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2030 남성들의 입버릇이 하나 있다. 

 

민주당이 뭐라도 잘못한 것 같으면 말한다.

 

"이러니 민주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면 중도적이니까 반대편인 국민의힘에도 그리 말하는가? 그러니까 저 발언들이 윤석열의 내란과 이어진 국민의힘의 헌재까지 부정하는 내란옹호 아래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저러고 있으니까 지지하지 못한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윤석열의 내란보다 국민의힘의 내란옹호보다 민주당의 잘못들이 더 중대하다. 

 

그래서 진짜 민주당이 뭔 잘못을 아주 크게 했는가? 그랬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났겠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용인할만한 행동들이거나 혹은 오히려 칭찬해 줄 만한 행동들마저 저러고 있으면 뭐 더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긴 민주당 지지자라는 것들이 동덕여대 시위와 서부지법 폭동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지랄하는 꼬라지도 보이기는 하더만. 그러고보면 윤석열 탄핵에 대해서도 여성 운운하는 게 꼴보기 싫어서 탄핵반대한다던 게 그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2030 남성들이었었지?

 

그냥 자기가 국민의힘 지지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나면 지금처럼 맘편하게 일방적으로 안전한 곳에서 남 욕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국민의힘 잘못할 때마다 욕먹는 게 싫어서 중도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지 실제로는 국민의힘 지지가 맞다. 그래서 그놈들 말버릇 중 하나가 왜 지지한 걸로 욕하느냐는 거다. 투표한 것으로 욕먹는 게 타당하다 그러는 것이다. 정치인이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렇게 욕해요. 웃기는 건 그런 놈들 표 받자고 민주당을 압박하면서 여성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자칭 지지자라는 병신들이다. 

 

진짜 수박들과 같다. 수박들 좆같은 이유가 뭐였는가? 뭐만 하면 중도층, 뭐만 하면 국민, 그러니까 지지자따위 무시하고 밟고 지나가도 괜찮다. 지금도 임종석 그딴 소리 지껄이고 있는 모양이더만. 그놈들이랑 똑같이 이미 다수 2030 여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에서 여성을 위한 정책도 포기하고, 젊은 여성들을 위한 정치적인 행보들도 그만두고, 아예 페미 자체를 범죄화하라고 지랄하고 있는 중이다. 2030 남성들의 표를 받아야 하니까 더이상 여성들을 위한 무엇도 하지 말라. 미친 새끼들 아닌가? 부산경남에서 표를 받아야 하니까 호남은 버리고 가자는 거랑 뭐가 다른가? 그런 새끼들일수록 목소리만 커서는. 젊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이 여성을 포기한다? 망하자는 소리겠지. 아닌가?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그리고 2030이라는 세대 안에 갇혀서만 사고하는 놈들은 어차피 민주당에 표를 줄 이유도 없고 그런 표 받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놈들 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페미를 범죄화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모든 혜택과 배려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성소수자와 장애인, 외국인 등등 사회적 약자들은 그냥 약자로 남겨두라는 것이다. 더불어 4050 일찌감치 내보내고 그 자리 2030 남성들에게 주라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민주당이 실제 그렇게 하면 진짜 표를 줄까? 더 나아가 그런 민주당에 그럼 나는 표를 줄 이유가 있을까? 그런 놈들은 그냥 이준석이랑 국민의힘에 알아서 하라고 맡기면 된다. 이미 지금도 지지하고 있구만 무슨?

 

모두를 가지려 할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은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청와대시절 동료와 당원, 지지자 가운데 청와대시절 동료를 선택하느라 당원과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자초하는 고민정처럼. 당원과 지지자들의 뜻을 따르려면 자신의 동지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요구를 외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이 감당하는 것이다. 이미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 그들에 충실하는 것이 옳다. 배신자는 포섭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리더가 될 수는 없다. 유시민이 참 좋은 말을 했다. 여성들의 지지를 받아서 겨우 이만큼 왔는데 그 여성들을 배신하자? 사람새끼들인가?

 

뭐가 됐든 민주당이 지지할 만하다 해서 성별과 세대를 떠나서 시민으로서 지지할 이유가 있으면 2030 남성들이라도 알아서 지지해 준다. 여성을 위하든 어쨌든 그러면서도 자기들도 위해주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뭐라 안해도 자신의 권리로서 지지도 하고 표도 준다. 나머지는 오로지 남성과 여성만 보고, 4050과 2030만 보는 놈들이다. 그런데 여성을 포기하고 4050을 포기할 것인가? 2030 남성들 표만 얻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보다보다 하는 꼬라지가 어이 없어서 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그런 게 민주당이기는 하다. 조용한 건 독재국가가 조용하다. 민주당이기에 시끄럽다. 서로 욕도 하고 멱살도 잡고 머리끄댕이도 당기고... 언론이 지랄이지. 사실은. 기레기새끼들.

조선왕조실록에 실제 있는 내용이다. 어느날 관아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는데, 가만 내용을 살펴보니 지어미가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왕이 판결한다. 아내로서 자기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니 벌을 주어서는 안된다. 비슷한 예로 너무 가난해서 남의 집 물건을 훔친 범인에게 그렇게까지 이웃이 굶주리도록 내버려둔 마을사람들 전체에게 책임을 물어 오히려 도둑을 구제한 사또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왜? 살인이고 절도일 텐데?

 

법대로 사건을 판단해서 유무죄를 가리고 처벌하는 것은 사법부의 역할이다. 법 이전에 사람의 문제로써 그 안에 어떤 사정이 숨어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그리고 정치인의 역할일 것이다. 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을 넘어서 어째서 죄를 저질렀고 그래서 그 원인과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최대한 다수를 위해 좋은 방향으로 억울한 피해 없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역할이 곧 정치라는 것이고 그래서 오래전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이들을 위정자라 불렀다. 정치를 행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원래 법이 있기 전부터 정치란 존재하고 있었고, 이미 있는 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도 정치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법치가 완비되기 이전, 사회가 보다 고도화되기 이전이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바로 이런 위정자들이 재판까지 전담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명판결 가운데 가끔 법이 뭐 이런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것들이 적지 않은 이유일 것이었다. 법보다 사람을 보고 죄보다는 그 사람의 사연과 처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부는 행위 자체만을 법에 따라 판단하지만 정치인은 그 이전의 사람의 문제를 봐야 한다.

 

이를테면 노조가 파업했을 때 그 합법성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 한다면 그럼에도 노조가 그렇게 파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서 다수 노동자들에게 억울한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억울한 사연이 있을 경우 최대한 구제될 수 있도록 법원의 판결을 넘어서 이야기들을 듣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적법성을 따져서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로 진압하려는 행정부와 달리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달려가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특히 사회적으로 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듣고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그 사이에서 노력해 왔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도 불법이라고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정부와 다르게 민주당 정치인들이 가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서 평화적으로 끝마치도록 나서지 않았었던가.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에도 그래서 모든 언론이 나서서 비난하는 가운데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현장을 찾아서 노동자들의 피해가 없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파업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떠나서, 그 파업이 폭력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시민의 요구가 있으면 찾아가서 중재하고 해결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가 사망했을 때도 그 법적인 판단의 여부를 떠나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찾아가서 억울한 사연들을 듣고 해결에 나서기도 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반드시 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그래서 반드시 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청소노동자라고 하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칫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지 않도록 정치로써 해결에 나선 경우였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여성인 대학생이고, 그 방법이 폭력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예 정치인이 그 자리에 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민주당 지지자라는 새끼들은 도대체 뭐하는 새끼들이란 것인가? 그것도 민주당을 지지할지도 모르는 2030 남성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유 가운데 당연히 여성주의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여성들을 위하고 싶어서 정치를 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절반이 바로 그 여성일 테니까. 더구나 아직 어린 대학생들이지 않은가. 아니 그런 것 다 떠나서 다수의 시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정을 들어주기를 바라는데 못하겠다 외면하는 정치인은, 아마 최소한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에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건 수박들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이 보수정당과 다른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역구가 달라도 찾아간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민주당 덕을 좀 봤었다. 그래서 억울한 사정이 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니까 가서 듣고서 그 안에서 들어줄만한 부분들에 대해 해결을 위해 노력해 보려 한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가? 더 어이없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이유라는 것이 다름아닌 또래의 다른 남성들이 그것일 싫어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지금 민주당을 지지하는 다수가 바로 그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지 않은가? 정당으로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을 위해 나서는 것이 지지하지 않는 이들의 불쾌감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옳지 못하다. 그러니까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싫어하면 대통령후보도 김문수를 영입해서 선거에 내보내야 한다는 뜻일까?

 

자꾸만 저따위로 떠들어대니까 2030 남성들이 자기들이 아주 갑인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지지해준다. 민주당이 어쩌면 내가 지지해 줄 것인다. 민주당이 이러면 내가 지지해 줄 것이다. 물론 그런 일따위 없다. 지지할 사람은 다 지지하고 있고 지금 여성을 핑계로 지지않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지지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시민으로서, 노동자로서, 군인이거나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혹은 상공인으로서 자신의 이해와 가치에 따라 자기와 맞는다 여겼으면 이미 지지하고 있을 테고, 여성을 이유로 지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차피 저들의 요구라는 것은 이미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불리할 수 있는 정책들을 민주당이 나서서 펴라는 것일 텐데, 이미 있는 지지자를 버리고 지지할지도 모르는 놈들을 위해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할까? 젊은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책들을 나서서 펼 수는 있어도 그것이 다른 성별 다른 세대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당장 이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게 불법적인 폭력시위까지 하기는 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대학생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그 대학생들이 남성들이었다고 민주당이 아주 외면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런데 2030 남성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누가 보면 2030 남성들이 민주당 머리 꼭대기에 앉은 상전인 줄 알겠다.

 

페미와 내란은 같다. 동덕여대 시위와 서부지법 폭동은 둘 다 폭력적이었으므로 똑같다. 심지어 민주사회에 무슨 폭력시위냐는 병신새끼들도 있다. 그러면 프랑스와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서 시위 때마다 폭동이 일어나고 하는 것일까? 2016년 촛불시위를 이야기하는 병신들도 있는데, 그것도 박원순이 중간에서 경찰개입을 막아줘서 그리 될 수 있었던 것이었지 작년 빠르게 탄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오세훈이 그렇게 평화적으로 끝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남태령에서 그런 정황들이 보이지 않았던가. 페미만 아니면 군사쿠데타도 괜찮고, 친일로 나라 팔아먹는 것도 상관없다는 놈들 무서워서 지지자인 젊은 여성들을 위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노력까지 폄하되어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지도 모르므로 기자회견 자체를 포기한 것은 그 또한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일 것이다. 정치인이니까. 그래서 정치인더러 정치를 하지 말라? 위법이고 불법이니 아예 끼어들지 말라? 민주당 지지자 맞아? 

 

이준석이 정치인 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2030 남성들이 윤석열을 지지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범죄는 범죄니까 타협하지 말고 처벌부터 해야 한다. 조금의 죄라도 있으면 어차피 범죄니까 수사해서 엄하게 원칙대로 처벌해야 한다. 일견 합리적이다. 그래서 트럼프를 합리적인 인물이라며 찬양하는 자칭 중도도 보았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정치가 아니다. 윤석열을 겪고서도 모르겠는가? 위법과 불법을 떠나서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사람만의 방식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정도를 따지고 방향을 따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 그냥 범죄니까. 불법이니까. 그러니까 아예 개입해서는 안된다. 어째서 대통령에게 사면권이 주어진다 생각하는가? 자기 측근들 죄 지어도 구제해 주라고? 내용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어도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없다. 그것이 당위성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민주당을 지지할까? 그래서 똥파리가 나오는 것일까? 웃긴다. 더구나 그 이유가 2030 남성들이라? 지랄은? 있는 지지자들이나 잘 지켜라. 엄한 남의 지지자 노리지 말고. 그러다 망한다. 병신새끼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저놈 싫다고 이놈 지지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 최소한 같은 기준으로 더 나은 쪽을 지지해야 옳은 것이다. 아무리 판단해도 지금 지지하는 놈이 그 이유가 된 놈보다 더 한심하고 병신같으면 그건 그냥 아예 생각을 안했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감정에만 충실했다는 것이다. 그걸 흔히 맹목이라 부른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민주당이 싫은 이유라 드는 것들이 한결같이 보수정당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엄격한 기준에 의한 것들이란 점이다. 사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최소한 지금 국민의힘은 그보다 더 형편없닌 평가를 받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명의 사법리스크를 말하는데 이재명이 저질렀다는 범죄라는 것들도 따져봐야 대부분 개인적인 것들이다. 실제 유죄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따질 수 있는 흠결이지 공적으로 판단할 만한 것은 아예라 좋을 정도로 없다. 반면 국민의힘은 지금 헌법 그 자체를 철저히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중이다. 내란을 저지른 주범을 옹호하며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흔들고 그 존재마저 부정하려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재명 때문에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그냥 감정만으로?

 

이재명에 대해서는 오로지 인간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다른 국민의힘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다. 내란특검에 반대하는 안철수라던가, 계엄철회를 의결하는 회의장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이준석이라던가, 계엄 자체를 찬성하는 김문수라던가, 내란이 아니라 주장하는 홍준표를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이재명의 사법리스크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구차한가. 더구나 정치인이기 이전에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서마저 당당히 받아들이는 우직함을 주장한다. 그러다 노무현이 어떻게 되었었는데? 노무현 같은 정치인 그립다고 그러는데 노무현 임기말 지지율이 20%가 안되었었다. 지랄들 하신다. 그렇게 노무현 좋아하는 국민이 많았으면 그때 노무현 지지율이 그 꼬라지였겠다. 더 웃기는 건 문재인 까내리는 걸로 5년을 보낸 새끼들이 문재인과 비교하며 쳐올린다는 것.

 

아무튼 진짜 구차하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가 원래 보수라고 인정하고 내란이 아니라 여긴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힘 지지한다 말하면 병신새끼라 한 마디 하고 말지 뭐 더 말하겠는가? 하긴 그놈들이 그리 떠받드는 조던 피터슨만 해도 하는 소리만 보면 죄다 극우 그 자체인데 자기는 절대 극우가 아니라 강변하고는 한다. 그놈들도 똑같다. 자기들은 보수가 아니란다. 합리적인 중도란다. 적당한 계기만 주어지면 민주당도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지 민주당이 국민의힘보다 못해서 지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에서 김문수 같은 놈들 데려다 후보로 내놓으라고? 그렇다고 이낙연이 당대표일 때도 민주당을 지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 않은가. 김한길류가 당대표일 때 민주당을 지지한 놈이 몇이나 될까? 내가 보수가 아닌데 보수정당을 지지하려니까 민주당에 탓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는 여전히 합리적인 중도이고 싶으니까 민주당이 잘못해서다. 그러니까 그 기준 그대로 국민의힘에 물어 보라고.

 

내가 인터넷에서 열심히 목소리를 높이는 이른바 2030 남성들에 대해 한심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분명 이념이 있다. 자기들만의 공통된 정치적인 지향과 성향이 실제 존재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실제 그들은 보수인 것이 맞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곧죽어도 중도다. 자기들은 오로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중도일 뿐인데 단지 현실이 그들로 하여금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투표하게 만드는 것 뿐이다. 그래서 민주당에 대해서는 꼬투리 하나라도 들춰서 비난하면서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정당이라며 그냥 무시한다. 그런데 그런 게 중도? 아들이 둘 있는데 하나는 평균 50점 맞았어도 칭찬해주고, 하나는 평균 90점 맞았어도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데 자식이니 공평하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뇌가 있으면 그런 식으로 핑계대지는 않을 텐데.

 

사실 그런 점에서 여론조사에서 특히 젊은 층에서 중도와 진보는 과포집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리고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율도 실제보다 낮게 나온다 보는 것이 옳다. 표는 국민의힘에 주고, 국민의힘 인사들에 더 우호적이면서, 민주당에만 일방적으로 엄격한데도 자기는 절대 지지자 아니라는 놈들이 이리 많으니까. 얘기하다 보면 진짜 천불이 터진다. 조던 피터슨과 토론하던 진짜 학자들이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전제를 인정하지 않으니 진전이 되지 않는다. 그러려고 그러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이 들어야 할 욕까지 내가 먹기는 싫다. 비난은 듣기 싫고 욕은 하고 싶고. 비겁한 것이다. 추악하다.

아주 오래전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주 싫어하는 엘리트 좌파였다. 흔히 말하는 오만한 진보라는 단어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날 사람들에게 그리 물은 것이었다. 보수는 저리 쉬운데 어째서 진보는 이토록 어려운가? 보수는 주장도 행동도 저리 쉬운데 진보는 어째서 모든 과정들이 어렵기만 한가? 그래서 내가 그때 들려준 대답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었다.

 

당장 반PC주의를 주장하는 어느 젊은 남성의 한 마디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그러고 살아왔는데 괜히 쓸데없는 소리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럭저럭 큰 문제없이 잘 살아오고 있는데 괜한 새로운 주장들로 인해 온통 시끄럽고 성가셔지고 있다. 즉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기는 해도 어차피 그동안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일들이고 그에 사람들도 적응한 상태라고 하는 전제 위에서 그저 새로운 주장이나 제안들에 대해 그 문제점만 지적해도 충분한 상당히 일방적이고 편리한 구조 안에 보수는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더 어렵고 더 복잡한 논리 없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없이, 그냥 기존의 구조 위에서 상대를 공격하기만 하면 되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실제 그동안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대한 2030 남성들의 태도 역시 대부분 그러했었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오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서 비난하다가 정작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원래 그런 정당이라는 한 마디로 퉁칠 때가 많았다. 원래 그런 정당이니까 굳이 비판할 필요도 없고, 민주당은 그보다 더 잘해보겠다고 주장하는 정당이니까 하나하나를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헌 행위 자체가 민주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강화시키고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민주당에 대해서는 모든 최선의 가정을 전제하여 비판하면서 국민의힘에 대해서는 최악의 현실을 전제하여 옹호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국민의힘은 기존의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대변하는 정당인 반면 민주당은 그것을 바꿔보자는 정당일 테니까. 그러니 뭐라도 더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못한 부분이 있으면 민주당은 그 존재 자체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여긴다.

 

그나마 보수는 이렇고 극우는 이보다도 더 쉽다. 히틀러를 떠올려보면 된다. 마오쩌둥과 홍위병을 떠올려보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아마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전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정의 어쩌고 떠들며 만들어서 방영하던 만화영화의 주제들도 그렇다. 주인공이랍시고 나오는 역시나 어린 새끼들도 입만 열면 정의를 떠들어대는데 결국 그 정의라는 것은 작품이 명시한 악당들을 때려잡는 것이다. 때로는 외계인이고, 때로는 역사 이전부터 존재한 신비한 세력들이었으며, 때로는 정신나간 과학자가 그 중심에 있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저 새끼들 나쁜 새끼들이니 정의로운 우리가 때려잡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더해 지금 너무나 선량하고 능력도 있는 네가 지금처럼 비루하고 한심한 처지로 내몰린 모든 책임이 그 나쁜 놈들에 있다고 하면 자신의 지금 처지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새끼들 때려잡자.

 

미워할 대상을 만들면 된다. 증오할 대상을 만들면 된다. 당연히 그 증오는 공포에서 비롯될 것이다. 저 새끼들을 때려잡아야 내가 산다. 저 새끼들 때려잡으면 내가 지금보다 더 영광스러워질 수 있다. 이를테면 이준석의 세대포위론 이후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4050 세대들이 모두 물러나면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이었다. 4050 늙다리들이 능력도 안되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꼼짝도 않으니 자기들이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된다. 나아가 여성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자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도 쫓아내고, 조선족도 내보내고, 혹은 장애인이거나 성소수자거나 못배우고 거지같이 산다고 대우받는 패배자들이거나. 그래서 민주당에 이렇게 해달라 요구하는 2030 남성들을 가끔 보면 정작 자신들을 위해 이러저러한 일들을 해달라기보다는 쟤들 좆되게 해달라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얘들 내쫓아라, 얘들 처벌해라, 얘들 특권을 줄여라, 정작 그 특권이 뭔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미 2030 남성들을 특정하지 않을 경우 아직 사회적으로 약자인 청년세대들을 위한 정책들은 대부분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의해 실제 추진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힘은 그런 것이 없다. 대신 국민의힘은 자신들이 적대하는 그들을 적대한다는 믿음이 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얼마를 더 양보해야 하고, 얼마나 더 배려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손해와 피해들을 감수해야 하는가는 꽤나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와 그를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동의하기 위한 지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하는 성가시고 불편하기만 한 과정들이란 것이다. 그에 비해 저 새끼 나쁘고, 저 새끼가 문제고, 그러므로 저 새끼만 때려잡으면 된다는 건 얼마나 쉬운가 말이다. 이게 다 페미들 때문이다. 이게 다 PC주의자들 때문이다. 게임이 실패한 이유를 정교하게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대해 바로 달리는 이게 다 PC가 문제라는 댓글같은 것이다. 더이상 고도의 분석과 이해같은 건 필요없고 하나의 적만을 대상으로 자신의 감정만을 투사하면 그것으로 자신은 얼마든지 더 현명해지고 더 지혜로워지며 심지어 더 정의롭고 더 도덕적일 수 있다. 그런데 포기하는가?

 

지금 2030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도 비슷한 놈들이 있었다. 들어는 봤는가 모르겠다. NL이라고. 지금은 흔히 주사파라고 부르는 그놈들이다. 임종석과 하태경이 그때 그 대빵 쯤 된다. 하는 짓거리가 닮아 있는 이유아. 전두환이 나쁘고 미국도 나쁘니까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도 만만세, 주체사상을 배우고 추종하는 것도 만만세, 자기들과 반대하면 같은 운동권이라도 가차없다. PD계열에서 NL이라면 지금도 이를 가는 사람이 적지 않은 이유다. 민노당도 통진당도 바로 그 해묵은 갈등이 원인이 되어 깨졌었다. 유시민도 그래서 머리채를 잡혔던 것이었고. 그러면 그때는 어째서 주장하는 것도 구린 NL이 더 대세가 되었던 것일까? 쉬웠거든? 간단했다. 그래서 편했다. 전두환 나쁜새끼, 박정희 나쁜 새끼, 미국 나쁜 놈들, 그러니까 북한 우리 편, 한 민족, 우리끼리. 그런데 그때 NL들이 지금도 그러고 다니는가? 일부 사회부적응자들이 그러고 다닌다. 직장도 얻고 가정도 꾸리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NL들은 지금은 더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 오히려 이제는 그 나쁜 새끼들은 군사독재의 후신인 보수정당을 지지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경로다. 다만 문제라면 그때 NL들이 나쁜 놈들이라 믿었던 놈들 가운데 박정희, 전두환은 진짜 나쁜 새끼들이었지만 지금 2030이 믿는 나쁜 놈들인 민주당은 과연 그러한가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것도 이미 정착된 사회의 구조와 진보하고 있는 가치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아무튼 내 결론은 이거다. 지금 2030 남성들이 보수를 넘어서 극우를 추종하는 것은 원래 그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더 쉽고 편한 답을 찾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물론 인정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항상 떠드는 말이 자기들이야 말로 단군이래 가장 고등교육을 받은 가장 똑똑한 세대라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것치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일차원적인 감정에 기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얘 나쁘고, 쟤 나쁘고, 저놈들 못됐고. 똑똑한 건 맞는 것 같은데 정작 그 똑똑한 머리를 쓰는 방향이 잘못되었다기보다 편향된 경우가 많다. 자기 분야에 더 열심이다 보니 정작 필요한 공동체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게으르다. 당장 내 일이 아니니까. 그래서 파편화된 개인들의 집합인 정의가 일방적인 방향성을 보이기 쉬운 것이다. 거기에 불을 지르는 것이 인터넷이고 유튜브일 테고. 특히 20대 남성들의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가 민주당의 그것에 비해 3배나 높다는 것은 그를 보여주는 즐거일 것이다. 지금 국민의힘이 민주당보다 얼마나 더 잘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들의 극우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국민의힘이 보수인가?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전제왕조라 말할 때 전제란 곧 특정한 개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여론이나 법률과 상관없이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세습된 군주가 오로지 자신의 권위만으로 신하들이 뭐라 하든, 법조문에 뭐라 적혀있든, 관습이나 전통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도를 일컬어 전제왕정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의 경우에도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이 있었고 조정에서 대신들이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도 하고 있었지만 왕이 그러고자 마음먹으면 현실적으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일개 현감을 몇 단계나 건너뛰어 바로 한 방면의 수군을 지휘하는 절도사로 임명하는 것이라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었지만 결국 선조가 그러자고 밀어붙이니 실제 그렇게 이루어지고 말았었다. 그게 왕정이다.

 

물론 왕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도 명목상 인민회의에서 선출된 주석이 공식적으로 국가의 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과거 소련에서는 서기장이라 불렸었고 지금도 푸틴은 공식적으로는 선거에 의해 러시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다.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 역시 총통이라 불리웠었다. 하긴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긴 하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와 전두환까지 헌법이란 것은 권력자가 필요로 하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는 그냥 명분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니. 권력자의 의지가 중요하지 헌법의 조문따위 무가치하고 무력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 모든 세속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상위의 규범으로서 헌법을 전제하여 그 범위 안에서 모든 권력이 쓰이도록 강제하는 제도를 입헌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같은 왕조라도 국왕조차 최상위 법전인 헌법의 조문을 넘어서서 권력을 사용하지 못할 때 그것을 입헌왕조라고 하여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상위 법전인 헌법은 특정한 개인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닌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함의에 의해 결정된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바로 그같은 입헌주의 위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그 헌법의 조문에 따라 사실을 판단하여 판결하는 헌법재판소는 입헌주의 체제 아래에서, 즉 헌정이라고 하는 정체성 아래에서 최고권위를 가지는 의결이라는 것이다. 헌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렇게 판단해야 한다. 괜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여러 다양한 경로로 임명하도록 헌법에 규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헌법을 사유화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다양한 구성원들이 헌법에 대해 판단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강제해 놓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에는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이념들 가운데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울러야 하는 것이고, 삼권분립 아래에서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는 취지에 맞게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자신의 몫을 가지고 구성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헌법재판관의 이념이나 성향을 따져묻는 자체가 헌법재판관의 임명과 관련한 헌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오독하는, 아니 부정하고 폄훼하는 반헌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에 있어 대통령의 권위는 바로 이 헌법에 우선하는가?

 

실제 대통령도 아니다. 대통령이 탄핵되어 잠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대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혹시라도 누군가 헌법을 어기고 헌법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경우를 경계하기 위해서 헌법에 규정해 놓은 헌법에 대해 판단하는 주체로써 정의되어 있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겠다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가 대행하고 있는 대통령부터가 헌법을 무시하고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구속되어 기소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탄핵여부에 대한 판단에 있어 그 정부가 속한 여당은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아예 무시한 채 짓밟으려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대한민국은 헌정국가인가. 입헌주의 국가인가. 대한민국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인가. 대통령이란, 그 대행이란 단지 선출된 전제군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심지어 그런 놈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최소 3학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화강점기 상태라고. 원래 민주주의를 바라지 않았던 놈들이 잠시 민주화의 강점을 벗어나기 위해 한창 독립운동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자면 지금 윤석열을 지지하고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최상목을 지지하는 놈들은 단지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정복당한 전제주의 대한민국의 피정복백성들인 것이다. 특히 반PC를 주장하는 2찍들의 논리대로라면 마땅히 차별하고 억압해서 다수를 따르도록 강제해야 할 대상들인 셈이다. 그놈들에게 과연 대한민국이란, 민주주의란, 헌법이란 어떤 의미인가. 하긴 의사당을 점거하고 폭동까지 일으킨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을 우상화하는 놈들이 또 그런 놈들일 테니. 그런 놈들이 자유를 주장할 수 있다는 현실의 모순이 우스울 뿐.

 

괜히 윤석열의 내란시도 이후 6공화국체제가 종말을 맞았다 떠드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헌법을 부정하고, 헌법을 무시하고, 헌법에 반하여 행동함에도 스스로 너무 당당하고 그런 행동들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너무 많다. 지식인이라는 것들까지 그러고 있다. 진보를 자처하던 놈들까지도 거기에 한 몫 끼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정과 민주주의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었는가. 새삼 확인한다. 대한민국 안에는 두 개의 정체가 존재한다. 그래서 더 강하게 억압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입헌주의 국가이며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반역은 원래 구족을 멸하게 되어 있다. 번국이 3족이다. 거름으로도 못쓸 쓰레기들이다.

원래 조선사회에서 과거란 양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실력만 되면 합격도 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었다. 그래서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과거에 합격해서 입신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단, 여기서 농사짓다가라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 땅도 가지고 있고, 그 땅을 경작한 노비며 소작인도 상당히 거느리고 있어서, 굳이 자기가 직접 뼈빠지게 농사지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향리나 호족들을 겸손하게 일컫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진짜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공부도 해서 과거에 급제한 예는 내가 아는 바로 없다.

 

당연하게 조선시대에는 책이 무척 비쌌다. 제대로 한 번 배워보려 선생님이라도 부르려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서 유학이라도 가려 하면 그동안 들어가는 돈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공부하려 하면 그동안 집안일은 아예 손을 놓아야만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생각보다 그리 낮지만은 않았던 것이었다. 남편이 과거공부한다고 책만 들이파는 사이 집안일을 대부분 책임지는 것은 아내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주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진 것도 없는 농민들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심지어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양반이 넘쳐나게 된 만큼 경쟁도 치열해져서 더이상 한 가정단위의 지원만으로는 급제를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어지간한 양반집안이라도 한 집안만으로는 그 비용이 감당이 안 되어서 아예 문중 전체가 나서서 될만한 이들을 밀어야 하는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비용이 감당이 안될 것 같으면, 어차피 대과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갈 기대가 없을 경우 그냥 과거에 합격했다는 명예 하나만 챙기고 포기하는 경우도 조선후기에는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초시니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면 원래 양인이면 다 볼 수 있는 시험이던 과거가 양반 가운데서도 선택된 일부만을 위한 제도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해서 관적에 나갈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과거도 볼 수 있었던 소수의 양반들을 벌열이라 불렀다. 어차피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얻을 수도 없고, 아예 과거 자체를 포기한 지방의 양반들은 달리 향반이나 잔반이라 불렀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는 주위 어딘가에는 실제 있는 사실들일 터다. 그나마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방 하나에 모든 가족이 모여 사는 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부방조차 없이 식구들과 부대끼며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이 학원까지 다니며 공부하는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참고서 한 권 사려 해도 눈치가 보이고, 학원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해도 옆에서 봐주고 챙겨줄 사람조차 없다면 그래도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더 잘살고 더 좋은 조건에서 공부하는 아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는 곳이 농촌이라서, 저기 멀리 외딴 섬이라서 더욱 그러고 싶어도 학원조차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인종적으로 그리 다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는 편이지만 인종과 민족이 다양한 사회라면 각자가 속한 집단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개인의 노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단지 드러난 결과만으로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해서 그들에게 기회에 차등을 두는 것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학창시절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들로 인해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기에 같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을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보니 오바마가 어린 시절 마약을 했었다 그랬던가? 그렇게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는 시간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개인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부르주아라는 착취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피착취자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층위을 가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저 착취만 하고 착취를 당하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면 고도로 복잡해진 구조 속에서 각자 일저부분 착취도 하면서 착취를 당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고민이자 마르크스주의가 공격받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드러난 학업성적만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이고 공정한 대우인가.

 

역시 조금 전 썼던 글과 이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인 것이다. 그래서 포용이고 관용인 것이다. 그래서 평등이고 그래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정치적인 올바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관성적으로 믿어왔던 행동들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더 복잡하고 번잡하고 성가신 대안을 찾아서 고민해 보자. 그러니까 당장 보이는 능력과 상관없이 각자가 놓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기회를 동등하게 주고 그 안에서 서로가 대등해질 수 있도록 사회가 만들어 보자. 그럼에도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중간에 도태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능력이 부족해서 도태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한 사회의 불만과 불안을 줄이는 과정일 것이다.

 

사회가 개인화될수록 정의 역시 파편화된다. 그래서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정의와 가치와 윤리와 도덕에도 개별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개인에 대해서도 그에 맞는 해석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구조상 그렇게 모든 구성원들에게까지 필요한 해석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 모든 개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배려란 기회라고 하는 가능성을 일반화하여 열어주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다. 역시나 반PC주의자들이 극혐하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는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역시 두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일 것이다. 일극의 세계와 다원성의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 더 쉬운 것은 전자일 타다. 후자를 설득하기란 너무 어렵다. 안타깝게도. 직관으로는 알아도 논리로 설명하기란 너무 지난한 과정이다. 하물며 설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고대 동지중해세계에서는 비의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 이른바 미스테리아라 일컬어지는 어떤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간단히 지금 자신들이 사는 세계는 거짓된 것으로 세상 어딘가에는 진실한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그 진실을 통해 인간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한때 예수가 불교를 배웠다는 주장이 유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를 가리키는 메시아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어원이 같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를 보면 불교와 마찬가지로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가서 고행만 하는 종파도 존재했었다. 고행이 자신들을 그 진실로 이끌어주리라.

 

최초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타고라스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여겨진다. 왜냐면 피타고라스 자신이 그와 관련한 명제를 스스로 쳔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세사의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피타고라스는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진실한 비밀이 바로 수에 있다고 당시 결론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었다. 말 그대로다. 유럽 문명의 수학과 과학은 바로 동지중해세계에서 유행했던 바로 이 비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수학을, 물리의 법칙들을, 현실의 모든 현상들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의 질서를 찾아낼 수 있으면 그것이 이 우주의 비밀에 닿는 방법인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 플라톤이 나와서 이데아를 통해서 그들이 추구해야 할 비의를 아예 정의해 버렸다. 미숙하고 거짓된 신 데미우르고스와 진실한 지혜의 상징인 소피아도 아마 이때 플라톤에 의해 우화로써 이야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아는 이후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만나고 유럽사회의 정신적인 뿌리를 이루게 된다. 괜히 이후 유럽의 모든 철학들이 플라톤의 재해석이라 불리우는 게 아니란 것이다. 바로 그 이데아란 무엇인가? 그 이데아에 이르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 이데아를 신으로 구원으로 여겼었고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양심으로 존엄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철학자 가운데 일부는 다시 고대의 지식을 불러와서 수학과 과학으로써 이 세상의 실체를 이해하려 했었다. 바로 그 일원적인 세계가 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중심의 문명에 대해 서구사회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 그 대상이며 본질인 것이다.

 

하나의 진실을 찾아서. 하나의 질리를 향해서. 그 궁극은 발전이고 번영이고 마침내는 구원일 터였다. 히틀러의 게르마니아도 그런 연장에서 이해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독일민족을 더욱 번영하게 영구히 번성하도록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경쟁이 되는, 그리고 방해가 되는 대상들을 모조리 절멸하고 가장 우수한 독일인들만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독일인들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들만이 남아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히틀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이기도 했었다. 누군가는 영국국민을 위해서, 누군가는 프랑스인을 위해서, 누군가는 이탈리아인을 위해서, 각자 그 대상만 달랐을 뿐 본질은 같았다. 그게 파시즘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반발하여 나온 것이 해체주의이고 그 끝에서 현대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온다. 완전히 맞는 건 아닌데 대충 그렇게 흐름이 이어진다 보면 된다. 정확히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진실과 진리가 아닌 서로 다른 무한히 많은 정의와 가치와 도덕과 윤리와 상식과 양심과 이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단지 해석으로써만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더이상 이전 철학자들이 말하던 거대서사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수없이 파편화된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곧 기존의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사회가 추구해 온 가치에 대한 해체와 붕괴를 의미한다.

 

반PC주의자들에게 거의 숭배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어느 철학자인지 임상심리학자인지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야 우연히 보았다. 뭔 소리를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 그런 주장들을 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체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동안 잘 유지되어 오던 서구사회의 정통과 가치를 한 순간에 부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수 반PC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거의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아무일 없이 잘 지내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성가신 놈들이 나타나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 잘 지내오던 그대로 세상을 조용하게 만들려 한 것이 히틀러였고, 스탈린이었으며, 그래서 그냥 다시 세상을 시끄러운 채로 내버려두자는 것이 이후 현대의 철학과 사상들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조용하던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자. 그게 트럼프다. 유일한 하나. 단 하나의 정의와 이익.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순이 생겨난다. 이전의 착취하는 부르주아와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니 마르크스 주의 자체에 파탄이 일어나는 것처럼. 

 

단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 단 하나의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만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이를테면 인어공주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백설공주는 반드시 유럽계 백인이어야 한다는 믿음처럼. 성소수자는 비정상이고 따라서 소수자로써 다수의 요구에 따라야만 한다.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들은 마땅히 주류가 바라는대로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요즘 유행중인 반PC의 배후에 개신교 교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90년대에도 영지주의에 반대한다고 록밴드들을 악마화하는 주장이 꽤나 젊은 세대를 사이에 유행한 바 있었다. 실제 저들이 주장하는 대부분 내용들이 특히 미국 남부의 원리주의 교회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인종주의적인 부분까지도. 그래서 그들 자신도 말한다. 미국에서는 백인이 주류이듯 한국에서는 한국인 남성이 주류다. 다르지 않다. 

 

생각났다. 조던 피터슨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냥 패스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반PC주의의 사상적 근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나름 판단에 도움이 된다 할 수 있겠다. 저들은 어째서 저리 생각하고 저처럼 과격한가. 그런데 어째서 전혀 동떨어진 한국사회에서 반PC주의가 저처럼 세력을 얻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에 대해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 아무튼 크게 보자면 이렇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문명이 발전시키고 지켜온 그 근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문제없이 해 오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목적이 그런 오독을 낳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사실을 넘어선다.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은 많이 순진한 모양이다. 달리 말해 내가 아직 많이 병신인 모양이다. 너무 선의로만 이해하려 했다. 그래도 이놈들이 선의로 병신같지만 그런 말을 했었겠거니. 그 왜 있지 않은가? 사람은 착한데 모자란 그런 놈들. 사람은 착하고 좋은데 경우도 없고 주제도 모르고 상황파악도 안되는 한심이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경수가 대선캠프 차린다는 말 듣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이다. 지난 대선 끝나고 당비 내는 당원도 없다고 매일 우는 소리를 하던 정의당 거지새끼들에게 무려 12억이라는 돈이 한꺼번에 들어왔었다. 그게 진심으로 당원들이 정의당 잘한다고 내 준 후원금이라 생각한다면 뇌가 없거나 양심이 없는 거다. 어째 대선 내내 이재명만 그리 물어뜯고 김건희는 온몸을 던져 방어하더라. 그 돈이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정의당에 지급되었겠는가?

 

한 마디로 입금이 되었다. 그래도 문재인의 측근으로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지분도 있고 하니까 네가 가서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대선에서도 민주당 표를 좀 빼앗아가라. 빼앗아 오라는 게 아니다. 빼앗아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정치지형상 박빙으로 대선이 치러질 경우 이재명의 당선가능성이 낮아진다. 국민의힘이 다시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먹는 욕? 대신 돈이 남지 않는가.

 

당내 여론이 이 정도로 쏠려 있으면 대충 눈치 봐서 찌그러지는 것이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보이는 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당장 지지자들까지 자기에 대해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데 진심으로 대권을 노린다면 아무리 자기당 지지자들의 미움을 살 수 있는 말을 그렇게 반복해서 읊어댈 이유가 없다. 그래도 지지자들은 달래가면서 뭘 해야지 지지자들과 맞서 가면서 뭔가를 주장하려는 모습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들의 감정이나 의견따위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민주당에서 떨려나간 놈들이 어떤 놈들인가 생각해 보라.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윤석열에게 우호적이었던 놈들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을 거슬러가며 윤석열의 편에 섰었던 놈들이다. 대선이 끝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경수와 마찬가지로 민주당과 이재명만 욕하다가 지선 말아먹은 놈들도 거기 포함된다. 윤석열에게는 오히려 아부하다시피 우호적으로 웃음지으면서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해서만 가혹하던 놈들이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요즘 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차차기까지 거론하며 자신을 좋게 봐주던 지지자들을 정면으로 들이받을 결심까지 하다니. 아마 김경수 자신이나 주위 어디 쯤 가만 잘 살펴보면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정의당처럼 후불제일까? 성공보수를 약속받고 뛰어든 거면 이건 진짜 병신인데? 아님 말고. 

 

달리 생각할 여지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뜬금없고 납득안되는 행보이니. 인간이 병신이라면 그럴 수 있다 치겠지만. 하긴 드루킹같은 사기꾼놈에게 휘둘린 것부터 인증일 테지만. 난 그놈 서프라이즈 시절부터 사짜라고 취급도 안했는데 거기 넘어가는 게 진짜 병신일 터다. 지능의 문제인 걸까? 역시 아님 말고. 아무튼 구리다. 아주 구리다.

박용진이 어떤 경우에도 민주당에 대해서만 반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별 것 없다. 자칭 중도라는 것들이 어차피 국민의힘은 그런 정당이라면서 민주당에 대해서만 더 잘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우 대부분 중도를 자처하면서 국민의힘을 상수로 두고 오로지 민주당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감시하고 비판하고 요구한다. 그래서 결론은 민주당이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이다.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이 뭐라도 더 나아서 지지하는 게 아니라 민주당이 절대평가에서 기준에 미치지 못했으니 그보다 못하더라도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말이 된다 생각하면 박용진이다.

 

어찌보면 참 불쌍한 것이다. 박용진이 겨우 배지를 달기 시작한 이래 민주당의 지지율은 거의 보수정당 지지율을 상회하고 있었다. 정작 민주당 지지율이 바닥을 칠 때는 박용진과 뜻을 같이하는 놈들이 당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박용진과 마음이 맞는 놈들이 대부분이라 딱 정치하기 좋을 때는 지지율이 낮고, 박용진과 전혀 맞지 않는 놈들만 남아있을 때는 당의 지지율이 높아서 차마 당적을 옮기가 꺼려진다. 차라리 조경태처럼 당이 현저하게 흔들리고 있어서 명분삼아 갈아타기 좋은 상황이 만들어져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회만 노리다가 아예 민주당에 눌러앉게 생겼다. 그렇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민주당이 잘못한 것 뿐이고, 그래서 국민의힘이 뭘 잘못하든 일단 민주당부터 욕하고 본다. 진정한 마음의 고향이 그곳이기에 차마 국민의힘과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것이 정치인 박용진의 비극인 셈이다.

 

그동안 박용진의 발언을 보더라도 바로 드러날 것이다. 처음부터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아다시피 한나라당 시절까지만 해도 거기서 공천 한 번 받기가 무척 빡셌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당선을 목표로 할 수 있다 보니 하여튼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죄다 보수정당으로 몰려들었고, 그래서 거기서 뭐라도 자격이 미치지 않으면 바로 밀려나서 민주당까지 흘러들어오고는 했었다. 더구나 심지어 박용진은 그 민주당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진보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경우다. 마음은 원래 보수정당에 가 있는데 정작 보수정당이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으니 이리저리 떠돌다가 김종인 눈에 들어서 배지 한 번 한 것이 그를 민주당 정치인으로 만든 것이다. 몸이 있는 곳과 마음이 있는 곳이 다르니 그 괴리가 늘 그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민주당만 잘못이고, 민주당만 문제가 있고, 민주당이어서 안된다. 그러니까 당을 옮기라고. 그렇게 민주당이 싫으면. 

 

그런 점에서 이른바 나민지, 나문지, 나노사들은 얼마나 현명한가 말이다. 대세에 휩쓸려서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민주당과 문재인,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결국 자기 원래 자리를 찾아서 지금은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국민의힘이 뭘 얼마나 더 잘해서 지지하느냐 그러면 그들 역시 대답은 한결같다. 민주당과 문재인과 노무현이 잘못해서 보수정당을 지지한다. 이유 없이도 지지할 수 있는 그것이 곧 신념이고 이념이고 의지인 것이다. 지향이고 성향이고 추구인 것이다. 그냥 자기 자리 찾아가면 될 것을 뭐 그리 구차하게 구는지. 그래서 비루한 것이다. 차라리 조경태처럼 확실하게 넘어가던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민주당은 싫은데 민주당 표는 받아야 하고. 뭐하는 인간인지. 참 인간이 한심하다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귀신도 안 잡아간다. 더러워서. 

간단히 1억짜리 전세집을 예로 들어보자. 전세금 1억을 모으려면 도대체 얼마씩 얼마나 모아야 하는 것일까? 대충 지금 최저임금 기준으로 한 달 실수령액 200 정도를 기준으로 매달 100만원씩 모아도 무려 100개월, 햇수로 계산하면 8년 4개월 쯤 된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모아도 사실상 매달 100만원씩을 주거비 명목으로 쓰지 않고 모아야 1억짜리 전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100만원이라니, 월급의 절반을 쓰지도 못하고 모아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 그리 말할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모아놓은 1억은 남아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 1억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가? 전세 한 번 들어가고 말 것인가? 기존의 전세계약도 연장해야 하고, 또 계약이 끝나면 다른 전세집도 알아봐야 한다. 그때마다 기존의 전세금은 그대로 인상분을 더 지불해야 할 텐데 그 돈까지 계속해서 정해진 급여 안에서 모아야 한다. 사실상 월세다. 그 돈이 몇 년 전 개정된 임대차보호법 기준으로 2년에 5%정도였는데 그것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심지어 세입자들까지 나서서 난리였었다. 그 정도로는 안된다는 것이니 그 이상을 법으로 보장된 4년 뒤까지 생각해서 계속해서 모아야만 한다. 그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 써보지도 못할 돈을 전세금으로 묻어둔 채 인상분을 모아야 하는 구조다.

 

물론 도중에 잘 풀려서 전세금에 보태서 집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모아서 어디 아주 싼 아파트 한 2억에 샀다고 쳐보자. 역시 200만원 월급 기준으로 2억을 모으려면 한 달에 100만원씩 16년 8개월을 모아야 한다. 그냥 산수다.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계산이다. 당장 집이 2억이라는 것부터 혼자 살 것 아니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고려의 대상조차 아닐 것이다. 2억짜리 자산이 생겼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집을 팔아야 생기는 이익이다. 완전한 주거의 안정이 보장되어 죽을 때까지 평생 일정한 월세만 세면서 살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쓰며 살 수 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돈을 모아서 집을 사야 할 의미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내가 전세라는 제도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당장 부모님이 따로 나와 살 때 전세금까지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었던 터라 처음부터 내가 벌어서 월세까지 내야 했던 때문이었다. 최저임금도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한 달에 얼마씩 모으면 단칸방 전세금이라도 모을 수 있을까? 괜히 사람들이 전세금 사기로 날렸다고 자살하고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한 달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쓰지도 않고 모아야 젊은 나이에 전세금도 모으고 하는 것이다. 진짜 먹고 입고 쓰는 돈을 최대한 아껴가며 모았는데 날렸으면 그때 느꼈을 절망감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 얻고, 그리고 다시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금 올려주고, 그렇게 또 악착같이 모아서 내 집 마련하면... 결국 좋은 것은 내 자식들 아니겠는가. 결혼도 않고 혼자 살 것이라면 그렇게 집이라고 남겨봐야 물려줄 사람도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살고 싶은 만큼 일정한 월세만 내고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있다면 더 여유롭게 벌어놓은 돈 다 쓰고 깔끔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전세든 내집마련이든 - 전세라는 제도 자체가 내집마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어차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결국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경우 그들에게 물려줄 자산으로서 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혼자 살다가 물려줄 사람 없이 죽을 것이면 내 집이라는 게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영구적으로 임대해서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쪽이 더 나 자신의 이해와도 맞는다. 더구나 부모들도 자식의 부양을 바라지 않고 자식들도 부모의 상속에 기대지 않는 개인주의사회에서는 더욱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 많은 집을 공급하라면서 공공임대주택에 대해 적대적인 젊은 세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이야기는 벌써 10년도 더 전에 내집도 필요없고 그냥 월세전세 살면서 쓰고싶은 만큼 쓰다 가겠다는 세대들 중심으로 널리 퍼지고 있던 것이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아무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도 한국사회에서 결혼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일 수 있다. 당장 일본만 해도 결혼하면 관공서에 신고하고 자기들 경제수준에 있는 월세 아무거나 얻으면 된다. 아마 월세 몇 달 분을 사례금조로 지불하고 밀리지만 않으면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구조일 것이다. 그러므로 딱히 결혼했다고 전세집 마련하기 위해 집에 손을 벌릴 필요도 없고, 전세금 마련하겠다고 결혼을 미룰 이유도 없다. 그냥 마음 맞아서 하고 싶으면 결혼해서 적당한 월세집 찾아 들어가면 된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시작부터 전세로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도 벌려야 하고, 전세금 부담에 결혼도 늦춰야 하고, 그러다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월세로 하기에는 전세에 비해 당장의 부담이 또한 너무 크다. 전세가 모으기 어려워 스렇지 일단 전세로 들어가면 인상분을 생각하더라도 상당히 경제적인 부담이 줄어드는 이점이 큰 것은 분명한 사실인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전세를 옹호하는, 특히 젊은 세대들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세가 서민들에게 유리한 제도일 수 있는 것은 맞다. 단, 그것은 이미 전세금을 마련한 경우다. 그런데 그래도 혼자서 살 만한 전세집을 구하려 해도 최소 몇 천만 원 이상의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막 사회에 나와 직장을 얻은 초년생이 그 돈을 모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부모의 지원 없이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그 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아껴가며 악착같이 모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부모의 지원을 배제했을 때도 전세는 일반 서민들에게, 특히 사회초년생인 청년들에게 유리한 제도일 것인가? 더구나 임대차보호법에 반대하던 논리 그대로 5% 정도의 인상률에 4년이나 계약을 보장해주면 전세라는 제도를 유지할 매리트가 없을 만큼 불안한 제도이기까지 하다.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면서 그 이상의 인상분을 마련해 올려주어야 한다. 그동안 그 돈으로 먹고 입고 쓰고 혹은 투자를 잘 해서 자산을 불리는 경우를 가정해 보라. 이익일까?

 

뭔가 요즘 청년세대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을 다시 재생시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PC와 관련해서 저들이 말하는 그동안 문제없이 잘 굴러왔는데 괜히 세상만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 있으면 진짜 나이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 전세가 서민을 위한 제도이던 것은 아직 금리도 높고, 따라서 급여도 빠르게 올랐던, 그래서 목돈을 묻어두고 있어도 그만큼 빠르게 모아서 더 많은 돈을 모아서 집도 살 수 있었던 시절에나 통하던 이야기다. 그때는 전세금을 목돈으로 받아서 이자만 받아도 집주인들 역시 안정적으로 월세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예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도일 것인가. 

 

아무튼 결론은 이거다. 내가 살고 싶은 만큼 일정한 임대료만 내면서 이사하지 않고 정착해 살 수 있으면 그냥 임대주택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기상환한다고 번 돈 대부분을 은행에 때려넣느라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못 사먹는 지지리 궁상인 지금 처지를 본다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매달 일정하게 월세 내면서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더 여유롭게 쓰는 쪽이 더 내 삶의 질을 위해서도 낫다. 아파트는 사는 게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물며 전세야.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 지 모르겠다. 그 역시 나와는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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