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왕조라 말할 때 전제란 곧 특정한 개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여론이나 법률과 상관없이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한 마디로 세습된 군주가 오로지 자신의 권위만으로 신하들이 뭐라 하든, 법조문에 뭐라 적혀있든, 관습이나 전통과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도를 일컬어 전제왕정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의 경우에도 경국대전이라는 법전이 있었고 조정에서 대신들이 회의를 통해 의사결정도 하고 있었지만 왕이 그러고자 마음먹으면 현실적으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일개 현감을 몇 단계나 건너뛰어 바로 한 방면의 수군을 지휘하는 절도사로 임명하는 것이라 대신들의 반대가 극심했었지만 결국 선조가 그러자고 밀어붙이니 실제 그렇게 이루어지고 말았었다. 그게 왕정이다.

 

물론 왕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에서도 명목상 인민회의에서 선출된 주석이 공식적으로 국가의 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과거 소련에서는 서기장이라 불렸었고 지금도 푸틴은 공식적으로는 선거에 의해 러시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다.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 역시 총통이라 불리웠었다. 하긴 우리에게도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긴 하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와 전두환까지 헌법이란 것은 권력자가 필요로 하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는 그냥 명분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니. 권력자의 의지가 중요하지 헌법의 조문따위 무가치하고 무력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 반대편에 모든 세속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상위의 규범으로서 헌법을 전제하여 그 범위 안에서 모든 권력이 쓰이도록 강제하는 제도를 입헌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같은 왕조라도 국왕조차 최상위 법전인 헌법의 조문을 넘어서서 권력을 사용하지 못할 때 그것을 입헌왕조라고 하여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상위 법전인 헌법은 특정한 개인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닌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의 함의에 의해 결정된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바로 그같은 입헌주의 위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그 헌법의 조문에 따라 사실을 판단하여 판결하는 헌법재판소는 입헌주의 체제 아래에서, 즉 헌정이라고 하는 정체성 아래에서 최고권위를 가지는 의결이라는 것이다. 헌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렇게 판단해야 한다. 괜히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여러 다양한 경로로 임명하도록 헌법에 규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헌법을 사유화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다양한 구성원들이 헌법에 대해 판단하는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그렇게 강제해 놓은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재판소에는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이념들 가운데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울러야 하는 것이고, 삼권분립 아래에서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룬다는 취지에 맞게 행정부와 입법부와 사법부가 자신의 몫을 가지고 구성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헌법재판관의 이념이나 성향을 따져묻는 자체가 헌법재판관의 임명과 관련한 헌법의 정신을 심각하게 오독하는, 아니 부정하고 폄훼하는 반헌법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렇다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에 있어 대통령의 권위는 바로 이 헌법에 우선하는가?

 

실제 대통령도 아니다. 대통령이 탄핵되어 잠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대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혹시라도 누군가 헌법을 어기고 헌법을 넘어서서 행동하는 경우를 경계하기 위해서 헌법에 규정해 놓은 헌법에 대해 판단하는 주체로써 정의되어 있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겠다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그가 대행하고 있는 대통령부터가 헌법을 무시하고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구속되어 기소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 탄핵여부에 대한 판단에 있어 그 정부가 속한 여당은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아예 무시한 채 짓밟으려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대한민국은 헌정국가인가. 입헌주의 국가인가. 대한민국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인가. 대통령이란, 그 대행이란 단지 선출된 전제군주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심지어 그런 놈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최소 3학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민주화강점기 상태라고. 원래 민주주의를 바라지 않았던 놈들이 잠시 민주화의 강점을 벗어나기 위해 한창 독립운동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하자면 지금 윤석열을 지지하고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최상목을 지지하는 놈들은 단지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정복당한 전제주의 대한민국의 피정복백성들인 것이다. 특히 반PC를 주장하는 2찍들의 논리대로라면 마땅히 차별하고 억압해서 다수를 따르도록 강제해야 할 대상들인 셈이다. 그놈들에게 과연 대한민국이란, 민주주의란, 헌법이란 어떤 의미인가. 하긴 의사당을 점거하고 폭동까지 일으킨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을 우상화하는 놈들이 또 그런 놈들일 테니. 그런 놈들이 자유를 주장할 수 있다는 현실의 모순이 우스울 뿐.

 

괜히 윤석열의 내란시도 이후 6공화국체제가 종말을 맞았다 떠드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헌법을 부정하고, 헌법을 무시하고, 헌법에 반하여 행동함에도 스스로 너무 당당하고 그런 행동들을 지지하는 국민들도 너무 많다. 지식인이라는 것들까지 그러고 있다. 진보를 자처하던 놈들까지도 거기에 한 몫 끼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정과 민주주의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었는가. 새삼 확인한다. 대한민국 안에는 두 개의 정체가 존재한다. 그래서 더 강하게 억압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입헌주의 국가이며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반역은 원래 구족을 멸하게 되어 있다. 번국이 3족이다. 거름으로도 못쓸 쓰레기들이다.

원래 조선사회에서 과거란 양인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실력만 되면 합격도 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었다. 그래서 조선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과거에 합격해서 입신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단, 여기서 농사짓다가라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 땅도 가지고 있고, 그 땅을 경작한 노비며 소작인도 상당히 거느리고 있어서, 굳이 자기가 직접 뼈빠지게 농사지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향리나 호족들을 겸손하게 일컫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진짜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공부도 해서 과거에 급제한 예는 내가 아는 바로 없다.

 

당연하게 조선시대에는 책이 무척 비쌌다. 제대로 한 번 배워보려 선생님이라도 부르려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서 유학이라도 가려 하면 그동안 들어가는 돈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공부하려 하면 그동안 집안일은 아예 손을 놓아야만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생각보다 그리 낮지만은 않았던 것이었다. 남편이 과거공부한다고 책만 들이파는 사이 집안일을 대부분 책임지는 것은 아내인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주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런 모든 것들을 가진 것도 없는 농민들이 얼마나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심지어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 양반이 넘쳐나게 된 만큼 경쟁도 치열해져서 더이상 한 가정단위의 지원만으로는 급제를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어지간한 양반집안이라도 한 집안만으로는 그 비용이 감당이 안 되어서 아예 문중 전체가 나서서 될만한 이들을 밀어야 하는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비용이 감당이 안될 것 같으면, 어차피 대과에 합격해도 관직에 나갈 기대가 없을 경우 그냥 과거에 합격했다는 명예 하나만 챙기고 포기하는 경우도 조선후기에는 일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 초시니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조선후기에 이르면 원래 양인이면 다 볼 수 있는 시험이던 과거가 양반 가운데서도 선택된 일부만을 위한 제도로 변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기 과거에 급제해서 관적에 나갈 것까지 염두에 두고 공부하고 과거도 볼 수 있었던 소수의 양반들을 벌열이라 불렀다. 어차피 과거에 급제해도 관직을 얻을 수도 없고, 아예 과거 자체를 포기한 지방의 양반들은 달리 향반이나 잔반이라 불렀었다.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사는 주위 어딘가에는 실제 있는 사실들일 터다. 그나마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방 하나에 모든 가족이 모여 사는 집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공부방조차 없이 식구들과 부대끼며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이 학원까지 다니며 공부하는 아이들보다 더 공부를 잘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참고서 한 권 사려 해도 눈치가 보이고, 학원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해도 옆에서 봐주고 챙겨줄 사람조차 없다면 그래도 오로지 자기 실력만으로 더 잘살고 더 좋은 조건에서 공부하는 아이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사는 곳이 농촌이라서, 저기 멀리 외딴 섬이라서 더욱 그러고 싶어도 학원조차 갈 수 없는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인종적으로 그리 다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지 않는 편이지만 인종과 민족이 다양한 사회라면 각자가 속한 집단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개인의 노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단지 드러난 결과만으로 오로지 실력만을 평가해서 그들에게 기회에 차등을 두는 것은 과연 공정한 것인가?

 

학창시절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들로 인해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기에 같은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을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고보니 오바마가 어린 시절 마약을 했었다 그랬던가? 그렇게 주어진 환경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는 시간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개인의 능력에 따른 공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부르주아라는 착취자와 프롤레타리아라는 피착취자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층위을 가지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할 것이다. 그저 착취만 하고 착취를 당하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면 고도로 복잡해진 구조 속에서 각자 일저부분 착취도 하면서 착취를 당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고민이자 마르크스주의가 공격받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드러난 학업성적만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이고 공정한 대우인가.

 

역시 조금 전 썼던 글과 이어지는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인 것이다. 그래서 포용이고 관용인 것이다. 그래서 평등이고 그래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정치적인 올바름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당연하게 관성적으로 믿어왔던 행동들에 대해 반성하고 다른 더 복잡하고 번잡하고 성가신 대안을 찾아서 고민해 보자. 그러니까 당장 보이는 능력과 상관없이 각자가 놓인 상황까지 고려해서 기회를 동등하게 주고 그 안에서 서로가 대등해질 수 있도록 사회가 만들어 보자. 그럼에도 자기 능력이 부족해서 중간에 도태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능력이 부족해서 도태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한 사회의 불만과 불안을 줄이는 과정일 것이다.

 

사회가 개인화될수록 정의 역시 파편화된다. 그래서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정의와 가치와 윤리와 도덕에도 개별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처럼 개인에 대해서도 그에 맞는 해석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구조상 그렇게 모든 구성원들에게까지 필요한 해석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구조적으로 그 모든 개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배려란 기회라고 하는 가능성을 일반화하여 열어주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다. 역시나 반PC주의자들이 극혐하는 이유일 것이다. 모든 개인에게는 일률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역시 두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과정일 것이다. 일극의 세계와 다원성의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 더 쉬운 것은 전자일 타다. 후자를 설득하기란 너무 어렵다. 안타깝게도. 직관으로는 알아도 논리로 설명하기란 너무 지난한 과정이다. 하물며 설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고대 동지중해세계에서는 비의주의로 해석할 수 있는 이른바 미스테리아라 일컬어지는 어떤 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간단히 지금 자신들이 사는 세계는 거짓된 것으로 세상 어딘가에는 진실한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그 진실을 통해 인간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한때 예수가 불교를 배웠다는 주장이 유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를 가리키는 메시아와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어원이 같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를 보면 불교와 마찬가지로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가서 고행만 하는 종파도 존재했었다. 고행이 자신들을 그 진실로 이끌어주리라.

 

최초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피타고라스 이전부터 존재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여겨진다. 왜냐면 피타고라스 자신이 그와 관련한 명제를 스스로 쳔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세사의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 말하자면 피타고라스는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진실한 비밀이 바로 수에 있다고 당시 결론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데모크리토스가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주장한 것도 그런 맥락 위에 있었다. 말 그대로다. 유럽 문명의 수학과 과학은 바로 동지중해세계에서 유행했던 바로 이 비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수학을, 물리의 법칙들을, 현실의 모든 현상들을 관통할 수 있는 보편의 질서를 찾아낼 수 있으면 그것이 이 우주의 비밀에 닿는 방법인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 플라톤이 나와서 이데아를 통해서 그들이 추구해야 할 비의를 아예 정의해 버렸다. 미숙하고 거짓된 신 데미우르고스와 진실한 지혜의 상징인 소피아도 아마 이때 플라톤에 의해 우화로써 이야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데아는 이후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만나고 유럽사회의 정신적인 뿌리를 이루게 된다. 괜히 이후 유럽의 모든 철학들이 플라톤의 재해석이라 불리우는 게 아니란 것이다. 바로 그 이데아란 무엇인가? 그 이데아에 이르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 이데아를 신으로 구원으로 여겼었고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양심으로 존엄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철학자 가운데 일부는 다시 고대의 지식을 불러와서 수학과 과학으로써 이 세상의 실체를 이해하려 했었다. 바로 그 일원적인 세계가 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중심의 문명에 대해 서구사회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 그 대상이며 본질인 것이다.

 

하나의 진실을 찾아서. 하나의 질리를 향해서. 그 궁극은 발전이고 번영이고 마침내는 구원일 터였다. 히틀러의 게르마니아도 그런 연장에서 이해하면 된다. 어떻게 하면 독일민족을 더욱 번영하게 영구히 번성하도록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경쟁이 되는, 그리고 방해가 되는 대상들을 모조리 절멸하고 가장 우수한 독일인들만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독일인들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들만이 남아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히틀러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회에서는 매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이기도 했었다. 누군가는 영국국민을 위해서, 누군가는 프랑스인을 위해서, 누군가는 이탈리아인을 위해서, 각자 그 대상만 달랐을 뿐 본질은 같았다. 그게 파시즘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반발하여 나온 것이 해체주의이고 그 끝에서 현대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온다. 완전히 맞는 건 아닌데 대충 그렇게 흐름이 이어진다 보면 된다. 정확히 그렇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진실과 진리가 아닌 서로 다른 무한히 많은 정의와 가치와 도덕과 윤리와 상식과 양심과 이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단지 해석으로써만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더이상 이전 철학자들이 말하던 거대서사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수없이 파편화된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곧 기존의 유럽을 중심으로 한 백인사회가 추구해 온 가치에 대한 해체와 붕괴를 의미한다.

 

반PC주의자들에게 거의 숭배의 대상처럼 여겨지는 어느 철학자인지 임상심리학자인지에 대한 글을 얼마전에야 우연히 보았다. 뭔 소리를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 그런 주장들을 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체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동안 잘 유지되어 오던 서구사회의 정통과 가치를 한 순간에 부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수 반PC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거의 일맥상통한다. 그동안 아무일 없이 잘 지내오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성가신 놈들이 나타나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 잘 지내오던 그대로 세상을 조용하게 만들려 한 것이 히틀러였고, 스탈린이었으며, 그래서 그냥 다시 세상을 시끄러운 채로 내버려두자는 것이 이후 현대의 철학과 사상들의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조용하던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자. 그게 트럼프다. 유일한 하나. 단 하나의 정의와 이익.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순이 생겨난다. 이전의 착취하는 부르주아와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니 마르크스 주의 자체에 파탄이 일어나는 것처럼. 

 

단 하나의 진리가 존재한다. 단 하나의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만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 이를테면 인어공주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백설공주는 반드시 유럽계 백인이어야 한다는 믿음처럼. 성소수자는 비정상이고 따라서 소수자로써 다수의 요구에 따라야만 한다.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들은 마땅히 주류가 바라는대로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래도 요즘 유행중인 반PC의 배후에 개신교 교회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90년대에도 영지주의에 반대한다고 록밴드들을 악마화하는 주장이 꽤나 젊은 세대를 사이에 유행한 바 있었다. 실제 저들이 주장하는 대부분 내용들이 특히 미국 남부의 원리주의 교회들이 주장하는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인종주의적인 부분까지도. 그래서 그들 자신도 말한다. 미국에서는 백인이 주류이듯 한국에서는 한국인 남성이 주류다. 다르지 않다. 

 

생각났다. 조던 피터슨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뭔 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냥 패스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반PC주의의 사상적 근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나름 판단에 도움이 된다 할 수 있겠다. 저들은 어째서 저리 생각하고 저처럼 과격한가. 그런데 어째서 전혀 동떨어진 한국사회에서 반PC주의가 저처럼 세력을 얻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에 대해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 아무튼 크게 보자면 이렇다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문명이 발전시키고 지켜온 그 근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문제없이 해 오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목적이 그런 오독을 낳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사실을 넘어선다.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은 많이 순진한 모양이다. 달리 말해 내가 아직 많이 병신인 모양이다. 너무 선의로만 이해하려 했다. 그래도 이놈들이 선의로 병신같지만 그런 말을 했었겠거니. 그 왜 있지 않은가? 사람은 착한데 모자란 그런 놈들. 사람은 착하고 좋은데 경우도 없고 주제도 모르고 상황파악도 안되는 한심이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경수가 대선캠프 차린다는 말 듣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이다. 지난 대선 끝나고 당비 내는 당원도 없다고 매일 우는 소리를 하던 정의당 거지새끼들에게 무려 12억이라는 돈이 한꺼번에 들어왔었다. 그게 진심으로 당원들이 정의당 잘한다고 내 준 후원금이라 생각한다면 뇌가 없거나 양심이 없는 거다. 어째 대선 내내 이재명만 그리 물어뜯고 김건희는 온몸을 던져 방어하더라. 그 돈이 어디서 무슨 목적으로 정의당에 지급되었겠는가?

 

한 마디로 입금이 되었다. 그래도 문재인의 측근으로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지분도 있고 하니까 네가 가서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나아가 대선에서도 민주당 표를 좀 빼앗아가라. 빼앗아 오라는 게 아니다. 빼앗아 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정치지형상 박빙으로 대선이 치러질 경우 이재명의 당선가능성이 낮아진다. 국민의힘이 다시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먹는 욕? 대신 돈이 남지 않는가.

 

당내 여론이 이 정도로 쏠려 있으면 대충 눈치 봐서 찌그러지는 것이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보이는 정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당장 지지자들까지 자기에 대해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데 진심으로 대권을 노린다면 아무리 자기당 지지자들의 미움을 살 수 있는 말을 그렇게 반복해서 읊어댈 이유가 없다. 그래도 지지자들은 달래가면서 뭘 해야지 지지자들과 맞서 가면서 뭔가를 주장하려는 모습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민주당 당원과 지지자들의 감정이나 의견따위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민주당에서 떨려나간 놈들이 어떤 놈들인가 생각해 보라.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윤석열에게 우호적이었던 놈들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을 거슬러가며 윤석열의 편에 섰었던 놈들이다. 대선이 끝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경수와 마찬가지로 민주당과 이재명만 욕하다가 지선 말아먹은 놈들도 거기 포함된다. 윤석열에게는 오히려 아부하다시피 우호적으로 웃음지으면서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해서만 가혹하던 놈들이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요즘 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차차기까지 거론하며 자신을 좋게 봐주던 지지자들을 정면으로 들이받을 결심까지 하다니. 아마 김경수 자신이나 주위 어디 쯤 가만 잘 살펴보면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정의당처럼 후불제일까? 성공보수를 약속받고 뛰어든 거면 이건 진짜 병신인데? 아님 말고. 

 

달리 생각할 여지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뜬금없고 납득안되는 행보이니. 인간이 병신이라면 그럴 수 있다 치겠지만. 하긴 드루킹같은 사기꾼놈에게 휘둘린 것부터 인증일 테지만. 난 그놈 서프라이즈 시절부터 사짜라고 취급도 안했는데 거기 넘어가는 게 진짜 병신일 터다. 지능의 문제인 걸까? 역시 아님 말고. 아무튼 구리다. 아주 구리다.

박용진이 어떤 경우에도 민주당에 대해서만 반성을 요구하는 이유는 별 것 없다. 자칭 중도라는 것들이 어차피 국민의힘은 그런 정당이라면서 민주당에 대해서만 더 잘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우 대부분 중도를 자처하면서 국민의힘을 상수로 두고 오로지 민주당에 대해서만 엄격하게 감시하고 비판하고 요구한다. 그래서 결론은 민주당이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이다.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이 뭐라도 더 나아서 지지하는 게 아니라 민주당이 절대평가에서 기준에 미치지 못했으니 그보다 못하더라도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말이 된다 생각하면 박용진이다.

 

어찌보면 참 불쌍한 것이다. 박용진이 겨우 배지를 달기 시작한 이래 민주당의 지지율은 거의 보수정당 지지율을 상회하고 있었다. 정작 민주당 지지율이 바닥을 칠 때는 박용진과 뜻을 같이하는 놈들이 당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박용진과 마음이 맞는 놈들이 대부분이라 딱 정치하기 좋을 때는 지지율이 낮고, 박용진과 전혀 맞지 않는 놈들만 남아있을 때는 당의 지지율이 높아서 차마 당적을 옮기가 꺼려진다. 차라리 조경태처럼 당이 현저하게 흔들리고 있어서 명분삼아 갈아타기 좋은 상황이 만들어져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회만 노리다가 아예 민주당에 눌러앉게 생겼다. 그렇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은 민주당이 잘못한 것 뿐이고, 그래서 국민의힘이 뭘 잘못하든 일단 민주당부터 욕하고 본다. 진정한 마음의 고향이 그곳이기에 차마 국민의힘과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는 것이 정치인 박용진의 비극인 셈이다.

 

그동안 박용진의 발언을 보더라도 바로 드러날 것이다. 처음부터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아다시피 한나라당 시절까지만 해도 거기서 공천 한 번 받기가 무척 빡셌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당선을 목표로 할 수 있다 보니 하여튼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죄다 보수정당으로 몰려들었고, 그래서 거기서 뭐라도 자격이 미치지 않으면 바로 밀려나서 민주당까지 흘러들어오고는 했었다. 더구나 심지어 박용진은 그 민주당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진보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경우다. 마음은 원래 보수정당에 가 있는데 정작 보수정당이 자신을 선택해주지 않으니 이리저리 떠돌다가 김종인 눈에 들어서 배지 한 번 한 것이 그를 민주당 정치인으로 만든 것이다. 몸이 있는 곳과 마음이 있는 곳이 다르니 그 괴리가 늘 그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민주당만 잘못이고, 민주당만 문제가 있고, 민주당이어서 안된다. 그러니까 당을 옮기라고. 그렇게 민주당이 싫으면. 

 

그런 점에서 이른바 나민지, 나문지, 나노사들은 얼마나 현명한가 말이다. 대세에 휩쓸려서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민주당과 문재인, 노무현을 지지했다가 결국 자기 원래 자리를 찾아서 지금은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국민의힘이 뭘 얼마나 더 잘해서 지지하느냐 그러면 그들 역시 대답은 한결같다. 민주당과 문재인과 노무현이 잘못해서 보수정당을 지지한다. 이유 없이도 지지할 수 있는 그것이 곧 신념이고 이념이고 의지인 것이다. 지향이고 성향이고 추구인 것이다. 그냥 자기 자리 찾아가면 될 것을 뭐 그리 구차하게 구는지. 그래서 비루한 것이다. 차라리 조경태처럼 확실하게 넘어가던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민주당은 싫은데 민주당 표는 받아야 하고. 뭐하는 인간인지. 참 인간이 한심하다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귀신도 안 잡아간다. 더러워서. 

간단히 1억짜리 전세집을 예로 들어보자. 전세금 1억을 모으려면 도대체 얼마씩 얼마나 모아야 하는 것일까? 대충 지금 최저임금 기준으로 한 달 실수령액 200 정도를 기준으로 매달 100만원씩 모아도 무려 100개월, 햇수로 계산하면 8년 4개월 쯤 된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면서 모아도 사실상 매달 100만원씩을 주거비 명목으로 쓰지 않고 모아야 1억짜리 전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달에 100만원이라니, 월급의 절반을 쓰지도 못하고 모아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아마 그리 말할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모아놓은 1억은 남아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 1억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가? 전세 한 번 들어가고 말 것인가? 기존의 전세계약도 연장해야 하고, 또 계약이 끝나면 다른 전세집도 알아봐야 한다. 그때마다 기존의 전세금은 그대로 인상분을 더 지불해야 할 텐데 그 돈까지 계속해서 정해진 급여 안에서 모아야 한다. 사실상 월세다. 그 돈이 몇 년 전 개정된 임대차보호법 기준으로 2년에 5%정도였는데 그것도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심지어 세입자들까지 나서서 난리였었다. 그 정도로는 안된다는 것이니 그 이상을 법으로 보장된 4년 뒤까지 생각해서 계속해서 모아야만 한다. 그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 써보지도 못할 돈을 전세금으로 묻어둔 채 인상분을 모아야 하는 구조다.

 

물론 도중에 잘 풀려서 전세금에 보태서 집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모아서 어디 아주 싼 아파트 한 2억에 샀다고 쳐보자. 역시 200만원 월급 기준으로 2억을 모으려면 한 달에 100만원씩 16년 8개월을 모아야 한다. 그냥 산수다.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계산이다. 당장 집이 2억이라는 것부터 혼자 살 것 아니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고려의 대상조차 아닐 것이다. 2억짜리 자산이 생겼다는 것에 의미를 둘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집을 팔아야 생기는 이익이다. 완전한 주거의 안정이 보장되어 죽을 때까지 평생 일정한 월세만 세면서 살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쓰며 살 수 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돈을 모아서 집을 사야 할 의미가 얼마나 있을 것인가.

 

내가 전세라는 제도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당장 부모님이 따로 나와 살 때 전세금까지 마련해 줄 형편이 아니었던 터라 처음부터 내가 벌어서 월세까지 내야 했던 때문이었다. 최저임금도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한 달에 얼마씩 모으면 단칸방 전세금이라도 모을 수 있을까? 괜히 사람들이 전세금 사기로 날렸다고 자살하고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한 달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쓰지도 않고 모아야 젊은 나이에 전세금도 모으고 하는 것이다. 진짜 먹고 입고 쓰는 돈을 최대한 아껴가며 모았는데 날렸으면 그때 느꼈을 절망감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 얻고, 그리고 다시 악착같이 모아서 전세금 올려주고, 그렇게 또 악착같이 모아서 내 집 마련하면... 결국 좋은 것은 내 자식들 아니겠는가. 결혼도 않고 혼자 살 것이라면 그렇게 집이라고 남겨봐야 물려줄 사람도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내가 살고 싶은 만큼 일정한 월세만 내고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있다면 더 여유롭게 벌어놓은 돈 다 쓰고 깔끔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전세든 내집마련이든 - 전세라는 제도 자체가 내집마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어차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결국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경우 그들에게 물려줄 자산으로서 더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혼자 살다가 물려줄 사람 없이 죽을 것이면 내 집이라는 게 그렇게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영구적으로 임대해서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쪽이 더 나 자신의 이해와도 맞는다. 더구나 부모들도 자식의 부양을 바라지 않고 자식들도 부모의 상속에 기대지 않는 개인주의사회에서는 더욱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더 많은 집을 공급하라면서 공공임대주택에 대해 적대적인 젊은 세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사실 이 이야기는 벌써 10년도 더 전에 내집도 필요없고 그냥 월세전세 살면서 쓰고싶은 만큼 쓰다 가겠다는 세대들 중심으로 널리 퍼지고 있던 것이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아무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도 한국사회에서 결혼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일 수 있다. 당장 일본만 해도 결혼하면 관공서에 신고하고 자기들 경제수준에 있는 월세 아무거나 얻으면 된다. 아마 월세 몇 달 분을 사례금조로 지불하고 밀리지만 않으면 계속해서 살 수 있는 구조일 것이다. 그러므로 딱히 결혼했다고 전세집 마련하기 위해 집에 손을 벌릴 필요도 없고, 전세금 마련하겠다고 결혼을 미룰 이유도 없다. 그냥 마음 맞아서 하고 싶으면 결혼해서 적당한 월세집 찾아 들어가면 된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시작부터 전세로 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도 벌려야 하고, 전세금 부담에 결혼도 늦춰야 하고, 그러다 아예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마저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월세로 하기에는 전세에 비해 당장의 부담이 또한 너무 크다. 전세가 모으기 어려워 스렇지 일단 전세로 들어가면 인상분을 생각하더라도 상당히 경제적인 부담이 줄어드는 이점이 큰 것은 분명한 사실인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전세를 옹호하는, 특히 젊은 세대들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전세가 서민들에게 유리한 제도일 수 있는 것은 맞다. 단, 그것은 이미 전세금을 마련한 경우다. 그런데 그래도 혼자서 살 만한 전세집을 구하려 해도 최소 몇 천만 원 이상의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막 사회에 나와 직장을 얻은 초년생이 그 돈을 모으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부모의 지원 없이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그 돈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아껴가며 악착같이 모아야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부모의 지원을 배제했을 때도 전세는 일반 서민들에게, 특히 사회초년생인 청년들에게 유리한 제도일 것인가? 더구나 임대차보호법에 반대하던 논리 그대로 5% 정도의 인상률에 4년이나 계약을 보장해주면 전세라는 제도를 유지할 매리트가 없을 만큼 불안한 제도이기까지 하다.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면서 그 이상의 인상분을 마련해 올려주어야 한다. 그동안 그 돈으로 먹고 입고 쓰고 혹은 투자를 잘 해서 자산을 불리는 경우를 가정해 보라. 이익일까?

 

뭔가 요즘 청년세대들과 이야기하다보면 마치 오래된 레코드판을 다시 재생시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PC와 관련해서 저들이 말하는 그동안 문제없이 잘 굴러왔는데 괜히 세상만 시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 있으면 진짜 나이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 전세가 서민을 위한 제도이던 것은 아직 금리도 높고, 따라서 급여도 빠르게 올랐던, 그래서 목돈을 묻어두고 있어도 그만큼 빠르게 모아서 더 많은 돈을 모아서 집도 살 수 있었던 시절에나 통하던 이야기다. 그때는 전세금을 목돈으로 받아서 이자만 받아도 집주인들 역시 안정적으로 월세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예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도일 것인가. 

 

아무튼 결론은 이거다. 내가 살고 싶은 만큼 일정한 임대료만 내면서 이사하지 않고 정착해 살 수 있으면 그냥 임대주택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기상환한다고 번 돈 대부분을 은행에 때려넣느라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못 사먹는 지지리 궁상인 지금 처지를 본다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매달 일정하게 월세 내면서 먹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더 여유롭게 쓰는 쪽이 더 내 삶의 질을 위해서도 낫다. 아파트는 사는 게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물며 전세야. 결혼해서 자식 낳으면 그나마 의미가 있을 지 모르겠다. 그 역시 나와는 상관없지만. 

이를테면 무협소설의 한 장면이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있다. 그래서 그를 단죄하고자 지나가던 협객이 칼을 뽑았는데 무고한 사람을 해치면 안된다며 그를 막아서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둘 중 누가 더 나쁜 놈인가?

 

민주당 지지자들은 고민정과 김경수만 욕하고 있지만 사실 노무현도 문재인도 성향 자체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희정이 주목받았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보수적인 유권자들과도 소통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설득도 해가며 도정을 잘 이끈 리더십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높은 평가를 해 주었던 것이었다. 노무현이나 문재인이 앞장서서 민주당이든 아니면 보수정당이든 특정한 정파나 계파, 정당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단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높였던 적이 있었는가?

 

노무현 정부 당시 열린우리당의 창당도 따지고보면 정동영과 신기남이 주도한 것이었고 노무현은 오히려 그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렇다. 어쨌거나 최소한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야당인 한나라당에 많은 양보를 해 주었었고, 심지어 나중에는 정권을 나누자며 대연정을 제안하기까지 했었다. 내가 노무현을 정치인으로서 도저히 지지하지 못하겠다 여긴 순간이었다.

 

문재인은 어땠을까? 민주당의 체질을 바꾸기 위한 혁신의 과정에서 결국 혁신안을 지키느라 다수 당권파가 탈당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문재인이 나가라고 내쫓아서 그리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최대한 양보하면서 붙잡았었고, 그때 약속을 지켜서 총선직전 당대표에서 물러나서 비대위체제를 받아들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농담처럼 떠돌던 친문좌장 박영선을 떠올려 보라. 진성준도 최재성도 원래는 문재인과 다른 쪽에 있던 정치인들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측근이던 김경수를 잡겠다고 드루킹특검을 제안했을 때도 문재인은 추경을 위해 오히려 민주당을 설득해서 받아들이게 했던 것이었다. 조국도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권한을 더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면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테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문재인은 철저히 법과 원칙과 절차와 타협을 앞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좋아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문재인을 존경해서 따랐다던 그 측근들의 성향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물론 그런 리더십이 필요한 경우라는 것이 있기는 했다. 그렇게 믿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보수정당이 지금처럼 아예 극단화되기 이전인 한나라당은 확실히 아직은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나갈 수 있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 김문수나 이재오 같은 재야출신 인사들도 완전히 돌아서기 전이었었고, 김영삼을 따라서 합당했었던 민주계 역시 아직 남아서 일정부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국정의 아젠다를 두고 경쟁하고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었다. 더구나 민주당이라고 하는 정당은 그저 하나의 정당을 넘어서 그동안 권위주의 정권과 맞서 싸우며 민주화를 이루어낸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정치인들은 그 고단한 과정을 함께 싸우며 지나온 동지들이기도 했다. 그러니 민주당의 동지들과도 화합하고, 반대편에 있는 한나라당과도 타협하며 민주주의의 원칙에 맞게 공존을 꾀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것이다. 물론 난 그때도 그게 무척 싫었다. 옳고 그름이 이렇게 명확한데도 어떻게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타협해야 하는가. 그때는 나도 아직 어렸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믿음은 아마도 문재인에게까지, 그리고 더해서 이낙연을 차기 대선주자로 여기고 지지하던 다수의 지지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었다. 당시 보수정당은 이미 지리멸렬한 상태였으니 이대로 문재인 정부가, 민주당이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며 화합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국민들도 알아줄 것이다. 그래서 원칙을 지켜 양보하며, 상식을 지켜 자제하고, 보편의 가치와 질서를 위해 후퇴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안되겠을 때는 독단으로 밀어붙이기도 했었지만 기본적인 국정기조가 그러했었다. 그래서 윤석열이라는 괴물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 태도가 자칫 지리멸렬 와해될 수 있었던 보수정당의 기를 살려주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들을 지지자들이 낱낱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문재인 같은 리더십으로는 안된다.

 

말하자면 민주당 안에 수박들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들어온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수박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민주당의 뿌리 중 몇 가닥이 나올 정도로 그 유래는 매우 깊다. 민주당으로는 안된다고 뛰쳐나와 창당한 열린우리당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안개모라는 것이 있었다. 노무현 쫓아내고 다시 민주당으로 합치고 난 뒤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들은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고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르면서 대부분 친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지지자들도 별 감정이 없었다. 문재인이 대세이니 태도를 바꿔서 친문을 자처해도 어차피 같은 민주당이겠거니. 그런데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그를 대하는 보수정당과 언론들과 이 사회 기득권들을 보면서 지지자들도 생각을 달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뜨뜻미지근한 민주당을 보면서도 입장이 달라진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대화도 타협도 거부하는 상대를 대상으로 더이상 양보만 반복하는 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모인 지지자들의 지향과 가치를 오히려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저들만을 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불관용에는 관용이 없다는 선언적 격언을 직접 몸으로 체화하게 된 것이다. 불관용을 관용하는 순간 오히려 불관용이 관용을 잡아먹는다. 차별과 혐오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하는 순간 그 차별과 혐오에 의해 다양성은 배척되고 부정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대화도 타협도 양보도 합의도 거부하는 이상 그들을 쫓아 그들에 맞추기보다 단호하게 민주당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지향과 가치를 지켜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민주당이 존재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더구나 저들의 불관용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바라는 보편적인 가치와 지향을 부정하는 불관용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공동체가 함께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윤리와 도덕과 정의까지 깡그리 훼손하고 오염시키려 하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까지 타협하고 양보하는 것을 과연 관용이라, 다양성이라, 공존이라 인정해야 하는가.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 사람의 목숨은 무엇보다 소중하기에 어떤 경우라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려 하는 것은 올지 못한 행동이다. 이상은 옳다. 그런데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다. 무고한 사람들이 이미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과연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바르고 도덕적인 행동일 것인가? 선하고 정의로은 행동이었을 것인가?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이 죄악이기 이전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더이상의 피해가 없도록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정의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설혹 상대가 다치거나 죽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꺼려서 당장의 행동을 삼가야 한다.

 

그래서 공자도 말했던 것이다. 진정으로 선한 이는 선한 이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악한 이들로부터는 원망을 듣는다. 선인으로부터도 악인으로부터도 모두 칭찬을 듣는 이는 절대 선할 수 없고 오히려 기회주의자로써 악을 용인하는 결과만 낳고 마는 것이다. 선한 이를 돕고, 선한 의도에 힘을 실어주고, 선한 행위를 함께하면서도 악한 이를 징벌하고, 악한 의도를 꾸짖으면서, 악한 행동을 막아설 때 그가 선한 것이지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좋기만 하려는 놈은 자신은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 악을 돕고 악에 힘을 실어주어 악을 함께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민주당 안에서 명백한 악들인 국민의힘과 타협하려는 놈들이 바로 그런 놈들인 것이다. 하물며 그냥 이념과 정책적인 지향이 다른 수준을 넘어서 헌정질서를 뒤엎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파괴하려 한 내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한 마디로 이미 상황이 바뀌었고 따라서 그에 대한 지지자들의 입장도 바뀌었는데 원래 하던대로 계속 하려는 것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문재인 전대통령조차 자신의 SNS를 통해 그토록 사람만 좋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내란에 대해서만은 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인데도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이다. 하나로 뭉쳐서 명백한 악인 내란세력과 그에 동조하는 집단들과 맞서싸워야 하는 상황에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정작 그와 온 힘을 기울여 싸우고 있는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반응들이 고울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저들이 민주당이라고 하는 같은 정당에서 같은 이념과 지향을 공유하며 앞으로도 함께할 동지들이 맞기는 한 것인가. 

 

물론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름의 선의를 가지고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그리들 말하는 것일 터다. 그리고 한때는 그런 말들이 꽤나 듣기 좋게 설득력있게 들리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멍청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었는데 예전 방식만을 고집한다. 그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상대해야 할 반대편의 모습이 달라졌고, 그에 따른 지지자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그런데 그런 민주당을 가르치듯 현실을 모르는 고담준론만 앞세우면 그거야 말로 배에 표식을 새기고 검을 찾으려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강물을 따라 배는 어느새 하류까지 흘러왔는데 표식을 보고 들어가 찾으면 과연 칼을 찾을 수 있을까? 정치를 너무 오래해서일 것이다. 혹은 정치를 하는 놈들의 세계에 너무 오래 발을 들이고 있었다. 고민정은 원래 언론인이었으니 주위에 있는 인사들이 모두 그러할 터다.

 

어째서 저들의 주장들을 다양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저들의 선의를 온전히 선의로써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더불어 과연 저들의 저같은 주장들이 어느날 갑자기 단지 계산에 의해서만 악의로 터져나온 것일 텐가? 그래서 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용납할 수 없다. 상황과 다르다. 맞지 않다. 그러므로 틀렸다. 이미 흘러가버린 정의란 것이다.

역시나 다시 슬금슬금들 기어나온다. 지금 2030 남성들 사이에서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가 많이 낮아졌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민주당이 이들을 잡아야만 한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어떻게?

 

물론 말한다. 페미만 버리면 된다. 그래서 2030 남성들이 페미만 싫어서 문재인을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는 것인가? 페미만 그토록 싫어해서 문재인 정부 내내 문재인과 민주당을 악마화하면서 국민의힘과 윤석열에게는 그렇게까지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면 진짜 그들은 민주당의 정책 가운데 페미만 꼭 집어서 반대했던 것인가?

 

문재인 정부 내내 그놈들 떠드는 소리를 가까이서 듣고 있었기에 아는 것이다. 아무튼 당시 2030남성들은 페미 이전부터 민주당의 정책 전반에 대해 거의 적개감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반대입장을 내보이고 있었다. 지금도 2030 남성들이 문재인의 실정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최저임금인상과 근로시간단축이다. 심지어 군인월급 올려준 것도 시비거는 놈들이 보일 정도다. 청년임대주택도 반대였고, 청년들을 위한 급여지원이나 저축지원정책도 역시 반대였었다. 그냥 다 반대였었다. 중대재해법도 반대였었고, 공수처도 반대였었고, 민주당의 대북정책역시 반대였었다. 그냥 민주당과 정책적으로 정반대편에 위치한, 이념적으로 전혀 반대편에 위치한 집단이라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놈들 잡자고 이런 정책들 다 포기하자?

 

청년들을 위한 정책 좋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딛는, 아직 사회적인 기반 자체가 부족한 세대를 위해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해주는 정책이 있으면야 당연히 좋다. 하지만 그것도 당사자들이 좋아야 좋은 것이다. 그런 것들 다 반대하면서 2030 남성들을 위한 정책들만 내놓으라. 그래서 2030남성이다. 그러면 과연 그 2030 남성들을 위한 정책들이 무엇이었는가 살펴보자. 그래서 국민의힘은 뭘 얼마나 잘해주어서 2030 남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인가? 그러니까 민주당은 해주지 않았는데 국민의힘은 해주었던 그것부터 찾아보자는 것이다. 결국에 민주당의 정책에 대한 반대 말고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얼마나 어떻게 더 잘해주라고?

 

심지어 페미조차도 국민의힘이면 황보승희도 신지예도 이수정조차도 하나같이 착한페미가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페미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페미에 반대하는 것임을 그들 스스로가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준석이 임명했으니 황보승희도 착한 페미, 윤석열을 지지하고 있으니 신지예도 착한 페미, 이수정도 마찬가지다. 아마 기존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2030 남성들에 대해 모든 기대를 내려놓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대선기간 내내 2030 남성들의 지지는 모든 이슈를 무시하며 한결같았다. 거의 6070 대구경북 노인의 지지를 보는 것 같았다. 저기에 뭘 얼마나 어떻게 더 해 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끌어온다고 민주당을 위해 얼마나 더 도움이 될 것인가?

 

한 마디로 지금이나 이전에 국민의힘을 지지했던 2030 남성들이란 이미 민주당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책에 반대하며서 국민의힘에 대해서만 맹목적으로 기대를 보냈던, 그것이 민주당에 대한 혐오와 증오 때문이었든 민주당의 정책들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든 민주당을 절대 지지할 수 없는 부류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잡아보겠다고 정책들을 내놓는 순간 민주당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잠시 국민의힘으로부터 이탈해 있다고 민주당의 정책으로 저들의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구경북에서 노인들에게 얼마나 잘해준다고 그곳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여론이 얼마나 나올 수 있겠는가?

 

민주당의 정책방향에 동의하면 페미가 됐든 뭐가 됐든 민주당을 더 지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페미 하나 때문에 민주당을 지지하지 못하겠다는 경우 역시 일단 이미 민주당을 더 열정적으로 더 강하게 지지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말부터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민주당을 몇 번이나 위기에서 구해준 동지가 있는데 지지해줄지도 모르는 놈들을 위해 그들을 버리자? 하다못해 윤석열 탄핵을 위해 젊은 여성들이 더 많이 거리로 나왔더라는 말조차 그 잘나신 2030 남성들 눈치 보느라 삼가자고 말하는 놈들이 있었다. 하물며 페미 말고도 민주당 정책 다 폐기해야 지지하겠다는 놈들을 도대체 뭘로 어떻게 설득하겠다는 것인가? 그게 정치적으로나 명분적으로 얼마나 의미가 있을 것인가?

 

굳이 2030 가운데 남성을 따로 떼어 놓을 필요 없이 아직 사회적으로 약자인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되 딱 거기서 끝내면 되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어주는 민주당을 선택한다면 좋은 것이고, 그럼에도 페미만 읊어대며 저쪽을 지지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을 버리고 2030남성들만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한 마디로 의미가 없는 헛소리들이다. 

 

정당에게는 정체성일라는 게 확고하게 있어야 한다. 이념이라든가 지향이라든가 성향이라든가, 그에 따른 추구하는 정책과 법안들의 방향과 형태가 분명하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바라고 이미 모여든 지지자들을 저버리는 짓은 배신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2030 남성들 표 더 얻어 보자고 그런 것들을 포기하자는 것인가. 결국 이재명이 아닌 김동연이나 이낙연이라면 지지하겠다는 사람들 있으니 후보 바꿔보자는 소리나 같은 것이다. 그런 선택들이 얼마나 민주당과 지지자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인가?

 

직전 대선을 겪어 보고서도 아직도 그 소리를 한다면 의도는 명확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은 그 숨은 속내까지도 너무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의미가 없다. 가치도 없고. 민주당이 먼저 2030 남성들을 버렸는가? 천만에! 서로 버렸다기보다 그냥 원래 안 맞았던 것이다. 모든 정책이 다 싫은데 지지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당연한 결과다.

전쟁이 났는데 야당이 지금 고민정, 임종석, 김부겸, 우상호 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인 이익만을 노리고 대통령을 흔들고 있다 생각해 보라. 한창 위협적인 적과 맞서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정권을 가져야겠다고 적의 선동을 위한 선전까지 이용해서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다. 과연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 것인가?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에 의한 친위쿠데타가 시도되었었고 아직 완전이 진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아직 내란의 주모자가 처벌받지 않은 채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고, 그에 의해 임명된 국무위원들과 쿠데타에 동원되었던 군장성들까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국회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의 국회의원들마저 그 지지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마저 무시해가며 그들을 지키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까지 하다. 언론마저 저들의 주장을 옮겨 읊기에 바쁜 와중에 민주당만이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민주당에서 자리 하나 더 차지해 보겠다고 정작 내란의 주범과 공범과 방조범들이 아닌 민주당과 이재명을 먼저 공격하고 있다. 힘을 깎고 명분을 줄이고 상황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는 행동을 오로지 자리 하나 더 좋은 것으로 차지할 목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제대로 민주당이 국민이 바라는 내란의 진압과 단죄를 제대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비유하자면 전쟁이 한창 치열한데 몇 번 전투에 이겼더니 전쟁은 이미 끝났다며 적과의 타협을 주장하고 나서는 상황인 것이다. 아직 전쟁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리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서 그 책임부터 물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 전에는 무엇을 잘못했었고, 전쟁 중에는 어떤 잘못들이 있었으니 한창 전쟁이 치열한데 그 책임자부터 단죄하다. 아니 그들끼리만 모든 것을 끝내지 않도록 한 자리씩 더해서 지휘관들을 임명해 보내자. 실제 역사상 그렇게 다 이겼다고 밥그릇 챙기려다 말아먹은 전쟁이 꽤 된다. 그 가운데는 아예 다 이기고 있던 전쟁을 뒤집고 나라를 절단낸 경우마저 있을 정도다. 당장 전장의 상황이 시급한데 그런 행동들까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가.

 

그래서 계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민주당진영의 스피커들도 오로지 이재명과 민주당만 믿으라며 지지자들을 단도리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역시 나 또한 이재명과 민주당만을 믿으며 감히 함부러 그 행보에 대해 토를 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만큼 엄중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만큼 중대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민주당이 해내지 못하면 안되는 상황이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민주당이 해낼 수 있기만을 바라며 힘을 실어주어야 했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이재명에 대한 호불호를 말하고 민주당의 행보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아주 못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윤석열을 구속기소해서 거의 상황을 한 단계 정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몰고 왔다. 자기들이 당직에 있을 때는 상대의 눈치나 보느라 아무것도 못하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특히 윤석열이 난장을 칠 때 청와대에 있었던 인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윤석열이 개지랄할 때 국회의원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놈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놈들이 이제와서 이재명과 민주당을 탓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하는 것을 그냥 두고봐야만 하는 것인가.

 

내가 우상호와 임종석 나부랭이들이 자기들이 민주화운동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라 단언하는 이유일 것이다. 권인숙도 얼마나 자신의 과거가 후회되었으면 은인이랄 수 있는 박원순을 그리 가볍게 내버리고 있었다. 군부와 함께 친위쿠데타를 시도한 윤석열에 대한 화합과 관용을 주장하는 우상호와 임종석 나부랭이들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하긴 김문수도 한때는 김일셩이 쳐들어오면 가장 먼저 쳐죽였을 대상으로까지 언급되었던 노동운동의 거물이었었다. 우상호와 임종석은 아마도 지금 김문수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까. 왜 하필 민주당에 들어와서.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른바 수박들을 혐오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낙연이었다면 지지했을 것이라는 놈들조차도 그래서 그놈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닉들을 거의 기억하는 편이라 확실하다. 이낙연이 당대표이고 수박들이 당을 장악하고 있을 때도 그놈들은 여전히 그것을 이유로 민주당을 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재명이 대선후보가 되니까 그제야 이낙연이었으면. 속아넘어가는 게 병신인 수준이다. 그런 놈들이다. 그런 수준들인 것이고. 그따위 놈들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당 안에 포용하자? 왜? 국민의힘과 민주당을 합당하라 그러지? 그놈들이나 그놈들이나. 용서가 되지 않는다. 개새끼는 개새끼, 버러지는 버러지, 적은 적일 뿐이다. 수박은 그냥 수박이다. 쓰레기들이다.

아주 오래전 순정만화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비슷한 로맨스 소설까지 열심히 찾아 읽었더랬었다. 그러면서 느낀 사실 하나가 어째서 남자주인공들은 거의가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30대이면서 여자주인공들은 많아야 20인 것인가? 

 

그런데 그것은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제인 에어나 키다리 아저씨, 영화 사운드오브뮤직도 다르지 않았었다. 반대의 경우가 없지는 않은데 그런 경우에조차 젊은 남성들은 그저 열정만 넘치는 미숙한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고 나이 많은 여성의 원숙함은 모성에 기대면서도 그마저 열등감에 가려지는 경우가 많았었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벌써 그리스 시대부터 이미 남성이 진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은 30대 부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을 정도로 남성에게는 사회적인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충분히 배우고, 훈련하고, 사회에서 그를 내보임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제대로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반면 여성은 어리기만 하면 되었다. 어리고 무지할 정도로 순수하고 순결할 수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성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마디로 같은 20대라고 했을 때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시각이 거의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다르게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었다. 같은 20대의 남성들에 대해서는 아직 미숙한 존재로써 무시하고 있었다면 20대 여성들에 대해서는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순결함을 너무나 당연하게 찬양하고 떠받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남성은 아직 사회적으로 자신을 증명하지도 인정받지도 못햇기에 덜 자란 미숙한 존재로써 무시하고 멸시했다면 같은 나이대의 여성들은 심지어 숭배의 존재로써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존재들로부터 존중받고 대우받는 것이 더 일반적이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20대를 소비하는 경향으로도 나타나게 되었다.

 

아마 유시민도 오래전에 이 부분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한 바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부터 주위에서 어른들이 여자아이들만 우쭈쭈 감싸고 떠받드는 모습만 보며 자라왔다는 것이다. 똑같이 잘했어도 여자아이들이 남자인 자기보다 더 칭찬을 듣고 똑같이 잘못했는데 여자아이들이 남자인 자기보다 덜 야단맞는 것을 일상으로 보고 자라왔으니 어쩌면 그런 인식을 가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 했더니 젊은 여자들만을 구하는 직장이 그리 많고, 그렇다 보니 자기보다 먼저 취직해서 수입까지 더 좋더라. 그렇게 성장과정과 당장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왔고 살고 있는 입장에서 또래의 여성들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 그리고 그에 따른 분노와 증오를 느끼는 것도 따라서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그 상태로 10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까? 

 

말한 것처럼 원래 전통적으로 남성의 가치는 30대 이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같은 30대의 나이에 여성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었을까? 아니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굳이 30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20대 중반만 넘겨도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이미 끝난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20대 중반만 되어도 혼기를 놓친 노처녀로 뭔가 결함이 있지 않은가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토록 주위로부터 찬양받던 젊음이라는 장점이 사라졌을 때 여성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멸시와 조롱 뿐이었다. 당연히 더이상 그런 나이든 여성을 찾는 직장도 없었고, 이미 취직한 상태라 할지라도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퇴사를 종용당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들도 이른 나이에 일찍 결혼해서 직장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는 되는 것이 그때는 거의 상식이다시피 했었다. 그나마 그동안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많이 보완한 결과 그런 경우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아직 그런 관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같은 남성임에도 아직 젊은 2030들과 사회적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4050 사이에 여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전혀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여성이 차별받던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의반타의반으로 도태되어 사라져간 또래의 여성들을 가까이서 보아 왔기 때문이다. 당장 같은 나이대에서 비슷한 지위에 이른 여성들을 헤아려보면 바로 답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지금 2030 세대일 젊은 여성들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지금보다는 더 많이 살아남아 더 큰 성공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단지 젊음만을 소비하기 위해 채용한 많은 직장에서는 그 전에 이미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가능성이 여전히 더 높기도 할 것이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는 그들의 젊음만을 소비하려는 일자리가 적은 만큼 당장은 어렵더라도 같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은 또한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차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사회적으로 남성들이 더 유리함에도 정작 젊은 남성들만 자기들이 불리하다 우는 소리를 하는 이유다. 정작 자신들의 앞에 놓인 현실이 그러하니.

 

결국은 뭐가 문제인가? 여전한 남성과 여성의 젊음에 대한 비대칭적인 소비의 관행이 그렇지 않아도 일자리도 적고, 그나마 일자리의 질까지 열악해진 상황과 맞물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까지 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젊음이라도 여성의 젊음이 더 가치가 높기에, 나아가 여성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이 젊음이라는 한 가지 가치 뿐이었기에 그 세대에서 일어나는 불균형과 불평등이 불우하고 부당한 현실에 대한 남성들의 반감과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여성들 때문이다. 그런 여성들을 위한 여성주의 때문이다. 그런 여성주의를 옹호하는 민주당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여성들을 위한 법과 제도는 민주당 혼자서 발전시켜 왔을까? 그래서 말한다. 이준석의 여성주의는 착한 여성주의다. 국민의힘의 여성주의는 착한 여성주의다. 반페미라는 것이 얼마나 반이성적인 선동의 결과인가를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것들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일 것인가? 그렇다기에는 전세계적으로, 특히 선진국일수록 젊은 남성들의 우경화와 보수화가 상당한 사회문제로까지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의 자신의 어려움을 다른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써, 공포와 혐오로써 해소하려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외국인 이민자들이 있을 것이고, 정책적으로 보호받는 소수인종도 있을 것이며, 자신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는 집단들이 있을 것이다. 히틀러가 그렇게 독일 청년들을 규합해서 나치정권을 세웠었다. 그렇다고 나이를 먹으면 바뀌지 않겠느냐고 하기에는 이미 개인화가 너무 심하게 진행되어서 예전처럼 보다 세상을 넓게 다양하게 보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자기들만의 세계에 갇혀서 자신들만의 논리로 자가연마를 하며 자가발전에 빠져들기가 더 쉬워졌다. 사실상 자신들만의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 않으면 말조차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아무튼 멀쩡히 잘 다니던 아르바이트를 젊은 여자애들을 써야겠다며 잘리고 하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일하던 가게에 다시 갔더니만 역시나 자기보다 더 어린 여자직원이 심지어 자기보다 더 대우받으며 일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게 되면 화도 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더 힘들고 더 위험하고 더 더럽고 그러면서 대우도 뭣같은 일자리를 찾아서 어렵게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다 자기는 남자니까 장차 가족을 부양하려면 더 안정적이고 수입도 좋은 직장을 어떻게든 얻어야 한다. 같은 최저임금 받으면서 여자라고 더 편한 일을 대우받으면서 하고 나는 더 힘든 일을 강압적으로 해야 하는 상황까지 겪게 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구조적인 것이다. 인간사회란 항상 그렇게 모순적이었다. 그것을 단지 반페미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여성주의만 아니면 되는 것인가. 스스로 답을 찾을 문제다. 쉽다고 모두 정답인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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