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을 진보라 부르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다. 일단 첫째는 진보란 곧 좌파이며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이니 민주당을 빨갱이로 몰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에 있는 새끼들이 상상을 뛰어넘는 개새끼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에 썼었던 이념보수와 현상보수 가운데 그나마 합리적인 전자에 대해 후자가 좌파 빨갱이라 욕하는 것과 같다. 비슷한 예로 꽤나 이름있는 유튜버 가운데 하나가 오바마같은 극단적인 인사들을 싫어하는데 트럼프는 합리적이라 말하며 자신은 중립이라 말한 것과 비슷한 결이라 할 수 있다. 오바마가 좌파면 유럽 진보정당들은 인간계를 벗어난 존재들인 것일까?

 

한국 진보의 계보는 조봉암이 이승만에 의해 사법살인당한 순간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조봉암이 당시 민주당으로부터 갈라져나와 진보당을 만든 것부터 그놈들이 원래 지주출신들로 오히려 자유당보다 더한 한국사회의 기득권들인 이유가 가장 컸었다. 그래서 이승만이 대놓고 조봉암을 죽이려 할 때도 당시 민주당 인사들은 그를 말리려 하기보다 오히려 적극 동조하고 있었고, 조봉암이 죽고 그를 따라서 모였던 진보당 인사들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간 뒤에는 결국 그들 역시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러면 어째서 이후로도 장면이나 윤보선, 유진산 같은 이들이 이끌던, 그리고 이후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중심이 되었던 민주당이 진보로 불리게 되었는가? 말한 그대로다. 민주당을 빨갱이로 몰려는 목적이 하나, 자유당 이후 공화당과 민정당에 이은 민자당까지 하나같이 독재권력을 위해 봉사하던 하수인들이었다는 이유가 또 하나다. 말하자면 정치적인 이유로 덧씌워진 이미지라는 것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아니 김대중이 대통령에 출마하고 당선된 이후에도 주위의 어른들을 보면 그를 두고 공산주의자 빨갱이라 부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전두환의 독재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조차 김영삼은 그래도 인정하는데 김대중에 이르러서는 좌파에 간첩이라고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었다. 이유는 독재정권을 긍정하는 이들에게 있어 김대중이란 자칫 박정희의 집권을 막아냈을지 모를 위협적인 인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지주와 토호들로 이루어진 당시 민주당의 정체성에서 한참 벗어난 근본없는 출신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신분도 낮고 없이 살면 당연하게 공산주의를 추종하게 된다. 막연한 믿은 같은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은 독재정권은 물론 제도권 야당에서도 김대중을 공격하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었다. 김대중은 빨갱이다. 그래서 과연 김대중은 공산주의자거나 사회주의자였었는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펼친 정책들을 보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김대중이 기득권 권위주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왔었기에 좌파고 빨갱이다. 

 

더구나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다는 것은 더불어 권위주의 정권이 부정하는 민주주의와 천부인권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도 함께 싸워야 함을 의미했었다.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무시당하고 부정당하던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서도 그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야 했고 그런 행동들까지 빨갱이로 몰리는 또 하나 이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을 위해 손을 내밀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는 자체가 곧 공산주의고 사회주의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을 위해 그들의 권리를 함께 주장하며 싸우고자 하는 모든 행동이 좌파고 빨갱이인 것이었다. 즉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와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리들을 대놓고 부정하는 놈들이 기득권으로서 보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근대사회라면 당연히 지켜져야 할 그것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진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천부인권과 시민으로서의 권리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민주당이 극단적인 집단으로 여겨지는 또 하나 이유가 되고 있을 것이다.

 

가난한 놈들은 가난한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한다. 노동자와 농민은, 어촌과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은 역시 자기들의 주제에 맞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 감히 서울에서도 잘사는 강남의 주민들과 동등하게 대학에 들어가려 해서도 안되고 취업의 기회를 누리려 해서도 안된다. 더 값싼 전기를 위해서 원자력발전소는 당연히 지방에 지어져야 하는 것이고, 서울을 향해 송전로를 까는데 감히 저항하는 놈들이 있어서도 안된다. 더 오랜 시간 더 가혹하게 일하도록 해서 도태되는 놈들도 당연히 내버리고 가는 것이 옳다. 더 적은 최저임금으로도 더 오랜 시간을 일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테니 그것이 공정이다. 의외로 지금 젊은 세대들이 당연하게 여러 커뮤니티들에서 떠드는 소리들이다. 그깟 일을 하면서 돈을 더 받으려 해서도 안되고, 더 나은 처우를 기대해서도 안되며, 감히 고용을 보장받으려 해서도 안된다. 인터넷에서 흔히 보게 되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공정과 상식을 추구하는 이들의 주장들일 터다. 이런 주장들이 중립이 되고 상식이 되는 사회에서는 따라서 당연하게 민주당은 좌파가, 그것도 급진적인 진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흔히 민주당을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는 주장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들 기준에서 민주당은 꽤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그러한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주장들은 과연 옳은가.

 

19세기 통일독일제국의 재상이던 비스마르크가 적극적으로 사회보장정책들을 도입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나라로 존재했다가 하나의 나라로 뭉치게 된 독일과 독일국민들을 빠르게 단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까지도 빠르게 독일이라는 이름 아래 뭉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독일이라는 나라를 직접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가난한 이들도, 소외된 이들도, 사회적인 약자와 소수자들 역시 결국 이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면 자신들을 이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좌파여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거나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사회의 단합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배려는 필수적일 수 있다. 괜히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백성들을 위해서 혜민서를 만들고 환곡을 내놓은 것이 아니란 뜻이다. 국민이란 국가란 이름 아래에서 모두가 동등해져야 한다. 대등해지고 평등해져야 한다. 그리고 진보는 여기서 국가라고 하는 권위마저도 지운 채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권리로써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 김대중이 당선되고 민주당이 집권한 이후 펼친 정책들을 보더라도 그런 것이 아주 대놓고 두드러지고 있었다. 사실상 당시 서방세계에서 유행하던 신자유주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들마저 그러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기에 좌파고 빨갱이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민주당이 좌파에 빨갱이로 매도당하다 보니 한국 정치지형에서 보수와의 사이를 가리키는 중도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되고 말았다. 말한 그대로 국가라고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누려야만 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평등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천부인권을 부정하고 배척하는 논리들마저 어쩌다보니 중립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사회가 보수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끌려가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민주당이 근대국가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들에 대해 주장하고 행동으로 추진할 때마다 민주당을 급진적인 진보라 여기는 인식으로 인해 중립은 더욱 오른쪽으로 더 치우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흐르면 사회는 보다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지금 젊은 세대들에서 이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과거의 권위주의를 답습하려는 듯한 주장들이 중립의 이름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도를 끝내야겠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이 내란을 획책하고 보수를 참칭하던 세력들이 그를 옹호하고 있는 현재는 민주당에게 좋은 기회일 수 있는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정치적인 필요와 목적에 의해 덧씌워진 진보라는, 정확히 좌파에 빨갱이라고 하는 이미지를 민주당으로부터 걷어내자. 민주당의 원래 정체성을 제대로 찾아서 바로 자리를 잡았을 때 현재의 왜곡된 정치지형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이 중도를 지향했을 때 과거 보수정당은 더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고, 아니 정확히 원래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고 왼쪽으로도 더욱 넓게 진보가 들어설 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이재명이 이제와서 굳이 민주당이 중도보수라고 새롭게 천명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발언일 터다. 김대중 때부터 이미 민주당은 언제나 보수일변도였고, 그들이 내세운 모든 법안이나 정책들이 그러한 보수의 가치에 입각한 것들이었으니까. 단지 당시 한나라당과 새누리당과 국민의힘들이 보수를 참칭했기에 떠밀리듯 진보가 되었을 뿐.

 

그래서 더 웃긴다는 것이 민주당이 중도보수라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했다고 반발하는 놈들 가운데 정작 실제 법안이나 정책으로 진보적인 무언가를 실천하거나 추구한 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인영? 박지현?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지금 민주당에서 당원들에 의해 떠밀려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원리 보수정당과 더 가까웠던, 오히려 민주당 안에서도 보수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여성주의자라고 모두 진보가 아닌 것이다. 여성주의 가운데도 권위주의적인 여성주의는 오히려 보수에 더 가깝다. 대우를 받아야 하는 자격이 있는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주의는 이미 조선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부인을 우대하고 존중하는 문화는 이미 중세에서부터 있어 왔었다. 다만 그것이 보편적인 자연인으로서의 여성이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여성주의는 여성인 노동자와 약자, 소수자들을 존중하는 여성주의인가. 지들이 언제부터 진보였다고 진보운운인가?

 

오히려 지금 중도보수를 자처하는 민주당이야 말로 김대중 이래로 가장 진보에 가까워진 민주당일 것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일 때도 정작 열린우리당은 노무현보다 더 오른쪽에서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의 개혁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낙연의 민주당 역시 문재인보다 더 오른 쪽에서 문재인 정부를 국민의힘 쪽으로 끌어오고 있었다. 김한길의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상 새누리당의 2중대나 다름없었으니. 그래서 이재명이 더 모두의 증오와 경멸과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그렇다고 이재명마저 진보라고 하기에는 원래 기본소득이란 복지에 나라가 돈과 인력을 쓰기 싫으니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보수의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재명이 가장 자랑하는 정책 중 하나인 지역화폐 또한 철저히 자본주의의 가치에 충실한 케인즈주의적인 정책이었을 터다. 그래서 과연 이재명의 정책 가운데 진짜 진보라 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 것인가.

 

트럼프를 합리적인 중도라 말하며 오바마를 급진좌파라 주장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당연하게 지금 민주당도 진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인 미국 민주당조차 스스로를 진보라 말하기보다 자유주의 정당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리버럴은 진보가 아니다. 리버럴은 말 그대로 자유주의다. 19세기 막 귀족중심의 봉건적인 질서에서 벗어난 부르주아의 이념에서 이어진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PC도 사실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마저도 진보가 된다면 보수란 과연 어떠한 가치일 것인가? 한국 2030 젊은 남성들이 주장하는 중립과 합리가 그 답이 되어 줄 것이다. 그래서 이재명의 선언은 필요했던 것이었다.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가? 이제야 겨우 출발점에 섰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진정 추구하고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란 무엇인가? 실제 보수의 시작을 의미할 것이다. 참 어려운 과정이었다.

진보도 마찬가지겠지만 보수라고 하는 것은 크게 이념보수와 현상보수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념보수란 말 그대로 보수라고 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시장주의라거나 자유주의라거나 국가주의라거나 혹은 민족주의와 같은 자신의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바를 궁리하고 탐구해서 오롯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현상보수라는 것은 자신이 실제 경험하고 체험한 현실의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부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자가 정작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어린 것들이 감히!'라고 한다면 바로 그가 현상보수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념적으로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그에 따른 공동체의 단합을 부르짖으면서도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인종이나 성별, 연령과 상관없이 어떤 파격에 대해서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현상진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현실에서 가장 존경받는 부류일 것이다. 항상 공동체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스스로 권위와 위엄을 보이면서도 정작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는 격의없고 관대하다. 그에 반해 전자를 흔히 위선자라거나 혹은 진보꼰대라 부르며 비웃기도 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공동체를 위한 가치와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신념 정도일 텐데, 문제는 이것이 항상 그렇게 딱 나뉘어 작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과 집단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모순이기도 하다. 내가 좋으면 모두에게 좋은 것이고 나에게 옳으면 모두에게 옳은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 좋으면 개인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고 공동체를 위해서 옳다면 개인에게도 옳은 것이다. 후자의 경우가 바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PC주의일 것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물론 다양성과 관용과 이해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행동양식마저 그에 맞춰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반대는 무엇인가? 지금 세계가 트럼프를 위험하다 여기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바로 나치즘이다. 파시즘이다.

 

파시즘의 논리는 다른 것 없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로 인해 안정되어 있던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금 이전의 안정된 사회로 돌아가자. 그동안 아무일없이 다들 잘 살고 있었는데 저놈들로 인해 온통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사는 것도 힘들어졌으니 저런 놈들 모두 몰아내고 우리들끼리 이전처럼 잘 살아보자. 그래서 히틀러부터 시작해서 파시스트들은 언제나 가장 영광스러웠던 어느 시점을 이상화하여 그를 미래에 추구해야 할 가치처럼 떠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화된 과거는 또한 지금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과 이어져 있기에 당연히 대중을 설득하기에 좋았다. 예전에는 좋았었는데 지금은 왜 이 모양인가? 한때 유럽을 호령하던 열강 독일제국이 어째서 지금은 패전국이 되어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에 시달리며 승전국들의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인가? 

 

한국 보수지지자 가운데 다수가 실제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의 보수정당이란 과거의 고도성장기를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또한 지금의 암울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더 나았던 시절의 이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보수정당이 얼마나 더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더 잘하고 못하고도 중요하지 않다. 현실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현재가 중요한 것처럼 그 이상적인 시절을 현재로 옮겨온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의 정의이고 가치이고 신념이고 윤리다. 그리고 그것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로 확장한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제도와 체제마저 그에 맞춰야 한다.

 

한국 보수주의자 가운데 상당히 극단에 치우쳤다 여겨지는 조갑제나 정규재 등의 지식인들이 현재 가수를 이루고 있는 보수지지자들과 전혀 결이 다른 발언을 들려주고 있는 진짜 이유일 것이다. 보수로써 당연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시장주의를 추구한다면 마땅히 윤석열의 친위쿠데타를 용인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반헌법적인 계엄에 이은 민주주의의 유린과 현정질서의 파괴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려잡아야 하고 사회주의자들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 그 자체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인정해서 안된다. 그것이 보수주의라는 이념이다. 반면 다수 보수주의자들은 보수정당과 그 정당의 대통령이 그러겠다고 하니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지지자들이 당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을 따라다닌다. 정규재의 평가는 옳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의 보수라는 것은 이념이 아닌 어떤 현실의 현상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더 가깝다.

 

사실 이 글은 원래 조던 피터슨의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이론과 논리들에 대해 비판해 볼 의도로 구상한 것이었다. 어째서 전혀 보수주의자같지 않은 그가 실제로는 보수주의자인 것인가. 보수주의적인, 더구나 극우라고 할 만한 어떤 이념이나 주장도 직접 추구하고 있지 않음에도 결과적으로 극우적인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전형적으로 자신이 믿는 현상에 근거와 논리를 끼워맞추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지금껏 살아왔던, 그래서 진정으로 믿고 있는 현실의 특정 현상에 대해 그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모든 논리들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가 근거들을 짜깁기해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논리의 퀼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럴싸한데 정작 전체를 보면 뭔가 허전하다. 뿌리가 없다. 그래서 나오는 논리가 원래 그랬다. 그 지지자들이 하는 말도 원래 그랬었다. 그래서 현상보수다. 이념적으로 치밀하게 궁리하고 탐구해서 추구하는 이념이 아닌 그냥 현상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트럼프라고 하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가장 영광스러웠던 시절의 미국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정작 트럼프가 지금 하는 일들은 과거의 가장 영광되었던 미국과 한참 거리가 있는 것들이다. 근거가 부실하니 실제 행동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결국 젊은 다수 남성들이 입으로는 국민의힘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행동은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이유일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이 잘못해서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 때문이라 주장하기도 하는데 절대 아니다. 그들 자신도 국민의힘이 더 잘못하는 것을 안다. 더 못하는 것도 알고 더 나쁘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위선보다 악이 낫다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위선적이지만 국민의힘은 솔직하게 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국민의힘을 지지하기 위한 논리로써 양비론을 펼친다. 방향과 정도를 무시한 채 둘 다 잘못했으니 똑같다 말하고 결국 페미니즘을 이유로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트럼프가 뭘 잘못하는, 국민의힘이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르든 결국 문재인과 민주당도 똑같다. 똑같이 않더라도 그마저 위선에 의해 나온 것들이다. 민주당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민주당이 아닌 다른 정당을 지지할 이유를 만들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더 한심한 것이기도 하다. 지지하면 그냥 지지하는 것이지 왜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핑계를 대는 것인가.

 

누구 때문에 누구를 지지한다. 누가 잘못해서 누구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누가 더 잘했다면 누구를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 거짓말이다. 지지할 만해서 지지하는 것이고, 지지하고 싶어서 지지하는 것이며, 지지해야 해서 지지할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이면 상관없는데 자신들도 이미 아는 것이다. 자신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그들이 더 낫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누가 더 잘한다기보다 그저 어느 일방의 잘못만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심지어 매우 디테일하기까지 하다.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기억에 담고 기회가 될 때마다 끄집어내어 확인한다. 얼핏 민주당을 지지할 것처럼 보이는 말들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실제 진실은 그들의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의 현실과도 이어진다. 이념을 위한 보수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조갑제랑 정규재는 진짜 내가 극혐하던 인사들이었는데... 그럼에도 확실히 이런 상황이 되니 어째서 그들이 지식인인가를 알게 된다. 바로 이런 게 보수다.

파시즘의 대두 이후 민주주의 사회에는 한 가지 대전제가 화두처럼 던져졌었다. 불관용에 관용이 있어서는 안된다. 다양성이란 당연히 관용이다. 대화와 타협, 화합과 공존이란 결국 서로에 대한 관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고 화합하면서 공존을 꾀하려는데 누군가 일방적으로 자기의 입장만을 강요하며 다른 주장들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행위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했을 때 과연 그 사회는 다양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이 나치가 민주주의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쟁취하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었던 이유다.

 

흑인은 아예 공공장소에 나서서도 공직을 맡아서도 안된다는 인종주의자들마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한다면 자칫 그들이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다양성 가운데 흑인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을 그대로 현실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공정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을 때 정당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불리한 위치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좋은 대학 나와서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이들만이 모든 권리를 독점하고 행사해야 한다는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사회의 다양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여성과 유대인, 집시, 성소수자, 빈민, 혹은 제도권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현실로 구현하고자 하는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의지주의자, 종교주의자들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저놈들은 인정 못하겠으니까 얘는 빼고 얘도 빼고 쟤도 빼놓고 그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받아들였을 때 과연 그 사회의 다양성은 지켜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민주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상대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그래서 민주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독립적인 인격에 대한 절대적인 존엄과 그에 대한 존중인 것이다. 그게 인권이다. 상황에 따라서 주었다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존엄하여 지켜져야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설사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내려진 결론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맞지 않더라도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승복하고 복종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나와 다를지라도, 어쩌면 내가 틀리다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다수가 그리 판단했다면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인정하고 따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제도를 지탱하는 구성요소중 하나인 정치결사로서의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정당을 구성하는 모든 당원들은 같은 정치적 이해와 지향을 공유하는 동지로써 동등한 자격을 가지며 대등한 권리를 갖는다. 그를 존중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 정당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당원들이 전당대회나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그를 통해 결론이 내려졌을 때 그를 복종할 수 있어야 당내 민주주의도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러한 당원들의 주장과 요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 한다면 그 정당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어제오늘 일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민주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대중의 새천년국민회의나, 그 이전에 존재했었던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의 민주당 역시 국민 다수의 의사와 상관없이 마치 로마의 원로원이나 초기 영국의 의회처럼 소수 기득권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었다. 그래서 바꿔보자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더니 여기서도 정동영이 공천권을 행사해서 지지자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당화하여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었다. 다시 열린우리당을 깨고 민주당으로 합당했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표를 주는 지지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혹은 당직을 맡고 있는 소수가 오로지 당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당시의 모습을 보았을 때 과연 그것을 민주주의 정당의 그것이라 말할 수 있었을 것인가. 실제 박근혜가 친박 위주로 보수정당을 재편하고 문재인이 민주당의 대표가 되기 전까지 오히려 정당민주주의가 더 잘 지켜지고 있었던 정당은 다름아닌 보수정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이전의 민주당에 대해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그 소수가 저마다 계파를 만들어서 당원이나 지지자들과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알아서 나눠서 해 먹었었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일단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당직을 맡고, 인맥으로 그 안에 포함된 소수가 자기들끼리 편을 나누어 해먹는 것을 다양성이라 민주주의라 말한다.

 

지금 김경수나 김동연, 김부겸, 임종석 등이 말하는 다양성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대통령후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복하여 선거운동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정당과 내통하면서 지지하기까지 했던 놈들을 다시 받아들이자. 당원이나 지지자와는 상관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당은 운영하면서 오히려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고 모욕하던 놈들을 다시 불러들이자. 그래서 하는 말이 기존의 당원과 지지자들을 극단적인 소수로 몰아붙이는 표현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써왔던 전가의 보도인 외연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당원과 지지자들만으로는 안된다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다양성의 대상들은 그동안 당원과 지지자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당 바깥에 존재하는 중도층과 보수층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던 이들이었다. 이 어디에 대등한 동지로써의 당원과 지지자에 대한 존중이 있을 것인가. 동지로써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는 저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당의 다양성을 위해, 무엇보다 정당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말하자면 엘리트정치의 복원이다. 이전 원로원 민주당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당원이나 지지자들과 상관없이, 수 백만에 이르는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원래 하던대로 이름있고 세력있는 이들끼리 적당히 주고 받으면서 타협하는 정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들이 거부하는 이재명이란 존재부터 배제하자. 당장 당원들이 선택한 대표이자 유력한 대선후보인 이재명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폄훼하고 배제를 주장하면서 다양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스스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자체가 그들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원이 선택한 당대표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은 인정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가 스스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표를 부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기들도 인정하는 것이 다양성이다. 아마 자기들이 지금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 알면서도 다른 이유들로 그런 주장들을 하고 있는 것일 게다.

 

내가 김경수나 기타 나부랭이들의 주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유다. 아마 다른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정작 정당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 왔던, 정당을 이루는 다양성으로 전혀 그 동등한 주체로써 인정받지 못했었던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던 입장에서 어떤 당원도 지지자도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언론만 난리다. 마치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유승민을 보던 민주진영의 입장과 닮았을 것이다. 유승민이면 그나마 보수진영에서 괜찮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괜찮을 뿐 지지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고무되었다. 이만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해준다. 그래서 정작 민주당을 위한다면서 민주당의 당원과 지지자는 외면한 채 그들만 바라본다. 물론 그 이상의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심상정의 정의당이 대선 끝나고 12억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 그들에게 민주당이란 당원과 지지자들의 정당인가, 아니면 자신들만을 위한 정당인가. 링컨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냥 똥버러지 새끼들이다.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동안 미국 대통령 가운데 힘을 앞세운 패권을 추구한 대통령이 아주 없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당장 레이건부터 그랬었고, 아들 부시 또한 그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그동안 미국 대통령들은 최소한의 선만큼은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고 있었다. 미국은 패권국가가 아니며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면서 정의와 질서를 추구한다. 패권을 추구하더라도 그런 전체적인 틀 안에서 최소한의 명분은 지켜가며 행동하던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위선이라 부른다. 그래서 그 위선마저 사라졌을 때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특히 2030 남성들 가운데 그런 경우가 많다. 차라리 위선보다 악이 낫다. 위선은 혐오스럽고 차라리 솔직하게 드러내는 욕망과 충동, 본능이 더 호쾌하고 좋다. 악은 차라리 욕이라도 할 수 있는데 위선은 욕하기도 애매하니까 그냥 악한 쪽을 선택하겠다. 그래서 더 정의롭지 못한, 더 도덕적이지 못한, 더 윤리적이지도 못하고, 보편의 가치와 질서와 정의를 부정하는 집단을 위선을 응징하기 위해 당연하게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트럼프의 막나가는 짓거리들을 자기 대통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보라. 위선적이던 오바마와 그 위선조차도 사라진 트럼프가 실제 현실에서 보이는 짓거리와 아마도 돌아올 후폭풍들을.

 

미국이 알아서 관리중인 파나마운하를 아예 가져가겠다고, 우방인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까지 자기들이 가지겠다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맹국 캐나다를 자기들의 주로 만들겠다고, 그냥 이스라엘을 위해서 가자지구를 자기들이 가져가서 개발하겠다고, 일견 시원하다. 미국 정도 힘이 있는 나라가 그래도 되는 거겠지. 미국 정도 군사력과 경제력이 되는 나라가 굳이 남의 눈치 볼 필요도 없이 그렇게 시원하게 지르는 것도 한 편으로 멋지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 후폭풍은? 그로 인해 세계질서에 끼치게 될 악영향들은? 그러면 이전 대통령들은 몰라서 안했었을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다. 세부적으로는 오류가 있을 수 있어도 그러나 그동안 서구사회가 저질러왔던 실수들을 이제라도 하나씩 바로잡아보자. 그 가운데 환경도 있고, 평화도 있고, 서로를 존중하는 국제질서 또한 있다. 강자라고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고, 하고 싶다고 막 내지르지 않는다. 그래서 위선이라고 이전 민주당 정부에서 하던 것들을 다 폐기하고, 심지어 공화당 정부들에서도 지키던 것들마저 모두 무시하고, 그래서 그 모습이 그렇게 후련하고 보기 좋은가? 그런데 미국은 그렇다 치고 한국이 저러고 돌아다니면 과연 어떻게 될까? 아, 그래서 내란을 지지하는 정당을 젊은 층 남성들에서 3배나 많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게다. 악한 게 차라리 답답한 위선보다 나으니까.

 

그런데도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트럼프만이 할 수 있는 신의 한수다. 트럼프가 가자지구에 사는 난민들 다 주변나라들로 내쫓고 가자지구를 미국 소유로 한 다음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데 달리는 댓글들이다. 이게 지금 한국인의 지성수준이다. 남의 나라니까 힘있는 나라는 그래도 된다. 힘이 있으면 그렇게 쓰는 게 옳은 것이다. 이래서 구한말 조선의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삼 확인한다. 인간의 지성이란 참으로 저열하다. 항상.

문재인 전대통령이 한겨레와 인터뷰했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었다. 보지는 않았다. 한겨레에 아주 먼지 한 톨 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나 자신의 행위로 인해 한겨레가 원자 하나 정도라도 이익을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분노와 환멸과 모멸감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저딴 새끼들이랑 인터뷰했는가 불만을 가질 뿐 그 내용 자체는 아예 모르고 있었는데... 어이가 없네, 한겨레 기자새끼가 추윤갈등에 대해 물었다고? 한 마디로 윤석열 내란에 대한 책임을 문재인 전대통령에게 돌리고 싶다는 건가?

 

불과 몇 년 지나지도 않은 일이라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추윤갈등이라기보다 윤석열의 월권과 항명으로 인한 정당한 징계과정에서 언론이 어떤 식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그 결과 법원까지 움직여서 윤석열의 손을 들어 주었었는지. 이 새끼들 추미애 장관이 기자회견할 때는 그 시간 가지고도 지랄하던 새끼들 아니던가. 그러면 그때 한겨레는 달랐었는가? 조국사태 이후 내내 윤석열의 편에서 그를 빨아주는 기사를 썼었고, 검찰이 읊어주면 그대로 문재인도 퇴임 후 사법처리해야 한다는 내용을 자체 유튜브채널에 아예 꼭지까지 따서 내보냈었으며, 추미애가 윤석열을 징계하려 할 때도 윤석열의 편에서 추미애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문재인 대통령도 그리 말하더만.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뭘 그리 잘못해서 정권교체에 힘을 보탰었는가고. 참 점잖은 양반이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데 인간적으로는 미워하기 힘들다. 그런데 이 새끼들이 윤석열을 임명하고 해임하지 않은 책임을 문재인 전대통령에 돌리려 들었다? 하긴 그러니 똥걸레지.

 

그래서 윤석열로 정권이 교체되고 한겨레는 얼마나 일관된 기준을 가지고 윤석열 정부의 잘못들을 비판하고 있었는가. 김용현이 그래도 한겨레 기자는 기자회견장에 나와도 된다 그랬다지 않은가. 권성동도 MBC랑 JTBC를 문제삼았지 한겨레를 두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었다. 심지어 그동안 자신들과 연대하던 민주노총이 간첩몰이를 당할 때조차 한겨레는 정의당과 함께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문재인 정부 시절 전자현미경까지 들이대가며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어 그리하고 있던 관행들조차 의혹이랍시고 떠들던 놈들이 윤석열 정부에서는 그나마 밝혀진 사실들만 가지고 최대한 조심해가며 비판도 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겨레 기사를 보고 있다가 이 새끼들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취급하지 않았구나 새삼 깨달음까지 얻었을까? 윤석열에 대해 기사쓰는 것 보고 있으면 이 새끼들은 문재인 전대통령에 대해 처음부터 대통령으로 예우조차 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윤석열에 대해서는 얼마나 예우를 갖춰가며 최대한 존중하면서 비판도 하고 있었는가. 그런데 그런 놈들이 문재인 전대통령에게 윤석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선에서도, 아니 지금도 이재명은 안된다며 김문수든 이준석이든 빨아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들이?

 

문재인 전대통령의 말이 옳다. 어떤 사안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잘못했다, 못했다, 잘하지 못했다 세 가지 다른 층위가 존재한다. 잘못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원래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을 때 하는 말일 것이다. 이를테면 윤석열의 내란시도라던가, 박근혜의 비선실세라든가, 아 그러고보니 한겨레가 공식입장으로 김학의 수사를 지시한 책임을 물어 문재인 전대통령도 퇴임 후 사법처리되어야 한다 주장한 바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김학의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고, 설계수명이 끝난 원자력발전소를 더 연장해 사용하지 않기로 했으니 윤석열의 내란과 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해가 되기는 한다. 결론은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근본적으로 같으니 따라서 윤석열 정부의 내란도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다. 자기들은 전혀 아무 상관도 없고. 역시나 그런 의도일 테지. 똥걸레 새끼들이라.

 

아무튼 잘못한 것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것을 가리킨다면, 못한 것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일 테고, 잘하지 못한 것은 해야 할 일을 하기는 했는데 그 성과가 미치지 못한 경우에 대한 것일 게다. 이를테면 학생인데 부모나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는 음주와 흡연과 폭행과 협박까지 일상으로 저지르고 있다면 그건 당연히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반면 그렇게까지 사고는 치지 않았더라도 학교에 가야 하는데 가지 않고 수업시간에도 딴짓 하느라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못한 것이다. 그에 비해 학교에도 열심히 다니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냥 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공부를 못했으니까 학교에서 싸움질이나 하는 놈들과 똑같이 못했다 한다면 올바른 평가일 것인가? 우리 부모세대가 가장 크게 잘못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정도와 방향을 따지지 않고 싸잡아 무조건 잘못했다 야단부터 쳤다. 그러니까 매일 학교에서 사고치는 깡패새끼들과 그냥 요령을 몰라서 공부를 못할 뿐인 아이들을 싸잡느라 결국 사회에 옳음에 대한 정의가 희석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뭐가 잘못인지 모르면 뭐가 옳은지도 모르게 된다. 어쨌거나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해서 문제인 것인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안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인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것인가?

 

문재인 정부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다 여긴다면 처음부터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이념적으로 지향하고 추구하는 바가 전혀 달랐으니 문재인 정부의 신념에 따른 정책들조차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된 해서는 안되는 일들이었다 여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촛불연대라고 하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연대란 비슷한 추구와 지향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지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정책 가운데 민주당이라는 전당이, 그리고 지지자들까지 함께 공유하는 신념과 가치에 반하는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있다. 필요한 때 필요한 행동들을 못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최소한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방향에서 완전히 틀어진 선택들을 했던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못했다. 하물며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아쉬운 것이고, 그래서 안타깝고 때로 대놓고 욕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욕이라는 게 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느냐고 하는 사후평가에 가깝다. 그 행위가 본질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잘못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그랬으면 더 좋았지 않았겠느냐는 미련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그나마 문재인 정부와 문재인 전대통령에 비판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일 것이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더 잘할 사람으로 뽑아 보자. 그런데 여기다 대고 그냥 너는 잘못했다 한다면 그는 과연 연대의 대상일 것인가? 동지일 수 있을 것인가?

 

어쨌거나 진짜 하다하다 한겨레가 윤석열을 가지고 문재인 전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상황까지 벌어지는구나. 얼마나 염치가 없으면. 얼굴가죽이 두꺼우면. 하긴 그러니까 윤석열 그리 빨아대던 김완이 놈도 윤석열 까댄다고 여기저기 유튜브 채널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중이다. 경호문제 때문에 대통령 관련 행사는 수의계약으로 진행해 오던 것까지 제대로 취재도 않고 비리라고 기사를 내던 놈이다. 유시민과 김어준이 검언유착 폭로하고 비판했을 때도 그 의도가 사악하다며 대놓고 욕하고 비웃던 인간이다. 그런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겨레에서 기자도 할 수 있다. 나는 문재인 정부 시절 한겨레가 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폐간되어야 하는 이유다. 한겨레는 사라져야 한다. 다음 민주당 정부를 위해서도. 새삼 다시 확신을 가지게 된다.

많은 스포츠 종목과 대회들에서 평생에 단 한 번 스테로이드 사용이 발각되었어도 영구히 선수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한 번이라도 스테로이드를 사용해서 근육을 강화했다면 그 영향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운동하는 사람들은 머슬메모리라 부른다. 운동을 중단해서 근육이 줄었더라도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 바로 이전에 가졌던 근육을 빠른 시간 안에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체의 기능이다. 그래서 한 번 약물을 사용했으면 설사 약물을 끊었더라도 약물을 아예 사용하지 않은 것과 비교되는 더 큰 근육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이 스테로이드라는 것은 무엇일까?

 

최초의 스테로이드는 동물의 정소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저 유명한 베이브 루스도 그것을 애용했다 전해진다. 그때 당시는 그것이 뭔지도 몰랐고 그냥 써보니까 좋더라는 수준으로만 겨우 알려진 상태였었다. 말하자면 포유류의 수컷이 가지는 성호르몬이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이 골격이나 근육의 양과 질에서 태생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때로 남자아이들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던 여자아이들이 중학교 이후 급격하게 신체적으로 또래의 남자아이들보다 뒤쳐지기 시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실제 스테로이드를 오랜동안 사용한 여성의 경우 목소리가 바뀌고 목젖이 나오고 수염이 자라는 등 남성화 현상을 보이고는 한다.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는 성전환수술을 할 때도 그래서 성호르몬은 중요하게 사용된다. 남성은 바로 그런 성호르몬을 성장기 이후 내내 일정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성전환수술을 했다가 신체구조가 바로 여성처럼 바뀔 수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성전환수술로 여성이 된 트랜스젠더들이 여성들과 같은 대회에서 경쟁하는 것은 이미 수술을 받기까지 최소 수 년 이상 스테로이드를 사용한 상태에서 경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전환수술을 받았으니 여성이라고 주장하기 이전에 그 신체조건 자체가 정당한 경쟁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태에 있다는 뜻인 것이다. 이건 다양성이고 뭣도 아닌 공정한 경쟁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과연 어느 스포츠 종목에서 수 년 간, 그것도 성장기에 스테로이드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서 신체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만든 이들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을 것인가. 아, 하나 있다. 보디빌딩. 이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문제가 아닌 기존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그것을 공정한 경쟁을 통해 입증해 온 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존중과 예우의 문제인 것이다. 그들의 노력과 열정과 의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부정했다.

 

사실 이것은 다른 다양성 논란과도 닿아 있는 부분이다. 어째서 기존의 프랑스사회만 이슬람계 이민자들을 관용해야 하는 것인가? 프랑스 사회가 관용하는 만큼 이슬람계 이민자들 역시 기존의 프랑스사회를 관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불관용은 불관용을 불러온다. 그렇기 때문에 불관용에 관용은 없어야 한다. 트랜스젠더들이 기존의 사회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다수의 이성애자들로부터 진정으로 존중받고 싶다면 자신들 역시 기존의 사회의 질서와 가치를 존중하는 모습도 보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소수자로써 자신도 경기에 출전해서 입상받고 싶은 욕심 만큼 그럼에도 그것을 불공정하고 부당한 일방적인 경쟁이라 여기는 기존의 이성애자 선수들의 입장도 고려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일방만 단지 다수라는 이유로 관용을 강제당할 때 반드시 반동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내가 양보하는 만큼 너도 양보하고, 내가 배려하는 만큼 너도 배려하라. 실제 운동선수로서 경기에 뛰는 것이 나의 생사를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까지는 아닐 것 아닌가. 진정 그렇게 경기에서 뛰고 싶다면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리그를 따로 만들면 된다. 그래서 여성들도 그동안 남성들에게만 허락되어 왔던 많은 종목들에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스스로 자신들만을 위한 기회를 찾아내 왔었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 적용하려면 그렇게 말처럼 쉽고 간단하기만 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고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던 것일 게다. 트랜스젠더들도 존중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자신의 의지로 정체성에 맞게 바꾸었다면 그에 걸맞게 대우하는 것이 분명 옳을 것인데,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부당하게 피해를 입어야 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를 잊는 것까지 과연 정당할 것인가. 그러니까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부터는 트랜스젠더들도 양보해야 하는 것인가. 자칫 조금만 엇나가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비쳐질 수 있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감정들이 쌓인 결과 반동은 그보다 더 크게 돌아오고 말았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나아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이 다시 재현될 수 있다. 과연 그것은 옳은 방향인가.

 

그래서 뭐든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리고 그 안에 안주하면 어느 순간 파열음이 일어나고 만다. 다만 그렇다고 한 번에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도 답도 되어 줄 수 없다. 대화가 필요하고, 논의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가능성들까지 고려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지금 당장의 옳음에 안주하고 말았다.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한국 진보들이 2찍으로 전락하고 만 실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과연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면 그러나 그런 것까지는 아니다. 당장의 다소 큰 오류들에도 그러나 분명 옳은 방향이고 필요한 방향일 것이다.

 

아무튼 결국 소수의 트랜스젠더들이 자기들만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성소수자 전체를 엿먹이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자신들도 공정한 경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비겁하고 비열한 것이다. 성별로써 여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이전의 남성이었던 시절의 신체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자로써 다수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당장의 유리함을 멋대로 자신의 이기를 위해 이용했다. 어쩔 수 없는 반동이다. 안타깝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뭐라 하기도 어렵다. 실제 부당하게 피해를 입어야 했던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반성의 시간이다. 고민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지 못하면 그냥 이대로 갈 수밖에 없다.  PC진영의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쉬어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럴 최소한의 지성은 가지고 있기를 바라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무려 19세기까지, 그것도 유학의 원조인 중국과 바다 건너 일본에서까지 중요하게 받들어졌던 퇴계 이황이지만 그러나 정작 살아있을 당시에는 고봉 기대승에 이어 그 제자인 율곡 이이에게까지 자신의 학문과 관련해서 논쟁만 했다 하면 번번이 깨지기만 하는 불쌍한 처지였었다. 고봉 기대승도 그렇고 율곡 이이도 그렇고 그래서 하다하다 논리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어거지로 밀어붙여 끝내고 말았었으니, 그런데도 조선유학의 큰 스승으로 한참 후대에까지 떠받들려지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물론 그냥 병신이라 이해 못하는 것일 뿐이지만.

 

사실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과 그 주장이 옳고 그른 것과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비례성 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까지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아무리 주장하는 바가 옳아도 말 자체를 못하면 논쟁에서 지고 마는 것이고, 주장하는 논리가 아무리 타당해도 미처 생각지 못한 허점을 치고 들어왔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이 없으면 역시 논쟁에서 이기기 힘든 것이다. 서로가 참고자료를 들고서 찾아보며 하는 논쟁이 아닌 이상 기억력의 차이에서도 승부가 갈릴 수 있다. 더구나 마침 이전까지 아무도 하지 않던 주장을 새롭게 펼치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나의 새로운 주장이나 이론이 정설로써 인정받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들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시작단계에서 논쟁이 벌어지면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것이다. 당시 퇴계가 그런 입장이었다. 원래 유학에서는 이와 기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었기에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이단에 가까운 것이었고, 따라서 기존의 유학의 논리와 주장들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이황에게 처음부터 불리한 논쟁이었던 것이 그가 논쟁을 벌일 때마다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진보가 어려운 것이다. 개혁이 그토록 어렵기만 한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 부정적인 부분만을, 그로 인해 발생할 지 모르는 부정적인 가능성이나 미처 고려하지 못한 현실적인 부분들만을 지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상대의 주장을 과절시킬 근거를 제시한 것이 되는 것이다. 반면 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모든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최대한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완벽한 논리를 펼쳐야지만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다. 아직은 머릿속으로만, 혹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는 계획이기에 더욱 그 안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해 모두 실제로 구현해서 살필 수 없다는 것은 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 있어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논쟁에서 저만한 비판들이 이루어졌고 그럼에도 적절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으니 보수가 더 옳은 것이다.

 

자칭 중도들이 자신들을 중도로 포장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이 보수라 주장하지 않는 만큼 보수적인 어떠한 주장이나 이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제안들에 대해서 그 허점들만을 비판한다. 그 단점과 약점들에 대해서만 오로지 공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는 안되는 것이다. 개혁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자칫 무척 논리적인 것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논쟁에서 졌으니 비논리적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PC주의에 대한 것이다. 단지 상대의 주장 가운데 존재하는 허점을 찾아서 공격하는 것만으로 PC주의는 잘못된 것이라 단정짓는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위선이고 악이며 그냥 원래 하던대로 사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것이다. 그동안 수 천 년 넘게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고작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인, 성소수자, 장애인들만 조금 고통받았을 뿐 대부분 아무일없이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다. 오히려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정상적인 백인이나 이성애자, 비장애인들이 그들을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르고 있다. 효율로만 보면 옳다. 소수를 위해 다수가 양보하는 것은 꽤나 이상한 일일 테니. 그래서 과연 그렇게 비판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PC주의가 진짜 옳다는 것인가.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반PC가 진짜 옳은가 자기 주장을 펼쳐 보라 하면 실제로는 그냥 그동안 그래왔으니 문제없을 것이라는 이상의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진보와 개혁이 문제라 주장하기는 하는데 그래서 정작 그동안 해오던 방식에 문제는 없는가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그냥 진보와 개혁으로 인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그들은 한 편으로 보수조차 아니기도 하다. 보수란 보수로써 추구하는 가치가 있고 지향이 있고 신념이나 이념이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신이 보수로써 지키고자 하는 바가 있고 추구하는 바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보수로써 이루고 싶은 이상이 있는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그 말은 곧 주장도 논리도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주장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논쟁이 과연 정당하고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이준석을 정치인으로서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2030 남성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아니 2030 남성들 자신들조차 사실은 이준석을 정치인으로서 그다지 크게 지지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지금 이준석의 정당인 개혁신당에 대한 2030 남성들의 지지율이 어떠한가 보면 바로 답은 나오는 것이다. 대선후보로서도 이준석은 최저의 지지율과 함께 최고의 비호감도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뭔 말만 하면 이재명의 비호감도를 떠드는데 그나마 지금 대선후보급들 중에서 비호감도가 가장 낮은 인물이 또 이재명이다. 홍준표와 오세훈과 한동훈과 김문수와 이준석까지 다 포함해도 비호감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재명이 가장 낮고, 반대로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해서도 이준석의 비호감도가 가장 높다. 왜? 자기 주장은 없고 남의 주장을 비판만 하고 있으니까. 안전한 곳에서 이상론을 펼치며 비판만 할 뿐 정작 자기가 그래서 무엇을 하겠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한 마디로 기생정치인이다. 다른 정치의 헛점과 약점에 기대서 그를 공격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올리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자칭 2030 남성들과 같은 정치인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 당연히 논리도 필요하다. 그 이전에 어떤 시각에서 그러한 근거들을 찾았고 논리를 만들었는가 자신의 입장과 전제 또한 밝혀야 한다. 오래전 경제학과 교수 한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런 내용들을 글로 쓰지 않느냐 물었더니 비슷한 대답을 들려주었었다. 학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서는 그 전에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사항들이 많다. 나같은 그냥 평범한 개인들이야 그저 내가 생각하고 믿는 바대로 떠들어도 되지만 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쓰는 글은 절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떤 과정들을 통해 어떻게 지금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명백하게 밝히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글이 아니다. 그런 정도의 철저함이나 엄밀함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왜 내가 그 주장들에 반대하고 논리와 근거들을 비판하는가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무척 중요한 것이다.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것이 없다.

 

내가 이른바 정치평론가라 부르는 부류들을 아주 극혐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그래서 유시민이 불필요하게 여기저기서 욕을 먹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 정치평론가들은 자신의 정파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느 진영에 속해 있고, 자신들의 주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 정치평론가들은 중도적이다. 자기가 중립이라 주장한다. 그러고서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행동을 비판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지적, 논리적 우위의 근거로 삼는다. 그래서 그런 사변적인 비판들이 얼마나 대한민국 정치에 있어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것도 없이 그저 당장의 현상만을 두고 그 빈틈만을 노려 물어뜯는 그 행위 어디에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가치와 지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 말들이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 반면 유시민은 처음부터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모든 시발과 과정과 결과를 낱낱이 드러내고 글쓰고 말한다. 그러니 편향적이라 말한다. 그래서 실체있는 편향과 실체없는 중립 가운데 무엇이 이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것인가.

 

인터넷에서 가장 말많은 놈들이 그런 놈들일 것이다. 주장은 없고 비판만 있다. 논리는 없고 비난만 있다. 실제 인터넷 시대에 가장 잘 팔리는 것들이 그런 부류들일 것이다. 당장 유튜브에서 발에 채이는 국뽕채널들만 해도 뭐가 어째서 우리나라가 좋더라가 아니라 누가 얼마나 병신이라 우리민족이 최고더라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래서 한국인이 왜 좋냐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왜 최고인가? 이놈도 병신이고 저놈도 병신이고 그러니 우리만 낫다. 그런데 그런 게 통한다. 그래서 이준석이 저리 각광받는 것이겠지. 남만 욕하면 그것으로 최고다. 정의당이 괜히 망한 게 아니다. 보수를 욕하기만 하는 게 진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잊고 말았다.

 

비판이 논리가 아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정의가 아니다. 논쟁은 그냥 말싸움이다. 말을 못하고 더구나 말이 느리기까지 하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건 피지컬이지 논리가 아니다. 정의는 더더욱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놈들이 너무 많다. 그 전에 가르치지 않는다. 토론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나도 하이텔시절부터 수 십 년째 키배를 떠 오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키배는 키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내가 댓글로 논쟁하지 않는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이다. 병신같다. 하긴 세상에 널리는 게 병신들일 테지만. 나도 병신일 테고. 언제나.

오래전 대학시절 학생회장도 했었고 언론에서도 떠들썩했던 큰 시위도 주도했었다는 사람과 잠시 알고 지낸 적이 있었다. 민주화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시의원에 출마했다가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도의회 출마한다는 선배 쫓아서 선거운동한다고 다니던 직장마저 그만두었다는 것 같았다. 하긴 박종철이 숨겨주다 목숨까지 잃었던 박종운인가도 부산에서 열심히 출마하고 있었다던가? 어쩌면 그 세대들이 가지는 공통된 의식 같은 것일 게다.

 

시대가 한 번 바뀌었다. 권력이 한 번 뒤집어졌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역할을 한 사람에게 한 자리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역사상 프랑스대혁명도 러시아혁명도 중국혁명까지 어찌되었거나 혁명을 주도한 이들이 나중에 권력도 잡고 사회의 주류도 되고 했던 것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면 권력이 교체되었듯 그 주류집단 역시 바뀌는 것이 옳다. 그래서 사실 1987년 이후로는 그것을 목적으로 학생운동하는 놈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런 운동권 가운데서도 다른 대학생들로부터 떠받들려지던 학생회장들급이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니 이제 자기들의 시대가 와야 한다 여기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 사회를 한 번 제대로 바꿔보자. 그만한 포부도 있고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무엇보다 그래야만 하는 자격까지 있다. 그래서 그리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놈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괜히 한 번 좌절했다고 바로 돌변해서는 입장을 바꾸는 놈들도 있었던 것이고. 대표적으로 김문수와 이재오가 그렇다. 민중당 만들어 나왔다가 개박살나고는 신한국당 들어가서 제대로 쓰레기들 되어 버렸다. 그냥 딱 김문수, 이재오 떠올려보면 된다. 정의당이나 민주당내 전대협 출신들이나. 그러니까 자기들이 그동안 해 온 일이 있는데 왜 이것밖에 대우를 못받는 것인가? 배신감이고 분노다. 그리고 그런 울분을 쉽게 참지 못한다는 것에서 그들의 오만함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석이 김민새가 되었던 이유였다. 당시 김민석은 서울대 출신에 전대협 초대의장으로 사실상 김대중 정부의 황태자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었었다. 당장은 아직 젊어서 무리지만 적당히 커리어도 쌓고 하다 보면 언젠가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대통령까지 노려볼 수 있을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었다. 주위의 평가도 그랬고, 그에 따른 당내 정치인들의 대우도 그랬고,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에게 깨지고 나서 대선을 앞두고 어디 듣보잡 부산출신 고졸 인권변호사 나부랭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꼬라지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차마 그 꼬라지를 두고보지 못하고 다른 민주당 정치인들과 함께 자격있는 사람으로 후보를 바꿔보려 당적까지 옮긴 것이 낙인이 되어 불과 얼마전까지도 김민새라 불리며 정치낭인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김민석의 감정을 헤아린다면 지금 임종석이 저러는 이유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과거 동교동계가 민주당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던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었다. 자기들이 김대중을 곁에서 모시고 같이 고초를 겪어가면서 일으키고 지켜온 민주당인데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것들이 엉덩이를 깔고 눌러앉아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 그게 마음에 들겠는가 말이다. 김영삼 따라간 상도동계와의 차이가 그것이다. 보수정당안에서 민주당계는 그냥 객식구였다. 말이 합당이지 자기들이 김영삼 따라서 기어들어간 것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민주당은 원래 동교동계가 김대중과 함께 만들고 지켜온 정당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 지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한다니 속이 뒤틀릴 밖에. 말하자면 본전생각이다. 당연히 내가 주인이고 대우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다.

 

그래서 동교동계고 운동권출신들이고 민주당 구당권파들이고 자칭 진보들이고 하나같이 노무현과 문재인을 그리 싫어했던 것이었다. 당연하게 같은 이유로 그들은 이재명도 무척 싫어한다. 차라리 그보다는 자신들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맞서야 했던 과거 군사독재 세력들이 그들에게는 더 가깝다. 이재명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보다 차라리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더 낫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부터 그런 맥락인 것이다. 이재명에게는 그토록 엄격한 놈들이 정작 윤석열의 친위쿠데타에 대해서는 따위로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우상호부터, 내란진압이 아직 한창인 상황에서 이재명 공격에만 열을 올리는 임종석과 고민정까지. 고민정도 크게 다르게 생각할 필요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에서 일하며 측근에서 함께 있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물론 지지자들로부터도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만 한다. 수박이 달리 수박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길 때 당원과 지지자를 무시하고 독단을 저지르는 수박이 되는 것이다.

 

김경수 역시 그렇게 이해하면 편할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했다. 자기가 그렇게 부당하게 정치적인 수사와 재판 끝에 죄인의 몸이 되어야 했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이 없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따로 없다. 거기서 그럼에도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당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정치인으로서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현실에 그리 많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같아서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옆에서 불을 지피고 장작을 넣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자신까지 생겼을 것이다. 아니면 그래야만 하는 다른 필연적인 이유가 있거나.

 

사람들이 도박을 끊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본전생각일 것이다. 이미 잃은 돈을 다시 찾으려 하니 어쩔 수 없이 빚을 내서라도 다시 도박에 뛰어들고 만다. 아예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면 모르겠는데 그 과정에서 몇 번 따 보기라도 했다면 더 헤어날 수 없다. 정치인이 패가망신해가면서까지 자기가 이룬 모든 것을 들여 매번 선거에 출마하고 하는 이유다. 그래야 덜 억울할 테니까. 당장의 억울함과 분노가 영광과 환희로 바뀔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자신까지 있다. 내가 전대협출신들을 싫어하는 이유일 터다. 사실 따지고보면 전대협도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그나마 안전해지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런 식으로 대학생들이 전면에 나서서 행동했다가는 바로 잡혀갔다. 그래서 우상호처럼 딱 얼굴마담 하기 좋은 놈으로 골라서 학생회장 시키고 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중에도 그 보상을 바라고 여전히 저 지랄들 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어찌보면 김민석은 일찌감치 한 번의 큰 좌절을 통해서 새롭게 깨어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확실히 지금의 김민석은 과거의 김민석과 다르다. 덕분에 최근 김민새라 부르는 민주당 지지자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이재명 이후의 차기를 이야기할 때 함께 거론되는 이름 가운데 하나이기까지 하다. 김민석도 지금 모습만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 무슨 뜻이겠는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기에 잘하면 그때는 과거의 전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지 못하니까 중도층 어쩌고 괜한 남의 지지자들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지자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아니까. 하지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오만하다는 이유다. 자신들에게는 자격이 있다. 그것은 권리다. 수박의 이유다.

자칭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2030 남성들의 입버릇이 하나 있다. 

 

민주당이 뭐라도 잘못한 것 같으면 말한다.

 

"이러니 민주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면 중도적이니까 반대편인 국민의힘에도 그리 말하는가? 그러니까 저 발언들이 윤석열의 내란과 이어진 국민의힘의 헌재까지 부정하는 내란옹호 아래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저러고 있으니까 지지하지 못한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윤석열의 내란보다 국민의힘의 내란옹호보다 민주당의 잘못들이 더 중대하다. 

 

그래서 진짜 민주당이 뭔 잘못을 아주 크게 했는가? 그랬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이 들고 일어났겠지.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는 용인할만한 행동들이거나 혹은 오히려 칭찬해 줄 만한 행동들마저 저러고 있으면 뭐 더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하긴 민주당 지지자라는 것들이 동덕여대 시위와 서부지법 폭동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지랄하는 꼬라지도 보이기는 하더만. 그러고보면 윤석열 탄핵에 대해서도 여성 운운하는 게 꼴보기 싫어서 탄핵반대한다던 게 그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2030 남성들이었었지?

 

그냥 자기가 국민의힘 지지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나면 지금처럼 맘편하게 일방적으로 안전한 곳에서 남 욕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국민의힘 잘못할 때마다 욕먹는 게 싫어서 중도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지 실제로는 국민의힘 지지가 맞다. 그래서 그놈들 말버릇 중 하나가 왜 지지한 걸로 욕하느냐는 거다. 투표한 것으로 욕먹는 게 타당하다 그러는 것이다. 정치인이 잘못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그렇게 욕해요. 웃기는 건 그런 놈들 표 받자고 민주당을 압박하면서 여성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자칭 지지자라는 병신들이다. 

 

진짜 수박들과 같다. 수박들 좆같은 이유가 뭐였는가? 뭐만 하면 중도층, 뭐만 하면 국민, 그러니까 지지자따위 무시하고 밟고 지나가도 괜찮다. 지금도 임종석 그딴 소리 지껄이고 있는 모양이더만. 그놈들이랑 똑같이 이미 다수 2030 여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에서 여성을 위한 정책도 포기하고, 젊은 여성들을 위한 정치적인 행보들도 그만두고, 아예 페미 자체를 범죄화하라고 지랄하고 있는 중이다. 2030 남성들의 표를 받아야 하니까 더이상 여성들을 위한 무엇도 하지 말라. 미친 새끼들 아닌가? 부산경남에서 표를 받아야 하니까 호남은 버리고 가자는 거랑 뭐가 다른가? 그런 새끼들일수록 목소리만 커서는. 젊은 여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이 여성을 포기한다? 망하자는 소리겠지. 아닌가?

 

세상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그리고 2030이라는 세대 안에 갇혀서만 사고하는 놈들은 어차피 민주당에 표를 줄 이유도 없고 그런 표 받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놈들 하는 소리가 무엇인가? 페미를 범죄화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모든 혜택과 배려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성소수자와 장애인, 외국인 등등 사회적 약자들은 그냥 약자로 남겨두라는 것이다. 더불어 4050 일찌감치 내보내고 그 자리 2030 남성들에게 주라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데 민주당이 실제 그렇게 하면 진짜 표를 줄까? 더 나아가 그런 민주당에 그럼 나는 표를 줄 이유가 있을까? 그런 놈들은 그냥 이준석이랑 국민의힘에 알아서 하라고 맡기면 된다. 이미 지금도 지지하고 있구만 무슨?

 

모두를 가지려 할 수는 없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은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청와대시절 동료와 당원, 지지자 가운데 청와대시절 동료를 선택하느라 당원과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자초하는 고민정처럼. 당원과 지지자들의 뜻을 따르려면 자신의 동지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요구를 외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온전히 자신이 감당하는 것이다. 이미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 그들에 충실하는 것이 옳다. 배신자는 포섭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리더가 될 수는 없다. 유시민이 참 좋은 말을 했다. 여성들의 지지를 받아서 겨우 이만큼 왔는데 그 여성들을 배신하자? 사람새끼들인가?

 

뭐가 됐든 민주당이 지지할 만하다 해서 성별과 세대를 떠나서 시민으로서 지지할 이유가 있으면 2030 남성들이라도 알아서 지지해 준다. 여성을 위하든 어쨌든 그러면서도 자기들도 위해주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뭐라 안해도 자신의 권리로서 지지도 하고 표도 준다. 나머지는 오로지 남성과 여성만 보고, 4050과 2030만 보는 놈들이다. 그런데 여성을 포기하고 4050을 포기할 것인가? 2030 남성들 표만 얻으면 다 끝나는 것인가? 보다보다 하는 꼬라지가 어이 없어서 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그런 게 민주당이기는 하다. 조용한 건 독재국가가 조용하다. 민주당이기에 시끄럽다. 서로 욕도 하고 멱살도 잡고 머리끄댕이도 당기고... 언론이 지랄이지. 사실은. 기레기새끼들.

조선왕조실록에 실제 있는 내용이다. 어느날 관아에서 살인사건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는데, 가만 내용을 살펴보니 지어미가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었다. 왕이 판결한다. 아내로서 자기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이니 벌을 주어서는 안된다. 비슷한 예로 너무 가난해서 남의 집 물건을 훔친 범인에게 그렇게까지 이웃이 굶주리도록 내버려둔 마을사람들 전체에게 책임을 물어 오히려 도둑을 구제한 사또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왜? 살인이고 절도일 텐데?

 

법대로 사건을 판단해서 유무죄를 가리고 처벌하는 것은 사법부의 역할이다. 법 이전에 사람의 문제로써 그 안에 어떤 사정이 숨어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그리고 정치인의 역할일 것이다. 죄를 저질렀으니 벌을 주어야 하는 것을 넘어서 어째서 죄를 저질렀고 그래서 그 원인과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최대한 다수를 위해 좋은 방향으로 억울한 피해 없이 해결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역할이 곧 정치라는 것이고 그래서 오래전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이들을 위정자라 불렀다. 정치를 행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원래 법이 있기 전부터 정치란 존재하고 있었고, 이미 있는 법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도 정치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법치가 완비되기 이전, 사회가 보다 고도화되기 이전이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바로 이런 위정자들이 재판까지 전담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명판결 가운데 가끔 법이 뭐 이런가 싶을 정도로 뜬금없는 것들이 적지 않은 이유일 것이었다. 법보다 사람을 보고 죄보다는 그 사람의 사연과 처지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부는 행위 자체만을 법에 따라 판단하지만 정치인은 그 이전의 사람의 문제를 봐야 한다.

 

이를테면 노조가 파업했을 때 그 합법성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 한다면 그럼에도 노조가 그렇게 파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서 다수 노동자들에게 억울한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억울한 사연이 있을 경우 최대한 구제될 수 있도록 법원의 판결을 넘어서 이야기들을 듣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적법성을 따져서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로 진압하려는 행정부와 달리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달려가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특히 사회적으로 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듣고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그 사이에서 노력해 왔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몇 년 전 있었던 화물연대 파업도 불법이라고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정부와 다르게 민주당 정치인들이 가서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서 평화적으로 끝마치도록 나서지 않았었던가.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에도 그래서 모든 언론이 나서서 비난하는 가운데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현장을 찾아서 노동자들의 피해가 없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파업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떠나서, 그 파업이 폭력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시민의 요구가 있으면 찾아가서 중재하고 해결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가 사망했을 때도 그 법적인 판단의 여부를 떠나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찾아가서 억울한 사연들을 듣고 해결에 나서기도 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반드시 법적으로 옳아서가 아니라, 그래서 반드시 법적으로 잘못된 행동이라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청소노동자라고 하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칫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을 겪지 않도록 정치로써 해결에 나선 경우였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여성인 대학생이고, 그 방법이 폭력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아예 정치인이 그 자리에 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민주당 지지자라는 새끼들은 도대체 뭐하는 새끼들이란 것인가? 그것도 민주당을 지지할지도 모르는 2030 남성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이유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이유 가운데 당연히 여성주의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여성들을 위하고 싶어서 정치를 한다?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 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절반이 바로 그 여성일 테니까. 더구나 아직 어린 대학생들이지 않은가. 아니 그런 것 다 떠나서 다수의 시민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정을 들어주기를 바라는데 못하겠다 외면하는 정치인은, 아마 최소한 민주당 정치인 가운데에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이건 수박들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이 보수정당과 다른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역구가 달라도 찾아간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도 민주당 덕을 좀 봤었다. 그래서 억울한 사정이 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니까 가서 듣고서 그 안에서 들어줄만한 부분들에 대해 해결을 위해 노력해 보려 한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된 행동인가? 더 어이없는 것은 그것이 잘못된 이유라는 것이 다름아닌 또래의 다른 남성들이 그것일 싫어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지금 민주당을 지지하는 다수가 바로 그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지 않은가? 정당으로서 자신을 지지해주는 이들을 위해 나서는 것이 지지하지 않는 이들의 불쾌감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옳지 못하다. 그러니까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싫어하면 대통령후보도 김문수를 영입해서 선거에 내보내야 한다는 뜻일까?

 

자꾸만 저따위로 떠들어대니까 2030 남성들이 자기들이 아주 갑인 줄 아는 것이다. 내가 지지해준다. 민주당이 어쩌면 내가 지지해 줄 것인다. 민주당이 이러면 내가 지지해 줄 것이다. 물론 그런 일따위 없다. 지지할 사람은 다 지지하고 있고 지금 여성을 핑계로 지지않고 있는 사람은 어차피 지지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시민으로서, 노동자로서, 군인이거나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혹은 상공인으로서 자신의 이해와 가치에 따라 자기와 맞는다 여겼으면 이미 지지하고 있을 테고, 여성을 이유로 지지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절대 지지할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어차피 저들의 요구라는 것은 이미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불리할 수 있는 정책들을 민주당이 나서서 펴라는 것일 텐데, 이미 있는 지지자를 버리고 지지할지도 모르는 놈들을 위해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할까? 젊은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책들을 나서서 펼 수는 있어도 그것이 다른 성별 다른 세대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당장 이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게 불법적인 폭력시위까지 하기는 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대학생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것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그 대학생들이 남성들이었다고 민주당이 아주 외면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런데 2030 남성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누가 보면 2030 남성들이 민주당 머리 꼭대기에 앉은 상전인 줄 알겠다.

 

페미와 내란은 같다. 동덕여대 시위와 서부지법 폭동은 둘 다 폭력적이었으므로 똑같다. 심지어 민주사회에 무슨 폭력시위냐는 병신새끼들도 있다. 그러면 프랑스와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서 시위 때마다 폭동이 일어나고 하는 것일까? 2016년 촛불시위를 이야기하는 병신들도 있는데, 그것도 박원순이 중간에서 경찰개입을 막아줘서 그리 될 수 있었던 것이었지 작년 빠르게 탄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오세훈이 그렇게 평화적으로 끝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남태령에서 그런 정황들이 보이지 않았던가. 페미만 아니면 군사쿠데타도 괜찮고, 친일로 나라 팔아먹는 것도 상관없다는 놈들 무서워서 지지자인 젊은 여성들을 위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노력까지 폄하되어야 한다. 물론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될 지도 모르므로 기자회견 자체를 포기한 것은 그 또한 정치적인 판단의 결과일 것이다. 정치인이니까. 그래서 정치인더러 정치를 하지 말라? 위법이고 불법이니 아예 끼어들지 말라? 민주당 지지자 맞아? 

 

이준석이 정치인 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2030 남성들이 윤석열을 지지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은 범죄는 범죄니까 타협하지 말고 처벌부터 해야 한다. 조금의 죄라도 있으면 어차피 범죄니까 수사해서 엄하게 원칙대로 처벌해야 한다. 일견 합리적이다. 그래서 트럼프를 합리적인 인물이라며 찬양하는 자칭 중도도 보았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정치가 아니다. 윤석열을 겪고서도 모르겠는가? 위법과 불법을 떠나서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사람만의 방식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정도를 따지고 방향을 따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 그냥 범죄니까. 불법이니까. 그러니까 아예 개입해서는 안된다. 어째서 대통령에게 사면권이 주어진다 생각하는가? 자기 측근들 죄 지어도 구제해 주라고? 내용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어도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없다. 그것이 당위성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민주당을 지지할까? 그래서 똥파리가 나오는 것일까? 웃긴다. 더구나 그 이유가 2030 남성들이라? 지랄은? 있는 지지자들이나 잘 지켜라. 엄한 남의 지지자 노리지 말고. 그러다 망한다. 병신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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