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서부지법 담 넘어갔다가 구속 안되고 풀려난 어느 청년의 글이 꽤나 화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보는 순간 솔직히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쓴 글 같았다. 확실히 내가 평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들었던 내용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그래서 몇 번 인용해서 쓰기도 했을 것이다. 2030 남성들 생각하는 게 이렇더라. 아니나 다를까 내용이 잘 읽힌다며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떠올린다는 인간들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대개는 자칭 중립들이다. 역시나가 역시나랄까?

 

내가 어떻게 자유주의가 권위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 바 있을 것이다. 자유는 개인적인 것인데 어떻게 권위주의라고 하는 전체주의와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도 사실 온전히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다. 개인의 자유가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때 사회는, 혹은 개인은 그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다수의 자유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정부분 억압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니 결국 모두는 자신의 자유가 침범받더라도 다른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현실에서 나타난 결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사회가 제도로써 일정하게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인이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범을 인내하고 용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네가 알아서 참아라.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간단하다. 고대 아테네는 민주주의 사회였지만 제정 이전 로마는 공화주의 체제였었다. 공화는 합의하는 것이다.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여 결론을 도출하고 그에 따라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다만 민주주의와 다른 것은 그 과정에서 반드시 그 사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은 대부분 시민들과 상관없는 처음 로마를 구성했던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귀족정에 더 가까웠었으니까. 초기 영국의 의회나 프랑스의 삼부회도 다르지 않았었다. 각 지역이나 신분, 계층에서 대표자를 선발하여 의회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과정에 대부분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그럴 가치가 있는 선별된 인원들만이 그 과정에 참가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전보다는 시민이라 불리우는 자유민들의 참여가 확대되었기에 이를 민주적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적인 토론과 협의의 과정을 거치고는 있었지만 아직 다수 시민, 나아가 국민들이 그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것들을 민주적이라 부르더라도 민주주의라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얼마전 서부지검 담을 넘었다가 체포되었었다는 그 청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고, 어째서 그런 그의 글을 잘 읽힌다며 유시민까지 언급하는 인간들이 나오고 있는 것인지. 단군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세대라는 것에 바로 답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만큼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따라서 남들보다 높은 수준에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생각한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는 것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그러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강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억압과 강제를 타파하고 그럴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자기와 같이 우수한 이들이 마음대로 자유롭게 생각한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체제다. 그런 체제란 어떤 것이겠는가? 그럴 수 있는 이들끼리 합의해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엘리트독재다. 그런데 정확히 독재가 아니다. 왜냐면 그같은 엘리트들 사이에서 대화와 토론이, 합의와 협의가, 존중과 복종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화주의다. 

 

사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칭 진보들, 이제는 2찍 진보가 된 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내용들이니. 그렇기 때문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대중을 협의와 판단의 과정에서 배제할 필요가 있다. 잘 알지도 못하 고 잘못된 판단만 내리는 대중을 계몽하여 이끌 의무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볼셰비키도 정작 자신들이 위한다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봉기를 철저히 탄압하고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독재를 실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부지법 담을 넘었다는 청년은 그 논리의 근거로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 테고. 자신이, 아니 자신과 같은 부류들이 더 자유롭기 위해서 그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하는 다른 대상을 이 사회로부터 거부하고 배제하고 오로지 그 자유에 동의하는 이들로써만 모든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권위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논리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절대 범해서는 안되는 금기마저도 자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든지 침범할 수 있는 절대의 민주주의다. 내가 그러고 싶으면 누가 뭐라든 그럴 수 있는 자유가 권력을 추구하고 그 권력에 기댄 권위주의를 긍정한다. 그 권위가 자신을 더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라는 것은 혐오하고 차별하고 부정하고 거부하고 배제할 수 있는 자유일 것이다. 바로 최근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새롭게 정의로써 대두되고 있는 반PC주의가 그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이 싫은데 왜 흑인을 자꾸만 자기에게 보여주는 것인가. 못생기고 뚱뚱한 것들은 그냥 꼴도 보기 싫은데 어째서 그런 것들이 자기가 보는 영화나 게임에 자꾸만 얼굴을 비추고 있는 것인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혹은 성전환자에 대해서도 자기는 그런 것들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기 싫은데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말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을 찾아서 볼 수 있는 자유가 자신들에게는 있다는 것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사람을 써서 만든 것이 아니면 용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자유이므로 그로 인해 실제 피해를 입고 불쾌감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보편적 가치와 존엄을 훼손당한다 여기더라도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토론의 여지조차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로 인해 실제 피해를 입고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될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서도 그들은 또다른 권력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자유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정작 권위주위와 더 밀착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녹색정의당 당직자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선량한 노동자라면 검찰의 수사를 받을 일 따위 없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통용되었던 논리였다.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국가가 독재를 하든 뭐를 하든 그를 꺼리거나 두려워할 이유따위 없는 것이었다. 나아가 일제강점기에도 그저 오늘을 열심히 일해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정작 자신들을 지배하는 것이 일본이든 조선이든 중국이든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군사독재를 뺀 두 가지는 실제 2찍 진보들의 주요 레파토리들이기도 했었다. 어차피 독재를 하든 뭐를 하든 그것이 자기와 방향이 일치하고 또 굳이 거스르려 하지 않는 한 거부하고 맞서려는 놈들이나 피해보는 것이지 자기들처럼 그저 자유롭고 싶은 분들에게는 전혀 아무 영향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은 그 권력을 존재케 한 든든한 기반이자 동지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주고 그 아래에서 자신들은 더 큰 자유를 누려보자. 바로 그 2030 남성들이 주장하는 자유가 과거 독재를 미화하고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긍정하고 이제와서 독재로의 회귀까지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공감하게 되는 과정이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확실히 재미있더라. 평소 그리 윤석열의 내란을 비판하던 인사들이 글이 너무 잘 읽힌다며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역시 그 또래들이구나. 그 세대들이구나.

 

결국은 공감의 문제인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인정과 존중의 문제인 것이다. 공동체라고 하는 인식의 부재가 원인일 것이다. 너와 내가,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놈들까지도 결국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그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극도로 개인화된 자유가 그렇게 공동체를 부정하고,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타자를 부정하고, 그를 배제할 수 있는 권력과 결합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실력주의라는 것도 모든 개인을 타자화 대상화 객관화하는 사고의 결과로 그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인지하지 맹목적 사고의 결과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싫은 놈은 싫은 것이고, 미운 놈은 미운 것이며, 배제해야 하는 놈들은 배제해야 하는 것이다. 뭐와 비슷한가면 초등학생 아이들이 또래의 아이를 왕따시키는 논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거기에 동의해주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다. 같은 생각을 하는 놈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심지어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를 긍정해준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처럼 그리 몰리게 되는 것이다.

 

그 짧은 글에서 그런 그들의 사고가 읽히고 마는 것이다. 하긴 워낙 자주 들어 왔으니까. 윤석열이 내란을 시도하기 전까지 워낙 나를 그쪽 지지자로 아는 경우가 많아서 너무 쉽게 흔하게 자주 듣게 되었었다. 전혀 아무 거리낌없이 솔직하게 자기 생각들을 이야기하는데 그래도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여주니 그 솔직한 속내를 많이 들어 알 수 있었다. 덕분에 2030 남성들이 썼다는 장르소설들에 대해서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설정되고 전개될 수 있는 것이었구나. 그래서 그들이 과연 소수일 것인가? 하지만 정작 윤석열은 내란수괴라며 잡아서 처벌해야 주장하던 이들까지도 어느새 그 글을 퍼다 날라서는 공감한다며 유시민까지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까지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말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강점사회라고.

 

불관용에 관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혐오와 차별과 배제를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인정하는 순간 그로 인해 공동체로부터 부정당하고 거부당하고 배제당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들까지도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는 순간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될 수도 있다. 이미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 안에서 히틀러라는 괴물이 독일 국민의 지지 아래 정권을 잡고 독재를 저지름으로써 실제 역사에서 입증된 사례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그같은 억압과 강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 터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위해서도,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 사회의 가치를 위해서도 절대 저들을 용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중용이 있을 수 없다. 중도도 중립도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를 지킬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혐오와 차별과 부정과 배제와 거부를 인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흑인차별과 동등한 주체로서의 인정 사이에 타협점이란 존재하는가? 여성에 대한 존중과 여성에 대한 혐오 사이에 중립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성소수자의 인정과 존중에 대한 타협이란 곧 일정한 부정과 배제에 대한 용인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란 무엇보다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래서 범죄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말하는 것일 터다. 인권을 존중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 존재할 때 그 대상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아무튼 의외로 나도 역시 쉽게 읽힌 편이었다. 쉽게 읽혔다기보다 읽는 내내 떠오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까지도 그래서 꽤나 선명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만큼 평소에도 자주 듣던 논리고 주장들이었던 때문이다. 어째서 미국에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놈들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지지하게 되었는가. 나아가 그들이 주장한 자유가 어떻게 트럼프라고 하는 또다른 권위주의의 괴물을 낳게 되었는가? 그런데 트럼프가 추구하는 가치란 것도 결국은 자유다. 일론 머스크가 추구하는 가치도 지극히 개인적인 최고의 자유였을 터다. 그런데 그런 일론 머스크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극우를 지지한다. 모순되지만 그러나 모순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복합성일 것이다. 사육신이 정작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라는 정변을 지지하고 나섰던 이유였을 것이다. 이를 하나의 잣대로 보려 할 때 오히려 모순은 깊어진다. 그냥 행동으로까지 드러내보인 놈들이 딱 저 정도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것이 저들의 이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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