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지시받은대로 몇 달에 걸쳐서 수많은 다양한 자료와 사례들을 취합해서 무려 3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다. 그랬더니 불과 한 시간만에 상사가 부르더니 야단친다.
"너 이거 틀렸어!"
사실 말이 300페이지지 원래 논문에 참고문헌의 목록을 반드시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고 있는 이유도 논문을 위해 인용된 문헌이나 자료에 대해서도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그와 같은 논리와 결론으로 이어졌는가 제대로 알아야 논문이 주장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참고한 자료나 인용한 사례들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결론 그 자체에 대해서만 판단하여 부정한다면 그것을 정당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 자체가 정당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상사로서 판단을 내릴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는 자로써 정당하게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법으로 논문은 반드시 참고문헌까지 살펴봐야 한다고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업에서 보고서에 대해 판단할 때 인용된 자료나 사례들에 대해서 일일이 다 살피고서 결론내려야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건 그냥 상식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국회에서 추천한 헌법재판관의 임명에 대해 별다른 법조항을 만들어 두지 않는 것도, 나아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가 의결한 법안에 대해 무제한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전까지 특별히 접으로 규정을 만들어 두거나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굳이 필요치 않았으니까. 최소한 그 정도의 상식 정도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은 것이었다. 재판 역시 다르지 않다.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재판에 쓰인 모든 증언과 증거와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들까지 모두 꼼꼼히 살펴야 한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최대한 재판과 관련한 자료들을 깊이 파악하고 이해한 뒤 피의자의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 없도록 판단을 내려야 한다. 굳이 그것을 법으로 강제하지 않은 것은 그런 것들이야 말로 너무나 당연한 책임이고 의무이며 상식이기 때문인 것이다. 판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기에 딱히 법적인 규정을 두지 않았다. 그랬더니 위법이 아니란다. 굳이 재판자료를 다 볼 필요 없이 피상적으로 아는 내용만으로 판단해도 위법이 아니니 정당하다.
한국에서 최근 가장 오염되고 모욕받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중도일 것이다. 대법원이 그래도 위법을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법을 어긴 것은 아니니 정당하고 민주당은 법원의 판결에 따라야 한다. 그를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판사가 재판기록을 전혀 살피지 않고, 재판에 어떤 증거와 증언과 근거와 논리와 절차와 과정들을 거쳤는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예단만 가지고 결론을 내렸는데 어차피 혐의가 있었으니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판사는 그냥 기소가 되면 검사든 피고인이든 어느 일방의 주장만으로도 하루만에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래도 위법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긴 그래서 고법에서 치러질 재항고심에서도 15일 첫 공판기일에 판결을 내리고 법정구속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일 게다. 그래도 된다. 그러한 판결에 대한 위법성조차 결국은 대법원이 판결한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대법원이 위법이 아니라 하면 위법이 아니게 된다. 그게 중도고 진보다. 아, 진보를 빼먹을 뻔했다. 역시나 엘리트 귀족주의자들 답게 진보도 여기서 빠지지 않는다.
어쩌먼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의 책임이 클 것이다. 언론이 그렇게 보도했다. 검찰이 그렇게 수사하고 기소했다. 판사가 그렇게 판결했다.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를 전제로 자기가 중도임을 자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의 정치적인 목적과 의도를 무시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근거를 가지는 합리적인 주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언제나 언론과 검찰과 사법부의 편에서 그를 근거로 자신이 중도임을 강변할 수 있다. 더욱 투명하다. 이재명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마저도 중도의 입장에서 긍정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중도다? 그게 문제다. 그런데도 스스로도 중도라 굳게 믿는다. 그러고 결국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힘이고 기껏해야 이준석일 텐데도. 하긴 한겨레도 윤석열 지지하고 이준석 지지하고 한동훈 지지하는데 진보이지 않던가. 김규항이나 진중권도 다르지 않을 테고. 참 말이라는 게... 웃기에는 현실이 참혹하다. 암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