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특히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반PC주의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평등과 복지를 부정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로구나.
반PC주의자들 다수는 생각한다. PC주의란 흑인을 우대하는 것이다. 흑인과 히스패닉으로 인해 오히려 아시아인들이 차별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백인들과 손잡고 흑인과 히스패닉을 우대하는 PC주의를 타도해야 아시아인의 지위도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는 백인이라면 당연히 아시아인도 차별한다. 실제 미국 사는 아시아인들 가운데 백인들로부터 차별받았던 경험을 토로하는 이들이 거의 다수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어째서 한국 원숭이들은 백인을 도와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면 자신들이 그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믿는 것일까? 백인들이 그동안 자신들을 위협할 정도로 지위와 권리가 신장된 흑인과 히스패닉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시아인들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흑인과 히스패닉을 위한 차별금지 및 소수인종 우대정책들로 인해 아시아인인 너희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그러니 함께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에 대한 우대정책을 폐지하자. 그러면서 그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무래도 이민의 동기부터 서로 다르기에 결과도 당연하게 크게 차이나게 되는 교육현장이라는 것이다.
아시아인 가운데 미국으로 이민까지 갈 수 있을 정도면 어느 정도 경제적인 기반이 갖춰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최소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있었던 경우가 다수를 이룬다. 반면 흑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히스패닉들도 그야말로 살기 위해 목숨걸고 국경을 넘은 경우가 대부분일 터다. 그렇다 보니 이민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던 교육현장에서 아시아인의 우위는 실제 눈에 보일 정도로 두드러질 때가 많다. 그런데 소수인종우대정책은 그럼에도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이 속한 인종적 정체성에 의해 많은 것들이 결정되도록 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아시아인인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흑인이고 히스패닉이라는 이유로 저놈들이 내 기회를 빼앗아가고 있다. 사실 이건 인종과 경제적인 계급이 종합된 결과라 할 수 있을 테지만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철저히 인종문제로 몰아가며 진실을 호도한다. 거기에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흑인과 히스패닉을 위한 소수인종 우대정책, 나아가 인종차별반대정책을 폐지해야 아시아인에게도 유리하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는 백인이라면 당연하게 아시아인도 차별한다. 아니 같은 백인 가운데서도 아일랜드계나 이탈리아계 혹은 동유럽계를 구분해서 차별하기도 한다. 흑인과 히스패닉에 대한 우대정책이 마음에 안 드는 백인이 아시아인이라고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장에 흑인과 히스패닉을 공격하는데는 오히려 계급적인 이유까지 더해지며 그들로부터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는 아시아인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군복무자를 위한 가산점 폐지를 위해서 장애인을 이용했던 한국 여성주의자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군복무는 분명 특정한 성별을 가진 이들에 대해서만 지워지는 불공정한 의무일 테지만 그것을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장애인을 이용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방적으로 의무만 지고 있는 처지인 남성은 장애인에 가려 그 권리를 주장할 당위성을 잃게 된다. 그러면 과연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진짜 장애인들을 걱정해서 그들을 앞세운 것이었을까? 그럴 거라 믿는다면 당신은 진성패미니스트일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보수라고 반드시 복지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정책 정도는 존재해 왔었다. 전두환 정부 아래에서 정부가 마련해 준 일자리에서 정부가 시키는 일들을 해주며 월급도 받고 때마다 쌀과 선물도 받아봤던 처지였기에 당연하게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 그들이 최소한 살아갈 수 있도록 선별적으로 복지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상대적인 진보, 혹은 리버럴들은 그러한 보수의 복지정책에 대해 인간의 기본권 차원에서 보편적 복지를 주장해 왔었다. 그보다는 모든 국민들이 동등하게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연 진짜 당장 죽고 못살 것 같은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 어느 쪽 주장이 더 귀에 솔깃하겠는가.
나도 어차피 백인에게 차별받고 흑인도 백인에게 차별받는데 그래도 흑인이 나보다는 우대받는 것 같다. 그러니까 흑인과 연대해서 아예 모든 차별을 폐지하기보다 흑인을 끌어내려 그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복지라면 그 돈까지 모두 자기가 받아서 누리는 쪽이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나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 그러면 과연 그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에게 돌아갈 복지까지 모두 빼앗아 자신에게 주려 할 때 그 수준이 지금 당장도 자기보다 나은 정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이면 선별적 복지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급식이다.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도 같이 먹어야 하기에 어찌되었거나 일정 이상의 수준을 보장해야 하는 한국의 급식과 달리 어차피 있는 놈들은 사립학교에 다니며 알아서 따로 챙겨 먹을 것이기에 딱 그 수준에 맞는 정도로만 제공하고 있는 미국의 급식이 그 예인 것이다. 어차피 가난한 놈들에게만 주어질 무상급식인데 그 질과 양이 훌륭한 수준이라면 그만도 못한 밥을 먹여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지만 그만한 여유가 없기에. 그렇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아닐 것이기에. 그러니까 저놈들 것을 빼앗아서 자기만 주겠다는 소리에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차별받는 흑인과 히스패닉이 자신들을 제외한 또다른 흑인과 히스패닉을 차별하겠다는 정당과 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차별받더라도 저놈들보다만 나으면 된다. 그런 점에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가난한 이들이나 소수인종 소수민족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 저놈보다만 나으면 된다. 저놈만 아니면 된다. 그렇게 몰아가기도 한다. 질시에서 비롯된 증오와 혐오, 그리고 공포야 말로 보수의 진짜 힘이 아닐까. 그것이 한국에서도 2찍 2030을 만들고 있는 것일 테고. 그게 반PC주의의 동력이다.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