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의 기록을 보면 흔히 보이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누구의 병사를 누구에게 속하게 했다는 것이다. 아마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군이란 당연시 중앙정부에 속해 있는 것이고, 지휘관 역시 중앙정부에서 임명해서 내려보내는 것인데, 어째서 굳이 병사들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그 소속까지 바꾸는 것인가. 더구나 일찌감치 중앙집권이 완료되어 관료적인 체계가 정착되어 있던 한국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근대 이전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봉건적인 질서를 떠올려 본다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사실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조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명망있는 사대부들에게는 그 명성을 쫓아 보여드는 또다른 사대부들이 있다. 당장 글씨부터 대부분 사대부들은 굳이 자신의 글씨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다. 대신 글 잘 쓰는 사람을 찾아서 그에게 대필을 맡겼다. 문장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역시 그에게 문장까지 맡겼다. 그래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토지와 노비에 집착했던 것이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지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챙겨야 한다.

 

하물며 전국시대 일본은 각 다이묘들이, 아니 사무라이 개인이 독립된 단위였었다. 사무라이마다 각자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신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가신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라도 영지가 간절히 필요했다. 영지가 없으면 다른 수단을 통해서라도 수입을 만들어 그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사무라이의 해적질이나 인신매매가 딱히 죄악으로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신들을 책임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신들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을 아우르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지휘관급의 전사자가 적지 않았던 조선군에 비해 일본군에서는 다이묘급의 전사자가 드물었던 것이었다. 다이묘와 가신단이 하나가 되어 싸우고, 따라서 위기의 상황에서는 마땅히 자신들의 머리인 다이묘를 살리기 위해 가신들이 희생해야 한다. 다이묘는 뒤에서 지켜보며 지휘하고, 가신들은 그 손발이 되어 앞장서서 싸운다. 그리고 그 모든 공적은 다이묘의 것이 되고, 그 공적에 따라 획득한 전리품과 상급은 다이묘에 의해 가신단에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더욱 가신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다이묘를 지키고, 다이묘의 공적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신들의 이익을 높이고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다이묘와 가신은 하나의 단위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삼국지의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최근까지 중국에서는 유력자들이 다수의 식객을 거느리고 자신을 위해 그들을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유력자일수록 더 큰 토지와 저택을 가지려 했던 것이었다. 그래야지만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재우고 먹히고 입히며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을 거둔 유력자가 움직이면 그를 따라 움직였고 그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자신의 이름을 앞세워 높은 관직과 재산과 부귀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유력자들이란 그런 다수의 군중을 거느린 대표자를 뜻하는 것이었단 것이다.

 

삼국지의 조인을 단지 조인 개인으로만 봐서는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표의 휘하에 있던 채모 역시 채모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대로 형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력호족이었다. 그 영향 아래 있던 인물들이 형주에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그 의견을 받아 쓴다면 그것이 곧 채모 자신의 능력이 되었다. 삼국지에서 신하에게 내리는 식읍이란 바로 그를 위한 재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혼자 먹고 사는 정도를 넘어서 얼마나 자신을 위한 세력을 꾸릴 수 있을 정도의 재화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식읍을 회수하고 병사를 회수한다는 것은 더이상 그와 같은 세력을 유지하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는 뜻이다. 상당히 가혹한 처벌이었다. 이후로는 그저 개인으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분명 한계가 있다. 개인의 재능도, 역량도, 경험도 분명 명확한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한계를 다른 인물들로 보충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 또한 넓어진다. 그래서 게임에서도 삼국지든 신장의 야망이든 신분이 높을수록 비례해서 능력 또한 높아지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의외로 현실적이다. 그만큼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다양한 경험을 더욱 직간접적을 얻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부족한 능력과 경험을 빌릴 수 있는 대상이 주위에 있었다. 젊은 시절 사이토 요시타쓰 하나만으로도 전전긍긍해야 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어느새 다케다나 우에스기, 미요시 등의 유력 다이묘들까지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이다. 조조도 젊은 시절에는 실수도 많았고 패배도 적지 않았었다. 조인은 여남에서 유비를 박살내고서야 비로소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보여준 것도 별로 없는 유비나 관우, 장비, 조운 등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높았던 것도 그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개인의 역량이 그만큼 뛰어났었다.

 

한중에서는 조조를 몰아붙였던 유비가 관우도 잃고 장비도 잃고 법정과 조운과 제갈량과 황권마저 주위에 없는 상태에서 육손을 상대로 얼마나 한심한 졸전을 벌이고 있었는가. 유비의 전략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를 시행하는 주위의 인물들의 역량이 이전의 인물들에 미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유비의 실력이 되고 실적이 된다. 그런 만큼 강동의 호족이었던 육손 역시 그 승리가 자신의 실력이 되고 실적이 된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살짝 회의를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아마 와키자카가 말년까지 겨우 7만석의 다이묘에 올라 있었을 것이다. 뻑하면 100만석 운운하는 대다이묘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다. 잘난 조상을 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영지나 가신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자수성가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에 들어 시즈가타케 칠본창이라 불리며 그 최측근이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 한계는 명확했다. 와키자카가 이후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며 보신에 힘쓴 이유거니와 그럼에도 여전히 7만석이란 영지 이상은 누리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 와키자카가 유일하게 자기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전장이 그런 점에서 토요토미의 명령으로 다른 다이묘들의 병력까지 아우를 수 있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이 아니었을까.

 

다케나카 한베에나 구로다 간베에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이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결국 그가 이룬 모든 업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실력에 의한 것이었다. 다케다 신겐의 군사이던 야마모토 칸스케 역시 우에스게 겐신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작전에 실패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면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가신들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명성과 영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빈익빈부익부인 것이다. 관우에 비해 명성에서 밀리던 서황이 정작 형주에서는 관우를 이길 수 있었다. 황충이 하후연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이 법정의 계략이었던 것처럼. 그럼에도 그를 모두 포함해야 하는 것이 또한 현실의 냉혹함이기도 한 것이다.

 

이재용 개인의 능력이야 어떻든 삼성의 경영진들은 뛰어나다. 삼성이란 기업 자체는 강하다. 누가 총수로 있는가보다 그 총수의 주위에 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것이기도 하다. 기껏 주위에 모인 놈들이라는 게 임종석이나 윤영찬, 박수현 같은 놈들 밖에 없었다. 고민정 같은 찌그래기들이 더 행세하는 상황이었다. 전해철과 양정철이 친문을 앞세우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처럼. 그리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지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