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같은 경우 어디 가서 무슨 뒤에 '장'자 붙거나 하는 자리 맡는 거 무지 싫어하는 편이다. 귀찮다. 성가시다. 물론 아무리 하찮은 것이더라도 일단 뒤에 '장'자 붙으면 나름대로 권위가 서는 것도 있다. 어느 정도 사소한 것이라도 남들과 다른 특권 같은 것도 주어진다. 아무튼 뭐가 좋아도 좋기는 한데, 그러나 그보다 그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너무 버겁다. 내가 왜 그런 번거로운 일들을 맡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장'자를 단지 남들보다 높은 곳에 있는 무엇으로만 생각한다. 남들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이고 고귀한 명예이고, 보다 크고 강력한 권력이고 권위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책임이다. 의무다. 자신을 얽매고 옭죄는 족쇄이고 형틀이다. 자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벗어던지니 홀가분하고 자유롭다. 그럼에도 끝내 자기가 먼저 자리를 내던지지 못하는 것은 그마저도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이고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 무게를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퇴가 책임이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가 자기에게 주는 벌이어야 한다. 피해이고 고통이어야 한다. 불이익이어야 하고 굴욕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말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스스로 책임을 졌다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그런데 단지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대신한다. 아무런 사죄도 반성도 없이, 더구나 아무런 사후처리 없이, 그저 자리에서 물러난 것만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이겠는가.
문득 작년 고작 4석짜리 재보궐선거에서 패했다고 비주류가 모두 나서서 물러나라 압박했을 때 당의 혁신을 위해 끝까지 당대표자리를 지키던 문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당시 문재인에게 물러나는 것과 당대표 자리를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편하고 쉬운 길이었을까? 당대표자리 그냥 물러나면 된다. 실제 김종인을 영입해서 비대위원장에 앉히고 절차에 따라 당대표에서 물러났을 때 문재인은 어느때보다 홀가분한 모습이었었다. 지금도 당과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고 있다. 당대표일 때는 사소한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꼬리가 따라붙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거의 없다. 그래서 과연 당시 문재인에게 당대표자리를 지키는 것과 포기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고통이고 불이익이고 모욕이었을까.
그릇의 차이다. 책임질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그때문에 자기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 지금 당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각오하고 무엇을 희생해야만 하는가. 물러나는 것은 쉽다. 오히려 남아서 리베이트추문에 대한 뒤처리를 하자면 온갖 구설에 휘말리기 쉽다. 당내 관계도 불편하게 꼬일 가능성이 높다. 리베이트에 관련되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바로잡으려는 당대표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미흡하다 여겨진다면 그에 따른 언론과 여론의 비판 역시 감수해야 할 것이다. 대선가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당대표로서 자신이 대표로 있는 당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인가. 그저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수모로써 모든 것을 대신할 것인가.
안철수가 생각하는 새정치의 실체다. 그래서 작년에도 그렇게 문재인더러 당대표 물러나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일 게다. 당대표는 특권이다. 권력이고 권리다. 그러므로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진정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표의 자리에 앉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불리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안철수의 방식과도 이어진다.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기에 권력을 가지려는 것이 아닌 권력이라고 하는 결과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다. 권력이란 자신을 위한 트로피다.
참 편하게 정치를 한다. 나같으면 진짜 편하다. 책임질 일 있을 때마다 더이상 책임질 일 만들지 않게 편하게 자리부터 내놓는다. 있던 자리에서 내려오기부터 한다. 그 다음에는 자기와는 상관없다. 작년에도 그랬다. 정동영과 천정배 두 사람이 탈당까지 하게 된 것도 결국 이전 당대표였던 김한길과 안철수가 뿌린 씨가 그렇게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당대표에서 물러났으니 자기와는 상관없다. 전직당대표가 물러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현직당대표를 비난하며 물러나라 압박한다. 자기와는 상관없다. 이제 자기와는 전혀 아무 상관도 없다.
정당이란 사기업과 같다. 자신은 CEO다. 내 회사다. 내 소유다. 그런데 내가 그 소유로부터 물러나야 한다. 아마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까. 권력을 사유화한다. 사회적 책임과 의무마저 사유화하려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당대표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무엇보다 큰 책임이다. 오히려 넘친다. 자신은 자신이 져야 하는 책임 그 이상으로 책임을 모두 졌다. 재미있는 캐릭터다. 너무 흔해서 이제는 식상하다. 새정치의 안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