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요즘 젊은이들 많이 어렵다는 것을 이번 이슈를 통해 더욱 느끼게 되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귀걸이 때문에 면접에서 - 심지어 서류심사에서 떨어졌다면 먼저 당사자인 젊은이들부터 나서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게 왜 문제인가. 실력있고 경력있고 일만 잘하면 되는 것이지.
기업이 굳이 사람을 뽑아 쓰려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자선사업하는 거 아니다. 구직자들 좋은 일 시켜주려는 것도 아니다. 사회에 대한 환원 차원은 더욱 아니다. 회사에서 필요하니까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그 일을 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야 기업의 목적인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현상유지라도 가능할 테니까. 그나마도 항상 최소한의 사람만을 뽑아서 대부분의 기업에서 직원들은 잔업에, 야근에, 심지어 주말근무까지 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동관련법이나 규정을 모두 지키려면 지금보다 최소 수십퍼센트 이상 더 고용해야만 한다.
그러면 기업에서 필요한 인재란 어떤 인재겠는가. 바로 여기에서 갈리는 것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인재인가. 아니면 일을 더 수월하게 시킬 수 있는 인재인가. 정확히 일은 잘할 것 같지만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인재와 일은 그다지 잘할 것 같지 않은데 시키면 시키는대로 충실히 따라줄 인재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대한민국이 병영사회라는 이유다. 유교와는 상관없다. 구일본군의 병영문화와 더 가깝다. 내가 너보다 계급도 높고 짬밥도 길므로 감히 내앞에서 함부로 나대서는 안된다. 그 말을 번역하자면 "어린 놈이 싸가지없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너의 '갑'이다.
다행히 요즘은 취업이 어렵다 보니 젊은이들 스스로 알아서 기업의 요구에 맞춰가는 바람에 고르는 어려움이 줄어들었다. 일도 잘할 것 같은데 한 눈에 보기에도 순종적이고 성실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간다. 감히 한 마디 자기 생각을 더하지도 못하고, 불합리한 것을 보면서도 불합리하다 말하지 못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스스로를 맞춰간다. 그러니까 10년 전만 하더라도 귀걸이를 이유로 면접에서 잘렸다면 현장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돌아서서는 서로 욕하기 바빴다는 것이다. 귀걸이가 일과 무슨 상관인데? 더구나 예체능계다. 실력과 경력도 충분하다. 누구보다 해당 분야에서 잘할 자신이 있다. 그만한 객관적 근거까지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귀걸이 하면 면접관이 불쾌해할까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금기로 설정한다.
2006년 당시 고용정보원에서 이력서사진이나 면접에서 귀걸이와 같은 악세사리를 해서는 안된다 명문화했던 것도 아니었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담당했던 담당자가 그런 것들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하게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럴 것 같으니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으니까. 그것이 어느새 상식이 된다. 상식에서 벗어났기에 이해할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자기들은 그럴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11년 전 당시도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신을 고용해 줄 기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정작 취업을 위해 스펙쌓기를 한다면서 그 가운데 실제 기업에서 업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는가. 계약이란 거래다. 내가 하는 만큼 그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로부터 받는 만큼 나 역시 그를 위해 해주는 것이다. 내가 얼마의 급여를 받는 만큼 어떤 일들을 기업을 위해 해 줄 수 있는가. 어떤 대우를 받고자 하기에 어떤 일들을 얼만큼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그를 위해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고 어떤 자격증을 따야 하는가. 취업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경력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기업에 잘 보일 것인가. 면접관에게 잘 보일 것인가. 인간적인 선의와 인정에 기대려 한다. 내가 최대한 예의를 갖추는 만큼 상대도 역시 자신을 호의로 대해주기를. 내가 먼저 충분한 가격을 갖추고 예의를 다하면 역시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기를. 그래서 기업들도 틈만 나면 직원과 심지어 소비자들에게까지 '가족'을 외치는 것인지 모른다. '가족'이란 어떤 불합리도 용서되는 원초의 관계다. 취업이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성공의 여부, 사회적 인정과 자존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스스로 최소한의 자격을 설정한다. 최소한의 태도와 예절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취직할 수 있다. 그래야만 면접관에게 선택될 수 있다.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 도태되지 않아도 된다.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불합리한 기대가 불합리한 태도와 관계를 용인한다. 상대의 불합리한 요구나 지시도, 태도 역시도 그래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에 순종함으로써 자신도 그런 질서 안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안전해질 수 있고 자신의 몫을 나누어 받을 수도 있다. 인정하면 편하다. 받아들이면 쉬워진다. 어차피 그런 것이 세상이다. 저 큰 세상과 맞서는 것은 단지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런 현실을 거스르고도 성공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문재인의 아들 문준용씨와 관련한 논란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논란 자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착각하는 것이다. 취업준비생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격이나 요건이 무엇이든 결국 결정하는 것은 채용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미디어를 통해서도 각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의 입을 빌어 그리 말하고 있기도 하다. 정작 스펙은 화려한데 무엇에 써야 할 지 모르는 지원자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지원자 가운데 뽑을 때는 태도와 인성, 자격을 우선해 볼 테니 그 이상 더해야 할 것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터다. 즉 지원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결국 결정하는 것은 채용하는 당사자의 임의라는 것이다. 귀걸이가 중요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세대차이일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취업문제로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는 않았었다. 당시도 취직이 어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대가 있었다. 희망이 있었다. 더 나아지기를. 더 합리적인 사회가 되기를. 불합리에 도전하고 그것을 깨부수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가 아직은 조금 남아있기도 했었다. 방황도 하고 실수도 하고 그러다 자기 길도 찾고. 하지만 어느샌가 실패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작은 일탈조차 용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엄격하게 사회가 요구한대로 자기를 맞추며 잠시의 방심도 용서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보다 상대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고보면 인터넷 문화 자체도 무척 경직되었다. 이하늘이 베이비복스를 모욕하고 김구라가 인터넷에서 욕설을 쏟아낼 때 낄낄거리며 동조하던 것이 당시의 젊은세대들이었다. 도전과 일탈이야 말로 그들의 문화였던 탓이다. 오히려 자신이 감시자가 되어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쉽게 집단행동에 나서는 모습과 비교된다. 누가 옳다기보다 그만큼 낯설다는 뜻이다.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받는 압력이 거세졌다는 뜻이 될 것이다. 거스르기 힘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과연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는가. 또한 얼마나 해당분야에 필요한 실력과 경력을 갖추고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적절한 채용이고 인사였는가. 그보다는 과연 자격을 갖추었는가. 과연 예의를 다했는가. 과연 적절한 태도를 취했는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존재다. 얼마나 시키는대로 자기 생각 없이 충실하게 따를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내가 부리기 쉬운 사람을 뽑는다.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사람을 뽑는다. 언제부터인가 확실히 노조도 많이 약해져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촌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다. 세상이 바뀐 탓이다. 아니 원래 세상은 이랬는데 더이상 그를 거스를 의지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그런 자신들의 상식에서 벗어난 대상들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그들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정작 자신들이 인사담당자 같다. 당시 고용정보원의 책임자 같다. 자기라면 이런 사람은 뽑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했으면 절대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아니면 지금까지 자신들의 노력은 허사가 된다. 의미가 사라진다. 발버둥이기도 하다. 그것이 정의여야만 한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부조리해도 그래야만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허튼 것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은 세상의 질서 안에 존재해야 한다. 모순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슬픈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어렵다. 이렇게 나약해져 있다. 그들만 탓할 수는 없다. 그렇게 기른다.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게 길들인다. 순종적으로. 말 잘 듣게. 자기 생각 없이. 주위의 눈치를 더 잘 살피도록. 주위에 맞춰가도록. 더이상 버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안타깝게도.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