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분명 작가는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권민우라는 캐릭터를 만든 것이다.

 

돌발행동으로 팀 전체가 협의해서 준비한 변론전략에 피해를 입힌 우영우에게 페널티를 주어야 한다는 권민우에게 장명석은 말한다. 같이 일하다가 생각이 안맞고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풀고 해결을 해야지 매사에 잘잘못 가려서 상주고 벌주고 난 그렇게 일 안한다. 아마 작가가 되도 않는 공정을 지껄여대는 20대 남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사법고시 합격한 곽상도 아들은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았어도 아버지가 민정수석까지 했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번듯한 학벌도 실력도 경력도 쌓지 못한 탓에 경비원, 미화원, 조리사 등을 하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조차도 불공정하다.

 

부모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으니 있는 집 자식들이 공부 잘하는 것도 정당하다. 그렇게 노력해서 서울에서 자리잡고 살게 되었으니 서울에 사는 학생들이 입시에 유리한 것도 공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가 무능해서 집안이 가난하다고 입시에서 약간의 우선권을 주는 것조차 불공정한 것이다.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는 하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을 것이다. 당시에도 20대 남성들과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 학교 다닐 때 노력하지 않아서 비정규직 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급여가 적고 처우가 열악해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 노력해서 좋은 대학 들어갔으면 그에 걸맞는 혜택을 누려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에 따른 페널티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당시에도 수도와 전기, 의료보험등의 민영화를 적극 주장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었다. 노력도 안해서 가난한 놈들이 내가 낸 세금으로 수도와 전기를 마음대로 쓰고, 병원도 다니고 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보지 못한다. 아마 지난 대선 초반에도 이재명이 서울대 가서 학생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자신들이 돈벌어 내는 의료보험료로 가난한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은 불공정하다. 결국은 지금의 현실이란 과거의 노력의 결과이기에 그에 따른 포상과 징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 공정이라는 사고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성공했다면 그에 따른 더 큰 포상을, 즉 더 큰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그렇지 못했다면 더 큰 징벌을, 즉 더 열악한 처우와 차별을, 그래야 노력한 사람은 노력한 보람을 느끼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무능과 나태를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바로 그 놈들에 의해 인터넷에서 네티즌 수사대라는 이름으로 개인들에 대한 사냥이 당연하게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벌을 주어야 하니까. 어떻게든 잘못한 것을 하나라도 찾아서 벌을 주는 것이 정의일 테니까. 타진요 사태는 그런 점에서 지금 이대남 현상의 전조였는지 모르겠다.

 

동료가 아니다. 아니 인간조차 아니다. 그래서 네티즌 수사대의 인간사냥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벌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상을 주어야 하는 대상이다. 즉 '대상'이다. 주체가 아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나와 대등한 또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의 주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판단하여 상을 주고 벌을 줄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저들의 공정에는, 정의에는, 저들이 사는 세상에는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인터넷처럼 그저 텍스트로 이루어진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명석의 입을 빌어 말하는 것이다. 우영우는 자신의 동료다. 함께 대화하여 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서로 다르고 맞지 않는 부분들을 이해해 가야 하는 또다른 주체인 것이다. 그저 부하직원이 아니다. 상을 주기 전에 묻고, 벌을 주기 전에 이해하려 한다. 그를 통해 함께 공존하려 한다.

 

어째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회는 굳이 비용과 기회를 배려해야 하는가. 얼핏 낭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자르면 남인 회사와 달리 현실의 공동체는 자연적으로 강제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과 함께 공존한다. 그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때로 양보하고 때로 손해를 보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가며 그들을 배려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권민우는 그런 사실 자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영우는 그냥 남이다. 자기와 다른, 그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타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대상이다. 인간도 아닌. 주체일 수 없는.

 

저번에 썼던 20대 남성과 자유의지주의에 대한 글을 보완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더 간명하게 그 진실을 꿰뚫는다. 물론 이제 와서 20대 남성의 공정따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이미 그동안 여러 사건들로 그 실체가 까발려진 뒤일 테니.

 

아무튼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민우란 캐릭터가. 권민우도 20대일까? 많아야 30대 초반일 텐데. 하는 짓거리가 닮았다. 타진요까지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병신은 병신이다.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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