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사대부란 향촌에 자기 땅을 가지고 경작하면서 유교경전을 공부하던 식자층을 일컬었다. 대충 영국의 젠트리나 독일의 융커와 비슷하다 보면 될 것이다. 세습된 신분이라기보다는 일정한 정체성에 근거한 계층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처음 그저 경제적으로 독립된 지식인으로서 향촌사회에서나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들이 중앙정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그들을 정의하는 정체성 그 자체가 근거가 되었었다. 마땅히 더 많이 배우고 익히고 알고 있는 이들이 천하를 위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위치에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양반이란 단순히 혈연에 의해 계승되는 신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 조선 전기에는 아예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이들만을 양반이라 불렀었고, 양반이 신분화된 조선후기에도 3대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조상이 얼마나 잘났고 대단했든 양반으로서 그 신분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조선에서 유독 과거가 잦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집안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으면 신분을 잃어야 했기에 그 기회를 늘려주고자 꾸준히 이유를 찾아서 과거를 열었던 것이었다. 조선에서 음서가 크게 대우받지 못한 이유였었고, 한 편으로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고 대우받기 위해서 대부분이 엄격한 도덕률을 지켜가며 살아야 하기도 했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양반으로서 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얼마나 엄격하고 다양한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신분이 양반이어도 정작 양반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통혼조차 어려웠다. 그것은 당색을 떠난 그들만의 기득권이기도 했었다.

 

해방 이후 유독 한국사회에서 교육열이 뜨겁게 일어났던 진짜 이유이기도 했다. 특히 판검사가 될 수 있는 사법시험이 무엇보다 중요했었는데, 그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지배층에 단숨에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을 일제강점기의 영향이기도 했었다. 아무리 차별받는 식민지의 백성일지라도 일정한 자격을 갖춰 법관의 지위에 오르면 일본인들과 대등하게 그들과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이회창의 아버지가 그렇게 일제강점기 식민지 백성으로서 검사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이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방된 이후에도 여전히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서 대한민국의 지배층으로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어째서 사법시험을 폐지하겠다 하니까 젊은층들 사이에서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치웠다며 반발하는 여론이 크게 일었었겠는가? 사법시험이란 단순히 법을 다루는 전문가를 시험을 통해 걸러내는 과정이 아닌 이 사회를 지배하는 신분을 만들어나는 통로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현재도 유효하다.

 

진보를 자처하던 한겨레가 어째서 윤석열 이전부터 검찰과 그토록 유착해왔던 이유인 것이다. 한명숙 이전부터도 한겨레는 항상 검찰의 입장에서 그들이 읊는 정의만을 고스란히 대변해 오고 있었을 터였다. 정의당도 다르지 않았다. 정의당은 물론 녹색당과 그 주변에 존재하는 지식인 대부분이 마찬가지로 검찰의 편에서 개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연히 대선에서도 윤석열을 때로는 대놓고 때로는 암묵적으로 지지했었고, 대선 이후에도 민주당만을 공격하면서 윤석열에 대해서는 최소한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심지어 민주노총이 간첩몰이를 당하는 와중에도 정작 민주노총 지도부조차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무엇이겠는가? 서울대다. 그것도 법대다. 심지어 사법고시에 합격한 정당한 자격을 갖춘 인물인 것이다. 그들이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것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하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언하고 민주당이 탄핵을 시도햇을 때 정의당이 내놓은 첫 공식입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재명의 대통령 당선을 막기 위해서라도 윤석열 탄핵은 최대한 늦춰야 한다. 

 

그동안 진보를 자처하던 2찍 지식인들이 민주당을 혐오하고 경멸하면서 보수정당과만 연대해 온 진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자격을 갖췄다. 비슷하게 좋은 대학 나오고 사법고시 합격해서 판검사에 변호사까지 됐어도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벌열과 지방에서 농투성이와 다를 것 없이 사는 잔반은 이미 전혀 다른 신분인 것이다. 서울에서 여전히 권력과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벌열에 비해 향촌에서 그저 농투성이들 앞에서나 행세를 하는 향반나부랭이와는 절대 같이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격이 있는 자신들 진보정당은 마찬가지로 자격이 있는 보수정당하고만 소통해야 한다. 민주당과 손잡는 것은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당 2중대라고 하면 발작하던 2찍 진보들도 보수정당 선봉대라고 하면 전혀 어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당과 정책적으로 공조한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나중에 반성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보수정당과 공조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서울대에 법대에 사법고시까지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거친 법관들이라면 어떨까?

 

서울대 나오고 법대 나오고 사법고시 합격해서 검사까지 했는데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휘두르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지렁이 국민들 몇 명 죽어나간다고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는 것이다. 이재명이나 문재인 따위야 고작 가천대 경희대이지 않은가. 같은 서울대 출신이라도 고졸에 경희대 가천대 따위가 묻은 놈들은 서울대라 인정하기 싫을 텐데 하물며 자신이 그런 허접한 대학 출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국가를 위해서도 그런 소수의 하찮은 희생쯤은 감수하고 정당하게 자격을 갖춘 이가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위치에서 국민들을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옳을 수 있다. 윤석열의 내란에 대해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렇게 말도 많았던 2찍 진보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지금까지 선고를 미루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명백하게 잘못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책임을 묻기에는 윤석열의 자격이 너무 훌륭하다. 말 그대로 정당한 성골의 혈통인 것이다. 말 그대로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책임을 묻기에는 그 출신이 너무 훌륭해서 망설여진다.

 

애초에 이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위해 법을 공부한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집안 전체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위해 청춘을 다 바쳐서 법을 공부했고 시험을 치러 합격했던 놈들이라는 것이다. 굳이 사법고시까지 보지 않았어도 서울대 들어간 대부분이 그런 이유에서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목숨을 걸고 공부했던 것일 터다. 그것을 알기에 2030 남성들도 윤석열의 내란에 대해 그리 큰 죄가 아니라며 서부지법에서 난동을 부리는데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었고. 정당한 자격을 갖춘 이가 그에 걸맞는 신분과 지위와 권한을 누리는 것은 공정이라고 하는 자신들의 가치에도 지극히 맞아 떨어진다. 다만 그럼에도 대부분 법을 공부한 학자들이, 심지어 해외에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눈치가 보여 솔직하게 선고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까지 미뤄지게 된 원인인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기각이든 각하든 하고 싶은데 그런 놈들 답게 당장 자신들의 선고에 대한 다른 이들의 판단이 어떨지 신경쓰고 눈치보인다. 

 

사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기는 하다.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에 기걱이라면 그냥 윤석열을 다시 대통령 자리에 돌려놓으면 나머지는 윤석열이 알아서 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로 돌아가서 뭔 짓을 하든 헌법재판소가 신경쓸 일따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선고를 늦춰가면서까지 헌법재판관들이 그 책임을 대신 지고 있는 것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원래 자기 속내를 감추는데 익숙한 족속들이다. 그래서 때로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을 때 그 비틀린 내면을 엿보게 되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학교 다니면서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쓸데없이 공부만 잘하는 쓰레기들이란 대개 그런 경우가 많았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

 

한 마디로 더이상 헌법재판소에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입법부의 권한을 위임하여 판단하는 절차를 유지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험을 통해 쟁취한 정당한 권한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의 특권적인 카르텔이 확인된 이상 다수의 국민들의 판단에 의해 선택된 입법부의 권한을 온전히 그들에게 위임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탄핵은 오로지 국회의 권한으로만 남기고, 그냥 국회가 탄핵이라는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책임을 선거라는 형태로 국민에게 묻는 방식으로 나가는 것이 어쩌면 지금으로서는 더 옳아 보이는 것이다. 대통령을 탄핵하면 당연하게 국회도 동시에 해산하고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현직 국회의원들에 대한 신임투표도 같이 치르도록 한다. 부당한 탄핵이었다면 대통령 자리는 물론 현재 자신의 의석까지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도록. 탄핵 또한 오로지 주권자인 국민들에 묻어 결정한다.

 

어쩌면 다행이기도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선고를 빨리했다면 헌법재판소가 필요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들었을 테니. 지귀연 전까지만 해도 판사를 믿느냐 그러면 누구를 믿느냐는 반론이 돌아왔던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귀연 이후 판사를 믿느냐 물으면 그래도 좋은 판사도 있지 않겠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원래 같은 놈들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판 사대부들일 것이다. 그것이 옳다고 대부분 국민들도 믿고 있었지만 아니라는 사실만 드러나고 말았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중이다. 처참하게도.

19세기 감자 잎마름병에서 시작된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3분의 1을 지워버리는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던 데에는 당시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인들의 자유주의적인 복지관의 지분이 꽤나 컸었다. 모든 개인들은 가난을 극복하고 부유해지고자 노력해야 하며 정부는 그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역할만을 해야 한다. 따라서 더이상 자신을 위해 노력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도 그러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다른 사람보다 못한, 그러므로 더욱 스스로 노력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만 이루어져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 아닌가? 내가 2030 남성들이 떠드는 공정이라는 주제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이미 19세기에 나온 이야기들일 테니.

 

그러니까 당장 감자농사를 망쳐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와중에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실제 도움이 될 만한 지원을 하기보다 그럼에도 그보다 못한 사람들까지 고려해서 겨우 목숨만 붙여 놓을 만큼의 지원조차 아껴서 제한해가며 최소한으로 했던 탓에 대부분 아일랜드 농민들은 그런 도움을 받기 전에, 아니 도움을 받는 와중에도 수도 없이 죽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작 감자잎마름병의 피해를 받지 않았던 아일랜드의 밀과 소고기와 유제품은 여전히 영국으로 실려나가고 있었고. 괜히 아일랜드인들이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편에서 영국과 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자기들이 마음대로 쳐들어와서 땅까지 다 빼앗아 가 놓고는 정작 아일랜드인들이 죽을 위기에 놓였을 때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본격화되고 과격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영국인은 아일랜드의 원수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난을 국가가, 혹은 공동체가 구제하려 할 때 그 수준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가난해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그보다 형편이 나은 탓에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하게 후자보다 전자가 조금 더 어렵게 사는 것이 얼핏 옳아 보이는 것은 분명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더 형편이 나은 사람까지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러면 그보다 조금 더 형편이 나은 사람이라는 순환고리에 걸리고 만다. 더구나 재정의 효율적인 지출이라는 측면에서도 지원은 가능한 최소한으로만 하는 것이 더 영리해 보이기도 한다. 재정지출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최대한 공정하게 지원을 하는 방법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 그보다 나은 사람들보다 못하게 돕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지원이란 것이 과연 그 대상이 될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적정한 수준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했기에 아일랜드 대기근이 그토록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영국 국내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자 운영한 구빈원은 진짜 최소한의 대상만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끔찍한 환경에 내몰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바로 이것이 많이 배우고 많이 안다는 사회적으로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20대 남성도 그리 말하더라. 복지는 낭비다. 사회적 자원은 보다 가치있는, 사회의 부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쓰여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보다는 진짜 어려운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삼는 선별적 복지가 옳다. 그러면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재원을 쓸 수 있으니 오히려 낫다. 거짓말이다. 일단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부터 재원을 아끼기 위한 것이다. 예산은 똑같이 쓰면서 대상만 선별해서 최소한으로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최소한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할 경우 그보다 조금 형편이 나았던 사람들과의 형평성이라고 하는 그들이 주장하는 공정한 복지라고 하는 논리와 모순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나는 집에서 신김치 하나 겨우 반찬으로 싸왔을 뿐인데 집이 가난하다고 학교에서 급식을 받아먹는 아이들의 식판에는 카레도 있고 고기도 있더라. 과연 신김치를 반찬으로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에 가난한 아이들의 식판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고추가루조차 없는 배추절임 하나 정도여야 다른 사람들도 불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무엇인가?

 

미국 학교들의 급식이 그토록 엉망인 이유는 별 것 없다. 진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그런 걱정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립학교에 비싼 돈을 내가며 자식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돈으로 자식들 밥을 먹이고 있을 것이기에 학교 급식에 신경쓸 이유가 없고, 공립학교 다니면서 급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들을 둔 부모들은 거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즉 어차피 돈도 좀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 사람들에게 공교육의 급식이란 처음부터 해당사항이 아니고, 그러므로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사람들만이 어쩔 수 없이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그와 같은 급식을 감수하며 자식을 학교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급식에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일 이유가 없다. 사실 보편적인 무상급식이 시작되기 전 우리나라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었다. 사는 동네, 다니는 학교, 학부모의 부와 지위에 따라 급식도 천차만별이었으니. 그런데 돈 있는 사람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도 자식들이 학교에서 같은 급식을 먹어야 하니 사정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급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선별적 복지란 사회적으로 부와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이 볼모로 잡혀 있는 현재의 상황을 타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을 남기기 위한 그들만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만이 남게 되었을 때 자신들은 더 많은 재원을 아껴서 다른 곳에 쓸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것은 지금 모두가 누리고 있는 이하로 복지의 수준을 떨어뜨림으로써 더 극대화될 것이기도 하다. 일론 머스크와 트럼프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선별적 복지의 진짜 목적일 것이다. 그래야 자기들이 내는 세금을 줄일 수 있다. 더 적은 세금만을 미국이라는 공동체에 내게 될 수 있다. 더 나은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더 적은 더 낮은 그럼으로써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을 딱 그 정도만. 그래야 개인들도 노력해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질 수 있을 테니.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자유의지주의자들의 주장과도 맞닿는다. 개인이 알아서 살아야지 사회가 그들의 삶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러한 산술적인 효율과 공정이 젊은층들의 일차원적인 감정과 본능과 충동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고. 내 세금이 저런 열등하고 한심한 인간들을 위해 쓰이는 것은 낭비다.

 

다시 말하지만 복지예산을 어차피 똑같이 쓸 것이라면 선별적 복지를 이야기할 이유따위 없다는 것이다. 예산을 더 적게 쓰자. 더 효율적으로 쓰자. 그래서 대상을 좁힌 대신 지원을 더 늘리고자 한다면 결국에 차상위라고 하는 현실의 문제와 부딪힌다. 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공정과도 맞지 않는다.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적게. 못하게. 그렇게 마침내 이르게 될 결론이 바로 영국의 구빈원이다. 그리고 미국의 노숙자들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오히려 고통과 모멸감을 느껴야 비로소 스스로 살아갈 동기를 가지게 된다. 휘황한 말로 포장을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세금도 내지 않은 어린 놈의 새끼들이 따라 주장할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참 우습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젊은 세대들은 자기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었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의 주장이 공정과 정의의 이름으로 떠돌고 있다. 시대가 바뀐 탓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김경수가 뜬금없이 나타나서 그리 지랄을 떨었던 것일 게다. 이재명의 2심판결이 이재명의 대선출마와 민주당의 집권까지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재명이 2심에서 유죄를 받을 경우 내부에서 이재명을 배제하기 위한 큰 움직임이 나와야 한다. 이재명을 대선후보에서 탈락시켜야 함은 물론 이재명의 영향 아래 있는 인물이 대선후보로 나서지 못하도록 반이재명 여론을 민주당 안에서 결집시켜야 한다. 그런데 안됐다.

 

밖에서는 김경수와 김부겸이 지랄하고, 안에서는 임종석과 고민정, 박용진이 난리를 폈음에도 민주당 지지층은 물론 현역 국회의원 가운데서도 그에 선동되는 이들이 전혀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동안 없었던 민주당 이름으로 기자회견까지 열어서 재판부를 압박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2심판결이 어떻게 나든 민주당은 이재명을 중심으로 대선을 치르겠다. 그런데 대선후보 여론조사결과마저 경우에 따라서는 과반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으니 재판부로서도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이재명이 아니더라도 이재명이 지지하는 인물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와서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회 의석까지 180석에 육박하는데 자기들 좆되는 것 아닌가.

 

검사나 판사나 가장 두려워하는 두 가지가 하나는 승진이고, 다른 하나는 변호사 개업이다. 그래도 검사나 판사로 계속 해 먹으려면 일단 직급이 지금보다는 올라야 한다. 그래도 고법원장, 대법원장, 대법관, 법원행정처장, 헌법재판관, 헌법재판소장 등 뭔가 그럴싸한 타이틀 하나는 따고서 판사도 그만둬야 할 것 아닌가. 판사 그만두면 당연하게 그동안의 이력으로 변호사로서 바짝 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도 민주당인데 의석까지 180석이면 판사 한둘이 문제가 아니라 법원 전체가 물먹을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어차피 지금 이대로면 검찰은 나가리다. 별다른 일 없으면 윤석열과 함께 검찰은 그대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검찰과 같이 죽는 길로 갈 것인가.

 

한명숙 때와 달랐던 이유인 것이다. 김경수 때와도 안희정 때와도 최강욱 때와도 조국 때와도 다르다. 그때는 안에서 민주당을 흔드는 놈들이 있었다. 유죄판결을 받으면 오히려 좋아서 날뛸 놈들이 한가득이었고 그들로 인해 역풍은 커녕 오히려 자기들 원하는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높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었고. 그래서 김경수 부추겨서 나서게 만들고, 그동안 해온대로 김부겸이며 김두관이며 임종석, 박용진, 고민정까지 모두 출동해서 판을 만들려 한 것인데 지금까지의 민주당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정치재판을 앞두고 민주당이 이렇게 단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노무현 탄핵 이후로 처음인 것이다. 유시민의 말이 옳다. 민주당은 태산만한 힘을 가지고 겨자씨만큼 쓴다. 자기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도 모르고 항상 주눅들어서 주위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것도 못할 때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민주당 주류라는 것들이 그렇게 보수정권에 의해 휘둘리던 놈들이었으니.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설마 판사가 자기 양심에 따라 오로지 법리를 쫓아 그리 판결했을 것이라 믿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판결에 있어 김민석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선고를 앞두고 여론을 만들고 재판부를 압박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 김민새라는 별명은 역사에 묻어버려도 좋을 듯하다. 이재명도 날리고 윤석열도 날리면 공평할 것이라 믿는 판사놈들이 그리 많았었단다. 검찰과도 그리 이야기가 끝나 있었고. 헌법재판소 역시 그런 합의 가운데 그동안 판결을 늦춰 왔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이 아예 하나가 되어 압박하니 판사 주제에 더 버틸 재간이 없다. 괜히 여기서 판결 잘못했다가는 자기가 좆될 수 있다. 그래서 유죄판결을 내리고 다만 피선거권에는 영향이 가지 않도록 균형을 맞출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판사도 알았던 것이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양쪽에서 다 욕먹는다. 아예 어느 한 쪽 편에 서는 것이 옳다. 그 결과다.

 

말하자면 법리에 충실한 결론이라기보다 민주당과 검찰, 민주당과 윤석열의 힘겨루기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마 윤석열이 내란을 시도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탄핵심판중이 아니었다면 결론은 전혀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아니면 이전처럼 이재명 유죄받으면 내게도 기회가 온다고 날뛰는 놈들이 넘쳐났다면 역시나 같았을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실망해서 등돌릴 것 같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이재명이라서 안된다는 말 자체가 저놈들의 그냥 믿음일 뿐이라는. 이재명이 당대표가 되고 민주당은 더 강해졌다. 그래서 승리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단 빨리 하기나 해라. 씨발놈들.

한겨레가 진보언론을 표방하면서도 지난 대선들에서 안철수와 윤석열을 차례로 지지했던 이유는 별 것 없다. 그들이 서울데 학벌이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하버드 출신이기 때문에 이준석도 그렇게 빨아주었었다. 민주당더러 늬들은 이준석이 없다며 자기들이 으스대던 기사를 지금도 기억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2찍 진보들이 노무현을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정확히 무시하고 경멸했던 이유 역시 같았다. 고졸이다. 대놓고 노무현 고졸이라고 비웃고 조롱하던 그때는 자칭 진보들도 주위에서 숱하게 보았었다. 사실 이전 PC와 그들의 특권의식에 대해 쓴 글의 연장이라 보면 된다. 원래 노동자 계급의 음악이던 록이 한국에서는 일찌감치 서구문명을 접할 수 있었던 있는 집 자식들의 선진문명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진보 역시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나 첨예한 사유보다는 선진국들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조들에 대한 동경과 추종에서 비롯된 것이 그 원인인 것이다.

 

전축을 가진 집도 드물던 시절에 아예 집에 악기까지 사다놓고 연습할 수 있는 집이 과연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에 얼마나 되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심지어 밴드가 합주라도 하려 하면 빌리는 돈도 절대 싸지 않은 연습실을 몇 시간씩 빌려야 했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젊은 대학생들이 주도하던 당시 한국 록이라는 것이 적당히 고고리듬 위에 뽕멜로디 얹은 사랑타령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 직접 몸으로 겪으며 고민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었던 있는 집 자식들이 외국에서는 그렇게 한다니까 무작정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 진보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자칭 진보들과 뭐라도 논쟁을 하려 하면 한국의 현실이 아닌 해외 유명인사들의 저작이나 토론, 연설 등을 인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었다. 뭐라더라? 한국에는 임대농이 없다던가? 어느 대학생으로부터 실제 들은 이야기다. 그때 우리 작은 아버지가 땅주인에게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하긴 불과 3년 전 진중권도 어느 직장인이 아내 다쳤다고 연차를 쓰느냐고 발악을 하고 있기도 했었다. 군대에서 몸에 병이 있다고 전화로 휴가연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말했다시피 이미 1990년대에도 그만한 사유가 있으면 부대에 연락해서 사전에 휴가를 연장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어째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는가? 진중권도 하는 소리 보면 거의가 외국에서 흘러들어온 주장이나 논리를 읊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내가 이만큼 안다. 중학교 시절 집에 비디오도 있고 한 놈이 해외 밴드의 공연에서 이렇게도 하더라며 교실에서 흉내내며 으스대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짜장면이 아직 2천 원도 안하던 시절에 명동에서 30분짜리 애니 한 편을 5천 원 주고 복사해서 보면서 주위에 떠들고 다니던 자칭 오타쿠들도 있었다. 부모가 일본에 자주 오가는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만한 돈을 취미에 쓸 수 있어야 비로소 오타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니텔에서 일본 애니들 쉽게 다운로드받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래서 꽤나 감격했던 기억이 선하다.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해외에서 나오고 있는 선진적인 사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거나 그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놈들은 그것을 앞세우고는 했었다.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래서 200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라 하면 일단 말머리에 유럽을 달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아는 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이다. 실제 젊은 대학생이었는데 오프라인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어이없어 빡쳤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고작 고졸이나 대학을 나왔어도 경희대 출신들에 눈이나 돌아갈까? 하물며 공돌이에 검정고시 출신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이다.

 

어째서 지금 국민의힘은 물론 2찍 진보들과 민주당 수박들까지 합세해서 이재명만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인가. 헌법재판소가 굳이 이재명의 2심 판결 이후로 윤석열 탄핵선고를 미루고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검정고시 출신은... 더구나 서울대도 연고대도 아닌 잡대학 출신은... 그러니까 그런 놈들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서울대 출신들이 가장 못참는 것 중 하나다. 자기보다 못한 대학 출신 밑에서 일하는 것. 자기보다 못하다 여기는 대학 출신과 한 자리에서 함께 하는 것. 서울대 출신은 그래서 자기가 직접 입으로 떠들지 않아도 주위에서 모두가 안다 말한다. 그렇게 행동하는 게 티가 난다. 그래서다. 지금 민주당 대표가 검정고시 출신이다. 잡대 출신이다. 그런 민주당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쓸 수는 없다.

 

한겨레 기자놈이 윤석열의 비상계엄사태를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은 네 가지 가운데 민주당만 빠져 있는 이유인것이다. 아마 민주당 대표가 윤석열이나 안철수처럼 서울대 출신이었으면 달랐을 것이다. 이준석처럼 하버드를 나왔어도 역시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이 경희대가 아닌 최소 연세대 출신만 되었어도 지난 정부에서 그렇게 죽일 정도로 적대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 김완이 왜 이제 와서 윤석열 까는 방송을 하고 있을까? 한동훈이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도 있다. 김문수도 있다. 좋은 대학 출신들이 이렇게나 많다. 굳이 윤석열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마 이재명이 전면에 나서면 역시나 이번에도 태도를 달리할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해야 하므로 없는 사실도 조작해서 기사를 써야 한다. 문재인 때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 바로 한국진보의 현실인 것이다. 괜히 진보정당들이 정작 그들이 대변하고 있다 주장하는 노동자 농민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더 크게 외면받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놈이 편의점 알바가 무슨 수당을 받는지도 모른다. 식대와 교통비까지 기본급에 산입되면 아르바이트 하는 젊은이들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간다. 내가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저 새끼 뭐하는 새끼인가 했었네. 있는 집 자식들이 자기 잘난 맛에 과시하려 흉내내는 것이 진보이다 보니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현실은 이렇게 고단한데 저 새끼들 하는 소리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곳만 가리키고 있다. 아마 대부분 느껴봤을 것이다. 그리고 한겨레는 그런 그들의 사고와 정서를 그대로 대변해 보여준다. 그러니까 절대 한겨레가 민주당을 위해 기사를 쓰는 일따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객관적인 사실만 보도하면 된다니까? 그런데도 국민의힘 국회의원 몇 명의 역할은 그리 찬양하면서도 민주당이 해 온 결정적인 역할들은 무시한다. 그게 진보다. 다른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여준다. 어째서 2찍 진보인가. 대단한 것이다.

지금 유럽국가들의 군사력이 처참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이유는 단 하나다. 군사력에 투자하는 돈이 낭비로 보인다. 사실 그럴만도 하다. 군사력이라는 것은 전쟁이 일어나야지만 의미가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가치도 없는 일에 돈을 쏟아붓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나라들이 전성기를 지나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군사력에 소홀하다가 결국 그로 인해 멸망에 이르고는 했었다. 고대 지중해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어차피 더이상 러시아와 전쟁을 하거나 할 것도 아니고 군사력에 쓸 적지 않은 돈을 다른 데 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일견 합리적이지만 러시아가 실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미국이 유럽을 버리는 듯한 행보을 보이면서 비로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자기 나라를 자기 힘으로 지켜야만 한다.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대부분 연구개발은 일정한 성과 없이 그자 돈과 시간만 쓰고 끝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없던 것을 만들고 모르던 것을 알아내고 하지 않던 것을 하는 과정 아니던가.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고 원리를 밝혀내고 그를 응용하는 방법까지 알아내는 과정에서 실패가 없으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더구나 무엇보다 항상 모두가 납득하고 인정할만한 연구주제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나 항상 의미있고 가치있는 그 결과 더 큰 이익으로 이어질 연구만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외토픽에나 나올만한 별 생뚱맞은 연구도 사이사이,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주인 것처럼 연구를 해야 하는 경우도 뜻밖에 적지 않다. 그래야지만 지금의 연구팀을 유지하면서 연구역량도 정비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테니까.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연구개발이라는 게 평소에 하는 일 없이 놀다가 필요할 때만 불러서 시키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해당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에 대한 스킬도 쌓아가야 한다. 해당 연구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나 과정들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더불어 그 결과로 얻어진 데이터 역시 제대로 분석해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건 그저 책으로만 혹은 강의만 들어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대수롭지 않고 그저 돈낭비에 지나지 않더라도 실제 연구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현장에서 습득해야 하는 말 그대로 스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만 들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주제에 대해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가며 연구개발을 진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장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고 일론 머스크에 의해 불필요하다 판단한 연구들이 중단되자 미국내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상황이 그 직접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불필요한 연구를 중단한 순간 장차 미국이 필요로 할 때 필요한 연구에 종사하며 경쟁력을 강화해 줄 연구인력들이 일자리를 잃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경쟁상대가 될 다른 나라로 떠나려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미국 정부에서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을 끊자 다수의 인력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경쟁상대인 중국과 유럽으로 떠나려 하는 중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인력들도 있는 모양인데 그러나 한국은 이미 윤석열이 선제적으로 작살내 놓은 상황이라. 그리고 그것은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항상 모든 신기술이 시장에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당장 특허청만 들어가 봐도 한 해에 수도 없이 많은 특허들이 쏟아지지만 정작 그 가운데 실제 상품화되어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는 것들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도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하물며 어떤 것들은 단지 흥미본위로, 연구개발팀 자체의 호기심이나 충동에 의한 것들일 수 있다. 이런 것도 있으면 재미있겠다. 저런 것도 만들어 보면 의미가 있겠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도 찾아지는 것이고, 아니더라도 필요한 때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데 투입할 수 있는 인력도 걸러지고 길러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기술을 중요시하는 기업들에서는 철저히 연구개발진들의 자율성을 북돋고 보장하고 있었다. 오래전 미국 기술기업들의 연구개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도 아무나 필요하면 자재나 설비들을 이용해서 개인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제재가 없는 모습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가능할까 싶은 신기술들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효율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될 것 같은 연구에만 돈을 지원한다. 성공할 것 같고 돈이 될 것 같은 기술개발에만 인력을 투입한다. 그 외에는 전혀 어떤 투자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연구인력을 놀리고 설비와 자재를 방치하더라도 낭비를 줄이기 위해 더이상의 연구개발에 돈을 쓰지 않는다. 물론 그런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실제 연구개발에 쓰이지 않는 인력과 설비와 자재는 낭비이므로 하나씩 배제되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새로운 것도 나오지 않고, 기존의 것들을 개량하고 발전시키려 해도 그 역량이 보존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잉과 인텔이다. 삼성도 지금 그 대열에 합류하려는 모양이다. 재무계열에서 기술기업의 경영을 맡게 되었을 때 벌어지는 흔한 부작용일 것이다. 돈을 아끼려다 가능성까지 팔아먹는다. 그런데 그런 짓거리를 나름 엔지니어 계통일 일론 머스크가 저지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골때리는 상황인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너무 성공하는 연구만 하려 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정치인과 대중들은 낭비가 많다고 줄여야 한다 이야기한다. 민주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의 가장 큰 차이이기도 하다. 민주당 정부는 실패하더라도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를 거리껴하지 않고, 보수장 정부는 비용을 줄인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연구들을 중단시킨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적 역량은 언제 길러졌는가? 그런데도 정부가 주도하는 것은 안된다며 핏대를 올리는 것이 보수정당과 그 지지자들의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정당 지지자 가운데는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의 추종자가 그리 많다. 똥을 싸도 그들은 옳다. 웃기는 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조정에서 각 관청에 예산을 내려보내는 장면이다. 어느 관청에서 쓸 수 있게 구리 몇 근을 내렸다. 바로 이 구리가 돈을 주조하는 원료다. 한 마디로 각 관청에서 조정에서 받은 구리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돈을 주조한 다음 그것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즉 들어가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있는 구조인 셈이다. 돈으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작 돈을 주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 기록만 남는다. 상평통보만 기준으로 하면 그냥 순적자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화폐라고 하는 본질을 꽤나 적확하게 꿰뚫은 상소를 흔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후기까지도 조선사회는 아직 쌀본위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기존에 가치의 기준으로 쓰이던 쌀을 사용해서 돈을 구매해야 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돈이란 상품의 기준이기 이전에 또한 그 자체로 거래가 가능한 상품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나 노력을 사용해서 돈이라고 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행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발권국이라는 말이 가지는 진짜 의미인 것이다. 돈을 찍어 시장에 푼다는 것은 다시 말해 돈이라는 상품을 생산해서 다른 재화로 교환하는 행위인 것이다. 돈을 찍어낸다고 해서 진짜 찍어낸 돈을 시장에 그냥 던지는 것이 아니라 거래라는 행위를 통해서 그 돈이 시장에서 융통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현대 통화정책에서 중요한 것이 금리인 것이다.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내면 바로 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이 아니라 채권의 형태로 은행들에 빌려주어 대출을 하든 이자를 주든 해서 유통케 하는 것이기에 중앙은행의 금리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결정되게 된다. 정부 역시 그렇게 같은 방법으로 채권을 발매하고 그를 중앙은행에서 사들이게 하는 식으로 재정을 충당하여 시장에 필요한 양의 화폐를 유통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정부의 빚이란 따라서 정책적으로 시장에 유통시키는 추가적인 화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가 빚을 짐으로써 더 많은 돈이 시장에 풀리고 그 돈이 경기를 부양하거나 혹은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이 그동안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감수해가며 세계로부터 막대한 상품을 사들이고 또한 곳곳에 돈을 뿌려 온 실제 이유인 것이다. 미국이 자체적으로 찍어낸 화폐인 달러를 다른 나라들에서 자기 돈처럼 쓸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돈을 찍어서 각 나라들에 일정량씩 막 퍼다 줄까? 결국은 그렇게 찍어낸 돈으로 다른 나라들로부터 그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사들여야 하는 것이다. 돈으로 돈을 사들이는 것이 국채이고, 돈으로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무역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무역적자라는 것은 미국이 찍어낸 달러를 다른 나라들의 상품으로 교환하는 과정인 것이고,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역시 정부가 발행한 국채로 다른 나라의 화폐를 사들이는 절차인 셈이다. 그렇게 미국이 무역과 재정에서 막대한 적자를 감수함으로써 달러는 세계로 충분히 퍼져나가고 기축통화로서 세계의 화폐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더이상 적자를 유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미국 정부에서 충분한 세금수입과 적절한 지출로 더이상 국채를 발행하지 않아서 다른 나라들에서 사들이고 싶어도 사지 못하게 된다. 미국 경제가 오히려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며 달러가 다른 나라들에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비슷한 예가 세계사에도 꽤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른바 전황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돈을 필요로 하는데 정작 그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중세말에 한 번 유럽에서도 화폐경제가 무너질 뻔한 적이 있었다. 세금을 금으로 내야 하는데 당시 유럽이 가지고 있던 금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어서 정작 세금을 낼 금을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조선에서 화폐유통이 늦었던 이유도 구리광산이 없는 탓에 원재료의 수급이 너무 불안정해서 시장의 신뢰를 잃은 탓이 컸었다. 수많은 다른 나라의 화폐들이 달러의 지위를 대체하려 했어도 그러지 못했던 실제 이유다. 그런데 진짜 미국에서 더이상 돈을 쓰기 싫다고 무역도 닫고 재정도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래도 발권국으로서 미국의 지위는, 달러라고 하는 기축통화를 통해 얻고 있는 막대한 이익 역시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미국 정부의 재정은 오로지 국민의 세금이다. 뉴스에서 어느 공화당 정부 관계자가 한 발언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일 것이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쓴 돈들이 전부 미국 국민들의 세금인 것일까? 정확히 적자를 제외한 부분만 그렇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감당해 온 재정적인 적자들은 대부분 국채를 통해 그것을 사들인 개인과 기업과 국가들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당연하게 세계의 여러나라들에서 자국의 재정으로, 혹은 발권력으로 사들인 것들이다. 세계의 수많은 개인과 기업과 무엇보다 국가들에서 미국이 국채를 찍어낼 때마다 사들임으로써 정부가 기록한 적자 만큼 미국은 더 많은 돈과 상품을 시장에서 유통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모조리 배제한 채 다른 나라들이 사들인 국채들까지 전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쓴다면 앞으로도 그같은 구조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지금 트럼프의 정책이란 발권국으로서 미국의 지위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서 세계에 유통시키기보다 세계로부터 달러를 회수하는 위치에 있겠다. 그런데도 과연 미국은 지금과 같은 세계경제의 중심으로써 세계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나라에 조금도 기여를 않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돈만을 써달라는 요구가 언제까지 어디까지 통용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미국이 발권국으로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은 이상 미국의 고립주의란 미국의 자멸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일론 머스크가 헛똑똑이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작 미국이 발권국이자 기축통화국이라는 의미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이 죄다 병신이라서 그런 막대한 지출과 적자를 감수했던 것일까.

 

돈을 상품이 아닌 오로지 거래의 기준으로서만 생각하니 빠지는 오해인 셈이다. 무조건 돈은 적게 쓰고 많이 버는 것이 좋다. 돈을 쌓아두는 것이 무조건 이익이다. 기업은 그래도 되는데 국가는 아니다. 국가가 재정으로 이익을 보면 그만큼 시장에서는 유통되는 돈이 줄어든다.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특히 젊은 층에서 세금을 줄인다고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에 열광하는 여론들이 크게 일고 있는 것이다. 그냥 쓰는 돈을 줄이고 버는 돈만 늘어나면 좋다. 개인은 그래도 되지만 국가가 그러면, 더구나 세계의 발권국이자 기축통화국이 그러고 있으면 적지 않은 문제가 일어난다. 한국은행이 지출을 줄이고 이익을 늘려 보겠다고 돈을 벌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명확하지만 그러나 이해하려면 기초가 필요하다. 미국이 쓰는 돈은 온전히 미국 시민들의 세금이기만 한가? 그런 일차원적인 사고가 트럼프를 만들었겠지만. 단순하다.

18세기 루소를 비롯해 이후 혁명의 근거가 되는 많은 주장과 논리들에 대해 귀족들 또한 꽤나 해박했으며 그를 주제로 토론을 즐기기도 했었다. 아니 이후 혁명의 주체가 되는 많은 사상가와 이론가들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인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를 적대하던 궁정귀족들이 프랑스 국민들을 대상으로 그를 음해하는 수단으로 프랑스의 언론과 지식인들을 이용한 것도 그 한 예일 터였다. 한 편으로 자신감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놈들이 공고한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의 지배를 뒤집을 수 있을 리 없으니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자.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귀족사회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아직 봉건귀족들이 기사이기도 하던 시절에야 얼마나 자신이 기사로써 뛰어난가만 보여주면 되었었다. 그래서 샤를 5세가 왕 주제에 마상시합에 참가했다가 뒈지기도 했던 것이었다. 내가 기사로서 얼마나 용맹하고 무예도 뛰어나고 거침없고 단호한가. 그런데 화약무기가 일반화되면서 더이상 기사의 존재는 그 의미를 잃었고 중앙집권의 강화로 인해 귀족들은 파리의 궁정에서 사치나 즐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 안에서 귀족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역시나 그 유행을 선도한 것도 파리의 왕실이었다.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고, 창작에도 직접 관여하는 한편, 지적이고 학술적인 부분에도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권력이 가지는 고상함과 우아함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면서 유럽의 예술과 학술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귀족들의 그같은 허영과 사치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근대 유럽의 지적, 예술적 산물들은 어쩌면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괴테도 가장 큰 후원자는 항상 귀족이었다.

 

그래서 교양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었다. 교양이란 말 그대로 사교를 위한 양식이다. 품위있는 존재들끼리 서로 교류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적 양식인 것이다. 최소한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나 음악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를 주제로 풍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으면서, 최근 유행하는 디자인의 패션을 갖춘 채로, 그래도 남들 모르는 고상하고 격식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쯤은 알고 있으면서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어야 그래도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갖췄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어느새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 부르주아들 때문에라도 그들은 더욱 귀족다움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었다. 이는 정확히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도 적용된다. 영국의 젠트리나 독일의 융커 등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지배층들 역시 이후 이를 자신들의 신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우리가 이 정도는 되니까 다른 노동자나 농민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른바 PC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이, 혹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 부르는 서구사회의 엘리트들이 정작 그 PC를 주제로 하는 토론에는 터무니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오래전 꽤나 지적으로 첨단을 걷는 한국 진보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흔히 PC주의자들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달리 이놈들은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전혀 설득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냥 무시한다. 한창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시작하려는데 느닷없이 최근 어디의 누가 쓴 논문이라든가, 어느 학회에서 발표한 이론들에 대해 아느냐 묻고 시작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게 뭐냐 물으면 그런 것도 모르냐는 경멸섞인 대답만 돌아오는데 꽤나 황당하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이고 그러므로 더이상 토론하는 의미가 없다. 이는 한국 여성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그런 것도 모르면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 그러니 그냥 따르라.

 

그래서 싸가지없는 진보라 부르는 것이다.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여길 때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이해시키 설득하려 한다면 당연하게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는 바를 충실하게 전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가르치려 한다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들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고 상대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긴다. 내가 상대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만을 누린다. 그래서 강요하고 강제한다는 말 또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해도 설득도 없이 그대로 따르라고 하는 일방적인 요구만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과거 힐러리 클린턴을 둘러싸고 있던 여성주의자들의 태도가 그러했다. 어째서 힐러리를 지지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여성이니까 당연하게 힐러리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종속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고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무시하고 면박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아마 여기까지 썼으면 우리사회에서도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전 여성주의자들과 논쟁할 때 굳이 이해하려 할 필요 없다는 말까지 들었었으니. 당신같은 사람을 이해시킬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말하는 걸 들으면서 이 새끼들과는 같이 못 가겠구나 새삼 실감했더랬다.

 

그래서 이른바 PC주의자들이 조던피터슨같은 얼치기들과도 제대로 토론이 안되는 한심한 수준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토론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같은 주장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만 만족해서 그것을 자기들끼리만 교류하고 공유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는 것이 당연히 당연하다. 그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은 지적으로 열등한 것이고 그럴 주제도 능력도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는 믿음만 있을 뿐 논리가 없다. 종교와 같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보통의 평범한 대중들에게 전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없다. PC주의자들이 만드는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 등 작품들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받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째서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야 하느냐고. 어째서 백설공주가 히스패닉인 것인가? 여기서 또 그들의 오만한 차별주의가 드러나는데 흑인도 얼마든지 매력적일 수 있다.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뜻은 그냥 얼굴 예쁘고 몸매 잘 빠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흑인으로서 혹은 히스패닉으로서 배우들이 가지는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기 위한 노력에 소홀한다. 그러니까 흑인인 인어공주와 히스패닉인 백설공주를 관객들은 그냥 받아들이라.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게임에서 주인공이 게이라는 이유로 주위로부터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면서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험난한 과정들이 제대로 그려졌다면 과연 성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만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은 필요없다. 옳은 건 그냥 옳은 거니까. 받아들이지 못하는 놈들이 병신이다.

 

물론 수용자들 역시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다. 음악이 그렇고 미술이 그러하듯 수용자인 대중 역시 보다 고차원적인 요소들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분명 있다. 하지만 모든 수용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면 그런 이들을 위한 노력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지나치게 친절해서 항상 비판받아 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 또한 창작자에게 필요한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않는다. 왜? 자신들은 지적으로 우월할 테니까. 오히려 그를 이해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들을 통해 지적인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역시 대중은 어리석고 자신은 우월하다. 그러고보면 오래전 진보주의자와 토론할 때도 어리석은 대중의 하나이고자 한다는 말을 모욕하는 뜻으로 쓰기도 했었다.

 

확실히 이렇게 써 놓고 나니 어째서 한국 진보가 망했는가 하는 것이 한 눈에 보이게 된다. 내가 한국에서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들에 대해 아주 오래전부터 혐오해 온 이유일 것이다. 여성주의자들과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C주의는 가르치려 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가르치려 한다면 그래도 나름대로 배려와 친절을 베풀기도 할 것이다. 아니니까 문제인 것이다. 어째서 여성이어야 하는가? 어째서 흑인이고 히스패닉이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왜 트럼프가 아닌 해리스여야 하는가? 한국에서는 지금 오히려 보수가 더 오만한 터다. 어째서 보수여야 하는가? 싸가지없는 보수라는 말이 없는 것이 그래서 꽤나 얄궂게도 느껴진다. 그렇다는 것이다. 교양의 이유다.

지금처럼 윤석열 탄핵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국민적 갈등을 한 방에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가 예상하는 것처럼 더구나 윤석열 탄핵을 인용하겠다 결론을 내렸을 때 그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인가? 여기서 사회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골방에 쳐박혀서 법전만 공부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의 사고방식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해 보자. 

 

가장 일차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용도 기각도 아닌 중간의 무엇일 터다. 그런데 그런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용이면 인용이고 기각이면 기각이지 그 사이에 무언가 중간적인 것을 만들어 놓기에는 현실이 허용치 않는다. 그렇다면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쪽에도 탄핵인용에 준하는 무언가를 주면 괜찮지 않을까? 이쪽에도 윤석열을 탄핵해서 보내 주었으니 저쪽에도 그에 비견될만한 인물을 같이 보내주자. 누구일까?

 

어차피 탄핵에 찬성하는 쪽이야 어떻게든 탄핵만 인용해주면 별 소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하는 쪽이 문제인데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재명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정권을 쥐는 것이다. 그러니까 탄핵을 인용하더라도 이재명도 같이 보내서 저들이 더 크게 반발할 여지를 줄이면 선고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나 혼란도 보다 덜해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에 같은 판사들인 법원으로부터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번 재판에서 반드시 이재명을 유죄로 판결해서 법정에서 구속까지 시켜 버리겠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기다리라.

 

신념도 가치도 이상도 지향도 없는 말 그대로 기계적 중립이 가지는 함정이다. 그냥 중간이면 된다. 이쪽에 하나 줬으면 저쪽에도 하나, 이쪽에 하나 주니까 저쪽에도 하나, 하긴 그러라고 그동안 전광훈을 중심으로 국민의힘이 저리 지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반발하니까 이재명만 제발 좀 보내줘. 이번주 선고가 안 나면 결국 다음주, 그리고 바로 다음주 수요일이 이재명 재판이다. 너무 속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가?

 

자기 정치적 신념이 그래서 그런 경우도 있을 테고, 신념과 상관없이 그냥 샌님들이라 주위 눈치보느라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견이 다수라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대한 시간만 끌자. 한 마디로 이재명을 보내기 위한 지연인 셈이다. 그런 고로 다음주 이재명 재판의 결론도 이미 내려진 상태라 봐야 할 것이다. 이재명만 죽이자. 민주당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민그러므로 생각해야 한다. 이재명이 물러나면 그 대안은 누가 있을 것인가?

 

저쪽이 진짜 오해하는 것이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만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박들이 병신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현역일 때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인은 뒤로 물러났을 때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뒤로 물러남으로써 정치인들은 때로 정치적 부담없이 과감해질 수 있다. 이재명을 그런 식으로 보냈을 경우 남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느낄 분노와 복수심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더 강하게 칼춤을 추게 될 수도 있다.

 

생각해야 한다. 누가 더 이재명을 대신해서 제대로 칼춤을 출 수 있는 적합한 인재인가. 일단 선수로 보자면 박주민이 가장 유력하다. 가장 우선해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일 것이다. 그나마 유력대선주자로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조심하느라 많이 둥글어진 이재명과는 입장부터가 꽤나 다른 터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보여준 선명성도 믿어볼만하다. 준비해야 할 때다. 복수는 더 악랄하게. 더 철저하게. 뿌리까지 뽑을 각오로. 헌법재판소는 필요없다. 새삼 확인한다. 

법은 무엇보다 예측가능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고 이렇게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며 살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할 경우는 법을 벗어나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문명을 이루어 살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먼저 했던 것이 바로 그 규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관념이나 혹은 관습으로써의 규범들이었었다. 하지만 문자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되면서 그것들은 법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큰 문제없이 잘 살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지키며 살아야 한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문명이 바뀔 때마다, 그래서 지배자와 질서가 새롭게 세워질 때마다 그렇게 법도 새롭게 만들어지고 모두에게 공표되었었다. 여기까지는 해도 되지만 여기서부터는 해서는 안된다. 이것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이것들부터는 앞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절대권력자인 군주조차 법을 지켜가며 권력을 사용해아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법치주의의 성립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이란 조문 그대로 약간의 해석은 더해질지라도 그 내용 자체를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상 혼군이라 불리우던 지배자들의 특징은 중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폭군은 그래도 왕이 하라는대로 거스르지 않고 잘 따르기만 하면 큰 화는 면할 수 있다. 그런데 혼군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중심도 없고 기준도 없고 앞뒤도 없어 일관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은 이쪽의 말을 따랐다가 내일은 저놈의 말을 따르고 그제는 또 지 꼴리는대로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그래서 혼군이다. 그래서 더욱 법치가, 입헌주의가 중요해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왕이라도 최소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자신의 권력도 쓸 수 있으면 쓰라. 그게 마그나카르타였다. 이제 더이상 왕이란 놈들이 지 꼴리는대로 명령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문자화된 규범을 통해서 자의적인 행동을 규제하고 그를 통해 예상가능한 일정한 통치가 가능해지도록 한다. 물론 그럼에도 대부분 왕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법을 넘어서서 법조문 자체를 아예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일들을 못하도록 규범으로써 가치로써 이론으로 이념으로 그를 강제하도록 하자. 그게 법치주의고 입헌주의다. 법조문 그대로 따라 판결하고 적용한다.

 

그래서 법조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법이란 이미 문자로써 구체화되어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해석과 적용 과정에서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전문가의 존재가 필요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법을 법조인 스스로가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 법조문의 적용을 자의로써 임의로 해석해서 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구속기간을 일단위로 계산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시간단위로 할 수 있다고 조문에도 없는 해석을 적용해서 귀속을 취소한다던가 한다면? 범죄에는 법을 파괴하는 범죄와 법을 이용하는 범죄와 법을 만드는 범죄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법조문을 이용해 판결하는 위치에 있는 판사가 아예 법조문의 내용을 임의로 바꿔서 판결한다면 그 사회는 과연 그 법조문에 따른 예측가능한 일관된 질서가 존재한다 말할 수 있을까? 판사가 자의로 법조문과 상관없이 판결할 수 있는 사회를 과연 근대적인 법치사회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판사 한 명이 단 한 명만을 위해 그같은 판결을 내렸을 뿐 여전히 다른 사안들에 대해서는 기존의 법조문 아래에서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법이 한 사람을 위해 마음대로 조작되고 운영된다.

 

하긴 한국사회에서 법조인이란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양반이 된 것과 같은 특권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을 게다. 더 큰 사회적 지위와 권력과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집안에서 공부 좀 한다 하는 놈들은 법을 공부해서 그같은 신분을 손에 넣었던 것이었을 터였다. 그래서 검찰도 법원도 법이란 단지 자신을 위한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법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법을 얼마든지 편집하고 첨삭하고 조작할 수 있다 여기는 것이다. 그래도 누가 뭐랄 수 없다. 검찰이 아니면 검찰을 기소할 수도 없고, 판사를 기소해 봐야 판결 역시 같은 판사가 내리게 된다. 그러니 자기들은 뭐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리고 물러나면 그동안 해 온 일들에 비례해서 변호사로서 대단한 특혜도 주어진다. 법조인의 양심이라거나 명예같은 것은 그들과 더욱 관계없는 단어들일 터였다. 한국사회가 그러니까 얼마나 썩어 있는가. 한국사회에서 법이란 것이 얼마나 가치없는 헛소리인 것인가. 단지 자신과 반대정파가 불이익을 볼 때만 법은 존중해야 할 숭고한 가치가 된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무엇보다 판사새끼들 자신들일 것이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실제 법조문과 새롭게 나온 판례 사이에서 혼란에 빠지고, 이미 구속된 피의자들의 가족들은 자기 가족이 이번 판례를 근거로 구속취소가 될 수 없을까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여기에 대고 다시 앞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구속취소가 이루어지는가 설명해주어야 한다.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납득시키고 다시 이 사회의 규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비용과 노력은? 그를 위해 필요한 시간과 인력들은? 그런데도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런 판사놈 판결에 열광하는 2찍 놈들이 또한 가장 판사를 우습게 여기는 놈들이라는 점도 그래서 아이러니다. 대한민국은 과연 법치국가인가? 근본적인 의문부터 가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로 인해서? 바로 판사와 검사들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진정한 위기다. 

진심으로 근대 이전에는 동성애나 양성애, 혹은 성정체성혼란등이 없었을 것이라 믿고 있는 병신들이 의외로 많다. 당연히 그 대부분은 개독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일 테지만 아닌 놈들도 상당하다. 심지어 어떤 놈들은 민주당이 정체성정치를 하면서 원래 없던 것들을 실제로 믿게 된 결과 성소수자가 생겨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진짜 어떤 놈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근세 이전인 중세, 즉 판타지세계에선은 성소수자란 존재하지 않았었는가?

 

그런데 이게 진짜 웃간다는 게 오히려 고대로 넘어가면 성소수자라고 하는 구분 자체가 의미없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대놓고 남성이 같은 남성을 사랑하고, 여성이 같은 여성을 사랑하면서, 때로 여장을 즐기는 남성이나 남장을 즐기는 여성의 경우도 실제 역사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분도 높고 권력도 있고 돈도 많은 인사가 자기 취향에 따라 동성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성의 행동을 따라하는 정도는 그냥 그놈들 하는 짓거리라고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당시에는 더 많았다는 것이다. 하긴 에도시대 일본만 해도 중도라 해서 동성인 애인을 두는 것을 꽤나 특별한 취미처럼 여기고 있기도 했었다. 그같은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창을 공공연히 운영하기도 했고, 그래서 바로 이 중도의 일본발음인 나카마에서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성별을 여성으로 속이는 남성들을 지칭하는 넷카마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실제 동성애자라서 동성과 사랑을 나누는 것인지 그냥 취향이 그래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거기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 하나인 테베의 경우 신성부대라고 동성애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운영하기도 했었다. 각자가 전우애보다 더 끈끈한 애정으로 묶인 사이이다 보니 그 어느 부대보다도 단결력도 좋고 전투력도 훌륭했다 전해진다. 굳이 테베의 신성부대가 아니더라도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미 성인이 된 남성이 미성년인 동성을 애인으로 두고 그를 후원하고 훈육하는 역할을 맡는 전통이 있어 왔었다. 심지어 인간적으로 미숙한 여성보다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훨씬 우월한 같은 남성과 나누는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주장한 철학자마저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보면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 동성애를 그토록 엄격하게 금기시한 이유부터가 그만큼 동성애가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면 굳이 신의 이름을 빌려가면서까지 금지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 

 

중세에 들어 많은 문화권에서 동성애를 금기시하기 시작한 첫째 이유는 역시 문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생산과 상관없는 생식행위라는 점이 가장 컸을 것이다. 당장 집안을 물려받아야 할 자식이 동성애자라서 다른 이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면 바로 대가 끊기게 되는 것인데 가문이 더욱 중요해지던 중세 이후 그런 행위를 용납할 부모나 그를 신하로 거느려야 할 군주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도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상태에서 동성을 상대로 외도를 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토픽으로 보도되고는 했었다. 그런 점에서 가문을 물려받을 장남 이외에는 사실상 잉여로 여겼던 에도시대 일본에서 동성애에 대해 관대했던 것도 크게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이나 설사 집안은 물려받지 못했더라도 차남 이하에서도 더욱 많은 자손을 낳아 후손을 늘리는 것은 가문을 번창시키는 것으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뿐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가문의 일원을 늘리고 공동체와 국가에 있어서도 구성원을 늘려 집단을 번창시켜야 한다. 그런데 아이도 낳지 못하는 동성과 사랑을 한다? 이건 천륜을 어기는 행동인 것이다.

 

둘째는 앞서서 언급한 고대사회에서 이같은 소수성애들이 고귀한 신분들이 저지르는 사치스런 향락이나 일탈 정도로 여겨지고 있던 점도 이후 이를 도덕적으로 금기시하는 또 하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이른바 반PC들이 성소수자를 개인의 취향 정도로 여기면서 혐오감을 드러내는 그 원천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에서 동성애가 나오고 성정체성의 혼란이 나타난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며 남자가 여장을 하고 여자가 남장을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원래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런 행위들을 저지르는 것부터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이니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경우가 끊이지 않았었기에 중세사회에서도 그를 단죄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나타나게 된다. 중세에 동성애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는데 열심히 때려잡아서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실제로 근세의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2세부터 동성애자로서 결국 결혼도 않고 후손도 없이 죽고 난 뒤 왕위를 조카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역사상 후손을 남기지 못한 유명인 가운데는 그래서 의심받는 이들이 제법 된다. 그래서 철저히 사회로부터 탄압당해 왔으니 중세사회에 동성애는 없었다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튼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어떻게 판타지 세계에 바이섹슈얼이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중세유럽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 동성애자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 단언한다. 중세유럽에는 동성애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니까 성소수자라는 것도 결국 근대가 만들어낸 발명품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없어질 수 있는 것을 미국 민주당이 괜히 PC한다고 만들어낸 것이다. 오바마가 흑백간의 인종갈등을 만들어낸 것처럼 민주당의 정체성정치가 실재하지도 않는 성소수자를 현실에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들이 트럼프를 추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주장들이 과연 사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엄연히 궁녀와 사랑에 빠져 폐서인되었던 세자빈이 존재하는데. 성소수자가 실제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일까? 뭐 이유가 필요해서는 아닐 것이다. 혐오에는 이유가 필요없다. 웃기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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