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노인요양병원에 봉사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노인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나를 보면 하는 말이 어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것이었다.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남자라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한다는 노인까지 있었다. 이게 이전까지 한국, 아니 유교문화권 사회에서의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짝을 찾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조건이 맞아서가 아니라 일단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당위 안에서 조건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조선시대에는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못한 처녀나 총각이 있으면 지방관이 직접 나서서 중신을 하고 혼례비용까지 지원하고 있었겠는가.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인간사회가 유지되는 원리다. 그래서 노인분들께 어떻게 결혼하게 되었느냐 물으면 그냥 살다 보니 때가 결혼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듣게 되기 쉬웠다. 아무것도 없이 나이가 찼으니 적당한 상대 골라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며 지금껏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특히 여성의 경우 결혼상대를 잘못 만났을 경우 세상에 이렇게 눈물나는 경우가 또 없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거의 대부분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하고, 결혼했으면 아이도 낳고, 아이도 여럿을 낳아 기르는 것이 당연했던 터였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특히 부모세대가 결혼해서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마 우리 세대부터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굳이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만 하는가.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만 하는 것인가. 사실 이것은 근대 유럽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들 보면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낸 경우를 적잖이 발견하게 되는데, 심지어 형제나 자매 모두가 결혼도 않고 아이도 없이 서로에 의지해 살다가 죽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이고 있었다. 개인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결혼과 출산, 육아에 대한 당위성이 약화되면서 굳이 필요치 않으면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그나마 유럽은 일찍부터 둘째 이하에게는 신분도 재산도 물려주지 않는 관습이 자리잡고 있어서 평생 결혼않고 사는 비혼자의 존재가 그리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따라서 비혼상태에서의 출산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특히 동아시아에서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낮은 출산율을 보이는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는 건 싫은데,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자은행등을 통해 아이만 낳았던 유명인들에 대한 대중의 가혹한 시선을 기억한다. 정자은행을 통한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남녀간의 관계에서 결혼이라는 절차 없이 아이를 가졌을 경우 과연 우리 사회는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결혼도 않고 동거만 하는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커플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하게 될 것인가. 더구나 그렇게 혼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경우 부부가 함께 기르는 것보다 더 많은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한데 그러한 정책적인 장치가 충분히 갖춰져 있을 것인가. 굳이 무리해가며 결혼하기는 싫은데, 그렇더라도 아이만은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국사회는 아직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한 사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아이를 낳으려면 결혼부터 해야 하는데 그 결혼을 하는 자체가 너무 부담스럽기에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개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굳이 프리드리히가 그랬던 것처럼 출산률을 높이기 위해 강간도, 중혼도 하여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허용할 필요 없이 그냥 낳고 싶으면 낳아 기를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면 결혼률과 상관없이 출산률을 조금은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란 뜻이다. 아니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대한 부담이 줄어든다면 결혼에 대한 부담 역시 함께 줄어들게 될 것이다. 결론은 그렇게 출산률이 문제라면 별다른 고민 없이 낳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낳을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를, 나아가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부가 제작을 지원하는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비혼출산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등의 노력을 선행하는 한 편 과감한 예산지원으로 태어난 아이에 대해 아무 걱정 없이 그저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도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여성인권의 신장이 출산률의 증가로 이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여성이 자기권리로 주도적으로 판단하여 결혼유무와 상관없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도록 한다. 출산이라는 것이 모성을 가진 여성의 권리이기도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스스로 판단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를 충실하게 인정하고 수용하며 지원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여성의 출산을 그저 사회적 강제이거나 의무로, 그렇기 때문에 출산거부를 여성의 권리처럼 주장하는 한국 여성주의는 문제가 많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곧 여성의 권리다. 하긴 그러니까 비혼출산한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과 배제에 여성주의자들까지 가세하고 있는 것이다. 모성을 여성으로부터 억지로 배제하려는 시도가 모성에 대한 여성의 욕구를 오히려 억압하는 기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낳고 싶으면 낳아야 한다. 낳기 싫은 사람더러 억지로 낳으라 할 것이 아니라 낳고 싶은 사람들부터 아무 걱정없이 마음대로 낳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아 씨발 그러고보니 가장 걸리는 것이 기독교로구나. 이 새끼들은 진짜 이 사회의 암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진보가 2찍으로 흐르는 또 하나 원인이다. 한국 진보의 뿌리가 개신교인데, 그 개신교가 말 그대로 보수를 넘어 반동 그 자체로 흐르고 있으니. 성매매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놈들인데 뭘 얼마나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유교가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경우는. 유교와 무속과 개신교가 만난 끔찍한 혼종이다. 참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