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대 있을 때 본부중대에 가면 상황판이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소대에도 있었다. 인원과 장비의 현황을 파악해서 바로 수정할 수 있는 필기도구를 사용해서 적어 놓음으로써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끔 한다. 사람이든 장비든 들어오고 나간 상황과 내역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만일의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당직이든 불침번이든 교대할 때 가장 우선해서 중요하게 인수인계되어야 하는 것이 이같은 인원과 장비에 대한 현황인 것이다.

 

총원 몇 명에, 결원이 몇 명이고, 결원 사유는 무엇이며, 그러므로 현재 막사 안에 있는 인원의 수는 모두 몇 명이다. 총기는 소총이 몇 정, 유탄발사기가 몇 정, 기관총은 몇 정 하는 식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특히 불침번 근무시에는 구두로 전달하고 실제 함께 확인까지 한다. 요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군대 있을 때는 그렇게 상황판에 적힌 숫자와 실제 숫자를 맞춰보고 이상이 없을 경우에만 교대를 마칠 수 있었다. 내가 괜히 현모씨에 대해 당시 근무를 개판 선 것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인수인계할 때 제대로 했으면 이미 교대를 마친 순간 미복귀자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 그러면 물었겠지. 왜 미복귀냐고. 그러면 대답이 돌아왔을 테고.

 

일단 당직사병이 직접 병영을 돌면서 인원을 파악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주말에는 인원파악도 제대로 않는다는 카투사라면 더 그렇다. 아마 카투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혹시 모를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대부분 부대에서는 불침번이라는 것을 둔다. 그리고 이들 불침번들은 그 만일의 상황을 보다 빨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병영내 현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서로 인수인계하게 된다. 그래서 병영 내에서 어떤 변동사항이나 이상상황이 발생하면 불침번은 바로 당직자에게 보고하고, 당직자는 주어진 권한에 따라 자기가 직접 처리하거나 아니면 지휘계통을 통해 상관에게 보고하게 된다. 추미애 장관 아들 서모씨와 당시 당직사병이었다던 현모씨가 서로 다른 중대에 막사도 따로 썼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인 것이다. 중대도 다른 당직사병이 과연 남의 중대 막사까지 찾아가서 인원을 점검하고 미복귀자를 찾아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그런 게 진짜 가능하긴 한가?

 

그래서 서모씨와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카투사 전역자들도 현모씨가 당직실 상황판을 보고 미복귀여부를 인지했을 것이라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다. 상황판에는 분명 총원과 현재인원, 그리고 결원 가운데 휴가자와 외출외박자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니 그를 통해 누가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았는가를 인지하게 되었다는 쪽이 더 합리적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것이다. 현모씨 자신이 상황판을 고쳐 적지 않았다면 현모씨가 인지한 내용이 당직근무를 교대하기 전에도 그대로 쓰여져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미 근무교대를 하는 단계에서 휴가미복귀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수인계 과정에서 미복귀여부와 사유에 대해 물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더 이상의 혼란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금요일이 복귀일이었는데 일요일 당직근무 교대까지도 아무일이 없었다면 이미 소속중대원들은 거의 그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아니었어도 바로 당직자간에 서로 확인하고 난 뒤 지휘계통을 통해 보고가 이루어졌다면 자료가 남았을 것이니 더 깔끔하게 상황이 정리될 수 있다. 당시 당직자로부터 휴가미복귀자가 있다는 사실이 계통을 통해 보고되었었다. 그런데 언제 교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있으면서 미복귀사실을 인지하고 전화까지 직접 걸었다니 과연 정상적인 상황일 것인가.

 

현모씨의 주장이 사실이라 가정했을 때 내 추측은 이렇다. 인수인계 그냥 대충 했던 것이다. 상황판에 뭐가 적혀있는지도 보지 않고, 이전 당직자로부터 변동사항에 대해 제대로 전달받지 않은 것이다. 회사에서 당직근무 설 때도 비슷한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밤새고 나서 졸려 죽을 것 같으니 제대로 인수인계도 않고 바로 집으로 가버린다. 어차피 뻔한 내용일 것이라 아무도 없는 당직실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놀 생각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예 듣지도 않고 등부터 떠민다. 그래놓고는 인수인계를 하지 않아 전혀 대비하지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한다. 이걸 어쩌나? 여기 전화해 보고, 저기 전화해 보고, 그러니까 자기가 야식으로 처리해주겠으니 지금 당장 복귀하라 했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파악을 제대로 못해 난리가 났으니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식이면 이전 근무자들도 다 박살나야 할 텐데? 어찌되었거나 모두가 정상에서 벗어난 모습들인 것이다.

 

그래서 현모씨가 당일 당직도 아니었고, 더구나 같은 중대도 아니었다 했을 때 사람들이 피식 웃으며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필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대부분 안다. 행정병이 아니었어도 그냥 군생활만 오래 했으면 당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당연히 알게 되어 있다. 여러 중대가 통합해서 당직근무를 선다? 의미가 없다는 이유다. 그래도 당직은 당직, 인원파악은 각 병영단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병영 구조에 따라서 중대단위거나, 혹은 소대단위거나, 혹은 분대나 그 이하 단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당직은 보고만 받는다. 변동사항이 있다고 각 단위에서 보고가 들어오면 파악해서 바로 위에 보고하는 위치인 것이다. 사병이라면 더욱 전결권한이 없으니 일단 보고부터 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미복귀자의 존재를 자기만 먼저 알아차리고 전화까지 걸었다? 오죽하면 카투사는 주말에 인원점검도 안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겠는가. 그런 군대 있으면 한 번 보고 싶다. 제대로 된 나라에 제대로 된 군대가 어디 그딴 식으로 운영되는지. 

 

다시 말하지만 군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인원과 장비에 대한 현황파악이다.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중요한 장비들이 몇 개나 어떤 상태에 있고 하는 내역을 항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그래서 잠깐 한 눈 판 사이 탈영자가 생기면? 무기가 밖으로 유출되면? 그로 인해 크게 사고라도 일어난다면? 사단장까지 바로 진급에 빨간줄 쳐질 일이다. 될 말을 해야 믿어준다. 미필들이 진짜 많기는 하다. 어이가 없다.

내 행동은 내가 판단해서 결정한다. 누가 그러라고 해서가 아니다. 누가 그런 행동을 보여서가 아니다. 그렇더라도 결국 판단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보니 불편하다. 사회적 모범이라? 나는 아이가 아닌데? 그 사람은 내 부모도 선생도 아닐 텐데? 나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내가 코로나19에 걸리기 싫다. 나 뿐만 아니라 내 주위도 역시 코로나19에 감염되는 일이 없도록 나 스스로 노력해야겠다. 그래서 외부활동도 줄이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면접촉도 최소화해야겠다. 내 판단이다. 내 결정이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좋다고 이익이 된다고 여긴다. 정부든 언론이든 단지 그 판단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이나 할 뿐이다.

 

혹은 그럼에도 나는 여행을 가야겠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반드시 교회에서 대면예배를 봐야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때려죽여도 마스크는 쓰지 못하겠다. 그냥 코로나19 걸리고 말지 죽는 게 무섭다고 집안에 움츠려만 있지는 못하겠다. 그런데도 정히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다면 그때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거리두기 2단계니 2.5단계니 하는 것들이다. 그 가운데는 법으로 금지하는 행동도 있고, 금지까지는 않지만 국민의 협조를 구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래서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면 권고나 주의도 명령으로 바뀌게 된다. 강제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당국에서 충분한 정보와 주의를 준 위에서 자기가 알아서 판단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관 남편이라 뭐라고? 국회의원은 다르다. 장관도 역시 다르다. 그들은 공직자다. 공적인 역할과 그를 위해 위임된 권한 만큼 상당한 공적 책임과 의무가 지워지는 자리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공적인 지위에 있는 만큼 당연히 감당해야 할 대가인 것이다. 아내가 장관이고 남편이 국회의원이라고 그들이 뭐 다른 존재라도 된다는 것인가?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신분사회였을까? 공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반 시민과 다른 역할과 책임과 의무를 강요받는다. 더 엄격한 역할과 책임과 의무가 강제되어야 한다. 정상이라 여기는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도 그래서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딱 자기에게 주어진 만큼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공직자는 공직자로서, 유명인은 유명인으로서, 그냥 개인이라면 개인으로서. 가족까지 공직자는 아니란 것이다. 장관 가족이 장관이 아니고, 국회의원 가족이 국회의원이 아니다. 도지사 가족은 도지사와 별개여야 한다. 그러니까 나더러 장관 남편 하는 것 보고서 열심히 모범삼아 따라하라는 것인가?

 

그냥 아내가 장관인 것이다. 혹은 남편이 국회의원인 것이다. 다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가족 문제에까지 개입하려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를테면 홍정욱의 경우 딸이 마약을 밀반입한 만큼 다른 마약사범들과 같은 수준의 처벌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장제원 의원의 아들이 남들처럼 엄격하게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어도 여전히 비판이 가해지고 있을까? 그래서 아내가 장관이라고 어떤 특권을 사용했다는 것인가?

 

민주주의 국가에 지도층이란 없다. 권력을 위임받은 똑같은 시민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통령이 나보다 위가 아니다. 내가 장관의 아래가 아니다. 위임된 권한을 배제한 상태에서 그들과 나는 똑같은 대한민국의 구성원이고 시민일 뿐이다. 하물며 가족이야. 외교부 장관 남편이 나에게 뭐라고?

 

언론 기사 쓰는 게 우습다. 민주당에서 논평 내는 것도 같잖다. 언제부터 늬들이 그렇게 대단한 특별한 신분의 인간들이었는데? 다시 말하지만 그냥 아내가 장관인 평범한 은퇴한 시민이다. 뭐 대단하다고. 지랄들이다.

이를테면 약속하고서 시간에 늦은 경우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약속은 지켜져야겠지만 그러나 자기만의 사정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시간에 늦었다. 그래서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법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 가운데 어디에 속하게 될 것인가? 고소고발로 처벌받아야 할까? 아니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할 일인가?

 

세상에는 법이나 도덕 같은 보편의 규준을 적용해 판단하기에는 애매한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평소 플라스틱 사용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면서 라면은 잘만 쳐먹는다. 라면봉지가 바로 플라스틱이다. 동물복지를 주장하면서 값싼 고기만 인터넷에서 골라 사는 중이다. 참치가 멸종위기라는데 어째서 참치김밥은 그리 잘 먹는 것인가. 분명 학벌주의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일 테지만 기왕에 대학에 가려면 내 자식은 서울대처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옳다. 좋은 대학 나오지 않아도 나름대로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으면 좋지만 굳이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을 말리지 않는다. 그래서 뭐가 문제란 것인가?

 

직장에서 부하여직원에게 딸에게 선물할 옷을 고르는데 도와달라 부탁을 한다. 일관계가 아니다. 당연히 부하여직원 입장에서 자신의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부탁인 것이다. 하지만 평소 신뢰가 있었고 친분도 있었기에 도와줄 것이라 믿고 부탁했고 기꺼이 그 부탁에 응하기도 했다. 성폭력 관련해서 당사자가 성폭력인가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서로간에 양해 아래 친근감의 표현으로 신체접촉이 있었거나 표현이 조금 더 과감해졌거나 하는 정도라면 법적인 처벌대상까지는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주위에서 보기에 그리 보기에 좋지 않았다면 그런 자체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할 수 있다. 보기에 안 좋았다니 내 행동이 조금 부적절하기는 했네.

 

금지가 아니다. 주의고 권고다. 그래주었으면 좋겠다. 따라도 그만 안 따라도 그만. 그래서 양해할 수 있으면 그만 양해 못하겠어도 그만. 그럴 필요가 있으면 사과하는 것이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추석기간 동안 고향에 갔다 왔다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굳이 여행을 다녀왔다고 비난할 이유는 더욱 없는 것이다. 시절이 이런데 여행은 자제했으면 좋았겠지만 자기가 가고 싶어 간 것이니 뭐라 말하기는 그렇다. 딱히 내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상대가 받아들이기에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았다면 그 부분은 인정해야겠다.

 

그래서 가십이란 것이다. 법적인 문제도 아니고, 도덕적인 문제도 역시 아니고, 하지만 제법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만한 문제적 행동이기는 하고, 그렇다고 딱히 책임을 묻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미약하다. 그러니까 잠시 구설에 오르고 망신 좀 당하고 그것으로 끝이다. 너무 상습적이면 그것도 문제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한 번 겨우 그런 것으로 과연 어디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하는 말이 있다. 보수진영은 그런 부분에 대해 딱히 도덕적인 선명함이나 순결함을 주장한 적이 없다. 법적으로도 결백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진영은 그래도 된다. 하지만 도덕과 정의를 이야기해 왔기에 민주진영은 아주 작은 구설조차 허락되어서 안되는 것이다. 박덕흠 3천억보다 더 중대한 비위라는 것이다. 조수진 11억보다도 더 큰 부정이란 것이다. 윤석열 가족의 비리보다도 더 큰 범죄인 것이다. KBS 기준에서는 그렇다. 한동훈과 관련해서 오보가 아닌 표현상의 실수조차 뉴스에서 바로 사과해야 하지만 김경록씨의 인터뷰를 왜곡한 것은 김경록씨가 문제다. 그러니까 부적절하다는 것이 어떤 보편적 가치와 규범에 어긋난 행동을 뜻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감정적으로 보기에 좋지 않고 불편하다는 정서적인 문제인 것인가.

 

어찌되었든 국민이 불편하다면 잘못된 것이다. 국민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면 잘못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인의 자세다. 그러나 언론의 자세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잘못이고,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법을 어겼는가? 사회 보편의 도덕적 규범을 어긴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정서적인 문제인가? 그냥 내가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내가 언론이 권력이라 말하는 것이다. 내가 기분이 나쁘니 범죄다. 비리다. 부정이다. 악이다. 마오쩌둥이 그랬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손가락 하나로 중국의 참새를 씨를 말려 버렸다.

 

법으로 금지한 것도 아니고. 규범으로 강제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다수 국민들이 정부의 주의와 권고에도 해외도 나가고 여행도 다니고 했었다. 금지는 금지고 권고는 권고다. 명령이 아니다. 언론이 문제삼으면 문제가 된다. 보수진영이 문제삼으면 문제가 되어야 한다. KBS가 기계적 중립이라? 세상 기계 다 망가졌다. 버러지새끼들인 것이다. 

입시를 목적으로만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마치 객관식이나 단답형 문제처럼 평면적이고 단편적인 개념으로 단지 암기하고 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이를테면 최근 논란이 된 계몽군주가 그 한 예가 될 것이다.

 

원래 군주란 것은 한 정치단위에서 최고의 권력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구성원 모두에게 지배자이거나 대표자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었다. 군주를 떠받치는 지지세력들에게는 대표자이되 지배자가 아니었고, 군주와 일체감을 느낄 수 없던 대부분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이되 대표자일 수 없었다. 

 

바로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최근 뜨겁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대선인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미국 국민의 대표자가 아니다. 미국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의 대표자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미국 국민들이 지지하는가가 아닌, 몇 명의 선거인단을 가지는 몇 개의 주가 지지하는가에 따라 선거의 결과가 결정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그렇게 정당한 계승자가 있는 경우에조차 선제후들의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서만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그렇게 유력 영주들의 지지를 얻어보겠다고 영지까지 퍼주다가 가난뱅이로 전락한 국왕이 있었을 정도였고, 영국에서도 귀족들의 모임인 귀족원이 왕위의 계승에까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반면 그렇게 선제후나 의회에 의해 선출된 왕들 가운데는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외국인도 적지 않았기에 일반 국민들과의 접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적대관계에 있던 오스트리아의 황녀 출신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내내 수많은 구설에 휘말려야 했던 마리 앙트와네트처럼 정서적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는 경우까지도 상당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군주들이 권력을 가졌으니 지배자일 수는 있어도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군주들에게도 굳이 그래야 할 필요 같은 건 없었다. 군주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필요한 금력과 무력 대부분이 바로 이들 자신을 지지하는 소수의 유력자들로부터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봉건영주들이란 곧 자신이 기사였고, 다수의 기사를 가신으로 거느리고 있던 이들이었다. 영주들이었기에 자신의 영주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곧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고, 그를 다시 경우에 따라 군주에게 바침으로써 군주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래서 중상주의라는 것도 나오게 된 것이었다. 역시 역사교과서만 보다 보면 쉽게 오해하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중상주의에서 말하는 부국강병이란 바로 군주 개인의 재정과 군사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농민들이 굶어죽더라도 그 결과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오는 세금만 늘어나면 다 좋은 것이다. 역시 그래서 중상주의란 것도 국민국가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딱 조선왕조실록에서 화폐와 상업을 경계하며 사대부들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 중상주의 시대 유럽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보면 된다.

 

그런데 최초의 국민개병제가 실시되고 총력전에 가깝게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 전쟁의 양상을 겪게 되면서 유럽 군주들의 그같은 인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단 벌써 한참 전부터 군주에게 중요한 지지기반이었던 귀족들이 오히려 정치적인 경쟁자로서 성가시게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귀족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왕위에도 오르고 왕권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한 편으로 그런 귀족들의 간섭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방해가 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치르다 보니 고도로 훈련된 전사집단이었던 귀족들의 필요성은 줄어들고 장차 징집되어 전장에 나서게 될 이전까지 백성이라 부르던 국민들의 필요성이 더 커지게 되었다. 더불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의 상공업자들이 군주인 자신들에 내는 세금이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곡식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귀족도 영지도 이제는 더이상 군주인 자신을 위해 필요없어진 것은 아닌가. 그래서 나타난 것이 절대왕정이고 중상주의였다. 그리고 그 연장에서 중국의 영향으로 더 강력하게 국민과 밀착하여 그들의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환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바로 계몽군주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동안 귀족과 부자들에게 했던 그대로를 국민들에게도 베풀어 주겠다.

 

그래서 계몽군주가 나타난 시기는 국민을 더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국민교육과 보건이란 개념이 나타난 시기와 많이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국민의 자발적 복종과 참여를 이끌어내어 자신을 위해 세금을 바치고 나가서 적과 싸우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한 편에서는 고리대금으로 여성들을 매춘부로 전락시키면서, 한 편에서는 그 매춘부들을 위해 병원을 짓는 모순도 당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국가가 아닌 왕실의 재정을 늘리기 위해서 온갖 착취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른 한 쪽에서는 국민을 위한 복지정책들이 시도된다. 하긴 임금인상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군대까지 동원해 노동자를 쏴죽이던 카네기나 록펠러가 나중에 사회사업가가 되어 자선사업도 열심히 했던 것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즉 계몽군주가 그나마 역사적으로 그나마 전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유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삶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 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인 것이지 군주로써 이전과 다른 어떤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란 것이다. 여전히 계몽군주 시절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음에도 혁명 이전 러시아 사회가 가장 낙후되어 있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 3세 역시 하는 짓거리나 해놓은 결과 역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음에도 평가는 크게 갈리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근대로 접어드는 19세기 말에 계몽군주라니. 하물며 20세기에. 더구나 21세기도 한참 지난 지금에.

 

18세기면 아직 근대 이전인 근세, 즉 전근대사회란 것이다. 그러니까 계몽군주라고 마음대로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이나 다 마음먹은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당사자가 죽고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으면 다시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었다. 그래서 근대 이후에는 그렇게 군주 개인의 자의에 맡기는 전근대적인 통치제제가 아닌 보다 고도의 정치제도가 발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계몽군주가 칭찬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무려 세종대왕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개념이란 것이다. 그리고 역사상 계몽군주라고 항상 옳고 바른 정책만 펼쳤던 것도 아니고. 모든 정책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이었던 것도 아니다.

 

한 페이지로 다 설명하려니 생기는 문제인 것이다. 아마 세계사 교과서에서 계몽군주와 관련해서 몇 페이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중상주의도 부국강병만 설명하지 그 부국강병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군주 개인의 주머니를 위해 인신매매까지 한다. 자국 국민을 잡아다 용병으로 팔아치우는 경우마저 있었다. 상인들이 너무 폭리를 취하는 바람에 먹고 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군대를 보내 잔인하게 진압하기도 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고종도 많이 닮았는데. 21세기에 계몽군주라 불렸다고 좋아하라니.

 

시험만 잘보면 병신이 된다는 대표적인 사례인 것이다. 기자새끼들 분명 시험은 잘봐서 대학도 좋은 데 갔을 텐데 계몽주의란 말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논픽션의 뜻도 모르는 수준들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유시민 이사장이 잘못한 것이다. 기자놈들 대가리 수준을 제대로 이해하고 단어를 선택해 썼어야 했는데.

 

유럽 근대에 어째서 사회주의나 아나키즘같은 기존의 구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해해보면 답은 나온다. 아직도 19세기식 자유주의를 떠드는 놈들에게 너무 과분한 요구일 테지만. 웃기지도 않는 것이다.

새삼 확인하는 것은 대기업 사무 정규직이 아닌 이상 거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다. 돈 많이 준다고 해서 찾아가 보면 결국 최저임금에 수당 좀 더 붙이는 정도다. 어째 일도 괜찮은데 돈도 많이 준다고 해서 갔더니만 주말과 휴일은 당연히 근무하고 잔업과 야근도 때때로 있다는 말을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 휴일근무수당과 야근수당까지 더하니 이건 완전 최저임금도 안되는 자리다.

 

즉 그나마 최저임금에 수당이나 붙여서 임금 맞춰주는 정도면서도 그마저도 아깝다고 근무시간 임의로 늘리려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이고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얼마전 썼던 아파트 경비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휴게시간을 빼면 최저임금 딱인데, 휴게시간을 대기로 돌리니까 최저임금에서 시급이 1000원 이상 까인다. 급여 많다고 찾아갔더니 일 힘든 건 둘째 치고라도 끝나야 할 시간에 끝나지 않고 다음날 출근도 2시간 일찍 하라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리저리 계산해 보니까 그냥 시간당으로 계산해서 노가다 뛰는 게 더 현실적이다.

 

청년들이 결혼을 않으려 하는 이유도 그래서 새삼 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면 저런 지랄맞은 조건에도 어쩔 수 없이 하나 잡아서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부모님께 생활비나 얼마간 보내드리면 나머지는 그저 혼자 먹고 살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 보니 그렇게까지 절박하지는 않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있어서 올해까지는 아무 일 않고 놀고 먹기만 해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듯하다. 임금이며 노동시간이며 근로조건이 죄다 이따위인데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꼼짝없이 거기 잡혀 인생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은 전문직이나 대기업 사무직 아니면 체력은 필수라는 것. 시간당으로 꼬박꼬박 챙겨서 받을 수 있는 자리란, 더구나 수당까지 더해서 최저임금 이상을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자리들이란 대부분 근력과 지구력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란 것이다. 그러니까 그토록 부모들이 공부하라 아이들을 닥달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저런 현실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대기업 사무직이 될 수 있으면 저들이 고생하는 모습이야 말로 보상이고 보람이 될 테니.

 

진짜 연말까지 모아놓은 돈 쓰면서 놀고 먹기만 했으면 싶은 마음까지 들고 있다. 일하기 싫다. 그런데 일해야 한다. 어차피 혼자 사는 것 돈 많이 받는 건 기대도 않고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며 지낼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 대신 근무강도는 조금 세다. 다행히 다른 건 몰라도 힘과 체력은 자신이 있다. 아니 지금 와서 유일한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힘과 체력 정도다. 그냥 구질한 현실의 이야기다. 대부분 사람들은 별 관심도 없는. 놀고 싶다. 복권이나 당첨되라!

벌써 2015년이구나. 시간 진짜 빨리 간다.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이 과거 JT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송곳'의 클립들을 자꾸 내 앞에 노출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현실의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구나. 그러고보니 드라마의 배경도 무려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0년대 초반이었다. 유시민이 한탄했지. 노무현 정부 동안 저런 일 일어나는 거 미처 신경쓰지 못했었다. 노동운동 하던 사람들이 노무현에게 이가는 건 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진짜 당시 악랄했었으니까.

 

아무튼 드라마 클립들을 보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어째서 당시 그토록 높은 화제성에도 시청률은 바닥을 기고 있었는가. 정확히 내 또래들에게나 화제였을 것이다. 지금 2, 30대만 되어도 뭔 헛소리인가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더구나 시험도 치르지 않고 캐셔나 판매, 재고관리를 위해 들어간 놈들이 무슨 정규직이고 노조냐는 것이다. 바로 얼마전 인천국제공항 논란을 떠올리니 더욱 확실해진다. 푸르미 정도의 대형마트면 그래도 나름 이름있는 기업일 텐데 고작 계산원이나 판매원, 재고관리원들이 정규직 자리를 지키겠다고 파업까지 하면 저들의 정의감에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정규직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학교 다닐 적부터 열심히 노력해서 시험까지 치렀으면 정규직, 그렇지 않으면 비정규직. 비정규직이 감히 고용안정을 바라서도 안되고, 높은 급여를 받아서도 안되고, 직원에 대한 복지를 기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나오라면 나오고, 그만두라면 그만두고, 최저임금도 안되는 돈에, 하루 20시간 일을 시켜도 돈 주는 사람 마음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고. 그런 최근 2, 30대의 공정과 정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드라마 '송곳'은 악과 불공정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지금 청년들은 드라마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며, 그래서 아예 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 세대의 공정과 지금 세대의 공정을. 이전 세대의 정의와 지금 세대의 정의를. 그래서 드라마 '송곳'의 내용에 크게 공감하며 볼 수 있었던 세대와 오히려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세대들의 가치의 차이에 대해서도. 그래서 그리 인기가 없었던 것이로구나. 그래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비정규직이 지금처럼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 차이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냥 맞지 않는다. 세대차이란 것이다. 늙었음을 깨닫는다. 

신기했다. 원래 경비보안은 최저임금만 겨우 받는 자리다. 정규직이든 뭐든 경비보안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주는 경우른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인천국제공항같은 매우 중요도가 높은 예외적인 경우만 조금 더 높은 급여를 받게 된다. 물론 이들은 특수경비라고 일반경비와 구분되는 경우들이다. 그런데 그런 일반경비가, 그것도 아파트 경비의 임금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나온 것을 보게 된다. 어떻게?

 

사실 저 말에 답이 있다. 경비보안은 무조건 최저임금만 받는다. 급여가 높다면 근무시간이 길다는 뜻이다. 다만 법적으로 주 40시간 노동을 강제하고 있으니 구인공고에는 주 40시간만 일한다고 적어놓는다. 그런데 정작 찾아가 보면 법으로 정한 최소 휴게시간 이외에는 모두 근무시간인 경우가 많다. 무려 18시간이다. 밥 먹는 시간 각각 점심과 저녁 1시간씩, 그리고 야간 수면시간 4시간 해서 6시간 휴게시간에 18시간 근무다. 이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거냐면 아파트든 어디든 경비가 주말이나 휴일이라고 집에서 쉴 수 있을 리 없으므로 이틀에 18시간씩 하루 9시간을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주간 근무시간이 무려 63시간에 이르게 된다. 주 60시간이면 산재규정에서 과로로 인정되는 시간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그나마 알량한 6시간 휴게시간까지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란 것이다. 식사시간에도 대기해야 한다. 수면시간에도 대기해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 지 알 수 없기에 항상 아파트 경내에 머물며 대기하면서 식사하고 수면도 취해야 한다. 뭔 말이냐면 당비 24시간 근무시강동안 아파트 경내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심지어 집이 바로 근처라서 집에서 밥먹고 오겠다 해도 그마저 허락해주지 않는다. 원래 휴게시간이란 노동자로서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모두 회복하는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휴게시간에는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노동자는 자연인으로서 사용자와의 계약관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데 그 시간조차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경내에서 대기하기를 강요하네? 사실상 근무 아닌가.

 

솔직히 조금 혹했다. 급여가 좀 세더라. 그런데 고양이 밥 줘야 한다. 물도 챙겨줘야 한다. 누가 버릇을 들인 것인지 밥 먹을 때 되서 새로 밥과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그냥 못먹을 것 취급하며 아예 굶어 버리는 배에 기름낀 고양이 녀석이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고양이 밥도 못 주게 하는 건 도저히 못 참겠더라. 그 전에 저런 식으로 일하면 휴게시간까지 포함 오히려 최저임금 이하로 내려가게 된다. 무엇보다 24시간 내내 아파트 경내에서 대기해야 하는데 내 성격상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아파트 경비를 60대 넘은 할아버지들이 대부분 하게 되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국민연금이라도 아껴보겠다고 일부러 사용자들이 60대 이상만 고르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60대 이상 고용률이 상당히 괜찮게 나오는 것도 바로 그 국민연금이 기여한 바가 제법 클 것이다. 아무튼 아직 몸 건강한데 이런 일 하는 건 너무 아니지 않은가.

 

아직도 이런 식으로 일시키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대충 급여 계산해 보면 얼마인지 나온다. 야간은 1.5배로 야간수당 붙는다. 감시단속직은 저강도노동이라 해서 주휴수당이나 주말휴일수당이 따로 붙지 않는다. 그나마 법이 바뀌며 야간에는 최대한 재워주도록 되어 있으니 그것 하나는 제대로 지켜줄 듯하다. 자는 것 깨우면 사람이 사나워진다. 그래도 역시 아직도 이런 식으로 일하는 곳도 존재한다. 아파트 경비분들 잘 대해주기 바란다. 참 힘든 일이다. 난 못한다.

삼국유사에 연오랑 설화란 것이 나온다. 어부 연오랑이 바위를 타고 일본까지 가서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내 세오녀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다가 역시 바위를 타고 일본에 가서 왕비가 된다. 그냥 신화인가 싶었더니 90년대 일본까지 고무보트 타고 갔다 온 사람이 있었다. 원래 일본 가려던 게 아니었는데 잠시 한눈 파는 사이 고무보트가 해류를 타고 그만 일본 영해까지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갈라파고스 같은 외딴 군도에 그리 많은 생물들이 사는 것이다. 인력 말고 다른 공력원이 없던 원시시대에도 사람들은 해류를 타고 태평양 외딴 이스터섬까지 진출했었다.

 

아마 80년대 귀순자 가운데도 그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사실여부는 알 수 없는데 당시 정부발표나 이후 드라마로 재연한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쪽배 하나에 의지해서 해류를 타고 남한으로 목숨걸고 내려온 경우였었다. 사실 목숨까지 걸 필요가 없는 것이 그래봐야 몇 십 킬로미터라는 것이다. 해류의 속도가 생각보다 매우 빠르다. 그래서 위의 경우도 고무보트 띄워 놓고 놀다가 잠시 한 눈 판 사이 해류를 타고 밀항 아닌 밀항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참고로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일본 영해인 것을 알고 지나가는 어선에 신고해서 한국 대사관을 통해 귀국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밀항과 밀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겠다는 너스레까지 떨고 있었다.

 

역시 과거 북한에서 넘어오는 귀순자가 귀순동기로 이야기하던 것 가운데 하나로 한국에서 해류를 타고 넘어간 상품포장들이 있었다고 했었다. 그냥 여러가지 경로로 바다로 휩쓸려 간 것들이었을 텐데 해류가 남에서 북으로 흐르면 북한 해안까지 가 닿고 했었던 것이다. 거꾸로 해류가 북한에서 남한으로 흐르면 반대 상황도 벌어진다. 그래서 문제, 과연 당시 공무원이 발견되었다는 해역에서 해류는 어디서 어디로 흐르고 있었을까? 부유물을 잡고 있었다는 정황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구명조끼까지 입은 채 부유물까지 옆에 끼고 있었다. 당시 해력의 해류에 대해 잘 알고 있을 담당 공무원이기도 하다.

 

굳이 헤엄쳐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남으로 귀순해 올 때도 굳이 헤엄같은 건 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아무거라도 뜰 만한 것만 있으면 해류에 맡겨 몸만 실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류를 타고 태평양도 대서양도 마음대로 횡단하는데 고박 수 십 킬로미터 정도야. 이래서 사람이 반공교육을 잘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 바다에 놀러가려면 안전교육 잘 받아야 한다. 아니면 진짜 바닷가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다. 북한 뿐만 아니라 재수없으면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면 어째서 가족은 그런 주장을 하는가? 첫째는 아마도 과거 월북자의 가족에게 가해지던 연좌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이유일 테고, 둘째는 아무래도 자신월북이라고 하면 정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해서 적국인 북한으로 넘어간 이상 정부 입장에서는 자국을 버린 배신자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논란이 생각보다 그렇게 크게 번지지 않을 것이란 이유이기도 하다. 보수층에서 오히려 더 이런 월북자들에 대해 엄격하고 가혹하다. 표류한 것이 되어야 그래도 죽음에 대해 정부에 책임을 묻고 얼마간 보상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남기고 간 빚이 1억이라는데 유족 입장에서 그 돈을 어찌 감당해야 하는 걱정도 있을 수 있다.

 

결론은 북한이 개짓거리 한 건 맞는데 언론이 떠드는 소리란 하나같이 북한이나 크게 다름없는 개짓거리란 것이다. 2세기 전에나 의미있을 미개한 짓거리를 한 것이 맞는데 그렇다고 해류가 뭔지도 모르던 선사시대의 논리를 꺼내 올 것은 없지 않은가. 한겨울도 아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죄다 바로 저체온증으로 정신 잃고 목숨까지 잃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바다에 빠지면 생존가능성을 계산해서 상당한 시간 동안 수색도 하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되도 않는 헛소리로 소리만 시끄럽다. 언론은 답이 없다. 뇌를 파내고 팔다리를 자르고 장기를 도려내면 기자가 된다. 벌레들.

6월 25일 현재 몸상태가 PC방에도 못 갈 정도로 좋지 못하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PC방 가서 게임도 못할 정도인데 과연 이틀뒤 6월 27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인가.

 

수술받은 무릎 상태가 좋지 않다고 휴가를 연장받은 것이 6월 23일, 그리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몸이 회복된다는 것은 일정한 임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어제까지 똑바로 누워 자지도 못했는데 오늘 베개 베고 누워 보니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아주 못 잘 정도는 아닌 듯하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물이 가득 근 물병을 들고 있으면 힘이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제법 설거지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바로 어제까지 복귀도 못할 것처럼 아파 죽겠더니 오늘은 조금 괜찮아져서 PC방에서 게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PC방에서 게임을 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 부대로 복귀해서 정상적인 군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란 의미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목욕탕에서 넘어져서 머리 깨지고 의사놈들 진료거부한다고 꿰매지도 못한 상태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하며 글이나 끄적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과연 내가 현역으로 복무중이었다 했을 때 복귀해서 정상적으로 군생활이 가능했었느냐 묻는다면 일단 대가리부터 깨주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일주일동안 똑바로 눕지도 못했었다. 얼마전에는 왼쪽 손목 근육이 찢어져서 빈 물컵도 못 들 정도가 되었기도 했었다. 그래도 게임은 한다. 글질도 한다. 다만 일은 하지 못한다. 가벼운 것조차 들고 나르지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것인가. 직장 다니는 중이라면 회복될 까지 병가를 내고 쉬는 것이 옳다. 하물며 군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항상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최상의 몸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곳이 바로 군대란 곳이다. 괜히 국민개병제로 인해 위생과 건강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발견된 것이 아니란 것이다.

 

치료를 위해 병가를 냈는데 단지 복귀일을 맞추기 위해 치료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복귀부터 해야한다는 자체가 병가를 낸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복귀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병가를 내고 민간병원에서 치료받은 자체가 다시 돌아와서 원래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인 것이다. 아니면 뭣한다고 군대에서 병가씩이나 만들어 민간병원으로 보내겠는가. 그런데 정상적인 부대생활이 어려울 것 같다면 충분히 더 회복할 수 있도록 여유를 두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당부분 회복이 이루어져 게임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기뻐해야 할 일이지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는가 다그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병사들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병사들의 건강까지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게임할 수 있을 정도니까 자기 휴가를 연장해 쓰더라도 일단 복귀하고 봐야 한다. 그 전에 정상적으로 연장허가를 받았음에도 회복된 자체가 문제가 되어야 한다.

 

저놈들이 군인을 보는 시각이란 것이다. 국민의힘만이 아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자란 새끼들이 군인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어디 감히 군인이 휴가를! 아죽 뒈지지 않았는데 감히 병가를 내는가! 아직 살아있는데 연가까지 써서 휴가를 연장하는가! 게임할 수 있으면 부대에 복귀해서 뒈져야 하는 것이다. 자기 권리라니까, 연가는? 하지만 자기 휴가조차 자신의 권리가 아닌 엄격한 통제 아래 허락받는 특혜로 여겨져야 한다. 군바리 새끼들은 휴가도 나가서는 안된다. 휴가를 못나가는 게 정상이고 휴가를 연장까지 하는 것은 특혜다. 정의당 씨발 페미년들이 떠드는 소리고, 한겨레와 경향 같은 자칭 진보언론들이 공정을 들먹이며 트집잡는 이유다. 그러니까 문제가 된다. 아직 회복되지 않아 연장했고, 이틀동안 게임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되었다. 그러니 휴가연장 자체가 잘못이다. 

 

국민의힘이야 원래 그런 놈들인 걸 안다. 군대 갔다왔다면서 군인을 처우 좋아지는 것에 질색팔색하는 군필자들도 적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진보의 인권은 군바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남자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폭력을 담당하는 군인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군인은 그냥 아프다 뒈지라. 그래서 불공정이다. 씨발년들.

 

글쓰다가 그만 열받고 말았다. 되도 않는 헛소리가 뉴스가 되는 상황이다. 어제까지 죽을 것처럼 아팠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게임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네년놈들 대가리가 문제인 것이다.

 

하다하다 여기까지 오고 만다. 그래서 게임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것이 휴가에서 복귀해도 좋을 정도로 회복되었다는 증거인가. 아무것도 없다. 병사는 그냥 개돼지다. 저 씨발년들은 항상 그랬었다. 버러지들이다.

예를 들어 얼마전 인천국제공항 보안검색요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 했을 때 아주 난리가 난 이유란 하나다. 어떻게 채용되었는지 모르겠다. 당연하다. 대기업 제외하고 직원 뽑으면서 필기시험까지 치고 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아마 중소기업 가운데서도 상당수가 필기시험 없이 이력서와 면접만으로 채용하고 있을 것이다. 필기시험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그렇다 보니 대부분 그런 경우 채용이나 취업이란 알음알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구인광고를 내고 지원자 가운데 뽑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왕에 아는 사람 소개로 찾아오는 쪽이 더 신뢰가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최소한 그 아는 사람이 보증인 역할이라도 해 줄 것 아닌가. 일하는 도중 사고를 치거나, 혹은 못해먹겠다고 뛰쳐나가거나 하면 책임이라도 물을 수 있다. 원래 대부분 급여도 고만하고 대우고 고만한 일들이라 오래 마음잡고 일할 사람을 구하기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 소개로 쓸만한 사람을 소개받고, 혹은 아는 사람 소개로 자기 처지에서 나쁘지 않은 직장을 소개받았다. 과연 그런 것을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차피 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하겠다고 해도 믿을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일자리를 구하는 입장에서도 여기서 계속 마음 붙이고 일해도 좋은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런 경우 중간애서 중개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서로가 마음의 짐을 덜 수 있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이 아니란 말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지원자들을 테스트하고, 일단 채용하고 나서도 낙오자는 단호히 떨어내고 새롭게 더 나은 인재를 모을 수 있는 대기업들과 사정이 다르다. 그러고서도 결국은 일단 고용해서 일 시켜보고 얼마나 잘하는가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계속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래서 중간에 소개하는 사람이 있으면 뭐가 그리 문제가 되는가.

 

인턴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인턴이라고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인턴으로 시작해서 잘만 하면 정규직도 시켜주마던 거짓말이 사기였던 사실이 밝혀진 것이 벌써 오래전 일이다. 더구나 학생 인턴은 채용과 상관없는 그냥 경험쌓기다. 당연히 인턴을 하는 입장에서도 어차피 돈도 못 받고 그냥 자기 시간 써가며 경험이나 쌓는 정도이고, 인턴을 받는 입장에서도 도움은 전혀 안되고 괜한 시간과 비용과 수고만 낭비할 뿐이다. 그런 인턴을 두가 시험씩이나 치러가며 뽑을 것이고, 또 시험봐서 뽑겠다면 지원할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냥 지원서류에 경력 한 줄 넣겠다고 그 수고를 기꺼이 감수할 당사자도 그러라고 자기 비용과 수고를 들일 기업이나 단체도 없다. 그러면 남은 건 하나다. 추천이다. 부모나 혹은 주변의 인맥을 이용한 부탁이다. 그런 수준밖에 되지 않는단 것이다. 인턴이란 것은.

 

이준석도 국회에서 인턴한 것 가지고 또 난리더만. 그런데 어쩌겠는가? 국회 입장에서도 인턴십을 뽑는데 무슨 정식으로 공고를 하고 시험까지 치러가며 뽑기에는 너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것이다. 인턴을 하는 입장에서도 고작 서류에 경력 한 줄 더 써넣는 것 가지고 일일이 준비까지 해가며 시험도 치르고 면접도 보고 하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다. 사실 굳이 국회여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조국 전장관의 자녀들이 혹은 대학에서, 혹은 지인의 로펌에서 인턴을 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반드시 그곳이었어야 해서가 아니라 당시 그들이 인턴을 할 만한 곳이 자신들의 인맥으로 그 정도가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나였다면 부모님의 직장이나, 혹은 주변의 지인들이나, 아니면 나를 좋게 보던 담임 등을 통해 인턴할 곳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선택지가 없다. 여기서 인턴하면 좋겠다. 그러면 한다.

 

이런 걸 가지고 특혜니 뭐니 떠드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란 것이다. 만화책 보다가 우연히 마음이 맞아 창업한다는 회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아주 없지 않다. 물론 리스크를 안아야 한다. 그렇게 사람 구하는 회사가 제대로 된 회사일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구직활동 할 때 이력서에 경력 한 줄이 또 더 들어가기도 한다. 단골만화방이라 주인 소개로 공장에서 일할 기회도 얻게 된다. 시험봐서 들어가는 대기업이 아닌 그렇게 알음알음으로 주먹구구로 대충 들어가서 맞춰 일하는 세계에 익숙한 나에게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논란인 것이다. 인턴이라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그렇게 대단한 일이던가 하는 것이다. 연봉이 한 4천 쯤 되나? 인턴하면 바로 명문대 들어가고 대기업 들어가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것인가? 아니 고작 인턴 몇 개 더 했다고 대학에서 바로 합격시켜주는 경우가 현실에 있기는 할 것인가. 입시담당자들이 병신인가? 고등학교 수준에서 어떻게 인턴을 운영하는지도 전혀 모른 채 생활기록부만 믿고 뽑게.

 

그래서 언론이 지랄을 하는 것이고, 또 대중들은 넘어간 척 더불어 지랄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안다. 인턴이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그래서 대부분 인턴이라는 것도 딱 그런 수준으로만 운용되고 하는 것이다. 기왕 배우려 왔으니 지금 하려는 일들에 대한 자료를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져오라. 혹은 과제로 내 준 책이나 논문을 읽고 리포트를 써 오라. 관련한 다른 강의나 혹은 자격증을 취득해서 실력을 인증하라. 그래도 되는 이유는 그래도 되는 정도의 인턴이기 때문인 것이다. 몰라서 넘어간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넘어가고 싶었던 것일까?

 

굳이 시험을 치르고 공정하게 경쟁해야 하는 이유는 모두가 그것을 바라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연구실에서 잡일이나 하는 인턴인데 해보겠냐고 물으면 몇이나 그러겠다고 대답할 것인가. 그 지루하고 잡다한 일들을 매일같이 성실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 것인가. 아니더라도 다른 인턴도 얼마든지 있다. 괜히 폼나는 인턴만 찾는 것이 아니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때 필요한 공정이란 어떤 공정이어야 하는가.

 

확실히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다. 바라보는 것도 너무 다르다. 인천공항공사라 하니 시험봐서 들어가는 사무직만 생각한다. 정규직만 되면 모두 사무직이 될 수 있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는가? 정규직이 되어도 여전히 보안검색요원이고 급여나 복지도 거기서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 온 세계가 그런 세계일 테니까. 저들의 공정이 나의 공정과 다른 이유다. 그렇게 아름다운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우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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