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전국의 대형사찰들은 당연하게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고 대규모의 농장까지 경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왕실이나 귀족으로부터 시주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는가?

 

불교신자라면 알지 모르겠다. 불교 교리에는 고리대금에 대한 금기가 딱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고리대금을 교리로써 금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고려에서는 사찰에 의한 고리대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기는 아예 일본에서는 사찰이 사병까지 보유하고 조정과 다이묘들을 상대로 무력으로 맞서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런 현실을 당시 고려의 사대부들은 현실로써 바로 눈앞에서 겪고 있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내세를 지향한다. 현실을 고통이라 여기고 그 고통이 사라진 내세의 피안을 추구한다. 그렇다 보니 불교의 교리에는 현실에 대한 고려가 그다지 충분치 않다. 그래서 불교의 경전을 보더라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굳이 구체적으로 설파한 내용을 찾기가 힘들다. 있다면 대부분 위경일 것이다. 불성부모은중경이 그 대표적인 예다. 현실의 가치인 효를 강조한 경전의 내용은 그러나 현실의 삶은 의미없음을 주장한 불교의 교리와 충돌한다. 그렇게 현실을 무시한 내세지향의 교리는 현실의 수많은 죄악을 무시하고 방관하고 심지어 동조케 만들었다. 어느 유명승려의 성폭행한 친부에 대한 조언은 그런 한 예일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불교 자신이 그 죄악에 일조하는 것도 그리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에서 부처를 부정하고 사찰을 훼손하는 폐석훼불이 주기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거대한 사찰이야 말로 악의 근원이다. 비대해진 사찰은 곧 현실의 악이다. 그리고 고려의 사대부들은 그 폐단이 고도로 일어나던 현실을 직접 몸으로 겪던 이들이었다. 그나마 돈도 있고 힘도 있던 권문세족 출신은 다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면 그런 현실을 더욱 처절하게 겪었을 터였다. 불교에 대한 이색과 정몽주의 태도가 정도전 등의 그것과 달랐던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억불숭유를 국가시책으로 정하고서도 그를 확정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었다. 여전히 다수 사찰들은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들과 유착해 있었다.

 

그런 역사를 이해한다면 문화재관람료랍시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돈을 뜯어내는 행위가 당연하게 이해가 된다. 하긴 그러니까 대통령이 작업중인 자재 위에 앉아 있었다고 지랄하는 승려가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역시 고려말 나타났던 불교의 폐해 가운데 하나였다. 사찰을 절대화하고, 사찰이 소유한 불교의 상징들을 신성시하며, 그를 통해 대중을 억압하고 강제하며 수탈하기까지 했다. 그저 억압하는 주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불교는 어느새 바로 이전의 폐단으로 지적되던 시절로 돌아가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고려말의 사대부들은 불교를 부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조선의 사대부들 역시 사찰이 불을 지르고 승려들을 때려 내쫓으려 했던 것이었는가. 현세를 위한 도덕과 규범이 없는 내세의 종교는 때로 현세의 욕망 앞에 너무 무력하다. 과거 기독교가 그랬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역시 내세가 아닌 현실의 규범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톨릭에 더욱 호감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종교란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물론 보수적인 성직자와 종교인들은 그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떠올렸다. 고려말의 사찰들이 어떤 꼬라지였었는가. 아니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유력자들과 결탁한 사찰은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대중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해인사를 약탈한 이유였다. 차라리 죽고 나서 내세만 포기할 수 있다면 현실에서야. 현실에서 더 큰 부귀영화만 누릴 수 있다면 윤회든 해탈이든 아랑곳할 것이 있는가. 그다지 믿고 있지도 않다. 내가 불교를 믿었었다. 지금도 믿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땡중인 것이다. 버러지들인 것이다. 그런 놈들을 부처는 가장 혐오했을 테지만.

 

해탈을 포기한 승려란 그저 밥버러지들인 것이다. 그래서 대승을 그리 많은 이들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대승은 사람의 역할이 아니다. 대승을 이루려면 먼저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승려는 사람이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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