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아주 오래전이다. 아직 사람이 순진해서 진짜 진지하게 사실과 논리로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토론을 하려던 진짜 오래전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하이텔 쓰던 시절 토론장에서 어떤 사람과 주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꽤나 길게 토론을 하던 끝에 상대가 갑자기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당황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자기가 억울하다며 우는 소리를 하면서 하소연을 하는데 순간 내가 뭘 잘못햇는가 잠시 자기반성까지 했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 내가 키배 떠서 이겼구나. 그때는 아직 키배란 말이 생소했을 때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떠들어도 이미 성인이 된 상대의 생각을 바꾼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텐데 하물며 괜히 감정 상한다고 얻어맞을 걱정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이면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터넷에서 글로 논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겨먹자는 것이다. 논리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옳다는 걸 입증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열받게 해서 폭주하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논쟁을 포기하게 만들어서 이기는 것이다. 어차피 긴 글 자료를 찾아서 일일이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까지 정리해서 진심을 담아 써봐야 제대로 다 읽고 답글 다는 놈은 거의 없다. 키배 뜨면서 상대가 무슨 말 하는지 신경써가며 키배뜨는 놈은 거의 없다 보면 된다. 그래서 키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가 쓴 글 가운데 꼬투리잡을 한두가지 찾아서 그를 통해 상대가 제대로 긁히도록 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키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방대한 지식이나 치밀한 논리같은 것이 아닌 상대를 제대로 긁을 수 있는 말빨과 글빨이라 하는 것이다. 이준석 지지자들도 그래서 이준석의 토론능력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지식이나 논리가 아닌 말빨을 드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제대로 논리적이라서가 아니라 상대를 이겨먹을 수 있는 말을 골라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준석을 제도권으로 들어간 일베라 일컫는 이유일 것이다. 제도권에서 성공한 키배라 부르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이준석을 감히 유시민과 비교하는 것을 보면서 유시민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코웃음부터 치는 것이다. 유시민도 젊은 시절 날선 말로 많은 사람들을 열받게 만들었었지만 그럼에도 그 말의 내용 하나하나가 구체적인 근거와 치밀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또한 화나고 짜증나는 가운데서도 그 지적인 능력만큼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만들었었다. 지금은 정치를 그만둔 김영춘이 열린우리당 시절 유시민을 두고 '옳은 말도 싸가지없게 한다'며 비판했던 것은 그런 다수의 심리를 대변하는 한마디라 할 수 있었다. 당장 나를 공격하니까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래서 밉기도 한데 정작 그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유시민 자신도 그 시절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기는 해도 무시하지는 않았다며 자평하기도 했던 것이었다. 실제 유시민과 정반대편에 있는 보수진영에서조차 유시민이라는 사람의 주장이나 논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유시민이라는 사람 자체만은 인정하는 경우를 지금도 주위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김대중을 욕하면서도 두려워했던 보수지지자들의 논리인 능력있고 똑똑한 빨갱이 그대로인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이준석은 어떤가? 이준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이준석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존경하고 인정하는가? 그러고보면 재미있는게 유시민을 가장 무시하고 혐오하는 놈들이 한결같이 이준석을 추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왜일까?
아무튼 이번 대선후보 토론을 통해서도 드러났는데 이준석의 토론태도라는 것이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이다. 이준석이 토론을 잘한다 말하는 것도 그만큼 상대의 약점을 잘 찾아서 헤집는다는 뜻으로 그의 지적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가인 것이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아무리 옳은 척 하는 사람도 이준석과 만나면 결국 자기 속내를 드러내며 자기 성질에 못이겨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능력은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딜가나 왕따나 되기 딱 알맞는 능력인 셈이다. 조나라의 명장 조사가 아들 조괄과 병법을 토론할 때마다 매번 지고서 저놈한테 군대 맡기면 나라 말아먹는다고 경계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말싸움 잘해서 이겨먹는 것이 반드시 능력이 뛰어나서는 아니다. 그런데 또 그런 것을 조괄 또래의 조괄같은 놈들은 잘한다며 좋아하며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이준석이 젊은 층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일 것이고. 특히 인터넷에서 키배문화에 익숙한 놈들에게는 거의 아이돌과 같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지금 MBC부터 방송사들마다 이준석을 띄우려 난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자놈들도 대부분 딱 그 세대일 것이거든. 공식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월급 받으면서 키배 뜨려고 기자 된 놈들 분명 있다. 특히 한겨레 같은 진보매체면 거의 확실하다. 어쩐지 한겨레가 이념적으로 전혀 반대편에 있는 이준석을 너무 좋아하더라. 키배와 지성을 착각한다. 키배와 지능을 혼동한다. 키배 잘뜨면 유능하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키배로 이름날린 놈들 치고 제대로 된 놈을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논객입네 뭐네 글로 이름을 알린 놈들치고 지금 어디서 제대로 사람구실 하고 있는 놈들 한 번 찾아보자. 그나마 한윤형 같은 놈은 서울대라는 학벌이라도 있으니 제밥벌이는 하는 모양이다만. 한윤형 묻었다는 소리에 그래서 빅마우스나 요즘은 무슨 남천동인가 하는 채널 근처도 얼씬 않는다. 더럽다.
아무튼 이번 대선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막연하게 이준석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던 특히 30대 이상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오히려 인터넷문화를 초기부터 겪어온 세대라 그런 식의 태도를 무척 싫어할 것이거든. 나도 싫어한다. 그래서 블로그질하면서도 정작 댓글접대를 않는 것이다. 댓글로 논쟁도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논쟁하는 자체가 이제는 혐오스럽다. 그냥 적당히 친목질이나 하며 지내는 게 낫지 무슨 논쟁인가 논쟁은. 가끔 늙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한 마디 하게 되는 경우에도 금방 후회하고 만다. 예전처럼 하루 넘겨 논쟁하는 자체가 이제는 너무 힘들다. 그런데 하물며 대선후보라는 놈이. 아니더라도 차기 보수의 희망이라 여겼던 인간일 터다. 그런 수준이다. 딱 거기에 걸맞은 정도다. 너무 어울린다.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아 그래서 너무나 뿌듯하다. 키배로써 여기까지 왔으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공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