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대 왕들마다 화폐의 유통을 위해 수도 없이 고심하고 실제 실행도 해 보았음에도 매번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전황이라는 것이었다. 뭔 말이냐면 시장에서 쌀이나 포목대신 쓰라 만들어 내놓았더니 그를 치부의 수단으로 보아 가진 재산을 모두 돈으로 바꾸어 창고에 쟁여놓는 놈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화폐라는 것이 당연하게 현물화폐였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금화라고 하면 금화 하나에 함유되어 있는 금의 가치 만큼 실제 시장에서도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화라고 다르지 않았고 동화라고 당연히 다를 리 없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론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금이나 은의 비율이 높은 화폐와 낮은 화폐를 함께 시장에 유통할 경우 비율이 높은 화폐는 개인이 소유하고 시장에서는 비율이 낮은 화폐만 유통되게 된다. 상대적으로 비율이 높은 쪽이 더 가치가 높기에 치부의 수단으로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화폐 쪽을 더 다른 사람과의 거래에 쓰게 된다.

 

그래서 실제 조선에서도 관청마다 예산을 배정할 때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구리 자체를 나누어주어 알아서 동전을 찍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구리가 부족해서 가치가 올랐을 때는 동전의 무게를 줄이기도 했었고, 은의 가치가 높아지면 은화와 구리동전의 교환비가 바뀌기도 했었다. 괜히 당백전이 조선말 조선의 경제를 박살냈던 것이 아니었다. 동전 하나에 들어간 구리의 가치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데 시장에서의 가치만 100배로 늘렸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당오전을 만들어 다시 한 번 조선 경제를 망쳐 놓았던 명성왕후 민씨는 참으로 여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손에 목이 따였어야 하는 년을 국모니 뭐니... 아 씨발.

 

아무튼 그런 이유로 쌀이든 포목이든 죄다 동전으로 바꾸어 창고에 쟁여 놓으면 어차피 구리의 가치 자체가 크게 떨어질 일이 없으니 오히려 부피도 줄고 보관상에도 유리했기에 많은 부자들이 시중의 동전을 모두 사들여 창고에 쳐박아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유통되는 동전의 모양이 바뀌면 그냥 녹여서 구리로 써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실제 조선에서는 내내 구리가 부족해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써야 했기에 필요한 경우 동전을 직접 녹여서 쓰는 경우가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될 정도로 무척이나 많았었다. 그러니 시장에는 항상 동전이 부족하고, 더구나 구리가 부족한 상황에 항상 충분한 양을 공급할 수 없는 탓에 여전히 시장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유통수단으로 쌀이나 포목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면 쌀보다 아무래도 보관이나 이동에 편리한 포목을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시장에도 실제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는 오로지 거래만을 위한 포목이 등장하고 있기도 했었다. 옷으로 만들어 입기에는 너무나 성기게 짜여진, 그러나 거래의 용도로 쓸 만큼의 구색은 갖춘 면포들이 시장에서 화폐 역할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는 것은 어차피 이것들은 실제 옷으 만들어 입거나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화폐 대신 쓸 수 있으면 되었기에 구색만 갖출 수 있으면 되었다. 시장의 요구도 그랬고 제작자들도 딱 그 만큼만 만들 수 있으면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시장에 주택공급이 부족하다 여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혼자서 수 십 채 씩을 집을 소유한 투기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파트를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에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미리 대출등을 통해 독점하는 세력이 존재하기에 그만큼 주택공급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집이란 단지 시세차익만 올리면 되는 대상이기에 굳이 안전하고 튼튼한 집이란 그리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건설사가 아무리 부실공사를 해도 오히려 집값이 떨어질까 어디가서 하소연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알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다. 그런 것을 알기에 건설사들도 아무렇지 않게 대충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고.

 

90년대 DDR이 한창 유행할 따 나 역시 DDR 장판을 사서 집에서 열심히 구른 적이 있었다. 아파트였는데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었다. 윗집에서 뭐 한다고 아래층에서 들리는 경우도 일단 내 경우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위에서 뭐 해서 성가신 것은 베란다에서 뭐 할 때나, 욕실 벽을 통해 지나가는 배수로를 통해 물이 흘러가는 경우 정도였다. 그래서 솔직히 처음 층간소음 어쩌고 했을 때 단독주택에서 세를 살고 있던 나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작은 소리까지 들린다고? 어떻게? 어차피 아파트란 가격만 알아서 올라주면 되는 것이고, 집값을 결정하는 것은 그 집의 완성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집을 사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조용한데 그런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

 

그러고보면 확실히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맞기는 하다. 조선이 미개해서 화폐유통이 늦었던 것이 아니었다. 원래 금은 워낙 가치가 높아서 실제 시장에서 유통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은은 바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원했고, 그렇다고 구리를 쓰려니 효종 전에는 조선에서 구리가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구리마저 독점하려는 놈들이 있었다. 화폐의 독과점으로 인해 현물을 교환해야 하는 생산자가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경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많은 사대부들이 지적하며 경계하고 있기도 했었다. 요즘 아파트 부실공사 논란들을 보며 문득 떠올린 사실이다. 너무 닮아 있다. 조선후기 화폐의 상황과. 유통의 수단과 치부의 수단, 그리고 실제의 쓸모에 대해서. 새삼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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