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진행중인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그랬었다. 내 일이 아니니까. 내 자식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나와 상관없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묻는다. 만일 거기서 죽은 것이 당신의 아들이고 딸이었다면?


"내 아들도 딸도 아니지 않은가?"


과거 군사독재 시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고초를 겪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그런데 한국 국민 다수의 생각은 어떤가? 제주도에서, 거창에서, 노근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그래서 한국인 다수는 그에 대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는가? 덕분에 나라가 지켜지고 경제도 발전했으니 필요한 일이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다.


너희들은 당했지만 나는 괜찮다. 너희들은 멍청해서 와사비초밥에 와사비도 없는 초밥을 먹었지만 나는 괜찮았다. 오히려 우월감마저 느낀다. 저들과 나는 다른 존재다. 차원이 다른 존재다. 와사비초밥이나 먹는 것들이 멍청하고 저열한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인의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일 것이다. 불매운동이 왜 필요한가? 혹시 모를 만일의 또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가 아닌가. 혹시라도 다른 스시야에서 시장스시와 똑같은 행동을 보일까 본때를 보이자는 것 아닌가. 그러나 당장 자기는 괜찮으니까. 자기와 상관없으니까.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었든. 오히려 그것을 과시하고 자랑한다.


일본에서 이제 한국인 상대로 장사해서 돈 벌려면 와사비 절반 넣어 스시를 만들어야 한다. 아예 와사비 없는 스시를 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한국인이 온다. 당하는 놈이 병신이다. 한국인의 수준이다.


새삼 화도 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놈들이지.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려니. 언제는 안그랬을까. 마음을 비운다.

연명이란 말 그대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살아는 있는데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하기에는 숨만 쉬고 있을 뿐 시체나 다름없다. 그래서 관용적으로도 연명이란 단어를 쓸 때는 '겨우' 등과 붙여서 상당히 부정적인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겨우 연명만 하고 있다. 연명이나 할 뿐이다. 죽지 않았으니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연명치료라는 것도 그와 같다.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어찌되었든 그 숨을 계속 쉴 수 있도록 돕는다. 심장이 뛰고 있으니 심장이 계속 뛸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다고 멀쩡히 다시 건강해져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연명이다. 완치나 호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단지 죽음을 미루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환자와 환자의 가족 가운데 단지 환자의 고통만 연장시킬 뿐인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더이상 고통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고통주지 않고 죽어야 할 때 깨끗하게 세상을 떠나겠다.


의사 자신이 연명치료라 말한 자체가 회복이나 호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신장투석을 해도 어차피 살 가능성은 없었고 단지 죽음만 늦출 뿐이었다. 혹시 모른다 정말 죽음만 몇일 늦췄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환자가 살아났다. 그럴 가능성은 '기적'이라는 말 그대로 매우 희박하다. 그런데도 연명치료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지금 죽지는 않았을 테니 죽음의 원인이 환자 보호자에게 있다. 의사가 맞는가? 


항상 느끼는 거지만 한국 보수의 수준은 너무 저열해서 때로 인간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이혼여부가 뭐가 그리 중요하던가. 이혼하고 취미생활이 무엇이었는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게 따질 사안이던가. 오랜 병에 효자 없다. 입원치로 1년 가까이 되면 보호자부터 지쳐버리고 만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치료와 간호는 병원에 맡기고 보호자는 일상으로 돌아가 여유를 즐기라 권하기도 한다. 더구나 1년 가까이 생사의 경계에 있다 보면 무덤덤해지기도 한다. 호상이란 그런 것이다. 죽음이 새삼 슬프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때 돌아가시는 것을 말한다. 아니아니 설사 아주 불효막심한 자식이어서 위독한 부모를 두고 놀러갔었다고 죽음의 의미가 달라지기는 하는가.


고작 그런 것으로 시비를 걸어 논점을 돌려야 할 정도로 말이 군색하다. 더 어이없는 것은 그런데도 그런 것들이 먹힌다.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에 회의를 가지게 된다.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개인이 희생되었는가의 여부를 따지는데 정작 죽은 사람의 가족을 두고 시비를 걸고 있다. 그에 더 관심을 보이며 피해자의 가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물어뜯는다. 이것이 개인지 붕어인지 아니면 사람새끼들인 것인지.


배웠다는 놈들이 그러고 있다. 심지어 의사라면서 연명치료를 거부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다 말하는 사람마저 있다. 사고로 수술까지 하고 그럼에도 의식이 깨어나지 않아서 치료하다 합병증까지 와서 사망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회복의 가능성도 없이 그저 숨만 붙여놓는 연명치료를 거부했다고 그것이 사망원인이 되는가. 한국 의사들은 그렇게 배우는 것인가. 이제부터 연명치료를 거부하면 살인죄로 처벌받아야 한다. 살 수 있는 사람을 죽였다.


좋게 생각하려 한다. 그래도 같은 국민이니까. 한 사회에 사는 같은 구성원이니까. 그저 생각이 다를 뿐이니까. 하지만 역시 세월호를 계기로 결국 그런 종자들이구나 포기하게 된다. 무고한 학살들에 대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서마저 그래야만 했었다. 그러니 잘했다. 그 딸마저 잘할 것이다.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너무 가볍다. 그 인간들에게는. 무려 절반에 가까운 무늬만 인간들에게는.


어차피 그런 것들은 주변에 불과하다. 어떻게 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치료 도중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원인이라면 의사가 잘못한 것이다. 충분히 살 수 있는데 치료를 잘못해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의사가 그리 말하고 있다. 처음 수술하게 된 사고는 원인이 아니었다. 대단하다. 대단한 의사의 양심이다.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도대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젊은이가 라면도 제대로 못먹고 혹사당하다 젊은 나이에 비명에 간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놈의 성과와 효율이었다. 당장 얼마의 돈이 더 들어가고, 얼마의 수입이 더 들어오고, 그렇다 보니 당장 돈도 안되면서 품과 돈이 많이 들어가는 안전관리를 외주업체에 떠넘겨버린 것이다. 그나마도 지하철공사에서 외주업체로 대거 낙하산 내려보내니 줄어든 비용에 사람도 제대로 고용해 쓰지 못하고 몇몇 계약직만 독하게 굴리다 사고가 난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에 슬퍼하던 것은 그저 남들 보라고 흘리던 눈물이었던 것일까?


사실 지하철공사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일반 사기업에서도 실제 눈으로 드러나는 성과를 낼 수 있는 부서가 있는가 하면 어떤 부서들은 그런 부서들을 서포트하느라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만 일을 잘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가치없는 것인가. 그래서 모든 부서들이 성과경쟁에 뛰어들면 회사는 어떻게 될까? 더구나 철도와 지하철은 시민의 편익을 위한 공공서비스의 개념이다. 시민을 상대로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일상을 영위하는데 있어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환경을 갖추어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막대한 적자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들여가면서까지 대부분의 시민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이용할 수 있도록 요금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 여론이 요동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하철은 상업적인 목적에서 운용되는 것이 아닐 테니까.


그래서 붕어만도 못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당장 내가 내는 지하철요금을 올리는 건 싫다. 그러나 지하철공사에 막대한 적자가 나는 것은 못참겠다. 내 세금이 들어가는 것도 반대다. 그러므로 지하철 노동자들만 쥐어짜라. 그런 식으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처럼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여보고자 사람들만 악착같이 쥐어짜고 있다. 당장 내가 소비에 쓰는 돈이 늘어서는 안되기에 임금도 올려서는 안된다. 노동자가 귀족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정작 자신도 노동자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며 서로를 착취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착취구조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래서 성과연봉제가 도입되면 지하철은 어떻게 될까? 지하철공사 직원들이 너도나도 성과를 내고자 경쟁하게 된다면? 비용을 줄이고, 수입은 늘리고. 그것은 모두 누구의 부담이 될까? 지하철공사의 주수입원은 아직까지 승객들이다. 반대하는 자신들이라는 말이다. 승객들을 위해 쓸 돈을 줄이고 승객들로부터 받는 돈을 늘린다. 아예 이 참에 확 지하철요금도 두 배로 올렸으면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성과라니까. 효율이라니까. 능률이라니까. 감히 노동자따위가 정부에 반대한다 하니까. 대중을 설득하는 노력도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저 비웃을 뿐. 붕어도 기억이 30초는 간다. 대단하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제약없이 하고자 하는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두면 자연히 기업도 더 발전하고 나라경제도 더 좋아질 것이다. 결국 기업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것 아닌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단 말 그대로 '기업하는 사람들'을 전제했을 때다. 단지 기업을 소유한 것만이 아닌 기업경영을 자신의 직업으로 정체성으로 삼은 사람들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더 큰 기업 더 경쟁력 강한 기업 더 많은 이익을 내는 기업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해볼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주어야 한다.


사실 그런 것들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문제인 것이다. 제대로 기업 한 번 해보겠다는 벤처기업가나 중소기업가가 겪어야 하는 현실의 어려움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자본력에서부터 절대적인 차이가 있는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국가는 아예 손을 놓아버린 채 그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불공정한 계약으로 인해 정당한 이익을 빼앗기고 그래서 끝내 좌절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까지.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자는 것 아니었는가.


더구나 단지 기업을 소유했을 뿐인 경영자의 혈족과 기업하는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기업을 소유한 사주의 아들일 뿐이다. 아내일 뿐이다. 그런데 단지 혈연을 이유로 회사를 물려받고 경영까지 도맡는다. 그저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이 단지 기업가와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경영을 맡아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도 기업하는 사람들이니 지원해주어야 할까?


한진해운 뿐안 아니다. 대우조선 역시 기업할 생각이 없는 인간들에게 단지 기업의 경영진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허락한 결과 일어난 참사들이다. 단지 창업주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업을 물려받고 말아먹은 2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도 단지 경영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기업하는 사람들로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진짜 기업만 하려는 사람들이 마음껏 자기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문제삼게 되는 것이다. 언제까지 저들이 단지 소유관계를 이유로 경영까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그로 인해 나라경제에 이처럼 큰 피해가 가해지고 있음에도. 그마저 개인의 소유이니 용인해주어야 하는 것인가.


결국 이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무능과 나태를 감시하지도 견제하지도 않는다면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사회가 개인에 대해 책임을 물으려 하는 것이다.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다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단지 강제로 약취하거나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부마저 결국 개인의 사유재산이니까. 다수의 주주들이 있는 주식회사지만 그마저도 사주의 배타적 사유재산에 불과하다. 누가 경영권을 가지든. 그래서 그 경영권으로 무엇을 하든. 그대로 다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 어느 한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만든 사회와 제도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도록 방치한 사회와 구성원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정말 뻔뻔하다. 살림만 하다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면 최소한 자리에 걸맞는 전문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그러기까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는 정도는 필요했을 것이다. 최소한의 조심성마저 사라졌다. 염치도 양심도 없다. 대단한 대한민국이다. 이젠 아예 놀랍지도 않다.


그동안 학교내 괴롭힘으로 인해 수많은 아직 한참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왔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스스로 손목을 긋거나 약물을 먹고, 그렇게라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보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국가가 외부로부터의 가해행위에 대한 개인의 사적구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이유는 모든 일탈행위에 대한 처벌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죄인가의 여부도, 죄라면 어떻게 얼마나 처벌해야 하는가의 판단도 모두 국가가 한다. 굳이 개인이 스스로 자기를 구제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책임지고 개인을 구제해 준다. 개인과 국가간의 엄격한 암묵적 계약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국가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차라리 복수를 할 수 없으니 스스로 유서까지 남기고 목숨을 끊었는데 가해자들은 그래서 어떤 처분을 받았는가. 가해자 가운데 반성하는 경우조차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부모까지 가면 오히려 피해자의 부모에게 큰소리치며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학교 역시 책임지기 싫으니 쉬쉬 문제를 덮으려고만 한다. 그저 자기 자식 대학에만 잘가면 그만이니 학부모들도 굳이 진실을 밝히려 애쓰지 않는다. 국가는 그것을 그저 방기한다. 어차피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위해 굳이 수고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오히려 죽고 나면 가해자의 득의양양한 웃음과 함께 죽어서까지 모두의 조롱만 받을 뿐이다. 동정은 잠시이고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가해자에 의해 더 긴 시간 동안 모욕을 당해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죽기보다 차라리 죽이고 죄인이 되어 사는 편이 낫다. 그래도 살아있지 않은가.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나로서도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단지 자신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가해자보다는 살기 위해 가해자를 죽인 피해자쪽이 훨씬 동정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내가 이 사건에서 가해자를 동정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럼으로써 또다른 괴롭힘의 가해자가 자신도 다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 그를 동정하며 편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설사 전과자가 되었어도 사연을 알면 누구나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가해자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큰 공포가 될 것이다.


어른들이 아무것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교육당국이. 그리고 무엇보다 학부모들이. 내 자식만 최고다. 설사 괴롭힘을 알았더라도 내 자식 일만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다. 선생조차 내 자식의 일이 아니니 굳이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조용한 것이 좋다. 아이들은 그렇게 병들어간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 구역질나는 현실의 피해자들인 것이다.


피해자를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를 동정한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흉기를 들고 휘둘러야 했던, 그래서 어쩌면 자칫 죄인이 되어야 하는 가해자를 더 걱정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사람이 슬프다.

이를테면 희망이 넘치는 사회라면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얼른 저 사람처럼 잘 살아야겠다."


그러면 거꾸로 희망이란 없는 사회에서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저놈도 나랑 똑같이 못살았으면..."


차라리 부자가 더 인정이 많은 이유다. 원래 대대로 귀하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만큼 말이나 행동 생각에서 여유가 드러난다. 어차피 지금보다 더 귀해지나 부유해지나. 자기보다 더 귀하고 부유한 누군가를 보더라도 그보다 못하지만 자신 역시 제법 괜찮지 않은가. 그러면서 어느 정도 거리가 가늠되면 한 번 욕심도 내본다. 나도 저기까지. 나도 거기까지. 그래도 충분한 기반이 자기에게는 있다.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그나마 하루 일을 공치면 하루를 굶어야 한다. 저축도 없고, 아이들 학교도 제대로 마치기 어렵다. 일이라도 오래 열심히 해서 무언가 희망이 보인다면 그것이라도 기대고 살 텐데 아다시피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자리마저도 귀하다. 그런 동네에서 누가 우연히 좋은 기회를 만나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었다. 그것을 보는 기분이 어떻겠는가.


온갖 소리들이 떠돌아 다닌다. 자기보다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보다 잘살고 자기보다 귀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라도 끌어내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다시 되돌려야만 한다. 아니라면 너무 비참하니까. 자기만 가난한 것은 너무 서러우니까. 내가 부자가 될 수 없으니 부자가 된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란 때로 서로를 끌어내리려는 아귀들의 아우성과도 같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부자였던 이들에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기제다. 저들은 나와 다르니까. 저들은 우리와 근본부터 다른 존재니까. 그러므로써 납득하게 된다. 자기가 부자가 아닌 이유를. 그들이 부자가 된 이유를. 자신들이 부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차라리 부자인 이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발가락 끝이라도 스쳤으면 자랑거리로 삼는다. 내가 이만큼 부자들과 가까이 있었다.


"너만 힘들어?"

"너만 고생했어?"

"나도 힘들어!"

"나도 너만큼 고생했어!"


노인들처럼 희망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이들도 없을 것이다. 남은 시간도 얼마 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 지쳐 있다. 남들을 위해 배려하기보다 당장의 자기만족과 위로를 위해 그들을 끌어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만큼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들을 보며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잊으려 한다. 자기의 알량한 위세에도 감히 맞서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섣부른 우월감마저 느낀다. 내가 아직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다. 그것이 전부지만 말 그대로 그것이 그들에게 남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노인들만일까? 타인의 불행을 보며 그들의 불행을 비웃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조롱한다. 타인의 행운을 보면서는 그들의 행운을 질투하고 시기한다.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보상금 많이 받았으니 된 것 아니냐 당당히 꾸짖을 수 있는 자신감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미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 대가로 얻은 얼마간의 돈이 그리 부럽고 배가 아픈 것이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아직도 가난하다.


IMF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IMF를 거치며, 그리고 김대중과 노부현 정부 아래 수도 없이 정리해고당하고 계약직으로 전락하여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처지로 몰린 사람들이 그만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까지 잃어버린 탓이다. 그래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복수다. 그냥 다 죽어보자. 희망이 아닌 발버둥을 위한 선택이었다.


사실 내가 다음, 아니 그 다음에라도 이 나라를, 이 사회를 이끌 리더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터다. 희망이다. 기대다. 목표다. 바람이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무엇을 하면 된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그 무엇이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과연 지금 누가 있을까? 국민들 자신도 이미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고 있지는 않을까.


서로에게 독을 건네고, 서로를 칼로 찌르고,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며, 그러면서 오로지 자기만 살려 발버둥친다. 인세에 지옥이 있다면, 아니 원래 불교의 지옥이란 윤회의 하나였을 터다. 내가 윤회하여 태어난 그곳이 지옥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업이다.


헬조선의 이유다. 희망이 없는 절망의 사회. 희망이란 빛은 어딘가 있기는 한 것인가. 멈출 수 없기에 그저 앞으로 달려가려고만 한다. 슬픔이다.

영화 '부산행'을 보는데 운수회사 상무 용석이 어린 수안에게 노숙자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한다.


"너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


사실 용석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흔하게 자주 듣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일가친척, 하다못해 알고 지내는 동네 어른들까지. 


공부 잘해야 잘산다. 공부 열심히 해야 나중에 귀하게 된다. 공부만 잘하면 해달라는대로 뭐든 다 해줄 수 있다. 공부 잘해서 대학에만 가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대로 다 해도 괜찮다. 그러나 공부를 못하면 사람들 앞에 나서서도 안된다. 무언가 바라거나 요구해서도 안된다. 어차피 공부도 못하는 놈들 미래는 뻔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내일은, 아니 지금은 과거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대가다.


본전생각이다. 무엇을 위해 그토록 인생에 가장 소중한 시절들을 밤잠까지 줄여가며 자신을 다그쳐 왔었는가.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하나 못하면서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공부만 했었던 것인가. 굳이 공부가 아니더라도 부자가 되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을 떠올린다. 과연 너희들은 나만큼 고생하며 노력한 적이 있는가. 사회적 지위는, 상대와 자신의 위치는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노력을 했던 자신은 상대에게 무엇이든 함부로 할 권리가 있다.


믿기지 않을 테지만 실제로 그렇다. 비정규직이니 파견직이니 파업을 하거나 일인시위라도 하면 항상 따라붙는 말이 '그러길래 학교 다닐 때 남들처럼 열심히 했어야지'다. 자신이든 부모든 학교 다닐 때 열심히 하지 않은 탓에 그 수모 그 고생을 겪는 것이 아닌가.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현실의 부당함과 불공정함은 당연한 것이다. 젊어서 그리 노력을 했는데 나이 먹어 아직 경비원일까? 학교 다닐 때 그리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고작 택배배달원일까? 더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갔다면 이런 몸이나 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까? 그러므로 그래도 된다. 나는 노력했으니까.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에 대해 오히려 관대한 것도 그래서다. 오히려 연에인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것도 연예인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돈을 잘 버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저 타고난 매력과 재능만으로 쉽게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손에 넣는다. 그러므로 비판한다. 노력하지 않는 그들에 대한 공격은 정의다. 반면 공직자는 그만큼 노력해 왔고 결과로써 자신의 노력을 증명한 이들이다.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해서 지금의 위치에 이른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만한 비리 쯤 봐 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지위도 높기에 더 엄격한 책임을 요구하기보다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부러움과 질시를 보낸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실력주의 경쟁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그렇다고 경쟁의 결과가 오로지 실력과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가. 진실은 보려 하지 않는다. 노력해야 성공하는 정의로운 사회여야지만 지금 자신의 노력은 의미를 갖는다. 어찌되었거나 지금 자신이 노력하는 보답을 기대할 수 있다. 당장은 우울하고 힘들더라도 내일의 희망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어찌되었거나 주위의 환경이야 어쨌든 노력했으니 성공한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처음의 조건이야 어떻든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니 지금의 처지가 된 것이다. 믿음을 현시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더 밀어붙이기도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부당하고 불합리한 핍박에도 한 마디 변명조차 못하는 그 모습이야 말로 자신이 믿는 정의의 증거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단지 강자가 현실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약자가 자신보다 열위에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정의여야 한다. 가치판단이 개입한다. 강한 것은 옳다. 약한 것은 그르다.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은 항상 옳다. 남들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은 항상 그르다. 노력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노력은 선이다. 노력은 정의다.


어째서 헬조선인가. 그것을 알아버렸으니까.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간 젊은이들이기에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어른들이 말한 정의는 없다. 노력만 하면 잘사는 공정한 사회는 이 세상에 없다. 최소한 이 나라에는 없다. 노력해도 못살고, 실력이 있어도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노력 이전에 타고난 환경과 조건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과도기다. 비로소 현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천정과 바닥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서로 사는 세계가 다르다.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저들이 사는 세계와 자신이 사는 세계가.


그러면서도 결국 굳이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것은 그들이 배운 것이 그런 것들인 때문이다. 혹은 외국인이라서, 혹은 여성이라서, 혹은 연예인이라서, 그리고 당연히 그들이 차별받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도 있어야만 한다. 여성은 노력하지 않는다. 여성은 성실하지 않다. 외국인은 한국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연예인은 놀고 먹는 족속들이다. 그들의 헬조선은 타인을 증오하고 경멸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는 인세의 지옥이다.


어째서 유독 한국사회에서 갑질문화가 이토록 지독히 뿌리내리고 있는가. 차라리 중세의 신분사회와도 같다. 그런데 정작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게 행세할만한 집안인 경우는 그리 없다. 그들이 그처럼 행동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도덕적 당위다. 갑질은 정의롭다. 갑질은 당연하다.


뿌리뽑히지 않는 이유다. 이미 한국인의 삶 그 자체다. 갑질 없이는 경쟁한국도 존재할 수 없다. 잘사는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다. 못사는 나라들은 게을러서 못사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보다 더 잘살아야만 한다.


우울한 초상이다. 비참한 현실이다. 대한민국이다.

원래 근대 이전까지 국민이란 - 아니 국민이라는 말도 근대의 산물일 테니 백성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 백성이란 단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 나라와 지배자 자신의 운명을 믿고 맡길만한 동반자나 심지어 동지는 결코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징집이라는 자체도 근대 이후에 생겨난 개념이라 할 수 있었다. 백성을 징집해서 군대를 꾸리기보다 자신으로부터 직접 급여를 받는 용병을 더 선호했다. 내가 급여를 지급하는 한 용병은 언제나 자신의 군대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민국가의 개념이 깊이 뿌리내리면서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징집된 병사들이란 더이상 믿을 수 없는 감시와 통제의 대상에 불과한 백성이 아니었다. 국가와 공동운명체였고, 국가의 운명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 동반자였다. 더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징집된 병사들이란 국민이었으며 국가의 주권자였다. 굳이 가두고 감시하고 통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나설 것을 전제하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근대의 국가란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지키려 애쓰는 국가다. 그렇게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설득해야만 한다.


구일본제국은 출발부터 강제와 억압을 통해 뿔뿔이 흩어진 각 번의 백성들을 통합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일본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천황의 존재 역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실상 독립국가의 연합체와 같은 상태였었다. 그것을 억지로 일본과 천황이라는 개념을 주입시켜 일본의 신민으로 만든 것이었다. 정작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이 천황의 충실한 신민인 일본인들을 믿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오로지 강제와 억압으로만, 폭력과 형벌로만 유지되는 군이란 바로 여기서 출발하고 있었다. 억지로 때려서라도 군인을 만들어야 한다. 온갖 폭행과 욕설과 모욕과 가혹행위들로 철저히 길들여 제대로 된 군인을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된 군인이란 상급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줄 아는 군인이다.


똑똑한 군인을 싫어했다. 많이 배우고, 또 보고 들은 것도 많은 도시출신들을 싫어했다. 그 전통은 한국군에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불과 90년대까지도 한국군 지휘관 가운데는 대학출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았었다. 똑똑해서 말만 많고 시키는대로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오로지 높은 곳에 있는 정부의 고위관료와 군의 지휘관들이 도맡아 한다. 일선의 사병들은 그저 시키는대로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 2차세계대전 당시, 아니 그 전부터도 일본군 가운데 지휘체계가 와해될 경우 덩달아 군기는 물론 인성마저 와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군의 사병들에 대한 - 아니 장교들에 대해서까지 억압과 폭력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이게 되었다.


그런 구일본제국군을 계승한 것이 바로 해방이후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부 가운데 상당수가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이들이었다. 1948년 수립된 정부의 수뇌부와 그들의 손발이었던 경찰들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인민들을 배신하고 일본제국주의에 빌붙었던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지배층과 지휘층이 조선의 일반대중과 유리되어 있었다.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 억악하고 강제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살인과 방화, 학살, 약탈 역시 대중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수단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조선놈들은 그저 패야 말을 듣는다고. 나라를 다스리다 보면 한두사람 쯤 죽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그것이 최근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였다.


군이 사병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다. 군에 있어 사병들이란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지도 용기도 없는 타자들이다. 주권자로서 나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사명감도 가지지 못하는 외인에 불과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 뿐이다. 나라를 지키려 하는 것도 오로지 자신들 뿐이다. 자신들의 나라만이 나라다. 군사독재의 전통은 유구하도록 그렇게 군을 통해 계승되어 왔다. 사병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보다 아예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는다. 충분히 고민하고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기회 또한 주지 않는다. 굴리고 다그친다. 때리고 윽박지른다. 그래야 군은 제대로 돌아간다.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은 단지 자신들이 결정한대로 시키는대로 따르기만 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군이라는 특성상 물론 어느 정토 억압과 통제는 필수적이다. 군의 단합을 위해서라도 일정기간 병영에 머물며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일과가 끝난 뒤에도 모든 일상들마저 지휘관의 통제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정해진 일과가 없는 날에조차 모든 일상의 행위들을 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결정한다. 자신의 나라다. 단지 그들의 나라일 뿐이다. 한국인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애국심이라 하는 것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관념적으로는 나라를 위하는데 실제 자기가 손해보면서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려는 의식은 부족하다. 아니 국가라고 하는 인식 자체가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다. 국가와 자신과의 관계를 단지 정권과, 혹은 권력자와 자신과의 일대일 인정의 관계로 인식한다. 국가라는 보편적인 세계가 아닌, 국민이라는 보편적인 관계가 아닌, 특수한 인정의 관계로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한다. 명령에는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부당한 이익 역시 정당화한다. 나라에 해를 끼치면서도 정작 위에서 아뭇소리 없으면 그것으로도 옳다.


국가가 먼저 국민을 존중해야 한다. 군이 먼저 병사들을 존경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 스스로가 나라와 군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굳이 억지로 다그치고 몰아세우지 않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나라와 군을 지키려 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그다지 필요없는 비용이다. 병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억지로 휴일까지 병영에 잡아두고 무언가를 강요하기 위한 비용이란 오히려 낭비에 가깝다. 해소되지 않은 불만과 동요가 결국 수많은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며 군에 대한 인식은 물론 군의 사기와 전투력마저 떨어뜨리고 있다. 그것을 또 관리하겠다고 비용과 노력을 낭비한다. 


차라리 모병제가 나을 수 있다 여기는 이유다. 최소한 200만원 300만원 월급을 주며 부린다면 사람 중한 줄은 알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병이 부족해서 인력난에 허덕인다면 더이상 병사들에 지불해야 할 비용을 아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수고와 노력과 비용을 들이면서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길 것이다. 병사는 공짜가 아니다. 국민 역시 공짜가 아니다. 공짜가 아닌데 공짜로 부리려 하니 그를 위해 또 엉뚱한 비용이 소모된다.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병영내 징집된 병사들에 대한 인간적인 예우와 환경의 개선. 충분히 대가를 치루고 대우하면서 소중하게 그들을 대해야 한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재량을 허용하며 그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을 믿지 못하는 국가가 어찌 유지될 수 있을까? 병사들을 믿지 못하면서 어찌 군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가장 크게 낭비되는 부분이다. 국민을 믿지 못한다. 병사들을 믿지 않는다. 아예 않으려 한다. 한심하다.

확실히 최근 메갈을 핑계로 여성과 관련한 어떤 주장도 의견도 실제 사례도 거부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주장을 하려 하면 바로 메갈이라는 낙인부터 찍는다. 메갈리아와 관계있을 것이기 때문에 네 말을 듣지 않겠다. 원래 이것이 목적이었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여성의 권리신장이란 남성들의 암묵적 동의 아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실 바로 이 지점이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강경한 여성주의자들과 남성들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고 양보해 줬기에 여성들의 권리와 지위가 지금처럼 높아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과연 그것이 남성들이 진정으로 여성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동의했기에 그리했던 것인가 묻고 싶은 것이다. 사실상 아직까지 여성의 사회적 지휘와 권리의 신장은 남성의 허락 아래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가 납득하지도 동의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래야 하니까. 그러는 것이 옳다니까. 아니면 틀리다 말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강요당하는 것이 있었다. 선진국은 그렇게 한다니까 어쩐지 그래야만 대한민국도 선진국이 되는 것 같다. 똑똑하고 많이 배운 지식인들은 그같은 주장들에 동의하고 있다고 하니 자신도 마치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약간은 허영심이다.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는 소심함도 있다. 하지만 불만은 남는다. 어째서 자신의 권리를 나누어 여성들에게 주는 것인가.


하지만 분위기가 그렇고 현실이 그러니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한 마디 말이라도 잘못했다가는 집중공격을 당할 수 있었다. 무지하고 무식한 구닥다리로 매도될 위험도 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해 이해하는 것처럼.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해 동의하는 것처럼. 하지만 어째서 여성과 여성주의는 내가 바라는대로가 아닌 것일까. 나는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주의에 동의하는데 어째서 내가 기대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일까. 


그리고 사단이 일어났다. 일부 과격한 여성주의자들이 메갈과 워마드 같은 극단적인 여성사이트와 결합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명분을 잃었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것은 그들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확실한 틈이었다. 여성주의는 별 것 없다. 여성도 별 것 없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커진다. 그동안의 불만들이 쏟아져 나온다. 여성들이, 여성주의자들이 잘못되었다. 진짜 여성주의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자신들이 바라는 여성주의다.


여성주의에는 이런 여성주의도 저런 여성주의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공산주의라고 하나가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하나가 아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이론과 논리가 존재하고 항상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하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관심도 없던 여성주의다. 현실에 실재하는 여성주의가 아닌 관념으로 이상화한 여성주의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남성이 이야기하는 남성을 위한 여성주의여야 한다. 여성주의마저 자신들이 소유하려 한다.


문제는 뭐냐면 그동안 사회적으로 남성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합의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어째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노력해야 하는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대학만 좋은 곳에 가면 된다.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여자친구도 마음대로 골라 사귈 수 있다. 부모들부터 문제다. 여성을 마치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처럼 이야기해 놨으니 제대로 된 여성관이 자리잡을 리 만무하다. 자신을 위한 보상이며 대상이다. 그리고 사회는 남성들과 상관없이 멋대로 여성주의를 현실로 옮겨 놓고 있었다. 남성들이 소외되고 있었다.


남성의 소외는 남녀평등과 별개의 문제다. 사회적인 평등과 별개로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성들보다 높지만, 남녀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어 있었다. 분노와 불만은 누적된다. 기회를 보아 터져나온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한 세대도 아직 다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의 지위는 빠르게 신장되었지만 그러나 남성의 의식까지 함께 성장하고 있었는가는 의문이다. 그 부조리가 메갈리아라는 틈을 비집고 현실로 터져 나온다. 남성에게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여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이면 마치 발작이라도 하듯 거부반응을 보인다. 더이상은 그대로 당하지 않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정작 사회적으로 대화와 합의를 주도하고 이끌어야 할 지식인들, 정치인들, 언론인들의 무관심과 방기가 만들어낸 반동에 가까운 것이다. 여성들 자신조차 남녀평등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적도 토론에 참여한 적도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여성주의자가 되고 만다. 그것이 과연 여성주의인가 고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신의 분노부터 다스려야 한다. 분노가 지나치면 증오가 된다. 증오는 답이 없다. 증오는 오로지 증오만을 생산한다.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냉정과 이성을 찾아야 한다. 물론 개소리다.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한참 더 싸우고 알아서 시들해질 때 쯤 진지한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더 싸우고 질리도록 싸우고 나서야 힘이 빠지면 차근히 현실을 돌아볼 여유도 생길 것이다. 지금은 그냥 지나간다. 바람에 거스르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가끔 내가 왜 이 짓거리 하는가 의문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를테면 자기가 남자다. 자기 앞에 여자가 있다. 무심코 여자에게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눈이 더 컸으면..."

"코가 더 오똑했으면..."

"턱이 더 갸름했으면..."

"가슴이 더 컸으면..."


그러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한 마디로 정히 그런 여자를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그런 여자를 찾아 나서라 조언해주고 싶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마음에도 없는 성형수술까지 한 사람을 위해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대부분 여기에는 단서가 하나 더 따라붙기도 한다.


"그래도 성형은 그렇고 천연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지금 여기서 죽었다가 다시 환생해 태어나기라도 하라는 것일까?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노무현이 당선되고 인터넷의 자칭진보 자칭개혁들이 모여서 한창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문득 위화감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진보란, 진정한 개혁이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들은 과연 진정 진보를,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장 자신부터 진보가 아니다. 그다지 개혁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세가 진보를 따르고 개혁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맞춰가는데 아무래도 영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 옷이 맞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는가. 사상도 이념도 정책도 맞지 않으면 그에 맞게 수선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수선하면 되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수선하라 요구한다.


원래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자신들이 믿는 바를 추구해 오던 이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신념이다. 그들의 이념이다. 그렇다면 존중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들과 다른 자신만의 신념과 이념을 주장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선 그곳에 너무나 탐난다. 그래서 요구한다. 너희들이 나에게 맞추라. 나도 진보고 개혁이다. 그러므로 진장한 진보이고 개혁이라면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원래 정의당은 그런 정당이었다. 시사인도 그런 언론이었다. 한겨레와 경향이 타겟이 된다. 오마이뉴스는 안 보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그냥 맞지 않으면 보지 않는다. 한겨레도 그다지 자신과 맞지 않으니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정의당 역시 가끔 기회가 되면 표를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다. 원래 그런 정당이었다. 그런 언론들이었다. 그런데 새삼 그럴 줄 몰랐다며 배신감을 토로한다. 진정한 진보와 언론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들을 압박한다. 아니라면 그들에 대한 지지와 구독을 철회하겠다.


처음부터 서로 이념이 달랐던 것이었다. 추구하는 신념이나 가치관도 달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여전히 자신은 진보여야 하고 개혁이어야 하며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그래서 바꾸려 한다. 진보정당을. 진보언론을. 여전히 자신들이 진보이고 정의이고 개혁이고 진실일 수 있도록.


시사인의 지적은 상당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시사인과 정의당을 공격하는 다수도 이미 깨닫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들은 원래 진보가 아니었다. 여성주의자도 아니었다. 진보와 여성주의에 대해 대단히 진지하게 고민한 척도 추구한 적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진보여야 하고 정의여야 한다. 진보정당과 언론에 대한 부정은 그것을 정당화한다. 저들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진보가 아니라고 잘못된 것이 아니다. 보수라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만이 정의는 아니다. 진보 가운데서도 여러 서로 다른 지향이 있고 추구가 있다. 녹색당과 정의당은 다르다. 사회당과도 다르다. 정의당 안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굳이 진중권이 유시민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심상정이 노회찬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김종대는 그냥 김종대면 된다. 그런데도 국이 하나로 끼워맞춰야 한다. 객관식 시험의 폐해다. 세상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는 오답에 불과하다. 그냥 그대로 놔두면 된다.


자신들이 느끼는 거부감 그대로 인정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평소 한겨레도 오마이도 시사인도 즐겨 읽지 않는다. 그나마 유일하게 챙겨보는 것이 경향신문이다. 나 자신이 보수주의자인 것을 안다. 그리고 여성주의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안다. 그래서 굳이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대로. 나는 나대로. 어차피 이 사회에 한 줌 영향력도 가지지 못한 정당이고 매체들인 것이다. 새누리가 그랬다면 상당히 신경도 썼을 테지만 고작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에 내가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는 이유는 그마저 알량한 권력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하자는대로 된다. 내가 바라는대로 된다. 아니면 응징한다. 아니면 아예 망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대단하다. 우리는 대단하다. 대중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에 대한 어떤 비판도 거부하려 하는 이유다. 어찌 감히 대중에게. 자신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무오류는 권력의 속성이다. 틀린 것도 옳게 맞게 만든다. 집단의 힘이 그렇게 만든다.


그냥 상관없이 살아도 되는 것을 굳이 관여하고 간섭하고 그래서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려 한다. 오지랖이라는 자체가 상대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자는대로, 내가 하라는대로 모든 것을 바꾸고 바로잡는다. 하여튼 시시콜콜한 것까지 내 손이 닿아야 하고 내 요구가 미쳐야 한다. 그래서 파쇼라 하는 것이다. 대중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모든 것을 통제한다. 대중만이 남는다.


내가 인터넷에서 진보입네 개혁입네 떠드는 인사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벌써 오래전에 이미 몸으로 겪어 봤었다. 그들의 오만과 폭력성을. 내가 틀렸어도 맞아야 한다. 내가 잘못했어도 옳아야 한다. 진보가 아니어도 진보여야 하고,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페미니트스여야 한다. 네가 바꿔야 한다. 네가 틀렸으니 네가 바꿔야 내가 옳게 된다. 부끄러움조차 없다는 것이 진짜 권력을 보는 듯하다.


그냥 상관없이 사는 것이다. 정의당은 저렇겠거니. 시사인은 그렇겠거니. 한경오도 또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다 망하면 망하는 것이고, 그래서 살아남으면 살아남는 것이다. 대세가 되면 그것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자신과 주위의 세계를 분리한다는 것.


예쁜 여자가 좋으면 예쁜 여자를 찾아가 사랑한다 고백한다. 눈이 큰 여자가 좋으면 그런 여자를 찾아가서 일단 작업부터 걸어본다. 반드시 눈앞의 여자여야 한다면 그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인형이 아닌 이상 내 입맛대로 상대를 바꿀 수는 없다. 당연한 사실일 텐데.


세상에는 정의당도 있고 새누리당도 있다. 시사인도 있고 조선일보도 있다.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는가는 시장이 결정한다. 개인의 선택이 결정한다. 누가 인위로 강요할 것이 아니다. 세상은 자신들만 사는 것이 아니다. 웃게 되는 이유다. 자신들의 정의가 너무 유치하고 한심스럽다. 토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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