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장르소설을 즐겨 읽는 편인데 요즘 지뢰를 계속 밟고 있는 중이다. 사이다라 해서 봤더니만 이게 왜 사이다?

 

이를테면 던전 안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았다. 예전 같으면 일단 구해주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히 구해준다고 했다가 위험에 처할 수 있을 지 모르므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다. 더 압권은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동정은 사치라 말하는 부분이다. 아니 그냥 잠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미안하다거나 안타깝다거나 속으로만 감정을 가져보는 것이 뭐가 그리 사치라는 것일까?

 

더 심한 것은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돈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없다면 그냥 떠나간다. 능력이 없으면 죽는 것이 옳다. 내 능력을 호구처럼 공짜로 남을 위해 쓰지는 않겠다. 몬스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지금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 앞에 내보이면 호구처럼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내 가족들만 챙기겠다.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들의 불행은 외면하겠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나아가 나는 고구마가 아니다.

 

실제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하는 말이다. 괜한 인정이나 동정에 휩쓸려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고구마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등치고 저버리고 심지어 자기 손으로 죽이기까지 해도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주위만 챙기는 사이다다. 사이다의 기준이 그동안 많이 바뀐 건가?

 

물론 깽판물이라는 말처럼 이전에도 깽판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깽판물에도 일정한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최소한 나쁜놈들 때려잡는 깽판이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주관적이나마 자기가 생각하기에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데 먼치킨적인 능력을 써먹는 나름 착한 깽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고구마가 되어 버렸다. 옆에서 바로 직전까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함께 일하던 회사의 동료직원들이 죽어나가는데도 그들을 돕는 것은 고구마다. 그들을 버리고, 아니 희생양 삼아 혼자서 살아남는 것이 사이다다. 요즘 내가 마가 낀 걸까? 어째서 이런 것들만 자꾸 걸리는 건지. 심지어 어떤 건 첫권 보고서 돈까지 내고 빌렸다. 아, 내 돈...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저런 사이다물일수록 말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냥 푹 찍 끝 해버리면 될 내용 가지고 몇 페이지 심할 때는 챕터 하나가 그냥 사라지기도 한다. 인간은 뭐 어떻고, 인간의 본성이 뭐 어떻고, 도덕이네 윤리네 정의네 운운운운운...사이다라면서?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논리가 꼭 어디서 본 것만 같다는 것. 이런 게 세대차이구나.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두고 도와주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동정조차 가지지 않는 것이 어째서 사이다인 것인가?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이해가 깊어진다. 원래 그런 것이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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