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조정에서 각 관청에 예산을 내려보내는 장면이다. 어느 관청에서 쓸 수 있게 구리 몇 근을 내렸다. 바로 이 구리가 돈을 주조하는 원료다. 한 마디로 각 관청에서 조정에서 받은 구리를 가지고 자체적으로 돈을 주조한 다음 그것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즉 들어가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있는 구조인 셈이다. 돈으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정작 돈을 주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 기록만 남는다. 상평통보만 기준으로 하면 그냥 순적자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화폐라고 하는 본질을 꽤나 적확하게 꿰뚫은 상소를 흔하게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후기까지도 조선사회는 아직 쌀본위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기존에 가치의 기준으로 쓰이던 쌀을 사용해서 돈을 구매해야 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돈이란 상품의 기준이기 이전에 또한 그 자체로 거래가 가능한 상품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다시 말해 내가 가지고 있는 재화나 노력을 사용해서 돈이라고 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행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발권국이라는 말이 가지는 진짜 의미인 것이다. 돈을 찍어 시장에 푼다는 것은 다시 말해 돈이라는 상품을 생산해서 다른 재화로 교환하는 행위인 것이다. 돈을 찍어낸다고 해서 진짜 찍어낸 돈을 시장에 그냥 던지는 것이 아니라 거래라는 행위를 통해서 그 돈이 시장에서 융통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현대 통화정책에서 중요한 것이 금리인 것이다. 중앙은행에서 돈을 찍어내면 바로 시장에 유통시키는 것이 아니라 채권의 형태로 은행들에 빌려주어 대출을 하든 이자를 주든 해서 유통케 하는 것이기에 중앙은행의 금리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실제 시장에서 유통되는 화폐의 양이 결정되게 된다. 정부 역시 그렇게 같은 방법으로 채권을 발매하고 그를 중앙은행에서 사들이게 하는 식으로 재정을 충당하여 시장에 필요한 양의 화폐를 유통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정부의 빚이란 따라서 정책적으로 시장에 유통시키는 추가적인 화폐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부가 빚을 짐으로써 더 많은 돈이 시장에 풀리고 그 돈이 경기를 부양하거나 혹은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이 그동안 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를 감수해가며 세계로부터 막대한 상품을 사들이고 또한 곳곳에 돈을 뿌려 온 실제 이유인 것이다. 미국이 자체적으로 찍어낸 화폐인 달러를 다른 나라들에서 자기 돈처럼 쓸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돈을 찍어서 각 나라들에 일정량씩 막 퍼다 줄까? 결국은 그렇게 찍어낸 돈으로 다른 나라들로부터 그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사들여야 하는 것이다. 돈으로 돈을 사들이는 것이 국채이고, 돈으로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무역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무역적자라는 것은 미국이 찍어낸 달러를 다른 나라들의 상품으로 교환하는 과정인 것이고,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 역시 정부가 발행한 국채로 다른 나라의 화폐를 사들이는 절차인 셈이다. 그렇게 미국이 무역과 재정에서 막대한 적자를 감수함으로써 달러는 세계로 충분히 퍼져나가고 기축통화로서 세계의 화폐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더이상 적자를 유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미국 정부에서 충분한 세금수입과 적절한 지출로 더이상 국채를 발행하지 않아서 다른 나라들에서 사들이고 싶어도 사지 못하게 된다. 미국 경제가 오히려 무역에서 흑자를 기록하며 달러가 다른 나라들에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비슷한 예가 세계사에도 꽤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른바 전황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돈을 필요로 하는데 정작 그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중세말에 한 번 유럽에서도 화폐경제가 무너질 뻔한 적이 있었다. 세금을 금으로 내야 하는데 당시 유럽이 가지고 있던 금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어서 정작 세금을 낼 금을 구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조선에서 화폐유통이 늦었던 이유도 구리광산이 없는 탓에 원재료의 수급이 너무 불안정해서 시장의 신뢰를 잃은 탓이 컸었다. 수많은 다른 나라의 화폐들이 달러의 지위를 대체하려 했어도 그러지 못했던 실제 이유다. 그런데 진짜 미국에서 더이상 돈을 쓰기 싫다고 무역도 닫고 재정도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래도 발권국으로서 미국의 지위는, 달러라고 하는 기축통화를 통해 얻고 있는 막대한 이익 역시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미국 정부의 재정은 오로지 국민의 세금이다. 뉴스에서 어느 공화당 정부 관계자가 한 발언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일 것이다. 그동안 미국 정부가 쓴 돈들이 전부 미국 국민들의 세금인 것일까? 정확히 적자를 제외한 부분만 그렇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감당해 온 재정적인 적자들은 대부분 국채를 통해 그것을 사들인 개인과 기업과 국가들의 이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당연하게 세계의 여러나라들에서 자국의 재정으로, 혹은 발권력으로 사들인 것들이다. 세계의 수많은 개인과 기업과 무엇보다 국가들에서 미국이 국채를 찍어낼 때마다 사들임으로써 정부가 기록한 적자 만큼 미국은 더 많은 돈과 상품을 시장에서 유통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을 모조리 배제한 채 다른 나라들이 사들인 국채들까지 전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쓴다면 앞으로도 그같은 구조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지금 트럼프의 정책이란 발권국으로서 미국의 지위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으로도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서 세계에 유통시키기보다 세계로부터 달러를 회수하는 위치에 있겠다. 그런데도 과연 미국은 지금과 같은 세계경제의 중심으로써 세계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나라에 조금도 기여를 않고 다른 나라들에 대해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들의 돈만을 써달라는 요구가 언제까지 어디까지 통용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미국이 발권국으로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은 이상 미국의 고립주의란 미국의 자멸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일론 머스크가 헛똑똑이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작 미국이 발권국이자 기축통화국이라는 의미를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들이 죄다 병신이라서 그런 막대한 지출과 적자를 감수했던 것일까.
돈을 상품이 아닌 오로지 거래의 기준으로서만 생각하니 빠지는 오해인 셈이다. 무조건 돈은 적게 쓰고 많이 버는 것이 좋다. 돈을 쌓아두는 것이 무조건 이익이다. 기업은 그래도 되는데 국가는 아니다. 국가가 재정으로 이익을 보면 그만큼 시장에서는 유통되는 돈이 줄어든다.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특히 젊은 층에서 세금을 줄인다고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에 열광하는 여론들이 크게 일고 있는 것이다. 그냥 쓰는 돈을 줄이고 버는 돈만 늘어나면 좋다. 개인은 그래도 되지만 국가가 그러면, 더구나 세계의 발권국이자 기축통화국이 그러고 있으면 적지 않은 문제가 일어난다. 한국은행이 지출을 줄이고 이익을 늘려 보겠다고 돈을 벌려고만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명확하지만 그러나 이해하려면 기초가 필요하다. 미국이 쓰는 돈은 온전히 미국 시민들의 세금이기만 한가? 그런 일차원적인 사고가 트럼프를 만들었겠지만. 단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