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2'에서 공유는 노숙자들을 찾아가서 빵과 복권을 함께 내밀고 고르라 이야기한다. 당장의 허기를 해결해줄 수 있는 실재하는 빵과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는 실재하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복권 가운데 과연 사회에서 도태된 패배자라 할 수 있는 그들은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456억이라는 돈을 위해 거의 죽을 것이 확실시되는 게임에 자신을 내던지는 게임의 도전자들과도 닮아 있는 모습이었을 터였다. 그렇게 공유는 그같은 패배자들 더욱 혐오하고 경멸하면서 아무렇지않게 죽음으로 내모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근거를 더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과 어쩌면 있을 지 모르는 가능성 가운데 사람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미 확정된 실재하는 사실과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 가운데 사람은 과연 무엇을 우선하게 될 것인가? 후자를 어떤 사람들은 희망이라 부를 테지만, 어떤 사람들은 달리 그것을 미련이라 부를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 포기해야 하는 확정된 사실에 따라 판단이 갈리는 것이다. 현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쫓으면 그것이 희망이 되는 것이고, 현재를 포기해가면서까지 미래의 가능성만을 쫓으면 그것은 미련이 되고 미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때로 희망이라 믿는 가능성을 위해 쉽게 현재를 포기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 패배자가 되어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박이고, 도박처럼 덤벼드는 무모한 사업들일 것이다. 잘나가던 연예인, 기업가들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내모는 것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미 윤석열이 실제 비상계엄이라고 하는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하여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상황이다. 자칫 대한민국의 헌정 자체가 중단될 수 있는,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힘겨운 싸움 끝에 겨우 일구어낸 민주주의라는 성과를 하루아침에 수 십 년 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을 실제 겪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그 주범인 윤석열은 직무정지상태라고 하지만 아직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고, 그에 적극 가담했거나 혹은 단순 방조했을 수많은 공범들 역시 아직 처벌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아직 대선도 치르지 않았는데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었을 경우를 가정해서 그를 막기 위해 그같은 내란을 시도했던 윤석열을 지지하고, 그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며, 윤석열을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국민의힘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말인가, 방구인가?

 

이미 실재하는 사실이 있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연의 가능성이 함께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이 실제 이루어졌을 경우 그다지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비교대상이 이미 최악이라 할 수 있는 확정된 사실이라는 것이다. 미래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이미 존재하는 최악의 사실들을 오히려 긍정하며 지지한다. 편을 들어주고 힘을 실어준다. 과연 이러한 판단들을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야 말로 그들이 놓인 현실이자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면서도 당연하게 국민의힘이 더 잘하니까 더 좋아해서 지지한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다 보니 결국 저렇게 돌려돌려 핑계를 만들어 대야만 하는 것이다. 윤석열이 잘못한 것도 알고, 국민의힘이 못하는 것도 아는데, 그러나 어찌되었든간에 관성때문에라도 자신들은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그들의 편에서 힘을 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저놈들과 같은 편임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그래서 그 핑계로써 민주당과 이재명 탓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과 이재명 때문에 자신들이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당이 지금같지 않고 이재명이 대선후보가 아니면 괜찮았을 텐데 하필 지금 민주당같고 이재명이 당대표면서 유력한 대선후보이다 보니 그 반대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국민의힘과 윤석열은 민주당과 이재명이 만들어낸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민주당과 이재명에 빛이 비추면 그 결과 그에 따라 생겨나는 존재들인 셈이다. 그것을 스스로도 인정한다. 민주당과 이재명에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은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지지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이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어 노무현까지 2대에 걸쳐 집권하는 동안 IMF이후 공백상태였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아젠다들을 상당부분 민주당이 가져와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으로는 한계를 맞았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대한민국을 꾸려나갈 것이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 민주당이 몇 걸음 앞서면서 보수정당의 선택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회창부터 이미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반대 말고 새로운 아젠다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결국 그들의 논리란 그동안도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괜히 바꿔서 혼란스럽게 한다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에 머물고 말았었다. 심지어 아예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놈들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빈 자리를 차지한 것이 개인의 탐욕이다. 보수정당 전체가 추구해야 할 일관된 가치가 없다 보니 자신들의 이익이 이념을 대신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의 탐욕으로 확장하여 몰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탐욕은 어떤 이념도 지향도 가치도 될 수 없다 보니 그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써 반민주당이 대세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놈들의 주된 논리인 위선보다 악이 낫다는 궤변이 여기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더 나쁜데 오히려 솔직하고 자신의 욕망도 긍정해주고 있으므로 덜 나쁘지만 괜히 착한 척하고 자신의 욕망도 부정하는 민주당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선명한 이념이나 지향, 가치를 위해 당장의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위해서 그를 부정하는 민주당과 적대하겠다. 오죽하면 진보를 자처하던 정의당과 한겨레, 홍세화나 김규항 같은 인사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한 6070 늙은이들보다 자기를 중립적이라 객관적이라 합리적이라 애써 치장하려 드는 2030 보수지지자들이 더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보수지지자라 말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원래 민주당도 지지했었던 진보적이기도 했었던 상당히 중립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유권자들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국민의힘과 윤석열을 지지하는 이유로 민주당과 과거에는 문재인, 그리고 지금은 이재명의 문제들을 이야기한다. 민주당과 문재인이, 그리고 지금은 이재명이 잘못했기에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윤석열의 탄핵에도 반대한다. 혹은 반대할 수 있다. 국민의힘이 더 잘해서가 아니다. 더 나아서가 아니다. 더 옳아서도 아니다. 그런데도 더 못하고 형편없고 더 나쁜 국민의힘을 자신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들은 자신들도 그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논리도 중구난방이다. 오히려 내가 그들의 논리들을 정리해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어째서 저들은 실재하는 윤석열의 죄악보다 아직 미연의 가능성일 뿐인 이재명의 실정을 더 두려워하는가? 이재명의 잘못이 두려워서 명백한 죄악을 옹호하고 있는 것인가? 어차피 처음부터 어떤 일관된 이념이나 지향,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일차원적인 감정, 본능, 욕망이 그들을 움직인다. 그것이 지금 국민의힘이라는 보수정당이 가진 정체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보라는 이념을 쫓으면서도 이념을 뛰어넘어 한겨레와 정의당과 녹색당과 김규항같은 놈들도 거기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념이 아닌 이념, 지향이 아닌 지향, 가치가 아닌 가치, 그래서 그 모든 책임은 민주당에 씌워진다.

 

말 그대로 빵과 복권과 같은 것이다. 실재하는 자신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빵과 당첨되었을 경우 기대할 수 있는 더 큰 탐욕과의 사이에서 탐욕을 선택하고 마는 것이다. 그같은 관성이 민주당과 이재명에 대한 막연한 증오와 공포로, 혐오와 거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냥 미망이다. 미련이다. 인간의 탐욕은 스스로를 연마한다.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강화시킨다. 일찌기 프랑스의 변태 마르퀴 드 사드가 평생을 걸고 증명한 사실이었다. 그 또한 인간의 이성이 가진 또 다른 이면이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공포가 공포를 낳고, 혐오가 혐오를 낳는다. 그렇게 부정과 거부를 통해 자신을 증명한다. 자기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관성이 되어 당연하게 여겨진다. 보수적이라기보다 비루하고 비겁한 것이다. 더욱 비열해진 것이다. 그게 지금 대한민국 보수의, 아니 과거 진보를 포함한 현실이다. 우습지만 사실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진보당 지지자 가운데 60% 이상이 윤석열의 탄핵에 반대하고 정권연장을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을 보고 어느 보수지지자가 평가한다.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는 민주당의 집권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사람 혼자만의 생각일 수는 있겠지만 그동안 정의당을 통해 보았던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이미지가 과연 어떠했는가 단적으로 알게 해주는 한 마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들에게는, 그리고 그 지지자들에게는 윤석열의 쿠데타보다 민주당과 이재명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가치일 것이다. 민주당을 반대하는 것에 더 중요하고 더 우선해야 하는 일이고 윤석열의 쿠데타나 그에 따른 정권교체는 크게 관심이 없을 것이다. 진짜 그러한가?

 

그런데 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시절 탈원전했다고 공격하고, 김학의 출국금지시켰다고 국정조사에서 따져물으면서 아예 문재인 대통령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던 것이 바로 정의당과 한겨레였었다. 아마 이 단계에서 이미 보수정당 지지자들조차 저들의 정체나 성향에 대해 판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추구하는 진보라는 가치란 과연 무엇인가? 저들의 진보적 이념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래서 저놈들은 무얼 위해 행동하는가? 대선 내내 민주당과 이재명만 공격하면서 심지어 정의당 대변인까지 나서서 김건희를 옹호하는 것을 보면서도 저놈들이 추구하는 진보적인 가치에 대해 판단하지 못한다면 뇌를 의심해야 한다. 문제는 진보당과 정의당은 진보를 추구하더라도 그 정체성이나 지향이 전혀 다른 정당이란 것이다.

 

통진당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뛰쳐나와 만든 것이 정의당이고, 그렇게 정의당이 떨어져나가고 남아 있다가 헌재에서 정당해산당해서 사라진 통진당의 잔여가 모여서 새롭게 만든 정당이 진보정당이라는 것이다. 굳이 운동권의 계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PD와 NL로 대충 뭉뚱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진보당을 마뜩잖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실 운동권 시절만 해도 NL과 PD의 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그것에 더 가까웠을 테니까. 그만큼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진당 시절 민주당과 선거연대도 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듯 민주당과의 관계 또한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하지만 그런 차이따위 알 리 없는 보수지지자 입장에서는 정의당이나 진보당이나 같은 진보정당이니 민주당에 대한 태도도 같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민주당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여전하다면 윤석열을 지지하는 것도 크게 이상할 일이 아니다. 

 

정의당이 도대체 진보의 이미지를 어떻게 망쳐버린 것인가. 민주노동당이 진보 앞에 자칭을 붙이게 하더니만 정의당 덕분에 자칭은 2찍이 되어 버렸다. 나만 그러는가 했더니 정의당 덕분에 진보 앞에 2찍을 붙이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더만. 그만큼 정의당의 문재인 정부와 대선, 그리고 윤석열 정부 아래에서의 행보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그 유탄을 진보당이 맞는 중이고. 녹색당이야 원래 검찰개혁도 반대하던 찌그레기들이니 말할 것도 없다. 저런 병신새끼들이 진보정당을 자처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2찍 진보인 것일 테지만. 진보당이 불쌍하다.

확실히 지식인은 지식인인 모양이다. 정규재가 제대로 보았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이념이고 신념이고 성향이고 그런 것 없다. 그래서 민주당을 이념적이라 공격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2030 남성들은 중도를 자처하면서도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일 테고. 이념이고 신념이고 지향이고 성향이고 없이 그들은 원래 보수당이었던 정당만을, 그리고 민주당이 아닌 정당만을 지지한다. 그 이외에 다른 이유따위 없다.

 

처음 김문수가 여권 대선후보 1위라 했을 때는 뭔 개소리인가 하던 인간들이 어느새 그에 대해 찾아보고서 희망회로를 돌리기 시작한다. 노동운동 했었으니 요즘 늘어나고 있는 체불임금만큼은 잘 해결해 줄 수 있겠거니. 경기도지사 시절 행정도 잘했다고 하니까 일도 잘 하겠거니. 그러면서 국민의힘 안에 자기 세력도 없고 하니까 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와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않으면서 그냥 잘 넘겨주겠거니. 여기서도 또 나오는 대단한 논리시다. 김문수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아 지지할 만하겠다. 

 

민주당 지지자들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일 것이다. 다들 아다시피 2020년 총선 언저리까지도 이낙연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지지는 매우 뜨거웠었다. 전국민적인 지지도 매우 높아서 거의 40% 이상의 지지율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이 추구하는 가치과 거리가 먼 행동들을 보여주면서 하나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문재인 지지자들이 그리 성토하던 이재명에게까지 역전당하며 원래 이낙연을 지지하던 다수 문재인 지지자들이 그리로 돌아서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었다. 이미 여론이 이재명을 선택해서가 아니라 이리저리 따져 보니까 이재명이 더 낫더라 해서 그리로 옮겨가 선택한 결과가 바로 이재명인 것이다. 

 

하긴 그래서 언론이며 정치권이며 자칭 지식인들이며 오해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이재명이 독주하려 해서 독주한 것이 아니라 이재명 정도로 민주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인물이 없어서 이재명이 독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국민의힘과 수박들이 열심히 김경수부터 조국과 안희정과 박원순까지 차례로 민주당 유력 대선후보들을 낙마시켜 온 결과가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그럼 저들은 이재명이 나서서 직접 어떻게 해서 사라진 인물들이었나? 국민의힘과 이낙연이 손잡고 날려버린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저 가운데는 이재명보다 더 나은 대안일 수 있는 인물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 그렇다고 임종석 같은 놈을 데려다 대선후보로 삼을까?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지금 민주당 대선후보로 임종석이나 이낙연이 유력하다는 여론조사결과가 나온다. 민주당 지지자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어떻게 저런 새끼가? 뭐 저런 병신 머저리같은 새끼가 민주당 대선후보라고? 저런 새끼 나오면 차라리 기권하고 말겠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새끼 대통령 되는 꼬라지는 못 보겠다. 당연하게 당내 경선부터 치러야 할 테니 따라서 알아서 정리될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김문수가 유력하다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기를 바라면서 그대로 가능성이 있다니 장점을 찾아봐야겠다. 당이 지지자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지지자가 당을 따라간다.

 

그러고보면 어째서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정치권과 언론과 자칭 지식인들까지 나서서 그리 이른바 개딸들을 악마화하고 나섰었는가 또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원래 지지자는 당을 따라가는게 정상인데 민주당은 거꾸로 당이 지지자를 쫓아다니고 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그래서 더욱 정치 이야기로 넘어가면 MBC나 JTBC조차 반이재명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한겨레를 비롯한 다른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윤석열 탄핵보다 이재명 사퇴가 더 우선이라는 게 자칭 2찍 진보언론들의 한결같은 태도였으니. 당이 김문수를 선택했으면 지지자는 따라간다. 참 대단한 정당이다. 거기에는 나이도 상관없다. 뭘 위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인지.

 

전광훈 나부랭이가 국민의힘을 아예 호로록 말아 쳐드실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민주당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지만 그러나 국민의힘이라면 가능하다. 그래서 민주당은 이념적인 것이고, 극단적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권을 가져서는 안되는 근본없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것이 이 사회 주류들의 아직도 한결같은 사고인 것이다. 그것이 김문수 지지율 46%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국민의힘을 지지한다는 2030 남성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민주당이 2030 남성들을 외면하고 있기에 자신들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있기에 자신들도 역시 자신들을 위해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이다. 심지어 그래서 윤석열도 지지하고 탄핵반대 집회에도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묻게 된다. 그러면 국민의힘은 2030 남성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는가? 그래서 뭘 어떻게 해 주었기에 지지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해 주면 민주당을 지지할 것인가? 민주당은 페미를 싸고돈다. 그러면 국민의힘에는 페미가 없는가? 그래서 떠올리게 된다. 이준석이 임명한 황보승희는 저들에게 착한 페미였었다.

 

그러니까 이 당이 뭔가를 못해서 저 당을 지지하면 그 당이 그보다는 나은 게 있어서 지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하나라도 더 나은 것이 있으니 지지할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토록 강조하는 2030 남성들에 대한 정책이나 입법만을 전제로 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뭘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러면 민주당은 또 뭘 얼마나 그보다 못했는데? 역시 페미? 그러면 국민의힘의 페미나 여가부에 대한 태도는 또 왜 그리 다른가?

 

그냥 솔직히 인정하면 될 것을. 자기들의 성향이 원래 그래서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을. 그래서 항상 강조해 말하는 것이다. 너희는 원래 성향이 그래서 보수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민주당을 지지할 이유 찾지 말고 솔직하면 된다. 괜히 사람 헷갈리게 중도입네, 원래 민주당을 지지했었네 떠들 이유따위 없다. 

 

하여튼 자기들 세대, 성별 싸잡아 이야기하면 가장 발작하는 것이 또 그들일 것이다. 항상 다른 성별 다른 세대 말할 때는 자기들도 싸잡아 이야기하면서. 타인에 대한 혐오나 증오, 경멸의 감정을 합리를 앞세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도 또 그들일 터다. 그런데도 자기들만은 싸잡지 말라. 부정적으로 언급하지도 말라. 평가하지도 분석하지도 말라. 그냥 자기들이 말하는대로만 따르라. 그러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해 주면 그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지지성향이 민주당으로 바뀔 거냐고?

 

내가 괜히 저들 자극해서 돌아서게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코웃음을 치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민주당을 지지할 수도 있는데 끌어안아야지 밀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원래 성향이 그렇다고. 민주당이 아무리 잘해봐야 대구경북의 노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할 가능성따위 없는 것처럼 원래 성향이 그래서 그러는 것을 왜 남탓을 하는가? 평소 하는 말을 들어보면 딱 그쪽 성향들일 텐데. 그러고서는 자기들이 자기들을 싸잡아 2030 남성이라는 집단의 뒤에 자신을 숨긴다. 이게 참 비겁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비루한 모습이기도 하다.

 

성소수자에 대한 트럼프의 발언에 환호하며 쏟아내는 논리들을 보면서 새삼 확인하게 된다. 취직을 못해서 그런가 싶었더니 멀쩡한 직장인들도 다수다. 하긴 120시간 노동발언이 나왔던 게 판교 IT직원들과의 대화 가운데서였었다. 결국은 그냥 성향이 그런 것이다. 뭘 어쩌겠는가? 자기가 보수적이라 그렇다는데. 내 주위에도 원래 성향이 보수적이라 정치이야기따위 걸러서 듣는 지인들이 꽤 된다. 그걸 어떻게 바꾸겠다고? 밭갈이도 중도에서 하는 거지 보수를 대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성 성향이라는 게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똥파리가 윤석열을 지지한 것도 원래 그놈들 성향이 그랬던 것이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닌 것처럼. 

 

아무튼 참 어려운 숙제다. 국민의힘은 해주지만 민주당은 해주지 않는 것. 국민의힘과 윤석열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지만 민주당과 이재명에게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 기존의 4050과 2030 여성들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입법이나 정책이 뭐가 있을까? 그런 걸 해 주어야지 중도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저들이 지지해준다는 거니. 힘들겠다.

트럼프가 남성과 여성 이외의 다른 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을 두고 환호하는 반응들을 보고 있으려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트럼프를 지지하면서 내세우는 논리들이 흥미로웠다.

 

"소수가 다수에게 맞춰야지 어째서 다수가 소수를 배려해야 하는가?"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잘 굴러오던 것을 괜히 바꿔보겠다 하다가 혼란만 야기한 것이다."

"원래 인간의 본능인데 그것을 거스르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소수가 다수의 가치와 질서를 따라야지 다수가 소수를 위해 맞추는 것은 모순이다."

 

말을 바꿔볼까?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에게 맞춰야지 어때서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맞추는가? 아, 이건 안 긁히겠다.

 

두 번째도 꽤 익숙하네. 일제강점기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문제없이 잘 살았다. 군사독재시절에도 괜히 데모한다고 하는 놈들만 문제였지 대부분 사람들은 모두 잘 먹고 잘살았다. 정의당 후보라는 놈도 그랬었네. 선량한 노동자는 검찰수사따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왕조시대에도 잘 먹고 잘 살았는데 무슨 민주주의 하겠다고 혁명이다 뭐다 사회만 시끄럽게 하는가. 일제강점기에도 죽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괜히 독립하겠다고 했다가 전쟁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청년남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괜히 혼란을 더 키울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모두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일 테니 굳이 자기 이익까지 손해봐가며 청년세대를 위하는 것도 따라서 본능을 거스르는 잘못일 것이다. 결국 사회가 이미 이렇게 만들어져 있는 이상 청년남성들이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사회가 거기에 맞춰 바꾸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문장은 아마 안 긁힐 것이라는 건 사실 기저에 깔린 사고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있는 자를 더 추종하는 것이기도 할 테고. 이른바 2030남성들이 비정규직이나 저소득층, 혹은 노동자, 농민들에 대해 어떤 입장들을 보여왔는가 아마 알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재정을 쓰는 것은 낭비다. 그럴 능력과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돈을 몰아주어야 사회가 발전을 한다. 그래서 민주당이 당장의 경제상황을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 얼마간의 재정지원을 하는 것조차 그들은 매우 적대적이다.

 

아무튼 2030 남성들이 성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있으려니 굳이 다른 성별과 세대들이 그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까지 포기해가며 배려해주어야 할 이유따위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사실 전체로 놓고 보면 이리저리 쪼갰을 때 결국 모두는 다수에 비해 소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존의 질서에 대해 그를 거스르는 주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남성과 여성이라는 기존의 질서가 있으니 성소수자고 나발이고 그냥 그 안에서 선택하고 맞춰 살아라. 그러니까 늬들도 이미 있는 사회의 질서에 맞추고 살아라. 그런 점에서 김무성이 옳은 말을 했다. 그래서 지지하는 것일까?

 

그러고보면 2030 남성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려 해도 뭘 해 주어야 하는지 헷갈리기는 한다. 민주당이 2030 남성들을 외면하니 국민의힘을 지지한다. 그러니까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이 2030 남성들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해 주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2030 남성들이 실제 바라는 많은 것들을 실제 정책으로써 입법으로써 현실에 구현하고 있다는 것일 터다. 그래서 그게 뭘까? 뭘 얼마나 어떻게 해 주었기에 2030 남성들은 그렇게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것일까? 아, 페미만 싸고 돌지 않으면 다 용서되는 것일까? 그래서 2030 남성 가운데는 윤석열의 친위쿠데타에 우호적인 놈들이 그리 많은 모양이다. 2030 운운, 남성 운운, 여성 운운, 조금의 빌미만 있어도 자기들은 탄핵 찬성 안하겠다. 계엄에 참성하겠다. 윤석열과 국민의힘 지지로 돌아서겠다. 내내 들어온 협박이었다. 그래서 말했지. 늬들이 원래 그런 성향이라 그러는 것 뿐이다.

 

그래서 우스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보수가 아니라 말한다. 보수화된 것이 아니라 주장한다. 아직도 합리적인 중도라 말한다. 자기들이야 말로 가장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캐스팅보트라고. 특히 젊은 남성 가운데 중도층 여론은 걸러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말들을 듣고 있으려니 지난 대선 끝나고 화가 나서 일하던 젊은 직원들에게 이제 나도 법대로만 할 것이라 말한 어느 사장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게 답인 거겠지.

 

아, 안다. 저런 주장 하는 놈들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도 전광훈 같은 놈들이 전부는 아니다. 모든 개신교회가 내란에 동조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다수라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내란이 아닌 성소수자 문제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성향은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난 젊은 김무성을 보는 줄 알았다. 그런 것이 논리라. 그러니까 법원 창문까지 깨고 쳐들어간 놈들 가운데 2030 남성들이 그리 많았었겠지. 심지어 직장인도 있었다던데. 재미있다. 아무튼 나 또한 2030 남성들을 혐오해도 좋은 논리적 근거를 얻은 셈이라. 그들이 주장한대로 돌려주면 되겠다. 그게 본능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거스르려 하는 것이 문제고 잘못이다. 당연하게.

이번에 서부지법 담 넘어갔다가 구속 안되고 풀려난 어느 청년의 글이 꽤나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보는 순간 솔직히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쓴 글 같았다. 확실히 내가 평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들었던 내용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그래서 몇 번 인용해서 쓰기도 했을 것이다. 2030 남성들 생각하는 게 이렇더라. 아니나 다를까 내용이 잘 읽힌다며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떠올린다는 인간들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대개는 자칭 중립들이다. 역시나가 역시나랄까?

 

내가 어떻게 자유주의가 권위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 바 있을 것이다. 자유는 개인적인 것인데 어떻게 권위주의라고 하는 전체주의와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도 사실 온전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가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때 사회는, 혹은 개인은 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다수의 자유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억압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니 결국 모두는 자신의 자유가 침범받더라도 다른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현실에서 나타난 결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사회가 제도로써 일정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인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범을 인내하고 용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네가 알아서 참아라.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간단하다. 고대 아테네는 민주주의 사회였지만 제정 이전 로마는 공화주의 체제였었다. 공화는 합의하는 것이다.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여 결론을 도출하고 그에 따라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다만 민주주의와 다른 것은 그 과정에서 반드시 그 사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은 대부분 시민들과 상관없는 처음 로마를 구성했던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귀족정에 더 가까웠었으니까. 초기 영국의 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도 다르지 않았었다. 각 지역이나 신분, 계층에서 대표자를 선발하여 의회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그럴 가치가 있는 선별된 인원들만이 그 과정에 참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전보다는 시민이라 불리우는 자유민들의 참여가 확대되었기에 이를 민주적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토론과 협의의 과정을 거치고는 있었지만 아직 다수 시민, 나아가 국민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것들을 민주적이라 부르더라도 민주주의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얼마전 서부지검 담을 넘었다가 체포되었었다는 그 청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째서 그런 그의 글을 잘 읽힌다며 유시민까지 언급하는 인간들이 나오고 있는 것인지.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세대라는 것에 바로 답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따라서 남들보다 높은 수준에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생각한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그러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억압과 강제를 타파하고 그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자기와 같이 우수한 이들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생각한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체제다. 그런 체제란 어떤 것이겠는가? 그럴 수 있는 이들끼리 합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엘리트독재다. 그런데 정확히 독재가 아니다. 왜냐면 그같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대화와 토론이, 합의와 협의가, 존중과 복종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화주의다. 

 

사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칭 진보들, 이제는 2찍 진보가 된 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내용들이니. 그렇기 때문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대중을 협의와 판단의 과정에서 배제할 필요가 있다. 잘 알지도 못하 고 잘못된 판단만 내리는 대중을 계몽하여 이끌 의무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볼셰비키도 정작 자신들이 위한다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봉기를 철저히 탄압하고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독재를 실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부지법 담을 넘었다는 청년은 그 논리의 근거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테고. 자신이, 아니 자신과 같은 부류들이 더 자유롭기 위해서 그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하는 다른 대상을 이 사회로부터 거부하고 배제하고 오로지 그 자유에 동의하는 이들로써만 모든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권위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논리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절대 범해서는 안되는 금기마저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침범할 수 있는 절대의 민주주의다. 내가 그러고 싶으면 누가 뭐라든 그럴 수 있는 자유가 권력을 추구하고 그 권력에 기댄 권위주의를 긍정한다. 그 권위가 자신을 더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라는 것은 혐오하고 차별하고 부정하고 거부하고 배제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바로 최근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새롭게 정의로써 대두되고 있는 반PC주의가 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이 싫은데 왜 흑인을 자꾸만 자기에게 보여주는 것인가. 못생기고 뚱뚱한 것들은 그냥 꼴도 보기 싫은데 어째서 그런 것들이 자기가 보는 영화나 게임에 자꾸만 얼굴을 비추고 있는 것인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혹은 성전환자에 대해서도 자기는 그런 것들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싫은데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말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을 찾아서 볼 수 있는 자유가 자신들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사람을 써서 만든 것이 아니면 용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자유이므로 그로 인해 실제 피해를 입고 불쾌감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보편적 가치와 존엄을 훼손당한다 여기더라도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토론의 여지조차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해 실제 피해를 입고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될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서도 그들은 또다른 권력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정작 권위주위와 더 밀착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녹색정의당 당직자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선량한 노동자라면 검찰의 수사를 받을 일 따위 없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통용되었던 논리였다.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국가가 독재를 하든 뭐를 하든 그를 꺼리거나 두려워할 이유따위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제강점기에도 그저 오늘을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정작 자신들을 지배하는 것이 일본이든 조선이든 중국이든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군사독재를 뺀 두 가지는 실제 2찍 진보들의 주요 레파토리들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독재를 하든 뭐를 하든 그것이 자기와 방향이 일치하고 또 굳이 거스르려 하지 않는 한 거부하고 맞서려는 놈들이나 피해보는 것이지 자기들처럼 그저 자유롭고 싶은 분들에게는 전혀 아무 영향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은 그 권력을 존재케 한 든든한 기반이자 동지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주고 그 아래에서 자신들은 더 큰 자유를 누려보자. 바로 그 2030 남성들이 주장하는 자유가 과거 독재를 미화하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긍정하고 이제와서 독재로의 회귀까지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공감하게 되는 과정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확실히 재미있더라. 평소 그리 윤석열의 내란을 비판하던 인사들이 글이 너무 잘 읽힌다며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역시 그 또래들이구나. 그 세대들이구나.

 

결국은 공감의 문제인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문제인 것이다. 공동체라고 하는 인식의 부재가 원인일 것이다. 너와 내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놈들까지도 결국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그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극도로 개인화된 자유가 그렇게 공동체를 부정하고,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타자를 부정하고, 그를 배제할 수 있는 권력과 결합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실력주의라는 것도 모든 개인을 타자화 대상화 객관화하는 사고의 결과로 그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인지하지 맹목적 사고의 결과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싫은 놈은 싫은 것이고, 미운 놈은 미운 것이며, 배제해야 하는 놈들은 배제해야 하는 것이다. 뭐와 비슷한가면 초등학생 아이들이 또래의 아이를 왕따시키는 논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거기에 동의해주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같은 생각을 하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심지어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를 긍정해준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처럼 그리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 짧은 글에서 그런 그들의 사고가 읽히고 마는 것이다. 하긴 워낙 자주 들어 왔으니까. 윤석열이 내란을 시도하기 전까지 워낙 나를 그쪽 지지자로 아는 경우가 많아서 너무 쉽게 흔하게 자주 듣게 되었었다. 전혀 아무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자기 생각들을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 솔직한 속내를 많이 들어 알 수 있었다. 덕분에 2030 남성들이 썼다는 장르소설들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설정되고 전개될 수 있는 것이었구나. 그래서 그들이 과연 소수일 것인가? 하지만 정작 윤석열은 내란수괴라며 잡아서 처벌해야 주장하던 이들까지도 어느새 그 글을 퍼다 날라서는 공감한다며 유시민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까지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말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강점사회라고.

 

불관용에 관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를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인정하는 순간 그로 인해 공동체로부터 부정당하고 거부당하고 배제당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들까지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는 순간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안에서 히틀러라는 괴물이 독일 국민의 지지 아래 정권을 잡고 독재를 저지름으로써 실제 역사에서 입증된 사례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그같은 억압과 강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 터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위해서도,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 사회의 가치를 위해서도 절대 저들을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용이 있을 수 없다. 중도도 중립도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혐오와 차별과 부정과 배제와 거부를 인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흑인차별과 동등한 주체로서의 인정 사이에 타협점이란 존재하는가? 여성에 대한 존중과 여성에 대한 혐오 사이에 중립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성소수자의 인정과 존중에 대한 타협이란 곧 일정한 부정과 배제에 대한 용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무엇보다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래서 범죄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말하는 것일 터다. 인권을 존중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 존재할 때 그 대상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아무튼 의외로 나도 역시 쉽게 읽힌 편이었다. 쉽게 읽혔다기보다 읽는 내내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까지도 그래서 꽤나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평소에도 자주 듣던 논리고 주장들이었던 때문이다. 어째서 미국에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놈들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나아가 그들이 주장한 자유가 어떻게 트럼프라고 하는 또다른 권위주의의 괴물을 낳게 되었는가? 그런데 트럼프가 추구하는 가치란 것도 결국은 자유다. 일론 머스크가 추구하는 가치도 지극히 개인적인 최고의 자유였을 터다. 그런데 그런 일론 머스크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극우를 지지한다. 모순되지만 그러나 모순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복합성일 것이다. 사육신이 정작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라는 정변을 지지하고 나섰던 이유였을 것이다. 이를 하나의 잣대로 보려 할 때 오히려 모순은 깊어진다. 그냥 행동으로까지 드러내보인 놈들이 딱 저 정도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것이 저들의 이념인 것이다. 

남의 나라 와서 고생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아마 중용일 것이다. 그냥 아무데서나 가운데 있으라고 중용이 아니다. 중용의 중中은 중심을 뜻하는 중이다. 그러면 그 중심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안다는 뜻이다. 도덕적인 윤리적인 가치적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에 그것을 이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더 옳고 더 바르고 더 가치있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오롯한 의지와 지성을 이성이라 부르는 것이지 판단하지 않고 재고 따지고만 하는 주장과 논리를 이성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아니 나아가 사람은 원래 재고 따지기 전에 사안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하고 그를 감정으로 드러내면서 나중에 이성으로써 논리를 만들어 붙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가장 순수한 감정이 곧 이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예 판단이 없다? 그에 대해 어떤 가치도 정의도 상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먼저 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친위쿠데타를 기도하고 여전히 그 책임을 회피하며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에서 그를 막아내고 그에 대해 처벌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가운데 누가 잘하고 못했는가를 먼저 판단하고 더 못한 사람에게, 못한 것을 넘어 아예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부터 책임을 묻고 보는 것이 바로 올바른 이성일 것이고 제대로 된 시시비비일 것이다. 100을 잘못한 사람이 있고 99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어찌되었거나 1을 더 잘못한 사람이 있고 1을 더 잘한 사람이 있으니 더 잘했다고 상을 주지 못할지라도 더 못한 사람에게는 먼저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비로서 정의와 가치가 바로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조차 그나마 더 잘한 쪽의 책임부터 물으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하긴 문재인 때도 그랬었다. 문재인이 뭐라 말만 하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를 가져와서 못한다 욕하기 바빴었다. 문재인이 뭐라도 행동에 나서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고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못하는 국민의힘이나 윤석열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는가? 조국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드러난 혐의들만 보면 그냥 잡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유죄받은 죄목들 보더라도 과연 사회적으로 중대하다 여길만한 것이 얼마나 있던가. 그런데 그마저도 윤석열의 내란과 동급으로 놓으려 하면 그건 이미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혹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논란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논리들일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흑인이라면, 혹은 여성이라면, 혹은 성소수자라면 자기는 당연하게 지지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에서 벗어나 있으니 자신은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동들을 어쩔 수 없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런 주장을 펴는 당사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중도로 여기고 있겠지만 그런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대상화이자 차별이 되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안, 여성, 트랜스젠더가 아닌 자기 머릿속에 있는 일방적인 기준만을 정형화하여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사고와 논리들이 가능한가? 현실에 존재하는 그들을 인정할 수 없으니 자기만의 논리로써 그들을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따른다는 대표적인 예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고 그를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논리가 뒤에 따라붙는다.

 

그래서 민주당이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결과가 그보다 더 잘못하고 있는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이 더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고자 더 잘못하는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란도 잘못인데 이재명도 잘못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은 탄핵에 반대하고 국민의힘과 윤석열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낫다는 것은 그래도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이재명과 민주당에 비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일 테고, 그럼에도 오히려 더 혐오스러운 것은 더 잘못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을 이유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일 터다. 이른바 위선보다 악이 더 낫다는 것이다. 위선이 싫어서 차라리 악을 선택한다. 더 선하지 못한 것이 싫어서 차라리 악한 것을 지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민주당이 더 잘하면 지지할 수도 있으니 자신은 중도다. 민주당을 지지해 온 수 십 년 세월동안 수도 없이 보아온 자칭 중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못해서 자신은 보수를 지지한다. 언제나 같았다. 김대중부터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까지 언제나 자칭 중도가 보수를 지지하는 이유는 민주당의 완전하지 못함이었다. 그래서 보수정당이 더 완전했었는가? 그래서 그들의 중도는 중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전가의 보도를 꺼내드는 놈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민주당은 왜 더 잘하지 못했는가? 민주당은 왜 더 나아지지 못했는가? 민주당이 잘못한 것은 없는가? 민주당이 못한 것은 없는가? 그러니까 스스로 반성하라. 그래서 하는 말이라니까? 그 기준을 국민의힘과 윤석열에게도 한 번 적용해 보라. 아, 자칭 중도에 자칭 진보도 추가해야겠다. 민주당 못한다고 국민의힘 찾아가서 손잡고 지지하는 것이야 원래 2찍 진보들의 전매특허였으니. 민주당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서 정 반대편에 있는 정당과 손을 잡고 그마저 막아서는 것이 진보다. 그래서 자칭 진보였던 것이었고 이제 2찍 진보가 된 것이다. 역시나 달라진 것이 없는 여전한 한결같은 모습일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들이다. 명백한 사실이 있다. 명확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이 눈앞에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스스로 결론내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결론 뒤에 숨어서 그저 그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 더 현명하고 더 지혜롭고 도덕적으로나 가치적으로 더 올바른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극단적이지 않으므로 중도적이고 중용적이다. 황희가 진짜 많은 사람들 버려 놓았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상황에조차 그를 회피하는 놈들을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자기들은 그런 게 너무 잘났다.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윤석열의 가장 큰 공적일 것이다. 그런 말뿐인 중도와 중용을 세상에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아마 깨닫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기들이 중도라 중용이라 여겼던 이들이 사실은 또 하나의 극단이었다는 사실을. 실제로는 중도도 중용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던 터다. 자기 판단기준이 없는 놈은 항상 더 악한 쪽을 선택하게 된다. 오십 보 도망친 병사와 백 보를 도망친 병사가 같아지면 모든 병사는 백 보를 도망치게 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이유다. 여전한 놈들이란 것이다.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한심하고 끔찍하다. 추악한 쓰레기들이다.

원래 이게 자칭 보수의 본질이었었다. 아니 정확히 권력과 정치란 것의 원래 정체였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초의 정치는 상대를 힘으로 누르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을 경우 죽이거나 무리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힘을 권력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래서 역사상 정치와 관계된 사건들에서는 실제 전쟁과 비교될만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죽어나가곤 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권력과 정치에서도 도덕과 윤리를 찾아서 그를 정의로 추구하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싸우지 말고 서로 죽이지 말고 함께 공존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래서 정당이 만들어지고, 선거라고 하는 제도가 정착되고, 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존을 모색할 수 있도록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고, 권력이 절대 침범할 수 있는 개인의 인권 역시 보편적인 가치로써 인정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체 인류의 역사와 비교하면 그것은 아주 최근에서야 겨우 이루어진 어쩌면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낯선 경험일 것이었고, 더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 역사가 고작 40년도 채 안 되는 짧디짧은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게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전의 방식이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을 죽이고, 저항하는 사람을 힘으로 찍어눌러 억압하고, 나아가 그 쪽에 있는 당사자나 가족까지도 마음대로 폭행하고 강간하고 약탈할 수 있었던 시절이 오히려 정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봐야 고작 38년, 아직 장년도 되기 전의 일이었을 테니까.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젊은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그들로 위안소까지 꾸렸었던 이야기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참 신기하다. 어째서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이같은 여성인권 유린의 역사에 대해서는 항상 침묵하는 것일까?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도 이미 1970년대 이전부터 알려지고 있었지만 정작 이들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히려 민주화 이후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간신문에 연재된 어느 장군의 회고에서 공산당을 체포해서 자기 부하들과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쓰고 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고, 여성은 강간당하고 위안소에서 강제로 군인들의 정액받이가 되어야 했으며, 그들의 재산 역시 그들을 죽이고 강간한 이들의 것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그들이 보기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겠는가 말이다. 당장 광주에서 사람을 죽이고,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선 대학생들을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던 당사자들도 이제야 겨우 60대가 될까 한 시기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증오스러운 빨갱이 새끼들을 죽이지도 못하고 용인해야만 한다.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러니까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 때 자기 자식 며느리와 통화하면서 반대하는 새끼들 다 때려죽여야 한다 목소리 높이는 노인들이 그리 많았었던 것이었다. 그게 바로 자기 자식, 며느리, 혹은 사위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래야 속시원하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빨갱이라고 차별하고 멸시하고 혐오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자신이나 자식, 그리고 재산까지 빼앗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사고가 여성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매개로 청년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미 지난 대선 정국에서도 2030 남성들 다수는 그리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단 문재인과 이재명부터 죽이고 민주당 페미정치인들 30명 정도 잡아넣은 다음 페미가 아닌 정치인들로만 다시 민주당을 만들어서 윤석열의 국민의힘과 경쟁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 문재인과 이재명을 죽여야 하는가면 그들은 나쁜 정치인이니까. 페미의 두목이고 페미정당의 두목이고 언론과 정치인들이 나쁘다 말하고 있으니까. 페미를 몰아낼 수 있으면 친위쿠데타도 나쁘지 않다. 독재도 나쁘지 않다. 나라를 팔아도 나쁘지 않다. 대신 페미만 때려잡을 수 있으면 된다. 나아가 페미란 너무나 혐오스러운 중국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단순히 여성만 싫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중국을 경계하여 거부하는 것이므로 자신들의 행동은 또한 애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순수한 일부가 이번에 행동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정치란 불편한 것이다. 답답하고 비효율적인 그저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의 정치란 자신들을 제대로 보아주지 않는 그들만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를 부정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전제로 하는 협의의 원리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옳은데. 당장 이것만이 정의인데. 그러므로 다른 것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정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옳은 방향 하나만을 위해 그냥 나아가면 되는데 왜 저리 한심스러울 정도로 돌아가려고만 하는가? 괜히 히틀러가 당시 독일 청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힘의 정의를 추앙하는 순수한 젊은이들일수록 더욱 그같은 파시즘에 경도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도 꽤나 많았었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힘으로 밀어붙이고 찍어누르는 것도 정의를 위한 당연한 행동일 수 있는 것이다. 

 

전에도 말한 민주주의의 강점에 대한 반민주주의, 즉 권위주의를 추구하는 기존의 보수가 반발하는 이른바 반동의 현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강제당했기에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민주주의 이전의 보다 효율적이고 강력했던 통쾌하고 후련했던 시절의 정치로 돌아가려 한다. 싫은 놈들은 찍어 누르고, 미운 놈들은 때려 죽이고, 그리고 하고 싶으면 강간도 하고 약탈도 하고 어느 놈 병신 만들어도 빨갱이라면 용서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었다. 담배 피운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여성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외국차를 탄다고 멀쩡한 여성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자신을 강간한 남성과 결혼하도록 주선한 것을 판사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도 폭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원래 자신들이 하던 것이었으니.

 

저들이 이번에 서부지법에서 휘두르던 폭력은 그동안 노동자들이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을 무자비하게 최루탄과 물대포와 진압봉으로 때려잡던 그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다 죽는다고 어쩔 수 없이 데모따위 모르고 살다가 거리로 나왔던 힘없는 아줌마 아저씨들을 몰아서 피투성이로 만들고 감옥에 보냈던 바로 그것의 재현인 것이다. 재개발예정지에서 철거에 저항하는 주민들이 있으면 경찰이 보고 있는 앞에서 깡패들이 노인과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둘러 쫓아내고 있기도 했었다. 그때도 반항하면 그때는 경찰이 깡패들을 도와서 그들을 전과자로 만들었었다. 학교에서는 말 안 듣는다고 학생들을 때리고, 직장에서도 상사가 시키는대로 않는다고 마음대로 징계하고 해고하고, 혹은 그를 미끼로 개인의 인신에 대한 위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런데도 그런 모든 행동들을 과거에는 정부가 가진 권력이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호하고 권장하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불가능해진 것 같으니 자기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동안에는 경찰이, 정부가, 정부가 인정한 깡패들이, 정부와 법원의 용인 아래에서 그런 일들이 합법적으로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안 될 것 같으니 자기들이 직접 그것들을 행동으로 보여주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즉 마침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바로 그것일 테니.

 

경찰마저도, 법원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는 저들의 저같은 당당함은 바로 그같은 기억에 근거한 너무나 당연한 정의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신들은 언제나 그런 위치에 있었고 그러므로 경찰도 법원도 자신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광주에서 사람을 죽여보고, 거리에서 대학생들을 때려보고, 철거현장에서 철거민들을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때려잡아 보았던 이들에게는 그만큼 당연한 행동이었을 테니. 임산부를 폭행해서 유산시켜도, 젊은 여성을 그 과정에서 추행하고 강간했어도, 그로 인해 평생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경찰과 법원은 자신들의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그러니 느끼게 되는 배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상식이 더이상 상식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더 과격해질 수밖에. 경찰과 법원마저도 자신들이 바로잡아야 한다.

 

극우 유튜버들만의 문제인가? 그러면 그들의 논리는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누가 그들의 주장을 현실에서 정당화, 합리화시켜주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써주며 부추겼던 일단 제도권 언론들이 있었다.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그들이 떠드는 소리들을 그대로 옮겨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지받는다 착각하게 만든 놈들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혹은 옆에서 그들을 부추기고 이끌었던 정치인들도 있었다. 등을 떠민 것이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주류라 여겨지는 종교였을 터였다. 그 종교가 좋아하는 삼위일체일 터였다. 그러면 그들이 원래 지향했던 바는 무엇인가? 한국 진보의 정체가, 나아가 여성주의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와 연대하고 있었는가?

 

그렇게 아직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반동이 강하게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만을 이번 기회에 더욱 확실하게 인지하고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윤석열의 최대 업적이다. 그동안 억누르며 숨어왔던 그들이 모두 표면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그들의 실체를 드러냈다.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제 저들의 실체를 오해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거기서 시작이다. 1987년 이미 끝났다 여겨진 싸움이 이렇게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나 다시 반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역사는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이제부터란 이야기다. 아직 끝나기에는 먼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오래전 어느 중국의 현자는 벼슬을 권하는 왕의 제안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귀를 씻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현자는 그 상류로 소를 몰고 가서 물을 먹였다고 한다. 벼슬을 권하는 말 자체가 그만큼 더러운 것이고 그러므로 그를 거부하는 것이 현명하고 덕망있는 행동이라 여기던 당시의 사고를 보여주는 이야기일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무래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권력이란 자신을 억압하는 강제적인 힘인 만큼 당연하게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우리만 그런가면 다른 나라들도 다르지 않다. 권력을 탐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며 그 권력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은 부덕한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와 멀어질수록, 권력과 거리를 둘수록 그는 청렴하고 도덕적이며 덕망과 인품을 갖춘 말 그대로 훌륭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 권력을 쫓아서 정치에 몸을 담으려는 이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혐오와 경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도 꽤나 흔하다. 문제는 그럼에도 권력이란 인간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구조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권력은 근본 중의 근본이라 할 정도로 필수적인 요소일 것이다. 권력도 권위도 없는 동아리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누가 뭘 결정하든 아무도 따르지 않고, 그에 대해 누구도 강제하거나 제재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 모임은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일정 이상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는 모임이라면 최소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내규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누가 그 모임의 행사를 주도하고, 그에 대해 어떤 강제력과 제재가 이루어지며, 그러므로 그 모임에서 계속 활동하기 위해서 자신은 어디까지 자신을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나 하고 싶은대로 다 하면서 그냥 모임에 이름만 걸어두겠다는 것이면 절대 그 모임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 사람만 쫓겨나거나 아니면 모임 자체가 와해되어 사라지거나. 그런데 하물며 국가단위다. 수 백만, 수 천만, 심지어 억 단위가 넘어가는 사람들이 모여 이룬 거대단위인 것이다. 권력 없이 그런 것이 유지되고 관리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간은 정치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가 권력을 가지고, 누가 무리를 주도하고, 그러므로 누구를 쫓아서 어떤 명령과 지시 아래에서 행동하는 것이 집단을 위해 이익이 될 것인가. 가장 연장자에게 권력이 아닌 권위를 쥐어주게 된 것도, 가장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는 전사에게 권력을 안겨준 것도,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에게 권력의 자리를 내어 준 것도 그런 결과였다. 그런데 그런 권력과 그를 위한 정치를 부정하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이들이 권력을 멀리하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를 하지 않게 되면 그 사회는 올바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바로 윤석열이라는 괴물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유일 것이다. 아니 이전에도 이미 히틀러라고 최악의 괴물이 최선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전에도 썼지만 벌써 1990년대부터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치와 무관한 초인을 한결같이 바라오고 있었다. 김대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그리 좋지 못했던 이유도 그가 너무 대통령 자리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권모술수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위해 때로 야합하고 때로 협잡을 부리며 때로 배신을 저지르기도 하고 때로 대중의 기대를 벗어난 독단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어서도 처음으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열악한 상황에서도 많은 일들을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신념만으로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자신의 실력으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던 이명박과 박근혜 또한 그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는 있어도 자신이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일들을 대부분 실제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역시나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무현과 문재인은 어떤가?

 

지지자들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치인답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인답지 않게 순수하고 정치인답지 않게 선량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세력도 가지지 못했고, 불리한 상황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의도한 바를 이룰 수 있는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사실 이미 이때 깨달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정치인에게 정치란 곧 기술이고 능력이다. 정치를 할 수 있어야 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약속한 것들을 실제 현실로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이 바란 것은 그보다도 더 정치와 거리가 있는, 전혀 정치따위 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대화도 없고, 타협도 없고, 조율도 없고, 상대에 대한 인정과 공존과 용납 또한 존재하지 않는 그런 막무가내를 우직함이라며 좋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 법이 너무 엄하면 법을 피하려 속이는 이들만 더 늘어날 뿐이다. 너무 도덕적이어서, 너무 정의감이 넘쳐서, 그래서 조금의 더러움도 인정하지 않는다. 조금의 못나고 서툰 것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오십보 백보가 된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자신의 기대감에 비추어 조국의 오십보는 처벌받아야 하고 곽상도와 나경원의 백보 천보는 괜찮은 것이 된다. 아예 정치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정하다 여기는 경우 그냥 정치적으로 흘러나오는 메시지에 쉽게 오염되기도 한다. 나는 정치를 모르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메시지를 너무나 손쉽게 믿고서 그에 휘둘리고 만다. 그럼에도 자신은 정치따위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떤 책임도 없다. 오히려 정치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는 당신들이 정치병자고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기들은 정치와 무관하기에 당적도 없고,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도 지지하지 않고, 사안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당과 정치인 개인의 차이에도 무지하고, 그 차이로 인한 실제 예상되는 결과에 대해서도 판단지 못한다. 그러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일인가?

 

내가 지금도 사방에 넘쳐나는 자칭 중도들을 보면서 오히려 태극기를 볼 때마다 더 큰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자기들은 너무나 깨끗하고 현명하기 때문에 정치같은 더러운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서 모두가 똑같다고 양비론이나 펼치는 놈들을 보면 경멸을 넘어 환멸의 감정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모두 그래서인 것이다. 그놈들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 지금도 친위쿠데타를 시도한 윤석열과 그를 막아내고 처벌까지 하려는 민주당을 같은 선상에 놓고 그저 정치싸움을 뿐이라 폄하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면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와 상식과 도덕의 기준이 무엇인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조금만 더러워도 다 더러운 것이면 결국 더 더러운 쪽이 승리하고 만다. 그동안 보수정당이 권력을 유지해 온 비결이었다. 자기들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민주당의 작은 잘못만 내보이면 다 똑같다고 그냥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런 일을 보수 언론은 물론 진보적이라는 지식인과 언론과 정치인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찌되었는가?

 

정치는 물론 더러운 것이다.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서고자 하는 행위가 그저 선한 의도만 가지고 가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저 선한 의도와 선한 행위만으로 오로지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회란 최소한 인간이 인간인 이상 현실에 있을 수 없는 모르는 이들의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환상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불필요한가? 권력은 필요없는 것인가? 그런데도 더럽다고 외면하면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선이고 정의고 도덕이고 윤리일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엄정하게 그 정도를 구분해서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오십 보와 백 보가 같다고 싸잡기보다 그 사이에서도 차등을 두고 차별을 두는 것이 곧 시비를 나누는 것이다. 그래도 그 가운데 누가 더 옳고 누가 덜 나쁘다. 그런데 그런 판단의 기준이 될 만한 자신만의 규준을 대부분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게 또한 무지고 어리석음인 것이다. 그냥 이놈도 저놈도 나쁘니 다 나쁘다. 그러면 자기만 오로지 옳고 바르고 깨끗한 것 같지만 그냥 뇌가 깨끗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모두를 위해 누가 더 나은 선택일 것인가?

 

정의를 위한 고민을 강요라 말한다. 도덕과 윤리를 위한 공감과 공유를 강제라 이야기한다. 그냥 다 똑같은 놈들이니 다 싫어하겠다. 다 거부하겠다. 여전한 그들의 태도가 바로 윤석열을 만든 것이다. 하긴 그런 놈들이 그토록 빨아대던 문국현이나 안철수도 사실 비슷한 수준이기는 했었다. 안철수도 지금 와서나 조금 정치인다워진 것이지 국민의힘 시절까지만 해도 뭐 이런 놈이 다 있는가 싶은 수준이었었다. 그래도 정치력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부족했어도 노무현이나 문재인이 끼친 해악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 이 또한 차별을 두어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무엇이며 공동체를 위해 자신들은 어디까지 알고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괜히 역사상 많은 민주주의에 대한 시도들이 실패로 끝났던 것이 아니란 것이다. 미국도 그 길을 밟아 가고 있는 중이다. 유럽도 지금 많이 위험하다. 누구 때문이라고? 바로 그런 놈들 때문이다. 혼자서만 옳은 자들. 자기 혼자서만 깨끗하면 좋은 병신들. 가장 쓰레기들이다. 2찍 진보가 세상에 가장 해악이 되는 놈들이라는 이유다. 그 새끼들은 뒈져도 존중할 가치가 없다. 그 비슷한 길을 걷는 놈들이 있다. 끔찍한 것들이다.

2007년에도 비호감도 조사가 있었는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시 민주당 예비 대선후보 가운데 정동영이 아마 전국민적인 비호감도 자체는 가장 낮았을 것이란 점이다. 심지어 같은 민주당 지지지들로부터도 비호감도가 아마 가장 낮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이해찬과 유시민은 그야말로 욕받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어차피 이명박이 이기는 선거이기는 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처참무인지경이었던데다가, 심지어 당 지지율 낮다고 대통령 내쫓고는 아예 열린우리당 해체하고 민주당과 합당하는 병신짓까지 저지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자기들은 실패한 정당이다. 실패한 정권이고 실패한 정치인들이다. 아예 그러고 스스로가 인정하고 들어갔는데 누가 그런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겠는가? 그럼에도 그동안 민주당이 선거 때마다 얻어 왔던 최소한의 득표조차 못하고 처참하게 박살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그동안 민주당 후보에 표를 주던 이들 가운데 다수가 아예 투표장에를 가지 않았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이낙연은 당연하게 보수 유권자들로부터도 비토가 가장 적었던 당대표였다. 그리고 박영선 역시 비호감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서울시장 후보였었다. 문제는 그토록 중도층과 보수층이 좋아 죽으려 했던 이낙연의 민주당 아래에서 정작 민주당 지지자들이 제대로 결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차피 질 선거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욱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가지 않았던 결과 민주당의 전통적인 표밭에서까지 참패하는 결과를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원래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동네에서 참패한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원래 지지자들이 돌아섰거나, 아니면 아예 투표 자체를 포기했거나. 비슷한 결과가 2022년 지선에서도 나왔었다. 비호감도 높은 이재명이 뒤로 빠지고, 기존의 지도부가 물러난 상태에서 그 좋아하는 중도적인 인사들이 주도한 선거였었다. 그토록 민주당에서 다양성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는 그놈들이 당권 잡고서 치른 선거의 결과는 또 어떠했을까?

 

김대중도 김대중만은 안된다는 유권자가 최소 과반은 넘었었다. 노무현 때도 노무현은 안된다는 유권자가 역시 최소 과반에 육박하고 있었다. 문재인도 2012년과 2017년 대선 초반 낮은 지지율로 꽤나 고생을 해야 했었다. 문재인의 경우는 비호감이 적은 대신 지지율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2012년에는 어지간히 정치고관여층이 아닌 이상 문재인이라는 인물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을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된다. 그럼에도 지지자들이 그들을 위해 투표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었다. 2찍 진보들이 그리 문재인을 싫어하는 이유다.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문재인을 위해서 그동안의 교차투표까지 포기하고 민주당에 그야말로 몰표를 주었었다. 당시까지는 아직 유시민이 정의당 당적을 가지고 있어서 민주당과 정의당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을 때였다. 2002년 대선에서도 정몽준의 지지철회가 오히려 지지층을 결집케 하면서 막판 집중투표로 아슬아슬한 신승을 가능케 했었다.

 

2022년 이재명이 선거에서 진 이유도 그래서 명확하다. 정작 민주당 지지층 내부에서 비토가 심했었다. 아예 이재명만은 안된다며 상대정당 후보를 지지하는 놈들이 최소 수 만은 나왔었다. 이놈들만 아니었어도 질 선거까지는 아니었었다. 다만 너무도 다행하게도 그놈들 나가고 나서 오히려 민주당 지지율이 오르면서 이제는 그 빈자리를 거의 채우고 있는 상태다. 뭔 말인가? 더이상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민주당 후보는 안된다는 당원이나 지지자, 혹은 정치인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민주당 정치인이 자기당 후보의 선거운동은 하지 않고 손 놓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당원과 지지자들 모아서 상대당 지지하고 나서는 꼬라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똥파리들 자신을 제외하더라도 그놈들의 난장으로 인해 등돌린 중도층까지 포함하면 이건 분명 이득이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은 유권자들로부터 비토를 덜 받는, 비호감도가 낮은 정치인이 아니다. 아니 정치인 자신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도와 정치적인 지지도 비례하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다. 사람은 참 좋은데, 평소 하는 말이나 내놓는 정책들은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지지하기는 아직 많이 부족하거나 애매하다. 정치적인 지지라는 것이 반드시 상대에 대한 호감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고관여층이 보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은, 정치인은 물론 인간으로서도 흠결이 많은 것 같은 인사들이 연이어 선거에서 당선되는 경우도 보이고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으로서 한 지역구를 대표한다는 것은, 지자체장으로서 하나의 지역을 책임진다는 것은, 나아가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맡긴다는 것은 인간적인 호감 그 이상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 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층의 존재다. 반드시 그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지지자들의 강한 결집이 실제 그들의 지지가 투표로 이어지게 만들고 중도층도 끌어오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오히려 싫어하는 정치인이라도 다수의 유권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강하게 지지하고 있으면 그리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2022년 대선이 끝나고 그 결과에 당황한 유권자들이 많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려 10% 이상 계속해서 이기고 있다고 여론조사가 나오고 있었는데 정작 결과는 0.7%라는, 자기만 다른 선택을 했어도 뒤집힐 수 있었던 수준이었다. 그래서 당시 여론조사가 선거에 악용되고 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었다.

 

이미 4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라는 것이다. 더구나 그 40%의 지지자 가운데 거의 절대다수가 지지하고 있는 당대표이기도 하다. 그런 이재명을 낙마시킨다고 민주당 지지층이 그를 중심으로 다시 뭉칠 수 있을 것인가?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대선후보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데 과연 중도층은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저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김동연은 정치인으로서 이준석 만큼도 급이 안 되는 인물이다. 중앙정치에 한 번도 나서 본 적 없는 주변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인물의 급을 따졌을 때도 과연 민주당에서 그를 대신할 만한... 아, 있구나. 추미애. 음, 추미애가 있었다. 국민의힘 곡소리 나는 이름일 것이다. 사실 이 정도 말고는 없다. 그래서 이재명이 비호감도 높다고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아야 할 이유가 민주당이나 지지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어차피 정치를 한다는 것은 비호감도를 쌓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모든 이들로부터 칭찬받는 이는 절대 선한 사람일 수 없고, 진정 선한 사람이라면 악한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마련이다. 정치를 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선명하게 드러낼수록, 자신의 가치나 지향을 분명하게 보여줄수록, 그가 정치인으로서 보이는 행보에 따라 호불호는 갈리고, 당연히 모두가 하나의 정책에 동의할 수 없는 이상 그로 인한 비호감도는 쌓여가게 마련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이나 법안은 잊더라도 자기에게 불이익을 준 정책이나 법안은 절대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들이 말년에 가면 지지율이 급락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동안 해 온 일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이다. 더구나 한국 사람들은 원래 정치라는 자체를 혐오한다. 정치인이 정치하는 자체를 혐오하는 경우가 중도층일수록 오히려 더 많다. 그래서 정치인이 아니었던 안철수나 윤석열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이재명만이 아닌 다른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호감도와 비호감도를 비교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그래서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들 가운데 이재명보다 비호감도가 낮은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있기는 할 것인가?

 

의미없다는 것이다. 이재명에 대한 비토가 존재하므로 이재명은 안된다. 그러면 그 대안은? 이준석은 무려 비호감도가 80%넘어가는 전국구 후보다. 지지자들이야 이정도로 비호감도가 높은 것도 능력이라며 좋아하며 지지하겠지만 그 비호감도는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유승민은 어떨까? 홍준표는? 요즘 국민의힘의 유력 대선주자로 손꼽히고 있는 김문수에 대한 비호감도는 어떨까? 그리고 당장 그리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재명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 만큼은 이재명에게 표를 주어야겠다. 이재명을 대통령에 당선시켜야겠다. 2심 결과와 상관없이 이재명에게 표를 주어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겠다. 그게 실제 유권자들의 투표심리란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엄중한 만큼 판단 역시 개인의 호불호와 별개로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이 바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재명 아니면 누구를 지지하려고? 원래 이낙연이면 좋겠다던 놈들이 바라는 수준으로 민주당 지지자들이 맞춰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싫으면 김문수 찍던가. 하긴 그러려고 그리 떠들어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김동연이 주의해서 지켜봐야 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삐끗 여론조사 결과를 오독하면 김두관 꼬라지 나고 만다. 자기가 민주당에서 비주류인 것을 인정하고 조금 더 인내하면서 기회를 노려봐야 한다. 진정으로 대통령까지 바라보고 있다면 비주류로써 어떻게 민주당 주류 지지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기회를 보며 고민해 봐야 한다. 나는 나쁘지 않다 생각한다. 경제관료로써 아주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민주당의 성향에 자신을 맞출 수 있다면 또 하나의 대안으로서 충분히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재명 이후가 불확실한 지금이라면 더 그렇다. 하여튼 별 병신같은 소리들 때문에 다시 이런 긴 글을 쓰고야 말았다. 비호감도 따지면 역대 민주당 후보 가운데 김대중이 최고였겠지. 다음이 노무현. 그러고보니 평가도 비례하는 것 같다. 어차피 민주당은 지지하지도 않는 놈들의 그냥 헛소리들이다. 가치도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