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학교내 괴롭힘으로 인해 수많은 아직 한참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왔었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스스로 손목을 긋거나 약물을 먹고, 그렇게라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보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국가가 외부로부터의 가해행위에 대한 개인의 사적구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이유는 모든 일탈행위에 대한 처벌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죄인가의 여부도, 죄라면 어떻게 얼마나 처벌해야 하는가의 판단도 모두 국가가 한다. 굳이 개인이 스스로 자기를 구제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책임지고 개인을 구제해 준다. 개인과 국가간의 엄격한 암묵적 계약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국가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차라리 복수를 할 수 없으니 스스로 유서까지 남기고 목숨을 끊었는데 가해자들은 그래서 어떤 처분을 받았는가. 가해자 가운데 반성하는 경우조차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부모까지 가면 오히려 피해자의 부모에게 큰소리치며 악다구니를 쓰는 이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학교 역시 책임지기 싫으니 쉬쉬 문제를 덮으려고만 한다. 그저 자기 자식 대학에만 잘가면 그만이니 학부모들도 굳이 진실을 밝히려 애쓰지 않는다. 국가는 그것을 그저 방기한다. 어차피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위해 굳이 수고를 낭비할 필요는 없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 오히려 죽고 나면 가해자의 득의양양한 웃음과 함께 죽어서까지 모두의 조롱만 받을 뿐이다. 동정은 잠시이고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가해자에 의해 더 긴 시간 동안 모욕을 당해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이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이대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죽기보다 차라리 죽이고 죄인이 되어 사는 편이 낫다. 그래도 살아있지 않은가.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나로서도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단지 자신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가해자보다는 살기 위해 가해자를 죽인 피해자쪽이 훨씬 동정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내가 이 사건에서 가해자를 동정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럼으로써 또다른 괴롭힘의 가해자가 자신도 다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었을 때 그를 동정하며 편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설사 전과자가 되었어도 사연을 알면 누구나 그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 한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가해자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큰 공포가 될 것이다.


어른들이 아무것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교육당국이. 그리고 무엇보다 학부모들이. 내 자식만 최고다. 설사 괴롭힘을 알았더라도 내 자식 일만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다. 선생조차 내 자식의 일이 아니니 굳이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조용한 것이 좋다. 아이들은 그렇게 병들어간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 구역질나는 현실의 피해자들인 것이다.


피해자를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를 동정한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흉기를 들고 휘둘러야 했던, 그래서 어쩌면 자칫 죄인이 되어야 하는 가해자를 더 걱정하게 된다.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사람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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