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지시받은대로 몇 달에 걸쳐서 수많은 다양한 자료와 사례들을 취합해서 무려 3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다. 그랬더니 불과 한 시간만에 상사가 부르더니 야단친다.

 

"너 이거 틀렸어!"

 

사실 말이 300페이지지 원래 논문에 참고문헌의 목록을 반드시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고 있는 이유도 논문을 위해 인용된 문헌이나 자료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그와 같은 논리와 결론으로 이어졌는가 제대로 알아야 논문이 주장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참고한 자료나 인용한 사례들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결론 그 자체에 대해서만 판단하여 부정한다면 그것을 정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 자체가 정당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상사로서 판단을 내릴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는 자로써 정당하게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법으로 논문은 반드시 참고문헌까지 살펴봐야 한다고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에서 보고서에 대해 판단할 때 인용된 자료나 사례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살피고서 결론내려야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건 그냥 상식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국회에서 추천한 헌법재판관의 임명에 대해 별다른 법조항을 만들어 두지 않는 것도, 나아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가 의결한 법안에 대해 무제한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전까지 특별히 접으로 규정을 만들어 두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굳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최소한 그 정도의 상식 정도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었다. 재판 역시 다르지 않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재판에 쓰인 모든 증언과 증거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까지 모두 꼼꼼히 살펴야 한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최대한 재판과 관련한 자료들을 깊이 파악하고 이해한 뒤 피의자의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 없도록 판단을 내려야 한다. 굳이 그것을 법으로 강제하지 않은 것은 그런 것들이야 말로 너무나 당연한 책임이고 의무이며 상식이기 때문인 것이다. 판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기에 딱히 법적인 규정을 두지 않았다. 그랬더니 위법이 아니란다. 굳이 재판자료를 다 볼 필요 없이 피상적으로 아는 내용만으로 판단해도 위법이 아니니 정당하다.

 

한국에서 최근 가장 오염되고 모욕받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중도일 것이다. 대법원이 그래도 위법을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니 정당하고 민주당은 법원의 판결에 따라야 한다. 그를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판사가 재판기록을 전혀 살피지 않고, 재판에 어떤 증거와 증언과 근거와 논리와 절차와 과정들을 거쳤는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예단만 가지고 결론을 내렸는데 어차피 혐의가 있었으니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판사는 그냥 기소가 되면 검사든 피고인이든 어느 일방의 주장만으로도 하루만에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래도 위법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긴 그래서 고법에서 치러질 재항고심에서도 15일 첫 공판기일에 판결을 내리고 법정구속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일 게다. 그래도 된다. 그러한 판결에 대한 위법성조차 결국은 대법원이 판결한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대법원이 위법이 아니라 하면 위법이 아니게 된다. 그게 중도고 진보다. 아, 진보를 빼먹을 뻔했다. 역시나 엘리트 귀족주의자들 답게 진보도 여기서 빠지지 않는다.

 

어쩌먼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의 책임이 클 것이다. 언론이 그렇게 보도했다. 검찰이 그렇게 수사하고 기소했다. 판사가 그렇게 판결했다.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전제로 자기가 중도임을 자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의 정치적인 목적과 의도를 무시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는 합리적인 주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언제나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의 편에서 그를 근거로 자신이 중도임을 강변할 수 있다. 더욱 투명하다. 이재명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마저도 중도의 입장에서 긍정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중도다? 그게 문제다. 그런데도 스스로도 중도라 굳게 믿는다. 그러고 결국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힘이고 기껏해야 이준석일 텐데도. 하긴 한겨레도 윤석열 지지하고 이준석 지지하고 한동훈 지지하는데 진보이지 않던가. 김규항이나 진중권도 다르지 않을 테고. 참 말이라는 게... 웃기에는 현실이 참혹하다. 암담하다.

요즘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반PC주의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평등과 복지를 부정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로구나.

 

반PC주의자들 다수는 생각한다. PC주의란 흑인을 우대하는 것이다.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인해 오히려 아시아인들이 차별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백인들과 손잡고 흑인과 히스패닉을 우대하는 PC주의를 타도해야 아시아인의 지위도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는 백인이라면 당연히 아시아인도 차별한다. 실제 미국 사는 아시아인들 가운데 백인들로부터 차별받았던 경험을 토로하는 이들이 거의 다수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어째서 한국 원숭이들은 백인을 도와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믿는 것일까? 백인들이 그동안 자신들을 위협할 정도로 지위와 권리가 신장된 흑인과 히스패닉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시아인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흑인과 히스패닉을 위한 차별금지 및 소수인종 우대정책들로 인해 아시아인인 너희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그러니 함께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에 대한 우대정책을 폐지하자. 그러면서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무래도 이민의 동기부터 서로 다르기에 결과도 당연하게 크게 차이나게 되는 교육현장이라는 것이다.

 

아시아인 가운데 미국으로 이민까지 갈 수 있을 정도면 어느 정도 경제적인 기반이 갖춰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소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던 경우가 다수를 이룬다. 반면 흑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히스패닉들도 그야말로 살기 위해 목숨걸고 국경을 넘은 경우가 대부분일 터다. 그렇다 보니 이민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교육현장에서 아시아인의 우위는 실제 눈에 보일 정도로 두드러질 때가 많다. 그런데 소수인종우대정책은 그럼에도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인종적 정체성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되도록 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아시아인인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흑인이고 히스패닉이라는 이유로 저놈들이 내 기회를 빼앗아가고 있다. 사실 이건 인종과 경제적인 계급이 종합된 결과라 할 수 있을 테지만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철저히 인종문제로 몰아가며 진실을 호도한다. 거기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흑인과 히스패닉을 위한 소수인종 우대정책, 나아가 인종차별반대정책을 폐지해야 아시아인에게도 유리하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는 백인이라면 당연하게 아시아인도 차별한다. 아니 같은 백인 가운데서도 아일랜드계나 이탈리아계 혹은 동유럽계를 구분해서 차별하기도 한다.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우대정책이 마음에 안 드는 백인이 아시아인이라고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장에 흑인과 히스패닉을 공격하는데는 오히려 계급적인 이유까지 더해지며 그들로부터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는 아시아인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군복무자를 위한 가산점 폐지를 위해서 장애인을 이용했던 한국 여성주의자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군복무는 분명 특정한 성별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만 지워지는 불공정한 의무일 테지만 그것을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장애인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방적으로 의무만 지고 있는 처지인 남성은 장애인에 가려 그 권리를 주장할 당위성을 잃게 된다. 그러면 과연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진짜 장애인들을 걱정해서 그들을 앞세운 것이었을까? 그럴 거라 믿는다면 당신은 진성패미니스트일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보수라고 반드시 복지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정책 정도는 존재해 왔었다. 전두환 정부 아래에서 정부가 마련해 준 일자리에서 정부가 시키는 일들을 해주며 월급도 받고 때마다 쌀과 선물도 받아봤던 처지였기에 당연하게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 그들이 최소한 살아갈 수 있도록 선별적으로 복지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적인 진보, 혹은 리버럴들은 그러한 보수의 복지정책에 대해 인간의 기본권 차원에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해 왔었다. 그보다는 모든 국민들이 동등하게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진짜 당장 죽고 못살 것 같은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 어느 쪽 주장이 더 귀에 솔깃하겠는가.

 

나도 어차피 백인에게 차별받고 흑인도 백인에게 차별받는데 그래도 흑인이 나보다는 우대받는 것 같다. 그러니까 흑인과 연대해서 아예 모든 차별을 폐지하기보다 흑인을 끌어내려 그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복지라면 그 돈까지 모두 자기가 받아서 누리는 쪽이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나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 그러면 과연 그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에게 돌아갈 복지까지 모두 빼앗아 자신에게 주려 할 때 그 수준이 지금 당장도 자기보다 나은 정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이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급식이다.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도 같이 먹어야 하기에 어찌되었거나 일정 이상의 수준을 보장해야 하는 한국의 급식과 달리 어차피 있는 놈들은 사립학교에 다니며 알아서 따로 챙겨 먹을 것이기에 딱 그 수준에 맞는 정도로만 제공하고 있는 미국의 급식이 그 예인 것이다. 어차피 가난한 놈들에게만 주어질 무상급식인데 그 질과 양이 훌륭한 수준이라면 그만도 못한 밥을 먹여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지만 그만한 여유가 없기에.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아닐 것이기에. 그러니까 저놈들 것을 빼앗아서 자기만 주겠다는 소리에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차별받는 흑인과 히스패닉이 자신들을 제외한 또다른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겠다는 정당과 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차별받더라도 저놈들보다만 나으면 된다. 그런 점에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가난한 이들이나 소수인종 소수민족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 저놈보다만 나으면 된다. 저놈만 아니면 된다. 그렇게 몰아가기도 한다. 질시에서 비롯된 증오와 혐오, 그리고 공포야 말로 보수의 진짜 힘이 아닐까. 그것이 한국에서도 2찍 2030을 만들고 있는 것일 테고. 그게 반PC주의의 동력이다. 아무래도.

조선시대 형사재판이라 하면 아마 대부분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관청의 뜰에 죄인이 묶인 채 꿇어앉아 있고 복식을 갖춰입은 관리가 그 모습을 굽어보며 준엄하게 한 마디 꾸짖는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근대 이전 재판이라는 것이 대부분 그랬었다. 재판을 맡은 주체가 거의 고귀한 신분이거나 지위에 있었기에 그 권위에 기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더 고귀한 위치에 있는 만큼 그들의 판단은 절대적이었고 따라서 그 앞에서 피의자의 권리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근대의 재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근대적인 관행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재판을 맡은 귀족이나 관리가 마음대로 결정하던 것을 일정한 절차를 거치도록 강제하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장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변호사라는 직업도 생겨나게 된 것이었다. 한 번의 판결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자칫 실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3심을 절차를 거치도록 했고, 각각의 재판 동안에도 최대한 많은 변수와 가능성을 고려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법정을 열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생길 수 있는 또다른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원칙이 바로 무죄추정, 즉 피의자에게 유리하도록 판결한다는 것이었다. 재판기간이 괜히 그렇게 길고 공판도 여러 차례 열리고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재판관들이 보니까 대충 유죄인 것 같아서 유죄로 판결한다. 아니 대충도 아니다. 재판관들이 보니까 유죄가 확실한 것 같아서 몇 번 보지도 않고 바로 판결을 내린다. 근대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이다. 재판관은 신이 아니다. 근대 이전 재판을 맡은 귀족이나 관리들이 신적인 존재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분명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란 단지 법을 전공한 개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더 다양한 더 풍부한 변수와 가능성을 고려하여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진실을 파악하고 그 위에 피의자의 입장까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자칫 자신의 판단으로 인해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것이 근대적인 재판제도라는 것인데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놈들이 있다.

 

하긴 그러니까 윤석열의 내란을 지지하는 것일 게다. 윤석열의 내란따위 별 것 아니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일 터다. 더구나 서울대 아닌가. 무려 서울대 법대 나와서 사법고시라는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한 우월한 존재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대중에 의한 인기투표에 지나지 않는 민주주의보다는 그런 자격을 갖춘 이들이 지배하는 독재가 더 옳다. 최소한 2030 젊은 세대 가운데 이번 대법원 판결을 잘했다고 주장하는 놈들의 대가리속이란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물론 한겨레를 비롯한 2찍 진보들도 다르지 않다. 정의당이나 그들과 손잡은 녹색당이나 어차피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검찰 앞잡이다시피 했으니 뭐 달리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2심 재판에서 쓰인 자료들을 보지 않았더라도 재판관들이 보기에 유죄인 것 같으면 유죄고 그 판결이 옳다. 그를 존중해야 한다. 2심 재판은 무조건 틀렸으니까 그 자료를 볼 필요도 없이 그냥 대법관들이 알아서 판단했으면 그것이 옳은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강점기라고.

 

민주주의가 싫은 놈들이 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이해하기는 한다. 젊은 치기로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다수의 병신들이 뭔가를 해보려는 민주주의라는 게 참 한심하게도 여겨질 것이다. 자기처럼 대단히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다수의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 내가 여러 차례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니 민주주의보다는 현명하고 이성적인 이들에 의한 독재가 더 낫다. 젊은 층에서 특히 독재에 대한 향수를 흔히 찾아보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재판도 어렵게 복잡하고 긴 과정 거칠 필요 없이 그냥 바로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바로 젊은 미국인들의 지지로 트럼프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된다. 대법관이니까. 서울대 나왔으니까. 사법고시 합격한 판사니까. 그런 것을 또 잘한다고 칭찬하는 놈들이 있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전근대에 걸쳐 있는가 바로 보여주는 증거라고나 할까?

 

다만 그럼에도 민주주의 강점기라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다수가 그에 반대하는 소수를 억압하는 구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일 것이다.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놈들이 거의 40% 가까이 나오기는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도 최소 60%를 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인해 그나마 법원의 판결 만큼은 존중하고 권위를 인정해주던 중도층마저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판결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이런 식으로 졸속으로 급하게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게끔 판결하는 것이 과연 현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아가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려는 법원을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좋은 것인가? 심지어 그로 인해 법원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한 내란세력을 복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법원도 내란의 공범들이다. 

 

재미있다. 확실히 여기서 세대가 갈린다. 같은 2찍인데도 2030 젊은 세대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는 분위기인 반면 4050 이상들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오히려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도 재판까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공감대가 그래도 나이 좀 있는 세대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보이는 반면 젊은 세대들에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긴 이준석이 시험봐서 국회의원도 공천하자고 하니까 신나서 지지하던 놈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공정은 곽상도 아들이 50억을 퇴직금으로 받고, 심우정 딸이 규정까지 바꿔서 채용될 수 있으며, 한동훈 딸과 나경원 아들이 부정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공정인 것이다. 윤석열이 공정이고 김건희가 상식이며 문재인이 악의 근원이다. 4050 2찍들이 대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선택을 한다면 2030 2찍들의 경우는 6070과 같이 신념에 의한 판단에 근거한다고 할까?

 

아무튼 바로 같은 이유로 인해 조희대와 대법원의 의도한 바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박살나 버렸다는 것일 게다. 원래는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판결했으니 민주당에서 이재명에 반대하던 놈들이 일어나서 한 번 분탕질을 쳐보라는 의도였을 것인데 그 과정이 너무 개같다 보니 아무래도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때문이다. 이건 대놓고 민주당을 무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호응하는 것은 대법원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이고 나아가 민주당을 대법원의 아래에 갖다 바치는 꼴인 것이다. 아무리 이재명이 싫어서 개짓을 한다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사람은 더이상 민주당에 몸담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윤석열을 같은 편이라 여겼기에 이재명을 따돌리고 윤석열을 뒤에서 밀었던 것이지 이런 식으로 대놓고 적대하면 속내야 어쨌든 그에 편승하기 어렵다. 덕분에 민주당만 단단해졌다. 아마 조희대를 비롯한 대법관들 모두 탄핵한다 해도 이탈표 걱정은 없을 듯하다. 민주당을 이런 식으로 공격한다면 단단히 뭉쳐서 맞서야 한다. 노회찬이 말한대로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중국과 일본과도 손잡아야 하는 것처럼.

 

진짜 투명하다. 어째서 민주주의 강점기인가. 어째서 대한민국이 근대강점국가인가. 다시 전근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놈들이 있다. 법치도 아닌 인치로, 헌법조차 무시한 채 권력자 개인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국가를 원한다. 그런 놈들이 전체 인구의 35% 이상이다. 심지어 2030, 그 가운데서도 남성만 따지면 거의 과반에 육박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인가. 그래서 민주주의를 포기하면? 어쩔 수 없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주어진다. 자기파괴란 어쩌면 가장 존엄한 권리일지 모른다. 오로지 나만이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다. 대단하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새삼 존경하게 되는 이유다. 저런 국민들을 믿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믿기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개혁이 지지부진했던 첫째 이유는 역시 검찰의 자정력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검사가 문제가 아니다. 검찰이라는 조직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검찰이라는 조직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단지 비대한 권력만 조금 줄이자. 그래서 외과수술하듯 정교하게 덜어낼 부분을 덜어낸 다음 그것을 문제없이 다른 쪽으로 넘기기 위한 구상과 준비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그 결과 검찰이 반격할 여지를 만든 것이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이 과정에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낙연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윤석열 뒤에 김한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듯하다.

 

그런 점에서 유시민의 말처럼 조국은 검찰개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어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검찰이 조국을 통해 정면으로 정권을 들이받을 수 있는 동력이 되어 주었다. 사실 윤석열도 처음부터 이제 임기 2년차인 정권과 정면으로 부딪힐 생각까지는 아니었었다. 적당히 조국을 털면 알아서 문재인이 조국을 포기하고 검찰개혁도 다시 이전대로 되돌리겠거니. 더구나 자칫 지나치게 정권을 자극할 경우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검찰을 압박, 윤석열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조국을 털기 시작하니 언론이 모두 자기들 편이라 아예 그를 통해 정권 자체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압박할 실제적인 어떤 수단도 사용할 생각이 없음을 확인하고 있기까지 했었다. 이대로면 된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청와대까지 겨냥하면서 마음대로 위세를 떨었고 그 결과 대통령까지 되었던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검찰과 한 몸이 되어 날뛰었던 언론의 역할이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어쩌면 더 다행이라는 것이 오히려 검찰이 정권까지 잡으면서 절정의 위세를 떨치게 되면서 그 실체를 그동안 검찰개혁에 관심도 없던 중도층들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검찰과 저토록 한 몸이 되어 있는 언론을 보면서도 진짜 이대로는 안되겠구나. 민주당만이 아니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고 검찰개혁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언론의 선동에 휘둘리기까지 했었던 중도층까지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다시 방점을 찍어준 것이 이번 검찰의 문재인 기소다. 아마 문재인 정부였으면 대부분이 관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아도 이번 기소가 얼마나 문제인가. 그리고 이전의 기소와 재판들에 대해서까지 관심이 넓어진다. 법원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공감대까지 넓어져간다. 그게 다 누구 덕분이다?

 

아무튼 크게 보면 이번 검찰의 문재인 기소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검찰개혁의 필요성만 더 강조해주는 꼴이 되었다. 이제 검사는 스스로 자신을 개혁할 것을 기대할 조직이 아니다. 절대 이대로 그냥 내버려두어도 좋은 조직이 아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동안 검찰개혁을 앞장서서 막아왔던 민주당내 수박들과 정의당 같은 2찍 진보들이 국회에서도 많이 사라졌다는 점일 텐데... 민주노총이 간첩몰이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검찰개혁따위 노동자와 전혀 상관없다던 정의당이나 한겨레의 태도를 본다면 더욱 다행스러운 부분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윤석열 힘이 빠졌다고 진보인 연 하는 한겨레 새끼들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역시나 이번에도 한동훈이나 이준석을 지지할 것에 대한 경멸을 더하면서...

 

그럼에도 검찰의 이번 기소가 아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윤석열과 이준석을 그리 빨아제끼던 2찍 2030들이 다시 문재인을 악마화하며 결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나 그를 위한 기소였을 것이다. 원래 같은 편이었던 언론을 다시 부르고 문재인과 민주당이 싫어서 자신들을 지지했던 지지층들에게 이유를 더해준다. 내가 진짜 신기하다는 것이 그렇게 윤석열과 이준석을 지지하던 새끼들이 도대체 뭔 이유로 문재인을 그리 악마화까지 했던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긴 윤석열만도 못한 놈이 대통령 될까봐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켰어도 차마 민주당을 지지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그 새끼들이었으니. 너무 적나라해서 중도층에는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오판한 이유라 할까? 검찰은 없어져야 한다. 그 이유를 스스로 강변해준다. 정말 투명한 것들이다.

내가 한국 정치인 가운데 가장 트럼프와 닮은 인물로 꼽는 이가 바로 이준석이다. 이전에는 허경영이 있었다. 사실 이준석의 주장과 허경영의 그것 사이에는 그다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시피 하다. 거의 척수반사급으로 아무런 진지한 고민없이 그냥 감정과 본능이 시키는대로 싫어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내놓는다. 사실 허경영보다 오히려 더 나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허경영은 뭐라도 해주겠다 한다면 이준석은 오로지 다른 누군가를 못되게 하겠다는 증오와 혐오만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진짜 이렇게 혐오스런 정치인이 또 있나 싶다.

 

부처를 줄이겠단다. 정부부처를 현행 19개에서 13개로 줄이겠다. 정부의 조직이 너무 비대해서 세금을 낭비한다는 일부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일 게다. 그보다는 정부란 자신이 낸 세금을 쓰기만 하는 조직이라고 하는 일각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정부가 작아지면 세금도 줄어들고 규제도 따라서 사라진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주장 아닌가? 말 그대로다. 정치인은 세금만 쓴다. 국회는 세금만 쓴다. 정부는 세금만 쓴다. 그러니 줄이자. 그러면 정부 조직은 어떻게 지금처럼 비대해져 온 것일까? 원래 최초의 정부에서는 부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아마 이승만 당시는 12개였던가 그랬을 것이다. 이준석의 공약보다 더 적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부부처가 많아진 이유는 그냥 장관자리 하나 더 챙겨주려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주무부처가 장관급이냐 차관급이냐에 따라 업무를 진행하는데 있어 그 동력이나 속도가 크게 달라진다. 더불어 한 부처에 속해 있는 부속부서일 때와 독립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때가 또 다르다. 당장 예산부터 장관급이 전면에 나서는 것과 차관급, 혹은 그 이하가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부처 안에서 서로 업무가 경쟁관계에 있거나 아니더라도 그 입장이 갈리는 경우 한정된 예산과 지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질병관리청도 독립시킨 것 아니던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따로 보고하고 인가받을 필요 없이 질병관리청장의 재량으로 판단하고 실행한 뒤 대통령에게는 보고만 하라. 그래서 지금껏 부처들이 늘어났던 것이었다. 하도 경제정책이 대기업 위주로 이루어지니까 중소기업가 한국 정치인 가운데 가장 트럼프와 닮은 인물로 꼽는 이가 바로 이준석이다. 이전에는 허경영이 있었다. 사실 이준석의 주장과 허경영의 그것 사이에는 그다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시피 하다. 거의 척수반사급으로 아무런 진지한 고민없이 그냥 감정과 본능이 시키는대로 싫어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을 논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내놓는다. 사실 허경영보다 오히려 더 나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허경영은 뭐라도 해주겠다 한다면 이준석은 오로지 다른 누군가를 못되게 하겠다는 증오와 혐오만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진짜 이렇게 혐오스런 정치인이 또 있나 싶다.

 

부처를 줄이겠단다. 정부부처를 현행 19개에서 13개로 줄이겠다. 정부의 조직이 너무 비대해서 세금을 낭비한다는 일부의 지적을 받아들인 것일 게다. 그보다는 정부란 자신이 낸 세금을 쓰기만 하는 조직이라고 하는 일각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정부가 작아지면 세금도 줄어들고 규제도 따라서 사라진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주장 아닌가? 말 그대로다. 정치인은 세금만 쓴다. 국회는 세금만 쓴다. 정부는 세금만 쓴다. 그러니 줄이자. 그러면 정부 조직은 어떻게 지금처럼 비대해져 온 것일까? 원래 최초의 정부에서는 부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다. 아마 이승만 당시는 12개였던가 그랬을 것이다. 이준석의 공약보다 더 적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부부처가 많아진 이유는 그냥 장관자리 하나 더 챙겨주려 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주무부처가 장관급이냐 차관급이냐에 따라 업무를 진행하는데 있어 그 동력이나 속도가 크게 달라진다. 더불어 한 부처에 속해 있는 부속부서일 때와 독립적으로 업무를 추진할 때가 또 다르다. 당장 예산부터 장관급이 전면에 나서는 것과 차관급, 혹은 그 이하가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부처 안에서 서로 업무가 경쟁관계에 있거나 아니더라도 그 입장이 갈리는 경우 한정된 예산과 지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질병관리청도 독립시킨 것 아니던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따로 보고하고 인가받을 필요 없이 질병관리청장의 재량으로 판단하고 실행한 뒤 대통령에게는 보고만 하라. 그래서 지금껏 부처들이 늘어났던 것이었다. 하도 경제정책이 대기업 위주로 이루어지니까 중소벤처기업부도 따로 만들고 했던 것처럼. 문화정책과 교육정책을 함께 다루다 보니 생기는 문제점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가 나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명박 때 과기부 없앴다가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는가?

 

그래서 국토교통부와 환경부를 하나로 통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기업관련 정책들을 하나의 부처에서 담당하다 보니 대기업만을 위한 정책들만 추진되는 상황에서 보았듯 서로 대립되는 관계를 하나의 부처로 통합하는 것은 그냥 누구 하나 죽으라는 소리인 것이다. 국토교통부에서 개발 좀 하려 하면 바로 그 앞에서 딴죽을 놓던 부처가 바로 환경부였었다. 개발에 동반되는 환경파괴에 대해 그를 견제하라고 있는 부처가 환경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정부의 지향에 따라 두 부처의 위상도 크게 바뀌어 왔었다. 환경을 중시하면 환경부의 발언력이 조금 높아지고 아니면 그냥 거수기로 전락하는 식이다. 그런데 두 부처를 하나로 묶어서 한 명의 장관 아래에 둔다? 하긴 2030 남성들이 환경정책에 유독 적대적이기는 하다. 자신들이 살아야 할 미래는 지금의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미래가 아니라는 듯이. 그냥 환경정책 포기하자는 선언인 것이다. 아니면 개발을 하지 말자거나. 후자일 리는 없으니 전자다. 그런데 여기에 해양수산부까지 얹는다. 해양수산부가 어떻게 독립되어 나왔는가 배경을 안다면 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러나 그래서 2030 남성들은 환영한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으니까.

 

더구나 더 큰 문제가 정부부처를 줄인다고 정작 그 부처에 속해 실제 업무를 진행하는 부서들이나 담당 공무원까지 한 번에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아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장 미국을 보더라도 공무원을 임의로 대량으로 줄이거나 할 경우 그동안 진행하던 정부의 업무에 크게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해오던 일들이 있는데 갑자가 부서를 줄이고 공무원을 줄이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두 명이 하던 일을 한 명이 몰아하면 되지 않겠냐고 사회경험없는 병신새끼들은 좋아라 떠들겠지만 실제 취직해서 한 번 일해보라. 그게 되는가. 괜히 머스크가 미국 공무원들더러 자기가 일주일동안 한 일 다섯가지 적으라 하니까 쉽게 답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계속 맡은 일만 전문적으로 하다 보면 그런 경계조차 희미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더하라고? 그러니까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냥 겉으로 보이는 부서만 줄이거나. 그래서 뭐다? 그냥 보이기 위한 공약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는 당선될 가능성따위 없으니까. 그래서 그를 통해서 어떤 미래의 가치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더 낫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고민따위 전혀 없는 그저 자기를 지지해주는 사회경험없는 20대 남성들의 감정과 본능만을 건드리는 것이다. 네가 세금을 덜 낼 수 있도록 해주겠다. 이러니 혐오하지 않을 수 있나.

 

아주 좋아서 죽으려 하는 중이다. 민주당더러 팬덤정치한다 그러더니 자기들 좋아하는 이준석이 공약이라고 내놓으니까 똥인지 된장인지 카레인지 고민도 없이 드럼째로 들이키며 퍼뜨리고 있다. 그러니 이준석이 2030 남성들의 대변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대변이 그 대변인가는 모르겠다. 이것도 귀찮으니까 그냥 하나로 쓰자. 이준석이 미래다? 그래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하긴 한국 2030 가운데 유독 아직도 트럼프 지지자들이 그리 많더만. 다르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저런 놈을 열심히 빨아대는 자칭 중도와 자칭 진보들이란. 참 세상엔 병신새끼들도 많다. 끔찍스런 현실이다.

굳이 경향일보까지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것은 경향일보는 이념을 쫓는 언론이 아닌 검찰의 이익을 대변하는 준기관지이기 때문이다. 이놈들은 이념도 뭣도 없이 검찰이 말하면 받아쓰는, 그래서 검찰 가운데 여성의 입장도 받아서 전달하는 역할이 전부이기에 이놈들에 대해 뭐라 말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 여기기 때문이다. 경향일보를 이해하고 싶으면 검찰을 보면 된다. 아마 대선부터 가장 발악할 놈들이 이놈들이 아닐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나마 주류언론 가운데 진보를 자처하는 한겨레가 생각하는 중립적인 언론이 무엇인가 한 번 살펴보자. 가장 극우적이라는 조선일보, 그러나 한겨레는 그 조선일보를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이라 여기며 조선일보에서 기사를 내면 그를 따라가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왔었다. 지면에서 진보와 관련한 이슈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 있나? 반면 자기들이 이미 잘 아는 사안이고 직접 취재까지 마쳤음에도 결론에서 조선일보의 보도를 인용하고 끝난 사례는 꽤 상당하다. 조선일보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기자들이 편집부를 들이받기도 했던 언론이 한겨레다. 그러면 당시 그나마 공중파 가운데 민주당에 가까웠던 TBS에 대해서 한겨레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가?

 

얼마전 한겨레 기자놈이 윤석열 내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이야기하며 국민의힘은 중요하게 다루면서 민주당은 쏙 빼놓았던 적이 있었다. 그게 중립이고 공정이다. 즉 민주당 편에 서지 않는 것. 사실이더라도 민주당을 배제하고 이야기하는 것. 거짓이더라도 민주당을 공격할 때는 함께하는 것. 그래서 조선일보는 영향력있는 중요한 언론인 것이고 TBS는 폐쇄되어 마땅한 편향된 언론이었던 것이다. 그게 한겨레 기자놈들의 일관된 입장이었고, 그것을 알기에 지금도 한겨레 기자놈들 출연하는 유튜브채널은 아무리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더라도 아예 보지 않는다. 저 새끼들 대선만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어떤 지랄을 할 지가 바로 눈에 보이거든.

 

어떤 사람들은 명백한 적만을 적으로 두고 애매하면 최대한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애매한 놈이 매번 뒷통수만 치면 어떻게 하겠는가? 쿄토 인근에 기반이 없다 보니 나름 세력도 있던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몇 번이나 배신했음에도 중용했던 오다 노부나가였지만 그 배신이 너무 반복되니 결국 죽이고 만 것은 용서가 무한한 것은 아니라는 한 예인 것이다. 더구나 아예 대놓고 나는 민주당에 대해서는 절대 어떤 좋은 말도 표현도 쓸 수 없다고 강변하는 놈들은 과연 적일까, 아군일까? 그런데도 한겨레도 적이라 하면 극단적이라는 놈들이 아직 민주당 지지층 가운데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원래 전통적인 지지자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한겨레가 뒷통수치면 이재명 문제라고 그러려나?

 

중립이니 중도니 하는 주장들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중도란 민주당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대놓고 내란을 지지해도 조선일보더러 편향되었다 하는 것은 민주당의 극단적인 지지자들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의외로 정의당이나 녹색당 지지자 가운데는 민주당 지지자들처럼 조선일보에 적대적이지 않은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민주당에 조금이라도 우호적이면 편향적이다. 그게 언론의 중립이고 중도다. 그렇게 믿는 놈들이 아직 특히 주류사회에는 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내란사태는 그 실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 중대한 상황에서조차 차마 민주당에 좋은 말은 쓸 수 없어서 아예 언급을 회피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절박함이다.

 

굳이 지켜볼 필요까지는 없고 정권이 바뀌면 바로 언론개혁법 입법해서 자격없는 언론들부터 박살내 놔야 한다. 이미 자생력을 잃은 경향일보나 한겨레일보 같은 언론들부터 박살내고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욕하는 것도 이제 지친다. 일부러 없앨 필요 없이 그냥 정부에서 보조하는 것만 없애도 대부분 언론은 살아남지 못한다. 발악하겠지만 어쩌겠는가? 또다시 언론이 손잡고 윤석열 같은 괴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부역자들은 손을 봐야 한다. 이재명에 기대하는 부분 중 하나다. 일단 한겨레부터 폐간하고. 한겨레가 없어야 뒤가 편하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것은 오히려 버니 샌더스였다. 다수 청년과 중하층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그야말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그에 비해 힐러리는 이미 오바마와 경선을 치르면서 신선한 이미지도 사라졌고 이후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며 도덕성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나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당시 미국 민주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힘을 결집해서 그를 주저앉혔고 그 결과 반대편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대선후보가 되었던 트럼프에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었다.

 

당시 미국 대선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한 눈에도 정 반대편에 있는 듯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라는 두 대선후보가 정작 특히 청년층에서 지지층을 상당부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버니 샌더스에 열광하던 미국의 청년유권자들은 힐러리가 그를 이기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자 바로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트럼프 지지를 선택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결국은 당시 미국 청년들 대부분이 지금까지의 민주당과 공화당으로는 안된다고 하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지금까지의 민주당을 바꿔줄 샌더스가 경선에서 떨어진 이상 대안으로써 공화당의 기득권들을 이기고 대선후보가 된 트럼프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같은 병신짓을 작년 대선에서도 미국 민주당은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이미 대통령이 있는데, 그래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후보를 내세울 것이면 경선이라도 치를 것이지 하다하다 해리스가 무엇인가?

 

작년 미국 대선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 그래서 우리나라의 2007년 대선이었었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없이 이명박만 막겠다. 이미 있는 대통령도 억지로 탈당시키고, 그동안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주었던 지지자들에게서도 등을 돌린 채, 잔류민주당과 손잡고 조직을 이용해서 민의와 상관없이 대통령후보가 되어서는 한다는 소리가 이명박은 안된다. 얼마나 지리멸렬한 선거였으면 당시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유권자 상당수가 이후 치른 총선까지 상당수가 투표 자체를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명박이 잘해서 압도적인 차이로 이긴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정동영이 너무 병신이라서 당시까지 열린우리당에 투표했고 이후 민주당에 표를 주게 될 사람들 다수가 그냥 투표 자체를 포기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실수를 2022년 대선에서 지금 민주당은 반복하고 있었다. 그동안 당권을 쥐고 있던 놈들이 당원의 선택을 받아 대선후보가 된 이재명을 인정하지 못하고 주저앉히고자 아예 대선에서 태업을 해 버린 것이다. 차이라면 그럼에도 지지자들이 결집해서 최소한의 차이로 패배할 수 있었던 덕분에 아직도 민주당은 이재명을 중심으로 그를 지지한 당원들에 의해 꾸려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2007년 민주당은 물론 2016년 이후 미국 민주당은 아니었다. 당내에서의 싸움에서는 이겼어도 결국 자신을 지지해 줄 국민들을 이기려 한 결과 트럼프라는 괴물을 두 번이나 당선시키고 말았으니.

 

어차피 엘리트의 위선이라고 하면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도낀개낀이다. 민주당만 엘리트고 공화당은 엘리트가 아닌가? 민주당만 기득권친화적이고 공화당은 아닌 것인가? 트럼프는 그 가운데서도 누구보다 더 기득권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인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주당은 아니다. 왜? 미국에서 소외된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과 청년들을 위한 정치를 천명하며 이제까지의 미국을 바꾸고자 했던 버니 샌더스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힘으로 주저앉혔으니까. 그리고 선택한 것이 그동안 해오던대로 계속 해먹겠다는 힐러리였고, 도대체 뭐하는 인간인지도 모르는 얼굴마담이자 꼭두각시 해리슨이었다. 차라리 되도 않는 선정적인 주장들로 자신들을 현혹하는 트럼프가 낫지 아예 뭐가 문제인지 관심조차 없는 민주당이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확히 2016년과 2024년의 대선은 트럼프가 이긴 선거라기보다 민주당이 패배한 선거가 맞다. 그만큼 당시 미국 민주당은 미국의 대중들에게 더 이상 어떤 신선함도 매력도 어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럼프가 개짓하는 것을 욕하면서도 차라리 한국의 되도 않는 지지자들을 비웃지 미국 유권자들을 비웃지는 못한다. 대선후보가 하필 윤석열과 이낙연이면 허경영을 지지하는 심리도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 차이다.

 

대선후보 경선과 나아가 대선을 앞두고 새삼 민주당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은 부분이다. 어째서 미국 민주당은 미국 다수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가. 트럼프라고 하는 한 눈에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 괴물같은 후보를 상대해서도 어째서 두 번이나 패배하고 만 것인가? 코로나라고 하는 중대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 상황에서 트럼프가 저지른 실책들이 아니었다면, 심지어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민주당 정부는 정작 미국이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서 지리멸렬한 모습만을 보이며 수권정당으로서 그 신뢰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국제적인 이슈가 터져나올 때마다 미국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서 한국에 사는 내가 한숨을 쉬고 있었을 정도면 미국에서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가 되었는데 지금 하는 꼬라지 보면서도 여전히 절반 가까운 미국 국민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왜? 어째서? 

 

대중정당이 그 지지자인 대중을 무시하면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기 전까지 민주당이 바로 이랬었다. 그 시절 민주당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잠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최소 분 단위로 줄어들 것이다. 세상에 이런 발암종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미국 정치상황이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반트럼프시위를 버니 샌더스가 노구를 이끌고 주도하고 있는 모습이 그래서 어쩐지 기시감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고. 결국은 무언가. 지지자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정치가 무엇인가, 어떤 비전을 기대하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물갈이가 제대로 이루어진 지금의 민주당에 대한 기대가 크다. 역시 국회의원 선수를 제한하는 건 옳은 방향이었다. 미국 민주당을 저 모양으로 만든 것은 자신의 권력에 취한 다선 정치인들일 것이니. 트럼프가 물러난다고 과연 지금 미국 민주당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저렇게는 되지 말자는 것이다. 트럼프라는 괴물을 만든 것은 공화당이 아닌 정작 미국 민주당이다. 잊어서는 안된다.

기업들이, 그리고 그 기업이 속해 있는 나라들이 관세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게 아니다. 관세가 비싸게 매겨지면 당연하게 그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관세까지 포함해서 더 비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러 나라들에서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라고 하는 수단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관세가 공정한 무역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는 주장에는 관세를 통해 다른 나라의 같은 제품을 더 비싸게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자국 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을 유지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관세 만큼 다른 나라의 제품이 더 비싸게 팔리니 경쟁력에서 밀리는 자국 상품도 어느 정도 경쟁하며 파는 것이 가능해진다. 

 

백악관 대변인인 여자가 아마 백인이라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추종자가 꽤 되는 것 같던데, 어느 회견장에서 기자들과 논쟁하는 것을 쇼츠로 만들어서 돌려보며 빨아주는 것을 보고 기함한 적이 있었다. 확실히 백인이나 히스패닉에 대해서는 그리 적대적이던 놈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별 병신같은 소리로 우겨대는 것도 잘한다고 빨아주는 것을 보면 반PC의 실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관세는 결국 자국 국민들이 지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공정한 무역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반박하는 것을 보고 이거 완전 미친 년 아닌가. 그게 그 말이거든. 관세가 왜 공정한 무역을 위한 것인가? 관세를 매기는 만큼 제품의 가격이 비싸지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결국 관세만큼 더 가격경쟁력이 있는 자국 제품을 쓸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이전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당시까지 외제라는 말은 고급과 또한 자신의 부를 상징하는 단어처럼 쓰이고 있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안되는 사람은 더 비싸고 품질도 떨어지는 국산을 쓰는 것이고, 돈도 좀 있고 능력도 되는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수고를 들이더라도 더 품질좋은 외국산 제품을 쓰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아예 수입금지품목까지 정해서 장벽을 세웠던 탓에 국내 기업들은 훨씬 떨어지는 기술력에도 일정한 가격을 받으며 제품을 팔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여 지금 세계시장에서 경쟁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 시절 몰래 구입해서 쓰던 밀수품들이 업자들이 높은 마진을 붙여 팔았음에도 더 값도 싸고 품질도 좋았었다는 것은 그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부분일 것이다. 결국 관세로 인해 더 비싸지고 구하기도 어려워진 외국제품들로 인해 국내산 제품들이 더 떨어지는 성능과 품질에도 더 비싼 값에 팔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비용을 최종적으로 부담한 것은 어디의 누구였을까?

 

기업은 당연하게 이윤을 추구한다. 이익이 남아야 기업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관세로 인해 외국에서 제품을 수입해서 파는데 부담이 발생한다. 그러면 그 부담을 누군가에게는 대신 지워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이윤은 남을 수 있도록 소비자에게 제시할 가격을 정해야 하는데 당연히 그 가격에는 관세가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트럼프의 주장에 넘어간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결국 관세는 미국의 소비자들이 내는 세금이었다. 당연한 사실인데 정작 그 사실을 아는 미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도 역시. 더구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미국 부자들이 더 적은 세금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지금 트럼프가 준비하고 있는 경기부양정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득세와 법인세에 대한 감세다. 소득세는 말 그대로 내가 버는 돈에 비례해 내는 세금이다. 그러면 법인세는 기업이라는 단체에 물리는 세금이니 개인과는 상관없지 않은가. 기업의 순이익은 바로 이 법인세까지 제하고 난 나머지 이익을 뜻한다. 그리고 주주들에 대한 배당은 이 순이익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돈 많은 기업의 주주들이 더 많은 배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배당금에 대한 세금까지 줄여주면 뭐 그냥 돈많은 놈들은 세금도 더 적게 내면서 더 많이 벌라는 소리인 것이다. 대신 그 모든 빈 자리를 실제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입하면서 내라. 미국놈들이야 병신들이니 그렇다 치고 그런 걸 좋아라 빨아주는 한국 원숭이새끼들은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가. 

 

그러고보면 트럼프의 생각을 아주 이해 못할 것도 아닌 것이 예전 관세는 커녕 아예 수입금지품목까지 강제되던 시절에도 돈 많은 놈들은 그런 것따위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부자에 대한 인식 가운데 하나가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는 외국제 사치품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이었다. 오히려 수입이 안되는 제품을 쓰는 것이 자신의 부와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던 것이었다. 하물며 얼마 안하는 관세 따위야. 아니 오히려 관세가 높게 붙여서 보통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면 그것이 더욱 자신이 소비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관세가 부담이 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을 것이다. 그깟 관세따위. 간접세가 어째서 경제적 불평등에 기여하는가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진짜 부자들에게 간접세는 전혀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간접세는 꽤나 소비를 제약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아무튼 이제야 미국인들도 깨닫고 있는 모양이다. 오히려 한국의 원숭이들이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트럼프가 옳다. 트럼프가 영리했다. 트럼프가 현명했다. 일론 머스크마저 기함하는 상황에 대해서. 역시 중국발 미세먼지가 원인인 것일까? 지금 젊은 세대들의, 특히 y유전자를 가진 이들의 뇌성장에 영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한국인의 유전자 자체가 지능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유전자였거나. 지금 젊은 세대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노인과 여성과 중년을 좆되게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정책이라 믿는 그 대가리속처럼. 이준석이 미래다. 그러니까 트럼프나 빨아주겠지. 병신들.

심지어 박정희조차 유신 이전까지 자신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겠다고 대학 경내까지 군과 경찰을 밀어넣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대학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이 대학인 이유는 바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까지의 중등교육과 대학 이사의 고등교육이 구분되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공의 통제와 관리 아래 이루어지는 중등교육과 달리 고등교육은 주체들의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선택과 판단과 규율 아래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대학은 항상 자유로웠고, 바로 그 자유를 통해 대학들은 학문을 발전시켜올 수 있었다. 그를 위해서 이미 초창기 대학들부터 학생과 교수의 길드가 만들어지고, 대학 스스로가 세속 및 종교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강력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경우 그러한 대학의 권위와 자율성을 직접 침해하는 것은 상당한 금기로 여겨져서 어지간하면 지켜지고 있었다. 하물며 자유와 개인을 중요시하는 근대의 민주국가라면 말할 것도 없다.

 

대학에서 교수와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학문적인 견해와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은 따라서 대부분 시대에 대부분 정상적인 국가들에서 당연하게 용인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학이 현실의 권력자의 미움을 사서 신변에 위협을 받는 저명한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한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러면 또 대학의 보호를 받는 반체제인사들에 대해서도 자유를 중요시여기는 특히 서구의 국가들은 그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근대 인류의 지성과 양심과 사상과 철학은 인류사회의 근본적인 구조와 체제까지 바꾸는 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게 대학은 그 중심에 있었고 그것을 알기에 더욱 현대의 정상적인 국가들 대부분은 그러한 대학의 권위와 자율성을 적극 보호하는 편이다. 교육의 내용이나 방식에 대해 공적인 관리와 조율이 가해지는 중등교육과 달리 온전히 대학에 모든 교육을 맡기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그러므로 대학은 자유롭고 오로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니까 박정희부터 대학 경내에 군과 경찰을 밀어넣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고 알고 있으면서도 저지른 것이었다. 그것이 박정희와 전두환이 독재자라는 이유일 것이고.

 

미국이 내세울 수 있는 수출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교육일 것이었다. 워낙 자유를 중요시여기는 나라인 탓에 미국의 대학교육은 세계에서도 감히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자유롭고 그때문에 수준 또한 매우 높다. 그래서 세계에서 현대에 최첨단을 달리는 지식과 정보를 배우기 위해 미국의 대학들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들이 미국의 대학들에서 등록금으로 지불하는 돈과 미국에서 생활하기 위해 지출하는 돈만 생각해도 미국 경제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비싼 돈을 내고 미국의 대학에 들어간 유학생들을 단지 정부가 보기에 불편한 주장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내쫓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 정부가 좋아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직접 행동에 나섰다는 이유만으로 교육받을 권리 자체를 박탈한다. 그들은 이미 미국의 교육서비스를 돈을 내고 이용하는 소비자들일 텐데. 무엇보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대학에 대해 단지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강제이고 억압이다. 

 

더 웃기는 건 그럼에도 그런 트럼프 행정부가 하는 짓거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대한민국의 현역 대학생이거나 대학교육을 마친 청년들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긴 지금 2030 가운데 상당수가 과거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를 그리워하고 있기는 하다. 4050 운동권세대들이 쓸데없이 대한민국을 민주화시켰다며 분노와 반감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민주화라는 말이 조롱의 뜻으로 쓰인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대학도 공권력의 통제 아래에 놓여야 한다. 대학생들도 정부가 허락하는 주장만을 해야 한다. 내가 가장 어이없어 하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납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6070 늙다리들을 제외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고 최소한 침묵했던 세대가 누구였는가 떠올리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런데도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가 공정과 자유라는 것이 어이없을 따름이다.

 

아무튼 흥미롭다. 대학생들이 자유롭게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시위라는 행동을 통해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부가 얼마든지 억압할 수 있는데 야동을 보는 것을 억압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적표현물에 대해서까지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문득 1970년대 말 일본에서 포르노를 성인비디오라는 이름으로 허용한 배경을 떠올리게 된다. 1980년대 한국에서도 에로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지던 이유이기도 했다. 얼마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민주주의란 얼마나 취약한 제도인가. 하나의 체제와 구조가 근본부터 무너지는데는 아주 작은 그러면서 너무나 적은 노력과 시도만이 필요할 뿐이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저런 병신짓거리를... 아, 스위치2 가격 비싸진 것 보고 분노하는 놈들이 보이기는 하더라. 딱 그 정도 수준이다. 민주주의란 그런 점에서 인간과 아주 맞는 제도는 아닐 것이다. 병신들이 너무 많다.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이른바 2030 남성들이 바라는 청년정책이란 다른 게 아니다. 여성들 취업 못하게 해달라. 4050남성들 좀 직장에서 잘라달라. 그러기 위해서 더 일하기 힘들도록 급여도 줄이고, 일하는 시간도 늘리고, 복지도 없애달라.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을 위해 급여도 지원해주고, 목돈 만들 수 있도록 저축도 지원해주고, 청년들을 위한 임대주택도 만들어주고, 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그랬었다. 하다못해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노동자 가운데 같은 2030 청년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조차 공정하지 못하다고 반대하고 나섰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오로지 여성과 4050세대들. 저놈들 좆되게 하는 게 바로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심지어 출산률 가지고 그리 민주당 욕하던 놈들이 또 하던 짓거리가 결혼하고 출산도 한 직원들을 위한 여러 지원과 복지정책들에 대해 자기들 차별한다고 집단행동에 나서서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혼도 않고 아이도 없는 사람들보다 아이까지 낳은 사람들을 위해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여러 지원들을 하는 것을 반대하고는 그냥 예전대로 하자. 한 마디로 남 잘되는 꼬라지는 못보겠다. 그러니까 이준석이 미래의 아젠다를 이야기하는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준석이 말하는 여가부와 국민연금이란 무엇인가? 여성들에 대해 정부가 그동안 해오던 행정적 정치적 지원들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oecd회원국 중 최악이라는 노인빈곤문제를 그냥 손놓고 있겠다는 것이다. 노인들에게 너무 많은 재원이 돌아간다. 하긴 노인들도 박스 줍고 빈캔 줍고 그러다 서로 싸우고 그래야 그들이 바라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이겠지. 그러니까 국가가 비전을 가지고 무언가 더 많은 다수를 위해 보편적으로 행동할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그나마 누리는 것들을 빼앗는 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공정이고 상식이고 정의인 것이다. 트럼프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아마 정치인들이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무엇인가 물어본다면 거의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더불어 대기업을 위하고 환경에 반대하고 차별과 평등을 위한 모든 정책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바로 청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째서 여성들이 느닷없이 민주당으로 돌아서서 이재명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는가는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여성들은 민주당 지지자였다. 아닐 걸?

 

아닌 2030도 분명히 있다. 아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심지어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2030들 역시 말하는 걸 들어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페미가 싫다고 윤석열의 내란을 지지하는 놈들이 6070 다음으로 많을까. 그렇다고 실제 2030 남성들이 자기들이 주장한 것처럼 이준석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느냐면 또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는 게 우스운 것이다. 이준석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놈들이 그 정도만 되어도 그래도 들어주는 시늉 정도는 해 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입으로만 떠들지 정작 이준석 자신의 지지율만 보면 그냥 이름만 유명한 고만한 정치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역시나 그래서 남는 게 이재명은 안된다. 페미는 안된다. 4050 몰아내자. 

 

아무튼 그래서 가장 어이없는 것. 어째서 심우정에는 분노하지 않느냐 그랬더니 안 그럴 것 같은 놈이 그러면 더 화나는 거란다. 그래서 원래 그럴 것 같은 놈이어서 지지한 것인가. 사실 논리가 없기는 하다. 문재인 정부에서와 같은 일이 윤석열 정부에서 일어나도 그놈들은 전혀 분노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었으니. 2030 남성들이 가장 조용했던, 아니 심지어 환호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나쁜 건 다 문재인 때문이다. 참 편리한 뇌구조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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