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 기자새끼들을 무당이라 부르는 것이다. 원래는 김어준 같은 사실확인 없이 선동이나 일삼는 무리들을 일컫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김어준이 더 언론인 같고 기자새끼들이야 말로 진짜 무당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사실도 논리도 없이 그냥 내지르기만 하면 기사가 되고 진실이 된다. 뭐하는 새끼들인가.

당장 탈원전만 해도 정작 구호만 있었지 실제 실행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피하다. 건설중이던 원전도 공론화를 거쳐서 계속 건설중에 있고, 기존에 건설된 원전들 역시 조기에 가동중단되거나 한 것 없이 모두 정상가동중이다. 그런데 무슨 탈원전으로 한전이 적자를 수조씩이나 보는가. 정작 탈원전은 한 적도 없는데 탈원전의 결과만 벌써 눈에 보이게 나타나고 있다. 차라리 그런 자체가 탈원전의 타당성을 말해주고 있다 생각하지 않는가.

어째서 탈원전이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천재가 아닌 인재라 한다. 원전의 구조적 문제가 아닌 관리하는 인력들의 오판과 실수가 사태를 키운 것이라 말한다. 그런데 어쩌는가? 그동안 우리나라 원전 역시 부실시공에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 사용 등으로 사람으로 인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괜히 탈원전 정책이 나온 것이 아니다. 인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실제 그로 인해 원전의 가동이 중단된 적이 우리나라에서도 적잖이 있어 왔었다. 그런데 깡그리 무시한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문제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문제따위는 없다. 세월호도, KTX탈선도, 하여튼 대부분 사고가 바로 사람에 의해 인재에 의해 일어나고 있음에도. 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탈원전으로 벌써 미세먼지가 늘고 한전의 적자까지 커지고 있다. 이런 새끼들이 무당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건강보험도 마찬가지다. 사보험의 문제가 바로 보험사가 어떻게든 돈을 남겨먹으려는데 있다는 것이다. 제대로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 뻔히 약관에 있는 것들마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그런데 이제 국민복지의 일환으로 전국민에게 강제하는 건강보험마저 어떻게든 혜택을 줄여 돈을 남겨먹어야 한다 주장한다. 더 적은 보장만을 해주고 그래서 건강보험공단이 이익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 말하고 있다. 말인가 방구인가. 당장 늘어난 건강보험적용으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척추교정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이건 그냥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건강보험의 보장이 늘지 않았다면 실손보험에 따로 가입했어야 했을 것이다.

사실 이게 진짜다. 건강보험의 보장범위가 늘어날수록 사보험의 영역은 줄어든다. 실손보험 같은 것 없이도 건강보험의 보장범위가 늘고 개인부담도 줄어들면 개인의 의료비는 줄어든다. 그래서 나 역시 지금 건강보험 말고 암보험 하나만 가입해 꾸준히 보험료를 내고 있는 중이다. 기사가 나온 매일경제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살펴보면 의도는 분명해진다. 그러니까 건강보험의 보장을 줄여서 사보험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사보험 하나 더 드느니 차라리 건강보험료를 얼마간 더 내는 것이 개인들에게는 이득이다. 실손보험에도 실제 가입해 봤던 입장이기에 더욱 하게 되는 말이다. 최저임금이 오르기 전 생활고로 결국 실손보험마저 해지하고 만 적이 있었다. 그런 주제에 저소득층의 소득을 걱정하고 양극화를 걱정한다.

말하자면 속아넘어가는 놈들이 그냥 병신이란 말이다. 나는 누군가의 지지를 간절히 바라야 하는 정치인이 아니니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과연 탈원전이라고 실제 시행된 정책이 뭐가 있던가. 앞으로 더이상의 원자력발전소를 짓지 않겠다는 것 뿐 기존에 있던 원자력발전소 가운데 연한도 되지 않았는데 조기에 폐쇄한 것은 아직 한 곳도 없다. 수명이 다한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는 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신재생에너지는 장차 선진국에서 무역장벽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높은 분야다. 항상 그래왔었다. 정의로운 척, 합리적인 척, 상식적인 척, 그래서 자신들이 새롭게 세운 기준으로 후발주자들의 앞을 막아왔었다. 진짜 경제전문지가 맞기는 한 것인가.

조금만 사실관계를 확인해 보면 그 주장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단지 대부분 개인들은 너무 자신의 일상들조차 분주하고 버거운 탓에 여유도 없고 또 한 편으로 게으른 탓에 그런 수고를 굳이 하려 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속아넘어간다. 알면서도 속이는 놈들이 더 나쁜 것인가.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것을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이 잘못인 것인가. 하여튼 그래서 골때린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신문기사에 제대로 열받는다. 이런 게 언론이다. 기자는 진짜 아무나 된다.
결국 외신기자라는 것들도 똑같은 무리들인 모양이다. 자기들은 마음껏 없는 사실도 조작해서 특정인을 몰아가는 기사를 쓰면서 정작 누군가 자신들을 지목해서 비판하면 탄압이라 주장한다. 그러니까 누구도 언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이런 뭐 개똥 거름통에 빠지는 소리인가.

되도 않는 기사를 썼으니 비판하는 것이다. 그 내용이 자칫 국익에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이기까지 하니 기사를 쓴 기자를 특정해서 비판하는 것이다. 차라리 비판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외신기자들이 문제다. 기자라는 새끼들이 문제다. 언론이라는 쓰레기가 문제다. 그보다는 조선일보의 어떤 기사가, 블룸버그에 기사를 쓴 특정 한국인 기자가 쓴 기사의 어떤 부분이 이런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게 탄압인가? 그냥 매국이라는 한 마디를, 그것도 어디 가서 대접도 못받는 여당의 국회의원이 한 마디 했다고 지랄지랄지랄.

그걸 또 받아 쓰는 기자란 새끼들도 뻔한 새끼들인 것이다. 바로 기자실 폐쇄했다고 언론탄압이다 읊어대던 그 새끼들이다. 진보언론에 대한 기대도 이미 그때 다 접었었다. 한국에 제대로 된 기자란 없다. 아니 기자에 대해 환상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저 월급쟁이들이고 돈 들어오는대로 기사써주는 쓰레기들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를 사람취급해주는 자체가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하다하다 별 거지같은 뉴스를 다 본다. 쓰레기는 다시 한 번 구제불능임을 깨닫는다. 국경도 없다. 하긴 어딘들 기자에 대한 인식이 좋기는 할까. 기자가 지성을 뜻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공룡들과 함께 저물었다. 자기는 쓰레기 기사를 쓰지만 그러나 비판은 듣지 않겠다. 기자란 새끼들도 자기 밥그릇지키기에는 진짜 열심이다. 기자가 사람이면 판사새끼들도 사람들이다. 지나가는 개똥도 언젠가는 사람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써글.

만일 기사에서 2년 내 최악이라 나왔다면 3년 전 통계를 찾아보면 된다.


전달 대비 최악이면 전해 동월과 비교하면 되고,


혹은 전년 동월 대비라 하면 전달과 비교해 보면 된다.


더불어 전년 동월이라 했을 때는 전전년 동월도 살펴보면 참고가 된다.


그 밖에 건 조금 더 상세하게 들어가야 하는 터라,


즉 기사 제목에 답이 있는 셈이다.


최소한 어떤 지표도 박근혜 시절보다 나빠진 것은 없다.


그래서 조중동 한경 jtbc 그리고 공중파 기레기새끼들이 개새끼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한경조차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좌초시키려는 이런 보수언론의 짓거리에 동조하고 있는 중이다.


보수정권이 들어서야 자기들 세상이 돌아올 것이라 믿는 것일까?


무엇보다 더 쓰레기는 자유한국당. 박근혜 시절 지표만 보면 도저히 양심상 경제이야기는 하지 못하겠건만.


속는 놈들도 병신이기는 마찬가지다.


심심해서 기사에 언급된 통계들 하나하나 찾아보고 내린 결론이다.


신문 경제면은 특히 볼 것이 못된다. 방송뉴스 역시 경제 관련해서는 굳이 볼 필요가 없다.


손석희도 경제 관련해서는 그냥 병신. 걍 똥이나 싸라 그래라.


볼수록 욕만 나온다. 이런 새끼들이 언론이다. 그런걸 또 돈 주고 본다. 써글.

어려서 어른들과 대화를 하려면 항상 듣게 되는 말이 있었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한 마디로 말문이 막혔다는 소리다. 달리 반박할 논거나 논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무기로 찍어누른다.


"너 몇 살이야?"

"주민등록 까봐?"


3, 40대에서 재취업이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다. 사실 대부분 직장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을 꺼려한다. 괜히 자기 나이와 경력 앞세우면 분위기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력직으로 들어왔어도 일단은 기존 직원에 비하면 신입인데 거기서 나이 앞세우고 경력 앞세우면 체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얼마전 더불어민주당에서 주최한 토론회에 단지 자기들을 비판하는 주장을 하던 사람들이 초청되었다는 이유로 참가를 거부한 여성주의자들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나와 다르니까 대화하지 않겠다. 나와 다르고 틀렸으니까 어떤 토론에도 응하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 여성가족부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까지 감시하고 규제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한 마디로 대화도 토론도 않겠지만 그러나 제재는 하겠다. 뭔 말이냐면 자기들의 논리가 그만큼 박약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히 자신들이 옳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런 토론회에 참석해서 비판자들과 맞서 토론하면 되는 것이다. 설사 논리에서 밀려 지더라도 그 주장하는 바가 타당하다면 그것 나름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토론이란 그런 것이다. 당사자의 역량이 부족해서 지더라도 주장하는 바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후에 재평가될 수 있다. 그럴 수 있도록 더욱 첨예하게 논리를 가다듬고 논거를 보충해서 진지하게 대화에 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그같은 토론과 대화는 거부하고 권력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단속하고 규제하겠다? 그냥 병신들 아닌가?


자기들이 실력으로 쟁취한 권력도 아니다. 여성주의자들이 지지해서 당선되었던 대통령은 지금 감옥에 가 있다. 여성주의자들이 지지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그의 뒤에서 실력을 행사한 같은 여성인 배후는 지금 감옥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대통령도 남성이고 국무총리도 남성이다. 여성으로서 자존심이 있지 이쯤 되면 장관직 내려놓고 워마드가 그러는 것처럼 남성권력 물러가라며 시위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남성대통령에 빌붙어 장관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아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모든 비판을 단속하겠다. 이러니 벌레소리 듣는 것이다. 벌레도 스스로 살아가려 정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기생페미니즘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 페미니즘 정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뭔 짓을 하든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만 깊어진다. 원래 페미니즘에 적대하지 않던 사람들마저 갈수록 페미니즘을 적대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뒤에 있으니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버러지들이.


너희가 주장하는 것은 틀렸다. 너희의 비판은 틀렸다. 그러면 왜 틀렸는가 설득해 보라는 것이다. 논리로써 한 번 그들을 설득해 보라는 것이다. 안된다면 틀렸다 단정해서는 안된다. 저것들이 진짜 사람인가도 의심스럽다. 이렇게까지 여성주의자들을 싫어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끔찍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운데 사회주의 계열이 상당했던 이유는 사실 별 것 아니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식민지 조선의 독립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사회주의자들 뿐이었다. 심지어 소련의 경우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계급해방의 연장에서 제국주의의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약소민족들을 해방시키겠다며 적극적으로 식민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의 호치민도 이때 소련으로 가서 스탈린과 만나고 있었다.


고립무원이었다. 지금 서방이라 불리우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야 당장 자신들부터 식민지배를 하던 입장이었으니 조선의 독립투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중국은 청이 망하고 여러 군벌이 난립하며 당장 자신들부터 일본의 침탈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었다. 그래서 한 편으로 항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의기투합하여 중국공산당과 손잡은 독립운동가들도 적지 않았다. 일단 중국공산당을 도와서 일본을 무찌르고 나아가 조선과 조선인을 해방시키겠다. 바로 같은 목적에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도 자국의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해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던 조선의 민중과 연대하려 했었다. 이른바 국제사회주의라는 것일 터다. 자본가와 제국주의라는 압제자들과 싸우려는 자신들은 오로지 동지고 형제들이다. 다만 일본의 사회주의는 해방도 되기 전에 일본이 고도로 군국주의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일본 국내에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더구나 만주침략이 시작되고 일본제국주의의 지배가 더욱 강화되며 식민지 조선 내부의 상황은 더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사회주의자들은 이념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마지막까지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던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을 유린하고 서구열강을 패배시키며 동남아시아까지 석권한 일본제국주의의 위세에 눌리며 조금씩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자신들만의 힘으로 유럽의 열강들마저 패배시키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무찌르고 독립을 이룰 수 없을 테니 그런 일본에 협력함으로써 최소한의 자치라도 얻어내자. 미국과 유럽의 열강들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일본의 힘을 배우고 일본의 지배 아래서 조선인의 자치와 발전을 이루도록 하자. 사실 일제강점기 말 친일로 전향한 이들에 대해서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부분이 있기는 하다. 어느 쪽이든 현실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한 최선인가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말 독립운동을 하려면 사회주의자여야 했고 사회주의자들만이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그나마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거의가 친일로 돌아섰거나 최소한 타협노선을 걷고 있었기에 사실상 국내에 독립운동이라고는 좌익계열밖에 남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오죽하면 임시정부가 귀국하며 당시 조선 국내에 남았던 이들은 모두 친일파라며 일갈하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좌익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겠다 말하고 있으니. 그러면 좌익계열을 제외하고 당시 식민지 조선에 남았던 독립운동가가 과연 몇이나 될 것이며,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틀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니까 뉴라이트에서 식민지 조선인들은 일본제국주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며 옹호론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을 빼면 조선인들은 그다지 식민지배에 항거하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리니까.


해방 이후 노선투쟁은 노선투쟁이고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다. 일단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이루고 난 뒤에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배제한 바로 그 해방까지의 행적에 대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여운형은 온전한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단지 그나마 당시 조선에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사회주의자들 밖에 없었기에 그들과 연대해서 하루빨리 조선의 안정을 되찾고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시도들까지 깡그리 부정한다면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역사에 순종과 타협 말고 무엇이 남겠는가 하는 것이다.


좌파라서 안된다? 그 좌파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빨갱이 때려잡던 우익 우국지사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에 굴종하거나 혹은 타협하며 조선의 인민들을 약탈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그 빨갱이 때려잡던 손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까지 때려잡고 있었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은 것일 게다. 자신들의 정체성은 빨갱이 때려잡던 그 우국지사들에 있다. 나경원의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다. 한국사회의 뿌리는 좌파 독립운동가가 아닌 그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앞잡이들에게 있다.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역사다.


정말 뭣같은 것이다. 그래도 미국이든 유럽이든 서방의 열강들이 우리의 독립을 도왔었다면. 심지어 어느 개신교인은 일제의 지배가 있었기에 개신교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며 긍정하기도 한다. 차라리 개신교 있는 일제의 지배가 개신교 없는 독립보다 낫다. 현실이 그랬었다. 아무도 우리를 돕지 않았고 단지 사회주의자들만이 우리를 도우려 했었다. 모두가 깡그리 잊으려 하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자유주의와 자유의지주의의 차이는 한 마디로 자유가 인간을 궁극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을 것이다. 분명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면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자유롭게 내버려두기만 하면 되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미 19세기 극대화된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현실을 통해 증명된 바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나온 대안이 개인이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법과 제도를 통해 개입하고 강제하자는 것이었고 이는 곧 사회주의로 이어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처음 외친 구호도 그래서 자유와 민주였다. 더 많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자본가를 억압하려는 것이 공산주의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런 한 편으로 자유주의자들 가운데서도 더 큰 사회적 자유를 위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억압과 통제가 필요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지금은 이들을 자유주의자, 혹은 리버럴이라 부른다. 이에 반해 자유의지주의, 좌파 자유의지주의자라 할 수 있는 아나키스트와 대비되는 우파자유의지주의를 달리 리버테리안이라 부른다. 원래 리버테리안이라는 이름도 아나키즘이라는 단어가 금지되어 있던 프랑스에서 자신들을 정의하는 단어로서 대체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유주의가 자유의 사회적 요소, 즉 개인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사회적 역할에 더 관심을 가진다면 자유의지주의는 그마저도 배제한 온전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 자기의 자기소유를 전제하는 개인에 있어 사회의 지분을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사회에 속한 이상 개인의 소유에 있어서도 사회의 소유를 인정할 것인가, 그렇디 않으면 개인은 오로지 개인의 소유이기만 한 것인가. 굳이 비유하자면 사회자유주의와 개인자유주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구성원 다수의 자유를 위해서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마저 온전히 개인의 책임 아래 둘 것인가. 그래서 전자에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형사가 존재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온전히 민사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간통죄의 경우만 하더라도 과연 결혼한 개인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사회가 제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한창 논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금도 가정과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서도 기혼자의 애정은 제한되어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실 공산주의자들과 가장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자본주의자들이 아닌 아나키스트들이다. 차라리 공산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둘 다 기성의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러나 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큰 차이를 보인다. 더 강력한 억압과 통제를 통해 그것들을 극복하는가, 아니면 그런 모두를 해체하는 궁극적인 해방을 통해 그를 이룰 것인가.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조차 또다른 억압이고 강제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의지주의자들 역시 사이가 좋지 못하다. 과연 서로가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가. 진정한 자유주의인가. 심지어 이제는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리버티마저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프리덤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그런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 더 큰 자유를 위해 개인의 자유에 개입하겠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얼마나 모순적으로 들리겠는가.

그러니까 최근 이야기되고 있는 젊은 층의 보수화와 관련해서 그들의 보수화가 과거 권위주의적인 보수와 같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는 것이다. 젊은 보수들이 주장하는 바는 한결같다. 그냥 내버려두라. 복지든 경제민주화든 그냥 상관말고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최저임금조차도 개입이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조차도 지나친 정부의 사생활 간섭이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각자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통적 보수의 가치인 권력의 사유화와 맞물린다. 정치권력이든 사회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권력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고 그러므로 권력을 소유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여기서 권력의 사유화에 따른 권리의 침해만 배제하면 사실 자유의지주의는 이들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이명박근혜가 집권해서 자기들에게 직접 피해가 온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명박의 사자방이든 박근혜의 국정농단이든 그러나 정작 자기들에게 직접 피해를 준 것은 없다시피 하다. 한 마디로 직접 나에게 해만 끼치지 않으면 어디서 학살을 저지르든, 세금을 모두 횡령해서 떡을 사먹든 상관하지 않겠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런 점에서 차라리 자신의 일상을 위협하는 듯한 페미니즘이 더 큰 문제로 여겨진다. 자신들의 평온한 일상을 자꾸만 건드리는 듯한 현정부의 정책들이 더 거슬리기만 한다. 차라리 현정부가 자기들이 뭘 하든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더 지지했을지 모른다.

즉 한 편으로 권위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통해 진보적인 듯 보였던 젊은 세대가 오히려 현정부 들어 보수라기보다는 반진보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 이유라 할 수 있다.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자신들에게 자신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전에는 자유한국당의 권위주의적인 권력이었고 이제는 민주당의 자유주의적 권력이 되었다. 무엇이든 자신들의 온전한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고 제약하려는 대상과는 무조건적으로 적대하며 싸우겠다. 다시 자유한국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온전히 자유로우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원래 자유의지주의라는 자체가 기성의 권력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권력이란 단지 억압이고 착취일 뿐이다. 모든 권력은 불의하며 오로지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그래서 리버테리안이다. 달리 말하면 해방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인습으로부터, 현재의 권력으로부터, 혹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인위적인 억압과 강제로부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의로운 권력이고 정의로운 정책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동의하지 모든 행위들은 부정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무정부주의가 맞겠지만 현실적으로 국가가 없으면 곤란하므로 최소한의 정부만을 추구한다. 어차피 너희들따위 없이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얼마든지 더 잘 할 수 있다. 너희가 오히려 없어야 내가 더 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차피 정부로부터 자기들이 받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기성사회로부터 자신들이 받은 것따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헬조선이다. 그들에게 지금의 기성사회는 때려부셔야 할 현실의 모순이고 부조리이며 무엇보다 적인 것이다. 때로 유명인들에 보이는 무조건적인 적의는 그들의 내재된 분노의 표출이다. 끊임없이 쌓여 온 좌절과 절망이, 마침내 현실에 대한 불신으로 원망으로, 마침내 분노와 부정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민주당도 자유한국당과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사실 그리 크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무척 소중하다.

자유의지주의 자체가 기성의 부조리한 권력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니까. 기성의 모순된 구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생겨났던 것일 테니까. 그런 점에서 방향성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현실은 그들에게 가혹했고 따라서 그들의 분노 역시 격렬할 수밖에 없다. 믿었던 권력으로부터 배신당했다. 사람이 아무때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떤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은 기존의 권력과 다르지 않았고 좌절과 절망은 커져만 간다. 비례해서 증오도 분노도 커져만 간다. 누구의 잘못일까?

과연 보수화되었는가. 하지만 과연 그것을 보수라 단정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유주의는 한 편으로 진보이며 한 편으로 보수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의 입장에서 진보이고 사회주의 입장에서 보수다. 그보다 더 극단적인 자유주의라 보면 된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이 반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젊은 층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믿었던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 어쩌겠는가. 더불어민주당의 리버럴과 젊은 층의 자유의지주의는 가고자 하는 길이 너무 다르다. 아무튼.
그동안의 통계를 보니 2017년 이전보다 거의 같거나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 2017년 2월만 올 2월보다 0.2%높다. 무엇을 말하는가?

문재인 정부의 고용률로 문재인 정부를 공격한다. 그보다 더 낮은 보수정부의 고용률은 비교대상도 되지 못한다.

이런 게 언론이다. 표도 볼 줄 모르는 국민이 너무 많다. 못 보는 척 하는 것인지.
아마 나이 좀 있다면 아이아코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전성기 경영을 잘한다는 것은 곧 구조조정을 잘한다는 뜻이었다. 노동자를 해고해서 인건비 지출을 줄이고 그 만큼을 이익으로 남겨 주주들에게 배당으로 나눠준다. 당연히 주주들이 보기에 최고의 경영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인력을 대책없이 줄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상당수가 숙련된 노동자들이고 때로는 당장 이익을 낼 수 없는 개발부서의 인력들까지 포함된 경우가 적지 않다.

주주자본주의의 한계로 흔히 지적되는 부분이다. 실제 아마 삼성이 크라이슬러 같은 주주가 절대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기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삼성전자는 없었을지 모른다. 완전 도박이었다.  어차피 안 될 것이라 모두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실제 상당기간 삼성전자는 아무 실적도 내지 못하고 돈만 까먹고 있었다. 그야말로 회사의 미래를 건 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국내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는 해외자본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다. 기업의 이익 가운데 배당을 늘려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서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이익이 줄면 자신들은 주식을 팔고 다른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찾아가면 된다. 엄밀히 주주는 기업의 주인이 아니다.

가끔 민주주의란 제도의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왕조국가에서는 백 년 앞을 내다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어차피 중간에 왕조가 바뀌거나 하는 일이 없다면 자신의 피를 이은 후손일 테니 크게 문제가 없다면 자기가 의도한대로 이어받아 진행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경우를 보더라도 선대의 유훈은 특히 계승의 정통성을 권력의 근원으로 삼는 왕조국가에서 헌법보다 더한 구속력을 가지게 된다. 그에 반해 민주주의 국가는 어떤가. 정부가 바뀌면 정책도 바뀌고, 무엇보다 새로운 정책을 시도해보려 해도 국민이 참고 기다려주지 않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얼마전 KBS의 최경영기자가 언론의 경제보도에 대해 비판한 것의 연장선상이다. 과연 언론 뿐인가. 언론만 참지 못하고 중간에 어깃장부터 놓는가. 조금만 불편해도 조금만 어려워져도 바로 우는 소리부터 내는 것은 국민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내가 피해입고 내가 성가셔지는 일이 생기면 바로 반발부터 하고 만다. 차라리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 최저임금만 해도 그렇다. 최저임금 자체보다도 그로 인한 논란들이 너무 시끄럽고 번거롭다. 그냥 전처럼 되돌리자. 그래서 그런 원인을 제공한 정부를 비판한다. 다시 아무일없이 예전처럼. 그러고보면 유럽의 선진국들도 덕분에 고인물을 넘어 썩은 물이란 소리를 듣는다. 가까운 일본도 근본적인 변화 없이 시간만 끌다가 지금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멀리 내다보고 현재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견딜만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만한 지식도 사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드러난 현상만을, 자기 앞에 놓인 현실만을 보고서 바로 판단한다. 그래서 브렉시트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도 나온 것 아니던가. 브렉시트가 의미하는 바도 모르고 선동에 넘어가서 투표하고는 뒤늦게 후회한다. 그렇다고 그런 국민의 요구를 거부하기에는 그들이 행사하는 한 표가 정치인들의 목줄을 쥐고 있다. 자칫 민주주의가 중의정치로 빠지고 마는 이유다. 국민이 바라니까. 국민이 요구하니까. 그러므로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자신의 권력도 유지할 수 있으니까.

문재인 정부의 성과제일주의를 보며 슬퍼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도 문재인 정부에서는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정책들이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미 한계에 이른 한국 사회와 경제의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멀지만 그러나 확실한 무언가 대책들이 나오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여론을 이기지는 못했다. 국민이 바란대로. 국민이 요구하는대로. 장기적인 정책들은 포기하더라도 당장 보이는 성과를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유한국당이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문제는 개인이 잘못한 탓이다. 원인도 해결방법도 명확하다. 그러니까 개인이 알아서 잘하면 된다. 20대가 차라리 자유한국당을 지지하려는 이유다. 그들과 주장하는 바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에 비해 민주당은 정의당만은 아니더라도 워낙 하고자 하는 것들이 많으니.

사실 한국 사회와 경제는 벌써 오래전부터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기업의 경쟁력은 나날이 떨어지고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따른 대립과 갈등마저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면 답은 무언가. 최소한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었을 터다. 그런데도 결국에 걸음을 멈추고 눈을 뒤로 돌려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식물국가다. 그렇게 국가는 서서히 안에서부터 허물어져간다. 최강대국 미국이 처음부터 저리 수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허덕이고 있었겠는가. 트럼프가 당선된 것을 비웃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든 미국 내부의 모순들을 주목한다. 하지만 트럼프마저 구조적으로 해결하기보다 대중의 인기를 모을 수 있는 단기적이고 즉흥적인 처방들에만 의존한다. 그래서 트럼프도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다.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을 텐데.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도. 하지만 야당의 반발은 거세고 국민의 여론은 그보다도 더 사납다. 위기의 순간에 한 발을 내딛기가 그렇게 무섭고 힘들다.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으니까. 차라리 플라톤처럼 완벽한 초인의 철인통치를 바라게 되는 것은 그만큼 내가 일상에 지쳐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도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안철수로, 문재인으로 바람을 쫓아 나부낀 것인지 모른다. 문재인이라면 다 해 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대해 회의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대중에 대해 실망하면서부터다. 정확히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하게 되면서부터다. 민주주의란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민주주의란 제도를 추구해야 하는지 모른다. 가장 최악의 정치제도지만 그러나 더 나은 다른 체제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나마 대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히틀러로 하여금 유럽을 전쟁의 포화속으로 몰아넣게 만든 당사자들이 다름아닌 독일의 국민들임을 잊지 않으며. 미국의 경제를 저 모양으로 만든 것도 다름아닌 미국인 자신의 선택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책의 책임이란 것이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생각만 깊어진다.
검찰에서 김학의 전차관의 특수강간 혐의에 대해 무혐의처분을 내린 이유를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전부터 들어왔었다. 이른바 한국에서 엘리트라 불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추잡하게 놀고 있는가를.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억눌러 온 이들이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 고작 대학입시 하나 끝났다고 온갖 일탈들을 심지어 사회 전체가 눈감아주고 있는 현실에서 그보다 더 큰 성공을 이루게 되었다면 과연 어떻겠는가.

검찰에서도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갔다면 이 정도 노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권에 잘 보여 법무부차관까지 되었다면 이보다 더 심하게 노는 것도 얼마든지 용인된다. 그러자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고,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까지 치르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더 실력도 있는데 이 정도 노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나도 저 정도 위치 되면 저렇게 놀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대중들조차 미꾸라지가 용이 되어 저렇게 놀자면 사법시험이라는 사다리가 필요하다며 아우성치고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인권따위가 중요하겠는가. 자기들이 이렇게 노력했고 실력까지 증명했는데. 이 나라를 진정 이끌어가는 엘리트일 텐데도.

오히려 괘씸했을 것이다. 감히 자기들이 노는 것을 수사했다. 자기들이 정당히 노는 것을 가지고 신고까지 했다. 도리어 당당히 협박까지 한다. 자기들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누구도 자기들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동안 어떤 정권도 검찰을 개처럼 부리기는 했지만 그들을 벌주지는 못했다. 얼마나 정권이 미울까? 그래서 노무현도 그렇게 망신주어 죽게 만들었는데 지금도 문재인을 죽이고 싶어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되도 않는 환경부 블랙리스트 수사를 보고 있으면 저들의 그런 음험한 악의를 바로 느끼게 된다. 누구도 검찰을 건드려서는 안된다. 누구도 검찰과 법원이라는 이 사회의 엘리트들을 건드려서는 안된다. 조중동이라고 하는 최고의 언론과 대기업들을 건드려서는 안된다. 국민은 어떨까?

아마 이 사회 엘리트라는 것들의 뒤를 캐보면 가관도 아닐 것이다. 김학의는 단지 그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엘리트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유흥업소 관계자와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하긴 이건 일반인이 아닌 유흥업소 종사자이니 경우가 다를까? 일반 여성이 아닌 유흥업소 종사자에 대해서는 어떤 모욕을 가해도 괜찮다는 것이 최근 여론인 모양이다. 그래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김학의 쯤 되면 그렇게 해도 된다. 그것이 정의다. 아 사회의 가치고 질서다. 그리고 그동안 그렇게 믿어왔고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을 것이다. 그나마 정권이 바뀌고 끈떨어진 연이 되지 않았다면 재조사도 없었을 것이다. 줄을 잘못 선 것은 실패한 것이다.

엘리트들 뿐만 아니라 엘리트를 바라보는 이 사회 대중들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쪽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닌 일반 여성이라는 사실에 사회가 비로소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엘리트들이 일반 여성들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듯, 일반 대중 역시 인간에 대한 기준을 두고 있다. 저들에게는 그래도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 그래서 지금도 성접대사건이다. 그래도 되는 여성들에 대한 범죄 아닌 유흥이다.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민낯이라고나 할까.

어째서 김학의 전차관의 범죄가 지금껏 철저히 묻힐 수 있었던 것인가. 그나마 언론들이 불을 지피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아주 소수의 언론들만이 끝까지 놓지 않고 뒤를 쫓은 끝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진짜는 일반여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냥 자신들과 똑같은 평범한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회 엘리트처럼. 엘리트를 욕하지만 엘리트를 닮아간다. 현실이다.
http://m.mt.co.kr/renew/view.html?no=2019031217433024970&ca=

웬일이래? 일일이 찾아보며 확인해야 했던 내용들을 언론이 정리까지 해서 기사로 내놓았다. 자칭 진보라는 한겨레도, 경향도, 정론이라는 JTBC도 감히 하지 않는 일이다. 언론의 본분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니다.

경제는 심리다. 경제가 잘되려면 경제주체들이 낙관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경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소비도 늘고 투자도 는다. 그런데 모든 언론이 정부를 비판하겠다고 경제 안 좋다는 소리만 하고 있으면 누가 소비를 하고 투자를 하겠는가. 그런데 경제가 잘 돌아갈 리 있겠는가. 그동안 한국 경제를 망친 주범이 언론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기사를 쉽게 쓴다. 남 욕하는 건 쉽다. 남 비판하는 건 쉽다. 그러나 어떤 사안을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그 이면까지 살펴 분석하는 것은 어렵다. 그냥 시작부터 끝까지 최저임금 탓하고 탈원전 탓하면서 정부만 비판하는 건 기자 입장에서 날로 먹는 것이다. 굳이 OECD자료까지 뒤져가며 기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시간도 노력도 적게 든다. 그러면서도 권력을 비판한다는 뿌듯함까지 챙길 수 있다.

내가 괜히 언론을 불신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정부를 옹호하는 기사만 쓰라는 것은 아니다. 불편해도 비판받을 부분은 비판받아야 하고 비난받을 부분이 있으면 기꺼이 비난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전제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경제가 폭망했는가. 아니라 내 몇 번이나 말해야겠는가.

세계경제가 어렵다.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에 비하면 경제규모에 비해서도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올해 SOC투자까지 실제  이루어지면 의외로 더 나은 성장을 보일 수도 있다. 세계를 보라. 나라 밖을 보라. 잘린 반도라서일까? 시야가 바다 너머까지 미치지 못한다. 간만에 제대로 된 기사였다. 참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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