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 와서 고생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아마 중용일 것이다. 그냥 아무데서나 가운데 있으라고 중용이 아니다. 중용의 중中은 중심을 뜻하는 중이다. 그러면 그 중심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사안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줄 안다는 뜻이다. 도덕적인 윤리적인 가치적인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기에 그것을 이성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더 옳고 더 바르고 더 가치있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오롯한 의지와 지성을 이성이라 부르는 것이지 판단하지 않고 재고 따지고만 하는 주장과 논리를 이성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아니 나아가 사람은 원래 재고 따지기 전에 사안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하고 그를 감정으로 드러내면서 나중에 이성으로써 논리를 만들어 붙이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가장 순수한 감정이 곧 이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예 판단이 없다? 그에 대해 어떤 가치도 정의도 상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먼저 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친위쿠데타를 기도하고 여전히 그 책임을 회피하며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에서 그를 막아내고 그에 대해 처벌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그 가운데 누가 잘하고 못했는가를 먼저 판단하고 더 못한 사람에게, 못한 것을 넘어 아예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부터 책임을 묻고 보는 것이 바로 올바른 이성일 것이고 제대로 된 시시비비일 것이다. 100을 잘못한 사람이 있고 99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어찌되었거나 1을 더 잘못한 사람이 있고 1을 더 잘한 사람이 있으니 더 잘했다고 상을 주지 못할지라도 더 못한 사람에게는 먼저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비로서 정의와 가치가 바로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조차 그나마 더 잘한 쪽의 책임부터 물으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하긴 문재인 때도 그랬었다. 문재인이 뭐라 말만 하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를 가져와서 못한다 욕하기 바빴었다. 문재인이 뭐라도 행동에 나서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고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못하는 국민의힘이나 윤석열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는가? 조국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드러난 혐의들만 보면 그냥 잡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유죄받은 죄목들 보더라도 과연 사회적으로 중대하다 여길만한 것이 얼마나 있던가. 그런데 그마저도 윤석열의 내란과 동급으로 놓으려 하면 그건 이미 가치판단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혹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논란에서도 흔히 등장하는 논리들일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흑인이라면, 혹은 여성이라면, 혹은 성소수자라면 자기는 당연하게 지지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에서 벗어나 있으니 자신은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동들을 어쩔 수 없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아마 그런 주장을 펴는 당사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중도로 여기고 있겠지만 그런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대상화이자 차별이 되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안, 여성, 트랜스젠더가 아닌 자기 머릿속에 있는 일방적인 기준만을 정형화하여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사고와 논리들이 가능한가? 현실에 존재하는 그들을 인정할 수 없으니 자기만의 논리로써 그들을 부정하고 거부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따른다는 대표적인 예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고 그를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논리가 뒤에 따라붙는다.

 

그래서 민주당이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결과가 그보다 더 잘못하고 있는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이 더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비판하고자 더 잘못하는 국민의힘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란도 잘못인데 이재명도 잘못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은 탄핵에 반대하고 국민의힘과 윤석열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낫다는 것은 그래도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이재명과 민주당에 비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일 테고, 그럼에도 오히려 더 혐오스러운 것은 더 잘못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더 잘하지 못하는 것을 이유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일 터다. 이른바 위선보다 악이 더 낫다는 것이다. 위선이 싫어서 차라리 악을 선택한다. 더 선하지 못한 것이 싫어서 차라리 악한 것을 지지하려 한다. 그러면서도 민주당이 더 잘하면 지지할 수도 있으니 자신은 중도다. 민주당을 지지해 온 수 십 년 세월동안 수도 없이 보아온 자칭 중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못해서 자신은 보수를 지지한다. 언제나 같았다. 김대중부터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까지 언제나 자칭 중도가 보수를 지지하는 이유는 민주당의 완전하지 못함이었다. 그래서 보수정당이 더 완전했었는가? 그래서 그들의 중도는 중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도저히 지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나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전가의 보도를 꺼내드는 놈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민주당은 왜 더 잘하지 못했는가? 민주당은 왜 더 나아지지 못했는가? 민주당이 잘못한 것은 없는가? 민주당이 못한 것은 없는가? 그러니까 스스로 반성하라. 그래서 하는 말이라니까? 그 기준을 국민의힘과 윤석열에게도 한 번 적용해 보라. 아, 자칭 중도에 자칭 진보도 추가해야겠다. 민주당 못한다고 국민의힘 찾아가서 손잡고 지지하는 것이야 원래 2찍 진보들의 전매특허였으니. 민주당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서 정 반대편에 있는 정당과 손을 잡고 그마저 막아서는 것이 진보다. 그래서 자칭 진보였던 것이었고 이제 2찍 진보가 된 것이다. 역시나 달라진 것이 없는 여전한 한결같은 모습일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들이다. 명백한 사실이 있다. 명확하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이 눈앞에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 스스로 결론내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과 결론 뒤에 숨어서 그저 그에 대해 비판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남들보다 우월하다, 더 현명하고 더 지혜롭고 도덕적으로나 가치적으로 더 올바른 근거가 되기도 한다.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극단적이지 않으므로 중도적이고 중용적이다. 황희가 진짜 많은 사람들 버려 놓았다.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상황에조차 그를 회피하는 놈들을 과연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자기들은 그런 게 너무 잘났다.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윤석열의 가장 큰 공적일 것이다. 그런 말뿐인 중도와 중용을 세상에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아마 깨닫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자기들이 중도라 중용이라 여겼던 이들이 사실은 또 하나의 극단이었다는 사실을. 실제로는 중도도 중용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던 터다. 자기 판단기준이 없는 놈은 항상 더 악한 쪽을 선택하게 된다. 오십 보 도망친 병사와 백 보를 도망친 병사가 같아지면 모든 병사는 백 보를 도망치게 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되는 이유다. 여전한 놈들이란 것이다.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한심하고 끔찍하다. 추악한 쓰레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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