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한 장면이다.


"어서 사실대로 고하라."

"억울하옵니다."

"저 놈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매우 쳐라!"


사실여부는 내가 판단한다. 진실여부도 내가 결정한다. 너는 내가 판단한 사실과 결정한 진실을 들려주기만 하면 된다.


수사관 역시, 아니 오히려 수사관이기에 피의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모든 편견을 배제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히 재구성해간다. 내면화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가? 그러면 혹시나 내가 잘못 알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터무니없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무어라 말하든 그저 자기가 정한 사실과 진실만으로 그 답을 판단하려 한다. 채점하려 한다.


타진요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햇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스탠포드에는 가보지도 못한 것들이 자기들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는 그에 맞춰 타블로에게 정답을 요구했다. 문제가 틀렸는데 답이 나올 리 없다. 문제가 틀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사실대로 말하라!"

"무슨 사실을?"

"이것들 사실이잖아?"

"아니라니까!"

"거짓말하네?"

"몇 번이나 해명했잖아?"

"하지만 내 기준에서 아무것도 해명되지 않았잖아? 어서 말해!"

"이제 그만 좀!"

"거부하는 건가? 날 모욕했어?"

"그런 뜻이 아니라..."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매우 쳐라!"


때로 대중이 권력이 된다. 그 권력에 취하기도 한다. 그래서 권력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의심스럽다고 의혹이 아니다. 그러면 모든 의처증 의부증 가진 배우자의 아내와 남편들은 의혹의 당사자여야 한다. 얼마나 타당한 의심인가. 그리고 얼마나 성실하게 사실과 진실에 대해 알고자 노력했었는가.


지금 문재인 캠프에서 대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사실이든 진실이든 상관없는 물고늘어지기다. 들을 생각도 없고 믿을 생각도 없다. 그럴 의도로 의혹을 확산한다. 단 하나 꼬투리만 남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코뿔소가 방안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말만으로는 어렵다.


또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반박하는 것도 똑같다. 한국 네티즌들이다. 어디 가지 않는다.

확실히 요즘 젊은이들 많이 어렵다는 것을 이번 이슈를 통해 더욱 느끼게 되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귀걸이 때문에 면접에서 - 심지어 서류심사에서 떨어졌다면 먼저 당사자인 젊은이들부터 나서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게 왜 문제인가. 실력있고 경력있고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지.


기업이 굳이 사람을 뽑아 쓰려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자선사업하는 거 아니다. 구직자들 좋은 일 시켜주려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 대한 환원 차원은 더욱 아니다. 회사에서 필요하니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일을 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의 목적인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상유지라도 가능할 테니까. 그나마도 항상 최소한의 사람만을 뽑아서 대부분의 기업에서 직원들은 잔업에, 야근에, 심지어 주말근무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동관련법이나 규정을 모두 지키려면 지금보다 최소 수십퍼센트 이상 더 고용해야만 한다.


그러면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란 어떤 인재겠는가. 바로 여기에서 갈리는 것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인재인가. 아니면 일을 더 수월하게 시킬 수 있는 인재인가. 정확히 일은 잘할 것 같지만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인재와 일은 그다지 잘할 것 같지 않은데 시키면 시키는대로 충실히 따라줄 인재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대한민국이 병영사회라는 이유다. 유교와는 상관없다. 구일본군의 병영문화와 더 가깝다. 내가 너보다 계급도 높고 짬밥도 길므로 감히 내앞에서 함부로 나대서는 안된다. 그 말을 번역하자면 "어린 놈이 싸가지없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너의 '갑'이다.


다행히 요즘은 취업이 어렵다 보니 젊은이들 스스로 알아서 기업의 요구에 맞춰가는 바람에 고르는 어려움이 줄어들었다. 일도 잘할 것 같은데 한 눈에 보기에도 순종적이고 성실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간다. 감히 한 마디 자기 생각을 더하지도 못하고, 불합리한 것을 보면서도 불합리하다 말하지 못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스스로를 맞춰간다. 그러니까 10년 전만 하더라도 귀걸이를 이유로 면접에서 잘렸다면 현장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돌아서서는 서로 욕하기 바빴다는 것이다. 귀걸이가 일과 무슨 상관인데? 더구나 예체능계다. 실력과 경력도 충분하다. 누구보다 해당 분야에서 잘할 자신이 있다. 그만한 객관적 근거까지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귀걸이 하면 면접관이 불쾌해할까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금기로 설정한다.


2006년 당시 고용정보원에서 이력서사진이나 면접에서 귀걸이와 같은 악세사리를 해서는 안된다 명문화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담당했던 담당자가 그런 것들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럴 것 같으니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으니까. 그것이 어느새 상식이 된다. 상식에서 벗어났기에 이해할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자기들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11년 전 당시도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신을 고용해 줄 기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정작 취업을 위해 스펙쌓기를 한다면서 그 가운데 실제 기업에서 업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는가. 계약이란 거래다. 내가 하는 만큼 그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로부터 받는 만큼 나 역시 그를 위해 해주는 것이다. 내가 얼마의 급여를 받는 만큼 어떤 일들을 기업을 위해 해 줄 수 있는가. 어떤 대우를 받고자 하기에 어떤 일들을 얼만큼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고 어떤 자격증을 따야 하는가. 취업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경력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기업에 잘 보일 것인가. 면접관에게 잘 보일 것인가. 인간적인 선의와 인정에 기대려 한다. 내가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만큼 상대도 역시 자신을 호의로 대해주기를. 내가 먼저 충분한 가격을 갖추고 예의를 다하면 역시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기를. 그래서 기업들도 틈만 나면 직원과 심지어 소비자들에게까지 '가족'을 외치는 것인지 모른다. '가족'이란 어떤 불합리도 용서되는 원초의 관계다. 취업이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성공의 여부, 사회적 인정과 자존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스스로 최소한의 자격을 설정한다. 최소한의 태도와 예절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취직할 수 있다. 그래야만 면접관에게 선택될 수 있다.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도태되지 않아도 된다.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불합리한 기대가 불합리한 태도와 관계를 용인한다. 상대의 불합리한 요구나 지시도, 태도 역시도 그래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에 순종함으로써 자신도 그런 질서 안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안전해질 수 있고 자신의 몫을 나누어 받을 수도 있다. 인정하면 편하다. 받아들이면 쉬워진다. 어차피 그런 것이 세상이다. 저 큰 세상과 맞서는 것은 단지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런 현실을 거스르고도 성공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문재인의 아들 문준용씨와 관련한 논란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논란 자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착각하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격이나 요건이 무엇이든 결국 결정하는 것은 채용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미디어를 통해서도 각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의 입을 빌어 그리 말하고 있기도 하다. 정작 스펙은 화려한데 무엇에 써야 할 지 모르는 지원자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지원자 가운데 뽑을 때는 태도와 인성, 자격을 우선해 볼 테니 그 이상 더해야 할 것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터다. 즉 지원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결정하는 것은 채용하는 당사자의 임의라는 것이다. 귀걸이가 중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세대차이일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취업문제로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는 않았었다. 당시도 취직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대가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더 나아지기를. 더 합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불합리에 도전하고 그것을 깨부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가 아직은 조금 남아있기도 했었다. 방황도 하고 실수도 하고 그러다 자기 길도 찾고. 하지만 어느샌가 실패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작은 일탈조차 용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엄격하게 사회가 요구한대로 자기를 맞추며 잠시의 방심도 용서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고보면 인터넷 문화 자체도 무척 경직되었다. 이하늘이 베이비복스를 모욕하고 김구라가 인터넷에서 욕설을 쏟아낼 때 낄낄거리며 동조하던 것이 당시의 젊은세대들이었다. 도전과 일탈이야 말로 그들의 문화였던 탓이다. 오히려 자신이 감시자가 되어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쉽게 집단행동에 나서는 모습과 비교된다. 누가 옳다기보다 그만큼 낯설다는 뜻이다.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받는 압력이 거세졌다는 뜻이 될 것이다. 거스르기 힘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과연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는가. 또한 얼마나 해당분야에 필요한 실력과 경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적절한 채용이고 인사였는가. 그보다는 과연 자격을 갖추었는가. 과연 예의를 다했는가. 과연 적절한 태도를 취했는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존재다. 얼마나 시키는대로 자기 생각 없이 충실하게 따를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내가 부리기 쉬운 사람을 뽑는다.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사람을 뽑는다. 언제부터인가 확실히 노조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촌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세상이 바뀐 탓이다. 아니 원래 세상은 이랬는데 더이상 그를 거스를 의지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그런 자신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대상들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그들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정작 자신들이 인사담당자 같다. 당시 고용정보원의 책임자 같다. 자기라면 이런 사람은 뽑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했으면 절대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아니면 지금까지 자신들의 노력은 허사가 된다. 의미가 사라진다. 발버둥이기도 하다. 그것이 정의여야만 한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부조리해도 그래야만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허튼 것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은 세상의 질서 안에 존재해야 한다. 모순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슬픈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어렵다. 이렇게 나약해져 있다. 그들만 탓할 수는 없다. 그렇게 기른다.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게 길들인다. 순종적으로. 말 잘 듣게. 자기 생각 없이. 주위의 눈치를 더 잘 살피도록. 주위에 맞춰가도록. 더이상 버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현실이다.

세월호 당시 노인들이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게 어떤 말들을 했는가 떠올려보라.


특별한 소수의 노인이 아니다.


그래서 더이상 노인을 존경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전에는 노인들에게도 선의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호 인양이 이렇게 쉬운 거였다니.


하지 못한 게 아니다. 하지 않은 거다.


저런 정부가 나오도록 아무것도 못한 내가 죄인이기도 하다.


그게 민주주의다.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지고 싸우되 책임은 함께 진다.


박근혜와 그 지지자만의 잘못이 아니다. 방관했던 자들, 반대했던 자들 모두의 잘못이다.


잘해서 선거에서 이겼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민주주의에서 주권자의 자리가 무거운 이유다. 왕조시대 오만 일들이 모두 왕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었다.


오래도록, 아니 어쩌면 영원히 큰 상처로 남게될 것 같다.


하늘이 우울하다.

일본 만화 '맨발의 겐'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의 형이 카미카제를 위해 출격했다가 추락해서 전투기만 부서지고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는데 교관이 그것을 보고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 따위 아무라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전투기는 아니다!"


근세 유럽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흑사병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유럽과 미국에서 여성과 흑인의 지위가 높아진 것도 결국 1차와 2차 양차세계대전을 겪으며 노동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무시하던 여성의 힘이라도 빌려야 했고,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던 흑인들 역시 징집해서 싸우게 해야만 했다. 아쉬울 때만 그 가치가 제대로 보인다.


워낙 아무것도 없는 폐허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전쟁에 그야말로 먹고 죽으려 해도 그럴 수 있는 무엇이 남아있지 않는 폐허 위에서 그야말로 사람의 힘만 믿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많다.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일할 사람은 쓸어버릴 정도로 많다. 사람의 가치가 하찮아진다. 더구나 당장 버는 돈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이익이기도 하다. 식민지를 거치고 전쟁의 페허에서 딛고 일어난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 앞에 개인은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나마 80년대는 조금 나았다. 90년대  IMF 전까지만 해도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IMF가 터지고 김대중이 집권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노동자 때려잡는 것이었다. 당장 회사에서 잘려나가 내일의 생계도 막막해진 사람을 나라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심지어 임산부까지 몽둥이로 두들겨서 모두 내쫓았다. 그동안 민주화의 과정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며 알게 된 내부의 사정을 이용해서 철저히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전략까지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노동자의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이 바로 김대중에 의해 노조무력화전략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지도부를 잡아다 감옥에 쳐넣는 것만으로는 노조를 무력화시킬 수 없다. 아예 밥줄을 끊어 살 수 없게 만들어야 비로소 노조의 목에 개줄을 매달 수 있다. 노무현도 그것을 충실히 받아 썼다. 


노조지도부가 파업의 대가로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받고 목숨을 끊는 이야기는 그래서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당시까지 무척 흔한 이야기였다. 어째서 노동계가 이명박과 박근혜 치하에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정부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는가. 순치되었다고 표현한다. 더이상 노동계는 정부와 기업에 맞서 싸울 힘 자체가 남아있지 않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노동계에 대해 해박한 자신들의 경험과 인맥을 활용해서 아예 철저히 박살내버린 탓에 민주노총조차 더이상 정부와 맞서 파업을 이끌어갈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같은 노동계의 지리멸렬한 상황이 노동계를 지지 및 조직기반으로 삼는 진보정당의 지리멸렬한 상황과도 이어진다. 당장 노동자의 목줄을 죄는 법을 입법하려는데 스스로 정부와 맞서지 못하고 시민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틈을 노려 편승하려는 모습도 그런 이유에서 보이게 된 것이었다. 혼자서는 때려죽여도 안되니까.


나라경제를 위해서. 기업이 잘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어차피 너희 아니더라도 노동자는 많으니까. 너희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은 많으니까. 심지어 그 잘난 야권지지자들마저 노동개혁에 대해 무언가 발언이 있거나 하면 그리 반박한다. 싫으면 그만두라. 그만두면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므로 어떤 권리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어떤 개선에 대한 요구도 공공연히 해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러니까 그 야권지지자들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잇는 1야당의 지지자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납득이 된다는 것이다. 항상 말했다. 나는 저 두 대통령을 아주 싫어한다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현장실습에 대해 다룬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꽤 오래되었다. 아마 'PD수첩'에서도 MBC가 지금처럼 맛이 가기 전에 몇 번 다루기도 했을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그리고 학부모들이 그리 일류대학에 목을 거는 것이다. 어째서 사법시험 존치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가. 그래야만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거든. 노동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한 현실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너 공부 열심히 않으면 저렇게 돼!"


징벌이기도 하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당연한 대가다. 그러므로 너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여러 노동이슈에서 잘난 네티즌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너희 아니더라도 사람은 많다. 너희 말고도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싫으면 관두라. 그대신 너희는 낙오자이고 패배자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짓밟아주마. 바로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살아남는 방법은 끝까지 인내하며 익숙해지는 것 뿐이다. 그리고 닮아가는 것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이 사회를 지탱하는 정의여야 한다.


일자리가 부족하니까. 일할 사람은 많으니까. 그리고 개인보다는 기업이, 그보다는 국가가 더 중요하니까. 학교가 더 중요하니까. 학교라는 이름의 선생과 기업이라는 이름의 자본가들이 더 중요하니까. 그냥 너희들이 죽으라. 개발독재를 위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에 대해 기성세대가 눈 하나 깜짝 않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 희생을 치를만 하니까 치른다. 오죽하면 고통을 호소하는 딸에게 부모가 들려준 조언이란 것이 원래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니 참으라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길들어왔고 그것이 당연하다 상식으로 여겨왔기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다. 사람에게 자격을 묻는다. 조건을 따진다. 인권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인간은 결코 일반적일 수 없다. 그 앞에 계량이 이루어진다. 존중해야 하는 인간과 그럴 필요 없는 사람과.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전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하기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쓰다가 망가지면 버리고, 버려지면 다시 대신할 사람을 찾는다. 그렇게 이 사회는 굴러왔다.


보다가 화가 나서 중간에 껐다. 그렇다고 몇몇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나 정의롭고 선한 대중들이 그동안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는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현실이 싫으면 네가 그만두라.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것이 또다시 낙인이 된다. 학교나 회사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에도 그들은 그것이 상식이고 정의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그렇게 배워왔고 익숙해져왔다. 이제와서 새삼 다른 방식따위 알지 못한다. 무엇의 문제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가.


이번 대선에 대해서도 그래서 그다지 기대는 없다. 참여정부가 당시 노동계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가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더 나빠지지만 않게. 노조도 이제 힘이 없다. 노동자도 힘이 없다. 냉혹한 현실이다.

예를 들어 어느 자동차회사에서 이런 광고를 냈다고 가정해보자.


"아빠가 사준 차"


혹은 어느 가방회사에서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운다.


"남자친구가 사준 가방"


과연 남자가 보기에 기분이 어떻겠는가. 바로 일부 한국여성들을 비하하며 '된장녀'라 부르는 그 이유인 것이다. 일부 한국여성들은 남자를 단지 돈벌어오는 기계로만 여긴다. 당연히 자기를 위해 돈벌어오고 아낌없이 쓸 줄 아는 존재라고만 여긴다. 당연히 기분나쁘지 않은가.


마찬가지다. 남자 입장에서 여자가 밥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수십만 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당연히 학교다닐 때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 들고 학교 가는 것이고, 여자친구가 있으면 여자친구가 싸주는 도시락을 먹고 싶은 것이고. 하지만 엄마와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너 도시락싸주는 존재냐?"


자기가 좋아서 싸주는 건 상관없다. 자식이 끔찍이 걱정되어서, 남자친구에게 조금이라도 맛있는 걸 먹이고 싶어서, 그러면 그것은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굳이 일부러 바라고 강요해야 하는 역할은 아니다. 아빠가 딸에게 차도 사줄 수 있고 남자친구가 가방도 사줄 수 있지만 자기가 하고 싶어서 사주는 것이지 원래 그러라는 아빠거나 남자친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리 말할 것이다. 엄마나 여자친구가 싸준 도시락이 좋다는 것이지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같은 비유로 돌려주려 한다. 여자친구가 다른 여자가 가진 가방을 가리키며 남자친구가 사주었다며 굉장히 부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떤 느낌이겠는가. 자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엄마의 도시락이네 여자친구의 도시락이네 좋아라 팔고 사먹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겠는가.


이를테면 트로피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누군가는 여자친구가 싸준 도시락을 먹고, 누군가는 그런 대량생산된 제품을 소비하고, 누군가는 아예 그런 것도 없고. 그런데도 전혀 그럴 생각이 들지 않는 자체가 문제라면 바로 거기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락같은 건 니가 싸먹든 사먹으라는 엄마나 여자친구가 당연하다면 그런 이름의 도시락도 사실 의미가 없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이 논란거리가 되는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아니 소수 얼뜨기들이 백악기 지층에서 파낸 구닥다리 헛소리들이나 지껄이며 소란을 일으키는 정도라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메갈리아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비판하는 다수의 남성들에 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다. 


페미니즘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음으로써 지지받을 자격을 잃었다. 따라서 나는 페미니즘을 거부할 것이다. 부정할 것이다. 배척할 것이다. 메갈리아는 훌륭한 빌미가 된다. 모든 페미니즘의 주장을 메갈리아로 몰아붙이고는 아예 논의 자체를 거부해 버린다. 딱 자기를 비판하는 모든 주장을 빨갱이라 낙인찍은 다음 아예 당사자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려 한 권력과 닮은 모습이다. 메갈리아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가 중요한 것이다. 더구나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메갈리아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메갈리아라서 그런 주장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메갈리아니까. 더이상 페미니즘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는 확실한 이유가 생겼다.


남자는 돈벌고 여자는 집안일하고, 그게 바로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남자도 집안일 좋아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전담할 수도 있다. 여자가 더 능력있으면 여자가 나가서 돈을 벌고 가족을 부양한다. 그러면 도시락은 여자가 아닌 남자가 싸야 한다. 아빠가, 혹은 남편이, 남자친구가. 그런데 그건 또 이상하다. 바로 기대다. 누구도 남자에게 그런 것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런 아이디어를 낸 자체가 덜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대학은 나왔으니 대기업에도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성적도 좋았을 테니 서류전형이며 면접도 통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사실조차 미처 헤아릴 능력이 안된다. 멍청하거나 아예 생각이 없거나.


엄마가 일하느라 바쁘면 도시락 같은 건 알아서 챙겨먹는 것이다. 도시락 먹을 주제가 못되면 알아서 주워먹든 훔쳐먹든 자기가 알아서 배를 채우면 되는 것이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면 고마운 것이지 그것을 바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당연한데 아직 당연하지 못하다. 한심한 짓거리들이다.

당연히 상대가 나보다 더 지위도 높고 힘도 세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 말하는 내용과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른 것 다 차치하더라도 상대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나의 입지나 나의 이익에 큰 영향이 미칠 수 있는데 허투루 대충 듣고 넘기려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이다. 당장 나 자신은 아니더라도 주위나 어쩌면 더 큰 사회적인 이슈로 발전할 수도 있다. 어떻게 먼저 그 내용과 의도를 이해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상대더러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걸러서 잘 설명해달라. 가능할까?


프로불편러라고 말한다. 사실 그런 말조차 의미없는 것이 인터넷에 이미 널리 일상화된 모습 가운데 하나다. 단어 하나를 꼬투리잡는다. 행동 하나를 트집답는다. 적절치 못했다. 해명하더라도 어찌되었거나 자신들이 듣거나 보기에 부적절했으니 주의했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다가도, 예능프로그램에서 웃겨보겠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듣는 사람을 고려해서 어휘 하나의 의미까지 일일이 생각해가며 말을 해야 한다. 몸짓 하나에까지 기호학적 해석까지 고려해서 심중히 해야만 한다. 아니면 아예 말하지 마라. 말하는 순간 난도질해버릴 것이다.


뭐냐면 권력이다. 대중이라는 권력이다. 이해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네가 이해시키는 것이다.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는 네 책임이다. 그래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선생님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다. 정치인이 국민을 대상으로 연설을 할 때다. 기업의 관리자나 군의 지휘관들이 하급자들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릴 때다. 이런 때는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된다. 명확히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상대에게 오해없이 전달할 수 있는 최적의 어휘를 골라서 써야만 한다. 왜냐면 그래야 혼란과 오류가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자신의 위치와 책임에 걸맞는 직무와 목적을 위한 수단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 적확하게 전달하는가가 곧 자신의 실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의 대화는 다르다. 일상의 대화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리 사전에 준비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어떤 말을 어떻게 하면 어떤 결과로 돌아올 것인가 사전에 철저히 계획하고 계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연인과 연인 사이에. 친구와 친구 사이에. 그때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단어와 문장을 고르고 다듬어 달라 요구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그냥 그런 것을 전제로 알아서 이해하는 것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그것이 소통이다. 상대가 듣는 나를 배려해서 말을 다듬는 것과 마찬가지로 덜다듬어진 상대의 말을 충실히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노력 자체를 아예 거부한 채 일방적으로 말하는 쪽의 책임만을 요구한다. 무슨 의미겠는가. 대등하게 소통하자는 것이겠는가.


실제 대부분의 프로불편러들은 대상을 같은 인간으로서 인격으로서 여기지 않는다. 말 그대로 대상이고 자신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다. 어떤 소통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자기가 불성실하게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어도 그 모든 책임은 그런 말과 행동을 항 당사자에게 있다. 대등한 공간에 있지 않다. 수평적인 공간에 있지 않다. 너는 나를 이해시켜야 하고 나는 너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되니까. 대부분 그런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에 있고 자신은 그들이 눈치봐야 하는 대중에 속하고 있으니까. 알량한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다. 


"네가 네 죄를 알렸다!"


이솝우화에 늑대와 새끼양의 이야기가 있다. 늑대가 새끼양을 잡아먹으려 어떤 이유를 대도 모두 새끼양의 반박으로 무산되자 그냥 다짜고짜 힘으로 잡아먹고 만다. 논리가 필요없다. 이유가 필요없다. 목적만이 존재한다. 나는 저들보다 위에 있다. 나는 저들보다 더 높고 더 강한 존재다. 그래야만 한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상대는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여야 한다. 그를 통해 자신의 비틀어진 열등감을 해소하려 한다. 이유따위는 필요없다. 네티즌으로서, 대중이라는 집단의 힘을 빌어 자신의 정의를 확인시켜준다.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야 만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그놈의 네티즌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을 버려 버렸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모인 군중심리가 하찮은 개인들에게 쓸데없는 헛바람만 집어넣어 버렸다. 그런데도 다수의 힘이 더 강한 소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 쾌감에 도취된다. 오히려 의도한 오해와 편견드로 상대를 몰아세우며 쾌감을 느낀다. 충분히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그런 식으로 몰아가려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놈들이 또 여론을 주도한다. 생각없는 것들은 그런 헛소리에 쉽사리 넘어가며 동조해 버리고 만다. 쓸데없는 성실함이랄까. 거의 예외란 없다시피 하다.


어차피 내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상대가 그것까지 고려하지는 못한다. 모르기 때문이다. 한 번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상대의 의도에 접근해야 한다. 어떤 의도로 어떤 목적과 이유와 과정을 통해 그런 말과 행동들을 보였는가. 인간을 인간으로서 이해한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서 언제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긴 그런 것이 가능하면 한 편으로 인간이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 의도하여 오해하고 그마저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런 강한 자신이야 말로 진짜 자신이어야 한다. 비루한 정신이다.


별 사소한 글이다. 그런데도 울컥울컥 치미는 것이 있다. 내 일이 아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일에 분노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에게 이성이란 것이 있다는 또하나 증거인 것이다. 아니라 하면 아닌 줄 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안다. 그리고 그런데도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 있으면 그 다음에 다시 물어 알아본다. 인터넷에만 들어오면 사람들이 괴물이 된다. 아무도 없는 익명의 공간에서 빈약한 자아는 괴물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다. 알량한 권력마저 인간을 이렇게 타락시킨다. 인간인 까닭이다. 한심하게도.

사실 나도 경험한 일이다. 오래전 어느 게시판에서 누군가와 논쟁이 붙었었다. 너무 사정없이 몰아붙인 탓인지 나중에는 논쟁이 아니라 감정을 앞세운 사정처럼 되고 말았다. 그래서 누가 욕을 먹었을까? 논리적인 비판과 감정적인 호소 가운데 무엇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내가 더이상 인터넷공간에서 논쟁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된 계기였다. 그냥 내 생각을 써서 알리지 더이상 누군가와 생각을 교환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은 당연히 약자를 동정하려 한다. 그런데 동정받는 약자란 선량한 약자여야 한다. 그리고 선량하다는 것은 남들처럼 능동적이거나 적극저이거나 집요하거나 영리하거나 계산적이지 않은 어떤 이상적인 순수함이나 순결함 같은 것이다. 한없이 깨끗하고 한 점 부끄러움도 더려움도 없어야 비로소 동정받을 자격을 갖는다. 이를테면 성폭행 피해자를 동정하다가도 피해자의 사소한 문제가 드러나면 그것을 이유로 오히려 비난을 퍼부어대는 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성폭행당하고 바로 경찰에 신고하면 그마저도 충분히 의심을 살 이유가 된다. 자기가 아는 '순수한' 성폭행 피해자는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순수한' 흑인과 '순수한' 소수성애자와 '순수한' 노동자, 혹은 '순수한' 세입자 같은 것이다.


어째서 단지 법이 그렇게 되어 있을 뿐 리쌍이 부당하게 세입자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임에도 세입자에게 더 많은 비난이 쏟아지는가. 전건물주가 편법으로 환산보증금을 5억으로 만든 탓에 임대차보호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건물주와의 구두계약에도 불구하고 무려 수 억에 이르는 손해를 입고 가게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물론 맞다. 그나마 연예인이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이미지가 직접 이익으로 이어지는 인기인인 때문이다. 아니었다면 저런 식으로 덤비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당하게 이익을 빼앗기고 큰 피해를 입었는데 목숨걸고 덤비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은 결코 선량한 행동이 되지 못할 테니까. 일방적으로 두들겨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다면 옷이라도 벗어 걸쳐주겠지만 같이 죽자고 계속 덤벼든다면 그 어리석음만을 비웃을 뿐이다.


물론 법적으로 리쌍도 할 만큼 했다고 본다. 법이 그따위인데 굳이 리쌍이라고 법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해주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반드시 다른 한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 모호하고 애매한 경계에 바로 법이 있고 제도가 있다. 혹은 관습이기도 하고 문화이기도 하다. 합쳐서 구조고 환경이고 현실이다. 리쌍이야 해 줄 만큼 해주었다 하더라도 우장창창 입장에서는 여전히 수 억의 손해를 본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어지간히 돈많은 자산가라도 수 억이면 매우 큰 돈이다. 1억만 되어도 대부분의 서민들은 그냥 바로 '억'소리 나오고 만다. 그래도 물고 늘어질만한 부분도 있고 비집고 들어갈 틈도 있으니 어떻게든 버텨 보는 것이다. 단돈 몇 천 원에도 달동네의 아주머니들은 대낮에 알몸이 되어 길바닥에 뒹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행동이 과연 잘못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차라리 우장창창이 세입자가 아니었으면 그런 비난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수준의 강자였다면 비슷하게 책임과 동정이 나뉘어졌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아무 저항도 않고 리쌍의 건물 앞에서 울고만 있었다면 동정은 받았을 것이다. 울지도 못하고 그저 소주만 먹다가 어디서 사고라도 당했다면 편들어주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약자가 순수하지 못했다. 약자가 보통사람들처럼 욕망과 의지를 내보였다. 더구나 강자를 곤란케 할 수 있는 수단들까지 교묘하게 동원하고 있었다. 약점을 물고 빈틈을 헤집으며 사람과 여론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것은 약자가 아니다. 동정받는 약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장창창을 전보다 더, 갑질하는 건물주보다도 더 혐오하게 된 이유였다. 정상이 아니다. 정상에서 벗어났다. 선량한 약자는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원래 법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법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법대로 한다면 리쌍처럼 하는 것도 그리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건물주들보다 양심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법이 정의일 수는 없다. 법보다 중요한 것이 당장 내가 입게 될 손해다. 정의보다 더 절박한 것이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 할 자신의 삶이다. 법을 지키자고 내가 죽을 수는 없다. 법을 바꿔야 한다고 그동안 굶을 수만도 없다.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다. 리쌍을 굳이 비난하지 않지만 우장창창의 사장도 마냥 탓하기 어렵다. 단지 전술이 잘못되었다. 아니 그래도 여론의 비난을 받는 대신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성공했다 할 수 있다. 역시 대중의 여론보다는 당장 내가 먹고 살야 하는 현실인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나마 리쌍은 양심적인 건물주였다는 것이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동정할 만큼 나름대로 인정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피눈물을 쏟아내야만 했다. 고작 수 억의 돈이다. 도대체 평범한 월급쟁이들이 몇 년을 일해서 모으면 그 돈을 벌 수 있을까. 중국의 경제제제로 상인들 어려워졌다니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래 남의 돈이라는 게 그렇다. 그나마 다행이다. 좋게 해결됐다니. 어렵지만.

'썰전'에서 안철수가 일자리공약이라고 발표한 것을 보았다. 사실은 그때 쓰고 싶었지만 원래 글이라는 건 바로 떠오를 때 써야지 시간이 지나면 어쩐지 자신부터 시들해지는 법이다. 그냥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어째서 사람들은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를 꺼리는가. 첫째는 역시 임금이다. 둘째는 안정성과 장래성이다. 마지막은 자존감이다. 대기업에 비해 임금도 부족하고, 그렇다고 안정적이거나 확실하게 장래가 보장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업수이여기는 것 같다. 사실 이것은 안철수가 공약한 학제개혁과도 닿는 부분이다. 자기가 졸업한 학교로 인해, 혹은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으로 인해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판단하려 한다. 서열을 매기고 그것으로 타인을 멸시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문제야 말로 해결하기가 가장 어렵다.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부터 접근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안정성이나 장래성 역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분도 결국 해답은 있다. 직업을 단지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다. 자신을 나타내는 어떤 정체적인 것이 아닌 그저 내가 벌어먹기 위한 수단이다. 말 그대로 어차피 더이상 돈을 벌어야 하는 필요가 사라지면 제발 있어달라 사정해도 먼저 그만둔다. 어디서 일하든 무슨 일을 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결국 돈이 가장 중요한 해법일 수 있다.


어째서 노동자들은 자신은 물론 상관없는 타인이 받는 임금에 대해서까지 그렇게까지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당연하다. 돈이 있어야 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당장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단순히 먹고 사는 정도가 아니다. 그저 굶지 않고 사는 정도라면 진짜 아무데서나 대충 허드렛일하며 어떻게든 버티고 산다. 노동자에게 최악의 시대였던 산업혁명기에도 그 열악한 조건과 환경에서 형편없는 임금만을 받으며 어떻게든 노동자들은 살아갔다. 역시 결국 근본으로 돌아간다. 나란 어떤 존재인가. 나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만이 가지는 자의식이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신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이기를 누구나 바란다. 그것을 현실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허구헌날 맨밥에 물말아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다. 내 아내 내 자식이 그렇게 사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 사람답게다. 사람답게 먹고, 사람답게 입고, 사람답게 괜찮은 집에서, 사람답게 문화생활도 누리며 살아간다. 최초의 복지가 단지 생물로서 인간의 생존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면 어느새 복지란 존재로서 인간의 존엄까지 지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각 지자체에서 상대적으로 값싸게 지역주민들에게 제공하는 각종 문화서비스들도 그런 한 예라 할 수 있다. 더 적은 돈으로 지자체가 마련한 공간에서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강연도 받고, 체육활동도 한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실제 음악을 연주해 보기도 한다. 무엇하러 그런 쓸데없는 일에 비싼 세금을 쓰는가.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나 역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 장차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으면, 그 이전에 지금 있는 부모와 형제들 역시 나로 인해 사랍답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지금 중소기업에서 받는 임금수준이 그같은 목적을 이루는데 충분한 수준인가. 사치는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위한 질높은 삶을 누리는데 필요한 정도의 수입은 보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 정도 수준에 이르고 있는가. 방법은 간단하다. 이미 윗 문단에 모든 답이 있다. 그렇게 해주면 된다. 아예 사회가 그럴 수 있게 모든 것을 보장해주면 된다. 자기가 직접 선택해야만 하는 부분들 - 이를테면 가장 기본적인 먹고, 입고, 자는 것들을 제외한 사회가 선택하여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사회가 책임지고 지원하는 것이다. 더이상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일에 매몰하지 않아도 된다. 일과 직장, 임금에 구애되며 살지 않아도 되도록 한다. 이상적이지만 그를 위한 과정에 있다는 믿음을 갇게 한다.


그래서 문재인의 공공부문의 채용증가 공약을 지지하는 것이다. 바로 문재인이 약속한 공공부문의 채용이야 말로 그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개인의 많은 부분을 책임져 준다. 개인을 대신해 많은 부분을 보장해 준다. 그러므로 개인은 단지 그 나머지만을 스스로 쟁취해서 누리면 된다. 더 적은 임금으로도 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한국에서는 벌써부터 세금 더 거둔다며 비명소리가 들리는데 그 이상의 세금을 거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사람들이 크게 문제없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그 만큼 사회가 세금을 거두어서 함께 쓰고 나머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다. 임금에 대한 집착이 적어지니 직업에 대한 압박도 사라진다. 더 좋은 직업을 바라는 것이야 누구나 같지만 그보다 못한 직업을 갖는다고 괜한 자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이미 충분히 인간으로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단순히 일정기간 임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부분까지 파고들려면 그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인간은 왜 일을 하고 어째서 돈을 벌려 하는가? 그러면 어째서 인간은 자신이 받는 임금에 대해 그토록 불안해하고 불만을 가지는 것인가? 아르바이트만 해서도 어쨌든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 한 달에 절반만 일해도 혼자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 비정규직문제도 그렇게 해결할 수 있다. 계약직이더라도 정작 사는 것은 정규직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 재원은?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주체들로부터 그만큼 더 거두면 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금과 같은 고용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자유롭게 해고하고 필요하면 바로 채용해 쓸 수 있는 유연한 노동시장은 결코 공짜여서는 안된다.


복지란 단순히 개인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다.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이유다. 개인이 일을 해서 돈을 벌듯 사회도 돈을 모아 그를 위해 쓸 수 있어야 한다. 역시 사회의 근본을 건드리는 작업이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삶이란 단지 생존이다. 존재가 아니다. 존엄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은 그냥 짐승이다.


별로 대단한 일은 하고 있지 않다. 벌이야 참 눈물겨울 정도다. 아끼고 또 아껴서 겨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에 굳이 더 많은 돈을 주는 더 나은 일자리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내가 사는 이유다. 일을 하는 이유다. 그냥 내 얘기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면서 탈민족은 아예 당위가 되었다. 어차피 민족이란 허구다. 민족이란 실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민족을 전제한 모든 논리와 주장은 허황된 것이다. 마땅히 이를 비판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 대상이 바로 일제강점기였다. 다수의 진보지식인들이 하필 서울대 출신인 것도 있어서 식민지근대화론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학파의 주장도 비판없이 받아들인다. 일제의 침탈과 수탈은 민족과 마찬가지로 환상이다. 민족이 없는 이상 일본인이라는 민족에 의한 조선인이라는 민족에 대한 침략과 억압과 약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려 애써 일제강점기에 대해 일본의 편을 든다. 심지어는 일제강점기가 계속되었다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에서 보다 성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말했듯 민족은 허구니까.


그 관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 어째서 한국 페미니스트들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책임을 묻는 것을 꺼리고 거부감까지 가지는가. 민족에 의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에 의한 만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남성에 의한 여성에 대한 약탈이고 억압이었다. 남성이 죄인 것이지 일본이 죄인 것은 아니다. 애써 일본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당시 조선의 남성들에게 그 대부분의 책임을 지우려 한다. 반성해야 하는 것은 조선의 남성들이고 지금의 한국의 남성들이지 일본이라는 국가나 민족은 아니다. 과거 이영훈이 일본의 사과나 반성보다 한국인 스스로의 성찰을 주장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동의했던 것이 바로 이들 진보 탈민족주의자들이었다.


원래 진보란 학벌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치 뒷골목 양아치들이 그렇듯 서로의 족보를 읊으며 관계를 설정한다. 그렇게 그들의 사상은 유전된다. 그들 사이에서 행세하려면 그런 흐름에 거슬러서는 안된다. 차라리 자기들 안에서 바보가 되더라도 미친 놈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신 그것이 더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친 놈으로 여겨진다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한때는 그래도 진보라는 것이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최소한 선진국에 의한 제 3세계에 대한 직간접적인 약탈들에는 분노하더라도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침략자라 분노하더라도 일본제국주의는 미개하던 조선을 근대화시킨 은인이다. 참고로 여기에는 개신교도 한 몫 낀다. 개신교의 선교가 공식화된 것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진 이후이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주로 개신교를 전도했던 것도 대부분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의 선교사들이었다. 한국에서 개신교를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도록 한 것만으로도 일본제국주의에는 공이 크다. 문창극이 괜히 교회에서 그런 연설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새삼 생각났다. 그 이후로 진보라는 인간들 - 특히 먹물냄새 풀풀 풍기는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뭐 그리 아는 건 많은지. 말도 많다. 패거리의 단합도 상당하다. 무엇이 문제인가도 자신들끼리 합의해서 결론지어 버린다. 오랜 기억이다.

지금도 오지 원시부족의 삶을 보면 사냥을 통한 동물성 단백질의 섭취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원시적인 사냥도구로 사냥에 나선다고 반드시 사냥감을 잡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사냥에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다. 자칫 사냥꾼이 사고로 다치거나 죽게 되면 역시 사냥감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때 원시인들은 어떻게 식량을 조달했는가.


불과 얼마전까지 대부분의 사회에서 인간의 삶이란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농사 등 중요한 생산에 종사하는 이외의 나머지 잉여인구는 산으로 들로 바다로 흩어져 먹을 수 있는 자연의 생산물을 찾아나서야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논에 나가 메뚜기를 잡고, 산으로 들어가서 버섯을 따고 나물을 캐고 산열매를 줍고, 역시 그 대부분은 저탄수고지방 다이어트에서 주장하는 동물성 포화지방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아니 당장 야생상태에서 구할 수 있는 동물들 가운데 그렇게 유의미하게 고지방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지방을 충걱한 경우도 매우 드물다. 돼지도 사람이 우리에 가둬놓고 기르니 지방이 끼는 것이지 야생의 돼지들은 지방의 두께가 훨씬 얇다. 원시의 삶은 얼마나 달랐을까?


인간과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원숭이나 유인원들을 보더라도 역시 육식만을 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대개는 육식과 채식을 병행하고, 자연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인 과일들은 대부분 탄수화물인 당을 포함하고 있다. 정확히 과일에 포함된 당분이 주된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것이다. 아주 초기의 인류 역시 유인원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면 역시 대부분의 먹을거리는 지방이 적은 야생의 짐승이거나 당분이 많은 과일들이기 쉬운 것이다. 인간의 몸은 당연하게 그같은 당시의 식생활에 맞게 진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탄수화물을 극도로 억제할 경우 케톤이 그를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인간의 몸은 충분히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고지방식이라는 자체가 어쩌면 문명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가축들을 가두어 기르며 열량 높은 먹이를 먹인 결과 가축의 고기에도 기름이 끼기 시작했다. 맛있는 고기를 평가할 때 기준인 마블링조차 사실은 근육에 지방이 낀 심각한 장애상태일 수 있는 것이다. 식물의 열매나 동물의 지방에서 기름을 정제하기 시작한 것도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며 가능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지방을 많이 먹으니 오히려 인간의 몸에 좋다?


많은 과일들이 굳이 몸에도 안좋은 당을 머금는 것도 그 연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이 몸에 좋지 않다면 식물들 역시 동물의 생존에 더 유리한 형태로 열매를 진화시켰어야 했다. 열매가 진화를 선택하고 강요했어야 했다. 하지만 육식동물들조차 열매의 당에 의존한 식생활로 연명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 않다. 그런데 그런 당을 줄이고 동물성 지방의 비중을 늘린다. 현명한가?


원래 적당히 비만인 쪽이 흔히 말하는 건강한 근육질 체형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오래산다는 연구결과가 아마 몇 년 전 발표되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피하지방이란 여분이다. 필요하기에 굳이 필요한 만큼의 영양을 제외하고 지방으로 축적하도록 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지나치다는 것은 최근의 경향이다. 영양섭취가 너무 지나쳐서 살을 빼야 한다면 가장 옳은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괜히 살뺀다고 밥을 줄였다가 정신이 몽롱해져서 하는 말이 아니다. 커피마저 설탕 없이 블랙으로 마신 지 몇 주 되었다. 몇 배 더 피곤하다. 정신도 혼미해지고. 계속 졸리기만 하고.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과연 남들 한다고 따라하는 이것이 정상이고 옳은 방법인가? 언론이 문제다. 그저 시청률에만 급급해서 일시적 가십에 쉽게 휩쓸리고 만다. 당을 늘려야 한다. 심각한 위기다. 남들 한다고 무조건 따라하는 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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