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것은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항상 보는 얼굴이다 보니 익숙하고 친숙하다. 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역시 그들과 같은 부류라 생각한다. 더구나 좋은 기사 써달라 친절한 웃음까지 지어보이면 이제는 자기가 저들의 위에 있는 것 같다. 자칫 기자들이 유명인들의 위에서 그들을 굽어보는 기사를 쓰게 되는 이유다. 하물며 연예부기자는 자기가 쓴 기사로 연예인 하나쯤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늘 쓰는 글들이 그런 글들이다. 비평이란 대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거리를 두는 건 좋은데 그 거리에 자꾸만 익숙해진다. 상대를 대상화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에 길들여지게 된다. 마치 자기가 하는 말들이 무슨 대단한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자기가 쓰는 글들이 무슨 대단한 가치라도 있는 것처럼. 더구나 누군가 주위에서 추켜주는 사람까지 있으면 거의 완벽하다. 아, 나도 겪어 본 일이라 안다. 그래봐야 고작 어디서 글이나 찌끄리는 수준이다.

타인은 객관화하는데 자신은 객관화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도 자기 얼굴을 바로 보지는 못한다. 거울이 필요한데 어떤 거울로 비춰 볼 것인가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다. 그마저도 자신의 주관에 따른다. 자기에 도취된다. 정확히 자기에게 속고 만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영영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모씨같은.

유력정치인을 훈계한다. 타인이기 때문이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기 때문이다. 굳이 건드리기보다 그냥 내버려두는 쪽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건드려봐야 이익도 없고 괜한 논란만 일크일 수 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지만 먼지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많은 자타칭 논객들이 빠지는 함정이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주제이면서. 가끔은 안쓰럽다. 이름까지 알려져 있다. 재미있다.

여유가 있다면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여유가 없기에 그런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안철수 대푝가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트윗을 올린 것은 아닐 것이다. 선의를 인정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문제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국사람들은 부모로부터 그렇게 듣고 배운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부모말 잘 듣지 않으면 저런 삶을 살게 된다. 어째서 더 노력하지 않았는가. 학교다닐 때 더 성실하지 않았던 것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할 당시 어떤 사람들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다. 못살고 어렵고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당연히 그런 일들을 해야만 한다.

이를테명 징벌이다. 모두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자가 되어 잘 살려 노력해야지만 한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고 의미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은 당위로부터 벗어나 있다. 잘살려 노력하지 않았거나 혹은 능력이 부족해 결국 좌절하고 말았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 더 힘들고 더 어렵고 더 열악한 직업들은 그에 대한 징벌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더 잘살려 더 힘써 노력해야지만 한다.

무의식이다. 더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조건에서도 별다른 위험없이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보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비로소 위험도 어려움도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때 유행어처럼 들렸던 말이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그러므로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모든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너무 당연해서 덧붙일 말이 없다. 만일 희생자가 부자였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주장하는 공정성장론이 의도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모두에게 기회를 준다. 모두에게 창업하고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또한 이 사회에 필요한 정의이기도 하다. 다만 이 사회가 가진 상식에 부합하는 정의다.

굳이 말꼬리를 잡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선의만을 읽는다. 그리고 그 선의에 내포된 비극성을 읽는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다. 여유가 없으므로. 부자가 되지 못했으므로. 많이 배우지도 가지지도 못했기 때문에.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은 그리 말했었다.

"우리가 벌받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각."

정치권이 조용한 이유가 있다. 보다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와 닿아 있다. 지엽말단을 건드려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 겉만 건드리거나, 아니면 그 핵심을 건드려 국민과 싸우거나. 동정은 쉽다. 현실이 어렵다. 항상.

어떻게 해도 정동영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무리들은 있었다. 그저 금배지 하나에 목숨을 거는 부류들.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바로 이들이 있었기에 어렵게 자금을 마련하고 힘들던 시절 야당을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그들은 주류가 아니었다.

탄핵역풍의 바람을 타고 총선에서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이놈저놈 가리지 않고 자기 말 잘 들을 것 같은 인간들로만 국회를 채웠다. 당권도 공천권도 오로지 정동영에게 있었다. 그렇게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들이 바로 탄돌이들이다. 정체성도 당에 대한 헌신도 갖추지 못한 정치꾼들.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오로지 국회의원 배지와 그것을 자신에게 달아줄 계파보스 뿐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바로 이들 비주류가 보인 행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을 우선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당이 승리할 수 있을 지 그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라고 있는 비대위다. 그러라고 있는 선관위다. 그러라고 임명한 공관위다. 그러나 어떻던가.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는 과거 친노들이 당권을 쥐고 보였던 행동들과도 비교해 보라.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당을 뛰쳐나가 당을 욕하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복당해서는 지분을 내놓으라 목소리를 높인다. 당에 얼마나 해가 되는가도 아랑곳없이 당장 자기 눈앞의 이익에만 정신이 없다.

작년 비주류가 그토록 문재인의 혁신안에 대해 한목소리로 반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쟁해서는 안된다.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된다. 다시 사무총장과 최고위원제를 되돌리려 한다. 적당히 나눠먹기 위해서라도 그에 걸맞는 자리가 필요하다. 최고위원이면 그럭저럭 체면치레는 된다. 사무총장이면 당권은 가지지 못해도 실무에 영향력은 행사할 수 있다. 그러고보면 사무총장 역시 문재인의 측근이 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지 제도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처음 그대로 나눠먹기 좋은 그대로.

과연 그런 모습을 국민이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랑곳없다. 지지자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국회의원 배지가 중요하지 국민의 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지자의 지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욕먹더라도 금배지 달고 한 자리 하면 다 상쇄된다.

문제는 그렇다면 나머지 더민주 국회의원들의 생각은 어떨까. 다시 친문재인 성향의 초선의원들은 거의 확실할 듯하다. 범친노로 분류되는 친문성향의 다른 계파 의원들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나눠먹기란 누구에게나 달콤한 유혹이다. 별다른 노력없이 과실을 얻을 수 있다. 

어쨌거나 지켜본다. 과연 더민주에게 수권능력이 있는지.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시금석이다. 이마저도 지켜내지 못하면 평생야당이다. 아니 야당조차 하지 못한다. 국민의당이라는 경쟁자가 있다. 하기는 비주류의 입장에서야 자기들 동료가 있는 국민의당과 당장이라도 합당하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더민주가 망해도 된다. 더민주가 어떻게되든 상관없다. 그런 놈들에게 중책을 맡긴다.

당을 바꾸는 것은 근본적으로 국민에 대한 눈치보기다. 국민에 대한 설득이다. 자기들에게 이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 이만큼 잘하려는 의지가 있다.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려 한다. 거꾸로 돌아가려 한다. 어이가 없다. 이놈들은 그래서 안된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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