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도 직급상 청와대 비서실장이 각부처의 장관과 동급으로 되어 있지만 그보다 아랫 직급인 수석들이나 심지어 그 아래에 있는 비서관들이 정권의 실세로 거론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긴 비서실장이나 수석등의 경우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실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의견을 전달하고 지시를 수행하는데 있어 그 아랫 비서관들의 역할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직급상으로 훨씬 위에 있음에도 각부처의 장차관은 물론 대통령 바로 아랫 의전서열인 국무총리마저 청와대 비서관을 꺼려하는 경우마저 생기기도 한다.

 

청와대 참모진 뿐만 아니라 지난 정부 시절 검찰만 보더라도 검찰총장이 사실상 장관 위에서 노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아예 검찰이 작정하고 청와대까지 몇 번이나 압수수색하며 장관을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아마 정권 내내 수도 없이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런 검찰총장의 공무원으로서의 직급은 과연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장관 아래다. 법무부 아래 검찰청의 수장이 바로 검찰총장이다. 그 아래 일선 지검장이나 고검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전 정권에서는 국정원장 또한 그런 정권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는 했다. 당연히 국정원이 아예 정권의 개노릇을 하던 군사정권 때는 국정원의 전신인 중정이나 안기부의 장이 정권의 핵심 가운데 핵심으로 여겨지고는 했다. 하긴 아예 박정희 정권 말에는 박정희의 심기경호 및 하반신경호까지 맡았던 경호처장이 중정마저 누르고 있었다. 

 

현대에도 그런데 전근대시대야 말할 것도 없다. 환관들이 한 나라의 재상들마저 우습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품계가 재상들의 위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바로 나라의 권력 그 자체인 황제의 주위에서 전적인 신임과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더라도 조선의 경우에도 역시 왕과 왕실의 가족들을 가까이서 모신다는 이유만으로 내시들은 명목적인 천대와 달리 상당한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 시대이다 보니 품계와 상관없이 아무래도 대부분 관직에 있는 이들은 지방직보다 왕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중앙직을 선호하고 있었다. 같은 품계라면 당연히 중앙관직이, 설사 어느 정도 품계의 차이가 있더라도 중앙의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관직이 선호되는 것은 따라서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신임하는 관리를 항상 가까이 두기 위해 품계를 조정하는 경우 또한 역사상 꽤나 빈번하게 있어 왔다.

 

어째서 유비의 장수들 가운데 조운은 초반부터 함께하며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었음에도 중용되지 못했는가? 중용되지 못했는데 나라의 명운을 걸고 손오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후방을 맡았겠는가? 유비가 이릉대전을 일으키면서 후방을 맡겼던 두 인물이 바로 제갈량과 조운이었었다. 제갈량이야 말할 것도 없고 조운은 유비의 명령으로 후방에 머물러 있다가 유비가 육손에게 패하자 군을 움직여 더 이상의 추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아마 유비가 친정을 나간 사이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했다면 이 또한 조운이 진압하고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이 1차 북벌에 나섰을 때 조진의 본대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도 바로 촉한에서 홀대받았다는 조운과 등지였었다. 다시 말해 조운이 나섰기에 조진이 제갈량이 아닌 조운의 군대를 본대라 여기고 미끼를 물었던 것이었다. 위연이 있었음에도 당시 위는, 위연과 전투를 치러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조운을 더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진과의 전투에서도 조운은 별동대라는 한계로 인해 전력에서 열세였음에도 충분히 지연역할을 함으로써 제갈량의 본대가 조위의 빈틈을 공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속이 가정에서 패배하면서 전국이 퇴각할 때도 역시 후미를 지키면서 큰 피해 없이 대부분의 물자를 보전해가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전투에서 이겨서 진격할 때보다 지고 퇴각할 때가 더 위험하다는 전장의 상식에 비추어 이때 보인 조운의 지휘력이란 매우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조운의 후미를 위협한 것이 다름아닌 조진의 본대였었으니.

 

원래 조조의 진영에서도 가장 정예라 일컬어지던 호표기를 지휘한 것은 조비 이후에나 두각을 드러내는 조휴와 조진, 조순 등 어찌보면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당연하게 모두 조조의 일족으로 조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측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의 방면을 온전히 맡거나, 높은 관직을 받아 한 지역을 다스리거나 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말 그대로다. 측근이니까. 조조군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장 정예의 기병을 지휘하고 있었으니까. 전장에서는 조조의 명을 받아 기병을 운용해야 했을 테고, 따라서 항상 조조의 곁에서 그의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조운이 바로 유비군에서 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공손찬 휘하에서도 기병지휘관으로 있었으며 유비 휘하에서도 역시 기병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항상 유비의 지근에 위치해 있었기에 당양에서 유비가 가족들과 떨어졌을 때 유비의 부인과 아들을 보호하며 퇴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만큼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서촉을 빼앗아 지배하게 된 뒤로도 조운은 유비의 지근에서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과연 유비 생전에는 유비의 지근에, 유비가 죽고 나서는 제갈량과 함께하던 조운과 직급상 위에 있으면서 한중을 다스렸던 위연 가운데 누가 실질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을 것인가.

 

어쩌면 너무 당연한 게 전근대사회에서 지방군이 중앙군보다 더 강한 전력을 가지는 경우란 매우 드물었다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너무나 쉽게 단기간에 진압되고는 했던 이유였다. 여진족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이징옥조차 반란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에게 살해당했을 정도라는 것이다. 고려시대 서경이라면 무신들의 고향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음에도 그 서경에서 일어난 반란조차 오래 간 적이 아예 없다시피 했었다.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수호전에 나오는 80만 금군이 바로 그 송왕조의 황도인 개경을 지키는 중앙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의 친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황제가 움직인다는 것은 바로 황제의 가까이서 지키는 중앙군이 같이 움직인다는 뜻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중앙군의 경우 직제에 따라 때로 지방의 행정까지 총괄하는 지방직보다 낮은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아무래도 고대의 경우 지방관직에 비해 중앙관직이 세분화되어 있다 보니 무관직이 문관직보다 낮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들까지 고려했을 때 항상 유비와 제갈량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때로 그 후방까지 맡았었던 조운이 중용되지 못했다 단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 진수가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역사서를 펴냈을 때 조운은 관우, 장비, 마초, 황충들과 같이 열전에 기록되며 황충과 함께 조아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그 바로 뒷세대였던 진수가 보기에는 이들 유비군의 주력장수들과 같은 급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촉한의 인물들 가운데 허정과 같은 경우는 관직은 무려 3공에 이르고 있었지만 정작 실권이라고는 없는 명예직에 더 가까웠었다. 그만큼 한나라에서 관직도 받았고 했으니 명성에 맞게 예우는 하지만 직급만 높을 뿐 실권은 그보다 낮은 관직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위연이 장비를 제치고 한중태수로 제수되었다 해서 위연이 반드시 장비보다 지위가 높았다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장비의 입장에서 한 지역을 다스리며 군대까지 총괄하고 싶었을 수 있지만 유비의 입장에서는 장차 있을지 모르는 전쟁을 위해서라도 장비가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명령을 받들 수 있어야 했다. 그런 권력의 관계에서 보면 조운 역시 유비 생전에나 제갈량이 탁고를 받고 난 뒤나 촉한 조정으로부터 꽤나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이릉대전과 1차 북벌에서 그같은 촉한 내부의 신뢰와 외부의 인식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고. 조진이 추격한 것이 제갈량이 아닌 조운이었던 것이나, 조운이 구원에 나서자 조비를 경계하기도 했을 테지만 어찌되었거나 육손이 더 이상 유비를 추격하는 것을 멈춘 것이 그 예일 것이다. 그러니까 조운이 죽고 그 아들들까지 제갈량에 이어 강유의 군중에서 북벌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일 터다. 조조와 처음부터 같이 했던 인물들 가운데 아들까지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한 경우는 조운 말고 제갈량 정도가 유일하다.

 

관제만 보지 말라는 뜻이다. 전근대사회의 특징이다. 오히려 높은 관직인데 명예직일 때가 있고, 관직은 낮은데 오히려 권력자와 더 밀착해 있는 실세인 경우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전근대사회에서 중앙관직은 항상 지방관직보다 우월했다. 장료가 아무리 높은 대우를 받았어도 조조의 일족인 조휴나 조진과 비교할 바가 아닌 이유와 같다. 서황이 그 많은 전공을 세웠음에도 조조로부터 더 큰 신임을 받으며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조조의 일족인 조씨와 하후씨들이었다. 관직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실제 그들이 가지는 지위와 권력은 권력의 중심과의 거리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단지 문자만으로 관직을 보려 한다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현대와 다른 전근대사회를 이해할 때 생기는 오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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