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지금 직장을 고른 것은 순전히 우연이고 충동이었었다. 이력서 쓰는 것도 면접 보는 것도 다 귀찮아서 그냥 몸쓰는 일이나 하려 했었다. 노가다는 출퇴근이 너무 길고 번거로워 - 그렇다고 숙식제공은 집에 보살펴야 하는 부양가족이 하나 있는 탓에 도저히 아니라서 결국 대상은 물류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군포 cj에 지원하여 출근하기로 한 당일 조금 더 조건이 좋은 것 같은 곳이 우연히 눈에 띄여 이력서를 넣고 계약직까지 되었다. 2개월짜리 시한부 인생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되는 동안 버티다가 안되면 다른 곳 찾아가도 괜찮지 않겠는가.

 

2018년 이래 정규직 신규채용이 없었다 했었다. 그래서 정규직 채용도 더이상 없는데 뭣하러 기간제 들어와 고생하느냐는 말까지 들었었다. 늦기 전에 더 좋은 일자리 찾아 떠나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조건도 나쁘지 않고 일도 감당할만해서 버티고 있는데 노조가 생난리를 편 결과라며 느닷없이 정규직 채용 공고가 떴었다. 정확히는 무기계약직이다. 물론 무기계약직도 정년 동안 고용이 보장되기에 정규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정부가 추진중인 정규직화의 대부분은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운좋게도 나이와 근속기간에서 무기직 전환 대상에 딱 포함될 수 있었다. 나보다 늦게 계약직이 된 사람들은 서류심사조차 거의 통과하지 못했었다. 당연하게 면접 결과 무기직 채용 결정.

 

몇 년 만이냐? 그동안 계약직을 전전해 온 세월이 20년을 넘어간다. 매번 과연 내년에도 지금 직장에서 같은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던 세월이 그 정도란 것이다. 그런데 정규직 되어 보겠다 그리 아등바등할 때는 냉정하게 잘리더니 그냥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하고 안되면 다른 길 찾아보겠다 하니까 운좋게 딱 걸리게 기회가 찾아온다. 복권 사는 것도 중단했다. 내일을 알 수 없어 사는 것이 복권인데 60세 정년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생겼으니 복권은 의미가 없다. 나는 나 자신만 믿고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물론 자칭 진보 새끼들 정규직이라고 내가 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떻게 표정이 바뀔 지 안봐도 눈에 선하다. 내가 자칭 진보가 주장하는 선의나 진정성에 대해 전혀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아주 오래전 그래도 자칭 진보 새끼들이라고 마음놓고 하는 일 밝혔다가 그 사실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기억이 선명하다. 저들이 노동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인 것이다. 여성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류호정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정의당의 입장처럼 저들에게 노동자란 동등한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냥 대상일 뿐이지. 나 자신은 그다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도 가끔 여기저기서 이름이 보이는 자칭 진보새끼들의 태도가 더 모멸감을 주었다. 나는 과연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인가.

 

아무튼 세상 일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될 일은 어떻게 해도 되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  안정적인 일자리 갖고 싶다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별로 생각 없다 해서 안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안 될 것이라 생각했고 계약기간 끝나면 어디서 일할까 구인사이트 뒤지고 있었다. 앞으로 구인사이트는 더이상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은 일이다. 지금 정부를 더욱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지금 일을 더 오래 아무일없이 하려면 정규직 채용을 더 늘려야 하기에. 이낙연이든 이재명이든 상관없다. 민주당이 희망이다. 더욱 절실해진 이유다.

이경규가 어느 방송에서 말한 바 있다.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더 위험하다. 아주 오래전 연예인에 대해 별 꼬투리를 잡아서 비난하는데만 열심인 이른바 네티즌들을 가리켜 나 역시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비루한 무지와 나태가 타인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게 만든다. 

 

여기서도 썼을 것이다. 여기 아니어도 어디선가는 썼었다. 누군가를 칭찬하고 지지한다는 것은 그와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까지 같이 지겠다는 의미다. 어째서 칭찬했는가? 잘했으니까. 왜 지지하는가? 옳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왜 잘했고 무엇이 옳아서 그를 칭찬하고 지지한 것인가? 그러려면 알아야겠지. 공부해야 한다. 취재도 해야 한다. 그러고서도 혹시라도 생각못한 부분들로 인해 곤란해질 지 모른다. 그에 비해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얼마나 편한가? 설사 내가 비난한 내용이 사실과 전혀 다르더라도,

 

"그런 빌미를 준 당사자가 잘못한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타진요 때도 타블로를 비난하던 놈들이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다. 그럴 빌미를 주었기에 자신들은 정당하게 비판을 한 것이다. 하지만 한 편에서 이미 초기에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타진요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을 알았던 나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판단의 여지가 있다면 오히려 신중하게 사실에 대해 더 정확히 알아보고 당사자의 해명까지 들어서 시간과 수고를 들이더라도 정확하게 사실을 알고 판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귀찮으니까. 그런 노력을 하기는 귀찮고 당장 자신의 정의감을 드러내고 싶으니까. 바로 인정부터 받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는가.

 

정부가 잘한다. 그래서 칭찬한다. 바로 비판이 들어온다.

 

"너 어용이냐?"

"너네 친정부냐?"

 

그걸 못 견딘다. 차라리 가짜뉴스로 비난하면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사실을 제대로 취재해서 보도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폼도 난다. 제대로 취재도 않고 사실확인도 않은 채 그저 살아있는 권력과 맞선다는 자신에 취해서 아무 기사나 막 써댄다. 그래서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기자세계에서 영웅이 될 수 있다.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 자기가 이렇게 무엄한 행동까지 해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경우없고 무례한,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모욕한 행위일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 없다. 살아있는 권력과 맞섰으므로 자신은 정당하다.

 

정의당에 진보가 없다는 이유다. 한겨레에도 경향에도 진보란 없다. 홍세화에게도 강준만에게도 진보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가 사실이면 최소한 박노자처럼 현정부가 들어서 조금이라도 나아진 부분들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박노자도 현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당연히 박노자는 극좌 중에서도 극좌에 속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진중권보다도 홍세화보다도 강준만보다도 심상정보다도 더 왼쪽에 있는 인물이 박노자다. 그런데 어용소리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비판할 부분들을 비판한다. 그것이 지식인이다. 누가 뭐란다고 그것을 두려워서 말조차 가릴 것이면 그건 협잡꾼이지 지식인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의당이나 한겨레나 자칭 진보 가운데 누구도 현정부 들어서 이루어진 여러가지들에 대해 제대로 인정하는 경우가 없었다. 다 못했다. 다 잘못했다. 망해야 한다. 죽어야 한다. 아니 죽여야 한다. 왜? 어용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니까.

 

감히 국민의힘으로부터 민주당 2중대라는 소리를 듣기가 그리 두려운 것이다. 조중동으로부터 친정부 언론이라는 말을 듣기가 그리 굴욕적인 것이다. 그래서 더 앞장서서 꼬투리를 잡아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데만 열을 올린다. 혹시라도 잘한 것이 보여도 그 가운데 못한 것을 찾아서 억지로 키워 떠드는데만 열심이다. 현정부와 민주당이 이루어낸 성과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진보이념에 부합하든 다른 부분을 찾아내서 비판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들에게 진보란 국민의힘으로부터 조중동으로부터 인정받는 진보다. 조중동이 부정하면 진보조차 아니게 된다. 국민의힘이 인정하지 않으면 진보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런 무의식이 장혜영의 민주당을 진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표출된다. 누가 누구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진보와 보수가 결정되는가? 

 

자아가 비루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비루한데 자존은 높다. 욕먹기도 싫고 비판듣기도 싫고 그래서 혹시라도 논쟁이 붙어 지기라도 하면 견딜 수 없는데, 그럼에도 인정은 받고 싶다. 대접은 받고 싶다. 그래서 그토록 기레기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남은 그렇게 쉽게 편하게 비난하면서 자신들을 향한 비난에는 그토록 견디지 못해 하는 것이다. 기레기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런 굴욕과 수모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면 기사같은 건 쓸 수 없는 것이다. 기자가 아닌 것들이 쓰는 기사란 그냥 글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주류라 생각한다. 자칭 진보들의 내면이다. 그런데 제대로 주류사회에서 주류로 인정받지 못한다.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일하게 노회찬 정도가 그런 판단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주류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수구언론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수구정당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민주당의 인정따위 필요없다. 민주당이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들이다. 원래 자기들의 신분으로 보면 진짜도 아닌 가짜진보 민주당은 마주할 가치도 없는 비천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이면에 그럼에도 어느새 주류로 올라선 민주당을 인정할 수 없다는 졸렬함이 자리하고 있다.

 

김학의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김학의의 인권조차도 소중히 여겨야 수구로부터 진보로 인정받을 수 있다. 김학의의 범죄와 상관없이 그의 도피를 막는 과정에서의 절차상의 문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진보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박원순은 비난해도 김병욱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피해자라는 여성의 주장을 앞세워 당사자도 아닌 민주당 국회의원의 사퇴는 주장해도 감히 주호영의 성추행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노후원전의 위험성보다 그 과정에서의 잘못들을 문제삼아 대통령과 청와대를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 필사적인 것이다. 

 

악의가 있어서도 있겠지만 그 정도 수준도 못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란 뜻이다. 그나마 악의라도 있으면 목적과 동기가 읽히는데 악의조차 없으면 그냥 부화뇌동하는 경박함만이 보인다. 신념도 양심도 정의도 자존도 정체성도 없다. 더 나쁘다. 내가 자칭 진보들을 벌레취급하는 이유다. 존엄이 없는 인간은 벌레와 같다. 그냥 비천한 것들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노동자는 단지 생산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란 생산에서 자본을 분리해내는 것이다. 자본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과 그 생산에 투자되는 자본을 분리함으로써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이를테면 동네빵집과 대형프랜차이즈 빵집과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아닌 경우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 소자본 빵집의 경우 가게 사장이 곧 제빵사고, 가게 사장이 만드는 빵의 품질에 의해 가게의 매출이 결정된다. 생산과 자본의 이익이 일치된 상태인 것이다. 분식점주인이 만드는 떡볶이가 맛있어서 멀리서까지 사람이 찾아오고, 국숫집 주인이 만드는 국수가 맛이 없어서 며칠 안 가 문을 닫는다. 그에 비하면 대형 프랜차이즈는 빵 만드는 사람 따로, 빵을 파는 사람 따로,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다. 어떤 빵을 만들 것인가조차 제빵사가 아닌 경영자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경영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을 투자한 자본가들이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제품의 품질을 떨어뜨리고 인력을 감축하는 결정도 아무렇지 않게 내릴 수 있다. 반드시 빵이 많이 잘 팔려야지만 자본이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생산과정에서의 소외가 일어나는 이유다. 한 마디로 보람이 없다. 빵을 만들면서도 과연 이게 내가 만드는 빵인지, 내가 만든 빵이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과연 내가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주어진 레시피대로 그저 기계처럼 반복해서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전체 생산과정 가운데 단지 제빵사로서 자신의 실력이 필요한 일부에만 관여할 수 있을 뿐이다.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그같은 경향은 더욱 심해진다. 자동차에 쓰이는 중요한 부품이지만 캠이나 크랭크를 제작하는 하청기업 종업원은 생산된 차를 직접 볼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왜 만들고 어디에 쓰이는지조차 모르는 채 전체도 아닌 일부 공정만을 반복할 뿐인 노동자에게 과연 얼마나 대단하게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기회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런 노동자는 무엇에서 자신의 노동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많은 사용자들이 가족이 있는 기혼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족이 있으면 가족의 생계 때문에라도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 보람 없이도,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음에도, 그러나 자기가 일을 해서 월급을 받는 만큼 가족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노동자로 하여금 더욱 열심히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며 버틸 수 있도록 해준다. 일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는 만큼 일의 결과로써 자신의 보람을 찾으려 한다. 밖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봉투들이 바로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없거나,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부양할 가족을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당장 청년실업률만 보더라도 일자리가 없다는데 사람이 없어서 문을 닫을 지경인 회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어째서 고용률이 30대만 되면 바로 치솟는가에 대해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을 것이다. 20대까지는 여기저기 고르며 버티다가 30대 되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조건을 낮춰서 아무데고 취업하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 와중에도 도저히 그 돈 받고 그 일은 못하겠다며 거부하는 일자리가 상당한 것이다. 일본의 고용률이 우리보다 높게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노동자라도 없으면 안되는 곳에서마저 일본인들은 일본인을 고용해 쓸 수 있다. 그러면 왜 청년들은 그런 일자리를 회피하는 것일까? 일도 보람이 없는데 일해봐야 기대할 것도 없다. 지금 최저임금 수준으로도 보람도 없는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일을 청년들이 왜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해야만 하는가?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게 된다. 어느새 남은 것이 그런 일자리들 뿐이니까. 거의 대부분 일자리가 최정임금이나 겨우 받는 정도다. 그조차도 고용이 보장되지 않아 몇 년 뒤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 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기껏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는데 계약이 끝나 실업자 신세가 되어 보라. 돈을 모을수조차 없는데 일자리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급여와 상관없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젊은이들의 경우 결혼률이나 출산률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고 부양할 가족도 없다면 의미없는 일에서 어떤 보람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하긴 가족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고생한 결과 가족이 행복해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이 고생한 결과에 스스로 보람과 의미를 찾는 것도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해 왔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위한 작은 사치에 대해 방송했을 때 다른 네티즌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에게 상을 준다. 그동안 노력하며 고생한 자신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을 해 준다. 그것이 파인다이닝일수도 있고, 클래식공연일 수도 있으며, 해외여행일수도 있다. 그 순간 행복해하는 자신을 위해 자신은 그만큼 더 노력하며 버틸 수 있다.

 

요즘 부쩍 지출이 는 이유다. 일이 힘든 때문이다. 일도 일이지만 그다지 보람 같은 걸 느끼기 힘들다는 게 더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냥 열심히 하는데 그것 뿐이다. 그래서 받는 돈은 나 혼자 살기에는 너무 많은 액수다. 내가 혼자 살면서 이런저런 고정지출 포함해서 한 달에 지출하는 액수가 고작 얼마간이다. 그런데 거의 그 두 배 가까운 돈을 받는다. 아 씨발 그냥 딱 저 절반만 받고 더 쉽고 더 편하고 더 의미있는 일을 찾아볼까? 일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래서 돈을 쓴다. 돈을 버는 만큼 나 자신을 위한 보상에도 아끼지 않는다.

 

물론 한계가 있다. 일단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겨우 주말이나 되어야, 그것도 낮에는 자야 하니 밤에만 겨우 시간이 난다. 그래서 미뤄두었던 게임도 질러 보고, 술도 조금 더 비싼 놈으로 마셔 보고, 그에 맞게 안주도 그럴싸한 것으로 준비해서 먹는다. 사실 가장 큰 게 술이다. 알콜중독이라기에는 주중에는 진짜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냉장고에 술병들이 가득한데도 그냥 외면하고 술없이 일주일을 버틴다. 술에는 안주가 따라와야 한다. 그리고 안주는 비용이나 공이 많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주중에는 시간이 없어 그것이 힘들다. 그리고 그렇게 수고와 비용이 들어간 안주를 제법 괜찮은 술과 함께 즐기며 주말의 한가함을 즐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일주일동안 개고생하는 것 아닌가.

 

문득 벌써 10년도 더 전에 거북이가 재해석한 '사계'에 대해 크게 반감을 드러내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일을 하는 의미도 보람도 사라진 시대에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한 무산자 노동자들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면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가. 그런 자신을 위해 비장함도 엄숙함도 숭고함도 아닌 하잘것없고 대수롭지 않은 그저 자신만을 위한 순간들이 필요치 않을까.

 

맥주 한 잔에, 매운 치킨 한 마리에, 그리고 어느새 보채다 잠든 고양이를 보면서 드라마도 볼 것 없어 끄적이는 중이란 것이다. 원래 계획이 있었는데 힘든 일일수록 피하고 싶은 것이 나란 인간이라. 일주일의 고단함을 주말의 하잘것없음으로 이완시키며 풀어본다. 내일도 마실 거다. 더 맛있는 안주와. 내가 살아가는 이유처럼.

내가 여성주의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메갈과 워마드였었다. 당시 이들 사이트를 현정부와 연관지으려던 어떤 세력들의 의도와 달리 이들의 정치적 성향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여성이기에 박근혜는 부당하게 탄핵당했고 남성인 문재인 대통령은 타도되어야 한다. 말이 타도지 실제 표현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민망한 것들이 대다수였었다. 그리고 그런 메갈과 워마드를 정의당과 한겨레, 시사인 등 자칭 진보진영이 감싸고 있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2012년 당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에 표를 주었던 자칭 진보주의자를 몇 알고 있다. 진보주의자이면서 여성주의자였는데, 박정희의 딸이라는 정체성은 배제한 채 오로지 생물학적인 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표를 주는 것을 진보적인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던 당시에도 여성이라서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펴던 이들도 있었다. 여성이기에 단지 박근혜의 지인이던 최순실의 정치관여를 더 크게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실제 지금에 와서는 최순실이 비선실세로 국정농단을 저지르기는 했어도 현정부보다 잘했다는 주장을 당당히 펴는 놈들을 어렵잖게 찾아보게 된다. 대표적으로 진중권, 서민. 아마 정의당에서도 비슷한 대답을 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여성주의자들이 다시금 자칭 보수를 중심으로 뭉치기에는 박근혜로 인한 내상이 상당했다는 것이었다. 박근혜를 지우고 다시 여성주의자들이 주도할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안희정과 관련해서 김재련 변호사와 피해자 김지은씨의 관계에 대한 의혹을 마냥 억측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박원순 시장도 당했었으니까. 그리고 안희정과 박원순을 발판삼아 이수정 등 여성주의자들과 자칭 진보정당 정의당, 그리고 좌우 할 것 없이 언론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KBS에서 자체개혁을 위한 노력이 사라진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KBS 9시 뉴스에서 자살도 2차가해라는 말이 나오면서 KBS의 개혁은 멈추고 과거로 회귀하게 되었다. 미투란 바로 그를 위한 여성주의자들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미투를 통해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가해자로 만들고 자신들이 다시 보수세력과 손잡고 정치세력화하는 것을, 나아가 자신들에게 크게 내상을 입혔던 박근혜의 복권까지 시도하려 한다.

 

실제 보라. 대구에서 국민의힘 소속 구의원이 여기자와 동료 여성의원들을 대상으로 아예 노골적으로 성희롱과 성차별 발언을 한 부분에 대해 과연 이들 여성주의자들이 강하게 입장을 드러낸 적이 있었는가. 정치인도 아닌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기자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한 것 가지고는 기자협회 차원에서 나서서 사과를 요구했었는데 여성기자를 면전에 두고 한 발언에 대해 어느 기자가 한 마디 크게 목소리 높여 비판이나 했었는가. 이번 김웅이 필리버스터에서 성범죄는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도, 심지어 박원순 시장을 계기로 여성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국민의힘으로 향했던 이수정이 조두순의 행동을 가리켜 담대하다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 과연 자칭 여성주의자, 자칭 진보가 무어라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심지어 여성 접대부까지 부른 김봉현의 검사 접대에 대해서도 저들은 침묵하고 있는 중이다. 당연하다. 박원순 논란 당시 저들은 서지현이 과연 진짜 성추행 피해자인가 의심하는 발언까지 한 바 있었다. 자기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피해자다움에 대한 의심을 공공연히 드러냈었다. 진혜원 검사 등에 대해서는 검찰 수뇌부를 움직여서 징계까지 시도했었다. 바로 서지현 사건을 묻고 김학의 사건을 묻었던 그 검찰 수뇌부와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호영이 김학의 사건을 들먹이며 법무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제기한 부분에 대한 저들의 평가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지만 한국 여성주의의 뿌리는 친일과 친독재였었다. 김활란, 박마리아가 한국 여성주의의 뿌리였고, 이후 YWCA등 많은 여성단체들이 정권에 기생하며 사회를 억압하는데 앞장 선 바 있었다. 민주화운동이 진보운동으로 발전하면서 덩달아 수혜를 입은 것은 이들 여성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째서 정의당 안에서 대표적인 강성 여성주의자였던 장혜원이 공수처법안에 대해 당론까지 어겨가며 기권하고 당대표는 그를 용인하고 있었는가. 민주당 2중대는 싫어도 국민의힘 선봉대는 즐겁다. 국민의힘이 노동존중 정당이고 조선일보가 여성존중 언론이다.

 

진짜 어이가 없는 것이다. 탁현민이 수 십 년 전 개인의 성적 판타지를 끄적이듯 쓴 에세이에는 그리 분노하면서 국회의원이 자기 이름을 걸고 그것도 필리버스터에서 한 발언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그게 바로 여성주의자들이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인 것이다. 민주당에는 적용되지만 국민의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마치 조국 딸이 받은 장학금은 뇌물이지만 검사들이 받은 접대는 그냥 정도를 지나치지 않은 정도의 말 그대로 접대라는 검사의 발표와 닮아 있다. 그 발표를 과연 언론 누가 비판하고 있을까?

 

더이상 여성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이 바라는 지지의 대상은 그래도 국회의원 이상의 권력자이지, 그것도 보수권력자지 나같은 최저임금이나 받는 하빠리 남성은 아니란 것이다. 아마 여기도 찾아보면 그런 주장을 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이해나 지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남성인 검찰 수뇌부를 움직여서 같은 여성인 현직 검사들을 징계하려 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적이다. 최소한 민주당 지지자인 내 입장에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아직 내가 서울 살던 6년 전 한 달 월세가 수입의 4분의 1에 가까웠었다. 다시 말하지만 어지간히 대기업 아니면 노동자가 최저임금 이상 받기란 쉽지 않다. 기껏해야 오래 다녔다고 근속수당 겸 해서 얼마간 올려주는 정도가 고작이다. 지금이라고 과연 얼마나 다르겠는가? 나라 망할 지경이라는 지금 최저임금 기준으로 주간에 주 40시간 일하고 주휴수당까지 받으면 180 조금 넘는 정도 받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예전 살던 동네 기준으로 전용 13평이면 월세가 기본으로 50만원 이상에서 시작될 것이다. 보증금은 당시보다 더 비싸다. 과연 살 수 있겠는가.

 

주 40시간 주간근무에 주휴수당 받으면 180만 원 남짓이다. 주 52시간까지 일하고 주휴수당 받으면 한 220까지 받는 모양이다. 맞벌이로 풀타임 근무면 그래도 한 달에 400 정도 수입이 들어오니 굳이 임대주택까지는 필요치 않을지 모른다. 결국은 그마저도 안되는 사람들이 대상이란 것이다. 정부에서 30평, 40평 짜리 임대주택 지을 줄 몰라서 짓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주거복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라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적자여야 하고 따라서 일정 수준의 임대료는 필수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중견기업에 다니고 직업도 안정적인 이들조차 막상 20평대 임대주택에 살다가 넓혀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반 월세보다 훨씬 조건도 좋고 비용도 저렴한 공공임대조차 그런데 일반 임대라면 어떠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13평 월 20만원짜리 아파트란 어떤 의미이겠는가.

 

물론 마음 같아서야 나도 300평짜리 대저택에서 가정부 집사 두고 고양이 마당에서 산책시키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아니 300평도 좁은 것 같다. 한 1300평 쯤 되는 집에서 말도 한 마리 기르며 텃밭을 가꿔보면 어떻겠는가. 사람이 욕심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사는 집도 월세 한 20만 원 더 주면 더 넓고 더 조건도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월세 25만원이면 월세 40만원에 비해 한 달에 15만원을 더 아낄 수 있고 그만큼 더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타협의 결과다. 외벌이라면 한 달에 200만 원 월급 받기도 어려울 것이고, 맞벌이라도 아이낳고 기르고 하다 보면 풀타임은 어려울 테니 수입이 그리 넉넉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런 처지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하려면 자기 수입만으로는 버거운 지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그런 조건에 있는 이들이 내 주위에만 적지 않다. 그냥 내 이웃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내는 월세보다 더 적은 돈으로 더 넓고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한 달에 월세 20만원만 아껴도 4년이면 거의 천만 원 돈에, 더 열심히 벌고 아끼다 보면 잘하면 아쉽더라도 전세금도 마련할 수 있을 지 모른다.

 

그러니까 많은 언론들, 그리고 정치인이란 것들이 쉽게 간과하는 부분인 것이다. 최저임금 8590원으로 올렸다고 아예 나라가 망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 8590원 시급으로 법정 근로시간을 아득히 초과해서 죽어라 일해봐야 서울에서 월세 내고 나면 한 달 겨우 살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평수 조금 작고 월세는 훨씬 더 아낄 수 있는 임대주택을 지어서 공급하려는 것이다. 임대주택이나마 더 적은 돈을 지불하며 살면서 나중에 돈 모아서 더 나은 집으로 넓혀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상식이다. 최소한 서민의 삶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내 상식에 비추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오히려 너무 좋은 조건인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최저임금 이하만을 받고 있고, 그나마 최저임금이 통상임금인 노동자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13평짜리 월세 20만원 임대주택이 그렇게까지 모멸적으로 받아들여질 이유란 없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야 당연히 자기 돈으로 더 좋은 집 얻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돈 많아도 아직 신혼이기에 돈을 더 모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라돈으로 임대주택까지 지어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하나까지는, 그래도 아직 어리면 둘까지도, 그렇게 최대한 모으고 모아서 제법 목돈이 되면 전세를 얻어 나가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 전세까지는 무리더라도 보증금 더 주고 더 넓은 집에서 더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전세금을 지원받을 형편도 안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은데 주거가 걱정이 되는 이들을 위한 정책에 왜 이리 말들이 많은가. 아이 둘에 24평 27평이 적절하다 여기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이 아닌 그럼에도 13평 짜리 아파트라도 싸게 살 수 있으면 바라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임대주택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한국 사람들 평균 수입이 신혼부부가 아이 둘 낳을 때 쯤엔 20평 짜리 아파트는 그냥 구해서 들어가 살 정도는 되는 줄 알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아이 낳고도 여전히 풀타임 근무에 부부가 맞벌이를 유지하는 경우란 오히려 매우 드문 것이다. 혼자서 벌거나, 맞벌이를 해도 한 쪽 수입이 부업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크게 치우쳐 있다. 그래서 서민인 것이다. 아니 맞벌이로 풀타임을 해도 더 싼 값에 최대한 오래 돈을 모으면 더 좋은 조건의 집에서 자란 아이들과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된다. 왜?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오래전 어느 미국 시트콤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할렘가에서 자란 흑인 소년들이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자라온 환경에 따른 갈등이 불거지며 그를 해소하기 위한 에피소드였었다. 깡통 열 개와 전선 한 다발로 뭘 만들 수 있겠는가? 돈을 만들 수 있다. 방 두 개에 목욕탕 하나짜리 집에서 몇 명이 살 수 있는가. 21명까지도 함께 살 수 있다. 정확한 내용은 아니다. 비슷한 맥락일 뿐. 벌써 40년도 더 된 시트콤일 테니. 그래서 13평 짜리 아파트에서는 몇 사람의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가. 언론과 정치권의 평균과 현실의 일상이 그만큼 다른 까닭이다. 

그동안 보면 김경수 지사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정부를 향한 검찰의 수사란 이명박근혜 정부의 과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국은 우병우, 정경심은 최순실, 울산시장선거는 박근혜의 선거개입, 그러면 이번에 감사원과 함께 진행 중인 월성원전 조기폐쇄에 대한 수사는 어떨까? 민주당이 강력 반발하니 내세운 논리가 4대강이다. 4대강도 정부정책이었는데 수사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원전 조기폐쇄도 마찬가지다. 그걸 한겨레가 물었다.

 

명백한 불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불법의 정황이 드러나서도 아니다. 불법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불법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민간기관이나 개인을 그런 식으로 수사하면 사찰이 된다. 전횡이 되고 권한남용이 된다. 그 자체로 불법이다. 그런데 한겨레는 그런 검찰의 주장을 받아서 검찰의 수사를 정당화하는 기사를 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노후화된 원전을, 그것도 안전상의 문제로 몇 번이나 가동중단되었던 원전을, 조기폐쇄하지 말고 끝까지 운영하고 있었어야 한다는 것일까. 더 웃기는 건 불과 얼마전까지 탈원전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해 온 언론이 한겨레였다는 것이다. 탈원전은 지지하지만 현정부의 탈원전은 불법이 있을 수 있으므로 반대한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시민단체가 있다. 지식인그룹이 있다. 그 가운데 저번 감사원의 원전 조기폐쇄 감사 과정에서 심각한 강압과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었다. 그쪽과도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쪽에서 더이상 한겨레를 신뢰하지 않고 기사거리를 주지 않고 있거나, 현정부에 유리할 것 같으니 한겨레가 아예 귀닫고 듣지 않고 있거나. 결론은? 한겨레는 현정부에 불리한 주장만 평소 주장이나 신념과 상관없이 듣겠다. 탈원전은 주장하지만 현정부는 반대한다.

 

아침부터 기분도 그래서 무슨 욕을 할까 유튜브 채널 가봤더니 가관도 아니다. 하긴 이제 한겨레에 기대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종이신문으로 돌아가는 길을 불사른 이유가 있었다. 작년 조국사태 당시 너무 노골적으로 속내를 내비치고 있었다. 대놓고 조국을 죽이겠다는 기사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경우를 떠올리게 만들고 있었다. 저 새끼들 아직도 저러고 있나? 어차피 화해는 불가능하다. 검찰총장도 아닌데 저놈들이 무릎꿇을 놈들도 아니고. 개새끼들이다.

사모펀드 건은 조범동과 공범으로 기소되었다가 다른 재판에서 무죄로 판결났기 때문에 아예 정경심 재판에서는 심리조차 진행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재판관련 기사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죄다 표창장 위조 관련인데, 아무리 표창장 위조로 유죄판결을 받는다고 형량이 구속기간보다 더 나오기란 힘들다. 더 나오면 그 순간 사법부 적폐인증이다. 더구나 윤석열 장모가 사문서위조와 행사로 엮여 있기 때문에 더욱 연관되어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문제는 그렇다고 형량을 낮게 줄 경우 그동안 검찰이 수사한다고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것에 대한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추미애 장관이 조국 전장관 일가족에 대한 검찰의 과잉수사를 묻고자 하는 의지를 밝힌 이유다. 고작해야 표창장 위조다. 실제 위조되었다고 해봐야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를 지방 3류대의 봉사표창장이란 것이다. 오죽하면 지원자도 없어서 교직원들에게 원서를 쓰게 해서까지 겨우 신입생 수를 기준에 맞추고 있었겠는가. 총장이라는 사람이 학력까지 사칭하던 대학의 표창장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것 위조한 것 밝히겠다며 그토록 온 나라를 들쑤셔 놓은 것인가. 언론은 고작 표창장 위조 하나 파헤치려 그 난리를 피운 것인가. 

 

이래서 사법시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사법고시 합격할 때까지 죽어라 골방에서 법전만 파다가, 사법고시 합격하고 나면 각각 법원과 검찰이라는 좁은 세상에 갇혀 거기가 전부라 여기며 살아간다. 조금만 머리가 있어도 지금 표창장 가지고 유무죄를 다투는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온 나라를 뒤집어 엎고 재판만 1년 가까이 끌어서 나온 결론이라는 게 표창장 위조가 사실이라는 것인가. 고작 표창장 따위가 그렇게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었다는 것인가. 다른 의도가 없었다면 그런 정도 범죄로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수사와 기소를 이어가지도 않는다.

 

당장 주위에 물어보라. 정치적으로 아예 입장이 정해진 경우를 제외하면 고작 표창장 하나 때문에 온 나라가 그렇게 시끄럽고 재판만 1년 가까이 끌어 온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조국 전장관이나 그를 임명한 대통령을 비판한다면 그렇게 온 나라를 오랜동안 시끄럽게 만든 자체를 문제삼고 있을 것이다. 비례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표창장을 위조했다 치고 그게 그렇게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중대한 사안인가. 설사 유죄판결이 나왔더라도 고작 그런 정도 사안으로 수사든 기소든 구속이든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니까 정부와 여당 내부에서도 전과 달리 조국 전장관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조범동 재판에서 사모펀드 건이 모두 무죄로 판결난 이상 끝난 사안인 것이다. 표창장 위조와 관련해서 유무죄 여부는 정경심 개인이나 가족들에게나 의미가 있지 나같은 제 3자에게는 전혀 아무 상관 없는 그저 남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을 잘 해야 할 텐데. 오히려 섣부르게 유죄판결을 내릴 경우 괜히 후폭풍만 커질 수 있다. 면피로 삼기에도 검찰 스스로가 너무나 크게 일을 벌인 탓에 자위용으로나 겨우 쓰일 뿐이다. 대신 이재용 재판까지 맡아야 하는데 자칫 40% 넘는 지지율의 살아있는 권력과 174석의 거대여당과 사법부 전체가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차라리 사실에 근거하여 법대로만 판결을 내린다면 검찰은 조금 더 곤란해지겠지만 사법부는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공부만 잘하는 머리 좋은 바보들이 사법부나 검찰이나 너무 많다는 사실인데. 머리 좋다고 다 똑똑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아무튼 오히려 이번 정경심 교수의 재판결과에 더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사법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경심 교수 자신이나 가족, 혹은 주변인들이 아닌 이상 재판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 자신이게 되는 것이다. 검찰은 끝났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봉사표창장이란 검찰이 그동안 해 온 수사와 재판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한 것이다. 그런 검찰을 위해서 과연 사법부 전체를 끌고 들어갈 수 있는 판결을 내리고 말 것인가. 사소한 일에 너무 큰 것을 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 것인가. 김명수가 언제까지고 사법부를 지켜 줄 수는 없다.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역시 내 일이 아니라 그렇다. 정경심 교수가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지 내가 유죄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다. 조국 전장관 아내이지 내 가족인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모든 언론이 하나가 되어 생난리를 쳤어도 전혀 흔들림없이 정부를 지지하던 국민이 무려 40%를 넘어가고 있었다는 사실만 명심하면 된다. 그들의 앞에 양승태가 아닌 사법부 전체가 청산해야 할 적폐로써 그 정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조국 전장관이나 가족들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되는 셈일 테지만 역사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연 머리 좋은 바보일 것인가? 흥미롭다.

그냥 유재일 떠올리면 된다. 한때 민주진보를 자처하다가 작년 조국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보수로 전향한 자칭 정치평론가다. 개인적으로 정치평론가라 하면 사짜 비슷하에 여기는 편이라 그다지 의미를 두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무튼 당장 유튜브만 보더라도 보수가 숫적으로도 압도하고 돈도 더 많이 벌리기에 그냥 편한 보수유튜버로 전향하기로 한다. 실제 아마 민주진보 평론가연 하던 시절보다 지금이 돈도 더 많이 잘 벌리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다음카카오 부사장으로 조선일보 출신이 가면서 대문에 오른 기사들의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네이버야 오래전에 이미 평정되었고, 다음이 그나마 버티고 있었는데 최순실의 마지막 똥으로 카카오가 저쪽에 넘어가면서 대문이 갈수록 네이버스러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그동안 해 놓은 짓거리가 있으므로 민주진영 독자들이 더이상 자신들의 신문을 사주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한겨레가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기를 노려봐야겠다. 어떻게 하면 포털 편집자들이 좋아할만한 제목과 기사를 뽑아 1면에 간택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봐야 한다.

 

사실 한겨레라는 언론사의 정체성을 보더라도 그쪽이 맞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과연 한겨레가 참여정부 이후 단 한 번이라도 진보언론이었던 적이 있었는가. 한겨레의 정체성은 오로지 반민주당 하나였었다. 민주당만 욕할 수 있으면 이명박도 박근혜도 찬양할 수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과 손잡고 노무현도 죽였었다. 한명숙도 감옥에 보내고 있었다. 그때 한겨레 기자가 외쳤었다지. 사필귀정이라고. 한겨레에게 절대악이란 그 정도로 민주당이었고 친노였고 친문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 것들은 그냥 나머지다. 그렇다면 어느때보다 민주당과 반민주로 정치권이 양분된 지금에 한겨레의 선택지는 무엇이 남았을 것인가. 정의당마저 반민주를 위해서 진보를 포기하고 고용유연화를 주장하기 시작한 지금 한겨레에게 남은 선택지란 무엇일 것인가.

 

실제 이번 정부 들어서 한겨레는 그동안의 주장을 부정하듯 최저임금인상에도 반대했고, 근로시간단축에도 반대했고, 탈원전 역시 반대한 바 있었다. 위안부문제에 있어서도 정의연이 아닌 박근혜식 위안부협정을 지지하는 스탠스를 취하기도 했었다. 모두 현정부가 추진한 정책들이라 그렇다. 최저임금은 인상되어야 하지만 현정부의 정책에 이런 문제가 있으므로 반대하고, 근로시간도 단축되어야 하는데 정부의 정책에 이런 단점들이 있기에 반대하고, 탈원전을 주장하지만 정부의 정책과정에 이런 오류가 있으므로 반대한다. 위안부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데 다른 언론이 비판하고 있으므로 정의연은 물러나야 한다. 그냥 다 반대다. 아마 현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킨다 하면 차별금지법도 반대하고 나서지 않을까.

 

그냥 반정부로 가겠다. 반민주로 가겠다. 돈 되는 쪽으로 쫓아서 가겠다. 한겨레가 삼성을 까는 이유는 하나다. 삼성을 까다 보면 적당히 까라고 삼성에서 얼마간 쥐어주기도 한다. 삼성 열심히 까던 기자를 특채해서 데려가기도 한다. 다 돈벌이라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당시에도 그런 식으로 정부로부터 얼마를 받아 쳐먹었을까? 최소한 현정부에서보다 한겨레가 더 살기 좋았던 시절이라는 한겨레 기자의 토로는 사실일 것으로 여겨진다.

 

한 마디로 그냥 하던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원래 하던 대로 하는데 더 노골적으로 하겠다. 최근 한겨레 유튜브 채널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윤석열 가족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다. 검찰의 문제는 최대한 회피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현정부와 여당의 책임으로 돌린다. 부정과 불법의 의혹으로 돌리려 노력한다. 윤석열 검찰이 그대로 유지되어야 청와대의 절대악을 파헤칠 수 있다. 역시 한겨레 기자가 직접 라디오에 나와 한 말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똥걸레는 똥걸레다.

보수정당이나 검찰, 혹은 기업들이 언론이나 기자들에 대해 고소고발을 일삼아도 조용한 이유는 그래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래왔기 때문이었다. 원래 평소 힘으로 언론과 기자들을 찍어누르던 존재이기에 새삼 채이고 밟히고 굴려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져 온 것이다.

 

그러면 민주당은 어째서 안되는 것인가? 역시 그래왔기 때문인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어지간해서는 언론이나 기자들에 대해 직접적인 대응을 삼가해 왔었다. 기껏해야 말 몇 마디 험하게 하는 정도였지 고소고발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말 몇 마디 한 것도 여론이 뭐라 하기라도 하면 바로 철회하고 사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니까 민주당은 언론이 뭐라 보도를 하든 반응않는 것이 정상이고 아무리 억울하고 화가 나도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이기에 참는 것이 상식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민주당은 언론과 기자를 상대로 고소고발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자칭 진보언론들조차 보수정당과 보수정권을 상대로 비판할 때는 표현 하나까지 세심하게 주의해 쓰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최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혹시라도 사실과 다른 것이 있으면 바로 무릎꿇고 사과한다. 아예 머리를 조아리고 바닥을 찧으며 용서를 구하는 경우마저 있다. 보수정당보다도 이 사회의 실세 중의 실세라는 검찰총장이라면 벌거벗고 누워서 배가르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 아니면 다치니까.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가는 크게 곤란해질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되는 상대에게는 그래도 되고 그래야 하는 상대에게는 그래야 한다. 언론의 속성이기 이전에 소인배들의 속성이다. 양심도 신념도 지조도 절개도 없는 놈들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지난 1월 아예 대놓고 선거법을 위반하는 칼럼을 임미리가 쓰고 경향이 게재한 것도 그런 연장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과연 보수정당을 향한 것이었으면 가능하기는 했을까. 이명박근혜 정부에서였다면 감히 엄두라도 낼 수 있었을까. 그러나 민주당이니까. 그래도 되는 정당일 테니까. 그래서 나경원이며 홍준표가 기자를 고소하고 아예 회견장에서 내쫓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민주당에서 기자 고소하고 혹은 비판적인 논평을 내니 온 언론이 들썩인다. 오히려 검언유착의 의혹을 묻기 위해 알릴레오 패널 하나의 성희롱성 발언을 크게 키우는 경우마저 생긴다. 유시민이 사과할 것을 알았으니까. 가세연이나 홍카콜라라면 사과할 일 같은 것 없다. 그러니까 조국 전장관의 고소고발에는 반발하면서 윤석열의 기자고발과 송치에는 침묵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대로 두고만 봐야 하는가.

 

조국 전장관이 따박따박 하나하나 언론에 대해 악의적 오보의 책임을 묻는 과정이 그래서 민주당과 지지자들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는 이유인 것이다. 민주당에 대해서도 언론이 자칫 선을 넘거나 하면 보수정당이 그랬던 것처럼 얼마든지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사실 명분도 좋았다. 너무 봐주기만 했더나 언론이 넘어서는 안되는 선까지 넘고 말았다. 가족을 걸고 넘어졌다. 공직자 개인에 대해서는 공인이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사인에 지나지 않는 공직자 가족들을 대상으로도 온간 악의적인 비방과 모욕과 조롱이 일상으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직자 개인에 대해서는 무어라 주장해도 용인하겠지만 가족에 대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 윤미향 의원의 경우도 남편이 나서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고 있는 것이다. 윤미향 의원 자신은 시민단체의 대표로서 공인이기도 하기에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냥 개인사업을 하는 남편의 경우는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추미애 장관도 그래서 아들이 나서서 언론을 상대로 고소를 진행하는 중이다. 김용민 의원은 한 발 더 나가 아예 진중권을 대상으로 모욕죄로 고발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결국 뭐냐면 빌미를 준 것은 어디까지나 언론이며, 공직자의 검증에 가족까지 끌어들인 보수정당이란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인지도 모르고 비판의식없이 받아쓴 것도 언론의 너무나 큰 잘못일 수 있다. 그러니까 민주당도 더 이상 참지는 않겠다. 그래서 그 첫발을 조국이 여전히 수많은 언론의 비난 속에 내딛고 있는 것이다. 더이상 또다른 조국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은 외쳤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온라인에서만 사람들이 열사가 되고 투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런다고 누군가에게 실제로 쳐맞을 위험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온라인에서 대단히 열정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일수록 그래서 자신을 향한 작은 비판조차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누군가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으로 고소고발당하면 그때부터는 오만 우는 소리를 쏟아내기도 한다. 쳐맞아보면 안다. 제대로 아파보면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까를 몸으로 깨닫고 그때부터 조심하게 된다. 민주당도 잘못 건드리면 좆되는 수가 있다. 민주정부도 괜히 잘못 선을 넘었더가는 진짜 인생 조지는 수가 있다. 이동재가 그 대표적인 예 아니던가.

 

그러니까 더 반발하는 것일 게다. 아니면 진짜 제대로 취재해서 기사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대충 걸리는대로 비틀고 키워서 정부와 여당만 욕할 수 있으면 권력과 싸우는 기사행세도 제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일일이 취재해서 확인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 것이다. 어디 감히 민주당따위가. 마치 하루종일 술쳐먹고 놀다가 공사가 아직 안 끝났냐는 집주인의 말에 화부터 내는 인부들 꼬라지인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가족까지 걸고 넘어지는 기자들을 더이상 봐줄 생각이 민주당은 없을 텐데. 더이상 그래도 되는 민주당은 없다. 그래야 되는 민주당도 없다. 존중없이는 존중도 없다. 언론의 자유를 먼저 짓밟은 것은 선을 너무 넘어버린 언론 자신이다.

 

이제부터 기자들도 몸으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당과 민주정부에 대해 기사를 쓸 때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발로 뛰어 취재한 뒤 표현을 조심해가며 써야만 한다. 보수정당에 그러는 것처럼. 검찰에 대해 그러는 것처럼. 그토록 현정부와 여당에 날을 세우는 자칭 진보들이 검찰을 향해 조심하는 것을 보면 어찌나 안쓰러운지. 정의도 신념도 진실도 용기도 무엇도 없는 그 비루함이란. 댓가를 치러야겠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려 했다면 대가는 엄중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언론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언론이 그동안 해 온 일들의 결과다.

 

조국 전장관을 지지하는 이유다. 하나하나 따박따박. 조국 전장관 하나로는 부족하니 윤미향 의원의 가족들도 한 번 나서봐도 좋을 것이다. 추미애 장관 가족들도 절대 언론을 그대로 두고 봐서는 안된다. 징벌적손해배상제는 반드시 통과되어야 한다. 이낙연에 거는 기대다. 이마저 못하면 대통령은 포기하는 게 옳다.

백신과 사망자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면 코로나와 사망자 사이에도 인과관계가 없는 것 아니냐? 그동안 코로나가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 주장하던 놈들이 최근 퍼뜨리고 있는 논리다. 백신으로 인한 사망도 인과관계가 없으면 코로나로 인한 사망도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코로나는 없다.

 

어째 KBS, MBC, 한겨레까지 가세하고 있다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한 눈에도 뻔히 보이는 상황을 모르고 끼어들었을 리 없는 것이다. 나라가 망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첫날부터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노래를 불렀던 언론들이다. 그런데 아직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니 망하게 만들어야 한다. 원래 조중동이나 YTN, 연합뉴스, SBS의 목적이 그것이었고, KBS, MBC 역시 페미를 명분삼아 그리 방향을 틀 기회만 노리고 있는 중이고, 한겨레야 한 번 피맛을 봤으니. 그러니까 지상매괴라고 백신을 공격함으로써 질병관리청의 신뢰를 흔들고 코로나 방역을 방해한다.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국민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언론이라니. 그런데도 좋다고 찾아가서 추천하고 댓글까지 다는 지지자들이 있다. 어째서 저들 언론들은 저렇게까지 현정부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이미 여러 번 떠들었으므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의도가 명확해졌다. 진짜 버러지새끼들이란 것이다. 좋은 기자는 죽은 기자 뿐이다. 명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