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게 자칭 보수의 본질이었었다. 아니 정확히 권력과 정치란 것의 원래 정체였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최초의 정치는 상대를 힘으로 누르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을 경우 죽이거나 무리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힘을 권력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래서 역사상 정치와 관계된 사건들에서는 실제 전쟁과 비교될만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죽어나가곤 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그러한 권력과 정치에서도 도덕과 윤리를 찾아서 그를 정의로 추구하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것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싸우지 말고 서로 죽이지 말고 함께 공존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보자. 그래서 정당이 만들어지고, 선거라고 하는 제도가 정착되고, 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존을 모색할 수 있도록 표현과 집회의 자유가 보장되고, 권력이 절대 침범할 수 있는 개인의 인권 역시 보편적인 가치로써 인정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전체 인류의 역사와 비교하면 그것은 아주 최근에서야 겨우 이루어진 어쩌면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낯선 경험일 것이었고, 더구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 역사가 고작 40년도 채 안 되는 짧디짧은 역사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게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전의 방식이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을 죽이고, 저항하는 사람을 힘으로 찍어눌러 억압하고, 나아가 그 쪽에 있는 당사자나 가족까지도 마음대로 폭행하고 강간하고 약탈할 수 있었던 시절이 오히려 정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봐야 고작 38년, 아직 장년도 되기 전의 일이었을 테니까.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젊은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그들로 위안소까지 꾸렸었던 이야기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참 신기하다. 어째서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이같은 여성인권 유린의 역사에 대해서는 항상 침묵하는 것일까?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도 이미 1970년대 이전부터 알려지고 있었지만 정작 이들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오히려 민주화 이후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간신문에 연재된 어느 장군의 회고에서 공산당을 체포해서 자기 부하들과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쓰고 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고, 여성은 강간당하고 위안소에서 강제로 군인들의 정액받이가 되어야 했으며, 그들의 재산 역시 그들을 죽이고 강간한 이들의 것으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그들이 보기에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겠는가 말이다. 당장 광주에서 사람을 죽이고,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선 대학생들을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던 당사자들도 이제야 겨우 60대가 될까 한 시기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증오스러운 빨갱이 새끼들을 죽이지도 못하고 용인해야만 한다.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러니까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 때 자기 자식 며느리와 통화하면서 반대하는 새끼들 다 때려죽여야 한다 목소리 높이는 노인들이 그리 많았었던 것이었다. 그게 바로 자기 자식, 며느리, 혹은 사위가 될 수 있었음에도. 그래야 속시원하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빨갱이라고 차별하고 멸시하고 혐오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자신이나 자식, 그리고 재산까지 빼앗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사고가 여성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매개로 청년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미 지난 대선 정국에서도 2030 남성들 다수는 그리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단 문재인과 이재명부터 죽이고 민주당 페미정치인들 30명 정도 잡아넣은 다음 페미가 아닌 정치인들로만 다시 민주당을 만들어서 윤석열의 국민의힘과 경쟁하게 만들어야 한다. 왜 문재인과 이재명을 죽여야 하는가면 그들은 나쁜 정치인이니까. 페미의 두목이고 페미정당의 두목이고 언론과 정치인들이 나쁘다 말하고 있으니까. 페미를 몰아낼 수 있으면 친위쿠데타도 나쁘지 않다. 독재도 나쁘지 않다. 나라를 팔아도 나쁘지 않다. 대신 페미만 때려잡을 수 있으면 된다. 나아가 페미란 너무나 혐오스러운 중국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단순히 여성만 싫은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중국을 경계하여 거부하는 것이므로 자신들의 행동은 또한 애국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순수한 일부가 이번에 행동에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정치란 불편한 것이다. 답답하고 비효율적인 그저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의 정치란 자신들을 제대로 보아주지 않는 그들만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를 부정한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전제로 하는 협의의 원리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옳은데. 당장 이것만이 정의인데. 그러므로 다른 것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정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옳은 방향 하나만을 위해 그냥 나아가면 되는데 왜 저리 한심스러울 정도로 돌아가려고만 하는가? 괜히 히틀러가 당시 독일 청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힘의 정의를 추앙하는 순수한 젊은이들일수록 더욱 그같은 파시즘에 경도되는 경우가 역사적으로도 꽤나 많았었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를 위해서는 힘으로 밀어붙이고 찍어누르는 것도 정의를 위한 당연한 행동일 수 있는 것이다. 

 

전에도 말한 민주주의의 강점에 대한 반민주주의, 즉 권위주의를 추구하는 기존의 보수가 반발하는 이른바 반동의 현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강제당했기에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민주주의 이전의 보다 효율적이고 강력했던 통쾌하고 후련했던 시절의 정치로 돌아가려 한다. 싫은 놈들은 찍어 누르고, 미운 놈들은 때려 죽이고, 그리고 하고 싶으면 강간도 하고 약탈도 하고 어느 놈 병신 만들어도 빨갱이라면 용서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었다. 담배 피운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여성의 따귀를 올려붙이고, 외국차를 탄다고 멀쩡한 여성의 머리채를 쥐어잡고, 자신을 강간한 남성과 결혼하도록 주선한 것을 판사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도 폭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원래 자신들이 하던 것이었으니.

 

저들이 이번에 서부지법에서 휘두르던 폭력은 그동안 노동자들이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것을 무자비하게 최루탄과 물대포와 진압봉으로 때려잡던 그 연장에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다 죽는다고 어쩔 수 없이 데모따위 모르고 살다가 거리로 나왔던 힘없는 아줌마 아저씨들을 몰아서 피투성이로 만들고 감옥에 보냈던 바로 그것의 재현인 것이다. 재개발예정지에서 철거에 저항하는 주민들이 있으면 경찰이 보고 있는 앞에서 깡패들이 노인과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폭력을 휘둘러 쫓아내고 있기도 했었다. 그때도 반항하면 그때는 경찰이 깡패들을 도와서 그들을 전과자로 만들었었다. 학교에서는 말 안 듣는다고 학생들을 때리고, 직장에서도 상사가 시키는대로 않는다고 마음대로 징계하고 해고하고, 혹은 그를 미끼로 개인의 인신에 대한 위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그런데도 그런 모든 행동들을 과거에는 정부가 가진 권력이 인정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호하고 권장하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들이 불가능해진 것 같으니 자기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동안에는 경찰이, 정부가, 정부가 인정한 깡패들이, 정부와 법원의 용인 아래에서 그런 일들이 합법적으로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안 될 것 같으니 자기들이 직접 그것들을 행동으로 보여주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즉 마침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바로 그것일 테니.

 

경찰마저도, 법원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는 저들의 저같은 당당함은 바로 그같은 기억에 근거한 너무나 당연한 정의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신들은 언제나 그런 위치에 있었고 그러므로 경찰도 법원도 자신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광주에서 사람을 죽여보고, 거리에서 대학생들을 때려보고, 철거현장에서 철거민들을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때려잡아 보았던 이들에게는 그만큼 당연한 행동이었을 테니. 임산부를 폭행해서 유산시켜도, 젊은 여성을 그 과정에서 추행하고 강간했어도, 그로 인해 평생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경찰과 법원은 자신들의 뒤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그러니 느끼게 되는 배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상식이 더이상 상식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더 과격해질 수밖에. 경찰과 법원마저도 자신들이 바로잡아야 한다.

 

극우 유튜버들만의 문제인가? 그러면 그들의 논리는 어디서 비롯되었겠는가? 누가 그들의 주장을 현실에서 정당화, 합리화시켜주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써주며 부추겼던 일단 제도권 언론들이 있었다. 가치판단을 배제한 채 그들이 떠드는 소리들을 그대로 옮겨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지지받는다 착각하게 만든 놈들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혹은 옆에서 그들을 부추기고 이끌었던 정치인들도 있었다. 등을 떠민 것이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주류라 여겨지는 종교였을 터였다. 그 종교가 좋아하는 삼위일체일 터였다. 그러면 그들이 원래 지향했던 바는 무엇인가? 한국 진보의 정체가, 나아가 여성주의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와 연대하고 있었는가?

 

그렇게 아직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반동이 강하게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만을 이번 기회에 더욱 확실하게 인지하고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윤석열의 최대 업적이다. 그동안 억누르며 숨어왔던 그들이 모두 표면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그들의 실체를 드러냈다. 다행스럽기도 하다. 이제 저들의 실체를 오해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거기서 시작이다. 1987년 이미 끝났다 여겨진 싸움이 이렇게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나 다시 반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역사는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이제부터란 이야기다. 아직 끝나기에는 먼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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