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功名이란 한 마디로 기회이고 인정이다. 과거제도가 정착되기 전, 고대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실력만 있다고 누구나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그를 사용할 여건과 환경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과 재능에 확신을 가질수록 개인들은 그를 활용할 기회를 바라게 되었고 그를 위한 노력 또한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실력과 재능을 누군가 인정해주고 발휘할 기회까지 허락해 준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오히려 전근대사회의 군신관계란 쌍무적 계약관계에 가까웠다. 관료제가 정착된 이후의 관계가 사용자와 고용인의 관계에 더 가깝다면 이전의 관계는 별개의 사업자간의 계약관계에 더 가까웠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적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얼마든지 등지고 떠날 수 있다. 정당하게 인정해주지 않고 댓가 또한 지불하지 않는다면 배신도 배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었다.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예양이 조양자 앞에서 자신이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한 이유를 털어놓은 대목일 것이다. 다른 군주들은 자신을 그저 여러 선비의 하나로만 여겼지만 지백은 자신을 나라의 소중한 인재로 예우했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자병법에도 보면 자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떠나겠다는 말이 아주 당연하게 쓰여 있는 것이었다. 충성이란 충분한 예우와 대가를 지불하는 이를 위한 것이지 그저 자신을 고용했다고 일방적으로 바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바로 공명이란 것이다. 공을 세우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자신의 계책을 고용주인 군주가 들어주어야 한다. 자신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존중하여 기꺼이 그를 위해 수고와 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공만 세우면 끝나느냐? 공에 따른 대가도 충분히 지불되어야 한다. 공을 세웠으며 명성이 오르고 지위가 오르고 부귀가 함께 따라오게 된다. 자신이 누리는 부귀란 자신의 실력으로 이룬 공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그럴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한 군주의 은혜인 것이다.

 

아마 삼국지를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꽤나 당황스러운 부분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유비가 선인이고 유비에게 명분도 있을 텐데 어째서 악인이고 명분도 없는 조조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이 저토록 많은 것인가. 그렇다고 모두가 조조처럼 잔인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악인들인 것도 아니다. 조조를 주군으로 삼아 충성을 다하며 조조가 다스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은 물론 일족의 모든 것을 내걸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대부분은 원래 조조를 섬기던 이들도 아니었다. 장합이나 가후처럼 스스로 항복해 온 이들도 있었고, 혹은 장료처럼 포로로 잡혔다가 전향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같이 죽을 때까지 조조와 그 아들들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쳤다. 왜? 그래서 공명인 것이다.

 

조조의 휘하에서 그들은 그동안 얻지 못했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각이나 장제, 장수 누구도 주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원소나 여포의 휘하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관직을 주고 녹봉을 내리고 병사와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당사자가 바로 조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역할에 또한 조조는 적절한 관직과 녹봉과 권한과 책임으로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물론 그래서 조위가 그렇게 쉽게 망한 것이었다. 구품중정제가 시작되면서 관리들을 평가하고 등용하는 역할을 당시 중정을 맡고 있던 사마의가 가로채 버린 때문이었다. 실제 관리들 입장에서는 조위가 아닌 사마의가 더 직접적인 은혜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삼국지 시대에만 통용되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제가 정착된 명청시대에도 그와 같은 공명의 고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사회에서는 실제 누구에게 학문을 배웠는가가 더 중요했지만 명청사회에서는 누가 시험장에서 자신의 답안을 채택하여 합격시켜주었느냐가 더 중요했다. 학문이야 돈만 내면 아무에게서나 배울 수 있었지만 과거에 나가고 관직에 오르는 기회는 아무나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명청사회에서 관료사회의 파당은 그같은 임용의 통로를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누군가의 은혜로 공명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오히려 사대부로서 너무나 당연한 미덕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비를 따르던 이들이 후대에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기도 했다. 유비가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그에 어울리는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된 것은 적벽대전의 승리 이후 형주에 거점을 마련하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말 그대로 쥐뿔도 없었다. 평원현은 공손찬이 임명하여 그 휘하로써 다스렸던 것이었고, 서주에서도 도겸이 죽고 지역의 유력자들에 의해 추대된 것이라 실권은 유비에게 있지 않았었다. 유비가 너무 쉽게 여포에게 쫓겨나고 조조에게 기반을 잃었던 이유였다. 황제가 있던 허도로 올라갔을 때는 조조가 아예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고, 원소의 휘하에서는 객장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남에서도 또한 유벽이 실제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신야를 다스린 것도 유표의 객장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지 온전히 그의 영토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 망명한 유비를 조운이 찾아가 따랐고, 이리저리 조조에 쫓기는 와중에도 수많은 인재들이 그 휘하로 몰려들고 있었다. 차라리 그런 유비에게 실망해 떠나간 진군이 정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형주에 정착하기까지 도대체 뭘 보고 그리 뛰어난 인재들이 유비에게 모여드는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결국은 공명이었다. 다만 조조가 자신의 신하들에게 제공했던 공명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이상이었다. 정의였고 당위였다. 유비가 옳다. 유비가 이루고자 하는 방향이 더 가치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를 통해 자신 또한 더 가치있는 목표를 이루려 한다. 그래서 제갈량도 고작 촉한의 승상이라는 자리마저 큰 은혜라며 자신의 목숨을 내걸었던 것이었다. 강유 또한 더 크고 더 부강한 조위에서 더 높은 관직과 더 큰 영화를 보장했음에도 차라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촉한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었다. 차라리 비참하게 죽더라도 촉한이 추구한 가치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 하지만 그런 어쩌면 바보같은 선택들이 수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십만에 이르는 백성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던 고향을 떠나 유비를 따라 나서고, 결국 조조군에 군대가 와해되고 신하들마저 흩어진 상황에서 조운 또한 목숨을 걸고 그 자식과 부인을 구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조조의 환대에도 관우는 자신이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한 유비를 찾아 굳이 먼 길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조조보다 유비를 더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조조는 이익으로 신하들의 충성을 샀지만 유비는 가치로써 신하들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할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유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충성을 다하는가. 그를 위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길을 가고자 하는가. 예양이 조양자를 죽이기 위해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까지 버리고 심지어 끝내 목숨까지 내던졌던 것처럼. 군주가 자신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으면 배신 또한 배신이 아니었지만 다만 지켜야 할 선은 분명히 있었다. 서황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양봉을 굳이 죽이지 않은 것이 그런 예다. 그런 관계를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써 아우른 것이 바로 후대의 충忠이란 것이었고. 그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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