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2'에서 공유는 노숙자들을 찾아가서 빵과 복권을 함께 내밀고 고르라 이야기한다. 당장의 허기를 해결해줄 수 있는 실재하는 빵과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는 실재하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복권 가운데 과연 사회에서 도태된 패배자라 할 수 있는 그들은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456억이라는 돈을 위해 거의 죽을 것이 확실시되는 게임에 자신을 내던지는 게임의 도전자들과도 닮아 있는 모습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공유는 그같은 패배자들 더욱 혐오하고 경멸하면서 아무렇지않게 죽음으로 내모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근거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과 어쩌면 있을 지 모르는 가능성 가운데 사람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미 확정된 실재하는 사실과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 가운데 사람은 과연 무엇을 우선하게 될 것인가? 후자를 어떤 사람들은 희망이라 부를 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달리 그것을 미련이라 부를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포기해야 하는 확정된 사실에 따라 판단이 갈리는 것이다. 현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쫓으면 그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고, 현재를 포기해가면서까지 미래의 가능성만을 쫓으면 그것은 미련이 되고 미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때로 희망이라 믿는 가능성을 위해 쉽게 현재를 포기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 패배자가 되어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박이고, 도박처럼 덤벼드는 무모한 사업들일 것이다. 잘나가던 연예인, 기업가들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내모는 것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미 윤석열이 실제 비상계엄이라고 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하여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상황이다. 자칫 대한민국의 헌정 자체가 중단될 수 있는,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힘겨운 싸움 끝에 겨우 일구어낸 민주주의라는 성과를 하루아침에 수 십 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실제 겪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그 주범인 윤석열은 직무정지상태라고 하지만 아직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고, 그에 적극 가담했거나 혹은 단순 방조했을 수많은 공범들 역시 아직 처벌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아직 대선도 치르지 않았는데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서 그를 막기 위해 그같은 내란을 시도했던 윤석열을 지지하고, 그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며, 윤석열을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국민의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말인가, 방구인가?
이미 실재하는 사실이 있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연의 가능성이 함께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이 실제 이루어졌을 경우 그다지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교대상이 이미 최악이라 할 수 있는 확정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미래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최악의 사실들을 오히려 긍정하며 지지한다. 편을 들어주고 힘을 실어준다. 과연 이러한 판단들을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야 말로 그들이 놓인 현실이자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도 당연하게 국민의힘이 더 잘하니까 더 좋아해서 지지한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다 보니 결국 저렇게 돌려돌려 핑계를 만들어 대야만 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잘못한 것도 알고, 국민의힘이 못하는 것도 아는데, 그러나 어찌되었든간에 관성때문에라도 자신들은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그들의 편에서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놈들과 같은 편임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그래서 그 핑계로써 민주당과 이재명 탓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과 이재명 때문에 자신들이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이 지금같지 않고 이재명이 대선후보가 아니면 괜찮았을 텐데 하필 지금 민주당같고 이재명이 당대표면서 유력한 대선후보이다 보니 그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국민의힘과 윤석열은 민주당과 이재명이 만들어낸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민주당과 이재명에 빛이 비추면 그 결과 그에 따라 생겨나는 존재들인 셈이다. 그것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민주당과 이재명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은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지지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어 노무현까지 2대에 걸쳐 집권하는 동안 IMF이후 공백상태였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아젠다들을 상당부분 민주당이 가져와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으로는 한계를 맞았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대한민국을 꾸려나갈 것이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 민주당이 몇 걸음 앞서면서 보수정당의 선택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회창부터 이미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반대 말고 새로운 아젠다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 그들의 논리란 그동안도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괜히 바꿔서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에 머물고 말았었다. 심지어 아예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놈들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개인의 탐욕이다. 보수정당 전체가 추구해야 할 일관된 가치가 없다 보니 자신들의 이익이 이념을 대신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의 탐욕으로 확장하여 몰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탐욕은 어떤 이념도 지향도 가치도 될 수 없다 보니 그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써 반민주당이 대세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놈들의 주된 논리인 위선보다 악이 낫다는 궤변이 여기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더 나쁜데 오히려 솔직하고 자신의 욕망도 긍정해주고 있으므로 덜 나쁘지만 괜히 착한 척하고 자신의 욕망도 부정하는 민주당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선명한 이념이나 지향, 가치를 위해 당장의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위해서 그를 부정하는 민주당과 적대하겠다. 오죽하면 진보를 자처하던 정의당과 한겨레, 홍세화나 김규항 같은 인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한 6070 늙은이들보다 자기를 중립적이라 객관적이라 합리적이라 애써 치장하려 드는 2030 보수지지자들이 더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수지지자라 말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원래 민주당도 지지했었던 진보적이기도 했었던 상당히 중립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유권자들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지지하는 이유로 민주당과 과거에는 문재인, 그리고 지금은 이재명의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민주당과 문재인이, 그리고 지금은 이재명이 잘못했기에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윤석열의 탄핵에도 반대한다. 혹은 반대할 수 있다. 국민의힘이 더 잘해서가 아니다. 더 나아서가 아니다. 더 옳아서도 아니다. 그런데도 더 못하고 형편없고 더 나쁜 국민의힘을 자신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도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논리도 중구난방이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논리들을 정리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어째서 저들은 실재하는 윤석열의 죄악보다 아직 미연의 가능성일 뿐인 이재명의 실정을 더 두려워하는가? 이재명의 잘못이 두려워서 명백한 죄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인가? 어차피 처음부터 어떤 일관된 이념이나 지향,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일차원적인 감정, 본능, 욕망이 그들을 움직인다. 그것이 지금 국민의힘이라는 보수정당이 가진 정체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보라는 이념을 쫓으면서도 이념을 뛰어넘어 한겨레와 정의당과 녹색당과 김규항같은 놈들도 거기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념이 아닌 이념, 지향이 아닌 지향, 가치가 아닌 가치, 그래서 그 모든 책임은 민주당에 씌워진다.
말 그대로 빵과 복권과 같은 것이다. 실재하는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빵과 당첨되었을 경우 기대할 수 있는 더 큰 탐욕과의 사이에서 탐욕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그같은 관성이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한 막연한 증오와 공포로, 혐오와 거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냥 미망이다. 미련이다. 인간의 탐욕은 스스로를 연마한다.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강화시킨다. 일찌기 프랑스의 변태 마르퀴 드 사드가 평생을 걸고 증명한 사실이었다. 그 또한 인간의 이성이 가진 또 다른 이면이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공포가 공포를 낳고, 혐오가 혐오를 낳는다. 그렇게 부정과 거부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관성이 되어 당연하게 여겨진다. 보수적이라기보다 비루하고 비겁한 것이다. 더욱 비열해진 것이다. 그게 지금 대한민국 보수의, 아니 과거 진보를 포함한 현실이다. 우습지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