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정기준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배우게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백성들이 꿈을 꾸게 되면 나라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무지한 채 자기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노예를 해방한다거나, 혹은 천민을 양민으로 올려주거나, 이방인에게 시민권을 내주거나. 가깝게는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기존의 남성들의 반응도 비슷했었다. 그러면 노예들이 하던 일은 누가 하고? 그로 인해 기존의 양인들이 역차별을 받는 건 또 어쩌고? 이미 완결된 사회구조 안에 있는데 갑작스럽게 변화를 준다면 그로 인한 혼란과 비용은 누가 감당하는가?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 온 대로 계속 그냥 가자. 인류역사상 근본적인 변화를 꾀했던 혁명가가 아주 없지는 않았음에도 변화는 느리게 때로 반동까지 겪으며 어렵게 이루어져 왔던 이유가 다 여기에 잇다. 한 마디로 아무리 알량한 것이라도 내 기득권을 놓치지 않겠다. 내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들였던 노력의 보상을 받아야겠다. 당연히 그 보상은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비정규직을 굽어볼 수 있는 우월감이다.


기간제 교사는 교육공무원인 정규직교사와 같아져서는 안된다. 기간제교사들이 세월호에서 교사로써 순직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어려우니 그냥 의사자로 만족하자. 법이 잘못되었으면 법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순직으로 인정해도 순직으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순직으로 인정하는 순간 기존의 공무원들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다. 크나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비정규직은 언제까지고 비정규직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정규직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정규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한 편으로 정의이기도 하다. 뭐 원래 모든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니까.


문재인 대통령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고비 가운데 하나다. 비정규직을 차별함으로써 그동안의 자신의 노력을 보상받으려 한다. 인간의 천박함은 동서고금이 없고 노소와 남녀가 다로 없다. 알량함이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우습다.

아마 지금도 일정기간 이상 비정규직으로 고용해서 사용하고 있다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어차피 기업에서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는 이유도 해당 업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을 찾기 위해서다. 아직 일을 시켜보지 못했기에 경력직이 아니라면 이전의 다른 경력들을 통해서 그 가능성을 살피고 가작 적합한 인력을 뽑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현장에서 실무를 통해 검증된 인력이 있다면?


현장에서 실무를 통한 경험 역시 채용을 위한 평가기준의 하나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굳이 학벌이나 시험성적만이 아닌 최초 채용기준은 조금 낮더라도 실제 업무를 통해 실력과 가능성을 확인했다면 업무에 적합하다 여겨 정규직으로 채용해도 좋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바로 그 시험이 문제인 것이다. 아무리 실무를 통해 경험을 쌓았어도 시험을 통해 검증하지 않았다면 자격이 없다.


현정부가 여러 시험들을 순차적으로 폐지하려는 이유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면 자격이 없다. 자신들과 같은 시험을 치르고 통과하지 않았다면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에 대한 여러 차별들은 정당하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같은 노동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 대한 어떤 처우개선이나 심지어 정규직전환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시험을 치르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서 이 자리까지 왔다. 너희들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 시험 자체를 폐지한다.


일을 시켜서 잘하는 것 같으면 굳이 학력같은 것 볼 필요없이 데려다 쓰면 되는 것이다. 정규직이라고 모두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에 종사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많은 경우 오랜 숙련기간이 필요한 업무에 대해서조차 비정규직을 채용해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실무를 통해서 그 능력을 확인했다. 무리없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다른 자격이 필요한 것인가.


시험이라고 하는 가상이 아닌 실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수학능력시험을 잘봤다고 대학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잘할 것이라 여기는 것도 환상이다. 대학성적도 좋고 스펙도 화려한데 정작 일을 시켜보네 전혀 깜깜이더라는 경우도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많다. 경험이다. 실전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몸으로 겪어서 확인해야만 한다. 참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시험을 치렀다. 본전생각이 제일 지독하다. 항상.

얼마전부터 인터넷을 하다 보면 특정한 범죄보도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겠다'라는 반응들을 보게 된다. 누가 옳고 누가 맞는지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하지 않겠다. 얼핏 냉정하다. 무척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결론나고 나면 그때 판단하고 평가하겠다. 하지만 과연 그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같은 이성과 냉정이 곧 정의일 수 있을 것인가.


성폭행 가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꽃뱀이라며 비난한다. 개인의 사생활까지 들추며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협박까지 해댄다. 그런데도 사정을 알 수 없다. 누가 틀렸는지 알 수 없다. 실제 경찰이 그렇게 수수방관하다가 가해자에 의해 피해자가 이차피해, 심지어 살해까지 당하는 경우가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물론 가해자의 - 정확히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주장이 맞아서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무고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판단에 의해 더 억울하고 더 고통스러울 것 같은 쪽은 선택하여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더 큰 피해와 상처를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그 책임도 함께 진다.


내가 진중권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알든 모르든 일단 판단을 내리면 진흙탕이든 똥구덩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같이 뒹굴고 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맞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 한다. 그리고 책임도 함께 진다. 진중권의 흑역사라 하는 것은 모두가 판단을 보류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 싸우려 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해도 나 역시 그래서 굳이 책임을 두려워해서 특정 이슈에 뛰어드는 것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다. 다만 판단하기까지 정보가 부족한 만큼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일단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모든 책임은 나 자신이 지는 것이다.


쿨한 것과 비겁한 것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그래서 포도밭의 여우로 자주 비유하고는 한다. 포도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먹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겁함을 이성과 냉정으로 어설프게 가리려 한다. 당장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어도, 그 가족마저 큰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나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그냥 지켜보겠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건장한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있다면 이유야 어찌되었든 먼저 말리고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두 사람 사이를 알 수 없으므로. 그래서 부부이고 연인이라면 일방적으로 폭행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과거 사회주의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그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설사 틀린 판단이고 결론이라 할지라도 일단 먼저 행동에 나선 순간 반성도 할 수 있고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판단해야 했던 합리적인 이유들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틀리더라도 끝까지 계산을 포기하지 않았던 학생을 아예 틀릴 것을 두려워해서 계산 자체를 포기한 학생이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틀렸기 때문에 또다른 답도 찾아 나설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


여전히 인터넷은 여러 이슈들로 숨돌릴 틈이 없다. 이쪽이 옳다는 사람과 저쪽이 옳다는 사람, 그러므로 이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과 저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 그러면 그 과정에서 엄밀한 검증을 통해서 새로운 진실을 밝혀낼 수도 있다. 구경꾼들은 둘 다를 비웃는다. 자기는 중립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상처입는 일이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일부지만 태도가 남다르게 얄미울 뿐. 자기만 이성적이고 냉정하다. 비웃는다.

말이 노동유연화지, 노동유연화의 핵심은 단순히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용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고용은 배제한 채 해고가 쉽지 않은 현실만을 이야기하며 고용을 유연화해야 한다 주장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연성으로 고용해서 쉽게 해고하고 나면 해고당한 노동자는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기업 입장에서야 해고하면 끝이지만 노동자는 그동안에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


항상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를 고민한다. 만일 일을 그만두고 다시 취직이 안되면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노후를 대비한 자금으로 보험등에 묶어두고 있다. 급여도 쥐꼬리만한데 그 안에서 실제 내가 내 삶을 위해 쓸 수 있는 돈은 매우 적은 수준에 불과하다.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의 일을 그만둔 만일의 상황을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소비인들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장래에 대한 계획인들 마음대로 세울 수 있겠는가. 그나마 나는 나이라도 많아서 몇 년만 버티면 된다는 견적이 이미 나와 있다. 앞으로 8년만 버티면 더이상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더 젊은 세대들은?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사회 전반의 모든 문제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연애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낳는다. 아이를 낳더라도 안정적으로 보살필 수 없다. 부모가 불안해하면 아이들도 바로 영향을 받는다. 부모는 불안한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전전긍긍하는데 아이들은 그저 굳은 의지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로지 자신의 미래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면 당신의 머리가 그래서 이미 망가진 것이라 여기면 된다. 인간은 물질세계에 살고 물적 환경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고용이 불안한 대신 다른 나라처럼 임금을 더 챙겨주던가. 당장 해고가 쉽더라도 재취업 역시 쉽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던가. 그런 점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은 매우 유용한 듯하다. 나이 먹고 연차 높아졌다고 더 높은 임금을 주기보다 그냥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나는 지출에 대해서는 사회비용으로 대신한다. 교육, 의료, 주거 기타등등등, 특히 육아와 관련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정부에서 모두 보조한다면 최소한 아이를 낳고 기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복지란 어쩌면 노동자의 임금을 최소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장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만큼 국가에서 사회에서 책임져주므로 노동자 개인이 더 많은 수입을 일부러 기대할 필요는 없다. 사회안전망이 확실하다면 노동자 역시 노동과 임금에 대한 기대를 낮출 수 있다. 내일에 대한 불안 역시 낮출 수 있다. 비정규직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은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가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역차별이 아닌가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가끔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다. 정규직이 되려고 그동안 들인 노력이 얼마인데 어떻게 비정규직이 한순간에 정규직과 같아질 수 있는가. 멀리는 초중고등학교 때부터 가깝게는 입사시험에 면접까지 치르고 힘들게 정규직이 되었는데 비정규직이 되는데 그만한 노력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묻고 싶다. 기업이 굳이 지원자의 학력이며 스펙을 보고, 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통해 직접 확인까지 하려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경력직이 아닌 이상 모든 지원자는 사용자 입장에서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일단 채용해서 써봐야 쓸만한지 아닌지 알 수 있는데 그렇다고 덜컥 채용부터 하고 나면 무르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서 그나마 가장 확률 높은 수단으로써 지원자의 학력과 스펙과 지식수준, 그리고 직접 면접을 통해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 파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지원자가 기업이 요구하는 업무를 충실히 훌륭하게 수행해낼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다. 그런데 정작 대다수 비정규직들은 벌써 몇 년 전부터 해당분야에서 더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업무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정 기간 이상 계약직으로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실상 실무를 통해 직접 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경력직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직접 관리하며 확인한 대상들인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가장 우선해서 고용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공부를 잘하고 스펙이 화려한 미지의 지원자인가? 아니면 학력이나 스펙이야 어쨌든 현장에서 실무를 익힌 경력자들인가? 물론 분야에 따라 스펙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당장의 업무능력보다 내일의 발전가능성에 더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면 계약직을 고용해서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대부분 계약직들은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현장을 떠나 다른 일을 찾아나서야만 한다. 업무의 연속성이 떨어진다. 즉 굳이 내일의 가능성따위 고려치 않고 오늘의 즉시전력감을 원하기에 계약직을 채용해 쓰는 것이다. 그런데 한시적으로 채용해 쓰는 것이 아닌 항구적으로 필요한 인력이라면 또 어떻게 될까? 항상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마저 계약직으로 고용해 쓰고 있다. 원래는 정규직으로 써야 하는데 인건비 아끼려고 계약직만을 돌려쓰고 있다. 과연 정당한 고용행태라 말할 수 있는가. 노동유연화라는 것은 사업자의 필요에 따른 고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지 그를 빌미로 정당하게 주어야 할 임금과 대우마저 열악하게 줄이라는 것이 아니다.


벌써 몇 년 째 현장에서 실제 근무하고 있고 태도나 실적에서 큰 문제가 없다면, 그리고 한시적이 아닌 항구적으로 필요한 인력이라면 원래는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으로 고용되었어야 하는 경우라는 것이다.  그만큼 실제 일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이력서도 받고 시험도 치고 면접도 보고 하는 것일 텐데 실제 일을 시켜보고 잘한다 싶으면 이미 자격은 넘친다 말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역차별인가? 그래서 그동안 비정규직으로 단지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열악한 대우와 인간적인 모멸감, 부족한 임금에 격무까지 강요당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격이 부족할까?


괜히 한국의 노동운동이 그나마 예전수준의 대중적 지지마저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노동자인데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비정규직을 외면한다. 비정규직이 당하는 열악하고 불리한 처우를 단지 정규직이 누리는 더 높은 임금과 복지의 수단으로서 이용한다. 실제 사업장에서 보면 비정규직을 더 서럽게 만드는 것이 같이 일하는 정규직들인 경우가 많다. 정규직에게 역차별이 되니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헬조선이 괜히 헬조선이 아니다. 자신들이 벌써 헬조선의 훌륭한 당사자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


노동의 적이 노동자 자신인 이유다. 알량한 권력조차 놓지 못하면서 사용자에게는 더 큰 것을 내놓으라 윽박지른다. 그래서 정규직 노조들은 얼마나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가지고 의지를 내보이는가. 결국 그쪽에서 나오는 소리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역차별이다. 재미있는 요지경세상이다.


사람이 다니기에 길이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길이 있기에 사람이 다니는 것일까? 사람이 다니기에 길이라 부른다. 그러나 길이 없어도 사람은 원래 그 길을 지났을까? 그래서 길이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을 타는데 눈앞에 가로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등성이가 보인다. 길은 오른쪽으로 꽤 멀리 돌아가는 듯 보이니 가로지를 수만 있다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비유 자체가 잘못되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거나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면 괜한 수고를 감수해가며 길이 아닌 등성이를 타고 넘을 사람은 그리 없기 때문이다. 


길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앞서 이 길을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것도 여럿이 반복해서 지나갔으니 눈앞에 또렷이 길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굳이 따로 목적지가 없어도 길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마음놓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길이 없는 산등성이를 넘는 것과 길을 따라 산을 걷는 것과의 차이다. 어차피 길같은 것 없어도 능력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산을 오르고 넘을 수 있을 테니 길같은 건 필요없다. 먼저 자기 능력으로 산을 오르고 넘도록 한 다음에 그 뒤를 따라 오를 수 있도록 하자. 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누군가 그 길을 따라 오르는 것을 보고 산을 오를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들은 자기 일에 대해 남자보다 소극적이다. 직장에 대해서도 덜 헌신적이다. 그저 좋은 혼처 찾아서 팔자 고칠 궁리만을 한다. 그런에 어떻게 여자들을 믿고 고용해서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자라면서 듣는 말이 시집 잘가라는 말이고, 직장에서도 항상 듣는 말이 언제 그만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혼이라도 하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결혼해서도 계속 직장에 다니다가도 애라도 낳으면 역시 그만두어야 한다. 아니더라도 알게모르게 눈치가 보인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 길러야 하고, 그런데 남성위주의 직장에서는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그런 모습들을 일상으로 보고 들으며 살아왔는데 새삼 일로써 성취를 얻는 자신을 꿈꿀 기회나 있었을까. 어차피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직장에 헌신해도 때되면 어쩔 수 없이 강요에 의해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길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여자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자신을 그 틀에 맞춰가게 된다. 거스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다. 과연 보상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고 자칫 혼자서 고난을 자초하게 될 수도 있다. 투사니 열사니 의사니 하는 것은 남다른 용기를 지닌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당장의 앞가림을 하기도 버거운 처지다. 그런데도 알아서 여기까지 기어올라오라. 그러면서 남자들은 자기들이 이미 앞서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을 보며 꿈꾸었던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그들이 할 수 있었으니 자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해냈으니 자신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왜 안되는가.


많은 선진국에서 공직에 여성을 의무적으로 임명해야 하는 이른바 할당제를 강제로 채택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사실 최상위로 가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실제 능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당장 정치권만 보더라도 국회의원 가운데 여성국회의원들의 실력이 남성국회의원들에 비해 결정적으로 떨어진다는 유의미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남성과 대등해질 수 있는, 여성 스스로 남성과 경쟁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롤모델이 되어 줄 수 있다. 여성도 열심히만 하면 저들처럼 남성들과 경쟁하여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의미있는 위치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비록 아직 그 가능성은 좁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열린 천정을 지나 자신을 실현하고픈 욕망을 애써 억누를 필요 없는 여성들이 나타나게 된다. 동기이자 계기다. 남성들이 그렇듯 여성들 역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약속된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그만큼 더 필사적이 될 것이다.


당장 여성들에게 허락된, 그리고 여성들에게 유리한 직종에서는 여성들 역시 남성들 못지 않게 적극적이다. 그리고 헌신적이다. 쉽게 포기하지도 않고 자신의 책임을 내던지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보장되는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미래의 자신에 대해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에게도 많은 것들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많은 보이지 않는 억압들이 여성들을 옭아매고 있다. 굳이 남성들이 당장의 여성할당제에 긴장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여성들이 장관이 되고 내각의 절반을 차지해도 대다수의 일반 남성들이 여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깊은 굴레를 이기기 위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랄 수 있어야 한다. 관습과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결국 가장 앞서 위험을 무릎쓰고 길없는 길을 헤치며 나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두 사람 그 뒤를 따라걷다 보니 어느새 유형화된 길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미 있는 길을 따라걷는다는 것은 매우 쉽고 안전한 일이다. 두려움이나 대단한 각오 없이도 그저 결심만 하면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그럴 수 있게 누군가는 먼저 앞장서서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쉽고 가장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정부일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길을 만든다.


역시나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취업에 목을 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량한 것이나마 나누기에는 당장 자신이 절박하다. 그것은 남의 사정이다. 네 사정이다. 내 일이 아니다. 논란이 뜨겁다. 당연한 인간의 이기다. 더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양보와 배려는 선택이지 강요가 아니다. 그 부분도 어떻게 다독이느냐가 이후 정부의 과제일 수 있다. 사회의 분열과 대결을 중재하고 바로잡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처음은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몇 사람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길이 생기고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 길 위를 지나간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또 인간인 탓이다. 시작은 계기이고 동기다. 어쩌면.



같은 진보라고, 언론인이라고 그렇게 편들어주는 것 아니다. 누가 문재인 욕했다 그러는가. 당장 보더라도 문재인을 문죄인이라 부르든 문걸레라 부르든 나는 아무상관 않는다. 노무현을 지지하던 시절에도 노무현을 개구리라 비유한 것에 화내는 지지자들을 오히려 달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 나였다. 사람이 싫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싫은데 싫어하지 말란다고 그게 되는가?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내가 아니면 아닌 것이고.


노무현 정부 내내 한겨레가 가혹할 정도로 노무현을 비판했어도 언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생각했었다. 경향신문이 욕을 먹을 때는 아예 노빠놈들과 맞짱뜨기도 했었다. 그러면 언론이 항상 정부에 좋은 기사만 내줄까? 그렇다고 아주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비판할만한 이유가 있었고 논리 역시 타당했기에 인정했다. 같은 편이라고 편들어주는 거 내가 더 싫어한다.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한겨레와 경향을 의심하기 시작했을까? 말했지 않은가. 지난 민주당 분당사태부터라고.


노무현이 검찰조사를 받던 무렵 한겨레와 경향이 비판기사를 낸 것이야 노빠들과 달리 나는 이해한다. 검찰이 나서서 그같은 혐의내용을 밝혔으니 언론 입장에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 자기가 발로 뛰어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은 아쉽더라도 나름대로 이해할만한 부분이 있다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 분당사태는 아니었다. 분명 명분은 문재인에게 있었다. 정당민주주의의 원칙을 따진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뽑힌 당대표를 흔들고 당의 혁신을 훼방놓으려는 탈당파를 비판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까 알리바이를 잘 만들어놓으라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특히 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의심받기 싫으면 먼저 의심을 피할 수 있게 알리바이를 만들어두어야 한다. 문재인이 싫더라도 명분이 그리 흐르면 반대편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명백한 사안에서조차 문재인은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반대편에 대해서는 최소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준다. 그러고 나서 총선이었다. 그리고 이제 대선이다. 문재인에 대해 너무 엄격하게 사람들이 비난한다 생각한다면 어째서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그런 엄격함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일까? 최초 이재명이었고, 그 다음이 안희정이었고, 이제는 안철수다. 안철수는 아주 뿌리가 깊다. 보수언론에서조차 비판하는 문제들에 대해 철저히 피해가는 사려깊음을 보여준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안철수가 언론의 비호를 믿고 헛짓하도록 방조한 것이었는가.


최근에야 하도 사람들이 뭐라 하니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몇 가지 의혹들을 검증하는 수준이다. 문재인을 향했던 치사할 정도의 집요함과 악랄할 정도의 치열함은 거의 보여주지 못하는 셈이다. 심지어 안철수와 국민의당의 네거티브를 거의 퍼나르다시피 보도하다가 안철수가 네거티브로 곤란해진다 싶으니 네거티브는 그만두라 훈계질까지 한다. 그나마 그 대부분은 민주당이 아니라 선관위와 다른 언론에서 보도한 사실들이었다. 안철수에 대한 모든 공격은 그저 가치없는 네거티브다. 프레임까지 아주 훌륭히 만들어두었다. 그런데도 그것이 후보자에 대한 엄격한 검증이라고?


세상에서 제일 처치곤란한 것들이 멍청한데 자기확신만 강한 놈들이다. 자신의 악의조차 선의라 확고하게 믿고 사는 종자들이다. 혹시라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모두 부당한 공격이다. 자신들은 희생자고 순교자다. 더불어 선지자이기도 하다. 그런 박해야 말로 자신들의 순결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럴 거면 조선일보처럼 알리바이라도 미리 잘 만들어두던가. 멍청한 것들이 주제도 안되는 주제에 못된 것만 따라배우고 있다. 잘하기나 하면. 그마저도 못하니 사람들이 더 화내는 것이다.


중립을 지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공정할 수 없으면 차라리 솔직하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이러해서 안철수를 지지한다. 우리들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솔직하다 인정할 수라도 있다. 그런 입장이구나 이해하고 그 다음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그랬더라면 굳이 절독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짓말도 티나게 한다는 게 바로 문제인 것이다.


한 마디로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진보의 조선일보라지만 조선일보라면 이런 식으로 멍청하게 굴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여전히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이 실제 조선일보의 악랄함이겠지만. 되도 않는 짓거리를 따라하다 보면 자기만 망친다. 마시지 못하는 술 따라마시다 골로 가는 수 있다. 뭐 별로 이제는 더이상 나아질 기대같은 건 없다. 한겨레만이 참언론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웃고 만다.

사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다. 처음 한겨레신문이 창간될 당시 나는 아직 아이였으니까. 대충 뉴스를 통해 듣기는 했지만 한정되었고 따라서 무엇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건너건너로 전해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아, 정말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바라고 돕고 있었구나.


한겨레는 그런 의미였다. 독재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타락해 있던 기존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진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진짜배기 언론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한겨레는 조선일보와 다르다. 동아일보나 중앙일보와 같은 보수적인 기성언론들과 다르다. 한겨레가 보도하는 것만이 그들이 외면하는 우리들의 진짜 이야기이고 진실일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가 어렵다고 하면 독자주제에 직접 발벗고 나서 도와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창간할 때도 그런 다수의 바람을 담아 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스스로 주주가 되어 창간을 도왔던 것이었다. 특정한 개인이나 법인, 집단이 아닌 창간에 참여한 국민 모두가 한겨레를 일으킨 주체였고 주인이었다. 그런데 그 한겨레가 한겨레라는 이름을 자신들의 일방적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


정확히 배임이다. 원래 한겨레가 창간할 당시 많은 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며 바랐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한겨레가 대단한 권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었고, 언론으로써 대단히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언론의 양심과 진실이었다. 다른 신문들에 비해 절반도 안되는 빈약한 지면이라도 그런 진짜 기자가 쓴 진짜 기사를 보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그래서 없는 돈까지 쪼개어, 심지어 문재인은 그를 위해 전세를 살면서도 무려 2억이나 되는 빚까지 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런 한겨레가 사실을 외면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특정한 후보를 위해 부역하며 나서고 있다. 자신의 신념과 그동안의 주장까지 외면한 채 특정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기사를 쓰고 있다. 용서해야 하는가?


경향신문이야 뭐 사주가 그런 입장이라 하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한다. 주주와 경영진이 그것이 옳다고 판단했다면 그 선택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나 동아일보다, 사실 세계유수의 언론들도 결국 사주와 경영진의 판단이 보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시사인과도 다른 이유다. 절대 그래서는 안되는 누군가가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어떻게해야만 할 것인가.


어쩌면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많은 다수의 국민들이 주주로 참여하며 구심점이 없다시피 했다. 결국 한겨레 자신의 양심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한겨레 내부의 민주주의에 의한 판단이 바로 지금 보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것이 지금 한겨레의 정체성이다. 그러면 주인으로써 국민들은 그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한겨레만은 용서해서는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원래 국민의 것이었다. 다수 국민의 진짜 사실과 진실을 전할 참언론을 기대하는 바람을 등에 업고 시작된 국민의 언론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한겨레는 그들만의 것이 되었다. 과연 한겨레를 비판하는 독자들에 대한 기자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차라리 아이라면 끝까지 보듬고 지켜야겠지만 언론이니까. 언론의 존엄은 오로지 진실에 있다.


이미 나는 버렸다. 내게 있어 한겨레란 조선과 중앙, 동아, 문화일보와 같은 그저 흔한 언론권력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 한 줌도 되지 않는 주제에 단지 기성언론과 대항하는 대안적 존재로써 주어진 의미를 진짜 자신의 가치라 착각하고 있다. 결국 냉정하게 현실만으로 비교했을 때 언론으로서 한겨레의 위치는 어떠한가. 자기가 자기를 모르면 답이 없는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당장 사드배치에 대한 한겨레의 입장을 보자. 안철수가 사드배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을 때 한겨레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여전히 기사로는 사드배치에 반대하면서 정작 대선후보인 안철수의 입장변경에 대해서는 한 마디 비판조차 없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차떼기는 어떨까? 국민의당이 스스로 인정했다. 렌트카까지 동원해서 조직적으로 선거인단을 모으고 실어날랐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에 대해 한겨레가 한 마디 비판이라도 하던가? 심지어 많은 국민들이 비판하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자유한국당 세 정당의 개헌합의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선택이었다. 옹호하고 있었다. 그러면 한겨레는 안철수를 적이라 여겨서 이토록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것일까?


당장 비문 3당의 개헌합의를 옹호하며 한 말에 답이 있다 할 것이다. 차라리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도왔건 자유한국당보다 문재인이야 말로 반드시 막아야 할 악이고 적폐였다. 문재인의 집권을 막는 것이 곧 정의다. 자기 편이라서 엄격한 것이 아니다. 적이라서 엄격했던 것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게 문재인을 비판하는 것은 그가 더 큰 악이고 더 증오스런 적이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호도해서는 안된다. 오랜 동지였다고 앞으로도 동지인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도 이미 문재인과 한겨레는 적이다. 먼저 한겨레가 적으로 선포했다. 그런데도 선의로 인정으로. 차라리 조선일보에 무릎꿇고 사정하는 것이 더 낫겠다. 적은 단지 적일 뿐이다. 그 이상은 없다. 항상.

솔직하네. 확실히 나만 하더라도 어지간히 싫은 상대가 아니면 차라리 욕을 하지 저런 식으로 이름 가지고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짓은 않는다. 최소한 서로 주먹다짐하는 동안에는 대등해질 수 있다 여기기 때문이다. 아예 주먹조차 맞대지 않고 그저 비웃고 놀리며 폄하하는 것으로 상대를 모욕하고 만다. 서로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와 존엄마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 최소한의 존중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


다행히 나는 정치인에게 나 자신을 이입하는 못된 취미같은 것은 없다. 문재인을 문죄인이라 부르든 문걸레라 부르든. 하지만 한겨레 기자 스스로가 인정했으니 문재인을 문죄인이라 부르게 하는 대신 나는 한걸레라 불러야겠다. 최소한의 기자가 갖추어야 기본마저 되어 있지 않다. 저런 놈들이 기자랍시고 한겨레의 이름을 걸고 기사를 낸다. 바로 그것이 한겨레의 정체성이다. 더구나 한겨레를 읽으면 한겨레와 수준이 같아진다 했으니 주위를 돌아다니며 한겨레 읽는 사람들은 모두 뜯어말려야지. 이 트위터 하나면 설득은 쉬울 듯.


확신에 가까운 의심이었지만 그나마도 의심의 여지없는 확신이 되고 말았다. 기자라는 놈이 자기 기사에 대한 비판에 발끈해서 저리 노골적으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다니. 고작 그런 정도로 발끈할 것이었으면 조선일보는 온통 테러리스트들만 있겠다. 어차피 한겨레는 조선일보 이하니까. 더이상 언론이라 부르기도 싫어진다. 한겨레를 신뢰하며 읽었던 모든 기억을 지운다. 미안, 한걸레였지? 걸레로도 도저히 못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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