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다니기에 길이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길이 있기에 사람이 다니는 것일까? 사람이 다니기에 길이라 부른다. 그러나 길이 없어도 사람은 원래 그 길을 지났을까? 그래서 길이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을 타는데 눈앞에 가로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등성이가 보인다. 길은 오른쪽으로 꽤 멀리 돌아가는 듯 보이니 가로지를 수만 있다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긴 비유 자체가 잘못되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하거나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면 괜한 수고를 감수해가며 길이 아닌 등성이를 타고 넘을 사람은 그리 없기 때문이다.
길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앞서 이 길을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것도 여럿이 반복해서 지나갔으니 눈앞에 또렷이 길의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굳이 따로 목적지가 없어도 길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마음놓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길이 없는 산등성이를 넘는 것과 길을 따라 산을 걷는 것과의 차이다. 어차피 길같은 것 없어도 능력만 충분하면 얼마든지 산을 오르고 넘을 수 있을 테니 길같은 건 필요없다. 먼저 자기 능력으로 산을 오르고 넘도록 한 다음에 그 뒤를 따라 오를 수 있도록 하자. 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누군가 그 길을 따라 오르는 것을 보고 산을 오를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여자들은 자기 일에 대해 남자보다 소극적이다. 직장에 대해서도 덜 헌신적이다. 그저 좋은 혼처 찾아서 팔자 고칠 궁리만을 한다. 그런에 어떻게 여자들을 믿고 고용해서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자라면서 듣는 말이 시집 잘가라는 말이고, 직장에서도 항상 듣는 말이 언제 그만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혼이라도 하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결혼해서도 계속 직장에 다니다가도 애라도 낳으면 역시 그만두어야 한다. 아니더라도 알게모르게 눈치가 보인다.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낳아 길러야 하고, 그런데 남성위주의 직장에서는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그런 모습들을 일상으로 보고 들으며 살아왔는데 새삼 일로써 성취를 얻는 자신을 꿈꿀 기회나 있었을까. 어차피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직장에 헌신해도 때되면 어쩔 수 없이 강요에 의해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길이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여자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자연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자신을 그 틀에 맞춰가게 된다. 거스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다. 과연 보상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고 자칫 혼자서 고난을 자초하게 될 수도 있다. 투사니 열사니 의사니 하는 것은 남다른 용기를 지닌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당장의 앞가림을 하기도 버거운 처지다. 그런데도 알아서 여기까지 기어올라오라. 그러면서 남자들은 자기들이 이미 앞서 그 길을 지나간 사람들을 보며 꿈꾸었던 사실을 애써 부정한다. 그들이 할 수 있었으니 자신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해냈으니 자신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은 왜 안되는가.
많은 선진국에서 공직에 여성을 의무적으로 임명해야 하는 이른바 할당제를 강제로 채택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사실 최상위로 가면 남성이나 여성이나 실제 능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당장 정치권만 보더라도 국회의원 가운데 여성국회의원들의 실력이 남성국회의원들에 비해 결정적으로 떨어진다는 유의미한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남성과 대등해질 수 있는, 여성 스스로 남성과 경쟁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롤모델이 되어 줄 수 있다. 여성도 열심히만 하면 저들처럼 남성들과 경쟁하여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의미있는 위치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비록 아직 그 가능성은 좁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열린 천정을 지나 자신을 실현하고픈 욕망을 애써 억누를 필요 없는 여성들이 나타나게 된다. 동기이자 계기다. 남성들이 그렇듯 여성들 역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약속된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그만큼 더 필사적이 될 것이다.
당장 여성들에게 허락된, 그리고 여성들에게 유리한 직종에서는 여성들 역시 남성들 못지 않게 적극적이다. 그리고 헌신적이다. 쉽게 포기하지도 않고 자신의 책임을 내던지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보장되는 미래를 믿기 때문이다. 미래의 자신에 대해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여성들에게도 많은 것들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직 많은 보이지 않는 억압들이 여성들을 옭아매고 있다. 굳이 남성들이 당장의 여성할당제에 긴장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여성들이 장관이 되고 내각의 절반을 차지해도 대다수의 일반 남성들이 여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깊은 굴레를 이기기 위한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랄 수 있어야 한다. 관습과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결국 가장 앞서 위험을 무릎쓰고 길없는 길을 헤치며 나갔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 두 사람 그 뒤를 따라걷다 보니 어느새 유형화된 길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미 있는 길을 따라걷는다는 것은 매우 쉽고 안전한 일이다. 두려움이나 대단한 각오 없이도 그저 결심만 하면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다. 그럴 수 있게 누군가는 먼저 앞장서서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쉽고 가장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래서 정부일 것이다. 정부가 앞장서서 길을 만든다.
역시나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취업에 목을 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알량한 것이나마 나누기에는 당장 자신이 절박하다. 그것은 남의 사정이다. 네 사정이다. 내 일이 아니다. 논란이 뜨겁다. 당연한 인간의 이기다. 더 나갈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양보와 배려는 선택이지 강요가 아니다. 그 부분도 어떻게 다독이느냐가 이후 정부의 과제일 수 있다. 사회의 분열과 대결을 중재하고 바로잡는 것도 정부의 역할이다.
처음은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몇 사람이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길이 생기고 사람들은 당연하게 그 길 위를 지나간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또 인간인 탓이다. 시작은 계기이고 동기다. 어쩌면.