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 말 한 마디에 트럼프의 진짜 속내가 담겨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들로부터 관세를 걷으면 소득세를 걷지 않아도 될 것이다."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의 행보를 보면 그 의도가 확실히 명확하다. 나라가 쓰는 돈을 줄이겠다. 무엇을 위해서? 재정적자?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세금은 줄이겠다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 걷는 세금을 줄이고 그만큼 적자가 심해지지 않도록 쓰는 돈도 줄이겠다. 여기서 방점은? 세금을 줄이겠다. 누구의 세금을? 이게 중요하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현대의 세제에서 당연히 돈을 더 많이 벌수록 더 비례해서 세금도 많이 내게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조단위의 재산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한 해 내는 세금의 액수를 생각하면 억울할 만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 쓰는 돈도 줄이고 나아가 다른 세원도 찾아야겠다. 이를테면 관세.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저렇게 자기네 동맹까지도 돌아보지 않고 관세를 때려대는 저 모습을 보고도, 심지어 이제 한국마저 그 대상으로 삼고 있는 상황에서도 트럼프 잘한다고 빨아주는 인간이 한국에 저토록 많다는 사실이. 다른 것 없다. 반PC 하나다. PC가 나쁘니까 반PC하시는 트럼프님은 옳은 것이다. 하긴 오바마는 극단적인 인물이고 트럼프가 합리적이라는 놈들이 중도를 자처하기도 하는 게 현실이고 보니.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그리고 공화당 정부가 하고 있는 꼬라지를 보라. 그렇다고 미국 민주당이 뭐라도 나았는가면 그놈들도 제대로 세금 안 걷으면서 정작 쓰기만 줄창 써대는 건 같았었다. 솔직히 조금 더 낫다고 하자면 트럼프가 차라리 낫다. 얘는 세금을 덜 걷는 대신 쓰는 것도 줄이자는 쪽 아닌가? 세금도 안 걷고 단기국채나 찍어대며 돈만 더 써제끼는 바이든보다야 이쪽이 더 합리적이기는 하다. 그래서 트럼프가 집권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류독감 방역에 뭔 인원이 그리 필요한가? 항공안전도 인력을 줄여라. 핵무기관리하는 놈들도 그보다 더 적은 수로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더 데려다 쓰면 되겠지.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그동안 이어오던 국제원조도, 동맹국들과의 공조도, 세계경찰로서의 위상도, 무엇보다도 발권국으로서의 지위도 깡그리 무시한 채 그냥 쓰는 돈만 아끼자. 이게 합리적이라 한다면 그놈은 절대 장사도 해서는 안되는 놈이다.

 

아무튼 여러모로 투명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너무 투명해서 오해가 생기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너무 일차원적이거든. 그런데 그런 일차원적인 사고가 한국 특히 2030 남성들의 사고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꽤나 보는 재미가 생기는 것이다. 아마 그들도 알 것이다. 사고수준이 비슷하니까. 그저 치장을 그렇게 하는 것일 뿐. 아니면 지능의 문제라 봐야 할 터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원래 일론 머스크는 친민주당 인사였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특히 PC가 잘못해서 공화당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주장 아닌가?

 

그래서 지금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 정부에 들어가서 하고 있는 짓거리들을 보라. 안보와 방역, 안전등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국가서비스를 제공하는 공무원들까지 거침없이 잘라내고는 미국연금까지 손대려 하고 있는 중이다. 연금은 폰지사기다. 독일에서는 나치를 찬양하는 극우정당을 응원하고, 인접한 캐나다의 주권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가 원래 민주당 지지자였었다고?

 

윤석열의 내란시도 당시에도 비슷한 놈들이 있었다. 여성을 언급하면 자기들은 탄핵에 반대할 것이다. 2030남성들을 우선하지 않으면 내란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게 원래 없었는데 단지 민주당에 대한 반감만으로 할 수 있는 선택이냐는 것이다. 민주당이 못해서 자기들도 윤석열을 지지한 것이다. 문재인이 잘못하고 이재명이 잘못해서 자기들도 국민의힘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면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의 행보에 대해서도 민주당적인 관점에서 비판해야 하는데 전혀 아니었었다. 원래 민주당을 지지한 게 맞다면 민주당 지지자의 관점에서 국민의힘이든 윤석열이든 비판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의힘과 윤석열의 관점에서 민주당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진짜 민주당 지지자였던 것일까?

 

결국 지금 일론 머스크가 보이는 행보들이야 말로 원래 그가 믿고 추구하던 진심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그동안 민주당 인사들과 친한 것처럼 보인 것은 단지 사업적인 이익을 얻고자 보인 행동들이라 보는 것이 옳다. 하긴 전기차와 관련해서 막대한 재정을 동원해가며 수많은 혜택을 주었던 것은 다름아닌 민주당 정부였었으니. 그에 반해 전기차와 관련한 모든 혜택을 종료시키려는 트럼프 정부에서도 일론 머스크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어느 쪽이 진심이었는가는 따라서 너무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누구 때문에 누구 지지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내가 2030 남성들을 욕한다고 2030 남성들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을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자기가 진심으로 믿고 있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단지 다른 사람의 말 몇 마디에 성향을 바꾼다? 그냥 원래 그런 놈들이니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부모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니 그런 그들의 생각을 바꿀 생각따위 전혀 없는 것이고. 그놈들은 그대로 사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산다. 그런데 자기가 선택한 것을 다른 사람 탓을 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하고 비루한 것인가.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도 흔들림없이 일관되게 열정과 헌신을 바치는 모습이야 말로 그의 진심이라는 것이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폐지되고, 예산이 삭감되고, 여가부에 대한 예산을 늘려도 한결같이 지지를 보내는 그 모습이야 말로 그들의 정체라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가 보여준다. 그런데 뭐라? 일론 머스크도 원래는 민주당 지지자였다? 그렇게까지 미국 민주당을 악마화하고 싶은 의도가 그 안에 숨어있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민주당과 PC가 잘못되었다. 지금 일론 머스크가 하는 것을 보면서도. 뇌가 없거나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인간이 아니거나. 버러지 추천이다. 병신새끼들.

1990년대 지금도 회자되는 군가산점 판결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장애인을 함께 앞세우고 있었다. 여성 뿐만 아니라 장애인 역시 군대에 가지 못한다는 이유로 공무원 임용에서 군가산점으로 인해 차별을 받고 있다. 그래서 과연 당시 여성주의자들은 진심으로 장애인들의 입장까지 생각해서 재판에 앞세웠던 것이었을까? 여성주의자 가운데 성소수자나 장애인을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후로도 장애인 이슈에서 여성주의자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면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한국 반PC주의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미국에서 대학들이 신입생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인들에게 페널티를 주고 있는 것을 백인 반PC주의자들이 앞세우고 있으니 반PC주의가 PC에 비해 아시아인에게 더 우호적이라 여기는 것이다. 실제 흑인이나 히스페닉에 비해 아시아인들, 특히 동북아인들의 피부가 더 흰 편이기도 하고, 어려서부터 서구문명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고방식을 흡수하다 보니 아시아에서 주류인 자신들이 미국에서 비주류인 흑인이나 히스페닉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한 마디로 아시아인은, 특히 동북아시아인들은 흑인이나 히스페닉같은 미국내 비주류 유색인종들과 다른 과거 일본이 탈아입구를 외치며 주장했던 명예백인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흑인과 히스페닉 등 비주류 유색인종들에 우호적인 PC주의보다 그를 부정하는 반PC주의가 훨씬 더 자신들에게도 유리하다.

 

그것을 더이서 바로 엿볼 수 있는가면 헐리우드 영화에서 흑인이나 히스페닉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경우 해당 배우의 외모나 피부색을 가지고 차별적인 언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모습들이 바로 그 증거들인 것이다. 흑인과 히스페닉은 못생겼고 심지어 혐오스럽기까지 하며 백인은 우월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 전국시대에 흑인이 등장한다고 난리가 난 것도 그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동안 백인이 사무라이로 등장한 만화나 영화가 얼마나 많았었는데. 역사왜곡으로 따지면 중국 삼국시대에 일본인 고딩들이 타임슬립해 가거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어린 시절 표류해 온 칭기즈칸과 만났다는 것 등 따져보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 게임과 영화에서 그렇게 역사적 사실들을 디테일까지 따져가며 즐겼다고 왜곡을 이유로 비판하는 것인가. 그냥 흑인이 싫다. 히스페닉이 싫다.

 

그래서 과연 반PC주의를 주장하는 미국의 백인들은 아시아인을 진정 자신들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있는가? 그동안 헐리우드 영화들에서 흑인만큼이나 모욕적일 정도로 차별적으로 그려졌던 것이 바로 한국인과 일본인들이었다. 그나마 일본은 좀 사정이 낫고 한국은 거의 듣보잡 수준이라 어디 근본도 없는 영화 하나에서 한국인이 매우 대단하게 묘사되었다고 꽤나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영화도 정작 내용을 보면 한국인보다는 중국인에 더 가깝게 묘사되고 있었다. 반PC주의에 동참하면 아시아인들도 백인처럼 흑인이나 히스페닉과 달리 그보다 우월한 존재로써 대우해줄 것이라 착각하는 모양이다만 글쎄... 하긴 아시아에서 만든 게임에서도 정작 캐릭터들은 거의 서양의 그것에 가깝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상관은 없겠다. 백인처럼. 그러니까 백인이 우월하다.

 

아무튼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다. 그래봐야 아시아 몽골리안 주제에 남의 나라에서 영화에 백인을 캐스팅하는지 흑인이나 히스페닉을 캐스팅하는지 왜 그리 난리들인지. 게임에서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을 등장시키는 것에 어째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원래 게임이든 영화든 만화든 잘만 만들면 뚱뚱해도 매력이 있고, 땅꼬마라도 재미있고, 게이든 트랜스젠더든 상관없이 재미있다. 잘만들면 재미있고 못만들면 재미없다. 그런데 만들기도 전에 인종부터 따지고, 즐기기도 전에 성정체성부터 문제삼고, 보기도 전에 캐릭터의 외모부터 시비건다. PC가 문제인 것일까? 그같은 맹목적인 반PC주의의 선동이 더 큰 문제인 것일까? 선동이라 말하는 이유는 정작 그 PC라고 하는 실체부터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냥 뭐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다 PC다. 자기들이 싫으면 PC, 좋으면 반PC. 누가 더 미친 것인지 경쟁하려는 것인가.

 

그래서 뭐가 더 중요한가. 흑인인가? 백인인가? 히스페닉인가? 캐릭터는 뚱뚱한가? 날씬한가? 가슴이 큰가? 엉덩이가 빈약한가? 호모섹슈얼인가? 헤테로 섹슈얼인가? 남성인가? 여성인가? 정체성정치를 그리 욕하더니만 자기들이 그 짓거리 하고 있는 중이다. 검열이라는데 자기들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검열을 시도하고 있다. PC가 들어있는가 아닌가는 단지 부차적일 뿐 그 본질 자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건 둘 다 똑같다는 것이다. 더구나 타인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점에서 반PC는 그보다 더 고약하다 할 수 있다. 인종과 성정체성과 외모에 대한 차별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저지를 수 있는 아마도 역사상 최초의 집단이 아닐까. 아니다 기독교가 있었구나. 배경에 뭐가 있는가 짐작해 볼 수 있다. 결국은 차별금지법, 바로 기독교가 가장 혐오하는 그것이 목표일 것이다. 1990년대 영지주의 선동의 재현일까? 재미있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가운데 특히 급진파들은 거의가 지방 향리 출신들이었다. 향리가 뭐냐면 일단 귀족이 아니면서 지역에 일정한 토지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착유력집단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 아직 중앙집권이 확고히 갖춰지기 전 모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할 수 없었던 고려조정에서 이들을 포섭해서 행정을 보조케 했었는데 그래서 향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대충 유럽의 젠트리나 독일의 융커, 청말의 향신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 조선시대 관청에 속한 아전들을 향리라 부르게 된 이유도 역시 같다. 아무튼 대부분 자기 토지를 가지고 지역과 밀착해 있다 보니 중앙의 수취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더욱 고려말 권문세족들의 착취와 약탈로 피폐해져가던 향촌의 현실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었기에 더욱 수취라는 제도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세금을 적게 걷고 적게 쓰는 나라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나라다.

 

사실 근대 이전까지 국가와 국민은 분리되어 있었다. 아니 국민도 아니었다. 그래서 백성이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지배층들에 의한 조정이 따로 있었고, 그 조정에 의해 보호받고 통제받는 피지배자로서의 백성이 따로 있었다. 당연히 국민도 아닌 백성에게 국가란 필수가 아니었고, 국가 역시 백성과 동일시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세금이란 백성의 주머니에서 국가의 창고로 이동하는 말 그대로 갈취이고 약탈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어느 정도 복지제도도 갖춰지고, 공공부분에 대한 투자도 상당히 이루어진 지금도 나라가 내게 해주는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 당연하게 나오는데 그마저도 없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더욱 당연하게 그런 생각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나라란 세금을 걷게 거두고 요역도 적게 동원하는 나라를 뜻하는 것이었고, 세금이 많고 노역이 많으면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세금을 최소한으로 걷어서 쓸 수 있는 나라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나라이니 한 번 만들어보자.

 

물론 조선도 나라 규모에 비하면 관리의 수가 꽤 많은 편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건 중앙집권이 워낙 탄탄하게 갖춰진 탓에 지방의 말단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또 그들을 관리하기 위한 업무 역시 중앙의 조정에 추가되었던 탓이지 그를 전제로 놓고 본다면 절대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나마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운영한다고 겸직을 많이 두었었고, 그렇게 임명한 관리들에게 지급하는 녹봉 역시 겨우 체면치레나 하는 수준이었다. 아니 지방 관아의 아전들처럼 아예 녹봉을 받지 못하는 경우마저 허다할 정도였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조선은 재정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전세를 생산량의 1할이라는 역사상 유례가 드문 낮은 세율로 유지하며 망할 때까지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아끼고 또 아껴서 왕이 먹는 반찬 가짓수까지 때만 되며 줄여가며 아끼던 조선이 얼마나 백성을 위해 훌륭한 나라였었는가?

 

일단 관리가 부족하니 조선시대에 관리라면 지방관아의 말단 아전들조차도 일바 백성들에게는 그냥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관청이 밀집해 있어 관리의 수도 많은 한양은 좀 나았지만 그렇더라도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특권이 되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전체 관리의 수가 적으면 그만큼 관리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업무량 만큼이나 책임과 권한도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관리들에게 녹봉마저 거의 생활이나 가능한 수준으로 주어지고 있었다. 아니 관리로써 최소한의 체면유지를 위해서도 그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에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만 겨우 주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아예 그나마 녹봉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라면 생활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수단을 마련해야만 했었다. 광복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돈이 없어서 장교들의 월급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결과 알아서 병사들의 부식이며 피복, 연료등을 횡령해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된다. 당시 공무원들도 제대로 월급을 받지 못해서 알아서 뒷돈을 받아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관리들은 특권집단이 되고, 최소한의 급여는 부정부패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 청나라에서 강희제가 막대한 세수를 가지고 관리들에게 충분한 녹봉을 지급하자 부정부패가 사라지더라는 것은 바로 그런 교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괜히 여러 나라들에서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충분한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보상수단을 통해서 생계는 물론 노후까지 확실히 책임져 줌으로써 그 이상의 다른 욕심을 부릴 여지를 막고자 노력하는 것도 역시나 같은 이유에서인 것이다. 더 많은 공무원을 고용해서 업무를 분담시키는 것도 소수의 공무원이 업무를 독점할 경우 그 권한이 너무 비대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당장 안양시에 개인사업자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한 명 뿐이라 생각해 보라. 모든 업무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살피지 못할 정도까지 되면 그냥 그 공무원은 개인사업자들에게 왕이자 신이자 저승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잘릴 지도 모르고, 급여도 충분치 못하다? 그냥 바로 징계해고되고 징역 좀 살고 추징금 좀 내고도 다른 나라 가서 먹고 살 만큼 챙기는 게 자신은 물론 가족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식으로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최소한의 비용만으로 나라를 운영하다 보면 결국 포기해야 하는 부분들이 나타나고 만다.

 

조선조정이 이미 나선정벌 과정에서 수석식 소총을 입수했고 복제까지 했음에도 결국 도입을 포기한 이유는 다름아닌 재정의 부족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배를 만들고 무기를 채워 넣는 과정에서도 결국 재정의 부담과 백성들의 동요를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었다.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한양의 빈민들을 위해서 청계천을 정비하고 적지 않은 임금을 주어가며 백성들을 동원해서 화성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당시 일본과 청 사이를 잇는 중개무역을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은이 고갈되고 무역을 통한 이익이 줄어들기 시작한 19세기 이후로는 조선조정이 사실상 식물상태에 빠지고 만다. 백성들을 위해 최소한의 세금만으로 운영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조선이 그러나 정작 그 백성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국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이후 개항까지의 역사는 학생 입장에서 꽤나 반가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상 공부할 것이 거의 없다. 세도정치 말고 따로 알아야 할 내용이 없다. 아마 이 시기 왕들도 누가 있었는지 헷갈리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추진하는 정부효율화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과거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아주 없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많았었다.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도 최소한의 정부를 가장 이상적이라 여겼었다.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하고 자신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요구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영국이 보여준 잔인하고 가혹할 정도로 무책임했던 모습은 당시 영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한계에서 비롯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아일랜드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기에 당시 영국 정부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당장 영국 국내의 빈민들도 어쩌지 못하는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에서 굶어죽어가는 농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자체가 무리일 수 있는 것이다. 근대국가로서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능동적으로 책임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 최소한의 규모와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용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세금도 충분히 거둘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세금을 덜 걷기 위해서, 정확히는 납세자로서 그 세금을 조금이라도 덜 내기 위해서 국가의 기능을 덜어낸다. 그 후과는 누가 감당할 것인가.

 

우리나라에도 많다. 정부가 거두는 세금은 약탈이고 착취이며, 정부가 세금을 쓰는 것은 낭비다. 돈은 민간에서 써야 한다. 민간에서 개인이나 법인들이 돈을 써서 시장을 통해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것이 민영화의 가장 주된 논리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그런 주장을 하는 대부분이 자신들의 그같은 아이디어가 전혀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왜 자유주의라 하지 않고 신자유주의라 부르는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지금은 다르다. 조선시대와 지금 대한민국은 다르다. 과연 얼마나 다를까? 세금을 덜 걷고 덜 쓰는 나라와 세금을 더 걷는 대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는 나라 가운데 정작 국민들을 위해 필요한 나라는 어떤 것이었는가? 역사는 그것을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지만 그러나 배울 생각이 없으면 역시나 없는 것과 같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아마 작년이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회사에서 직원들의 출산과 육아를 지원하기 위해 휴가와 수당, 시설등을 정책적으로 확충하는 것에 대해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반발하는 여론이 꽤나 크게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자기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낳지 않을 것이지만 어째서 자기에게는 출산과 육아로 인한 혜택이 없는 것인가. 아이 낳았다고 그리고 기른다고 그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닌가. 자기만 차별을 받는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출산과 육아로 인한 개인의 부담을, 그를 지원하기 위한 공동체의 보조와 지원이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이기심을 그들 나름대로는 공정하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권리주장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미국이 자기들 세금을 들여가며 저개발국을 지원해야 하는 것인가. 미국이 달러도 찍어내서 유통하고 있는데 어째서 미국은 다른 나라들을 상대로 항상 무역적자를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미국인들이 더 싼값에 다른 나라 물건을 사서 마음놓고 소비하면서도 어째서 저 나라들은 더 싸게 물건을 생산해서 미국의 경쟁자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인가. 나아가 그껏 조류인플루엔자 방역하는데 굳이 세금을 써서 공무원을 많이 고용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항공안전을 관리하는데 굳이 세금을 들여가며 노동조건을 맞춰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을 필요가 있는가. 핵무기 관리는 그저 가능한 최소한의 인원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다 내 권리다. 아메리칸 퍼스트. 어쩐지 많이 비슷하지 않은가?

 

요즘 트럼프가 뭐만 했다 하면 미쳐 발광하는 특히 젊은 남성들을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너무나 흔하게 찾아보게 된다. 방역이나 항공안전, 핵무기관리 등에 종사하는 수많은 공무원들을 자르고, 나아가 유엔 등 미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불필요한 낭비라 여기며 모두 거부하는 행동들에 대해 사이다라며 열광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바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하긴 그러니까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것처럼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당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2030 젊은 남성 유권자들이었으니까. 실제 탄핵정국에서도 윤석열과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가 60대 다음으로 높기도 하다. 어째서일까? 그래서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때 그들이 하던 주장과 지금 모습들이.

 

유엔에 미국이 막대한 돈을 쓰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저개발국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이유가 그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한 인도적인 목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마저 모두 비용이라 생각한다. 그만한 비용을 썼으면 당연히 미국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단차원적으로 생각한다.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했으면 인류역사가 저꼬라지일 이유가 없다. 세계라고 하는, 미국이 패권을 누리며 주도하던 인류의 공동체를 배제한 채 개인의 욕망과 충동만을 전제로 그것을 논리로 만들려 하면 저런 현상이 벌어진다. 뭐 더 할 말도 없다. 하물며 나라도 다른 대한민국에서. 남의 나라인 미국의 대통령과 그 측근을. 이것도 반PC주의를 위한 것일까? 웃는다.

아무 생각없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가다가 아주 흥미로운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아마도 1990년대 거리 인터뷰인 것 같은데, 흑인과 백인들이 서로에 대해 존중하고 인정하는 아주 훈훈한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그리고 영상을 게시한 당사자나 거기에 댓글을 다는 사람들 다수는 이런 주장들을 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는 흑인과 백인 사이에 인종갈등이 없었고 오히려 최근에 들어서 민주당과 오바마가 부추기고 만들면서 생겨난 것이다."

 

아마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정도라면 뭔 개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조금 뜸해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것이 인종차별로 인한 사건사고였고, 그로 인한 흑인사회의 집단적인 반발과 행동들이었을 텐데 이제와서 저따위 소리를 하는 놈이 있고, 그것을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놈들이 있다고? 

 

지금도 당시 자기 동네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무장을 하고 옥상에서 경계를 서는 한국인 남성들의 모습으로 유명한 LA폭동이 일어난 해가 바로 1992년이었다. LA의 흑인들이 인종차별에 항의해서 집단으로 폭동을 일으킨 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1990년대 초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경찰에 의해 흑인이 부당하게 가혹행위를 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사건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고, 그리고 역시나 그것은 흑인사회의 반발과 소요로 이어지고는 했었다. 오죽하면 지금도 흑인들이 당하고 있는 일상에서의 다양한 차별들이 코미디의 소재로써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고 있을 정도겠는가. 피의자가 흑인인데도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이 정중한 태도를 보이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이미 차별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다른 이들에게까지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에는 인종차별도 인종갈등도 없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물론 흑인차별따위 없다고 주장하는 흑인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부시 행정부에서 꽤나 잘나갔던 곤돌리자 라이스 역시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흑인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학위도 받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흑인이라고 성공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흑인은 더이상 다른 흑인들처럼 차별받지 않고 오히려 백인들과 대등해지거나 오히려 그들보다 우위에 설 수도 있다. 그러니까 흑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백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던 흑인들이 오히려 같은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꽤나 크게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비유하자면 일제강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본인들과 대등해진 조선인이 다른 조선인을 차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보면 된다. 그런데 그런 경우를 예로 들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민족간의 갈등도 없었다고 하면 과연 진실이 되는가?

 

1990년대 한창 지역갈등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을 때 우리나라 방송에서도 영호남의 주민들이 서로 존중하고 화합하며 공존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조영남의 '화개장터'가 나름 히트한 것도 그런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다. 영남과 호남출신의 남녀가 부부가 되어 잘 사는 모습이 나오고, 영남과 호남의 경계에 사는 주민들이 이웃으로써 너나없이 화목하게 어울리는 모습이 방송에서 보이니까 그때는 지역감정이 없었다 단정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방송에서 서로가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감정의 골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1990년대에는 인종갈등이 없었다, 인종갈등은 민주당과 오바마가 만든 것이라 선동해버리면 그냥 어이가 없는 것이다. 아마 젊은 놈들이겠지. 반PC에 미쳐서 오히려 흑인이 우대받고 백인이 역차별받는다고 떠들어대는 노랑원숭이새끼들일 것이다. PC는 가짜다. 지구온난화가 가짜라는 트럼프와 잘 통하는 놈들이다. 그런 선동을 하는 놈들이나 거기에 넘어가는 놈들이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유튜브 영상 하나 이런 긴 글까지 쓰고 만다. PC도 상당히 맹목이라 꽤나 거슬릴 때가 있었는데 반PC는 그런 정도를 넘어서 아예 지성 자체를 부정 하는 느낌이다. 그냥 미쳤다. 반PC를 주장하는 미국 백인들이 아시아인을 끼워넣어 위하는 척 떠들어대니까 자기들이 명예백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일빠들인가? 일본애들 자랑이 자기들은 아시아인이 아니라 명예유럽인, 명예백인이라는 것이었는데.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 윤석열 이후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많다. 참 심각하다. 웃을 수도 없다.

1의 힘으로 1의 일을 하는 것을 효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1의 힘으로 최소 1.1, 아니 다들 1.1을 한다면 1.2, 1.3, 나아가 2까지는 할 수 있어야 그를 효율이라 말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써서 평범하게 한 사람 만큼 일하는 것을 그 이상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율이고 능률인 것이다.

 

사람이 음식물을 섭취해서 그를 에너지로 바꿔 쓰는 비율이 대략 40%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60%는 소화와 대사과정에서 낭비되는 셈이다. 그게 평균이다. 즉 원래 대부분 사람은 그 정도로 음식물을 에너지로 쓰는데 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평균을 벗어나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실제 일론 머스크는 제프 베조스와 함께 직원들의 복지나 워라밸과 같은 개념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들로 흔히 알려져 있기도 하다. 남들처럼 정해진 시간만 일하고 일찍 퇴근해서는 주어진 일을 모두 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최소한의 인력만을 고용해서 주어진 일을 해내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 효율일 수 있는 것이다. 뭐냐면 노동자는 단지 기업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끊임없이 논의하고 투쟁하며 도출해 온 결론인 노동자는 기업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노동이라는 수단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주체라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이며 그 과정에서 기업도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신의 수단인 노동을 보다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도록 절충점을 찾아 온 것이 지금까지 노동권이 인정받고 보호받아 온 역사인 셈이다. 그런데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부정한다. 사실 이는 어쩌면 그동안 미국의 양대 엘리트주의 정당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해 온 역사의 연장에 있다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쉬운 해고를 통해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져 온 결과 정작 다수 미국 노동자들은 갈수록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악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중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노동자들이 결국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라고 하는 현실일 것이다.

 

물론 어찌되었거나 법이 그렇고 제도가 그렇다면 사기업은 얼마든지 그래도 될 것이다. 정해진 규범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일 테니. 문제는 그것을 정부로까지 확장하는 경우다.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효율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는 당장 필요없으면 해고했다가 필요하면 다시 고용해 쓸 수 있다. 당장 필요없는 인력을 필요한 부서로 이동시켰다가 필요할 때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 놓을 수 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겨도 해당 인원만 정리하고 얼마간의 손해만 감수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아니다. 국가는 한 순간의 지연과 공백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피해가 공동체 전체에게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세월호를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올 것이다. 이태원 참사 역시 국가의 행정력에 잠깐의 공백이 발생했을 때 어떤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아니 기업도 사실 예외가 아니기는 하다. 그런 식으로 효율을 추구하면서 돈만 잡아먹는 자체 공장들과 인건비도 비싸게 드는 장기근속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한 결과가 잇따른 보잉사 항공기들의 사고와 한때 몇 수 아래로 보았던 경쟁자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인텔의 현재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니. 자기가 이해 못하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연구개발에 소홀한 결과가 그동안 삼성이 추구해왔던 초격차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오히려 다른 경쟁자들에게 기술에서 밀리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래봐야 결국 사기업의 문제라는 것이다. 경영진과 주주와 노동자만 피해보고 마는 것이다. 당장 대단치 않은 연구들이라고 지원을 중단할 경우 그 연구에 종사하던 학위를 가진 연구원들 다수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고, 이후 설사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가 있어서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려 할 때 그들은 이미 현업에서 이탈한 상태일 수 있는 것이다. 당장 해외의 국가들에 지원하는 재정이 아까울 수 있어도 그렇게 지원하는 재원들은 이후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이익을 정의로 바꾸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항공안전을 책임지는 인력이 과로로 인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다면 그 피해는 누가 입게 될 것인가. 

 

국가란 그만큼 방대한 구조이기에 수 억에 달하는 인구와 그에 따른 수많은 가능성과 변수들을 모두 통제하려면 그만큼 방대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가운데는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어 방치되고 있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구조와 요소들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인체의 효율성과도 매우 일맥상통한다. 실제 사람의 근육 가운데 일상에서 주로 쓰이는 것은 대개 일부 뿐이다. 자기 몸의 근육을 모두 다 쓰면서 생활하는 사람은 오히려 거의 드물다. 하지만 어떤 근육도 결국은 언젠가 어떤 상황에서는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당장의 필요만으로 판단할 경우 그같은 만일의 상황에 대한 대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당장 일론 머스크 자신만 하더라도 트위터를 인수하고 바로 해고부터 했다가 정상적으로 기능이 돌아가지 않자 해고한 직원 가운데 일부를 다시 채용한 전력이 있었다. 기업이야 그냥 손해만 보면 그만인데 국가단위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서 더 고약한 이유가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공무원들 100명 쓸 것을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50명만 쓰면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능력있는 50명만 쓸 것도 20명만 쓰고 일하는 시간을 늘려서 더 악착같이 쥐어짜면 더 적은 비용으로 일하게 할 수 있다. 나머지는 도태시킨다. 수 억의 인구를 책임져야 할 공무원들에 대해 평범한 개인이 아닌 특출난 소수를 전제로 조직을 구성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평범함에 대한 혐오다. 특별하지 않은 개인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다. 자기라면 그럴 수 있다. 능력없는 다른 사람이면 못할 일을 자기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평범한 다수의 보편적인 개인이 아닌 자신이 생각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소수만을 전제로 구상하여 그에 미치지 않는 이들은 도태시킨다. 무엇을 위해서? 그러니까 기업은 돈을 벌려고 그런다 친다면 국가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모든 나라들에 관세를 물린다면 소득세같은 건 내지 않아도 된다는 트럼프의 말에 답이 있을 것이다. 결국은 자기가 내는 세금을 줄이겠다. 국가와 국민조차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면 어째서 젊은 세대들은 이와 같은 일론 머스크의 무도함에 열광하고 있는 것인가. 당장 조류 인플루엔자로 계란값이 폭등하는 상황에 방역을 책임지는 공무원의 수를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줄이려 하는 그같은 행동들에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는 것일까? 자기들은 특별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2030 남성들이 주 69시간을 지지한 이유일 것이다. 주 120시간을 주장했음에도 오히려 지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성들이나 나이 많은 4050이면 주 120시간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지만 자기들은 가능할 것이므로 자기들이 우위에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무능력한 이들을 모두 잘라내야 자기들에게도 기회가 돌아온다. 무능력한 자는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들만의 공정함에 충실한 행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마 조금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 또한 결국 평범한 보편적인 다수의 노동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생산직은 어쩔 수 없이 반복된 작업으로 인해 신체의 부위에 가해지는 부하가 누적되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있을 때가 많다. 더구나 고도로 분업화된 현재의 제조업에서 생산직 노동자 다수는 그로 인한 신체적인 질병을 항상 달고 살거나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런 노동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 바로 병가라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일이 힘든 만큼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자신을 위해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한 상태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바로 병가라는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병가도 쓰지 말라. 물류노동자들이 일하는데 에어컨도 안 틀어준다는 베조스와 더불어 내가 일론 머스크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병가를 너무 많이 쓴다. 그렇다면 생산현장의 노동강도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것이 원래 정상이지 않겠는가. 결국은 반동이다. 역사를 다시 19세기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소수의 부르주아가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수단으로 삼고 지배하던 시절로.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거기에 열광하는 놈들도 마찬가지.

 

국가단위가 되면 구조는 더욱 방대해지고 비례해서 더욱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데 그를 사기업 수준으로 단순화시켜 사고하려 한다. 소수의 특출난 이들을 중심으로 사기업이 그런 것처럼 몇 가지 단순한 목적과 동기만을 가지고 국가라고 하는 구조를 움직이려 한다. 하필 그런 일론 머스크가 옆에 있으면서 트럼프의 폭주는 집권 1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동안 굳이 효율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아니 그래서는 안되었던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그 복잡성을 무시한 채 효율만을 앞세운 결과 오히려 미국은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잃는 한 편, 정작 미국 국내에서까지 국가의 기능에 결손이 발생할 우려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들을 합리적이라며 찬양하는 자칭 중도들을 보면서 그것이 남의 일만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된다. 벌써 꽤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청년세대들로 갈수록 더 극단화 우경화되는 경향을 확인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참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민주당을 진보라 부르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일단 첫째는 진보란 곧 좌파이며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이니 민주당을 빨갱이로 몰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에 있는 새끼들이 상상을 뛰어넘는 개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에 썼었던 이념보수와 현상보수 가운데 그나마 합리적인 전자에 대해 후자가 좌파 빨갱이라 욕하는 것과 같다. 비슷한 예로 꽤나 이름있는 유튜버 가운데 하나가 오바마같은 극단적인 인사들을 싫어하는데 트럼프는 합리적이라 말하며 자신은 중립이라 말한 것과 비슷한 결이라 할 수 있다. 오바마가 좌파면 유럽 진보정당들은 인간계를 벗어난 존재들인 것일까?

 

한국 진보의 계보는 조봉암이 이승만에 의해 사법살인당한 순간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조봉암이 당시 민주당으로부터 갈라져나와 진보당을 만든 것부터 그놈들이 원래 지주출신들로 오히려 자유당보다 더한 한국사회의 기득권들인 이유가 가장 컸었다. 그래서 이승만이 대놓고 조봉암을 죽이려 할 때도 당시 민주당 인사들은 그를 말리려 하기보다 오히려 적극 동조하고 있었고, 조봉암이 죽고 그를 따라서 모였던 진보당 인사들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간 뒤에는 결국 그들 역시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후로도 장면이나 윤보선, 유진산 같은 이들이 이끌던, 그리고 이후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되었던 민주당이 진보로 불리게 되었는가? 말한 그대로다. 민주당을 빨갱이로 몰려는 목적이 하나, 자유당 이후 공화당과 민정당에 이은 민자당까지 하나같이 독재권력을 위해 봉사하던 하수인들이었다는 이유가 또 하나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이유로 덧씌워진 이미지라는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니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된 이후에도 주위의 어른들을 보면 그를 두고 공산주의자 빨갱이라 부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전두환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조차 김영삼은 그래도 인정하는데 김대중에 이르러서는 좌파에 간첩이라고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유는 독재정권을 긍정하는 이들에게 있어 김대중이란 자칫 박정희의 집권을 막아냈을지 모를 위협적인 인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지주와 토호들로 이루어진 당시 민주당의 정체성에서 한참 벗어난 근본없는 출신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신분도 낮고 없이 살면 당연하게 공산주의를 추종하게 된다. 막연한 믿은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은 독재정권은 물론 제도권 야당에서도 김대중을 공격하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 그래서 과연 김대중은 공산주의자거나 사회주의자였었는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펼친 정책들을 보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김대중이 기득권 권위주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왔었기에 좌파고 빨갱이다. 

 

더구나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더불어 권위주의 정권이 부정하는 민주주의와 천부인권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도 함께 싸워야 함을 의미했었다.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무시당하고 부정당하던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야 했고 그런 행동들까지 빨갱이로 몰리는 또 하나 이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을 위해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는 자체가 곧 공산주의고 사회주의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을 위해 그들의 권리를 함께 주장하며 싸우고자 하는 모든 행동이 좌파고 빨갱이인 것이었다. 즉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와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리들을 대놓고 부정하는 놈들이 기득권으로서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근대사회라면 당연히 지켜져야 할 그것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진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천부인권과 시민으로서의 권리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민주당이 극단적인 집단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 이유가 되고 있을 것이다.

 

가난한 놈들은 가난한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한다. 노동자와 농민은, 어촌과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은 역시 자기들의 주제에 맞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 감히 서울에서도 잘사는 강남의 주민들과 동등하게 대학에 들어가려 해서도 안되고 취업의 기회를 누리려 해서도 안된다. 더 값싼 전기를 위해서 원자력발전소는 당연히 지방에 지어져야 하는 것이고, 서울을 향해 송전로를 까는데 감히 저항하는 놈들이 있어서도 안된다. 더 오랜 시간 더 가혹하게 일하도록 해서 도태되는 놈들도 당연히 내버리고 가는 것이 옳다. 더 적은 최저임금으로도 더 오랜 시간을 일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그것이 공정이다. 의외로 지금 젊은 세대들이 당연하게 여러 커뮤니티들에서 떠드는 소리들이다. 그깟 일을 하면서 돈을 더 받으려 해서도 안되고, 더 나은 처우를 기대해서도 안되며, 감히 고용을 보장받으려 해서도 안된다. 인터넷에서 흔히 보게 되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공정과 상식을 추구하는 이들의 주장들일 터다. 이런 주장들이 중립이 되고 상식이 되는 사회에서는 따라서 당연하게 민주당은 좌파가, 그것도 급진적인 진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흔히 민주당을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는 주장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들 기준에서 민주당은 꽤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그러한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주장들은 과연 옳은가.

 

19세기 통일독일제국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가 적극적으로 사회보장정책들을 도입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나라로 존재했다가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된 독일과 독일국민들을 빠르게 단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까지도 빠르게 독일이라는 이름 아래 뭉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이라는 나라를 직접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가난한 이들도, 소외된 이들도,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들 역시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면 자신들을 이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좌파여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거나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단합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배려는 필수적일 수 있다. 괜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백성들을 위해서 혜민서를 만들고 환곡을 내놓은 것이 아니란 뜻이다. 국민이란 국가란 이름 아래에서 모두가 동등해져야 한다. 대등해지고 평등해져야 한다. 그리고 진보는 여기서 국가라고 하는 권위마저도 지운 채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권리로써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 김대중이 당선되고 민주당이 집권한 이후 펼친 정책들을 보더라도 그런 것이 아주 대놓고 두드러지고 있었다. 사실상 당시 서방세계에서 유행하던 신자유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들마저 그러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기에 좌파고 빨갱이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민주당이 좌파에 빨갱이로 매도당하다 보니 한국 정치지형에서 보수와의 사이를 가리키는 중도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되고 말았다. 말한 그대로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누려야만 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평등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천부인권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논리들마저 어쩌다보니 중립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사회가 보수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끌려가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민주당이 근대국가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에 대해 주장하고 행동으로 추진할 때마다 민주당을 급진적인 진보라 여기는 인식으로 인해 중립은 더욱 오른쪽으로 더 치우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 사회는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 젊은 세대들에서 이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과거의 권위주의를 답습하려는 듯한 주장들이 중립의 이름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도를 끝내야겠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이 내란을 획책하고 보수를 참칭하던 세력들이 그를 옹호하고 있는 현재는 민주당에게 좋은 기회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정치적인 필요와 목적에 의해 덧씌워진 진보라는, 정확히 좌파에 빨갱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민주당으로부터 걷어내자. 민주당의 원래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서 바로 자리를 잡았을 때 현재의 왜곡된 정치지형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중도를 지향했을 때 과거 보수정당은 더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고, 아니 정확히 원래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고 왼쪽으로도 더욱 넓게 진보가 들어설 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이재명이 이제와서 굳이 민주당이 중도보수라고 새롭게 천명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발언일 터다. 김대중 때부터 이미 민주당은 언제나 보수일변도였고, 그들이 내세운 모든 법안이나 정책들이 그러한 보수의 가치에 입각한 것들이었으니까. 단지 당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과 국민의힘들이 보수를 참칭했기에 떠밀리듯 진보가 되었을 뿐.

 

그래서 더 웃긴다는 것이 민주당이 중도보수라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했다고 반발하는 놈들 가운데 정작 실제 법안이나 정책으로 진보적인 무언가를 실천하거나 추구한 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인영? 박지현?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지금 민주당에서 당원들에 의해 떠밀려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원리 보수정당과 더 가까웠던, 오히려 민주당 안에서도 보수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여성주의자라고 모두 진보가 아닌 것이다. 여성주의 가운데도 권위주의적인 여성주의는 오히려 보수에 더 가깝다. 대우를 받아야 하는 자격이 있는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주의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부인을 우대하고 존중하는 문화는 이미 중세에서부터 있어 왔었다. 다만 그것이 보편적인 자연인으로서의 여성이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여성주의는 여성인 노동자와 약자, 소수자들을 존중하는 여성주의인가. 지들이 언제부터 진보였다고 진보운운인가?

 

오히려 지금 중도보수를 자처하는 민주당이야 말로 김대중 이래로 가장 진보에 가까워진 민주당일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일 때도 정작 열린우리당은 노무현보다 더 오른쪽에서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의 개혁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낙연의 민주당 역시 문재인보다 더 오른 쪽에서 문재인 정부를 국민의힘 쪽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김한길의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새누리당의 2중대나 다름없었으니. 그래서 이재명이 더 모두의 증오와 경멸과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그렇다고 이재명마저 진보라고 하기에는 원래 기본소득이란 복지에 나라가 돈과 인력을 쓰기 싫으니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보수의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재명이 가장 자랑하는 정책 중 하나인 지역화폐 또한 철저히 자본주의의 가치에 충실한 케인즈주의적인 정책이었을 터다. 그래서 과연 이재명의 정책 가운데 진짜 진보라 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 것인가.

 

트럼프를 합리적인 중도라 말하며 오바마를 급진좌파라 주장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당연하게 지금 민주당도 진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미국 민주당조차 스스로를 진보라 말하기보다 자유주의 정당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리버럴은 진보가 아니다. 리버럴은 말 그대로 자유주의다. 19세기 막 귀족중심의 봉건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부르주아의 이념에서 이어진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PC도 사실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진보가 된다면 보수란 과연 어떠한 가치일 것인가? 한국 2030 젊은 남성들이 주장하는 중립과 합리가 그 답이 되어 줄 것이다. 그래서 이재명의 선언은 필요했던 것이었다.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가? 이제야 겨우 출발점에 섰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진정 추구하고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란 무엇인가? 실제 보수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참 어려운 과정이었다.

진보도 마찬가지겠지만 보수라고 하는 것은 크게 이념보수와 현상보수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념보수란 말 그대로 보수라고 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시장주의라거나 자유주의라거나 국가주의라거나 혹은 민족주의와 같은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바를 궁리하고 탐구해서 오롯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현상보수라는 것은 자신이 실제 경험하고 체험한 현실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부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자가 정작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어린 것들이 감히!'라고 한다면 바로 그가 현상보수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념적으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그에 따른 공동체의 단합을 부르짖으면서도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인종이나 성별, 연령과 상관없이 어떤 파격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현상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현실에서 가장 존경받는 부류일 것이다. 항상 공동체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스스로 권위와 위엄을 보이면서도 정작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는 격의없고 관대하다. 그에 반해 전자를 흔히 위선자라거나 혹은 진보꼰대라 부르며 비웃기도 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공동체를 위한 가치와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신념 정도일 텐데, 문제는 이것이 항상 그렇게 딱 나뉘어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모순이기도 하다. 내가 좋으면 모두에게 좋은 것이고 나에게 옳으면 모두에게 옳은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좋으면 개인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고 공동체를 위해서 옳다면 개인에게도 옳은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바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PC주의일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물론 다양성과 관용과 이해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동양식마저 그에 맞춰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반대는 무엇인가? 지금 세계가 트럼프를 위험하다 여기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바로 나치즘이다.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논리는 다른 것 없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로 인해 안정되어 있던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금 이전의 안정된 사회로 돌아가자. 그동안 아무일없이 다들 잘 살고 있었는데 저놈들로 인해 온통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사는 것도 힘들어졌으니 저런 놈들 모두 몰아내고 우리들끼리 이전처럼 잘 살아보자. 그래서 히틀러부터 시작해서 파시스트들은 언제나 가장 영광스러웠던 어느 시점을 이상화하여 그를 미래에 추구해야 할 가치처럼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화된 과거는 또한 지금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이어져 있기에 당연히 대중을 설득하기에 좋았다. 예전에는 좋았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인가?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열강 독일제국이 어째서 지금은 패전국이 되어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에 시달리며 승전국들의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인가? 

 

한국 보수지지자 가운데 다수가 실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의 보수정당이란 과거의 고도성장기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또한 지금의 암울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더 나았던 시절의 이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보수정당이 얼마나 더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더 잘하고 못하고도 중요하지 않다. 현실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현재가 중요한 것처럼 그 이상적인 시절을 현재로 옮겨온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의 정의이고 가치이고 신념이고 윤리다. 그리고 그것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로 확장한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제도와 체제마저 그에 맞춰야 한다.

 

한국 보수주의자 가운데 상당히 극단에 치우쳤다 여겨지는 조갑제나 정규재 등의 지식인들이 현재 가수를 이루고 있는 보수지지자들과 전혀 결이 다른 발언을 들려주고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보수로써 당연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시장주의를 추구한다면 마땅히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용인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헌법적인 계엄에 이은 민주주의의 유린과 현정질서의 파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려잡아야 하고 사회주의자들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 그 자체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인정해서 안된다. 그것이 보수주의라는 이념이다. 반면 다수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정당과 그 정당의 대통령이 그러겠다고 하니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지지자들이 당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을 따라다닌다. 정규재의 평가는 옳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의 보수라는 것은 이념이 아닌 어떤 현실의 현상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더 가깝다.

 

사실 이 글은 원래 조던 피터슨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이론과 논리들에 대해 비판해 볼 의도로 구상한 것이었다. 어째서 전혀 보수주의자같지 않은 그가 실제로는 보수주의자인 것인가. 보수주의적인, 더구나 극우라고 할 만한 어떤 이념이나 주장도 직접 추구하고 있지 않음에도 결과적으로 극우적인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전형적으로 자신이 믿는 현상에 근거와 논리를 끼워맞추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금껏 살아왔던, 그래서 진정으로 믿고 있는 현실의 특정 현상에 대해 그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모든 논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가 근거들을 짜깁기해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논리의 퀼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럴싸한데 정작 전체를 보면 뭔가 허전하다. 뿌리가 없다. 그래서 나오는 논리가 원래 그랬다. 그 지지자들이 하는 말도 원래 그랬었다. 그래서 현상보수다. 이념적으로 치밀하게 궁리하고 탐구해서 추구하는 이념이 아닌 그냥 현상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트럼프라고 하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정작 트럼프가 지금 하는 일들은 과거의 가장 영광되었던 미국과 한참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근거가 부실하니 실제 행동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결국 젊은 다수 남성들이 입으로는 국민의힘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행동은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잘못해서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 때문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절대 아니다. 그들 자신도 국민의힘이 더 잘못하는 것을 안다. 더 못하는 것도 알고 더 나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위선보다 악이 낫다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위선적이지만 국민의힘은 솔직하게 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국민의힘을 지지하기 위한 논리로써 양비론을 펼친다. 방향과 정도를 무시한 채 둘 다 잘못했으니 똑같다 말하고 결국 페미니즘을 이유로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트럼프가 뭘 잘못하는, 국민의힘이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르든 결국 문재인과 민주당도 똑같다. 똑같이 않더라도 그마저 위선에 의해 나온 것들이다. 민주당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민주당이 아닌 다른 정당을 지지할 이유를 만들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더 한심한 것이기도 하다. 지지하면 그냥 지지하는 것이지 왜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핑계를 대는 것인가.

 

누구 때문에 누구를 지지한다. 누가 잘못해서 누구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누가 더 잘했다면 누구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 거짓말이다. 지지할 만해서 지지하는 것이고, 지지하고 싶어서 지지하는 것이며, 지지해야 해서 지지할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이면 상관없는데 자신들도 이미 아는 것이다. 자신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그들이 더 낫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누가 더 잘한다기보다 그저 어느 일방의 잘못만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심지어 매우 디테일하기까지 하다.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기억에 담고 기회가 될 때마다 끄집어내어 확인한다. 얼핏 민주당을 지지할 것처럼 보이는 말들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실제 진실은 그들의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의 현실과도 이어진다. 이념을 위한 보수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조갑제랑 정규재는 진짜 내가 극혐하던 인사들이었는데... 그럼에도 확실히 이런 상황이 되니 어째서 그들이 지식인인가를 알게 된다. 바로 이런 게 보수다.

파시즘의 대두 이후 민주주의 사회에는 한 가지 대전제가 화두처럼 던져졌었다. 불관용에 관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다양성이란 당연히 관용이다. 대화와 타협, 화합과 공존이란 결국 서로에 대한 관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고 화합하면서 공존을 꾀하려는데 누군가 일방적으로 자기의 입장만을 강요하며 다른 주장들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행위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했을 때 과연 그 사회는 다양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 나치가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하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었던 이유다.

 

흑인은 아예 공공장소에 나서서도 공직을 맡아서도 안된다는 인종주의자들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한다면 자칫 그들이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다양성 가운데 흑인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을 그대로 현실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공정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정당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불리한 위치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좋은 대학 나와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이들만이 모든 권리를 독점하고 행사해야 한다는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사회의 다양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여성과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 빈민, 혹은 제도권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현실로 구현하고자 하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의지주의자, 종교주의자들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저놈들은 인정 못하겠으니까 얘는 빼고 얘도 빼고 쟤도 빼놓고 그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받아들였을 때 과연 그 사회의 다양성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민주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그래서 민주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독립적인 인격에 대한 절대적인 존엄과 그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그게 인권이다. 상황에 따라서 주었다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존엄하여 지켜져야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설사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내려진 결론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맞지 않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승복하고 복종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나와 다를지라도, 어쩌면 내가 틀리다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다수가 그리 판단했다면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따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제도를 지탱하는 구성요소중 하나인 정치결사로서의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정당을 구성하는 모든 당원들은 같은 정치적 이해와 지향을 공유하는 동지로써 동등한 자격을 가지며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를 존중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정당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당원들이 전당대회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그를 통해 결론이 내려졌을 때 그를 복종할 수 있어야 당내 민주주의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러한 당원들의 주장과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 한다면 그 정당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민주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대중의 새천년국민회의나, 그 이전에 존재했었던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의 민주당 역시 국민 다수의 의사와 상관없이 마치 로마의 원로원이나 초기 영국의 의회처럼 소수 기득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그래서 바꿔보자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더니 여기서도 정동영이 공천권을 행사해서 지지자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당화하여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었다. 다시 열린우리당을 깨고 민주당으로 합당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표를 주는 지지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혹은 당직을 맡고 있는 소수가 오로지 당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당시의 모습을 보았을 때 과연 그것을 민주주의 정당의 그것이라 말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실제 박근혜가 친박 위주로 보수정당을 재편하고 문재인이 민주당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 오히려 정당민주주의가 더 잘 지켜지고 있었던 정당은 다름아닌 보수정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이전의 민주당에 대해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그 소수가 저마다 계파를 만들어서 당원이나 지지자들과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나눠서 해 먹었었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일단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당직을 맡고, 인맥으로 그 안에 포함된 소수가 자기들끼리 편을 나누어 해먹는 것을 다양성이라 민주주의라 말한다.

 

지금 김경수나 김동연, 김부겸, 임종석 등이 말하는 다양성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대통령후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복하여 선거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정당과 내통하면서 지지하기까지 했던 놈들을 다시 받아들이자. 당원이나 지지자와는 상관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당은 운영하면서 오히려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고 모욕하던 놈들을 다시 불러들이자. 그래서 하는 말이 기존의 당원과 지지자들을 극단적인 소수로 몰아붙이는 표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전가의 보도인 외연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당원과 지지자들만으로는 안된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다양성의 대상들은 그동안 당원과 지지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당 바깥에 존재하는 중도층과 보수층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이들이었다. 이 어디에 대등한 동지로써의 당원과 지지자에 대한 존중이 있을 것인가. 동지로써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는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당의 다양성을 위해, 무엇보다 정당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말하자면 엘리트정치의 복원이다. 이전 원로원 민주당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원이나 지지자들과 상관없이, 수 백만에 이르는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원래 하던대로 이름있고 세력있는 이들끼리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타협하는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들이 거부하는 이재명이란 존재부터 배제하자. 당장 당원들이 선택한 대표이자 유력한 대선후보인 이재명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폄훼하고 배제를 주장하면서 다양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체가 그들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원이 선택한 당대표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은 인정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표를 부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기들도 인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아마 자기들이 지금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알면서도 다른 이유들로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내가 김경수나 기타 나부랭이들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유다. 아마 다른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정작 정당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 왔던, 정당을 이루는 다양성으로 전혀 그 동등한 주체로써 인정받지 못했었던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던 입장에서 어떤 당원도 지지자도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언론만 난리다. 마치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유승민을 보던 민주진영의 입장과 닮았을 것이다. 유승민이면 그나마 보수진영에서 괜찮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괜찮을 뿐 지지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고무되었다. 이만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준다. 그래서 정작 민주당을 위한다면서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는 외면한 채 그들만 바라본다. 물론 그 이상의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심상정의 정의당이 대선 끝나고 12억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민주당이란 당원과 지지자들의 정당인가, 아니면 자신들만을 위한 정당인가. 링컨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냥 똥버러지 새끼들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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