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루소를 비롯해 이후 혁명의 근거가 되는 많은 주장과 논리들에 대해 귀족들 또한 꽤나 해박했으며 그를 주제로 토론을 즐기기도 했었다. 아니 이후 혁명의 주체가 되는 많은 사상가와 이론가들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인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를 적대하던 궁정귀족들이 프랑스 국민들을 대상으로 그를 음해하는 수단으로 프랑스의 언론과 지식인들을 이용한 것도 그 한 예일 터였다. 한 편으로 자신감이기도 했다. 어차피 그놈들이 공고한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의 지배를 뒤집을 수 있을 리 없으니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자.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귀족사회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아직 봉건귀족들이 기사이기도 하던 시절에야 얼마나 자신이 기사로써 뛰어난가만 보여주면 되었었다. 그래서 샤를 5세가 왕 주제에 마상시합에 참가했다가 뒈지기도 했던 것이었다. 내가 기사로서 얼마나 용맹하고 무예도 뛰어나고 거침없고 단호한가. 그런데 화약무기가 일반화되면서 더이상 기사의 존재는 그 의미를 잃었고 중앙집권의 강화로 인해 귀족들은 파리의 궁정에서 사치나 즐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 안에서 귀족들은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역시나 그 유행을 선도한 것도 파리의 왕실이었다.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하고, 창작에도 직접 관여하는 한편, 지적이고 학술적인 부분에도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권력이 가지는 고상함과 우아함을 과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면서 유럽의 예술과 학술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귀족들의 그같은 허영과 사치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근대 유럽의 지적, 예술적 산물들은 어쩌면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괴테도 가장 큰 후원자는 항상 귀족이었다.

 

그래서 교양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었다. 교양이란 말 그대로 사교를 위한 양식이다. 품위있는 존재들끼리 서로 교류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적 양식인 것이다. 최소한 유명한 작가의 그림이나 음악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를 주제로 풍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으면서, 최근 유행하는 디자인의 패션을 갖춘 채로, 그래도 남들 모르는 고상하고 격식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쯤은 알고 있으면서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어야 그래도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는 갖췄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어느새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한 부르주아들 때문에라도 그들은 더욱 귀족다움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었다. 이는 정확히 조선시대 양반들에게도 적용된다. 영국의 젠트리나 독일의 융커 등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 지배층들 역시 이후 이를 자신들의 신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우리가 이 정도는 되니까 다른 노동자나 농민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른바 PC주의자라 불리는 이들이, 혹은 싸가지 없는 진보라 부르는 서구사회의 엘리트들이 정작 그 PC를 주제로 하는 토론에는 터무니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오래전 꽤나 지적으로 첨단을 걷는 한국 진보주의자들과 논쟁을 하면서도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흔히 PC주의자들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달리 이놈들은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전혀 설득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냥 무시한다. 한창 현실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시작하려는데 느닷없이 최근 어디의 누가 쓴 논문이라든가, 어느 학회에서 발표한 이론들에 대해 아느냐 묻고 시작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게 뭐냐 물으면 그런 것도 모르냐는 경멸섞인 대답만 돌아오는데 꽤나 황당하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 그게 너와 나의 차이이고 그러므로 더이상 토론하는 의미가 없다. 이는 한국 여성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그런 것도 모르면 말을 섞을 가치가 없다. 그러니 그냥 따르라.

 

그래서 싸가지없는 진보라 부르는 것이다. 서로를 대등한 존재로 여길 때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이해시키 설득하려 한다면 당연하게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는 바를 충실하게 전하려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가르치려 한다면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이놈들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고 상대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즐긴다. 내가 상대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만을 누린다. 그래서 강요하고 강제한다는 말 또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해도 설득도 없이 그대로 따르라고 하는 일방적인 요구만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과거 힐러리 클린턴을 둘러싸고 있던 여성주의자들의 태도가 그러했다. 어째서 힐러리를 지지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여성이니까 당연하게 힐러리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종속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고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무시하고 면박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아마 여기까지 썼으면 우리사회에서도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전 여성주의자들과 논쟁할 때 굳이 이해하려 할 필요 없다는 말까지 들었었으니. 당신같은 사람을 이해시킬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말하는 걸 들으면서 이 새끼들과는 같이 못 가겠구나 새삼 실감했더랬다.

 

그래서 이른바 PC주의자들이 조던피터슨같은 얼치기들과도 제대로 토론이 안되는 한심한 수준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토론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같은 주장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만 만족해서 그것을 자기들끼리만 교류하고 공유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는 것이 당연히 당연하다. 그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들은 지적으로 열등한 것이고 그럴 주제도 능력도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에는 믿음만 있을 뿐 논리가 없다. 종교와 같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보통의 평범한 대중들에게 전파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또한 없다. PC주의자들이 만드는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 등 작품들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받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째서 인어공주가 흑인이어야 하느냐고. 어째서 백설공주가 히스패닉인 것인가? 여기서 또 그들의 오만한 차별주의가 드러나는데 흑인도 얼마든지 매력적일 수 있다. 여기서 매력적이라는 뜻은 그냥 얼굴 예쁘고 몸매 잘 빠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게 흑인으로서 혹은 히스패닉으로서 배우들이 가지는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기 위한 노력에 소홀한다. 그러니까 흑인인 인어공주와 히스패닉인 백설공주를 관객들은 그냥 받아들이라.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게임에서 주인공이 게이라는 이유로 주위로부터 배척당하고 외면당하면서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험난한 과정들이 제대로 그려졌다면 과연 성소수자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만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들은 필요없다. 옳은 건 그냥 옳은 거니까. 받아들이지 못하는 놈들이 병신이다.

 

물론 수용자들 역시 어느 정도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다. 음악이 그렇고 미술이 그러하듯 수용자인 대중 역시 보다 고차원적인 요소들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분명 있다. 하지만 모든 수용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면 그런 이들을 위한 노력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지나치게 친절해서 항상 비판받아 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 또한 창작자에게 필요한 노력일 것이다. 하지만 않는다. 왜? 자신들은 지적으로 우월할 테니까. 오히려 그를 이해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들을 통해 지적인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역시 대중은 어리석고 자신은 우월하다. 그러고보면 오래전 진보주의자와 토론할 때도 어리석은 대중의 하나이고자 한다는 말을 모욕하는 뜻으로 쓰기도 했었다.

 

확실히 이렇게 써 놓고 나니 어째서 한국 진보가 망했는가 하는 것이 한 눈에 보이게 된다. 내가 한국에서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들에 대해 아주 오래전부터 혐오해 온 이유일 것이다. 여성주의자들과는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PC주의는 가르치려 한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가르치려 한다면 그래도 나름대로 배려와 친절을 베풀기도 할 것이다. 아니니까 문제인 것이다. 어째서 여성이어야 하는가? 어째서 흑인이고 히스패닉이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왜 트럼프가 아닌 해리스여야 하는가? 한국에서는 지금 오히려 보수가 더 오만한 터다. 어째서 보수여야 하는가? 싸가지없는 보수라는 말이 없는 것이 그래서 꽤나 얄궂게도 느껴진다. 그렇다는 것이다. 교양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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