굽는 것은 또 그대로 그렇게 인류는 색다른 맛을 추구해 왔었다.


물론 아예 재료의 맛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달고 짜고 맵기만 한 음식들이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또한 원래 좋은 재료를 쓸 수 없는 환경에서 보다 쉽고 값싸게 음식을 만들어 공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발달한 일종의 편법들이었다.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문명의 차이라기보다는 그냥 문명 안에서도 환경의 차이, 혹은 계급의 차이로 이해해야 한다. 그마저도 소금과 설탕과 고추가루가 싼값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니 역시 문명의 발달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가난하고 문명이 뒤떨어진 사회에서는 짜고 달게 먹으려 해도 그럴만한 소금도 설탕도 구하기 어려운 곳이 많다.


아무튼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들치고 감미료와 향신료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요리들도 다양한 것이다. 언제 어떤 재료를 어떤 감미료와 향신료를 써서 더 맛있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궁리와 고민이 그 많은 요리들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쇠고기의 맛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쇠고기 하나로 그 많은 맛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다만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맛을 해칠 정도로 달고 짜고 맵게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한 마디로 어찌되었거나 맛있다 여기기에 음식들도 달고 짜고 맵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세뇌됐다고 말하기에는 그래서 떡볶이를 맛있게 여기는 대중의 입맛은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달고 짜고 맵다. 물엿을 아예 색이 변하도록 넣고, 거기에 소금과 고추가루도 듬뿍 쓴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나마 맛이 순하다는 간장떡볶이도 짠 간장에 설탕을 듬뿍 넣어도 달고 짜게 만든다. 결국 그렇게 만들고 소비되는 이유는 그것을 사람들이 맛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소한 매운맛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사람들은 떡 특유의 식감에만 적응하면 문화권을 떠나서 대부분 맛있게 여기기도 한다. 외국인에게 인기있는 한국음식들도 대개 그런 것들이다.


순수한 재료의 맛을 최고로 추구하는 일본만화를 보면서 한 번 써보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 건 단지 예전 일본에는 그만큼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재료 자체가 부족했던 때문 아닌가. 우리나라 음식도 원래는 매우 심심했었다. 소금도 귀했고, 설탕도, 고추가루도 아직 비싸기만 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추운 북쪽지방에서는 남쪽에서보다 더 심심한 음식을 즐겼다. 그래서 북쪽 지방의 음식이 남쪽 지방의 음식보다 더 발달해 있는가.


삼계탕에도 소금을 넣어 먹지 않는다. 설렁탕도 소금 없이 그 자체의 심심한 맛을 즐기는 편이다. 그래서 아무데서나 설렁탕을 사먹지 않는다. 그저 달고 짜고 맵기만 한 음식은 나도 혐오한다. 그러나 그건 그것 이건 이것. 그렇다고 재료의 맛을 해쳤다 할 수 있는가. 문명은 더더욱. 우스운 것이다.

멀리 가려 했더니 벌써 몇 년 전 '매드맥스:분노의 도로'가 개봉된 적 있었다. 원래는 '북두의 권'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아니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무협소설은 어떨까? 중앙정부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며 정파니 사파니 무림문파들이 제각각 무력을 소유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최선의 전쟁보다 최악의 평화가 차라리 낫다. 아무리 숭고한 이상을 위한 전쟁이라도 결국 전쟁이란 자체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 그런 공포 속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최소한 김정은의 치세라도 김정은 한 놈만 조심하면 되는 것과 달리 오늘은 이편이 이겼다가 내일 저편이 이기면 그때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바로 국가가 폭력을 독점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국가 말고 어느 누구도 개인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 개인의 인신과 재산에 대해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그를 위해서 국가는 더 강력한 폭력을 독점하지 않으면 안된다. 군대를 보유하고 경찰력을 동원하고 그럼으로써 국가 이외의 폭력이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제약한다. 물론 그 국가가 더 나쁜놈일수도 있지만 말했듯 이놈저놈 칼들고 총든 놈들을 걱정하기보다 국가 하나만 조심하면 그래도 안전하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당장 사악한 독재자를 몰아냈더니 군벌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고 있는 실제의 현실들을 돌아보라. 그래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지금이 독재자의 치하보다 더 나은가.


경제에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은 다름아닌 결제수단이자 가치의 수단인 화폐일 것이다. 누가 화폐를 독점하고 발행할 것인가에 따라 경제 전반이 크게 좌우되게 된다. 어느 나라의 경우처럼 아무 생각없이 화폐만 찍어냈다가는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국민들의 일상마저 위협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선처럼 아예 화폐를 발행하지 않으면 화폐를 구하기 힘들어지며 역시 경제에 압박이 가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화폐를 독점하고 차익을 노리려는 놈들마저 있다.당장 흥선대원군부터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라며 당백전을 발행하고는 전작 세금은 상평통보만으로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그나마 권력자들은 그런 실정이 계속되면 반발이 일고 마침내 권력을 잃고 쫓겨나기라도 한다. 그런데 단지 돈만이 목적인 개인이라면 어떨까?


개인이 발행권을 갖는다. 개인이 임의로 화폐를 만들고 찍어내어 시장에 유통시킬 수 있다. 어떤 화폐를 어느 정도의 가치로 유통시킬 것인가도 개인이 정할 수 있다. 당연히 누가 얼만큼 어떻게 가질 것인가도 개인이 정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얼만큼 화폐를 발행할 것인가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다. 단지 화폐발행의 국가독점을 몇몇 개인의 독점으로 바꿀 뿐이다. 그나마 국가는 국민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가지지만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블록체인의 전제가 타인의 선의에 기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를 발행하는 주체들의 선의는 어떻게 믿어야 할까? 100명이 합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10명이서 서로 이해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역사적 시간에 비례해서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책임과 권한 역시 강화되어 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계제국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언젠가 세계 역시 하나의 정치체로 묶이게 될 것이다. 단일한 통화와 단일한 규범과 단일한 권력구조를 가지고 보편적인 원리와 가치 아래 지배되게 될 것이다. 중동의 인권과 미국의 인권이 다르다. 유럽의 정의와 아프리카의 정의가 다르다. 그 혼란으로 인한 비용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하나의 보편적인 원리 아래 하나가 되어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를 뻘로 배운 것인지. 화폐의 역사도 알지 못하면서 화폐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최초의 화폐는 국가가 발행한 것이 아니다. 최초의 화폐는 개인과 개인이 약속한 가치있는 재화였었다. 화폐를 국가로부터 독립시킨다. 화폐를 중앙으로부터 분리한다.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인지. 어이없다.

요즘은 모르겠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물렵 국사교과서에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이점으로 중국과의 교통을 꼽았었다.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해상으로 교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다. 혹은 한강 하구의 소금생산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이야 말로 전국 최고의 곡창이었다는 사실을.


아닐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강인 한강이 바로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라는 한반도의 동서를 크게 가로지르는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된 강이었다. 당장 지금도 완만한 산자락 가운데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 일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큰 도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강남은 아예 산도 거의 없이 허허벌판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호남평야의 개간이 완료된 것이 조선 전기부터다. 조선전기까지도 무성한 숲과 늪지를 개간하고 위협이 되는 맹수를 사냥하는 일에 군사가 동원되고 있었다. 북한에서도 곡창인 황해평야의 개간 역시 조선 중기에 완료된다. 그러면 그때까지 한반도의 곡창은 어디였을까? 괜히 조선에서 경기도를 관료들에게 지급할 과전의 대상으로 지정한 것이 아니다. 호남평야의 개간이 끝나기 전까지 한강유역이야 말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곡창지대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도 그래서 한강유역을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이었고. 전근대사회에서 인구는 곧 국력이고,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것은 풍부한 식량생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말도 안되는 소리다. 서울에서 농사를? 그런데 그게 불과 몇 십 년 전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한강 근처에 제법 늪지도 있었고 농사짓는 곳도 있었다. 곳곳에 비닐하우스며 논도 제법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도시가 되어 있는 백마, 일산, 광명, 안양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그 무렵 가보지 못해 모르겠다. 하여튼 부곡역만 해도 흔한 가게 하나 없이 덩그러니 역만 있던 곳이었으니. 


말하자면 지금 한반도의 식량생산은 호남평야에 비견할만한 중요한 곡창지대인 경기도를 싹 갈아엎은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거다. 특히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너무 개발이 되어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생산된 식량을로 북쪽까지 먹여살리고 했었던 것인데. 조선시대에도 황해도 북쪽은 농사가 힘들어 항상 식량난을 겪곤 하던 지역이었다. 그나마 황해도와 평양 주변에서 제법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뿐.


그냥 서울의 옛날 사진을 보다가 떠올라 끄적여 봤다. 백제며 고려며 조선이 괜히 경기도에 도읍을 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고려말 남쪽지방이 온통 왜구의 약탈로 조세조차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개경의 조정이 버틸 수 있었던 근거였다. 최소한 바로 가까운 경기도 일대는 그래도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을 테니.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산업혁명의 못된 유산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플라톤이 주장한 불완전한 신 데미우르고스는 사실 그리스의 신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리스의 신들은 불멸일지는 몰라도 전지하거나 전능하지 못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의 세계가 넓어지고 사고가 깊어질수록 그같은 불완전한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축적되어갔을 것이다. 만일 진짜 신이 존재한다면 자신들이 아는 신들과 달리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일 것이다.


아마 시작은 오르페우스였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오르페우스를 한때 지중해세계에 유행했던 미스테리아, 즉 비의주의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아다시피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기 위해 사후세계까지 찾아갔던 인물로 유명하다. 오르페우스 자기가 그렇게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죽어서 직접 지하로 내려가 죽은 이들의 왕을 만나 아내를 구해서 나왔다. 그러나 마지막에 죽은 자들의 왕 하데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아내를 지하세계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시까지 그리스인들에게 사후세계란 그저 막연한 관념으로만 존재했는지 모른다. 원래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에서도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은 매우 막연했었다. 자신들의 신을 신실하게 믿으면 죽은 뒤에 구원받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지옥을 뜻하는 영어단어인 '헬'은 그래서 북유럽신화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는 죽은 뒤에도 살아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주장하고 있었다.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고 난 뒤에도 지하세계에서의 삶이 계속 이어질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마 이집트 문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라 일컬어지는 피타고라스 역시 이집트에서 신의 비밀스런 지식으로 여겨지던 수학을 배우고 그를 기초로 자신의 학파를 만들고 있었다.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도 원래 피태고라스가 처음으로 만들어 썼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인간은 죽지만 죽은 뒤에도 영혼은 남아있어 언젠가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와 부활하게 된다.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불멸로 남아 언젠가 있을 부활을 대비하게 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언제고 영혼이 다시 돌아와 깃들 수 있도록 살아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려 막대한 비용과 수고를 들여 미이라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신들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라면 인간의 영혼 역시 신과 같이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과 신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조상신숭배와 만나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헤라클레스가 신이 되는 과정에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육신을 불사르고 불멸의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 신들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는 이후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필멸의 육신과 불멸의 영혼이라는 대비와도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 의도를 짐작케 한다. 인간에게는 불멸의 영혼이 있으며 그것은 신과 같은 신성을 가지는 진정한 자신이므로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 신성에 이를 수 있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고 듣고 배워 온 신화들은 모두 거짓이다. 신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가짜다. 그래서 거짓신들을 대신할 새로운 신을 찾으려 한다. 이데아다. 그리고 그 이데아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이다. 피타고라스가 시작했고 이후 많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동참한 일종의 종교운동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이성이란 그동안 자신들이 믿어온 거짓신들을 대신할 진짜 신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리스도교가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 철학이 추구했던 이성과 진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이 대신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며 오만하게 외쳤던 이제 비로소 완전한 진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선언은 그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이야 말로 전지하고 전능하며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그리스인들으 추구했던 진짜 신 그 자체였다. 아니 거꾸로 그리스도교의 신 자체가 그같은 그리스 철학자에게서 시작된 완전한 진리와 그를 구현한 절대의 존재에 대한 추구를 반영한 존재였다. 진짜 신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그래서 그리스 철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의 야훼야 말로 자신들이 찾던 진짜 신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신을 믿느냐가 아니었다. 역시나 불멸의 존재인 자신들의 영혼을 보다 신에 가깝게 끌어올릴 방법과 대상이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들은 상징으로 여겼다.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로 인간세계에 내려온 것 역시 그를 위한 상징으로 여겼었다.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서 태어나 인간의 육신을 죽이고 지고한 신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오리시스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신이 되었던 것처럼. 그것은 지중해 세계에서는 당시 이미 보편적인 믿음이기도 했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넘어 인도까지 원정하며 자연스럽게 섞여들어온 인도의 사상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몸으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정확히 인간의 몸을 버리고 불멸의 영혼을 통해 진정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단순한 신앙의 대상인 야훼는 그런 점에서 그들의 신이 될 수 없었다. 진짜 신은 자신들을 불멸로 이끌 무언가여야 했다. 여전히 진리와 지식은 그들에게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괜히 영지주의를 오히려 이교도보다 더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지탱하는 근본을 그들은 철저히 부정하고 폄훼한다.


아무튼 인간이 필멸의 존재로써 불멸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집트의 사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의 비밀을 알면 된다. 신들만이 가진 진정한 세계의 지식을 깨달아 알면 된다. 그래서 영지주의다. 정확히 영지를 뜻하는 그노시스는 지식 그 자체를 뜻한다. 세계는 수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는 원자라는 물질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잰다. 지구의 지름을 계산해낸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지식을 쌓으면 신들만이 아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세계의 지식과 비밀을 알아가는 과정이야 말로 진정한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길인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을 과학이라는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라 일컫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확한 지적인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신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짜 신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이 아닌 세계의 진리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신의 진리에 다가가는 방법이다.


유럽문명이 세계문명을 지배하게 된 이유인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엄밀하게 세계의 구성요소를 찾아내고 그 법칙과 원리를 밝히는 과정은 그를 계승한 유럽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 거의 쓸데없는 노력들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지식들이 실제 현실에서 쓸모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엄숙하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었다. 아무 의미도 없고 크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어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을 밝히고 진리를 쫓는다. 그 자체가 어쩌면 유럽인들이 진정으로 섬겼던 진짜 신이었는지 모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째서 유럽에서 과학문명이 유독 크게 발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유럽만이 아니다. 천문학과 수학의 지식은 많은 문명에서 신과 관련된 신성한 지식으로 비밀스럽게 전수되고 있었다. 그것을 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세속권력의 권위를 담보하는 중요한 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다만 더 철두철미하고 더 엄밀했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처럼. 근대 유럽문명의 진정한 뿌리는 이집트라는 것일까? 그냥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1. 그리스 왕정이 무너진 이유가 있었다. 원래 신들이 하는 짓거리란 당시 권력자가 하던 짓거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신이란 지고의 권위와 권능을 가진 존재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인 그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가 상상할 때 결국 참고하게 되는 것이 현실에서 역시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권력자의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동아시아에서도 최고신이라 할 수 있는 하늘의 신 옥황상제의 모습을 보면 가장 이상적인 당시 중국 황제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경우가 많다. 옥황상제가 머무는 천상의 모습부터가 당시 중국 황궁 자체였었다.


하여튼 이런 막장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혈족살인에, 근친상간에, 자기들끼리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 인간세계에서까지 온갖 해악을 미치고 있다. 당장 제우스만도 그나마 유혹에 성공한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가 유인에 납치에 결국은 강간이었다. 제우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포세이돈도 만만치 않았고, 헤르메스를 비롯 그리스의 신들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사생아들이 그렇게 신들의 강제와 억압에 의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신화 후반 신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인 영웅들의 이야기로 넘어왔을 때 더 확실해진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오이칼리아를 멸망시키고 이올레를 납치해 오는 장면이나,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아마존의 여왕을 납치하고 아직 어린 나이였던 헬레네를 납치했다가 도리어 아테네가 함락당한 이야기등은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파렴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할 수 있다. 하긴 도덕이란 자체가 고도의 사유체계이고 보면 고대의 군주들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는 했을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여신 아테네보다 수를 잘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미가 되었고, 미다스는 아폴론이 아닌 판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귀가 당나귀귀로 변했었다. 이같은 신들의 막장성이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가 되고 있기도 했었다.


2. 고대 그리스의 왕가는 세습보다는 추대가 더 흔했고, 그럼에도 대부분 왕가가 서로 인척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당장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가멤논만 하더라도 자신이 미케네의 왕이면서 동생인 메넬라오스가 스파르타의 왕이기도 했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만 보더라도 반드시 혈연을 매개로 왕위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전설이 나타날 수 있었던 이유인 반면, 이들 영웅들 역시 씨줄과 날줄로 서로 혈연으로 엮인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당시 그리스 지배층의 모습을 어렴풋 유추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미니멀한 중세 유럽의 귀족사회나 일본의 무사계급과 닮지 않았을까. 그런 체계없는 계승 또한 고대 그리스의 권력이 보여주는 파렴치함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왕위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인류역사에서 그것은 상식이었다.


3. 고대 그리스에서 양치기와 어부는 지배층에 속한 관직에 더 가까웠다. 하긴 고대사회에서 모든 생산수단은 전제군주의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을 관리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특권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의 전설만 하더라도 아버지인 라이오스가 오이디푸스를 내다버릴 때 그 명령을 따른 것도 양치기였었고, 그 양치기가 버린 오이디푸스를 주워서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에게 데려간 것도 바로 양치기였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역시 양치기로 있다가 여신들의 다툼의 심판을 맡고 헬레나를 아내로 얻고 있었다. 한 편 바다에 버려진 페르세우스 모자를 구한 것이 세리포스의 어부 딕티스였는데, 바로 세리포스의 왕 폴리덱티스의 동생이었었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폴리덱티스가 돌이 되자 뒤를 이어 왕이 되기도 한다. 


결국 양과 소는 당시 군주들에게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배 또한 값비싼 수단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당시 사회규모에서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후대의 고대화된 사회의 군주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고대사회에서는 토지 역시 군주의 소유로써 농민들은 단지 군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그로부터 필요한 식량을 얻을 뿐인 존재였었다. 농사를 짓는 씨앗까지도 그래서 모두 군주가 제공하고 있었다. 보이오티아의 왕비 이노가 전왕비인 네펠레의 자식들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 썼던 계략 가운데 하나가 농민들에게 줄 씨앗을 익혀서 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익힌 씨앗에서 싹이 틀리 없으므로 큰 흉년이 들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왕은 자신의 자식들을 신의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아직 생산력이 부족하던 시대의 토지란 사유재산으로서는 너무 가치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4. 싸움에서 진 적의 성기를 자르는 것은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포로들이 거세된 바 있었고, 가깝게는 원명교체기에 명군에 의해 원과 그에 협력하던 이민족포로들에 대한 광범위한 거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화가 그렇게 운남에서 포로가 되어 거세당한 뒤 환관이 되었다 영락제의 측근이 된 경우였다. 처음에는 우라노스나 크로노스가 각각 아들들에게 찬탈당하고 거세까지 당한 것이 어떤 신화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궁리도 했었었다. 하지만 세계사를 보거나 지중해세계의 역사를 보았을 때 그냥 거세는 패자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에 지나지 않았다. 성기를 제거했으므로 더이상 후손을 낳을 수도 없고 남성으로써 권위를 세울수도 없다. 개인에게나 혹은 집단에게나 심각한 위협이자 모욕이다. 한 마디로 씨를 말리겠다는 말의 적극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5. 문득 석탈해 신화를 떠올릴게 되었다. 석탈해도 태어났을 때 알이었던 탓에 상자에 담겨져 바다에 버려진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 역시 어머니 다나에와 더불어 상자에 담겨 바다에 던져지고 있었다. 사생아로 태어났던 때문이었다. 비슷한 예가 신화에서는 몇 더 있는데 하나같이 결혼하지 않은 채 임신했거나 출산까지 한 경우였었다. 부정한 출생이기에 차마 산모와 아이를 죽이지는 못하고 신의 뜻에 맡겨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은 아닐까. 생부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 신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가 신에 의해서만 살 수 있는 운명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죽었어야 할 운명에서 끝내 살아났으므로 그것은 신의 뜻이고 그들은 신의 자식들이다. 그냥 망상.


6. 포세이돈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괴물에 범죄자들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바다가 주는 이미지였을 것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리스는 또한 뛰어난 해양문명이었음에도 여전히 바다는 정복될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밀어닥치는 폭풍과 비바람, 높은 파도, 무엇보다 바다를 무대로 누비는 해적들까지. 테세우스가 살해한 스키론 역시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한 편으로 살라미스의 임금 키클레우스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는데, 심지어 전승에 따라서는 테세우스와 사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맨 위와 이어진다. 하긴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역유지에 의해 주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여행자에 대한 범죄가 저질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국사회에서도 있었다. 가족의 상을 당해 장례를 치르러 가는 차를 막아서고 돈을 갈취한 것이 그 마을 이장이었었다. 바다가 그 모든 것을 대신한다.


7. 얼마전 다시 그리스신화를 읽게 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굳이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니 확실히 그 맛이 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냥 신들이 신들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신화에 녹아든 역사 이전 그리스 사회의 모습에도 눈길이 가게 된다. 무엇보다 어째서 고대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했는가 그 이유를 더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가짜 세계이고 가짜 신이다. 플라톤의 그 외침은 진리는 현실의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감춰진 진짜에 있다. 영지주의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좀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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