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예 처음부터 작심하고 체계를 갖추지 않는 이상 소규모 집단은 개인의 인연이나 인정에 이끌러 운영될 수밖에 없다. 지인들로 구성원을 만들고, 혹은 구성원이 서로 지인이 된다. 엄격한 규범이나 규칙보다 개인의 인정과 의리가 집단을 유지하는 질서이자 구조가 된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다. 선진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규모사업장 같은 경우 그냥 사장과 임원, 직원들이 거의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낸다. 실제 그 가운데 다수가 가족이거나 친척이거나 친구인 경우가 많다. 그런 것을 일일이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려 해서는 그래서 곤란할 수 있다.


고작 4년짜리 고용이다. 4년이 지나 재선에 실패하면 뿔뿔이 흩어져 남남이 되어야 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재선실패 이후에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시 선거에서 이기기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친인척채용이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누구나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일할 권리가 있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관련한 논란도 결국 그런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적당히 좋게좋게. 서로 좋은 의도로 만났으니까.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매몰차지 못했고 엄격하지 못했다. 곳곳에 구멍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런 정도는 허용범위인 것이다.


털려고 하면 얼마든지 털 수 있다. 개인의 인정에 의지해 유지되는 집단인 때문이다. 허술한 구조로 인해 편법이나 탈법들이 발생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그런 것까지 컨트롤하는 것이 리더십일 테지만 처음부터 그런 리더십같은 것은 생각지 않은 경우라면 더 어쩔 수 없다.


침묵한 보람이 있었다. 어지간하면 언론보도는 믿지 않는다. 개인에 대한 보도는 더 신중해진다. 언론은 이미 갑이다. 강자다. 얼마든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적인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자칫 그 무기가 다르게 잘못 사용된다면?


그나마 보아하니 그동안의 경험으로 축구교실의 운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만큼 규모도 커졌고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잘려나간 누군가가 그 동안의 관행을 고발한다. 자기는 남인 것처럼. 언론은 받아쓴다. 대중은 부화뇌동한다. 한바탕 헤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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