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장비를 비판하는 게시물이나 영상에 반드시 따라오는 댓글이 있다. 사실 역사도 유구하다. 저 비슷한 내용의 글을 무려 20세기에 하이텔에서도 보았으니.

 

"그때 소달구지나 끌던 조선..."

 

사실 정치권에도, 그리고 정부 요직에도, 나아가 그들을 지지하는 지지층에도 일뽕들이 넘쳐나는 이유일 것이다. 일제강점기까지, 아니 불과 80년대까지 똥오줌도 못가리던 미개하고 가난한 조선반도 엽전들과 달리 일본분들께서는 이때부터도 벌써 대단하셨다. 그러니까 일본분들은 매우 대단하신 분들이다.

 

그래서 과연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남들 비행기 만들 때 소달구지나 끌고 다닐 정도로 미개하고 열등하기만 했는가? 한국전쟁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엔진과 부품들을 뚝딱 조립해서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한국전쟁 끝나고 10년도 되기 전이었다. 대충 주위에 굴러다니는 자동차들 뚝딱거려 원리를 알아내고 구할 수 있는 부품 가지고 조립해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강점기에는 그런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대학이라고는 경성제국대학 오로지 하나 뿐이었었다. 그것도 사실 조선반도에 이주해 살고 있는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조선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대신 대학도 아닌 전문학교를 통해 고등교육을 받았었다. 이때 전문학교들이 이후 서울대를 제외한 사립대학들의 전신이 되고 있었다. 연희전문이라든지 세브란스 의전이라든지 이화여전들이 그것이다. 더구나 이들 전문학교들까지 모두 통틀어 조선반도에서 이루어진 이공계교육이라는 것은 기술의 습득 이상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전문적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배우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야 했는데 이마저 일본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다. 괜히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한 자리 하는 새끼들이 죄다 친일파였던 게 아닌 것이다. 친일파 아니면 제대로 된 고등교육은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다. 오죽하면 서울대에서 부전공이든 교양이든 역사 배운 놈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쪽발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까? 

 

대학도 그런데 사기업들의 사정은 더 처차무인지경이었다. 경술강제병탄이 있고 나서 조선총독부가 가장 먼저 했던 것이 회사령을 통해 전국에 난립하던 민족자본들을 대거 정리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소수의 협력적인 인사들에게만 회사를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렇다고 일정 이상의 자본을 획득하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었다. 식민지조선에서 그나마 규모가 있는 회사나 공장들은 거의가 일본인들의 소유였고, 그래서 한국 기업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회사와 공장들이 해방 이후 한국인 기업가들에 불하되는 과정이 오래된 기업일수록 거의 반드시 등장한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대가리가 빡대가리들이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사업으로 경쟁해서 이길 수 없었으니 식민지 조선에 조선인에 의한 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것이라 주장할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시발택시만 하더라도 일본이 서구의 선진적인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일단 악착같지 자국 국민들의 등골을 빨고 나중에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피를 쥐어짜셔 선진국들에게 발주를 준다. 이러이러한 것들을 만들어 달라. 혹은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직접 기술을 배우거나 설계도를 가져와서 사들인 공구와 기계등으로 공장을 세워 직접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때 서구의 열강들로부터 들여온 기술이라는 것은 대개 시대에 뒤떨어진 도태된 것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거기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자랑하던 군함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영국에 발주를 주어 생산한 것을 사왔었고, 나중에는 영국으로부터 받아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나름대로 개량해가며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뻘짓도 어마무지하게 했었다. 도대체 이런 게 굴러가기는 하는가 싶은 것들도 그때 꽤 많이 만들었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써먹어야 하기도 했었다. 일뽕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제로센 또한 그렇게 이미 미국에서 생산중이던 전투기의 디자인과 설계를 응용해서 자기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성과라면 성과겠지만 그래서 시발자동차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폐허 속에서 한국인들 역시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그래봐야 이미 있는 부품들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미 있는 중고엔진과 부품들을 조립해서 굴러가게만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다. 거기서 시작하는 거라니까. 그리고 지금도 많은 자동차들이 해외의 검증된 부품들을 사들여 와서 자기네 공장에서 조립한 뒤 완제품을 만들어낸다. 일본이 처음 자체적으로 엔진을 설계까지 해서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 언제라 생각하는가. 그런데 바로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일제강점기 식민지조선에는 없었다. 대학도 없었고, 당연히 이공대생들도 없었고, 그를 현실에서 시도하고 이루어낼 수 있을 만한 자본도 기업도 없었다. 누구에 의해서? 그러니 식민지근대화론따위에 솔깃해하는 2030 남성이니 2찍 진보니 하는 것들에 혐오와 환멸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2030 남성들은 일관되기라도 하지 2찍 진보 새끼들은 미제국주의에 의해 제 3세계 국가들에서 자원약탈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그리 비분강개하면서 대일본제국님들께서 식민지조선에 베풀어준 경제발전의 은혜에 대해서는 찬양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하긴 2찍 진보도 따지고 보면 그 주류가 경성제국대학일 테니까. 그런데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들은 소달구지나 끌고 다녔다면 이를 어찌 이해해주어야 하는가?

 

제국주의열강의 식민지지배가 가져온 최대 폐해일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제국주의 열강의 후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지배는 해당 당사국과 민족들이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를 차단해 버렸다. 그들 스스로가 노력과 도전으로 이루어낼 수 있었을 지 모르는 수많은 선택지들을 지워 버렸다. 식민지조선에서도 일본제국주의는 가장 먼저 수많은 기존의 학교들부터 통폐합하고 있었다. 아직 존재하던 서당들 역시 거의 대부분 문닫게 만들고 말았다. 그나마 서구 열강들도 인정하는 가장 관대한 형태의 지배를 했던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나마 일본이 다른 서구의 열강들에 비해서는 식민지에 대해 관대한 편이기는 했었다. 괜히 아직까지도 대만에서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을 향수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일본을 찬양하면서 그 지배를 받아야 했던 조선인들을 모욕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래서 더 신기한 것이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일본과 한국의 격차가 가장 극심했던 것은 1970년대, 그러니까 1990년대까지도 일본은 대부분 한국인들에게 아직 동경의 대상이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양국의 격차가 이렇게 좁혀진 지금에 일빠들이 저리 늘어나고 있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독립운동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정부를 오히려 지지하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물론 일뽕들이야 예전부터도 있어 왔었다. 레파토리도 사실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요즘 일뽕들은 앞에 반드시 스윗을 붙인다. 이전의 일뽕들조차도 우습게 여기는 그들의 자신감이기도 할 터다. 역시나 야동이 그들을 그리 만든 것인지. 저들의 주된 주장 중 하나가 포르노의 허용이고 보면 크게 잘못된 판단은 아닌 듯하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연구할 가치가 있겠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지만. 

2030남성과 6070이 연대한 이유를 알았으니 반페미인 2030과 페미가 주력인 2찍 진보가 어떻게 연대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면 되겠다. 그러고보면 신기했다. 박원순 죽었을 때 그리 페미라면 못잡아먹어 안달이던 2030 남성들이 정의당에 호감을 보이는 것이. 그리고 혐오장사로 먹고사는 가세연의 주장을 고스란히 정의당 페미들이 받아서 읊기도 했었다. 2022년 대선의 전초전이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을까?

 

일단 2030 남성과 2찍 진보들의 세계관 자체가 같다. 대한민국은 완성되어 있다. 언론도 검찰도 법원도 모두 완전무결하다. 어떤 오류도 없으며 어떤 허점도 모순도 없다. 그래서 언론이 보도하면 사실이고, 검찰이 수사하면 신실이 되며, 법원이 판결하면 진리 그 자체가 된다. 하물며 그 주체가 서울대라면야 더욱. 다만 그렇기 때문에 2030 남성들과 2찍 진보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으니 바로 민주당이다. 

 

2030 남성들은 민주당이 조금 더 중도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면 바라고, 2찍 진보들은 민주당이 조금 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그들이 똑같이 바라보는 대안이 금태섭, 김해영, 박용진, 조응천, 이원욱, 이낙연들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야 말로 가장 중도적이고 합리적이면서, 또한 도덕적으로도 가장 순결하고 완전무결하다. 그들로 민주당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오롯이 정의로운 언론과 검찰, 법원의 힘을 빌어 이들을 심판해야만 한다.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같은 대상에서 대안과 희망을 찾는다는 점이 오묘하다면 오묘한 점이랄까?

 

어쨌든간에 그런 점에서 2030 남성들과 2찍 진보들에게 있어 공통된 공공의 적은 문재인과 이재명이어야 한다. 문재인과 이재명부터 잡아죽이자는 점에서 이들의 이해는 처음 일치한다. 문재인과 이재명을 잡아죽이고, 그에 물든 민주당내 불순세력을 언론과 검찰과 법원의 힘을 빌어 청소해야 한다는 부분도 같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이 남는가? 그러고보면 2찍 진보들도 이준석을 그리 빨아댔다는 것이다. 이준석이야 말로 청년정치의 미래다. 이준석이 없는 민주당에게는 미래가 없다. 이준석과 이낙연이 어째서 합당까지 했었는가 새삼 납득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렇게 통했던 것일까?

 

즉 민주당이야 말로 페미와 반페미의 공공의 적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익히 아는 바다. 민주당만 잘하면 대한민국은 무조건 잘된다. 민주당이 못해서 대한민국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당만 빼고 찍으라는 칼럼도 나오는 것이다. 이명박 때는 민주당 찍느니 기권하라는 기사까지 자칭 진보매체에 올라오기도 했었다. 그래서 저들은 연대할 수 있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민주당만 아니면 된다. 다시 말해 민주당만 바로 서면 된다. 그래서 죽인다. 너무 투명하다.

최저임금이나 노조에 대한 태도, 그리고 건강보험 등에서 볼 수 있 듯 분명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노동자의 입장을 더 고려해 주는 편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노동자들은 그런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지지한 것인가?

 

한국인들에게 미국 공화당보다 민주당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더 좋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일단 첫째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전쟁이 많이 일어났다. 물론 거의 명분도 있고 이유도 있는 전쟁들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미국 공화당에게는 전쟁을 좋아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더해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역에 있어 한국정부를 비교적 덜 압박한다. 한 마디로 자기들 물건 더 사라고 괜히 지랄하는 경우가 그나마 조금은 덜하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미국 공화당에 비해 민주당이 자유무역에 대해 조금 더 우호적이란 뜻이다. 정확히 세계화에 적극적이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를 하나의 경제단위로 설정하는 것이다. 더 싼 곳에서 상품을 사서 더 비싸게 사는 곳에 파는 것처럼 생산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에서 생산을 하고, 그것을 더 비싸게 사 줄 수 있는 곳에서 판다. 물론 그래서 좋아진 점도 있다. 이를테면 내가 어릴 적 땅콩샌드에는 땅콩잼이 그야말로 한 줌 겨우 들어가 있었다. 붕어빵에도 팥소가 진짜 쥐똥만큼 들어가 있었다. 붕어빵을 어디부터 먹는가는 팥소가 어디에 몰려 있는가와 관계가 있는 논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보라. 중국에서 수입해 와서 땅콩도 싸지고 팥도 싸졌다. 옷도 봄가을 옷이면 그냥 한 해 잠깐 입는다고 거의 일회용 가깝게 싼 것 사서 입고 버려도 될 정도로 어마무지하게 싸졌다. 전자제품들은 또 어떨까? 덕분에 노동자들도 임금이 크게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도 전보다 더 나은 수준의 소비가 가능해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트북은 진짜 돈 있는 놈들이나 쓰던 거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때보다 거의 반값도 안되게 싸졌다. 기술발전도 있지만 그만큼 생산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면 이전까지 그 제품을 생산하던 사람들은 어찌되는가 하는 것이다.

 

2020년 코로나로 한창 시끄럽던 무렵 마스크가 충분치 않아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동안 단가가 안 맞는다고 죄다 수입해 쓰다 보니 정작 국내에 마스크 생산시설이 충분치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전에도 마스크는 만들었을 텐데 인건비에서 비교가 안 되니 그냥 중국에서 싸게 사서 쓰는 것을 선택한다. 내가 값싸게 입는 트레이닝 바지도 원래는 우리나라에서 싸게 생산해서 파는 공장들이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단가에서 경쟁이 되지 않으니 어차피 팔리지 않을 것 더이상 만들지 않게 된다. 아예 공장문을 닫기도 한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 공장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중국산 상품들을 싸게 살 수 있게 된 건 좋은데 정작 노동자 자신이 그 상품들을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미국 역시 다르지 않다.

 

애플이 그렇게 돈을 많이 번다. 그래서 애플의 주력상품들은 지금 어디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는가? 엔비디아 주가가 그렇게 올랐다는데 그 엔비디아의 제품들은 어느 나라의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가? 미국 경제가 좋아진다 하는데 기업들의 실적이 좋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실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기는 한 것인가? 일자리가 늘어나면 급여나 처우는 과연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괜찮아질 것인가? 그래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해외에 있던 자국 기업 공장들을 다시 다 미국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리할 정도로 강제했던 것이었다. 그 무렵 TV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지금도 기억한다. 미국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조금 비싸더라도 미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소비하고자 하는 미국 시민들의 움직임이었다. 안 그러면 미국 시민들 자신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그것이 보편타당하게 옳다는 이유로 세계화를 추구하는 정당을 노동자들은 어떻게 여길 것인가?

 

물론 공화당이라고 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그래서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었다.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기는 했지만 트럼프라는 인물 자체가 원래 공화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기존 공화당 정치인들과 충돌도 많이 했고 갈등도 많이 빚었었다. 그런 만큼 기존의 정치권의 문법과 크게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 트럼프가 외친 첫 일성이 바로 아메리칸 퍼스트! 미국을 최우선으로 여기겠다. 미국의 이익만을 먼저 생각하겠다. 그래서 기존의 공화당 정치인들과 달리 미국이 그동안 치르던 전쟁들도 빠르게 종식시키고 있었다. 굳이 미국에 직접 이익도 되지 않는 전쟁들에 더 이상 미국의 돈과 미국 젊은이들의 아까운 생명을 희생하지 않겠다.그리고 도저히 트럼프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바이든으로 돌아서고 난 뒤 다시 그런 트럼프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차라리 나쁘지 않다.

 

해리스가 불법이민자들을 받아들인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마저도 제대로 못해냈을 정도로 해리스가 원래 무능했다. 그런데 자기가 무능하면 일선의 담당자라도 유능하면 되잖은가? 그러면 두 번째 불법이민자들도 결국 히스패닉이니 민주당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불법이민이면 시민권도 없는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 결국은 뭐냐면 불법이민자들의 역할이다. 한국사회에서 불법체류자들이 가지는 역할이기도 하다.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이다. 법망을 벗어나서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에도 일을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임금에 대한 부담을 낮춰주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임금의 하방을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들인데 불법체류자들이 있기에 오히려 최저임금보다 더 적게 줘가며 부리는 농어촌과 물류센터의 일용직이 그것이다. 필리핀인 가정부를 두고 공정한 좋은 정책이라고 좋아하는 놈들이 있던데 조선족 출신 가사도우미들이 어째서 한국사회에서 질시의 대상이 되었는가 떠올려 보라. 특히 그런 사람들과 같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입장이 되면 열불 터지는 것이다. 한 달에 못해도 몇 십만 원은 더 받을 수 있는데 저 사람들로 인해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사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삼성도 스마트폰은 거의 베트남 공장에서 만들어서 세계시장에 내다판다. 현대자동차도 국내공장에서는 더이상 신규채용이 없다시피한 지가 꽤 되었다. 역시나 2030 남성들이 일자리 없다고 지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은데 세계화랍시고 여기저기다 지사를 내고 공장도 짓고 하느라 정작 국내에서 더이상 채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소기업에 취업한 젊은이들을 위해 정부에서 지원하는 것을 두고 대기업 일자리를 더 만들어야지 중소기업에 일하라고 그런다고 반발하던 게 그놈들이다. 그것들 정권 바뀌고 다 없애니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좋아하던 놈들이다. 아무튼 인건비도 더 싼 곳에 지사도 내고 공장도 짓고 하다 보니 기업들의 실적은 좋아지는데 정작 국내의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만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이런 상황을 그저 중국산 싼 물건들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좋아졌다 해야 하는 것인가.

 

2030 남성들이 현실이 이럼에도 굳이 트럼프의 승리를 반PC의 승리로 포장하고 싶은 진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누가 더 세계화에 적극적인가? 적극적이나마나 우리나라에서는 세계화는 그냥 필수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아예 정권차원에서 삼성이 미국에 공장을 짓도록 적극 등을 떠밀고 있기도 했던 것이었다. 국내에 더 공장을 지어야 하는데 해외에 공장을 짓도록 하고 있었다. 더구나 지난 정부에서 그나마 국내 소부장산업을 성장시켜보겠다고 정부에서 지원하던 것들마저 모조리 철회하고 폐기한 상황이다. 물론 2030 남성들은 환호한다. 어차피 더 좋고 더 싼 물건이 있는데 국내에서 다 생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본에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그런 물건들을 사서 쓰는 것이 옳다. 이해가 되는가? 일본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그들은 세계화를 비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PC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설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무튼 결국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의 권익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는데 그놈의 노조라는 걸 만들 수 있는 직장부터가 당장 노동자인 미국 시민들은 아쉽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고 높은 임금을 보장받더라도 불법이민자들의 존재가 자신들의 위치와 임금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민주당의 세계화가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트럼프의 극단적인 자국우선주의가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에 노동자를 위한다면서도 세계화로 인한 자본의 이익에 더 우선한 결과가 지난 대선이었던 것이다. 자기당을 지지하고 있는 흑인과 무엇보다 히스패닉 유권자들에게 불리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이 최저임금을 올린 만큼 더 저렴한 노동력을 위해 국경을 열어 놓는다. 지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서 트럼프는 그렇게 한국 반PC 2030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반PC적인 인물인가? 미국 기준으로는 그럴 지 모른다. 정확히 미국 기준으로도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다. 미국에서 반PC란 남부의 근본주의 개신교의 논리를 그 기준으로 삼는다. 대부분 PC라는 자체가 아직 미국사회에서 지배적인 주류개신교의 논리와 주로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주류사회에서 그같은 근본주의적인 논리는 비주류로 밀려난지 아주 오래인 터다. 하지만 트럼프는 반PC의 상징적인 인물이어야 한다. 애잔할 정도다. 그래서 오바마가 PC의 투사가 되어 가고 있다. 만악의 원인이 되어 간다. 우습다.

나이가 아직 어렸었다는 참작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단종이 결국 자신의 왕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재위시에는 김종서와 황보인, 민신 같은 세종 때부터 국정에 참여해 온 대신들이, 왕위를 잃고 난 뒤에는 성삼문과 박팽년, 유응부, 그리고 종친인 금성대군등이 왕을 지키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찬탈자인 수양대군에 의해 그 일족들까지 멸족당하고 말았다. 아니 이들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의 찬탈에 반발한 이징옥의 함경도군이나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상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간 백성들까지 포함하면 죽어간 숫자가 물경 천 단위를 넘어간다. 왕이 왕위를 지킨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고려에서도 결국 공민왕이 자신의 안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아들인 우왕이 불안하게 왕위에 올랐고 결국 손자인 창왕까지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우왕이 자신의 왕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결과 죽어나간 이들 역시 장인이던 최영부터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당연하게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난 뒤 왕조교체의 과정에서 죽어나간 이들 역시 넘쳐날 정도였었다.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는 또 어땠을까? 그가 잠시 마음을 놓음으로 해서 아들인 방번과 방석, 사위인 이제, 친구와도 같았던 공신 정도전과 남은 등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었는가? 광해군이 방심한 탓에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정인홍은 전례를 깨고 칠순의 나이로 사약을 받아야 했었다. 

 

일본 에도시대에도 번주가 자신의 지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가이에키라 하여 영지를 몰수당하는 형벌이 내려지는데, 그냥 단순히 번주 혼자 지위를 잃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다스리던 번 전체가 보호자를 잃은 채 약탈에 내몰리는 결과로까지 이어질 때가 많았다. 즉 번주가 행실을 잘못해서 쇼군에게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가신들은 실업자가 되고 백성들은 약탈의 희생양이 되는 등 그 피해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메이지유신 당시에도 그래서 막부의 편에서 유신파와 맞섰던 아이즈번 역시 번주의 선택에 의해 가혹한 보복을 당해야만 했었으니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내리는 한 순간의 판단과 선택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은 무엇보다 자신의 왕위부터 지켜야 한다. 아무리 현명하고 자비로운 왕이 새로 들어선다 할지라도 왕위가 바뀌는 순간 이전의 왕을 따르던 이들은 새로운 왕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다. 너무너무 운도 좋게 이전의 왕을 따르던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전처럼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역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이의 판단에 달린 만큼 이미 이전의 왕의 손을 떠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왕이란 이미 왕으로서 존재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한 몸에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그래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운명을 다른 군주에게 맡긴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를테면 모두가 바라는 가정인 선조가 이순신에게 왕위를 넘겼을 경우에도 과연 모든 선조의 신하들이 새로운 왕인 이순신을 반겼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전히 선조의 충신이고자 하는 신하와 백성들에 대해 이순신은 온전히 자비와 관용만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혹시라도 선조의 복위를 위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이들에 대해서마저 무작정 자비와 관용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선조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이순신을 죽이는 것이 옳았을 수 있다. 부조리해 보이지만 그것이 곧 왕이 된 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왕위와 왕으로서의 권위까지 모두 지켜낸 결과 선조는 자신의 치세 동안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수복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다른 낭비 없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어느 영화에서와 달리 임진왜란 이후 전후복구는 이미 선조 재위 동안 상당부분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잡혀갔던 백성들을 다시 돌려받기 위한 노력 또한 바로 선조 재위 기간 동안 실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괜히 요순의 전례를 따르겠다고 섣부르게 왕위를 넘기기라도 했다면 그것 안정시킨다고 더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을 것이다.

 

어째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결국 장강이라는 천혜의 방벽을 두고서도 오히려 수군에 의해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손호보다도 유선에 대한 평가가 더 낮은 것인가.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렸던 조예나 사마염보다도, 무고한 옥사를 수도 없이 일으켰던 조비나, 권신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조환이나 조모와 같은 허수아비 황제들보다도 유선에 대한 평가가 더 처참한 것인가. 심지어 중국에서는 무려 천 년 넘게 유선의 아명인 아두를 바보를 뜻하는 욕으로 쓰고 잇었을 정도였다 한다. 단지 아버지가 유비라서? 제갈량을 신하로 두었어서? 강유의 최후가 너무 비장해서? 그러니까 어째서 사람들은 선조가 차라리 한양에서 백성들과 싸우다 죽었기를 바라는 것인가? 왕이기 때문이다. 황제이기 때문이다. 황제로서 자신의 나라와 신하와 백성들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유선이 항복할 당시 촉한에 전혀 남은 희망이 아주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검각에는 강유가 있었고, 영안에는 한때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나헌과 염우가 적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실제 촉한이 항복하고 조위가 내역을 살폈을 때 촉한에 남아 있던 병사의 수가 무려 10만이 넘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더이상의 보급도 불가능한 등애군을 상대로 성도에서 농성하면서 보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한 편 각지에서 구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산길을 넘어왔는데 공성병기까지 챙겼을리는 없으니 도성을 지키면서 버티다 보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조위가 촉한을 공격하는 것을 알고 마침 손오에서도 구원군을 보내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그때 구원한다고 보낸 군사들이 유선이 항복한 것을 알고 남은 영토라도 차지하겠다고 밀고 들어왔다가 나헌에게 털리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도저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티고 또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나같은 경우 당시 유선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편이기는 한데, 솔직히 아무리 황제 자리가 좋아도 황제노릇만 40년 넘게 하다 보면 질릴 때도 되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황제노릇을 시작했으니, 고작 익주 하나 차지하고 있을 뿐인 조그만 나라에서 어디 멀리 놀러가지도 못하고 황궁에만 쳐박혀 있는 세월이 지겹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예나 사마염처럼 사치라도 제대로 부려 봤었는가? 후궁이라도 많이 들여서 여자랑 노는 재미라도 누려 봤었겠는가? 손호처럼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사람을 죽여 본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환관을 하나 발견해서 그를 총애하며 이것저것 하자는대로 들어준 정도가 고작이었었다. 자기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었고, 황제가 되기 위해 피똥싸며 다른 형제들과 계승권을 두고 다투거나 한 적 없이 그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적이 쳐들어와서 다시 버티며 싸우려 하니 그게 또 귀찮기도 했었을 것이다. 그때 유선 나이 정도면 그럴 때도 되었다. 문제는 그같은 유선의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이다.

 

당장 아버지와 형제와도 같았던 관우의 후손들이 점령군으로 들어온 방회에 의해 아버지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씨몰살당하고 있었다. 강유가 유선의 복위를 위해 종회를 꼬드겨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분노한 조위군에 의해 많은 공신의 후손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며 약탈당하고 고통받았을 백성들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그렇게 되도록 황제로서 자신의 책임을 무책임하게 놓아 버린 것이 아니던가 말이다. 나라와 신하와 백성들을 지켜야 할 황제가 다른 이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항복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인 것이다. 더욱 유비와 제갈량을 잊지 못하고 이후로도 오랜동안 망해버린 나라를 추억했을 촉한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러니까 문재인이 정권연장에 실패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았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을 테지만, 주어진 여건이 그러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윤석열의 난동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결과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었다. 노무현도 다르지 않았다. 좋은 사람으로 정권을 내주기보다 차라리 더럽고 추악하고 악랄한 권력욕의 화신으로써 주어진 권한 안에서 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정권을 지켜내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달리 권력의지라 부른다. 정치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다른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남들보다 강한 동기와 의지일 것이다. 그것은 같은 목적과 동기를 공유하는 정치적 동지들을 위한 가장 강하고 순수한 선의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왕이 왕위를 지키는데만 골몰한다. 왕이 오로지 자신의 권위만을 탐욕스럽게 지키려 한다. 그래서 역사상 그나마 왕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돌아왔는가 보라는 것이다. 왕조가 교체될 때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유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나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종도로 피바람이 불었었다. 괜히 왕은 무치라고 후궁도 여럿 두어가며 2세 생산에 열을 올렸던 것이 아니다. 왕이 후손을 제대로 남기지 못해도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받을 수 있다. 아니 후손 이전에 자기가 건강해서 오래 살아야 많은 이들이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종이 10년만 더 살았으면 굳이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이들을 더 많이 살릴 수 있었다. 괜히 대통령 경호한다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대통령의 안위를 위해 쓰는 비용은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를 위한 필요비용이다.

 

그래서 유선이 무능한 것이다. 멍청한 것이고. 한심한 것이고. 당시에도 이후로도 그보다 더 무능한 황제는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보다 더 자격없는 왕이나 황제들은 드물었었다.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왕으로서 자신을 지키려 했던 그들이야 말로 유선보다도 더 왕같은 왕이었을 테니. 그래서 병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아두란 바보병신을 가리키는 다른 말로 쓰인 것이었고. 능력이 없어 무능한 것보다 더 심하다. 그래도 그룹총수라면서 그룹의 가장 중요한 기업이 어찌되는지도 신경쓰지 않는 어느 이씨네 재모시기란 분처럼. 교훈이다. 유선은 그래서 병신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국 사실로 밝혀지는 모양이네. 아무리 그래도 당대표씩이나 되어서 가족들 명의까지 동원해서 댓글작업을 했을까? 솔직히 그렇잖은가? 대부분 당원게시판들이 당비를 납부한 당원들에게만 공개되어 있는데, 그렇다는 것은 결국 게시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단 또한 확보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당원게시판에서 단지 보이는 이름이 가려져 있다고 저 하고 싶은대로 떠들고 다닌다? 그것도 아는 이도 하나 없는 장삼이사 갑남을녀 필부필부도 아닌 당대표나 되는 인사가?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 보면 서울대 나오고도 정작 세상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경우가 또 의외로 많다. 하긴 정작 군대까지 갔다와 놓고도 청원휴가 갔다가 일신상의 이유로 휴가를 연장한 것을 무슨 대단한 비리 쯤으로 여기는 2030 남성들이 그리 많았지 않았던가. 내가 군대에 있었던 90년대에도 이미 휴가 가기 전에 중대장들이 그리 신신당부하고는 했었다. 휴가 가서 뭐 중대하고 급한 일이 있으면 부대에 전화부터 해라. 휴가를 연장해주든 뭐든 자기가 다 조치해 줄 테니. 그러니 탈영만 하지 마라. 그게 90년대였다니까? 그런데도 최근에 군대 갔다온 놈들이 오히려 모르더라. 진짜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척했던 것인지. 

 

아무튼 서울대 나와서 사법고시까지 합격하고 검사로서도 잘나갔으면 사소한 일상의 일들따위 크게 신경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주위에 다 대신해 주었을 테니 몰라도 되는 일들따위 모른 채 지내도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볼 대는 상식이었을 텐데도 정작 자신은 그런 것들을 전혀 몰랐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 정작 군대까지 갔다 왔으면서 휴가 중 전화로 휴가연장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2030 남성들처럼. 병장회의에서 결정하면 장교들도 따라야 한다 진지하게 믿는 2030 남성들이 실제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지지하는 것일까? 흠...

 

어쨌거나 설마 싶어서 어찌 돌아가는가 지켜보고만 있었더니 대충 결론이 그리 나오는 모양이다. 이재명만 잡으면 된다 그랬다가 오히려 자기가 잡힐 상황인 셈. 그러는 와중에도 철저히 그 사실을 가려주고 있는 언론의 분발이나 애써 그런 사실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는 2030 남성들의 노력이 눈물겹기까지 하다. 사실을 인지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재명 유죄는 그리 열심히 떠드는데 이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더라. 이런 게 진정성이겠지. 진실성이 느껴진다. 감탄한다.

어릴 적 TV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가난해서 못살겠다는데 뭐 이리 다들 잘사는가? 당장 가장 쥐꼬리 월급에 엄마는 어떻게 사느냐 하소연을 하는데 그럼에도 너무 잘 산다.

 

만화책만 봐도 그랬다. 어지간하면 가난하다는 집에 애들 방이 따로 있었다. 심지어 딸과 아들이 따로 방을 쓰고 있었다. 집에 마당도 있었다. 아,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도 마당이 있기는 했다. 대신 세들어 사는 여러집이 함께 쓰는 공용마당이었다. 수도도 공동, 화장실도 공동, 한참 나가야 나오는 큰 길이나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던 시절인데. 80년대 이야기다.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자유부인을 보고 북한에서 체제선전에 이용했다더라. 남한의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가지고 북한에서 남한은 이렇다더라도 체제선동에 써먹는다더라. 북한에 이용될 정도로 한국의 현실을 열악하게 그리는 것은 빨갱이다. 실제 그래서 잡혀간 사람도 있다. 너 북한 좋으라고 이적행위 하는 것 아니냐면서.

 

그래서 1980년대까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마당은 있어야 했고, 담장도 미국처럼 나무울타리 정도는 둘러야 했었다. 가족들끼리 각방은 기본이다. 혹시라도 남매나 혹은 부모자식이 같은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손잡고 잔다? 바로 안기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서 이전 드라마들 보면 집이 가난하다는데 대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죄다 방도 여럿에 마당까지 딸린 한옥에서 사는 것이 일단 기본이다시피 했었다. 진짜 단칸방에서 겨우 죽지 못해 사는 가난한 집구석? 가능할 리 있겠는가?

 

그것은 1990년대가 되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다. 만화가 원작인 일곱개의 숟가락 보면서도 기함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니 부모 없다면서? 그래서 달동네에서 어렵게 산다면서? 그런데 일곱 식구가 저런 넓은 집에서 산다고? 참고로 지금 11평에 방 두 개짜리 집을 혼자 쓰고 있는데 옆집 아줌마가 와서 그러더라. 이런데 혼자 쓰시냐고? 난 좁은 데서는 못산다. 세상 다시 없어도 일단 방은 넓어야 스트레스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다. 아무튼 지금도 현실이 그러한데 부모도 없이 끼니까지 걱정해야 한다는 집구석이 저게 뭔가?

 

그렇게 관성이 정해진 것이었다.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가 서울 달동네의 풍경을 잘 묘사했다고 하지만 그것도 역시 허구가 많이 섞여 있다. 아, 있다. 내가 그동안 보았던 드라마 가운데 가장 가난을 잘 묘사한 캐릭터가.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네다. 당시 괜히 순돌네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린 것 같은 가난한 집구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거든. 제대로 된 변변한 옷장도 없어서 비키니 옷장을 겨우 쓰다가 그것을 혼자 사는 할머니한테 줬더니만 그냥 쓰레기라며 고물상에 내다 팔아 버린다. 그런데 그마저도 당시 박원숙은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었다. 내가 고행석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만화가 가운데 그 정도로 가난을 제대로 묘사하는 만화가가 또 드물었었다. 페이소스가 뭔지 제대로 아는 만화가였었다.

 

그렇게 출발부터 가난과 유리되어 시작된 것이 한국 대중문화의 컨텐츠였는데 심지어 이것이 IMF이후로 PPL이라는 함정까지 만나고 말았다. 설정에서는 분명 가난하고 못산다고 나오는데 전혀 아무런 설득력도 가지지 못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지는 원인이 된 것이다. 저 정도면 충분히 잘사는 거 아냐? 아니 저 정도 살면서 뭐가 그리 불만인 건데? 하긴 자기 방도 있는 아들네미가 PC방에서 시간을 죽이면서 불공정한 세상에 분노를 표하는 이른바 웹소설들이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니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 역시 가난에 대한 허들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당장 일본드라마나 만화를 봐도 말 그대로 단칸 아파트는 거의 디폴트로 등장하고 있다. 젊은 신혼부부라면 방 하나에 욕실 하나 주방 하나인 좁은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하는 것이 무척 당연하고, 막 성인이 되어 혼자서 독립하게 되었으면 그런 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역시 일상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일본에서도 서민들이 사는 단열이나 제대로 될까 싶은 아파트의 구조가 일본 드라마나 만화를 즐겨보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익숙하기도 하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들이 싸게 들어가 사는 오래된 단독주택 반지하방은 한국 대중들에게 그만큼 익숙하기는 한가. 겨우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해봐야 사람이 살 곳이 못되는 그런 공간으로나 묘사되기 일쑤다.

 

특히 젊은 남성들이 상대적 박탈감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다들 저런 정도는 기본으로 사는데 나는 왜 저러지 못하는가? 아니라니까! 아직도 서울 구석구석 찾아보면 진짜 옛날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았었을 그런 방들이 쌔고 쌔였어요. 물론 그럼에도 그런 방들조차 서울이다보니 비싸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일 것이다. 누구는 가난하다면서 저러고 사는데, 누구는 당장 못살겠다면서 저렇게까지 하고 살아가는데, 그런데 나는 지금 사는 꼬라지가 이게 뭔가? 그래서 앞으로 과연 희망이라는 것이 있을 것인가? 현실이 저렴하면 도덕관도 저렴해진다. 항산이 항심을 낳는다는 말은 비단 맹자 개인의 주관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결혼을 했으면 일단 아파트는 한 채 장만할 수 있어야 한다. 애를 낳았으면 학원도 몇 개는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방 몇 칸 짜리 월세방에서 좋은 사람 만나서 아이도 낳고 잘 사는 젊은 세대들도 아직 채이도록 많다. 같이 일하던 직원 가운데 하나도 아내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혼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고 더 돈 많이 주는 힘든 일을 찾아서 그만두고 나갔던 적이 있었다. 그냥 듣기에도 더럽게 힘들어 보이던데 당장 부양해야 할 아내가 있고 이제 곧 아이까지 태어날 테니까 그냥 서슴없이 그리고 방향을 틀더라. 이래서 또 남자인 것인가 새삼 감탄했더랬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일단 조건부터 따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결혼해서 남들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인가. 박정희 때 이미 체제선전을 위해 올려치기한 가난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은 대한민국에 속한 현실이 아니다.

 

아직도 돈이 없어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방세 낼 돈도 없어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도 넘쳐나고, 난방할 돈이 없어서 한겨울에 얼어죽거나 혹은 추위를 이기지 못해 건강이 악화되어 죽어가기도 한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언론보도에도,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심지어 그 넘쳐난다는 유튜브에서도 그런 현실 같은 건 다루지 않는다. 한 가정을 미화원해서 겨우 최저임금이나 받는 어머니 혼자서 꾸려가야 한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냥 피상적으로만 다룰 뿐 그 의미까지 깊이 파고드는 경우란 없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을 낮추고 일하는 시간을 늘려야 공정하다는 개소리가 당연하게 쏟아져나오고는 하는 것이다. 나 혼자 먹고 살려 해도 최저임금만으로는 고개가 저어지는데 하물며 가족까지 부양해야 한다면야. 그런데 그런 일자리가 어디 한둘인가.

 

말하자면 만들어진 분노라는 것이다. 원래는 북한 보라고 국민들더러는 괜히 엉뚱한 생각 말라고 시작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 사회에 또다른 분노를 낳고 말았다. 어찌보면 성공했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방향을 잃은 분노가 결국 증오와 혐오를 낳고 그를 위해 권위주의적인 보수의 자유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아니었으면 2030 남성들이 이렇게까지 보수화될 수 있었을까. 박정희의 심모원려라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2030 남성들이 박정희를 빨아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또한 2030 남성들의 보수성향을 가지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원래 20대 때는 항상 내면에 분노가 들끓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질풍노도 아니던가. 그 방향성의 문제다. 보수가 그림을 아주 잘 짰다. 이준석의 등장은 적절했고. 그래서 답은? 다 자란 성인들에게 뭘 어쩌겠다고? 가르치겠어? 설득하겠어? 그냥 그러고 사는 것이지. 그래서 성인이란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다른 의미는 없다. 

오래전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공산주의자 사냥 때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다. 14살짜리 공산주의자의 딸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한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다 보니 그런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는 수준의 추억담이었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잘 없지만 불과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때 공산주의자 포로를 집단으로 강간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어르신들이 적지 않았었다. 바세린의 용도를 그때 그분들께 처음으로 들어 알았었다. 물론 들어서 알았다는 것 뿐이지 내가 직접 쓸 일 따위 앞으로도 전혀 없을 의미없는 지식이었다. 그런 정도를 넘어서서 포로의 신체부위를 어떻게 했느니 그리고 시신을 어떻게 멋지게 전시했느니 무슨 하드코어 스너프가 따로 없는 무용담을 진짜 술도 안 취한채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는 했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도 TV에서 광주사태라고 한창 뉴스가 나오고 있었을 때 아는 동네 형노마가 분노에 차서 모두가 들으라고 그리 말하는 것도 들었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광주놈들 모두 죽여 버릴 거라고. 여자는 강간하고 남자는 죄다 칼로 찔러 죽여 버릴 거라고. 빨갱이 새끼들이니까. 내가 좀 험한 동네에서 자랐다. 반공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은 도대체 뭔 정신으로 자기 나라 국민들을 그리 무참히 학살했던 것일까?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부터 이제 갓 결혼한 새색시까지, 심지어 그 새색시를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하는 일들마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4.3당시 제주도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한 학살과 강간이 집단으로 저질러지고 있었다. 아마 6.25전쟁 당시 주로 공산주의자의 가족을 대상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랬던 것처럼 위안소를 운영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다. 일본군위안부도 사실 여성주의자들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묻었었다. '여명의 눈동자'가 처음 쓰여진 것이 1970년대였다. 하지만 정작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1980년대 피해자 자신이 사실을 세상에 공표하기까지 전혀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었다. 하물며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이 운영했던 위안소는 지금도 그냥 없었던 일이다. 바로 그 위안소가 전쟁이 끝나고 이어진 것이 이른바 기지촌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면서 외화나 벌어오라는 것으로 그래서 기지촌은 그냥 공창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들이 전혀 이후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공산주의자의 가족이었으니까.

 

이후로도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하다못해 만화방에서 대충 빌려다 시간때우기로 읽는 무협지까지 얼마나 공산주의가 묻어있는가를 따져서 일일이 당사자들을 처벌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영 작가로서는 소질이 없는 것 같은, 심지어 번역가로서도 그다지 대단한 인물은 아닐 것 같은 사람이 덕분에 민주화 이후 영웅취급을 받았었다. 무협지에서 주인공이 하는 대사 중 일부가 공산주의의 유물론을 닮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사실 그런 식이면 당시 무협소설 가운데 군사독재를 빗대서 비꼬거나 비판하는 내용이 또 적지 않았었다. 아예 군사독재에 항거하다가 죽어가는 운동권 인사들을 빗댄 듯한 무협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집권을 무협으로 풀어낸 '대도무문'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대도무문'의 작가가 김영하라는 사실을 알고 좀 놀랐었다. 아무튼 한 마디로 그냥 재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는 대학생의 신분으로 꽤나 고초를 겪어야 했다는 것이고.

 

김추자는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다가 춤동작 하나가 북한과 접선하는 것 같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아 뭐 이런 씨발이라 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게 가능햇었다. 북한과 관계있다니까 살인범은 영웅이 되고 피해자는 간첩이 되는 어이없는 일들까지 그때는 일어나고 있었다. 공산당에 반대했으면 영웅이고 공산당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으면 빨갱이다. 사회 전체가 그것을 감시하고 검열하다시피 했었다. 어디의 어떤 문장은 공산주의의 유물론과 닮아 있고, 어디의 어떤 단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것과 닮았고. 그렇게 어떻게든 공산주의를 찾아내서 처벌하는 것이 지금껏 반공주의가 존속해 온 근간이었던 것이다. 어디가 얼마나 공산주의와 닮았고 어디서 어디까지 공산주의와 닿아 있는가. 그래서 저 새끼는 빨갱이라 하면 빨갱이가 되는 것이고, 저 새끼는 간첩이라 하면 간첩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문재인은 친중이라 하니까 모든 말과 행동들이 친중이 되고, 문재인은 친북이라 하니까 국가원수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행위들마저 친북에 간첩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고보니 닮았지?

 

눈에 불을 켠다. 얼마나 PC와 닿아 있는가? 얼마나 PC가 묻어 있는가? 이것은 어디까지 페미와 닿아 있는가? 어디서 어디까지 페미가 묻어 있는가? 저 새끼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어느 부분에서 페미가 느껴지고 PC가 느껴지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서로 단결한다. 서로 단합한다. PC는 이게 안좋고, PC는 이게 문제고, 그러니까 여성들은 이런 것 같고, 그래서 여성들은 이게 문제이고, 그런데 그 다음이 없다. 그냥 저 새끼들 때려잡자. 저 연놈들 아예 발도 못 붙이게 하자. 그래서 선거를 앞두고 검찰권력 이용해서 한 정당의 정치인 수 십 명을 잡아가게 하겠다는 깜찍한 주장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정치보복도 상대가 페미가 묻은 인사들이면 정당하다. 그들을 배제하고 페미가 묻지 않은 인사들만으로 정당을 다시 만들도록 하는 것은 공공의 정의다. 2030 남성들이 반공세대인 6070들과 연대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세대를 뛰어넘어 너무 닮아 있다. 빨갱이는 때려잡아야 한다. 페미를 색출하고 PC를 응징하는 것이야 말로 정의다. 그래서 페미를 때려잡고 PC를 박멸하면 그 다음은? 페미를 때려잡고 PC를 박멸해야겠지, 영원히.

 

전부터 느껴오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면 뭘 어쩌자는 것인가? 공산주의자를 때려잡아야 한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로 이 나라를 이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켜나가겠다는 것인가? 공산주의자들을 악착같이 마지막까지 찾아내서 모두 박멸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사회적 논의에도 결국 끝에는 공산주의자가 남는다. 빨갱이만 남고 만다. 저 새끼는 빨갱이다. 저 논리는 공산주의의 그것이다. 저 주장은 공산주의자들의 그것과 닮았다. 그러니 빨갱이다. 마찬가지로 그래서 PC에 반대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환경운동에 반대하고, 차별하고 혐오할 자유와 권리를 얻어서 그것으로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인종에 따라 차별하고, 국가와 민족에 따라 차별하고, 재산에 따라 차별하고, 직업에 따라 차별하고, 성별에 따라 차별하고, 그렇게 차별하는 것이 본능이니 차별하고, 개인의 자유이고 권리이니 차별하고, 그래서 그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더 나은 세상이란 과연 무엇인가? 페미를 찾아내고, PC를 색출해서 정화하는 것? 그러니까 게임에 성소수자 나오는게 불쾌한 건 알겠는데 그래서 성소수자는 아예 게임에 넣지 말자고? 백인이 주인공이던 원작에 유색인종 나오는 게 기분나쁜 건 알겠는데 그러니까 원작대로 모든 영화와 드라마는 백인들로만 채우자고? 어차피 백인들의 역사고 백인들의 원작이니 그냥 보기 좋게 백인들만 등장시키자? 시대가 바뀌었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페미는 악이니까. PC는 반드시 박멸해야 할 악이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하긴 그러니까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모욕하고 하는 거겠지. 상관없는 타인의 사생활에 조롱을 내뱉기도 하고. 내가 그 새끼들 싫어하는 이유는 별 것 없다. 내가 메갈과 여시를 싫어하는 이유와 같다. 혐오는 혐오할 뿐이다. 증오는 증오할 뿐이다. 혐오와 증오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저 미워하고 싫어하며 서로를 배척하고 배제하고자만 하는 그것들이 얼마나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남길 수 있을까? 그리고 결국 그런 대가리들이 혐오와 증오만을 앞세우며 허위와 기만을 늘어놓는 정권을 뻔히 알면서도 출범시키고 말았다. 왜? 페미를 때려잡아야 하니까. 문재인과 이재명을 죽여야 하니까. 민주당 페미묻은 것들을 정치보복으로 감옥에 보내야 했으니까. 기득권 여성주의자들이 민주당을 반대한 이유도 같다. 감히 여성정치인인 박근혜를 탄핵해서 감옥에 보내 버렸다. 그런 것들이 윤석열 지지한 건 신기한 일이지만 서울대에 사법고시 합격했으면 그럴만하다. 그게 우리 사회에서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니까.

 

그래서 전혀 멀어 보이던 2030남성과 6070이 서로 연대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서로 그토록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심지어 박원순 전시장이 죽었을 때는 극성 반페미와 꼴페미가 서로 연대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세상에 반페미의 지지를 받는 정의당이라니. 가세연의 주장을 받아서 같이 주장하는 꼴페미라니. 어째서 그런 것들이 가능했는가? 내가 왜 2찍 진보들과 2030남성들과 극성꼴페미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판하는가. 그래서 그들은 민주당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말했듯 민주당은 원래 출발부터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정당이니. 그동안 민주당이 겪어 온 시간들부터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민주당에서 쳐내고 싶은 씨발것들이 적지 않은 건데.

 

아무튼 볼수록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역시 저 새끼들은 이준석 지지하고 윤석열 지지하고 한동훈 지지하던 그대로 앞으로도 계속 국민의힘이나 지지하는 게 옳다. 괜히 민주당에 표 주겠다고 지지자인 양 행세하는 것이 이제는 더 무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당시 똥파리들이 어떻게 민주당 안에서 분탕질을 쳤었는가 기억하고 있는 때문이다. 그래서 저런 놈들이 과연 이 대한민국에서 어떤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게 있기는 하겠는가. 자신들이 연대한 선배들처럼 끝까지 페미와 PC만 찾아 헤매다 끝나고 말겠지. 세상 모든 건 페미와 PC로 이루어졌다. 더 많은 페미와 더 적은 PC만으로. 답이 없다는 이유다. 미국 반PC도 이 정도까지는 아닐 텐데. 풍토평이다. 아주 지독한. 

진짜 투명하다. 너무 투명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어째 갑자기 문재인 책임론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했다. 검찰이 문재인 소환을 준비중에 있었구나.

 

요즘 내가 인터넷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냥 우연히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와 관련된 것이라면 더 그렇다. 누군가 인터넷에 어디 제품 좋다더라 나쁘더라 쓰더라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와 같다. 누군가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마냥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런데 공교로와도 너무 공교롭다. 왜 하필 지금?

 

그러니까 느닷없이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 모이는 자리에 문재인 책임론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전부터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최근 그 정도와 강도가 더 심해지고 있었다. 오죽하면 평소 실패한 대통령이라며 욕하던 내가 문재인 책임만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을까. 그냥 예전 김남국이나 김용민이 그랬던 것처럼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라 여겼더니만 검찰소환이라... 아직 똥파리가 남아 활동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우연이다.

 

문재인의 민주당과 지지자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해야 한다. 이재명을 사법적으로 죽일 수만 있으면 그 다음은 문재인이어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그냥 쭉정이들 뿐이겠지. 딱 저놈들 입맛에 맞는 그림이다. 

 

문재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래서 더욱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잘못한 것은 윤석열이고 국민의힘이고 그 지지자들이다. 그들의 승리를 막지 못했던 당시 수박들과 똥파리들의 책임인 것이다. 욕하려면 차라리 그놈들에게 힘을 실어준 지지자들을 욕해야지 무슨 문재인인가? 기책을 써서 적을 이기지 못했다고 사악한 의도로 계략을 동원하는 적 대신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여러 사람들이 꽤나 열심히 노력중이라는 생각 뿐이다. 역시나 인터넷에서 가장 시끄러운 놈들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든든한 지지기반 역시. 의도는 명확하다. 넘어가는 놈은 똑같은 놈들이다. 언제나.

대충 감을 잡았다. 그러고보면 이른바 PC라 부르는 정치적 올바름은 우리들 세대에게 있어 정체성과도 다름없는 것이었다. 80년대 민주화 이후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나 그를 지켜보았던 이들 모두 그 다음단계로써 보다 올바른 차별과 편견이 없는 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목표로 삼았었기 때문이었다.

 

환경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를 새로운 대안으로 추구하기도 했었고,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것들로 인해 부당하게 차별받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그것을 실제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기업들의 블라인드채용이었다. 다른 것 보지 말고, 외모도 학력도 보지 말고 오로지 지원자 자신이 노력한 것들로만 일단 서류심사라도 볼 수 있도록 하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권리도 생각하게 되고, 차별받는 성소수자나 혹은 지금은 다문화가정이라 고쳐 부르는 혼혈문제나, 혹은 우리사회에서 어느새 하층을 이루고 있는 외국인이거나, 때로는 특정 지역에 산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부당한 차별 등이 화두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모두가 2030 남성들이 아주 끔찍히도 혐오하고 증오하고 환멸하는 것들이다.

 

어째서 반PC가 그리 극성인가 알 것 같다. 그다지 상관이 없는데도 트럼프의 당선을 굳이 PC에 대한 반PC의 승리로, 극단적인 PC주의자인 오바마에 대한 반PC전사 트럼프의 승리로 몰아가려는 것인지 그 이유를 대강이나마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타겟은 4050 자체인 것이다. 그들이 기득권이라 여기는 4050를 공격할 자신들만의 논리를, 그를 하나로 정리한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PC는 악이고 따라서 반PC가 정의다.

 

나는 성소수자가 싫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싫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 나아가 여성을 성적인 수단으로 여기기에 그 또한 당연하게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가난한 놈들을 멸시하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자기보다 학력이나 학벌이 낮은 사람들을 혐오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냐? 그것이 본능이니까.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억압이고 강제일 테니까. 반페미로 시작한 반PC가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의 반대를 무시하는 것은 쿨한 것이다. 환경이야 어찌되었든 당장 이익이 된다면 그리 하는 것이 옳다. 장차 비용이 얼마가 들든 당장 싸게 먹히니 원전이 친환경이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틀렸다. 우리가 옳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정의를 주장한다.

 

시작은 미국이었는데 결국은 한국사회의 현실과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부분 4050, 혹은 그 이전의 민주화세대들이 주장해오던 것들이었다. 따라서 당연하게 지금도 민주당이 정도와 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추진해 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쩐지 차별금지법에 대해 2030을 대변하는 이들이 꽤나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더라. 노력해서 기껏 좋은 대학 들어갔는데 그마저도 혜택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불공정한 법이다. 개인이나 계층의 차이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 그를 억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자신들은 그럴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바라며 그것이 곧 인권이고 정의다. 문제는 이 인간들이 이것을 이데올로기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안티가 이데올로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처럼 작용하기는 한다. 이를테면 반공주의 같은 것이다. 공산당에 반대한다는 하나만으로 자신들을 결집할 수 있다. 하나의 지향을 가지고 행동에 옮길 수 있다. 그래서 PC가 왜 잘못이고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들의 정의가 정당화될 수 있으니.

 

결국은 내가 그동안 2030 남성들에 느껴온 것들을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2030 남성들은 이렇다. 그들의 주장이나 생각이나 행동하는 바들이 이렇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두 모아보니 하나로 정의한다. 헤겔이 그랬지. 역사는 정반합으로 이루어진다고. 이전 세대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 왔듯 이후 세대들은 그에 반발하여 더 나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반PC를 이념으로 삼았다. 판타지세계에 성소수자따위는 없다. 상상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사회에는 성소수자따위 존재할 여지같은 건 없다.

 

트럼프가 정작 반대하는 것은 미성년자에게 성전환수술을 시키거나 그를 지원하는 것일 텐데도. 성인이 된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없다. 더이상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동성연인들간의 결혼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꽤나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트럼프임에도 그의 대선에서의 승리는 반PC가 정의롭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 정의가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선거에서 이겼으니 윤석열이 이재명보다 옳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옳다. 2030남성들이 4050보다 옳았다. 

 

왜 갑자기 반PC인가 했네. 그전에도 있기는 했었다. 그동안에도 반PC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어찌되었거나 계속해서 들어오기는 했었다. 그런데 요즘 너무 많다. 그리고 그 시기가 너무 공교롭다. 분명 주도하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넘어가는 것은 결국 그놈들이란 것이다. 원래 타고나기를 그런 놈들이다. n번방 사건 때조차 자신들이 즐길 자유를 주장하며 피해자들의 영상을 찾아헤매던 바로 그놈들. 차별을 위한 자유를 주장하는 놈들이다. 같은 또래에 같은 성별이어도 처지가 다르면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고 배제할 수 있는 그들. 보고 있으면 재미있기는 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리 말하곤 했었다.

 

"그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냥 자식 죽은 거 아닌가? 가족이 놀러가다 사고로 죽은 것 아닌가? 세상에 자식 잃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사고로 가족 잃은 사람이 밖에만 나가도 넘쳐난다. 

 

나는 처음에 노망날 때 다 된 늙은이 아니면 일베들이나 그러는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참사 당사자나 유가족들에 대해 대학특례를 적용한다는 뉴스가 나오자 바로 태도가 돌변하고 있었다. 자식 죽은 게 벼슬인가? 시체장사한다.

 

이태원 참사 때도 다르지 않았었다. 역시나 그게 그럴 일이던가.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던가. 왜? 내 일이 아니니까.

 

아마 지금 2030남성들처럼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세대도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누가 칼들고 협박했는가? 누가 비정규직하라 했는가? 누가 단기계약직으로 들어가라고 칼들고 협박이라도 했는가? 자기가 원해서 미화원 들어갔으면 뭔 짓을 당하든 감수하는 게 옳다. 자기가 감수하겠다고 그런 조건 받아들이고 보안원이든 시설관리든 하겠다고 했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뭔 최저임금인상이고, 고용안정이고, 근로환경개선인가? 바로 그런 것이 2030남성들이 말하는 공정일 것이다. 그 연장에 있다.

 

그냥 슬픈 일 있어도 너희들끼리만 슬프라. 아픈 일 있어도 너희들끼리만 아프라. 다만 그로 인해 단 하나라도 내게 피해를 끼치지 말라. 그래서 죽은 이들을 추모하자고 분향소 만들어도 그마저 성가시고 불편하다. 즉 너희가 어디까지 얼마나 슬퍼하고 아파하는지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한다. 왜? 자기는 2030 남성이니까. 대중이란 익명성 뒤에 숨어 있으니까. 집단이라는 폭력을 등에 업고 있으니까. 자기가 권력일 테니까.

 

하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는 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노동자가 파업이라도 하려 하면 기성세대들은 그리 말하고는 했었다. 아, 그때 기성세대들이다. 그게 뭐 그리 파업까지 할 일인가? 파업을 하더라도 그렇게 과격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정작 자기가 당사자가 되어 파업 한 번 하고 나니 태도가 바뀐다. 다들 그럴만해서 그런 것이겠구나. 워낙 그분들 세대에서는 그런 정도는 묵묵히 참고서 일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그런 정도라도 고맙게 여기고 열심히 일해서 지금껏 자식도 기르고 했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들 세대들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파업하고 시위도 하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 결과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소송이란 것이 정착되며 노조가 사실상 무력화되기에 이르렀다.

 

어떤 2030 병신들은 말한다. 노조가 뭐하는 곳인가? 노조가 왜 있는가? 노조가 있기는 한가? 그래서다. 노조의 투쟁을 외부에서 일방적인 잣대로 판단하다 보니 노조가 사실상 사용자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크게 제한되어 버렸다. 일단 파업이라도 하면 손해배상소송으로 노조지도부는 자신은 물론 일가친척까지 패가망신도 감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법을 지켜가며 조용히 무언가를 해 보기에는 사용자가 들어주지 않으면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예 없다시피 한 것이다. 그나마 규모도 좀 있고 하면 노무감사라는 것도 있어서 정부의 눈치도 보고 하겠지만 그마저도 아니면 그냥 그러려니 닥치고 감수하고 일해야 한다. 그래서 노조가 무력해진 것이다. 그 자신들이 바라는대로 조용히 남들 피해 안 주고 법 다 지켜가면서 무리없이 활동하다 보니.

 

그래서 그게 얼마나 그렇게 분노할 일인가? 모른다. 그렇게까지 과격하게 행동해야 할 만한 문제인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행동들이 과연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그래서 판단하지 못한다. 스스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주장하는 놈들도 가만 보면 결국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만 옮겨와서 읊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주장할 때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주장한다. 역시나 평생 할 일따위 없다 여겼던 파업에 직접 나섰던 어느 분의 경험담이다. 세상이 자기들 목소리따위 전혀 들어주지 않더라. 어떤 언론도 자기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기사로 내 주지 않더라. 용산참사 당시 철거민에게 모든 책임이 있었다는 오세훈의 주장에 대해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던 한겨레조차 혹시라도 민주당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인지 한 마디 비판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객관적으로 사실을 판단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정한 분노와 행동의 잣대는 과연 그에 부합하는 것인가?

 

남탕에서 목욕하고 있는데 여탕 고장났다고 여자 손님들도 같이 목욕하도록 하겠다면 과연 남자인 나로서 좋기만 하겠는가? 그걸 좋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편해서 짜증부터 나는 나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환불해 달랐더니 환불 못해주겠다 그러면 아마 나처럼 씨발 욕하고 그냥 나오는 사람 말고도 아예 목욕탕을 뒤집을 듯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목욕비가 꽤 비싸기까지 하면 더 그렇다. 그래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가? 여자들이랑 같이 목욕하라 그랬더니 싫다고 짜증내는 내가 틀렸는가? 여자들이랑 같이 목욕하면 좋은 것이니 좋아라 반기는 그들이 옳은 것인가? 그래서 그러한 상황에 대해 나는 어느 정도 수위로 판단하여 행동으로 내보여야 하는 것인가?

 

역시나 2030 남성들이란 것이다. 자식 죽은 게 벼슬이다. 시체팔이 장사한다. 일베만이 아니었다니까? 세상에 그렇게 일베가 많으면 일베가 아마 세계최대의 사이트였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바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따위 소리 떠드는 놈들이 넘쳐났었다. 그런데도 일베탓만 한다면 그것이 곧 비겁이고 비열인 것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슬퍼하고 분노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어디까지 그런 감정들을 공감하고 용인해주어야 하는가. 누가 칼들고 협박했는가? 다른 건 몰라도 2030 남성들이 파업한다고 나서면 꽤 재미있기는 하겠다. 지지할 마음은 절대 안 들지만. 웃기는 버러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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