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피스톨즈라면 아마 아는 사람은 거의 아는 이름일 것이다. 대중음악을 넘어 현대 대중문화의 흐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당장 핑크패션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옷핀과 피어싱, 왁스, 찢어진 옷과 가죽 등이 바로 이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펑크문화라는 자체가 바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펑크를 막장의 다른 말로 만든 놈들도 바로 이놈들일 터다.

 

갑자기 놈들이라고 호칭을 바꾼 이유란 다른 게 아니다. 이 새끼들 음악을 시작할 때부터 유명해지고 싶다고 악기상을 털어서 시작했다. 악기라고는 배워 본 적 없는 놈들이라 기본적인 코드도 짚을 줄 몰라서 음악까지 무척 단조로운데 거기에 더해 베이스도 칠 줄 모르는 놈을 얼굴마담으로 세워서 핸드싱크까지 했었다. 펑크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시드 비셔스가 바로 그놈이다. 허구헌날 마약과 술에 취해서는 무대에서까지 헤롱거리던 놈들이 바로 이놈들이었다. 무대에서 자해하는 짓거리도 이놈들이 시작했다. 방송 도중 사회자에게 대놓고 욕설을 내뱉어서 방송출연금지까지 당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흔히 펑크밴드라 하면 떠오르는 모든 막장짓을 이놈들이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고구마가 카메라에 침을 뱉은 행위나 카우치가 느닷없이 방송 도중 바지를 벗어던진 행위 역시 이들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차라리 당당했으면 막장이라도 멋이기나 했지 끝까지 비겁했다는 게 카우치가 지금까지 욕먹는 행위일 것이다. 아무튼 그러면 이런 막장새끼들에 대한 언론이나 대중의 평가는 어떠할까? 그냥 레전드다. 그동안 저지른 짓거리에 대해 욕은 할 지언정 그래도 그들의 음악이 가지는 가치를, 아니 그들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헤비메탈의 시작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레드제플린이지만 정작 따지고 보면 히트곡 가운데 상당수가 표절곡으로 의심받거나 심지어 법적인 판결까지 받은 터였다. 사생활도 만만치 않은 막장이라 이른바 그루피라 부르는 팬들과의 추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 로버트 플랜트는 자기 처제와 불륜을 저질러서 꽤나 화제가 되었을 것이었다. 드러머인 존 보넴은 약물중독에 결국 술을 있는대로 쳐마시고 자빠져 자나가 토사물이 목에 걸려 죽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었다. 하긴 레드 제플린 뿐인가. 롤링 스톤즈의 믹 제거는 막장인 사생활을 아예 자랑처럼 떠벌리는 인간이고, 블랙 사바스의 보컬이던 오지 오스본은 술과 마약에 쩔어서 오죽하면 부인이 이러다 이 인간 죽겠다 싶어 결혼했다 이야기까지 했었을까. 최초의 락밴드라 불리우는 후는 호텔 벽에 구멍을 뚫는 전통 아닌 전통을 만들었고, 오아시스도 그 전통을 물려받아 베개 훔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역시 대중과 언론의 평가는 어떠한가?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지미 헨드릭스나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아직까지 전설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사생활이야 어찌되었든 그가 이룬 업적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문제들은 단지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서의 일일 뿐 공적인 영역에서는 대중적인 그들의 역량과 업적을 우선해서 판단해야 한다. 사생활에 대한 비판은 비판대로, 그러면서 아티스트로서 그들이 대중문화와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인정해야 한다.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동안에도 그의 사생활에 대한 가십을 보도하던 언론들 역시 아티스트로서 마이클 잭슨의 이룬 업적과 현재의 위상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그를 존중하면서 한 편으로는 그의 사생활을 파헤쳤다. 찰리 채플린이나 파블로 피카소의 사생활이 그들의 위대함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런 문제들조차 사소하게 여길 정도로 그들이 남긴 업적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어쩌면 이야말로 군사독재의 유산일 것이다. 그래도 일제강점기 일본 새끼들은 조선인들을 억압하면서도 조선인 개인이 가진 역량 자체는 어찌되었거나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용운을 몇 번이나 잡아넣고, 그때마다 고문까지 했으며, 더구나 일상생활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식민지 조선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중요한 인물로써 일정한 활동을 하며 개인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까지 강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족 지도자들이 어찌되었거나 식민지 조선인들의 구심점으로서 저술도 하고, 강연도 하고, 언론에 기고도 하는 등 최소한의 활동은 보장받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박정희는 어땠는가? 단지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중현을 아예 매장시켜 버렸었다. 오죽하면 대마초관리법이 만들어진 것보다 대마초혐의로 대중예술인들을 처벌한 것이 더 앞서고 있었겠는가. 그냥 활동만 정지시킨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나온 음반들까지 모두 파기해 버렸다. 그래서 신중현의 오래된 음반을 찾으면 옆나라 일본에서 찾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것을 전두환이 물려받았었고, 이명박과 박근혜가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다시 부활시켰었다. 뭐라도 하나 문제가 있는 새끼들은 아예 아무것도 못하게 매장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마초 관리법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개인이 도덕적이지 못하니 매장해야 한다. 정확히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하니 당연히 매장해 버려야 한다.

 

대중이 권력을 가지게 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이제 대중에게로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사소한 문제라도 있으면, 아니 단지 그런 의심만 있어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여론이라는 칼날을 앞세워 아예 난도질하고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을 정의라 여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타블로였다. 단지 일부가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입증의 책임을 떠넘기고, 그 입증의 사소한 오류들을 빌미삼아 끝끝내 그 부모까지 죽음으로 내몰았었다. 그때 그 새끼들 가운데 제대로 반성한 새끼를 내가 거의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똑같은 새끼들이 이후 여러 이슈들에서 희생양을 만들었었다. 지들은 얼마나 올바르게 살아서 확실하지도 않은 정황들을 가지고 어느 개인을 단정짓고 낙인찍었으며 단죄하려고까지 했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존엄까지도 아닌 그 개인이 이 사회를 위해 이룬 기여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된다. 그보다 내가 위다. 내가 절대자다. 그러고보니 조선왕조시대에도 그랬었다. 명필로 이름높았던 안평대군의 글씨가 지금 남아있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수양대군과 경쟁하다가 도태되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역적은 글씨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명초의 거유라 일컬어지는 방효유가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대단한 평가를 들었는가 지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은 게 없다. 거의 그 정도로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난도질하는 것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들이 결국 나중에 기자까지 된다. 어떻게 되겠는가?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그동안 연기자로서 이 사회에 남긴 기여를 생각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기자새끼들이야 그럴 수 있다. 경찰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혐의가 있다 생각했으니 수사를 했고, 기사거리가 된다 여겼으니 취재를 했다. 그렇더라도 대중의 조롱거리로 난도질하도록 내던지지는 말았어야 했다. 한 인격을, 그리고 그가 그동안 이루고 이 사회에 남겨놓은 성과와 업적들을 배제하고 부정해서는 안되었다. 역시나 2찍 진보 새끼들은 그냥 2찍이라 부르는 이유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 코로나 방역 때문에 집회를 제한한다고 지랄하던 2찍 진보 새끼들의 인권은 어느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런 점에서 의혹이 불거졌어도 철저히 인권을 위해 보호받고 있는 특정인들이야 말로 저 새끼들의 진짜 정체성을 보여준다 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야 어차피 인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새끼들이니 취급도 않는다. 그런 결과인 것이다. 살아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혹이나 정황이 있기에 그 죽음마저 추모하지 못하겠다. 안타까워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욕하고 침뱉는 것이 당연하다. 그건 고결함조차 아니다. 도덕적인 순결함이란 최소한 타인의 죽음이나 불행에 대해 최대한 냉정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순간에조차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확인하려 든다. 권력을 확인하려 든다. 그것을 과연 도덕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도덕적이지 못한 자들의 도덕성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욕망을 가지고 충동에 휩슬린다. 더 엄격하게 자제하고 절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인 이상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불완전함 가운데 진정으로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항목들을 정의해 둔다. 그마저도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들이지 개인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들이 아니다. 인간이란 당연하게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이고 따라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므로. 타인에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공동체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따라서 개인이 개인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에 대해 일방적으로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월권이다. 딱 그 만큼만.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말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이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므로. 그러는 자신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완벽한가. 도적적으로 순결한가.

 

그런 대중을 바라고 언론이 내던진 것이었다. 그러라고 수사당국도 언론에 흘린 것이었다. 경찰만의 책임이라기에는 그런 경찰을 제어하라고 경찰국을 법무부 안에 바로 현정부에서 만들어 놓았었다. 아직도 대부분 수사지휘권은 검찰에 있는데 검찰이 장악한 법무부로부터 경찰 자체가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 구도인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방식이다. 수사도중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언론에 흘려 여론을 만든다. 개인을 망신주고 모욕주어 흔들리도록 압박한다. 그러다 죽으면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그로 인해 재판부까지 판결에 영향을 받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것을 오히려 편승하려드는 언론에 더해 그러라고 더 부추기는 대중이 역시나 또 한 번 이런 비극을 불러 온 것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검찰과 경찰의 수사 도중 죽어나갔음에도 오히려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던 사회의 분위기가 또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고나면 또 다시 입바른 소리 하며 아닌 척 하는 자칭 진보새끼들도 있을 것이다. 다 똑같은 새끼들이다.

 

대중예술인을 예로 삼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유명한 학자일 수 있고, 대단히 뛰어난 경영자거나 군인일 수도 있다. 하나만 잘못해도 모든 것을 부정당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래서 암담함을 더한다. 어쩌면 그래서 민주주으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이루는 주체로서의 국민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 자유가 아니라 강제되는 자유다. 민주를 넘어선 자유다.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넘어선 자유일 것이다. 그런 새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다. 그래서 지금 정부도 출범할 수 있었을 테지만. 네가 잘못했으니 나는 이제부터 뭘 해도 자유다. 쓰레기는 쓰레기다. 버러지는 버러지다. 죽은 이들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인간이 슬프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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