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고 하는 것은 원래 폭력적인 것이다. 권력이란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그 권력일 것이기에 국가란 폭력 위에 존재한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바라지 않았음에도 왕이 나를 지배하고, 내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왕의 명령에 의해 전장으로 끌려가 다른 나라의 국민들과 서로를 죽이며 싸워야 하기도 한다. 그냥 나는 나일 뿐인데 내 이름 앞에 나라의 이름이 붙고, 때로 나와 상관없는 그 이름 때문에 내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 모든 것들이 결정되어 있기까지 하다.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가.

 

나는 민주주의따위 바란 적이 없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 되고 싶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이기보다 선진국 일본의 식민지에서 보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었다. 실제 지금 녹색당을 지지하고 있는 나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대한민국이 독립되지 않았으면 어쩌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그다지 옳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그런 사람도 대한민국에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바라는 다수가 한국인들만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기에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이었고,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또한 내가 바라지 않았으니 폭력이다. 그래서 국적을 거부하는 코스모폴리탄들도 나오는 것이다. 혹은 자기가 원하는 나라로 가서 귀화하는 이들도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1987년 6월 노태우가 갑자기 6.29 선언을 하면서 그동안 한 번도 민주화집회따위 한 적 없고, 오히려 민주화운동을 빨갱이들의 난동 쯤으로 여기던 사람들마저 하루아침에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대구와 경북이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마치 고려시대 신라사람들이 옛 신라왕조를 그리워하며 신라부흥운동을 벌였던 것처럼 대구와 경북에서도 과거의 군사독재시절을 그리워하며 그 당사자들의 동상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군사독재를 재현하려는 내란에까지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대구경북만이 아니다. 원래 민주화를 바라지 않았었던 그 시절 4050들과, 이후 태어난 2030세대에서도 자기들이 원하지 않았던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군사독재로의 회귀를, 다시 말하면 자신이 바라던 원래 군사독재로의 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 비율이 무려 30%에 이르고 보면 그런 그들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하는 민주주의란 얼마나 억압적인 것인가?

 

계엄이 선포되고 내란이 일어났을 때도 그래서 여러 커뮤니티에서는 그런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선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보다 나은 선택이 있을 때 민주주의는 얼마든지 포기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민주주의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나와 얼마나 상관있는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강요이고 강제고 나아가 폭력이다. 그나마 꽤나 이성적인 척 하는 사람들이 떠들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그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묵살하고 심지어는 처벌까지 해야만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지금 전주 이씨 종친회에서 조선의 왕실을 복원시키겠다 해도 정부가 단호하게 막아야 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왕족과 같은 특권적인 신분은 존재할 수 없다. 충청도 어디에서 이제와서 백제를 부흥시키겠다 누군가 나서도 그를 용인할 수 없는 이유와도 같은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통일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설사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다른 나라를 세우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 필요하다면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자신을 대변할 정치인을 선출해서 그 일부라도 현실에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히 필요하다면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인정한 상태에서 대구와 경북에서만 지자체를 군사독재체제로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체제 아래에서 군인이 지자체장을 맡을 수는 없으니 지방정부만 그렇게 구성해서 지역민들을 과거처럼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정도 수준까지 자치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선거의 역할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반대파를 싸그리 죽여서라도 자신들이 원하는 체제를 만들어야겠다.

 

말하자면 그들 나름의 독립운동인 것이다. 국권회복인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란에 반대하는 국민이 전국민의 70%가 넘는데 그들을 모두 죽이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인도네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니 제주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을 반대하는 이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재산을 빼앗아 자기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윤석열의 내란을 지지하는 최대 30%, 최소 25% 국민들의 이유인 것이다. 자신들이 좋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야겠다. 어른들이 말하는 그 좋았던 시절로 이 나라를 되돌려야겠다. 갓 군대를 제대한 20대가 다시 계엄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들었으니 아주 현실과 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해야 하기에 이들과 싸우고 이들을 억압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강요하고 강제하고 따르지 않으면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란 것이다.

 

70%를 죽일 것인가 25%를 죽일 것인가의 갈림길인 것이다. 물론 25%는 70%를 죽이고 싶어할 테지만 민주주의를 바라는 70%는 25%를 굳이 죽일 생각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강제할 뿐이다. 강요할 뿐이다. 입을 막고 손발을 붙잡고서 민주주의를 따르라고 억압할 뿐이다. 그마저도 폭력이라 부른다면 폭력이 맞다. 강제고 강요도 맞다. 그것이 국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국가이고자 하고 그를 다수의 국민이 바란다면 남은 방법은 그와 비슷한 체제를 가지는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것 뿐이다. 싫으면 따르라. 왜 강요하고 강제하는가? 그것이 대한민국이니까. 왜 정치적인 올바름을 강요하고 강제하는가?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필요하니까. 

 

새삼 미안한 감정도 드는 것이다. 군사독재에 더없이 만족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을, 태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를 강제당한 탓에 그를 경험할 기회마저 빼앗겼을 사람들에게 너무나 일방적으로 민주주의만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역적들에게 정복당해 이단의 이념을 강요당하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는가. 그것이 다수의 요구이고, 따라서 국가의 폭력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작용하게 되었다. 이전에 민주주의를 바라던 이들이 군사독재에 의해 수도 없이 죽고 다치고 절망으로 내몰렸던 것처럼.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고 분리독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이상 그들은 그 이념과 체제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말하자면 군사독재로의 회귀를 바라는 저들의 나름 독립운동이자 부흥운동은 결국 진압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다시 민주주의를 바라는 다수가 저들의 정복과 지배를 받아야 한다. 그럴 수는 없으니 저들을 진압할 수밖에 없다.

 

어째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사독재를 바라는 저들의 자유는 존중받지 못하는가? 국가니까. 군사독재로의 회귀와 부활을 바라는 저들의 요구는 인정받지 못하는가? 그것이 바로 국가라는 것이니까. 그래서 아무리 거부하고 반발해도 강요하고 강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를 위해 70%가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니. 빨갱이 새끼들, 즉 나까지 다 때려죽여야 한다고 계엄을 다시 하자는 20대 청년을 두고서도 너를 죽이겠다 말할 수 없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언제까지고 강요되고 강제되어야 하며, 그를 반대하는 어떤 주장도 억압당하고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원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떠날 수밖에. 그 부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주주의국가에서도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에 반대할 수 있는 자유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공수처의 원래 설립취지는 검찰과 마찬가지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지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서 서로 경쟁하며 견제토록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검찰만이 모든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특히 권력주변의 수사에 있어 검찰의 자의가 발휘될 여지가 그동안 너무 많았었고, 특히 검찰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는 수사가 시작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이 부분을 별도의 수사기관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해소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여기에는 검찰이 아예 행정부까지 접수해서 공수처 인사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전제되지 않았었다. 더구나 인사청문회를 거치고도 부적절한 인사를 처장에 임명하는 상황까지는 고려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공수처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심지어 처음부터 불필요한 조직을 너무 허술하게 만들었다며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 바로 그놈들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검찰정권도 괜찮다면서 윤석열에게 표를 주어 검찰에 모든 권력을 몰아준 그 놈들이 처음부터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보다 사법시험 봐서 검사 된 것이 더 대단한 일이라며 한동훈이 임종석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더 기여했다는 바로 그놈들이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만들어서 문재인 이재명 감옥에 보내고 금태섭 조응천 같은 놈들로 민주당을 일신해서 경쟁토록 해야 한다는 그놈들이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검찰을 견제하라고 만든 조직을 검찰 출신 대통령을 앉혀서 무력화시킨 놈들이 그놈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놈들이 공수처 무용론을 앞장서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공수처가 아니었으면 지금 윤석열의 내란을 수사하고 있을 곳은 다름아닌 검찰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윤석열 정권 내내 지켜봐 왔음에도 여전히 검찰이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할 것이라 믿는다면 그냥 대가리가 구더기거나 윤석열의 내란도 옳다는 확신범일 것이다. 그나마 공수처가 있으니까 검찰도 수사를 뭉개지 못하고 하는 시늉이라도 했던 것이었다. 공수처가 있으니까 경찰이 나서서 독자적으로 수사하려는 의지라도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검찰출신을 대통령으로 앉혀서 공수처를 무력화하고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만든 지금에도 이 정도 역할까지는 가능한 조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늬놈 새끼들만 아니었다면. 공수처장을 누가 임명했는데? 그것도 문재인 탓이다?

 

지금 정부 들어서 제 역할 하는 조직이 뭐가 있는가? 공수처가 유명무실해서 처음부터 있어서는 안되는 조직이었다면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외교부는 어떨까? 보훈처는 어떨까? 국방부는? 행정안전부는? 뭐 하나 제대로 역할을 하는 정부기관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나마 여가부는 논란이 없으니 잘 돌아가는 모양이다. 여가부 폐지 하나 보고 지지한 새끼들은 그냥 병신 인증인 것이고. 늬들이 뽑은 윤석열이 저 지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역시나 윤석열 내란에 반대하고 탄핵 지지한다고 저놈들 정치성향이 바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좋게 보는 과거 민주당 출신 정치인이 이낙연 금태섭류라는 게 진짜 코미디. 병신새끼들. 욕도 아깝다. 세상에 제일 쓸데없는 것들이다.

내가 내란사태 초기부터 이야기한 그대로다. 박근혜 때도 마찬가지였었다. 정작 박근혜와 당시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거의 바닥을 찍고 있었는데, 그러나 선거 때가 되자 다시 24% 넘게 결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냥 말하기 싫은 것이다. 솔직해지기 쪽팔리니까 말않고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그래서 여론조사결과에 비해 보수정당이 더 많은 표를 얻어 개헌선은 막아서고 있었다. 사람 심리가 그렇고 특히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 싫은 사람일수록 더욱 생각을 바꾸기보다 감추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다시 얼마든지 솔직해질 수 있다.

 

명태균이 아주 좋은 걸 가르쳐준 것이다. 처음 물꼬만 잘 트면 여론을 어떻게 원하는대로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누군가 시작만 해 주면 되었다. 그래도 윤석열을 지지하겠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을 지지하겠다. 계엄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당연히 내란도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대통령의 권한행사다. 오히려 현재 가장 필요한 조치였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무려 40%에 가깝다. 더이상 숨기고 있을 필요가 있다. 더구나 언론들이 기계적 중립이랍시고 그런 주장들까지 적극적으로 받아써주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이제는 솔직해지겠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다. 그래도 여가부 폐지가 없으면 30% 넘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 싶었었다. 오히려 여가부폐지가 있어야지만 그나마 2030 남성들의 지지를 받아서 40%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여겼었다. 그런데 그것도 필요없었다. 수도권의 지지율도 회복되었고, 50대 이하에서도 지지율이 오히려 오르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합한 지지율이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을 합한 지지율보다 더 높기는 하지만 거의 절반, 경합이 가능한 수준까지 오른 상태다. 대한민국 국민 수준이 이렇다. 6070 늙다리 세대들 뿐만 아니라 4050과 2030 국민들마저도 딱 이런 수준들이다.

 

하긴 4050이라고 다 민주화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6070들 가운데서도 4.19에 참여한 이들이 있었을 테고, 유신정권에 항거하던 이들이 있었을 테지만 역시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었다. 무임승차한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원하지 않았는데 PC처럼 민주주의를 강요당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2030 남성들은 아주 솔직하더만. 민주주의를 강요하려 하지 말라. 민주주의를 강제로 가르치쳐 하지 말라. 민주주의가 절대적인 선은 아니다. 역시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느 세대다 예외는 있었고 그들의 수가 언제나 적은 수는 아니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적은 수의 일부가 앞장서서 쟁취하고 지켜온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60%남짓의 지지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윤석열이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가. 민주주의를 바라지 않는 국민이 얼마나 많은가. 전체 국민 가운데 35%에 이르는 국민들이 헌법마저 무시하고 있다. 헌법마저 불필요하다며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겨우 과반 조금 넘는 국민들만이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거리로 나가 있는 상황이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더 간절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엄하게 더 신중하게 더 치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게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지금도 뭐만 하면 계엄지지로 돌아서겠다 협박하는 놈들까지 있기도 하면. 그냥 계엄지지로 돌아서면 되는 거지 뭐 그리 협박들을 일삼는 것인지. 또 남 핑계대고 계엄을 지지하려고? 얘들도 잠정지지로 포함시키면 거의 40% 나오겠다. 대단하다. 대한민국이다.

아마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그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전까지는 그러면 안된다고 하는 학습에 의한 관념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싫어도, 혹은 거북해도, 혹은 불편해도 그러면 안된다 배웠으니 그러지 말아야겠다. 최소한 드러내지는 말아야겠다. 그런데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반PC라고 하는 것이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 그래도 된다더라. 오히려 이제는 그러는 것이 더 정의라더라.

 

솔직히 그렇거든. 아주 어려서 주위에 알비노가 한 명 살았었다. 그리 자주 볼 일은 없었는데 어쩌다 우연히 스쳐지나가기라도 하면 신기한 것을 넘어서 뭔가 알 수 없는 거부감같은 것을 느끼고는 했었다. 그만큼 너무 이질적이었었다. 당시로서는 그리 흔하지 않았던 흑인을 길거리에서 보게 되는 경우에도 비슷했었다. 반PC를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처럼 사람에게 자기와 다른 대상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본능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유독 아이들일 때 자기와 다른 아이들을 따돌리고 그러는 것 아니던가. 집이 가난해서 차림이 추레해서도 따돌리고, 남들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도 괴롭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또래의 아이들과 달라서 놀리기도 한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면서, 혹은 주위의 다른 어른들로부터, 아니면 만화나 영화, 소설등의 대중문화를 통해서 학습하게 되었다. 그러면 안된다고.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나와 달라서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에도 스스로 그러지 않도록 엄격하게 강제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족쇄가 풀리고야 만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피부가 조금 검거나 하면, 혹은 여름에 뛰어노느라 피부가 까맣게 타거나 하면 당연하게 쿤타킨테라며 TV시리즈에 나왔던 흑인캐릭터의 이름을 붙여서 놀리는 것이 거의 일상이다시피 했었다. 피부가 검은 것은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이고 피부가 새하얗고 투명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피부가 검은 것도 또 하나의 매력이 되었고, 백인의 그것과 전혀 다른 미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특히 미국의 대중문화에서 백인들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미적 기준에 대해서도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단지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다양한 인종들이 더욱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영화나 게임에서 백인이 아닌 캐릭터가 등장하는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다시 읽었을 때 '인어공주'는 백인이라기보다 백인의 문명과 거리가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 원주민과 같은 다른 인종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인어공주 자신이 인간이 아닌 인어라는 전혀 별개의 종이었다는 것이다. 종이 다른데 인종까지 백인과 같을 이유따위 어디에도 없었다. 실제 같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의 내리터브 구조와 '인어공주'의 그것이 꽤 닮아 있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인어공주의 주인공이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영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단지 주인공이 백인이 아닌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는 것은 최소한 내 상식과는 맞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이 백인도 아닌 아시아의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난을 퍼부어야 할 이유따위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백인 뿐만 아니라 흑인도 히스패닉도 같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인어공주를 만들면서 흑인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백설공주를 만들면서 히스패닉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는데 상관도 없는 아시아인종들이 그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인종차별에 결벽적일 정도로 예민한 사회에서 굳이 흑인캐릭터를 백인캐릭터로 바꾸는 행위에 대해 개발사 차원에서 징계를 했더니 오히려 아시아인이 사는 한국사회에서 더 크게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오히려 판타지이기에 현실보다 더 자유롭게 소수자들을 등장시켜왔던 것이 그동안의 전통이다시피 했는데 이제와서 무슨 판타지에 바이섹슈얼이라고 분노하는 이들마저 나오고 있다. 미연시에서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찐따에 못난이 찌질이들인 이유는 대부분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그렇가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어리고 잘생기고 예쁜 주인공들로 설정하지 않는 것인데 그마저 PC라며 비난을 퍼붓는 이들 또한 있다. 원래 서구권의 소설에서는 로맨스소설이 아닌 이상, 아니 로맨스소설에서도 대놓고 어리고 잘생기고 예쁘게만 묘사하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그런데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더이상 참지 않아도 되는 것을 학습한 것이다. 더이상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부터는 좋아하믄 것만 하며 살아도 상관없다. 더이상 학습된 정의를 위해 억압하고 자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가 알게 된 것이다. 싫은 것은 싫다. 좋은 것은 좋다. 나는 흑인이 싫다. 히스패닉이 싫다. 게이와 레즈비언과 트랜스젠더와 바이섹슈얼이 싫다. 못생긴 사람들이 싫다. 장애인들이 싫다. 가난한 놈들도 싫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 비정규직 하빠리 노동자들도 싫다. 싫다. 싫다. 싫다. 그래서 백인이 좋다. 젊고 잘생기고 예쁜 백인, 그것도 정상인이고 양성애자인 그들만을 바란다. 그리고 여기에 이준석이 앞정서서 그것이 정의임을 확인시켜 주었었다. 모든 언론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의 논리를 받아 적으면서 그러한 믿음들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었다. 심지어 진보를 자처하는 한겨레나 진보정당인 정의당마저 그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옳다.

 

오만 것이 다 PC가 된다. 자신들에게 거슬리는 모든 것이 PC가 된다. 그래서 심지어 계엄초기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마저 민주주의를 강요하는 PC로 받아들이는 이들마저 있었다. 올바름을 강요하는 것은 악이다. 올바름을 강제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악인 것이다. 올바르지 않은 것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어야 선이다. 자신도 올바르지 않으면서 올바른 척하는 위선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솔직하게 악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한 것만이 오히려 선이고 정의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N번방 사건 당시에도 2030 남성들 가운데 상당수는 피해자들에게 2차가해일 수 있는 성착취물을 자신들의 권리로써 당당히 찾아보려 했었고 그를 막는 당국을 한 목소리로 비난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들이 문재인을 악마로 여기는 또 하나 이유였다. 욕망과 본능이 곧 정의다. 그것이 곧 진리다.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2030 남성들이 보수화되었다고 하는 그 정체인 것이다.

 

2030 남성들의 보수화와 이전의 보수가 다른 결정적인 지점이다. 그래서 이야기한 바 있다. 같이 권위주의를 옹호하더라도 그 동기부터가 다르다. 2030남성들은 딱히 자신들이 보수라서 권위주의를 옹호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로써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고 있을 뿐이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신의 욕망이자 본능인 것이다. 어렵게 사법시험 합격해서 검사도 되었고 민정수석도 되었으면 아들이 50억 정도 퇴직금으로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에 비해 사법시험도 보지 않은 교수 나부랭이가 자식을 의대에 보내겠다고 인맥까지 동원해 인턴도 보내고 표창장도 받게 한 것은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노력을 안해서 식당일이나 하고 경비일이나 하는 하빠리들이 시험도 보지 않고 정규직이 되는 일따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누가 칼들고 협박했는가. 그러니까 이전과 다른 그들의 너무나 솔직한 이런 주장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가?

 

물론 이전에도 아주 없지는 않았었다. 그동안 1990년대부터 수도 없이 키배를 뜨면서 온라인공간에서 싸워온 놈들이 바로 그런 놈들이었으니. 다만 이전까지는 그런 소리를 하는 놈들은 아주 소수였고, 당연하게 자신들이 정의라고 집단으로 뭉쳐 떠들지도 않았었다. 지금은 아예 떼로 몰려다니며 오만 곳에 PC라는 딱지를 붙이고 자신들의 정의를 함께 외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이 PC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PC에서 비롯되었다. 그러한 PC에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다. 젊고 잘생기고 예쁘고 신체적 장애도 없고 양성애자인 백인들만이 등장하는 영화와 만화와 게임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본능이자 욕구인 것이다. 그것이 곧 옳다. 그러니까 무엇이 그 계기가 되었는가?

 

웃기는 것은 정작 미국에서 주장하는 반PC라는 것은 그들이 떠드는 것과 같은 일차원적인 내용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반PC가 특히 미국 하류층 백인들 사이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진 계기부터가 그동안 미국정부들이 제도적으로 소수인종을 배려하면서 소외되어 왔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대학에 입학하려 해도, 취직을 하려 해도,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소수인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으며 그들이 자신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흑인이나 히스패닉들보다, 심지어 아시아인들보다도 자기들이 더 나을 것도 없는데 백인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차별받고 있기까지 하다. 그래서 출발지점조차 전혀 다르다. 단지 결과만 정치적 올바름이라 여기는 대상에 대한 무차별적인 증오와 혐오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더이상 참지 않고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고 꺼려하는 것을 드러내겠다. 내가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을 솔직하게 드러내고야 말겠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지향과 추구를 그들 자신들이 서로 정당화시켜주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만일 다시 2030 남성들이 민주당에 반발하여 결집하게 된다면 바로 반PC가 그 이론적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페미는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그다지 크게 두드러지게 차별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착한 페미라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것이었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2030 남성들이 진심으로 여가부가 폐지될 것이라 믿고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윤석열 정부에서 여가부를 존치시키고 김건희의 지인을 장관의 자리에 앉히려 했을 대도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페미에 대해 착한 페미와 나쁜 페미로 구분을 두었던 것처럼 2030 남성들 다수는 전혀 어떤 비판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윤석열의 여가부는 상관없다. 김건희가 나와서 설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민주당에 반대하고 국민의힘을 지지할, 그러도록 자기 또래들을 설득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에서 반페미가 더이상 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을 알게 된 저들의 선택은 이제는 반PC로 옮겨갈 것이란 뜻이다. 그것은 민주당의 정체성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차별방지법과 바로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벌써부터 윤석열 탄핵 이후를 대비하려는 듯 민주당과 관련한 게시글들에 PC를 반대한다는 논지를 드러내는 댓글들이 심심찮게 보이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PC같은 것은 하지 말라.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이란 원래 민주당이 추구하던 방향이라는 것이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위선일지언정 민주당은 공동체를 위해 보다 올바른 방향을 항상 고민하면서 대안으로 제시해 왔었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런 올바름이 싫다. 사실 그래서 벌써부터 반PC로 선동하는 놈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못생긴 여자들 싫지? 배나온 남자들 싫지? 흑인이나 히스패닉 불편하지 않아? 판타지게임에 바이섹슈얼이라니 말이 안되지? 게이나 레즈비언으로 게임하고 싶어? 그런데 그게 뭐? 하지만 그들에게는 중요하다. 그래서 민주당은 다시 2030 젊은 남성들이 포르노도 못 보게 할 것인가? 매매춘도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자신들을 동남아, 아프리카 후진국 노동자들과 같이 살게 하려는가? 결국 같은 상황들이 반복될 것이다. 2030 남성들이 민주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러나 문재인 때도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처음부터 민주당을 지지한 적이 없었다.

 

굳이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전부터 특히 2030남성들 사이에 널리 확신처럼 퍼져 있는 반PC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2030 남성들이 보수화되었다는 진짜 정체일 것이고. 또한 2찍 진보가 더이상 진보가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2030 남성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영합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그들 2찍 진보들일 테니. 괜히 2030 여성들이 그동안 지지하던 진보정당에게서 등돌리고 민주당 지지로 돌아선 것이 아니란 뜻이다. 예상이다. 그래서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벌써 민주당 지지자들이 주로 모이는 커뮤니티들에서도 몰이가 시작되었다. PC는 안된다. PC는 악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페미가 그랬던 것처럼. 주의해서 지켜볼 부분이다. 과연 어떨까? 일단 한겨레는 경계해야 한다. 이준석을 띄우려 민주화세대를 사회에서 퇴장시켜야 한다 주장하던 언론이니. 당연하다.

역사상 반란이나 정변이 일어날 경우 현장에서 바로 정리하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거치는 단계가 대부분 농성이었었다. 봉건시대에는 자기 영지로 돌아갔고, 혹은 왕도에서 정변이 일어났을 때는 저택에 틀어박혀서 일족과 사병을 움직여 마지막까지 맞서려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반란이든 정변이든 일단 권력을 사이에 두고 다투다가 밀리면 자기 혼자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아직 중앙집권이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시대라 정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전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렇게 버티다 보면 방법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 마지막 농성까지 진압했을 때 흔히 역사에서는 난이 끝났다고들 말한다.

 

다시 말해 한 번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자기 저택에 틀여박혀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그를 진압하지 못한 이상 아직 반란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스스로도 아직 반란을 일으킨 애초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밖에도 여전히 반란을 지지하는 동조자들이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를 옹호하며 용서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마저 있어 아직 살 길이 남아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미 한 번 반란을 일으켰고, 실패해서 궁지로 내몰렸던 이가, 과연 그렇게 용서받는다고 진심으로 참회하고 반란을 일으킬 뜻을 접을 수 있을 것인가? 대부분 역사에서도 그렇게 용서받고 물러났던 이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해서 새로운 왕조의 시조가 되었던 경우가 더 많았었다. 아니면 용서받은 줄 알고 농성을 풀었다가 죽었거나.

 

아직 대한민국은 내란중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내란이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다. 내란의 의도도, 내란을 일으킬 무력도 그들은 무엇 하나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반란을 동조하는 놈들이 전국민 가운데 무려 3분의 1에 이르기까지 한다. 이른바 대한민국 사회의 지배층인 엘리트들로 한정하면 아마 이 비율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들을 믿고서 윤석열이 버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직 반란군이 남아서 버티고 있는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정치와 외교와, 군사와 경제가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윤석열 체포실패는 바로 그런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내전중이다. 전세계에 알리고 말았다. 윤석열의 쿠데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이다.

 

바로 끌어냈어야 하는데. 그럼으로써 윤석열의 반란이 완전히 끝났음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어야 했다. 이제 윤석열의 반란은 끝났고 그에 따른 수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리고 그 댓가는 다시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 전체가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하긴 이미 윤석열이 친위쿠데타를 시도한 순간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때 모든 것은 시작되었고 단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을 윤석열도 국민의힘도 전광훈도 이준석도 안다. 한겨레와 경향도 역시 알고 있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란 부패해 있고, 더욱 많은 경우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그럼에도 청렴하고 유능한 정치가 역사상 아주 없었느냐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대중들에게 철저하게 통제된 정보만을 전달할 경우 그런 믿음을 가지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박정희가 독재는 했지만 청렴했었다 믿고 있는 지금의 늙은 세대들처럼. 전두환이 부패하기는 했지만 경제를 잘해서 나라를 이만큼 살려 놓았다는 그들의 경험담처럼. 그래서 지금도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능한 것보다 부패한 것이 낫다. 나아가 다 싹 죽여버리고 독재를 하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을 수 있다. 

 

어찌되었든간에 결국은 지금의 정치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와 상관없는 곳에서 정치와 전혀 거리가 멀 것 같은 인물들을 찾게 된다. 아주 멀리는 박찬종이 있었다. 당시 박찬종의 선거캠페인을 보면 그같은 대중의 요구를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거대양당을 등에 업지 않은, 정확히 보수 3당이 연합한 거대여당을 이기기에 그는 아직 일개 개인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후 선거 때마다 바람을 일으킨 인재들이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쳤었다. 하긴 그러고보면 1997년 당시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었던 이회창도 그런 대표적인 예 중 하나일 것이다. 법관 시절 올곧고 청렴한 이미지로 인해 신한국당에 영입된 이후 급격하게 바람을 일으키며 김영삼을 등에 업은 이인제까지 누르고서 IMF를 일으킨 여당의 후보로써 김대중마저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될 뻔했었다. 그때 이회창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정치인 이회창의 이미지까지 더해지면서 또 한 번 민주당을 위협하고 있기도 했었다. 아무튼 그렇게 매번 선거 때마다 참신한 인물을 찾던 대중의 요구는 마침내 검사 출신에 사람 잘 잡아넣는 것 하나만은 잘하는 것 같은 윤석열을 선택하기에 이르는데...

 

결국 당시 대중이 윤석열을 지지한 이유는 하나였다. 윤석열이 대놓고 정치보복을 하겠다 나섰는데도 유권자들이 흔들림없이 그에게 표를 몰아준 이유는 다 싹 잡아넣으라. 다 귀찮고 시끄러우니까 일단 죄다 싹 잡아 넣으라. 그래서 그 처가의 비위도, 그 자신의 무지나 무례와 오만함도, 때로 무도하게까지 보이는 모습까지도 모두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재인도 잡아넣고, 이재명도 잡아넣고, 하여튼 민주당 놈들 죄다 잡아 넣어서 지금 당장 내가 힘들고 어렵고 세상이 시끄러운 대가를 치르게 하라. 그래서 당시 국민의힘에서도 다른 정치인 후보를 누르고 여의도정치를 모르는 후보를 당원과 지지자, 그리고 경선에 참여한 국민들은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정치같은 것 하지 말고 그냥 확 밀어붙여서 다 쓸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들이 바라는 것들만 이루어주라. 그 결과가 이것이다.

 

어차피 국민들도 헌법이나 법률따위 관심이 없었다. 공정이나 상식, 정의따위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다. 그냥 닥치고 다 죽이고 쓸어버리고 그냥 내가 바라는 것만 이루어달라. 거기에는 실력도 없으면서 서로 대화하고 타협한다고 시간만 끄는 정치에 대한 답답함이나, 그런 주제에 수도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처벌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 정치인에 대한 환멸 또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범죄자 잡아넣는 검찰이라면 그런 놈들 더 잘 쓸어버릴 수 있겠거니. 현실정치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다름을 조율해가면서, 또한 적당히 서로의 욕망 또한 용인해 가면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가는 현실정치를 부정한 결과가 바로 윤석열이라는 것이다. 아마 당선만 되었다면 과거 이회창도, 혹은 문국현이나 안철수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하긴 그래서 문재인이 대단하다는 것일 게다. 역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출범한 정부였음에도 오히려 대중이 분노할 정도로 천천히 느긋하게 돌아가며 무언가를 제대로 밀어붙여 이루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더욱 대중은 윤석열을 원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높은 지지를 받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문재인에 대한 실망이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을 찾아자선 것이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를 받으면서도 항상 절차를 지켜가며, 명분을 쌓아가며, 자신을 적대하는 상대와도 대화와 타협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싫다고 정치인 아닌 이를 골라 권력을 쥐어줬으니 결과가 어떻겠는가.

 

어찌보면 이른바 중도라 불리우는 다수 국민들이 바라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국회따위 무시하고 대통령이 뭐든 마음대로 밀어붙여서 이루라. 하는 일도 없고 세금만 축내는 국회의원따위 아예 무시하고서 괜히 법을 지킨다고 답답하게 굴지 말고 화끈하게 밀어붙여서 제대로 해 보라. 그래서 한동훈이 국회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을 상대로 깐족거릴 때 그들은 그리 환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했었다. 대통령이 되었으면 권력을 마음대로 쓸 수도 있어야지 그동안 문재인은 너무 답답했었다. 그래서 비상계엄이라는, 즉 자신의 권력을 위한 친위쿠데타를 실시한 위중한 상황에서도 그들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지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이런 모습을 바랐었다.

 

법 위에 존재하는 군주를 바랐었다. 괜히 다른 사람들에 휘둘리고 끌려다니지 않는 강대한 군주를 기대했었다. 그는 정치따위와 상관없고, 정치의 문법에 기대지 않는 초인이어야 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하여 잡아넣을 심판자이기도 했다. 이제는 뭐라도 깨닫는 사람이 조금 있기는 할 것인가. 특히 정치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 없는 것 같은 젊은 세대에서 정치란 무엇인가 깨닫게 되는 경우가 나오지 않을까 어렴풋한 기대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더럽고 한심하고 무능하고 짜증나더라도 그러한 모습까지도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자신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써가 아닌 그런 일부 가운데 선택되어 정치라고 하는 책임을 대신해 맡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권자로서 심판하되 그를 외면하거나 부정해서는 안된다. 결국은 정치란 그 사회와 함께 발전하고 정화되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987년 제정된 6공화국헌법은 이로써 그 수명을 다하고야 말았다. 그동안 정치인의 양심과 양식에 의해 구체적인 문구 없이도 당연하게 지켜져 오던 관행적인 부분들은 물론 이미 존재하는 조문조차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될 수 있고, 그럼에도 그를 빠르게 적절히 조치하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대놓고 헌법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놈들만 전 국민이 무려 3분의 1에 이른다. 이 역시 정치를 부정한 국민의 선택이니 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고도의 행위인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기만 했었다. 그러도록 조장한 언론의 승리이기도 하다. 어차피 다 썩은 거 더 썩은 놈도 상관없다. 윤석열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놈들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어준 유권자들의 선택이, 그리고 지금도 지지하고 있는 그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미래는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조선의 국왕 선조가 이후 조선의 역사에 끼친 가장 큰 해악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기축옥사를 첫손에 꼽는다. 사실 이순신을 죽이려 한 것도 그럴 수 있다 보고, 아예 일본군을 피해 중국으로 도망가려 했던 것도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다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이순신을 고문했지만 아예 죽이지 않았기도 하고,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맞아서도 왕권을 지키면서 복구까지 국정을 나름 잘 수행하기도 했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안되었다는 부분도 당시 10만이 넘는 병력을 바다 건너로 투사할 수 있는 나라가 드물었었고, 지리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일본이 조선보다 영토도 크고 인구도 많다는 사실을 일본조차도 아직 알지 못하던 때이기도 했다. 오히려 진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면 바로 기축옥사일 텐데...

 

기축옥사 이전까지 조선조정에서 당쟁이라고 해봐야 서로 무리를 지어서 상대의 뒷담화나 하고 조정에서 논의할 때 상대의 논리를 깎아내려 우위를 점하려는 정도였다. 그렇게 국왕의 신임을 자신들에게 돌리고 상대정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서 더 많은 좋은 관직을 자기들이 가지고 싶다는 수준을 넘어서지는 않고 있었다. 일단 연산군 때부터 수도 없이 사화를 겪으면서 수많은 선비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기도 했거니와, 그렇게 죽어나간 선비들이 당시 조정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사림 자신들에게도 스승이거나 선배이거나 일문이거나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인 가운데 누군가는 연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사림 자신이 대개 학맥을 따라 나뉜 경우라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단한 학자를 배경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유학자로서 딱히 그 이상의 적대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도 했었다. 그런데 선조가 갈수록 비대해지는 신료들의, 정확히 사대부들의 힘을 꺾기 위해 송익필의 무고를 빌미로 정여립의 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부터 상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송익필이 정여립을 무고한 이유부터 노비로써 자신의 주인을 무고하여 몰락케 한 가문의 범죄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존경받는 유학자에서 노비로 신분이 추락한 데 대한 보복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선조가 정여립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까지 섞어서 크게 옥사로까지 이어지면서 당연하게 증오와 혐오와 경멸이 더해진 크나큰 피바람이 조선의 사대부들 사이에 몰아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이때도 선조는 역적에게 자비는 없다며 그동안 늙은 여인이나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는 고문하지 않던 전례까지 무시하고 연루된 사대부들의 늙은 어머니나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까지 고문하게 하는 등 상황이 더 극단으로 치닫도록 부추기고 있기도 했었다. 실제 사화라고는 하지만 연산군 때부터 정작 죄를 지었다는 사대부들 자신은 죽거나 귀양을 갔더라도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일가족까지 고문받고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었다. 그런데 기축옥사에 이르면 그런 것 상관없이 아예 호남에서는 사대부의 씨가 말랐다 할 정도로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 그 희생자만 물경 천 단위를 넘어갈 정도였었다. 괜히 조선의 유학사를 이야기할 때 호남 유림은 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때 가장 큰 희생자를 냈던 것이 바로 호남유림이었었고, 그 결과 아예 그 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호남유림은 조선사회에서 주변으로 내몰리게 되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렇게나 크게, 그것도 전례없이 잔혹하게 피바람이 분 결과 조선의 유림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의 골이 패이기 시작했다.

 

조선 광해군 때 북인들이 당시 기축옥사에서 선조의 의도대로 남명 조식의 학맥들로 이루어진 호남의 유림을 절딴내는데 앞장섰었던 서인은 물론 그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남인들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바로 그런 배경에서였었다. 아니 그 전에 이산해는 세자의 책봉을 둘러싸고 정철을 꼬드겨서 나서게 한 뒤 바로 뒤를 쳐서 그를 모함해 귀양을 가게 한 전력이 있었다. 이때도 선주는 이미 쓸모가 다한 정철을 제거하고 조정에서 힘을 얻기 시작한 서인을 누르기 위해 이산해의 모함을 기꺼이 이용해주는 면밀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아예 서인 전부를 호남의 동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씨몰살하려 했던 이산해의 의도를 선조의 뜻을 받든 류성룡이 막아서면서 다시 동인 안에서 북인과 남인이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피로써 쌓은 원한이니 피로써 씻어야 한다. 서인이 집권하고 북인은 아예 조정에 출사조차 못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칠순을 넘기면 사사하지 않는다는 전례를 또 깨고서 서인이 정인홍을 사사하여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여기가 당쟁의 1막이다. 인조반정이 비단 인조 개인의 왕위에 대한 욕심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튼 그렇게 선조가 씨앗을 뿌린 피로 피를 씻는 증오와 원한에 의한 당쟁이라는 줄기는 다시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적장자로 즉위하면서 정통성에 대해 감히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었던 숙종대에 다시 크게 꽃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즘 자칭 중도들 사이에서 꽤나 현명한 투표방식으로 회자되고 있는 환국이었었다. 처음에는 서인으로, 그 다음에는 남인으로, 그러다가 다시 서인에게로, 그러면서 그때마다 상대 당파의 중요인물들을 죄다 죽이고 귀양보내고 하다 보니 학연과 혈연으로 이어진 당파 사이에 원한과 증오가 쌓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당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 더 악착같이 상대 당파를 죽이고 벌주고, 그러니까 더욱 그 복수를 위해서라도 왕에게 잘보이기 위해 경쟁하면서 상대 당파를 죽이고 벌주려 하고,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아예 상대 당파가 인정하는 왕은 자기 당파에서 인정할 수 없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인좌가 노론의 당여이기도 했던 영조를 인정하지 못했다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나, 노론의 선비가 경종은 자기들의 왕이 아니라면서 그 능 앞을 말을 탄 채 지나간 사건들이 그 결과인 것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환국이 정작 너무 깊이 패인 원한의 골로 인해 왕마저 무시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괜히 영조가 탕평을 내세운 게 아니란 뜻이다.

 

너무 서로 죽고 죽이다 보니 그 원한으로 인해 왕마저 보이지 않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당파간의 결집이 강해지면서 신하로써 충성을 바쳐야 할 왕마저 그 이후로 밀리는 상황마저 벌어지게 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서도 구선복을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보내야 했던 이유였다. 오히려 사저에 있으면서 노론과 자주 교류했었기에 영조 자신이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노론에게 경종은 왕이 아니었고, 소론에게도 영조는 그러했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조정 안에 두 당파가 공존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앞에서 충성을 경쟁하도록 몰아갔던 것이었다. 바로 기축옥사 이전 선조의 조정이 그러했었다. 돌고 돌아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정작 왕권을 위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는 자신의 친위세력을 만들려다가 세도정치의 판을 깔아주고 말았었으니...

 

바로 주권자로서 중도적인 국민들의 가장 현명한 투표방식으로 극찬받는 환국투표의 현실일 것이다. 환국투표의 전제 자체가 그렇다. 정치인들은 모두 썩어 있고 믿을 수 없으니 매번 정권을 바꿔주어 서로가 서로를 죽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정책의 일관성이고 나발이고 얼마나 좋은 정책과 인물로 정당들이 경쟁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죽임으로써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대립하고 대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 깨끗해진다. 하지만 그같은 복수의 정치에는 결국 국민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실컷 정치보복하고 마음대로 정권을 휘두르다가 다시 내어주려 하니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 헌법마저 무시하는 상황이 바로 그 예일 것이다. 인물이 좆같고 정책이 똥같으면 조금이라도 나은 정당에 계속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데, 조금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으면 그를 심판하기 위해서 죽일 수 있는 상대정파를 인물도 정책도 따지지 않고 이용하려 한다. 그리고 그 결과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어도 역시나 그렇게 투표하도록 만든 상대 정당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야말로 무오하다는 전제왕조의 군주나 쓸 법한 논리 아니던가.

 

조선시대에 환국이 가능했던 이유는 어찌되었거나 당시 조선에서 주권자는 국왕 자신이었고, 따라서 국정 또한 국왕 자신이 주도해서 직접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은 바뀌지 않고 행정부와 국회만 바뀌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 대통령까지 바꿔 버린다. 내정이고 외교고 죄다 내다버리고 그냥 서로 죽고 죽이는 일에만 몰두하도록 의도적으로 유권자가 몰아가 버린다. 그것을 현명한 투표고 올바른 정치라 여긴다. 이번에는 문재인과 이재명 감옥에 보냈으니 다음에는 윤석열과 김건희 감옥에 보내자. 교육을 탓하기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놈들이 대개 특정 세대 특정 성별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그냥 미친 것이다. 대가리가 썩은 것이다.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정치가 곧 현실이라는 자각이 없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삶까지 정의할 수 있다. 당장 내 월급과 내 일하는 환경과 조건과 직접 닿아 있을 것임에도.

 

아직 문재인과 이재명을 감옥에 보내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대선을 치르면 이재명이 나오게 될 것이다. 현재 계엄에는 반대하면서도 여전히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는 이들의 논리일 것이다. 아직 환국이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환국을 할 수는 없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아, 드라마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왕권강화는 선이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큰 것은 악이다. 정치란 곧 신하들이 하는 짓거리와 같다. 당시의 당파싸움과 같다. 자기들이 왕이라 여기는 것일까?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아직 자신들의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새삼 가르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 자란 어른의 생각을 어찌 바꿀까? 한심스러운 것이다.

환국정치란 한 마디로 서로 경쟁하는 두 정파가 번갈아가며 권력을 가지고 상대를 죽이게 함으로써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지는 정략적인 행위를 가리킬 것이다. 정치를 하는 두 정파 모두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에 한 번은 이쪽에 힘을 실어주고 상대를 죽이게 한 뒤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다시 힘을 주어 복수케 한다. 왕조시대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정은 왕인 자신이 멀쩡히 주관하고 있을 테니.

 

모든 정책에는 일관성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정책 하나가 실제 집행되었으면 최소 몇 년 뒤에도 같은 정책 아래에서 제도가 운영되고 있을 것이란 기대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미있는 성과도 가져올 수 있다. 더구나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이라면 언제쯤에나 처음 의도한 결과가 실제로 드러나게 될 지 알 수 없는 경우마저 상당하다. 그러므로 한 번 정책을 입안했으면 설사 정파가 다르더라도 정부의 권위와 신뢰를 위해서라도 기존의 정책을 유지하는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정치인들 꼴보기 싫다고 매번 선거 때마다 정권을 바꿔서 한 번 씩 뒤집어 엎으라 요구한다. 그것이 현명한 유권자의 선택이라고. 그래서 나라가 과연 제대로 운영이 될 것인가?

 

더 고약한 것은 매번 선거 때마다 정치권으로 하여금 정치보복하도록 대놓고 판을 깔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국정치란 자체가 정치혐오층으로부터 나온 개념이었을 것이다. 역시나 정치를 혐오하는 2030 남성들 사이에서 그래서 꽤나 의미있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했었다. 민주당이 정권 잡으면 국민의힘을 조지고,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당을 조지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박근혜 감옥에 보냈으니 다음에는 윤석열이 대통령 되어 문재인과 이재명 감옥에 보내고, 그 다음에 민주당이 정권 잡으면 윤석열과 김건희를 감옥에 보내고, 그래서 김건희의 수많은 의혹에도 그냥 대놓고 무시한 것이었다. 그렇게 매번 수사해서 감옥에 보내고 사람을 죽이고 그러면 나라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마디로 자기가 추구하는 이념이나 지향이 없기에 가능한 개소리인 것이다. 진지하게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공동체와 그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없는, 그저 정치를 게임 정도로나 아는 모지리 찌질이 새끼들이나 가능한 망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차라리 태극기부대가 그런 자칭 중도층들보다 낫다는 이유다. 그래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보수정당이 정권을 계속 잡아야 한다는 일관된 지향성이라도 갖는다.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공동체와 구성원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신념도 있고 가치도 있다. 그런데 이놈들은 이것도 저것도 다 싫고 그러니까 서로 다 죽여봐라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 이상의 고민도 가치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없다. 그 결과 나라야 어찌되든 내가 싫어하는 놈들만 다 뒈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중도층이라고 꽤나 목소리가 크기도 하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어차피 썩은 놈들 싹 다 뒈졌으면 좋겠다. 어차피 썩은 것들 더 썩으나 덜 썩으나 다 똑같으니 그냥 죄다 뒈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치혐오다. 그리고 그런 정치혐오가 정치에 무지한 자를 매번 선택해서 바람을 일으키고 끝내는 정권마저 쥐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오로지 문재인과 민주당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리고 다시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보복으로 - 아니 이전에 민주당이 박근혜와 이명박을 수사해서 감옥에 보낸 자체도 보복이다. 그러니까 최상목이 국회의 몫으로 정해진 헌법재판관을 임명 않는 것도 중도라며 칭찬할 수 있는 것이다. 헌법도 법률도 가치도 지향도 이념도 없이 오로지 현상으로만 판단하려 하고 있으니까. 

 

결국은 정치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니 가르치지 않은 것은 2030 여성들이나 이전 4050세대들도 마찬가지였으니 결국은 그냥 자기들이 나태하고 게으른 것이다. 의욕도 없고 성의도 없다. 그러니까 현상만을 가지고 개인의 감정을 투사하여 합리적인 판단인 양 자기들끼리 자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20대 남성들의 보수화라는 현상이 가지는 진짜 정체일 것이다. 보수화라기보다는 보수적인 가치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싫고 밉고 짜증나는 감정에만 매몰된다. 그리고 그것을 언론이 부추기면 쉽게 선동되어 넘어간다. 그럴 나이이기도 할 테고.

 

환국정치라...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의도부터 매우 적확하다. 늬들끼리 싸우다 죽어라. 나라야 어찌되든, 국민들이야 어찌되든, 어차피 정치따위 무슨 상관인가? 정치야 누가 어떻게 하든 자기와 무슨 상관일 것인가? 그래서 계엄이라는 중대한 시국에 그들은 정치무관심자가 된다.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는 의도에만 민감하게 격렬한 반응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을 찍었다. 자기들의 감정을 위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을 했다. 너무 당당하다.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나는 저런 놈들 존중하는 법을 모르겠다. 저런 놈들이 2030 남성을 앞세우는 걸 그들 세대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항상 2030 남성을 앞세우고 떠드는 것은 그런 놈들이었을 테니. 당사자들의 문제다. 언제나.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법과 제도라도 언제나 모든 경우에 완벽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그만큼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가능성이란 너무도 다양하고 방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상정한 모든 가능성을 뛰어넘어 인간이 예측한 모든 사건과 상황을 넘어선 사건과 상황들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정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보편의 상식이라는 것이, 대화와 토론과 합의라는 과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존의 법과 제도 안에서 사람들이 나머지 과정을 채워나가는 것이 곧 운영이요 관리요 그를 인간사회 안에서 이루어가는 과정이 정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정치가 싫다. 그런 정치가 너무 귀찮고 번거롭다. 그래서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경멸하고 증오하던 인간들이 결국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만들고 말았다. 윤석열이 처음은 아니었다. 1992년에는 박찬종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997년에도 이인제가 있었다. 2007년에는 문국현이 그 역할을 물려받았었다. 2012년에는 문재인과 안철수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2017년 안철수는 다시 한 번 대선에 나와 유의미한 득표를 얻은 바 있었다. 그리고 22년 기존의 거대양당과 결합한 정치혐오의 결과물, 여의도정치를 경험한 적 없는 오로지 수사와 기소만이 전부인 인사를 대통령의 자리에 앉히고 말았다. 당사자도 말했었다. 나는 여의도정치와 관계가 없다.

 

항상 선거 때마다 정치란 것을 모르는, 정치를 아예 경험한 적 없는 인사들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되고는 했었다. 정치가 싫으니까. 정치인들이 너무 마음에 안 드니까. 그래서 참신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정치와 상관없는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특히 중도층을 중심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과연 2012년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다. 그때 민주당 상황과 문재인이라는 정치초년생이 결합했을 때 과연 대한민국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나마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 같기는 하다. 최소한 문재인이란 보편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었으니.

 

문재인이 싫어서. 민주당 정권이 싫어서. 민주당이 싫어서. 이재명이 싫어서. 그래서 구속해서 감옥에 보내라고 대통령에 당선시킨 인물이라는 것이다. 정치와 정치인들이 너무 싫어서 매번 다른 정당에 권력을 주어서 그때마다 이전 정부를 감옥에 보내는 것이 최선이랍시고 이른바 환국정치를 바라면서 가장 사람을 잘 잡아넣을 것 같은 인사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그렇게 수사와 기소밖에 모르는 대통령은 정치라고는 전혀 모른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해서 국정에서 정치란 단어를 아예 실종시켜 버렸다. 대화와 토론과 합의라고 하는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을 무시한 채 아예 야당과의 어떤 소통도 거부하고 거부권만을 일상으로 쓰다가 마침내 비상계엄이라는 진짜 비상상황에서나 써야 할 권한을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용하는 짓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심지어 그런 행위를 지지하는 인간들이 전국민 가운데 30%나 된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그같은 중대한 내란행위에 대해서조차 헌법이 가리키는 기본적인 정신을 무시한 채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는 이유로 뭉개고 넘어가려는 행위까지 용인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국 지금의 헌법과 법률만 가지고는 더이상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만 모두의 앞에 드러내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하다못해 12.12군사쿠데타의 또 한 주역이었던 노태우나, 민주당 지지자라면 누구나 증오해 마지않는 이명박이나 박근혜조차도 헌법에 없다고, 혹은 법률에 해당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저토록 마음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최소한의 절차를 거쳤고, 최소한의 합의를 위한 과정을 가졌었다.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킨 것이 정작 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던 박근혜의 새누리당이었다는 것은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상식적인 범위 안에 있는 정치인이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정치가 정치를 잊었을 때, 정치인이 정치를 무시하게 되었을 때, 그러나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은 너무나 무력하다. 의회도 법원도 행정부 전체가 뭉쳐서 내란을 일으키면, 더구나 거기에 집권당까지 합세해 버리면 그를 제재할 어떤 수단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6공화국, 1987년 민주화 이후 유지된 대한민국 민주주의 체제이 현주소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허술하고 허약하다.

 

아니 법이 문제가 아니다. 헌법이 문제가 아니고 법률이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도 윤석열을 지지한 이들은 말한다. 자기들이 뭘 잘못했는데? 그냥 문재인과 이재명이 싫어서 투표했고 그런데 자기들이 투표한 인물이 그런 짓거리를 저지른 것 뿐이다. 그래서다. 싫어서. 미워서. 그래서 그들을 죽이라고. 잡아서 수사해서 감옥에 쳐넣으라고. 그래서 제대로 검증을 안했었다. 드러난 수많은 문제점들을 애써 눈감고 무시했었다. 그때부터도 이미 전조가 있었음에도 무시하고 문재인과 이재명만 잡아죽이라고 그에게 표를 준 것이었다. 환국투표는 더 고약하다. 그러니까 정권 바뀔 때마다 상대정당 정치보복해서 감옥에 보내라고 투표하는 것이다. 유권자로서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에 대한 어떠한 책임의식도 없이 단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증오에 매몰되어 그를 목적으로만 그 권리를 행사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전제인 주권자의 엄정한 판단에 의한 투표라고 하는 행위 자체가 함께 실종되어 버렸다. 맹목적인 감정만 남았다. 그런 국민들을 믿고 지금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개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촘촘하고 엄격한 법규정이 필요해졌다. 한 마디로 기존의 헌법과 법률로는 더이상 기존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는 한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1987년 긴 투쟁 끝애 이루어낸 6공화국체제의 붕괴며 종식이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헌법이, 어떠한 가치와 제도와 질서가 그를 대신하게 될 것인가? 최소한 더이상 윤석열 같은 인가들이 정치를 무시하고 날뛸 수 있는 가능성부터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도 대부분 국민들은 선거 때마다 새로운 바람을 바라며 다시 모험을 하려 하게 될 테지만. 그럼에도 이런 상황까지는 막아야 한다.

 

윤석열이 명백히 잘못했지만 윤석열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에게 칼을 쥐어주고 사람들을 지키라 했으면 칼을 쥐어준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될 수도 있다. 6공화국에 이어 7공화국이 들어선다면 그 또한 결국 그렇게 끝을 맺게 될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피를 적게 흘리고 끝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테지만. 하긴 그때 쯤엔 나도 화장터로 갈 준비를 해야 할 테니 그 때 세대들이 알아서 할 일일 터다. 한 시대가 저물었다. 다름아는 국민의 선택에 의해. 그래서 시대란 것이다. 윤석열의 체포는 그 마지막의 화려한 불꽃이다. 자살은 꽤나 극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니. 체제의 자살이랄까? 아마 그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한 번 끊었다. 안타깝게도.

그래서 말했지 않은가? 지금 2찍 진보들에게 남은 진보의 이념이란 반민주당 하나 뿐이라고.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많은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든간에 단계적으로 점진적으로 진보의 의제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최소한 시도라고 하고 있는 곳은 현재로서 민주당이 거의 유일하다. 진보정당의 역할이라고는 그나마 민주당이 이루고자 하는 정도에 대해 완전하지 않다고 반대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진보정당이 망한 것이다. 정작 진보의 아젠다를 현실에서 이루고 있는 것은 민주당인데 진보정당은 그것에 반대만 하고 있으니.

 

사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차별성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민주당과 더 거리를 두고 민주당의 반대편에 있는 보수정당과도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아예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여기에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맥이 닿아 있는 여성주의자들까지 합류햇다. 그들은 여러 인맥과 학맥과 혈연으로 군사독재정권의 실세들과 닿아 있는 이들이다. 민주당 2중대는 안되는데 보수정당 전위대는 상관없다. 아니 아예 보수정당과 한몸이라도 괜찮다. 그렇게 진보라는 이념이 사라지자 그들의 원래 정체성이 드러난다. 원래 진보란 집안도 좀 살고, 자기 학벌도 좀 되고, 그래서 크게 먹고 살 걱정이 없이 이념의 순수성 가지고 동호회활동을 해도 좋은 놈들이 하는 한가한 짓거리일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닌 사람들은 죄다 나가고 이제는 진짜 그런 놈들만 남아 버렸다.

 

윤석열의 대통령직 해임과 처벌을 앞장서서 막고 있는 한덕수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이재명이 대통령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저들의 강한 의지가 진보정당인 정의당의 대표의 발언에서 느껴지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한겨레와 경향 역시 이재명을 앞세워 한덕수 탄핵에 대해 우려하는 입장을 내보이고 있기도 했었다. 차라리 내란으로 나라가 뒤집어지더라도, 민주주의가 아예 박살이 나고 국민들의 혼란과 고통에 빠지더라도 다시 한 번 민주당 대통령이 나오는 것만은 반드시 박아야 한다. 노동자의 인권이 바닥을 치고, 농민이 생활고에 신음하고, 전쟁의 위협에 온국민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리더라도 민주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진보다. 너무 솔직하지 않은가?

 

윤석열의 내란에는 반대하지만 한덕수 탄핵에도 반대한다. 그 말인 즉슨 반대는 하는데 처벌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반대하는데 탄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최소한 민주당이 집권할 수 없도록 시간을 끌 수 있어야 한다. 전제가 붙는다. 단서가 붙는다. 이런 건 반대가 아니다. 그냥 주장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은 탄핵할 수 없게 하고, 처벌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 진짜 목적일 테니.

 

원래 그런 놈들인 것을 알았으니 이제와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그런 게 바로 2찍 진보들이고, 그래서 2찍 진보들인 것이다. 이제는 아예 치장도 않는다는 점에서 저들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그 무엇보다 이재명의 대통령 당선만은 막아야 한다. 민주당의 집권 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그게 2찍 진보다. 너무 투명하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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