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컴퓨터가 고장나서 한참을 헤맨 적이 있었다. 원인은 리셋단자에서 일어난 이상전류. 리셋단자에 스위치를 연결하면 이상전류가 발생하여 메인보드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무한재부팅. 그런데 설마...


무심코 파워단자와 리셋단자를 함께 연결한다. 메인보드를 테스트해도 굳이 리셋단자만 따로 테스트하지 않는다. AS센터에 가서 고장여부를 확인할 때도 파워버튼만 건드려 부팅여부를 확인하지 리셋단자의 이상전류까지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는다. 그런 건 정밀검사로 따로 들어가야 하는데 과연 그만한 리스크를 감수할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차근히 하나하나 원인을 따지다 보면 언젠가는 찾아내기야 하겠지만 과연 언제이겠는가.

하지

그동안 원인을 몰라 이것저것 부품을 갈아끼고, 용산의 서비스센터까지 왕복하고, 그 사이 컴퓨터를 쓸 수 없으니 피씨방에서 게임을 대신하고, 그 비용을 모두 더하면 최소 몇 만원은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하다하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동네수리점에 맡기고 돌아나오면서 최소 한 5만원은 부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5만원쯤 불러도 나로서는 굉장히 싸게 한 것이라고. 10만원은 조금 비싸지 않을까. 그런데 웬걸? 아주 미안한 목소리로 2만원이라 말한다.


얼마나 시달렸을까? 굳이 부탁하지도 않은 컴퓨터 내부정리에, 무한재부팅으로 멈춰 있던 윈도우 설치까지 알아서 모두 끝마쳐놓고 있었다. 쇼트가 원인이지만 내부가 너무 엉망이라 그런 것일 수 있다. 그 정도 변명은 용인해 준다. 인터넷을 찾아보더라도 컴퓨터 수리비에 대한 원성들이 자자하다. 수리점 없이 혼자서 컴퓨터를 고치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과 돈이 더 들어가야 할까?


어쩌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다. 어째서 닭 한 마리의 값은 얼마인데 치킨값은 그 몇 배나 받고 있는 것인가. 집에서 만들어 먹으라. 닭을 자신이 먹는 치킨과 똑같이 조리해서 먹으려면 도대체 얼마의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들어갈까? 하나의 맛을 개발하는데도 막대한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간다. 그를 위한 회사도 운영해야 하고, 그러자면 사람도 고용해 써야 하고, 각종 기자재며 설비도 필수적이다. 원가만 따질 것이면 아무 노력도 않고 이익도 챙기지 말라는 것인가. 자본주의는 가치를 극대화하는 데 그 목적을 가지며, 그것을 이루는 것이 생산자의 노력이고 지식이고 기술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까. 직접 만져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무심코 무시하게 된다. 당장 거기에 필요한 유형의 원자재들만을 보게 된다. 리셋단자에 쇼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그것 알아내자고 따로 돈이 더 들어갈 리 없지 않은가. 그저 부품 하나하나 떼어내며 이상여부를 확인하면 된다. 그게 참 귀찮은 짓이다. 지루하고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을 대신한다. 무엇보다 리셋단자의 이상을 의심할 정도면 그동안 컴퓨터를 다뤄 온 경험과 내공이 보통은 넘는다 할 수 있다. 그저 개인 컴퓨터나 만지작거리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결국 수리점에 맡긴 탓에 아낀 나의 시간과 노력과 비용들을 계산해 본다. 그래서 2만원이란 비싼 비용인가. 5만원도 사실 결코 비싸다 할 수 없는 가격이다.


그럼에도 직접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의심하며 따져묻는다. 어떻게 그렇게나 받아먹을 수 있느냐며 시비를 건다. 그만큼 수리기사의 말투는 지쳐 있었다. 그만큼은 받아야 가게도 유지되겠지만 그럼에도 받기 어려울 것을 알기에 굳이 변명거리를 만든다.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까지 더한다. 내가 더 미한하다. 곰곰히 생각했다. 과연 그것이 그렇게 미안해 할 일인가.


사회전반에서 발견되는 문제다. 공장노동자는 과연 그저 사용자로부터 월급만 받아먹는 존재인가. 누군가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일을 하는 것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이다. 그 가운데는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도 적지 않다. 깡그리 무시한다.


새삼 확인한다. 얼마나 한국사회에서 사람의 존재란 하찮은가.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과 기술의 가치란 이처럼 보잘 것 없는가. 보이는 것만을 보고 직접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한다. 즉물적 세계다. 일차원의 사고다. 덕분에 컴퓨터는 잘 쓰고 있다. 이어진다.

한국은 아직 여성운동의 전통이 취약하다. 여성주의에 대한 지식도 없고 인식 역시 빈약하다. 심지어 여성들 자신들마저 여성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기에는 여성주의 자체가 이미 너무 낯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미 여성들 자신이 느끼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여성으로서, 아니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했고, 그리고 아들을 낳기 위해 심지어 아직 핏덩이인 딸을 죽여야만 했었다. 뒤웅박팔자라는 말을 한다. 뒤웅박에 똥을 넣으면 거름통이 되고 돈을 넣으면 돈통이 되듯 여성의 삶도 다 남자 만나기에 달린 것이다. 도박에 미쳐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둘러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겠거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여성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다. 공감해줄 대상이 필요했다. 여성주의자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정작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이들 다수의 일반 여성들에게까지 절실하게 닿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들 평범한 다수의 여성들의 목소리 또한 여성주의자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 하기는 다수의 중요한 여성주의자들은 계급적으로 주류인 상류층에 속한 경우가 많았었다. 평범한 이 사회의 일반적인 여성들을 이해하기에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었다. 그들의 여성주의는 이 사회 여성의 현실이 아닌 그들이 보았던 권위있는 누군가의 저작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세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 논리도 다르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오히려 다수 여성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메갈리아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주장하는 것은 매우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냥 남자들이 잘못했다. 남자들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들이 억울하다. 남자들이 한 그대로 남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여성주의에 대한 첨예하고 정교한 이론 따위 알지 못해도 자신들이 얼마나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아왔는가는 경험으로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되갚아주면 되는 것인가. 페미니즘의 단계 가운데 극단적인 레디컴 페미니즘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페미니즘을 여성과 사회 모두에 각인시켜야 한다.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모두가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자면 멀리 있는 이론이나 논리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직관이 더 빠르고 쉽다. 남자들에게 그대로 돌려주자. 그리고 자연스럽게 현실에 불만을 가진 여성들은 메갈리아로 몰려들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메갈리아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다. 워낙 여성주의의 전통이 일천하다. 여성들 사이 여성주의 자체가 그다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메갈리아를 불편하게 여기는 남성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공격하고 나섰다가는 자칫 여성주의 자체가 와해될 가능성이 있다. 남성이 여성주의마저 정의하고 강제한다. 남성의 눈치를 보며 남성들이 지지하는 여성주의만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여성주의가 어느 정도 뿌리내리고 있다면 걱정이 덜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니 더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분노를 세상에 내놓기 시작했다. 절대 그 의미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화려한 수사와 논리로 여성주의를 이론적으로 공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여성이 아니거나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당장 빚때문에 먹고 죽을 농약을 사들고 돌아가는데 농업의 현실이 어떻네 떠들어봐야 농민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과 그런 여성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편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들은 이해할 생각조차 없다.


일탈이 있다면 그것대로 비판하면 되는 일이다. 범죄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끝나는 일이다. 과연 누가 메갈인가. 누가 메갈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는가. 개인의 신상을 뒤지고, 개인의 사상과 양심까지 검열하려 한다. 강제하려 한다. 메갈을 하지 마라. 메갈 근처에도 가지 마라. 설사 자신이 아무 잘못도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메갈과 관계가 있다는 것만으로 너는 악이다. 죄인이다.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배제되어야 한다.


가장 불쾌한 것은 사회의 일부를 다수의 힘으로 철저히 배제하려 하는 그 의도다. 폭력이다. 권력이란 폭력이 정의를 가졌을 때 나타난다. 자신들이 정의가 된다. 그 정의를 확인하려 한다. 다수의 폭력이 권력이 되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파쇼라 부른다. 다양성은 대중의 선택에 의해 배제된다.


범죄는 범죄다. 일탈은 일탈이다. 여성들 역시 당당해져야 한다. 일탈과 범죄를 통해서라도 주장하려는 바가 있다. 회피는 비겁한 것이다. 절박하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메갈리아라서가 아니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항상 상대적인 약자를 향해 기울어 있다. 유일하게 믿는 진실이다.

이를테면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에 대한 상당수 남성들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째서 남성이라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져야 하는가. 나아가 어째서 밤늦게 길에서 남성인 자기를 보면 여성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하거나 가는 방향마저 바꾸는가. 하지만 여성들은 그래야 하거든. 남성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쩌면 메갈리아에 대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음에도 다수 네티즌에 의한 신상털이까지 동반한 메갈리아와 그 우호세력에 대한 집단린치에 대해 비판적인 역시 다수의 입장이 여기서 갈릴 것이다. 메갈리아가 주장하는 미러링이라는 것을 상당부분 인정한다. 지나치다 싶은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 여성들이 실제 일상에서 겪으며 느껴온 억울함과 굴욕감의 반영인 것이다. 남성의 성기를 절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라면서부터 여성이기를 부정당해야 했었고, 남자이기에 태어나지 말라는 말 그대로 여성이기에 태어나서는 안되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었다. 그리 오래지도 않다. 지금도 나이 지긋한 세대에서는 일상으로 쓰이고 있다. 직장에서 저질러지는 성폭력과 심지어 직접적인 성범죄들도 말할 것 없다. 취업과 인사상의 불이익 또한 여성에게는 현실이다. 여성에게 가장 안전한 직장은 전업주부다. 하기는 그마저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또 어떤 남성에게는 그것은 남의 이야기다. 자기가 겪기에 오히려 여성이 아닌 남성들이 차별받고 있다. 꼼꼼히 따져보자. 여성들이 취업과 인사에 있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이유들이다. 여성들이 급여 등에 있어서도 불이익을 받는데 정당하다 믿고 있는 이유들이기도 하다. 밤길도 함부로 혼자서 다니지 못한다. 어디 남자와 믿고 술자리 가지기도 불가능하다. 학교 선후배, 동기조차 절대 믿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여성이기에 당해야 하는 강요와 압박을 과연 남성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메갈리아의 미러링에서 남성들을 불편케 만드는 폭력성만이 보이는 것이다. 그 폭력성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미러링은 분명 반사회투쟁이다. 그리고 반사회투쟁의 목적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대상을 불편케 함으로써 현실의 부당함을 깨닫도록 만든다. 최소한 일부로 하여금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인식토록 강제한다. 메갈리아 논란이 일어나자 바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여성에 대한 집단적 혐오가 그 증거다. 꼭꼭 가면 뒤에 숨겨두고 있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메갈리아를 핑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당장 메갈리아에 대해 공격하면서 앞장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메갈리아를 하는 여성들의 외모나 신상에 대한 것이다. 여성들은 어떻다. 이 사회에서 여성들은 어떤 존재들이다. 나아가 여성주의란 이런 것이다. 자기들이 여성주의까지 정의하려 한다. 여성주의의 운동마저 자신들이 바라는 방식으로 강제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혐오고 차별이다. 자신들이 인정하는 여성주의만 인정하겠다. 자신들이 인정하는 여성만 인정하겠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메갈리아에 대한 공격은 곧 여성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진실한 속내다. 똑같이 메갈리아에 비판적이더라도 굳이 여성이나 여성주의에 대한 공격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면 단지 메갈리아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처럼 야만적인 인간사냥을 방불케하는 집단공격을 긍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메갈리아가 일베를 미러링한다면 반메갈리아는 메갈리아를 미러링한다. 그나마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이해할 부분이 있지만 메갈리아에 대한 미러링에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는가. 그냥 기분나쁘다. 단지 감정이다.


메갈리아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적 행동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 역시 남성인 때문이다. 불쾌하다. 불편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심리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온건한 여성주의가 이루어낸 것이 무엇인가. 여성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여성들이 특혜를 받고 있다. 남성이 차별당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서 남성이 차별당하는가. 남성을 차별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한국사회 여성의 지위와 현실, 그리고 그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나마 나아진 것은 이제 드디어 여성들이 남성들의 경쟁자로 스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을 두려워한다. 여성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원래 개도 두려운 상대를 만나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나아졌다. 더이상 여성은 동정의 대상도 연민의 대상도 아니다. 그나마 희망이다.

비단 여성의 경우만은 아니다. 처음 인간이 자신보다 열등한 다른 존재를 만났을 때 가지는 감정은 무시다. 굳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일부러 차별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약자이고 열등한 존재이기에 가만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에 대한 차별을 굳이 제도화하지 않음으로써 얼핏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상대적으로 인정받은 듯 여겨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냥 무시한 것이다. 차별조차 할 필요 없이.


그러다가 조금씩 여성의 존재를 의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정의하기 시작한다. 여성들에게도 남성들처럼 반드시 따라야 하는 사회의 규범과 기준이 있다. 남성들에게도 엄격한 사회적 규범이 관습적 제도적으로 강제되듯 여성 또한 그래야만 한다. 다만 여성과 남성이 같을 수 없으므로 여성은 여성의 규범을 따르면 된다. 다만 그 규범은 바로 얼마전까지 일방적으로 무시당해 온 사회적 관습과도 관게가 있다.


그렇데 차별받다가 조금씩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사회활동 역시 많아지만셔 어느새 남성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까지 이르게 되면 이번에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나타나게 된다. 더이상 무시할 수 없다.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규준을 강제할 수도 없다. 이미 여성은 남성인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다. 저들이 자신과 다른 것은 저들이 정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저들은 틀렸다. 부정한 것에 대한 당연한 거부다.


참고로 중세유럽의 기사도나 그로부터 유래한 신사의 여성에 대한 배려는 이 가운데 가장 위에 있는 무시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차피 자신보다 열등하다. 자신의 배려와 도움이 없이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조금 양보하고 손해보더라도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 경쟁자가 아니다. 대등한 동반자도 아니다. 그 경계에 있다. 인간으로 여기는가 아닌가. 차라리 혐오가 나을 수 있다. 최소한 같은 인간일 수는 있다. 아무튼.

지금 메갈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뭉친 여러 커뮤니티에서 지배적으로 나오고 있는 주장 가운데 하나가 '진정한 페미니즘'이다. 과연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인가.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자신들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인가의 여부를 자신들이 판단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평가 역시 자신들이 결정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이번 메갈리아 사태에서 한결같이 메갈리아 편에 서려는 이유다.


여성들 자신을 위한 페미니즘이다. 여성들 자신에 의해 여성들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결권은자존과도 이어진다. 내가 결정한다. 내가 판단한다. 내가 책임진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대신 정의하고 판단하고 강요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이다. 진짜 페미니즘은 이런 것이다. 자신들은 이런 것들만을 페미니즘으로 인정한다. 그 밖의 것들은 페미니즘으로 인정할 수 없다. 먼저 자신들을 납득시키라. 자신들의 동의를 구하라.


간단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데 조선총독부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이나 수단들을 정의한다.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일본제국의 법과 제도 안에서 독립운동은 이루어져야 한다. 일본인 자신들이 인정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일본인 자신들이 동의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한다면 그때는 일본인 자신들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의 편에 서 줄 것이다. 그래서 과연 독립운동가들인 조선총독부가 정한 기준에 따라 독립운동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과연 그들의 노선이나 방법이 정당하며 효과적인가의 여부는 자신들끼리 토론하고 논쟁하며 결정할 문제다. 무엇이 페미니즘인가는 자신들이 결정한다. 그에 대한 판단이나 행동 또한 자신들이 알아서 결정한다. 너희들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다. 괜히 남성이 여성주의자의 논쟁에 끼어들어봐야 좋은 꼴 못 보는 이유다. 타인이다. 어떻게 해도 몇 다리 건너 남이다. 얼마나 여성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는가. 여성들 자신을 위한 토론에 남성들이 어째서 자신들의 시각을 강요하며 끼어들려 하는가.


메갈리아를 응징해도 여성주의자들 자신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리하면 되는 것이다. 전혀 남인, 심지어 대상이기도 한 남성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밀리게 되면 남성들이 여성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결정하게 된다. 남성들이 동의하는 범위 안에서만 여성운동을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이 여성운동에 비판적인 남성에 의해 종속된다. 존재의 이유 자체를 부정당할 수 있다. 전쟁이다. 죽느냐 사느냐.


어째서 뻔히 보이는 여러 문제들에도 여성주의자들과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진보정당과 정치인들이 메갈리아의 편에서 네티즌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최소한 일베에 대해서 반대편의 네티즌들이 진정한 보수는 어떤 것이라며 그들을 정의하거나 강제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었다. 단지 일베라고 하는 커뮤니티의 평소 행동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보수 자체가 타겟은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도 그래서 일베를 쉽게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메갈리아 사태에는 여성주의가 걸려 있다. 메갈리아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여성주의적 성향에 동의하는 다수 개인들이 이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다. 발단이 되었던 성우 역시 메갈리아의 주장을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일부 주장들에 공감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타겟이 잘못되었다. 처음부터 행동 그 자체를 목표로 삼았어야지 여성주의까지 전선을 넓혀서는 안되었다.


말 그대로 메갈리아사태는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여성주의와 비여성주의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메갈리아라 할지라도 여성주의자로서 여성주의를 지키고 싶은 입장과 여성주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메갈리아를 이유로 여성주의를 문제삼으려는 이들의 싸움이 된 것이다.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사람들마저 말한다. 그런 것은 진정한 여성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여성주의는 이런 것이다. 진정한 여성주의자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 판단도 결정도 행동도 그들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 한다.


늬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혀 상관없는 너희들이 멋대로 단정짓고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만 내버려두면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 갈등과 경쟁을 통해 결론지어졌을 문제였다. 여성주의를 길들이려 한다. 나 역시 이번 사태를 보며 느끼는 것이다. 여성과 여성주의에 부정적이던 이들 상당수가 메갈리아 사태에 편승하여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기고 있다. 집단이 여성주의를 강제하려 한다.


서로 보는 것이 다른 것이다. 비여성주의자들에게는 여성주의가 대상이다.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여성주의의 주체는 바로 자신들이다. 굳이 여성주의와 여성주의자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일방적인 믿음과 결정만을 강요하려 할 뿐이다. 그에 비하면 여성주의자들에게 그것은 자신들의 이야기다. 자신들의 몫이다. 알아서 한다. 누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끝없이 부딪히고 있다.


이런 적이 없었다. 거의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하나가 되어 뭉쳤다. 심지어 일베마저 그 대열에 함께한다. 그야말로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는 지구연합군이다. 메갈리아라고 하는 악을 아예 뿌리째 뽑아야 한다.


사실 따지고보면 인터넷 커뮤니티 가운데 메갈리아만 과연 특별하게 여겨야 할 정도로 대단히 문제가 많은 사이트인가는 회의적이다. 어디나 극단적인 사람들은 있고, 더구나 커뮤니티 자체가 극단적이다 보면 그 극단이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도 적잖이 있어왔었다. 다만 차이라면 대부분의 경우 그같은 커뮤니티들은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일 텐데, 그래서 거의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졌더라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어째서 유독 그 가운데 메갈리아만 인터넷 전체가 나서야 할 만큼 공공의 적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아마 그래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나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진보지식인들, 혹은 작가들이 메갈리아의 편에 서서 대중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기도 할 터다. 남혐이기 때문이다.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한 대부분의 문제가 많은 사이트들은 거의가 남성이 주류인 남초커뮤니티였던 반면 메갈리아만 남성을 혐오하는 여성들의 커뮤니티였던 것이다. 감히 여성이 남성을 혐오한다? 여성주의자들의 이상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남성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단호한 자신감이야 말로 사회의 룰을 만드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오만에 가까웠다. 자기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여성과 여성주의자들의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반란진압이라 할 수 있다. 중세유럽에 봉건영주들이 서로 칼들고 창들고 열심히 싸우다가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면 하나가 되어 진압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봉건영주들은 모두가 귀족이다. 지배신분이다. 그리고 농민들은 그같은 귀족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신분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당시 시대의 정의이자 질서이자 가치였다. 그것을 부정한다. 적대하는 영주와의 싸움이야 이해에 따른 것이라 하겠지만 신분이라고 하는 신성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응징하는 것은 시대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었다. 여성들에게 그 주제를 알도록 한다. 여성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알게 한다. 자신들이 주류이고 주체임을 모두에게 확신시켜준다.


그냥 개별사안에 대해 비판하고 지나가면 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 큰 이슈도 아니었다. 넥슨에서 메갈리아를 한다는 이유로 성우 하나를 바꿨다. 단지 메갈리아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어떤 반사회적인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메갈리아의 주장 가운데 공감하는 것들을 퍼나르고, 메갈리아에서 제작한 티셔츠를 사서 입었다. 그리고 그같은 넥슨의 결정에 대한 언제나와 같은 논쟁이 불거지게 되었다. 누가 옳네, 누가 더 잘못했네, 그런데 그것이 그만 메갈리아와 남혐과 여성주의의 논쟁으로 번지고 말았다. 성우를 옹호하고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모두는 적이다. 사회의 악이다. 십자군이다. 마땅히 자신들은 그 악을 응징해야 한다.


사실은 심심한 것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경기도 안좋고 특히 네티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청년들은 여러가지로 안좋은 일들이 누적되어 있었다. 분노를 발산할 대상이 필요했다. 항상 그 먹이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타진요부터 적우, 그리고 얼마전에는 설현이 그 대상이 되었다. 물어뜯고, 잡아 짓이기고, 그렇게 끝내 무릎꿇려 굴복시키고 만다. 자신들의 승리를 확인한다. 승자의 우월한 위치를 즐기려 한다. 그런데 하필 여성들이 여성주의라는 불편한 근거를 가지고 남성들을 비판하고 나서고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히 부적절한 것들이 있었다. 참고로 미러링이라 하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한 편으로 남성들이 여성을 향해 일상적으로 보이는 모습 가운데 하나였다. 아니라 말하면 섭섭하다. 일베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린 것이 아니다. 의외로 일베는 인터넷에서 그 뿌리가 아주 깊다.


그것이 일견 마녀사냥으로까지 보이는 메갈사냥으로 번지고 만 이번 메갈리아 사태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메갈사냥에서 보듯 인터넷에서 저들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 수에 있어서도 힘에 있어서도 현실에서보다 더 압도적인 위력을 자랑한다. 자신들끼리 화력을 모았다. 그리고 가볍게 응징해 주었다.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토벌은 계속된다. 지리멸렬하여 흩어졌어도 잔적까지 모두 뿌리를 뽑는다. 즐기고 있다. 이처럼 쉽고 승리가 확실한 싸움은 항상 모두에게 최상의 유희다.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토벌에 가까운 소란이 지리하게 이어지는 이유다.


만일 메갈리아의 구성원들이 여성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앞세우는 것이 여성주의가 아니었다면? 그들을 옹호하는 이들이 평소 여성과 여성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면? 메갈리아의 남혐을 비난하면서 슬금슬금 메갈리아를 타겟으로 여혐을 조장하는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커뮤니티에서 메갈이아라는 절대악이 그같은 부적절한 사고와 발언들까지 정당화시켜준다.


그냥 토벌인 것이다. 힘의 과시인 것이다. 그리고 메갈리아를 비롯한 그를 옹호하던 이들마저 모두 지리멸렬 흩어졌다. 그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인터넷에는 쓰레기도 많고 메갈리아 역시 그런 쓰레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일베마저 손을 잡고 함께 행동한다. 일베는 그나마 이해가 간다. 메갈리아가 정확히 미러링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이 일베였을 테니까. 입장이 같다.


아무튼 보기 지겹다. 당신들 옳은 것 안다. 당신들 강한 것도 안다. 바보가 되어야지 미친 짓을 해서는 안된다. 무엇이 정의인가. 어디까지가 정의인가. 멈출 줄 아는 것이 지혜이고 이성이다. 지겹다. 악의는, 서로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재생산된다. 날이 만이 덥다.

이를테면 메갈리아가 주장하는 '미러링'이란 반사회투쟁의 일환일 것이다. 기존의 권위가, 권력이 정의한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부정함으로써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하는 것이다. 보다 온건하게는 현대 민주주의사회에서 상식이 되어 있는 시민불복종에서부터 보다 과격하게는 아랍에서 일어나는 자살폭탄테러가 그 범위에 속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결코 너희의 존재를, 너희가 정한 법과 규범과 윤리를 인정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같은 일련의 반사회투쟁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자신들이 기존의 사회적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고 거부하려 한다는 자체를 일부러 속이거나 감추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예 일부러 먼저 자수함으로써 처벌받는 과정까지도 투쟁의 일환으로 여기는 이들마저 있다. 일부러 자수해서 처벌받는 것은 무리더라도 최소한 기존의 규범에 의해 처벌받게 되었을 때 그마저 부정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한다.


내가 이른바 메갈리아라 불리우는 극단적 여성주의자들에 대해 느끼는 실망의 정체다. 여성주의 운동을 하다 보면 조금 과격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사회보편의 가치나 통념을 벗어난 말과 행동을 보일 수도 있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비겁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남성중심의 사회와 그런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질서를 거부하고자 미러링을 시작했다면 그 의도를 분명히해야 한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바로 그 남성들의 비난과 공격을 정면으로 받으며 그마저 자신들의 정의를 입증하기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차라리 일베는 당당하다. 아무데서고 자기들이 일베라는 사실을 티내지 못해서 안달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여기저기 퍼나르며 확산시키는데 열중이다. 그 과정에서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마저 나오고 있다. 법적인 처벌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당당하게 같은 일베이용자 사이에 인증하며 자신의 주장과 정체를 드러낸다. 그에 비해 메갈은 얼마나 당당히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자기들끼리 모여서 낄낄대는 것은 그저 자위질에 불과하다. 자기들끼리 만족하고 자기들끼리 즐거워한다.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최소한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테러를 저지른다.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차를 몰아 돌진하고, 자기가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도 비행기를 몰아 건물에 들이받는다. 동의하지는 못해도 나름의 절박함이나 자신들만의 정의가 그들의 행동의 동기가 되고 있음은 이해할 수 있다. 자칭테러리스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뉴욕에 핵폭탄을 떨어뜨리는 상상을 하며 낄낄거린다면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그저 기분만 나쁠 뿐 사회적으로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으며 아무런 가치도 가질 수 없다.


남성이 싫다면 남성과 싸워야 한다. 남성중심의 사회가 싫다면 그런 사회와 싸워야 한다. 아무 상처도 희생도 없이 싸우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조금씩은 다치고 아파하며 현실을 이겨나간다. 그만한 각오도 없이 그저 모여서 자기들끼리 수다나 떤다. 어디 가서 당당히 하지도 못할 이야기들을 자기들끼리만 주고받으며 벽을 친다. 오히려 경멸받는다.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하게 된다. 지금 메갈논란의 진짜 정체다. 메갈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런 그들의 존재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럽고 경멸스럽다.


예전 어느 책 제목이었던가? 여성들이여 테러리스트가 되라. 테러리스트가 되려면 아예 진짜 테러리스트가 되던가. 아니면 적당히; 현실에 순응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도록 타협해나간다. 이도저도 아니고 그저 자기들끼리만 남들에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자위질한다. 사실 이런 논란의 가치조차 없다. 그냥 한심한 찌질이들이다. 그나마 그런 이들에 대해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대하는 이들이 가엾을 뿐.


메갈과 메갈이 추구하는 여성적 가치에 동조하는 이들을 굳이 분리해서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다. 메갈의 주장은 요란하다. 화려하다. 그래서 이끌리기 쉽다. 하지만 실체가 없다.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대고 싶은 여성들 자신의 절박함이 있다. 그 괴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계속 챗바퀴다. 어째서 많은 여성들이 메갈리아에 우호적 입장을 드러내는가. 이해하지 못하고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

도덕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평등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다 관대한 도덕적 기준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다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결국 공평하지 않은 도덕을 그나마 공정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어지간히 불리한 선택을 해도 기본적인 우월함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반대로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서야 겨우 상대에 너무 뒤지지 않을 수 있다. 키만 2미터가 넘어가고 손에 칼까지 든 강도를 상대하면서 정정당당을 따진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겠는가. 총을 들고 협박하는 살인자를 상대로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면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다수의 적을 상대로 모래를 끼얹고, 함정에 빠뜨리고, 뒤에서 기습을 한다. 모두 정당하다.


온건한 수단을 사용해서 상대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는 것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하다 보면 언젠가는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온건하다는 자체가 결국 상대에게 자신은 맞춰가는 것을 뜻한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수단에 대해 상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맞춰 하나둘 양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에게 길들여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순치라 부른다. 상대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로지 상대가 이해와 공감을 베풀기만을 막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원래의 의도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선택도 결정도 오로지 내가 아닌 상대의 판단에 달렸다.


일제강점기 온건주의 노선을 걷던 독립운동가들이 어느 순간 대부분 친일파로 전향해 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기는 그 순간에도 많은 온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조선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한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을 도와야 한다. 일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일본이 고마워서라도 자신들을 달리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맞서싸워봐야 상대가 안되니까. 싸울 수 있는 수단이란 이미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일본의 자비에 기대어 일본의 인정이 조선과 조선인들을 돌아봐줄 날만을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독립의지는 사라진다. 그 자체가 이미 일본에 종속된 식민지의 현실 그 자체였을 테니까. 불관용과 비타협을 앞세운 상대와의 온건주의란 그래서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도 그동안 많은 온건한 여성주의자들이 있었다.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눈높이에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만든 보편작 사고와 가치에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굳이 크게 다투거나 싸우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 천천히 진행하고자 한다. 물론 그 주된 목적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남성의 이해와 공감이었다. 그들의 호의였다. 그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여성들을 위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왔다. 분명 성과였다. 그런데 정작 그 결과가 그나마 알량한 여성주의의 성과에 대한 남성의 비아냥과 적개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성의 당연한 권리주장마저 무시하며 여성주의마저 남성에 종속시키려 시도한다면? 남성이 보기 좋은 여성주의란 남성을 위한 여성주의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위한 것이다.


벌써 오래전이다. 어느 여성주의 논쟁에서 한 여성주의자에게 남성은 이 논쟁에서 빠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도 어차피 남성이지 않은가. 똑같은 남성일 뿐이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 자신이 해결한다. 여성의 문제는 오로지 여성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다. 서운할 정도로 냉정하던 그 말의 뒤에는 그같은 시리도록 자조적인 짙은 절망과 체념이 묻어 있었다. 남성의 이해를 구해서는 안된다. 남성의 공감을 구해서도 안된다. 남성과 싸워야 한다. 남성과 싸워서 여성이 남성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남성이 타협하고 양보할 수밖에 없음을 직접 인식시켜야 한다. 일깨워야 한다.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에 있어 메갈리아는 일종의 상징이다. 어째서 많은 여성들, 여성주의자들,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이토록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메갈리아 역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이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베와는 다르다. 일베는 기득권에 더 가깝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비주류가 주류의 흉내를 내는 곳이다. 비주류의 목소리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이 사회 기득권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강자와 약자의 도덕은 분명 다르다 말했었다. 허용의 범위가 다르다. 메갈리아를 옹호한다 해서 메갈리아가 한국사회의 주류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이 당장 현실이 될 수도 없다. 하물며 그보다 더 약하고 영향력도 없는 보다 온건한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그런 주장들을 하는 이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벌써 여러해 전이다. 장애인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했던 적이 있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네티즌 역시 그에 적대적이었다. 불편하다. 시끄럽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아무에게도 불편끼치지 말고 조용하게 시위하도록 하라.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장애인들의 목소리는 그나마 비판적 기사로조차 다루어지지 않았다. 남성들이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남성들이 바라는대로 양보만 계속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이 바라는대로 온건하고 착실한 투쟁만을 한다면 여성주의는 과연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정확히 메갈리아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해도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는, 그럼에도 막연한 기대로 점차 순치되어 정체를 잃어가는 현실에 대한 반발일 수 있다. 메갈리아라고 하는 사이트 자체가 아닌, 그런 주장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배경들에 대한 공감이다. 남성은, 그리고 남성들이 만든 지금의 사회는 이해와 공간의 대상이 아니다. 대화와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극복과 저항의 대상이다.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다. 혁명가가 된다. 온건한 수단으로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과격한 수단 뿐이다.


메갈리아가 어떤 사이트인가를 따지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시작은 특정한 몇몇사람이 했어도 결국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그리로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메갈리아에 비판적이면서도 메갈리아와 함께일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배울 만큼 배웠고 남들보다 똑똑하기도 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메갈리아의 편을 드는 것일까. 그러면 메갈리아가 나타나기 전 그들은 여성주의에 대해 우호적이었는가. 메갈리아가 아니었다면 메갈리아에 비판적인 다수 네티즌들은 여성주의자의 편에서 여성주의를 위해 싸울 수 있었을 것인가.


불통의 사회가 만든 비극이다. 서로를 향해 총과 자살폭탄테러를 주고받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와도 닮았다. 온건주의는 설 곳을 잃는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메갈리아가 시작이 아니었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여성 자체에 대한 비하와 멸시로까지 이어졌다. 작용은 반작용을 부른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미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남성이란 단지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함께 대화하고 이해를 구할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남성과 여서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


회의적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여성주의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인터넷에서 여성은 그나마 지금보다 더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남성들은 여성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인가?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기에 어느새 메갈리아에 이끌리는 여성도 늘어난다. 어느새 인터넷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 심지어 그것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안보이는 남성들의 속내가 여성들을 메갈리아로 등떠밀어 보내고 있다.


남성은 적이다. 여성은 차라리 적조차 아니었다. 차라리 적이기를 바란다. 메갈리아에 가지는 유일한 불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이고 악이기를 선택하라. 정작 남성들이 만든 논리와 가치의 뒤에 숨는다. 자신들은 원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관용과 배려를 바라며. 비겁하다. 최소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의 자살폭탄테러범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일베사냥에 이어 메갈사냥이다. 강자라는 자신감이다. 사회의 룰을 자신들이 정한다고 하는 자존감이다. 그럼에도 여성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 순종해야만 한다. 끝이 없다. 답은 명확하다.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무엇이 원인이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한 걸음만 물러서면 되는데, 역시 이 경우에도 대칭성은 적용되지 않는다. 보다 우선해야 하는 주체가 있다.


어차피 메갈리아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이해하고 일정부분 공감하며 아마 대부분은 이해도 공감도 못할 것이다. 너무 이질적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는 것은 그런 대상도 한국사회와 같이 극단으로 기운 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 때문이다. 늦었다. 아직 너무 뜨겁다.

사실 아예 처음부터 작심하고 체계를 갖추지 않는 이상 소규모 집단은 개인의 인연이나 인정에 이끌러 운영될 수밖에 없다. 지인들로 구성원을 만들고, 혹은 구성원이 서로 지인이 된다. 엄격한 규범이나 규칙보다 개인의 인정과 의리가 집단을 유지하는 질서이자 구조가 된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선진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규모사업장 같은 경우 그냥 사장과 임원, 직원들이 거의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낸다. 실제 그 가운데 다수가 가족이거나 친척이거나 친구인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일일이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려 해서는 그래서 곤란할 수 있다.


고작 4년짜리 고용이다. 4년이 지나 재선에 실패하면 뿔뿔이 흩어져 남남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재선실패 이후에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선거에서 이기기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친인척채용이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일할 권리가 있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관련한 논란도 결국 그런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적당히 좋게좋게. 서로 좋은 의도로 만났으니까.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매몰차지 못했고 엄격하지 못했다. 곳곳에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런 정도는 허용범위인 것이다.


털려고 하면 얼마든지 털 수 있다. 개인의 인정에 의지해 유지되는 집단인 때문이다. 허술한 구조로 인해 편법이나 탈법들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런 것까지 컨트롤하는 것이 리더십일 테지만 처음부터 그런 리더십같은 것은 생각지 않은 경우라면 더 어쩔 수 없다.


침묵한 보람이 있었다. 어지간하면 언론보도는 믿지 않는다. 개인에 대한 보도는 더 신중해진다. 언론은 이미 갑이다. 강자다. 얼마든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적인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자칫 그 무기가 다르게 잘못 사용된다면?


그나마 보아하니 그동안의 경험으로 축구교실의 운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만큼 규모도 커졌고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잘려나간 누군가가 그 동안의 관행을 고발한다. 자기는 남인 것처럼. 언론은 받아쓴다. 대중은 부화뇌동한다. 한바탕 헤프닝이었다.


사실 이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해 온 내용이다. 군인을 민간법정에 세우면 된다. 군검찰과 군판사가 아닌 민간인 검사와 민간인 판사가 수사하고 판결내리도록 하면 된다.


대개 상급자다. 혹은 상급자와 동기이거나 선배이거나 후배다. 영향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강한 군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제대로 된 판결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군사법정이란 결국 군에 대해 지은 잘못을 심판하는 곳이다. 민간에서 집장 좀 임의로 빠졌다고 무슨 처벌씩이나 받을 일이겠는가. 상사의 업무지시에 불복하면 그냥 징계받거나 잘리고 나면 그만이다. 그마저도 실제 심각한 물질적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검찰이나 법원이 나서서 판단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방산비리는 군에 대해 지은 군인의 잘못인가.


나라의 세금이다. 대한민국은 문민통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국방예산이라고 그게 모두 군의 재산이 아니다. 민간의 재산 가운데 군이 필요하다 해서 나누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누가 누구에게 물어야겠는가.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을 덧붙일 의미가 없다. 나라의 세금을 도둑질했으면 나라가 그 죄를 물어야 하고 나라의 법정에서 심판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마저 군사법정에서 자기들끼리 하겠다 주장한다.


이미 군의 사법체계는 군내부의 비리에 대해 엄단할 능력도 의지도 없음을 그동안의 판결들을 통해 모두에게 입증한 터다. 군은 결코 같은 군인에게 - 더구나 고위장성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들을 처벌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들이 저지르는 죄가 끊이지 않는다. 답은 명확하다. 단지 어쩔 수 없이 부패한 군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특정정치집단의 이해가 그것을 막아서고 있을 뿐.


군인에게 명예란 없다. 특히 한국의 군인들에게 명예란 단지 사치에 불과하다. 진짜 명예를 안다면 저따위로 판결을 내릴 수 있을 리 없다. 법을 어기고도 자기들끼리 입과 손을 맞추며 죄가 아니라 주장한다. 모두가 죄라는 걸 아는데 자기들끼리만 아니다. 명예를 모르는 자를 존중할 필요는 없다. 


한국군에서 특히 국방과 관련한 비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자기들끼리 죄짓고 수사하고 판결까지 내린다. 선배 후배 동기가 모여서 죄짓고 수사하고 결론까지 내린다. 대단한 군대다. 그저 웃을 뿐이다. 저놈들이 애국을 말하고 안보를 말한다.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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